[이상규의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
남한 정치 상황과 정부 수립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 기도로 제헌국회 개원
해방과 함께 북한에는 소련군이 진주한 후 김일성을 앞세워 공산정권을 수립했다. 공산당은 기독교를 탄압하여 교회가 폐쇄되고 김화식 김인준 이정심 목사(이상 1947년), 김철훈 목사(1948년), 이유택 목사(1949년) 등 교회 지도자들이 순교자의 길을 갔다.
1947년 말까지 80만명에 이르는 북한 주민이 모든 것을 버리고 월남의 길을 선택한 것은 공산정권의 학정을 체험했기 때문이었다. 남한에서 미군은 북한에서의 소련군보다 한 달 늦은 9월 7일 제24군단 소속 제7보병사단이 인천으로 상륙하였다. 이튿날 서울에 입성한 이후 점차 남한 일대에 주둔하였다.
한국에 주둔한 미군 사령관은 하지(John Reed Hodge, 1893∼1963) 중장이었다. 이렇게 됨으로써 미·소 양군은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분할 점령한 것이다. 이 원치 않았던 38도선은 장차 한국민족의 분열과 비극을 초래하는 요인이 되었다.
남한에 주둔한 미군 사령관 하지와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사이의 항복 조인이(9월 9일) 이루어짐으로써 일본의 조선 지배는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이제는 미군이 군정청을 설치하고 남한의 모든 행정을 담당하였다. 남한에는 북한과 달리 정치적 자유가 주어졌으므로 여러 정당이 창당되는 등 정국이 혼란했다. 송진우 김성수 장덕수 중심의 한국민주당, 안재홍 중심의 국민당, 여운형 등의 조선인민당, 박헌영 등의 조선공산당 등 50여개 정당이 난립했다. 이승만(1875∼1965)은 10월 16일 미국에서 귀국하여 10월 23일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결성하였다.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1945년 11월 귀국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지닌 김구와 한국독립당도 해방정국의 주요한 정치세력이었다. 표출하는 정파 간 이견과 대립으로 해방정국은 혼란했다. 국토의 분단, 경제구조의 파탄으로 경제적으로도 무질서했다. 북한에서 넘어온 월남 인구와 해방을 맞아 중국이나 일본에서 귀국한 인구가 200만이 넘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三相會議)의 신탁통치 결정은 혼란을 가중시켰다.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에서 모인 미국 영국 소련 외상들은 한국문제 해결책으로 미·영·중·소 4개국에 의한 신탁통치를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 안은 격렬한 반대에 직면했다. 전국적인 시위운동으로 발전하여 파업이 일기도 했다. 북한 공산당도 처음에는 반탁운동에 가담했으나 돌연 찬탁으로 돌아섰다. 1946년 1월에는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 사항을 실천하기 위한 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담이, 3월 20일에는 정식 위원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소련은 장차 세워질 임시정부를 위한 협의 대상에서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정당이나 사회단체는 제외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것은 공산주의자들만으로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민족주의자들을 제거하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미국 측은 반탁운동은 의사표현의 자유라는 점에서 반탁운동자라 하더라도 협의 대상에서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런 미·소 간 대립으로 미소공동위원회는 결렬되었다(1946년 5월 9일). 1947년 5월 21일에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으나 소련은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정당과 사회단체를 협의 대상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종래의 입장을 되풀이하여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도 지리멸렬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한국 문제를 미·영·중·소 4개국 외상회의에 회부하자고 제안했다. 소련이 이를 거부하자 미국은 한국독립 문제를 1947년 9월 유엔에 제출하였다. 미국은 유엔의 감시 하에 총선거를 실시하고 그 결과 정부가 수립되면 미소 양군은 철수하며 이런 모든 절차를 감시하며 협의하기 위해 유엔한국위원회의 설치를 제안했다. 이 안은 소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수정을 거쳐 절대다수의 지지로 유엔에서 통과되었다. 이 결의에 따라 유엔한국위원회는 1948년 1월 활동을 개시했다. 그러나 소련은 유엔의 활동을 거부하여 유엔한국위원단은 입북(入北) 할 수 없었고, 북한에서의 활동은 좌절되었다. 이렇게 되자 1948년 2월 26일 모인 유엔소총회에서는 유엔한국위원단장 인도대표 메논(V K Menon, 1897∼1974)이 제시한 ‘가능한 지역에서 만이라도 선거에 의한 독립정부 수립’을 결의하였다. 그래서 남한에서 만의 독립정부를 수립하기에 이른 것이다.
총선거는 1948년 5월 10일 월요일에 실시되었다. 처음에는 5월 9일 주일에 실시하려 했으나 기독교회의 반대로 하루 미루게 된 것이다. 선거를 통해 198명의 의원을 선출하였고, 5월 31일 오전 10시 국회를 개원하게 되었다.
임시의장으로 선출된 이승만 박사는 등단하여 이렇게 말했다.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사상이 무엇이든지 누구나 오늘을 당해 (중략)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라고 자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어서 감리교 목사인 이윤영 의원에게 기도를 부탁했다. 대한민국 국회는 ‘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여’로 시작되는 기도로 개원되었다. 이 점은 국회속기록 제1호 1쪽에 기록되어 있다.
제헌국회는 즉시 헌법 제정에 착수했다. 헌법은 7월 12일 국회를 통과하고 7월 17일 공포되었다. 헌법 절차에 따라 7월 2일 대통령선거가 실시돼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 박사가 선출되었다. 8월 15일 정부수립이 선포됨으로써 대한민국이 성립된 것이다. 그해 12월 대한민국은 유엔총회의 승인을 얻어 한국을 대표하는 유일한 합법적인 정부가 되었다. 이것이 해방 후 한국교회가 헤쳐가야 할 환경이었다. 이런 사회·정치적 삶의 자리에서 한국교회는 어떻게 반응하며 교회 재건과 쇄신을 이루어 갔을까?
남한에서 교회재건
日기독교에 편입됐던 교파 복원운동 활발
해방 후 북한에서 교회재건운동이 전개되었듯 서울에서도 교회재건운동이 일어났다. 서울에서의 교회재건은 앞에서 언급했던 북한이나 후에 언급할 경남 일원에서의 재건운동 성격과는 다른 것이었다. 북한에서의 경우, 교회재건은 ‘교회쇄신운동’의 성격이 있었으나 서울에서의 경우는 교회조직, 곧 치리회의 정비와 재조직이었다.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해방이 되자 서울에서는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을 그대로 존속시키려는 움직임까지 있었다.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이란 일제의 압력에 의해 통합돼 일본기독교에 편입됐던 교회 조직이었다. 성결교 안식교 동아기독교 등이 강제 해산된 가운데 장로교는 ‘일본 기독교조선장로교단’으로(1943.5), 감리교는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으로(1943.8) 예속돼 있었다.
그러나 45년 7월19일에는 장로교 감리교 구세군 등의 교파를 망라하여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통폐합돼 일본기독교에 완전히 예속됐다. 중앙 조직은 장로교와 감리교에서 통리와 부통리를 맡았다. 통리는 김관식(金觀植·1888-1948) 목사, 부통리는 김응태(金應泰·1890-1971) 목사였다. 지방에는 교구장을 두었고, 조선 8도 외에 중국에도 지부를 두었다. 이들이 업무를 시작했을 때는 8월1일이었다. 해방되기 꼭 15일 전이었다.
해방이 되자 ‘일본기독교 조선교단’ 인사들은 이 조직을 유지하기위해 45년 9월8일 새문안교회에서 남부대회란 이름으로 교단대회를 소집했다. 이 대회에 참석한 중심인물이 장로교의 김관식 김영주 송창근 목사, 감리교의 변홍규 박연서 이규갑 목사 등이었다. 감리교 대표들이 조선교단의 존속을 반대하고 자파환원을 원해 모임은 논란에 휩싸였다.
통리 김관식은 그해 10월 18일과 19일 서울에서 총회를 소집하고 이전의 명칭인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을 ‘조선기독교회’로 변경, 존속을 시도했다. 그러나 공식적인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 모임에 참석한 41인은 ‘남한기독교대회’를 준비해 한달여 후인 11월27일과 28일 서울에서 다시 모였다. 참석자는 200여 명에 달했다. 김관식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하는 등 남한 교회를 대표하는 기관으로 재기하고자 시도했으나 46년 4월30일 회의를 끝으로 사실상 해산되고 말았다. 이 모임에서 각 교파로의 환원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의 해체는 남한에서의 각 교파 복원운동으로 발전했다. 45년 9월 말까지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침례교, 안식교 등 각 교파의 복원작업이 진행됐다. 장로교의 경우 46년말까지 지방별로 노회가 재건됐다. 그해 6월에는 ‘남부총회’가 소집됐다. 6월 11일부터 13일까지 3일간 11개 노회 54명의 총대가 참석한 가운데 서울 승동교회에서 ‘대한 예수교 장로회 남부총회’가 조직된 것이다. 남한지역에서만이라도 총회를 구성하여 한국장로교회를 재건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이때 재야 교역자였던 배은희(裵恩希· 1888-1966) 목사가 회장으로, 함태영(咸台永·1873-1964) 목사가 부회장으로 선임됐다. 김양선은 이에 대해 “일견 교회의 주도권이 이전의 일본기독교조선교단 지도자들의 손에서 떠난 것 같이 보였으나 교회의 주도권에는 실제적 변화가 없었다”고 지적했다. 이 총회에서 가결된 중요한 두 가지 결의가 있었다. 장로교 제27회 총회가 범과(犯過)한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한다는 것과 1940년에 설립된 조선신학교를 남부총회 직영신학교로 가결한 것 이었다. 조선신학교에 대한 결의는 후일 논란의 불씨가 되었다. 신사참배 결의에 대한 취소는 그 후 제34회 총회(1948)와 제38회 총회(1952)에서 반복됐다.
47년 4월18일 대구 서문교회에서 열린 제2회 남부총회에서는 남북통일의 조속한 실현이 불가능하다고 보아 ‘남부총회’를 ‘총회’로 개칭키로 했다. 그래서 42년 10월16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제31회 총회를 끝으로 일제의 강압으로 해체되었던 이전의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를 계승, 제1회 남부총회(1946)를 32회 총회로, 제2회 남부총회를 제33회 총회로 개칭하기로 결의했다. 이상에서 살핀 것처럼 해방 후 서울에서 전개된 교회 재건을 위한 시도는 일제 강점 하에서 해산되거나 통폐합됐던 기구의 재건에 지나지 않았고 영적 갱신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해방 후 교회의 재건과 더불어 교회 부속 기관들의 재건도 이루어졌다. 신사참배 반대로 폐쇄됐던 학교와 병원들이 재건되거나 신설됐다. 서울의 연희대학은 전쟁기에 경제전문학교로 개편되었으나 해방과 더불어 이전 이름으로 재건되었다. 46년 1월에는 백낙준 박사가 연희전문학교 학장에 취임했다. 세브란스의과대학도 전쟁 중 아시아 의학전문학교로 전락되었다가 해방 후 복구됐다. 후일 연희전문학교와 병합되어 연세대학교로 발전하였다.
이화여자전문학교는 45년 4월부터 경성여자전문학교로 불리다가 해방 후 이화여자전문학교로 복구되었고 46년 8월15일 문교부 승인 제1호로 종합대학교 인가를 받았다. 또 이북에 있던 학교들이 남한에서 복교하는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숭실대학이었다. 숭실전문학교는 38년 폐교됐으나 16년 만인 54년 서울영락교회당에서 재건되었다. 감리교계 학교인 평양의 광성 중·고등학교가 서울에서, 개성의 호스돈여학교가 전주에서 각각 재건되었다. 그 외에도 여러 지역의 기독교 학교가 재건되거나 신설되었다.
남한에서 교회재건 ②
분열 위기 감리교, 평신도들 노력으로 통합
해방 후 감리교회에도 재건운동이 일어났다. 1945년 9월 8일 ‘일본기독교 조선교단’ 인사들이 이 조직의 존속을 시도하여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남부대회란 이름으로 교단대회를 소집했다. 이때 재야 교직자들이었던 감리교의 김광우 박연서 변홍규 이규갑 목사 등은 이 대회의 불법성을 지적하고 퇴장했다. 이들은 이날 서울 동대문교회에 모여 ‘감리교재건중앙위원회’를 조직, 이규갑(李奎甲·1887-1970) 목사를 위원장으로 추대했다. 이 목사는 상해임시정부, 신간회 등에 참여했던 독립운동가 출신 목사였다.
이들은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에 참여했던 인사들과는 달리 감리교회의 완전한 재건을 시도했다. 재건중앙위원회는 동·서·중의 3부 연회를 조직한 후 동부연회에는 변홍규 목사, 중부연회에는 이규갑 목사, 서부연회에는 이윤영 목사를 회장으로 추대했다.
또 46년 1월에는 감리교신학교를 재건하고 변홍규 목사를 교장으로 임명했다. 이들이 흔히 ‘재건파’로 불리는데, 이런 쇄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호응은 크지 않았다. 재건파가 주도하는 3부 연합연회에 가담한 교회는 70여개에 불과했다. 그 이유는 재건파 인사들이 일제말기 친일적인 교단에 의해 휴직되거나 파면돼 교회를 담임하지 못했고 교회 행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재건파를 반대한 이들은 ‘부흥측’이라고 불리는데 이들도 교회재건을 시도했다. 부흥측 인사들은 46년 4월 7일 강태희(姜泰熙) 목사를 중심으로 서울 수표교 감리교회에 모여 ‘기독교조선감리회 부흥신도대회’를 개최했다. 이들은 “감리교 부흥 및 수습대책에 있어 감리회의 전통 헌장과 신도의 여론을 존중하여 합리적이고 타당한 방도를 취하되 양심과 이론에 호소하여 실시되기를 희구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들은 재건파와는 별도로 47년 1월 ‘기독교조선감리회’를 조직하고 강태희 목사를 감독으로 선임했다. 반면 재건파는 48년 1월 23일 “조선감리회의 역사적 신성을 유지하고자 한다”는 취지에서 장석영(張錫英) 목사를 감독으로 선출했다. 교회재건과 관련하여 감리교도 양파로 분열된 것이다.
그러나 평신도들의 강력한 요구와 교계지도자들의 노력으로 양측은 대화와 타협을 통해 무조건 통합하기로 합의했다. 그 결과 49년 4월 30일 서울 정동감리교회에서 통합 연회와 통합총회를 구성하고 김유순(金裕淳) 목사를 감독으로 선임했다. 제9대 감독이었다. 김 감독은 한국전쟁 중 서울에서 공산군에 납치되어 순교한 것으로 보인다. 분열되었던 감리교의 통합을 민경배는 ‘해방의 감격에 버금가는 감동’이라고 했다.
일제에 의해 해산됐던 성결교회도 재건을 서둘렀다. 성결교의 경우 43년 5월 24일 남녀 교역자가 검거되고 9월에는 성결교회의 공예배가 강제로 중지됐다. 또 그해 12월 29일에는 전 교회가 해산되는 수난을 겪었으나 해방과 함께 다시 교회문을 열고 교단 조직을 정비하게 된다. 45년 11월 9일 서울에서 재건 총회를 개최하고 의장에 천세광(千世光), 총회장에 박현명(朴炫明) 목사를 추대했다. 서울신학교를 개교하고 이건(李健) 목사를 교장으로 선임했다. 폐간됐던 활천(活泉)지도 복간됐다. 49년 4월 18일에는 이전의 ‘조선예수교동양선교회 성결교회’라고 불리던 교단 명칭도 ‘기독교대한 성결교회’로 변경했다.
‘동아기독교’라고 불리던 침례교도 해방과 함께 교단 조직을 정비하고 재건하게 된다. 침례교도 일제에 의해 43년 해산된 바 있으나 해방 이후 노재천(盧在天) 박기양(朴箕陽) 백남조(白南祚) 신성균(申性均) 이종덕(李鍾德) 등에 의해 재건이 시도된다. 침례교 일각에서도 일제시대의 교단 조직의 존속을 거론한 바 있으나 46년 2월 충청남도 부여에서 교단재건회의를 개최하고 침례교로의 독자적인 조직을 재건하기로 결의했다. 그해 9월경에는 예천 공주 강경 등지의 교회가 재건됐다. 당시 침례교 대회인 ‘대화회’(大和會)가 경북 예천에서 개최됐다.
일제하 간도지역에서 활동했던 한기춘 목사가 이전부터 미국 침례교본부와 관련을 맺고 있던 우태호 목사와 함께 미국남침례교 본부와의 제휴안을 제시했다. 대화회에서는 이 안을 채택했다. 이때부터 침례교는 미국 남침례교의 후원과 협조를 얻게 되었고 연합사업을 전개하게 된다.
이때 모인 대화회에서는 몇 가지 제도의 혁신을 단행했다. 감독제(監牧)를 회중제(會衆制)로 전환하고 교직자에 대한 명칭도 다른 교파와 동일하게 수정키로 하여 ‘안사’를 ‘목사’로, ‘감로’를 ‘장로’로 개칭했다. 교회정치제도를 회중제로 전환함에 따라 교역자 문제도 종래의 파송제를 청빙제로 변경하였다. ‘대화회’도 ‘총회’로 변경되었다. 동아기독교라고 불리던 교회 명칭을 침례교로 변경한 것은 49년이었다.
구세군도 재건의 길을 갔다. 구세군은 1908년부터 영국과 호주 선교사들이 내한하여 활동했다. 그러다가 40년 일제에 의해 조선구세단(朝鮮救世團)으로 개칭됐다. 일본인이 단장으로 취임한 이래 대부분의 교회가 폐쇄된 상태에 있었다. 해방과 동시에 구세군 재건 운동이 시작돼 45년 11월 9일 서울에서 총회를 개최, ‘구세교회’라는 이름으로 재건하고 교회헌법을 제정했다. 46년 10월에는 영국 국제 본영(本營) 대표단이 방한함에 따라 교회명칭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교단 명칭을 ‘구세군’(救世軍)으로 환원했다. 사관학교는 47년 가을에 재건되는 등 해방과 함께 교회 혹은 교단이 재조직된 것이다.
경남지방에서 교회재건
쇄신-교권파 갈등 ‘노회 분열’ 파국으로…
교회재건운동은 부산경남지역 교회를 관할하던 경남노회에서도 일어났다. 경남은 남한에서의 신사참배 반대운동 중심지였다. 또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주기철 주남선 최상림 한상동 이인재 손명복 최덕지 등이 경남노회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 지방에서의 교회 재건운동은 단순한 기구의 재건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경남 지방에서는 일제때 해산된 노회의 재조직과 함께 신사참배의 죄에 대한 회개운동과, 또 영적 쇄신을 추구했으나 친일전력 인사들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다. 이 대립은 결국 경남노회의 분열(1949)을 초래했고 결국 한국장로교회의 분열로 이어졌다.
해방이 되자 부산 경남지방 교계 지도자들도 교회재건을 구상했다. 45년 9월 2일 부산진교회에서는 최재화 목사를 비롯하여 권남선 김길창 노진현 심문태 등 20여명이 ‘신앙부흥운동 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과거의 모든 불손한 요소를 청산하고 순복음적 입장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 경남노회를 재건 할 것”을 결의했다. 이들은 최재화 심문태 두 사람의 이름으로 선언서를 발표했다. 9월18일에는 이들을 중심으로 부산진교회당에서 경남노회 재건을 위한 노회를 개최했다. 43년 5월5일 일제에 의해 장로회 총회가 해산됨에 따라 경남노회도 그해 5월 25일 “경남노회는 발전적으로 해소(解消)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타의에 의해 해산됐다. 이번에 해산된 노회를 다시 조직하게 된 것이다. 노회장에는 심문태, 부회장 최재화, 서기 강성갑, 회개 구영기 목사가 각각 선임됐다.
이때 ‘자숙안’(自肅案)이 상정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목사, 전도사, 장로는 일제히 자숙하며 일단 교회를 사직할 것.
둘째, 자숙기간이 종료되면 교회는 교직자에 대한 시무투표를 시행해 그 진퇴를 결정할 것.
경남노회의 자숙안은 북한에서의 그것보다 더 엄격했다. 북한에서의 자숙안은 ‘2개월 간 휴직하고 통회 자복하는 것’이었으나 경남노회 안은 ‘일제히 자숙하고 일단 교회를 사임하는’ 것이었다. 이 안은 부산진교회의 최재화 목사를 중심으로 강주선 김상순 윤술용 목사 등에 의해 제안됐다.
이때는 주남선 한상동 목사 등 소위 출옥성도가 남하하기 이전이어서 자숙안은 출옥성도들에 의해 제안된 것이 아니었다. 자숙안이 출옥성도들의 교만과 독선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자숙안을 발표했으나 신사참배를 수용했던 친일 전력의 인사들은 이 안을 거부했다. 이들은 “신사참배는 우리가 양심적으로 이미 해결한 것인데 해방이 되었다 하여 죄로 운운함은 비양심적이다”라며 자숙안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노회 주도권을 장악해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했다. 이들이 교권주의자라고 불리게 된 이유다. 이때부터 교회쇄신론자들과 친일 전력의 교권주의자들은 대립하게 된다.
45년 12월3일 마산 문창교회에서 경남노회 제47회 정기노회가 개최됐다. 이때 제기된 자숙안에 대한 찬반 논란은 경남노회의 분열을 예견하는 것이었다. 노회원들은 재건노회 임원들의 총사퇴를 요구하고 출옥 인사인 주남선 목사를 노회장으로 추대했다. 주 목사는 출옥성도로 자처하지 않고 겸손하게 ‘은혜로운 화합’을 주장했다. 그는 우선 손양원 전도사를 강사로 부흥집회를 한 후 노회를 개회하자고 제했다. 그러나 김길창 배성권 등은 자기들의 각성을 의도한 집회라 하여 참여치 않았다.
집회가 끝난 후 주남선은 보다 완화된 자숙안을 제시했고 그의 제안에 따라 경남노회 교역자 수양회가 46년 1월11일 부산 영도의 태종대에서 개최됐다. 해방된 지 5개월이 지난 추운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150∼200여명이 모여 통회자복기도회를 개최하고 자숙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러나 김길창 목사와 그 지지자들은 참여하지 않았다. 도리어 이들은 노회주도권 장악을 시도, 46년 12월3일 진주 봉래동교회에서 모인 제48회 경남노회에서 김길창 목사를 노회장으로 선임했다. 이 때 그는 신사참배에 대하여 더 이상 거론하지 못하도록 의결했다.
교회쇄신 운동은 심각한 반대에 직면했다. 당시 한상동 목사는 ‘노회가 바로 설 때까지’라는 단서를 붙여 잠정적인 노회 탈퇴를 선언했다.
이때부터 평신도들의 거센 항거가 일어났다. 47년 1월3일 부산의 초량 부산진 영도교회, 마산의 문창교회, 거창의 거창읍교회, 남해의 남해읍교회 등 6개 교회는 공동으로 성명서를 발표하고 교회 쇄신운동을 지지했다. 부산노회 소속 67개 교회는 제48회 노회의 결의에 항거하고 한상동 목사를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부산의 초량교회에서는 신도대회를 개최하며 철저한 회개와 자숙 등 교회개혁을 요구했다.
사태가 이렇게 발전하자 47년 3월10일 구포교회에서 개최된 임시노회에서 김길창 노회장과 임원들은 총사퇴했다. 평신도들의 항거에 못이긴 잠정적인 후퇴였다.
그해 3월24일에는 마산 문창교회 등 68개 교회 평신도 대표 200여명이 모여 ‘경남노회의 부패성과 그 교권주의자들의 비양심적인 태도’를 규탄했다. 47년 12월9일 부산 광복교회에서 개최된 제49회 경남노회에서는 자숙안에 대해 불복한 목사들에게 사과서를 받도록 결의했다. 이처럼 경남노회에서 교회쇄신론자들은 수적 열세였으나 평신도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고 친일전력의 교권주의자들은 자기 보위(保衛)의 수단으로 교권을 장악하고자 했다. 이런 과정에서 교회쇄신운동은 효과적으로 수행되지 못했다.
(고신대·역사신학)/http://cafe.daum.net/stigma50
|
출처: 개혁주의 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이지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