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oward Manet, 1832 - 1883
에두아르
마네
1823년 1월 23일.
프랑스의 어느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마네는
비교적 순탄한 어린시절을 보냈습니다.
가업을 잇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기대와는 반대로
마네는 어려서부터 예술가의 기질을 보였다고 합니다.
(소묘와 캐리커처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어쩔수 없이 아들을 법조인으로 키우는 것을
포기했고.
마네 또한 아버지에게 배를 타겠다고 말했어요.
리우데자네이루까지의 6개월간의 여행.
그것은 마네의 일생에 있어서
오랫동안의 정신적 모티브로 남게 됩니다.
"브라질로의 여행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물결이 갈리는 거대한 바다의 물이랑을 보면서
빛과
어둠의 찬란한 놀이에 넋을 잃기를 몇 밤인가!
낮에는 갑판에 서서 수평선을 눈으로 잡은채
한동안을 놓지
않았다.
이렇게 나는 한 하늘의 생김새를 알아차린 것이다."
해양학교 시험에 연달아 낙방하고 난 뒤 부터.
본격적으로 쿠튀르의 화실에서 미술수업을 받게 됩니다.
마네는 거의 책을 읽지도 글을 쓰지도 았았다고 해요.
그러나 그는 뛰어난 관찰력을 지닌 소년이었고.
그의 눈은
놀랍도록 정확하고 날카로웠습니다.
1856년에 마네는 쿠튀르를 떠나
라부아지에 거리에 스튜디오를 마련했어요.
그는 살롱에 정식으로 입성하고 싶어 했고
여러차례 작품을 출품하기 시작합니다.
그림 1
: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 (1859)
살롱전에 첫 출품한 작품입니다.
이 그림은 보들레르의 '악의 꽃'(1857)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술로 인해 몰락해버린 사람을 소재로 그려서 사회윤리를 해쳤다.'
'치밀하지 못한 묘사와 불명확한
마무리' 등의 이유로 낙선 한 작품입니다.
(이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평생도록 수없는 낙선과 비판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지요.)
...
마네는 그 이후 그곳을 떠나 빅투아르 거리로 이사를
가고
야외로 나가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이 당시의 파리의
거리는 큰 변화의 시기였고
이 때 그의 눈에 비친.
파리와 파리 시민들의 현대적인 도시 생활의 모습.
이것은 앞으로 마네가 평생을 통하여 그리게 될 주제가
되었습니다.
그림2 : 튈르리 공원의 음악회 1862
마네를 비롯한 여러친구들이 보이는데요.
왼쪽 제일끝에서있는 사람이 바로
마네,
세번때 앉아있는 사람은 자샤리 아스트뤽,
네번째 앉아있는 여자 바로 뒤에 서있는사람이 보들레르입니다.
마네는 보들레르와 절친한 친구였고.,
보들레르의 작품<현대생활의 용기>에서 보여주는 발상에 이끌렸어요.
위 그림은 그 발상을 은유한 작품이었습니다.
'고상한 생활의 호화로운 광경과..
큰 도시의 미로를 따라 떠도는 수많은 덧없는
존재..
우리가 우리의 용기를 보기 위해서는 스스로 눈을 떠야만한다.'
그림 4 : 풀밭에서의 점심 1862
모델은 친동생 귀스타브, 처남인 페르디낭 렌호프,
그가 총애하는 모델 빅토린 뫼랑, 그리고 일시적으로 고용한 유대인 처녀 였습니다.
이 그림은 1863년 살롱전에서 낙선을
했으나
낙선한 화가들을 위한 낙선전에 다시 출품되어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킨
그림입니다.
두 남자가 입고 있는 말끔한 옷은 타인의 이목을 의식한
차림새.
이 차림은 벌거벗은 여인과 묘한 대조를 이루면서 세속적인 위선을
암시하고있습니다.
왼쪽구석아래에 개구리는 세속을 떠날수 없음을.
중앙윗쪽의 새
한마리는 세속을 떠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림이 잘 안보이시면 클릭하시면 더 크게 보실수 있습니다.)
그림의 인물들은 신화에 나오는 여신이나 영웅의 모습이 아니라.
현실의 살아있는 파리 시민의 모습이었습니다.
바로 이점이 당시로서는 커다란 충격이었고.
'옛 거장의 작품을 통속적인 그림으로 만들어 고전을 욕되게 했다'며
매서운 비판을 받았던 작품입니다.
마네는. 그런 여론에 잠시 좌절하기도
했지만.
그 조롱을 웃음으로 받아넘기고는
다시
새로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그림 5 : 올랭피아 1863
"캔버스가 찢기지 않은 것은 당시 살롱전 주최 관리자들 덕분이었다."
당시의 비판의 강도가 어느정도 였는지 알수 있는 대목입니다.
기본구도는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에 따온것이지만.
수줍고 여성스런
모습이 아니라.
당당함. 그리고 성적매력을 뿜어내는 매춘부를 그리고 있어요.
모델
빅토린이 유일하게 목에 두른 검은 리본.
그것은 손님에게 팔려가기를 기다리는 사치스런 물건임을 암시하고.
검은고양이 꼬리가
이루는 기묘한 물음표.
그것은 곧 부르주아에 대한 조롱이었어요.
그들의 분노에 마네는 씁쓰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어요
"나는 그 사람들을 알아. 그들은 줏대 없는 사람들이야.
나는
그럼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아. 그래도 진실된 전문가는 있을거야"
그는 쌀롱에 정식으로입성하여 그들과 정면으로 대항하고
싶었어요.
사람들은 그의 작품과 그를 야유하고, 그를 파렴치한처럼 보았지만
그는 결코 주눅드는법이 없었고
항상 거만하리라 만큼 자신에 넘쳐 있었다고
합니다.
마네는 수많은 정물화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이 것은 놀라운 마술이다.그는 색을 투텁게, 번갈아가며
칠했는데
이들은 함께 녹아 있는 듯 하다.가까이서 보면모든 형체는 평면이 되어
사리진다. 그러나 한걸음 물러서면 평면은 다시 꽃의
형태가 되어 나타난다."
그림 7 : 파리 교외의 경마장 1864
마네는 흥겨운 오락에 취해 있는
자기와 똑같은 계층인 파리장들의 모습에 주목했습니다.
"우리들이 있는 그대로를, 부츠와 실크해트가 있는,
우리들의
나날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다!"
그림8 : 키어사지와 앨라배마의 전투 1865
바다풍경을 다룬
대표적 해양화중의 하나입니다.
수평선 쪽에서 키어사지 호와 앨라배마 호가 전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시커멓게 넘실대는
파도가 전투의 끔찍함과 공포를 나타내는 듯 해요 .
그림 9 : 독서 1865-1873
모델은 마네의 부인인 쉬잔 렌호프입니다.
젊은 시절 그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던.
네덜란드출신의 낙천적인 여성이었다고 합니다.
쉬잔 뒤에 있는 남자는
그녀의 아들인 레옹입니다.
그림 10 : 피리부는 소년 1866
간결하고 정확한 필치가 잘 드러난 그림입니다..
당시
일본예술가들이 보여준 날카로운 윤곽선의 우키요에와
밝은 채색의 니시키에 목판화를 모방한 것입니다.
하지만 살롱전의 심사위원들은 "단조롭고 입체감이 없다"는
이유로
낙선을 시키게 되죠.
그림11 : 에밀졸라의 초상 - 1867-1868
마네의 그림이 일본과 스페인의 영향을 받았음을 나타내는 그림입니다.
에밀졸라는 우키요에의 광적인 수집가 였다고 해요.
그림 12 : 불로뉴항구에 비치는 달빛 1868-1869
호텔창문을 통해서 내려다본 고기잡이 배의 귀향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
마네는 역사화를 무척이나 경멸하긴 했지만
동시대적인 정치 이슈를 회피하지는
않았습니다.
1867년 만국박람회가 한창이던 때,
멕시코의 황제 막시밀리언이 처형당했다는 소식이 프랑스에
전해졌습니다.
당시 프랑스의 자유주의자들은 나폴레옹 3세의 팽창정책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프랑스는 1864년. 오스트리아의
막시말리안 대공을 꼭두각시로 내세워
신대륙울 지배하면서 그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해
국민에게 과중한 세금을 강요했으나
나폴레옹 3세가 지원을 중단하면서
막시밀라안은
죽음을 당해야 했죠.
이 사건은 프랑스의 자유주의자와 공화주의자 사이에서
커다란 정치적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마네는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이라는 주제로 4점의 연작을 남겼습니다.
그중 2점을 소개하겠습니다.
그림13 :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 1867-1868
총살하는 군인들이 케피(윗부분이 납작한 모자)를 쓰고
있습니다.
이것는 이 사건에 나폴레옹 3세가 관련되어있음을 나타냅니다.
**그림이 조각난 것은 마네가 죽은 후에
레옹
렌호프가 그림을 쉽게 팔아넘기기 위해서 잘라냈다가
드가가 이그림을 구입해 복원했다고
합니다.
그림 14 :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 1868-1869
그림에 서명된 날자
1867년 6월 19일은 실제의 처형이 있었던 날이었죠.
이 그림에서 막시밀리안은 정치적 순교자로 그려지고 있는데.
십자가에
못박혔던그리스도를 연상시킬정도예요.
막시밀리안은 후광으로 감싸져 있고
그에게 총격을 가하고 있는 총살대는 프랑스를 상징하는
케피를 쓰고 있습니다.
그림 15 : 발코니 1868-1869
1869년 살롱전에 출품되어 또 한번의 논란을 불러일으킨
작품입니다.
'전혀관계없는 것들의 조합이다.' '세 모델이 부자연스럽다.' 는 등의 야유가 쏟아졌어요.
부채를 들고 앉아있는 사람은 베르트 모리조(그림16참조),
오른쪽에 서있는 여자는 바이올리니스트 파니
클라우스(마네의 아내인 수잔의 친구),
멋진 신사는 화가 앙투안 기유메,
그리고 왼쪽 뒤로 희미하게 보이는 인물은 레옹 렌호프입니다.
이 작품은 고야의 정면구성법을 모방하여 그려진 것인데
고야의 그것과는 달리
인물들은 초연한 자세로 파리 특유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그림 16 : 제비꽃 다발을 든 베르트 모리소 1872
마네는 루벤스의 그림을 모사하던 모리소를
루브르박물관에서 처음만났고 이후 두 사람은 평생 친구로 지냈어요.
마네는 이 작품의 모델이 되어준 모리소에게
제비꽃 다발을 그린
작은 그림을 그려 감사를 표했습니다.
그림 17 : 철로에서 1872-1873
졸고 있는 강아지를 안고 있는 여인은 모델은 빅토린 뫼랑입니다.
풀밭에서의 점심과 올랭피아에서
보여줬던 당당하고 교만해 보이던 눈빛은
여기에서는 한결 은은하고 부드러워졌습니다.
그림18 : 배위에서 그림을 그리는 모네 1874
당시 마네는 클로드 모네에게 특별한 호감을 보였다고
합니다.
마네와 모네는 예술적 이상과 포부는 크게 다르긴했지만
항상 서로의 작품을 존중했습니다.
이 그림은 마네가 그린
모네의 초상화입니다.
...
한편 현대적으로 변모하는 파리는..
점점 부르주아를 위한 유흥장으로 변하고
있었어요...
"여염집 여인네들이 매춘부처럼 차려입은 건지,
매춘부들이
여염집 여인네 처럼 차려입은 건지
요즘엔 통
분감하기가 어렵다"
그림 19 : 나나 - 1877
마네는 매춘부를 주제로 다룸으로써 기존의 방식과 결별을
선언했습니다.
"잠옷을 겨우 걸친 그녀는. 아침부터 내내.
서랍장 위의 작은 거울 앞에 붙박인 듯이 서있다.
아직 아이같기도 하면서 성숙한 여인 같기도 한
자신의 벌거벗은 몸.
그 싱싱한 젊음을 감상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살롱전에 출품되긴했지만
'부도덕하다'는 이유로 곧바로
낙선되었습니다.
...
무수한 비난과 조롱속에서
세월은 흘러갔고
마네는 결국
살롱전에서 2등을 하여
그토록 바라던..
매년 살롱전에 참가 할수있게 기회를 얻게되지만..
그 영광은 너무 늦게 찾아온것었습니다..
2년 뒤 세상을 떠나기
때문이죠.
1882년에 병마에 시달리며 그린 최후의 대규모 유화가 바로 이 작품입니다.
그림 20 : 폴리베르제르의 술집 1882
여종업원은 알 수 없는 수심에 잠겨 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화려하고 즐겁습니다.
여급의 우울한
표정속에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마네의 슬픔이 담겨있는 듯합니다.
...
그의 나이 51세
운동실조증이라는 병으로 별세를
하게 됩니다.
마네가 세상을 떠난 이튿날,
전세계 모든 언론이
( 바로 전날 궤변을 늘어놓으며
조롱을 퍼붓던 사람까지)
한 위대한 화가의 죽음을 보도하며 깊은 애도를 표했다고 해요.
뒤늦게 인정받기 시작한 늦깎이
화가.
발표할때마다 언제나 커다란 비판을 받았던 작품들.
온갖 비난을 받아가며 예술가의 길을 걸었지만
그 비난의 원인이 "내 탓이 아니아" 하고 당당히
말하던 사람.
언젠가 모두의 눈이 뜨일 날이 있을꺼라고 굳게 믿었던 화가.
그가 진정한 승리자 에두와르 마네
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의 시대의 인간이어야 한다"는 마네의 말을
가슴속에 세기며 이 포스트를 마치겠습니다.
첫댓글 마네의 <풀밭위의 식사>에서 색은 대상의 사실적 표현보다는 명암의 극적대비를 위해 쓰여졌는데 이는 인상주의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모네의 <인상;해돋이sunrise>는 인상주의의 어원임과 동시에 절정이었습니다. 대상고유의 색과 형체를 부인한 인상주의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