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인 관념: 형이상학과 심리학에서
벩송: 원인관념(L’idée de cause), 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00-1901)
원인관념(1900-1901 강의록, 2019) 1강 2강
- 슈발리에(Jacques Chevalier, 1882-1962), 벩송강의 수강자. 그의 필기노트이다.
- 메이에르-비쉬(Gabriel Meyer-Bisch, s.d.) 편집, PUF, 2019, 부록 pp.184-192(P. 256).
* 벩송의 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 연도 및 주제.
1897(서른여덟)
11월 꼴레즈-드-프랑스(College de France)에서 와병 중인 샤를 레벡(Jean Charles Lévêque, 1818-1900)을 대신하여 강의를 하다. [이 때 플로티노스에 관한 강의를 했다.]
1900(마흔하나)
5월 17일 샤를 레벡(Jean Charles Lévêque, 1818-1900) 후임으로 꼴레즈-드-프랑스에서 그리스-라틴 철학을 담당하는 교수가 되다.
8월 3일 “국제 철학자 대회” 섹션: 철학일반과 형이상학, 이 분과는 9시에 열렸는데 벩송이 주제했다. 발표자들 중에 브링슈비끄, 르 르화가 있다.
8월 4일 파리에서 국제 철학자 대회(Congrès international de Philosophie)에서 「우리가 원인성의 법칙을 믿는 심리학적 기원들에 관한 노트(Note sur les origines psychologiques de notre croyance àla loi de causalite)」를 발표.
원인 관념(L’idée de cause), 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00-1901), 2019년 출판
1901(마흔둘)
시간 관념(L’idée de temps)(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록,1901-1902), 2019, 255 p
1902(마흔셋)
시간관념의 역사(Histoire de l’idée de temps)(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록, 1902-1903) (2016 출판)
1903(마흔넷)
기억이론의 역사(Histoire des théories de la mémoire)(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록, 1903-1904) 2018년 출간, P. 377.
1904(마흔다섯)
11월 19일 가브리엘 따르드(Gabriel Tarde, 1843-1904)의 후임으로 꼴레즈-드-프랑스의 근대 철학 담당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자유문제의 진화(L'évolution du problème de la liberté)(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록, 1904-1905), 2017년 출간.
* 이하의 강의들은 ‘강의록’이 아직 나오지 않았으나, 잡문집에는 소개되어 있다.
- 의지의 이론들(1906-1907)
- 일반 관념들(1907-1908)
- 정신의 본성과 사유의 두뇌활동과 연관(1908-1909)
- 인격성(1910-1911)
- 진화의 관념(1911-1912)
- 철학적 방법에 대해: 개념과 직관(1913-1914)
제1강에서: 이 강의는 세 가지가 중요 문제제기 이다. 1) 왜 형이상학으로부터인가? 2) 형이상학과 과학은 정신의 방향이 다르다. 3) 형이상학은 어떻게 진화한 것인가? 답은 강의 전체와 연관 될 것이고, 체계적인 정리는 “창조적 진화” 4장에서 이루어 질 것이다. 그러면 원인의 관념은? 강의 속에서는 제2강에서 원인 관념을 다루면서, 심리학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여기서 심리학은 조건반사든 습관이든(행동심리학 포함) 반성의 심리학도 아니고, 형상과 본질을 중요시하는 형태심리학도 아니며, 과거를 반성하는 회고적 심리학도 아니라, 생명의 기원에서 생성하는 내성심리학, 생성심리학일 것이다.
우선, 체계의 과학이 아니라, 박홍규처럼 총체적 자료의 과학으로서 형이상학을 다루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료 전부를 해석 또는 해명할 수 없는 학문은 학문이 되는가? 그렇다면 부분을 해석하는 제반 학문(과학들)이 형이상학(철학)과 동일한 반열에 있을까? 벩송이 형이상학을 다루고자 하는 것은 신체 바깥의 대상들을 다루는 것도 중요하지만, 신체 안에서 일어나고 지속하고 있는 것들을 생각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부분의 학문으로서 과학이 지성을 도구로 삼아 체계화하는 것은 형이상학과 다른 길을 갈 수 있다. 그럼에도 지성의 한계에 부딪히는 생물학과 심리학 등에서는 천문학과 물리-화학과는 다른 길을 가고 있다고 할 때, 형이상학이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길은 후자의 길일 것이다. 이 후자의 학문은 1900년까지 제대로 정립되지 못했다(마찬가지로 20세기 후반의 광양자에 이르면 우주의 생성도 19세기 물리-화학적 설명과는 다르다). 물론 1900년 당시까지 진화론도 필연의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원자론적 종합의 관념과 같은 기계론적 진화인지, 또는 목적론을 받아들이면서 인간의 최상위라고(정향진화, 스펜서, 나중에는 샤르뎅) 착각하고 있는 것인지를 검토할 단계가 아니었다. 이런 원자론적이고 기능적인 입장에는 완전자와 절대자라는 관념을 버리지 못하는 스콜라적인 요소에 의해 지배되어 있다고, 벩송은 7년이 지나면 “창조적 진화(1907)” 4장 마지막에 쓸 것이다.
제2강에서는, 제1강에서 철학사 속에서 각 시대의 철학자들이 형이상학적으로 수학들을 가지고 다루는 방식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는데 비해, 여기서는 경험을 근거로 하는 일반인과 과학자들이 사실을 다루는 방식을 제시하다. 그럼에도 경험을 다루는 데 있어서, 경험론과 합리론의 차이가 있고, 둘 다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음을 지적한다. 제3의 방법으로, 기억을 깊이 설명하지 않았지만 생리학자들, 정신물리학자들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벩송은 심리학적 분석을 통해 문제제기를 한다. (55QL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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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강의에 앞 강의가 부분들에서 전체로가 아니라 전체에서 부분으로 간다고 했다고 강의를 시작한다. 심층이 전체에 가깝고 개별 사실들과 개념과 관념은 부분에 닮았다. 이 내부에서 외부로 방향은 의식상태의 인식과 재인식의 방향이다. 심리학의 방향은 스토아학파의 우주관과 닮았고, 플라톤이 티마이오스편에서 우주의 영원성을 지상으로 옮겨 시간을 정하는 것과는 반대방향일 것이다. 플라톤에서는 내부에서 외부로 가는 방향이 분명하지 않다. 상식에 머물기 때문이다. 벩송이 심리학적 방법이라고 하는 것은 의식상태 전체가 먼저이고 그리고 그 속에 생명의식, 그리고 인간의식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단계의 과정이 qpfrthd에게서는 연속성이라는 것이다. (55QMB)
****[원인: 형이상학과 심리학에서]
# <원인관념(1900-1901 강의록, 2019)> 1강(184-187), 2강(187-192)
* 1강(184-187)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그것의 역할은 어떤 것일 수 있는가? / 형이상학은 특별나게 단순한 것이며, 그것은 우리에게 우리 감관들과 우리 인식의 훈련에 의해 암시되었다. (184)
1) 감관들. 각 감관은, 이 감관의 본성에 의하여, 우리에게 정해진 특별한 성질들을 제공한다. a) 동일한 감관의 자료들 사이에는 연속성이 있다. b) 다른 감관들의 자료들 사이에는 불연속성이 있다.
2) 사람들이 공통감관(le sens commum, 상식)이라고 부르는 이 감관[의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일반 법칙은 어디에서 오는가?: 동일한 감관의 자료들은 항상 자료들 사이에 연속성으로 있고, 그리고 다른 감관들의 자료들과는 불연속성으로 있다.
형이상학은 과학이다. 즉 감관들의 자료와 상식[공통감관]의 자료들 사이에 연속성을 학립하고자 애쓰는 과학이다. 그러나 누가 우리에게 말하는가, 이런 연속성이 현존한다고 또한 형이상학이 공상(chimerique)이 아니라고? 여기서 또한 단지 양식(le bon sens)에 호소하면서, 사람들은 연속성이 현존한다(있다)고 긍정할 수 있다. 존재 전체의 빛살의 능력은 정확하게 흡수의 능력을 측정할 수 있다(원초적 동물의 눈과 새의 눈). 우리 감관들의 자료들은 훨씬 넓은 일체들로부터 추출되어 있다. 감관들의 장치들은 이것들[감관들]이 펼칠 수 있는 에너지의 양을 정확하게 표현한다. (184)
오히려 공통감관은 사회적 보존에 운명 지워져 있다.반면에 감관들은 개인적 보전에 연관이 있다. 여기서 또한 우리는 무엇보다 행동으로 향해 방향 지워진 능력에 관계있다(avoir affaire). 공통감관의 자료들은 도덕적 삶의 전제일까 또는 보다 넓은 일체로부터 추출된 것일까?
사색하는 우리의 능력은 작동하는(agir) 우리의 능력에게 정확하게 모델이 되어야만 했는가,또는 두 능력들 사이에서 어떤 간격이, 즉 어떤 놀이가 있는가?사색하는 능력과 작동하는 능력 사이에 이런 간격이 있다고 믿는 자들은 형이상학자들이다. 반대로 프로타고라스에서 오귀스트 꽁트에까지 형이상학의 부정(la négation)은 인간 인식의 인간중심적 개념 작업, 즉 두 능력의 공통성을 확립하는 개념작업 안에 있다.
형이상학과 실증과학의 어떤 연관들이 있는가? 위대한 형이상학자들은 모두가 위대한 과학자들이다. 그럼에도 형이상학과 과학은 인간 정신의 대립된[상반된] 두 방향을 표상[대표]한다.자연에 대한 과학은 사실들의 관찰에 의해서 그리고 도구들의 개입에 의해서 시작한다. 그 과학은 인간에게 자연을 향해 작동하게 허락하는 발견물들에서 끝난다. 과학은 감각-운동의(sensori-moteur) 장치이다.둘[형, 과] 사이에는 일반적 법칙들이 있다. 어떤 이들에게서, 이 법칙들은 오로지 편리한 상징들의 표기법들일 것이고; 다른 이들에게서는 이 법칙들은 실재적일 것이며, 연속성을 확립하는 어떤 것이다. 이런 방식의 과학을 생각하는 자들은 형이상학자들이다.차이는 말끔하다. 그럼에도 차이는 주장 자체에서라기보다 오히려 일반정신의 방향에 있다. (185)
형이상학은 어떻게 진화했는가? 어떻게 형이상학은 이끌어져 왔는가? 형이상학이 오늘날 제기되는 문제거리를 기원들 이래로 어떻게 제기하기에 이르렀는가? 그렇게 진화한 형이상학은 어디에 있는가? (185)
형이상학은 과학이다. 그 과학[즉 형이상학]은 연속성을 학립하고자 애쓰는 과학이며, 전체에 일반적 통찰(une vision)을 갖는 과학이다.그 기원에서 형이상학은, 과학이 자기에게 완전히 빌려준, 그 자리 속에 위치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그리스인들에게서 기원에서 하나의 과학이 있었고, 유일하고 정합적인 과학인 기하학이 있었다. 따라서 형이상학은 기하학이어야 마땅했다. 기학학자는 이상적 도형들을 구축하고, 그 도형들 위에서 증명을 확립하며, 이런 증명들은 실재성에 적용되어 마땅하다. 형이상학은 이런 과학의 확장(une extension)이다. 형이상학은 자기의 대상과 자기의 방법에 대해 조금씩 의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플라톤(Platon, 전428년-전347년)에 이르러 절정에 도달했다. 고대철학자들은 감각적 자료들 옆에다가 모조품들(des duplicata, 복사본들)의 도덕적 관념들, 즉 이데아들을 구성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이데아들의 세계 위에 이것들[복사본]과 실재성이 일치하는 방식으로 사유하고자 원했다. (185-186)
근대철학에서, 사람들은 측정(척도)의 연구로 향해 조금씩 길을 갔다. 근대과학에 의해 완성된 진보를 특징지우는 것, 그것은 실험적 방법이 아니라, 오히려 측정의 관념에, 즉 수학에 일치되는 중요성이었다. 그런데 근대 형이상학과 근대 수학(la mathématique)과 관계는 고대인들의 형이상학과 고대인들의 수학과 관계와 같다. 근대 수학은 대수학(une algèbre)이다. 근대 수학은 크기들의 변수들 속에서 크기들을 다루며, 이 크기들을 따간다. 역학 덕분에 근대 수학은 모든 현상들의 연대를 요청한다.
데카르트(Descartes, 1596-1650)에서 라이프니츠(Leibniz, 1646-1716)까지 사람들은 점점 더 잘 보고되었던 형이상학의 진행을, 형이상학이 보편적 필연성의 과학이 되어 마땅한 진행을 따라갈 수 있다: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은 틀림없이 데카르트의 메카니즘[정역학]보다보다 미묘한 메카니즘[동역학]이며, 또한 보편적 필연성의 메카니즘이자 학설이다: 모든 것은 모든 것에 연결되어 있고, 모든 것은 모든 것의 함수(기능)이다(라이프니츠, 스피노자). 그러면 이 첨예한 형식 하에서, 문제들 중의 문제가 되었던 자유의 문제가 제기된다.영국 관념론은 이에 대해 첫째로 중요성을 보았다. 로크(Locke, 1632-1704), 버클리(Berkeley, 1685-1753), 흄(Hume, 1711-1776)은 무엇보다도 작용(l’action, 행동)에 전념하였다. (186)
그러나 문제를 말끔하게(깨끗하게) 보았고, 또한 문제를 자기에 맞는 방법을 다루었던 첫째 철학자는 칸트(Kant, 1724-1804)이다. 경험은 절대적 필연성에 의해서(메카니즘) 우리에게 현상들 자체 사이에 연결된 현상들을 제공한다. [그럼에도] 모든 것은 공간과 시간 속에서 굴절되어 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것은 단순한 작동(l‘acte simple) 즉 자유로운 작동(l’acte libre)을 표현할 뿐이다.(186)
칸트의 관념론으로부터 헤겔(Hegel, 1770-1831)의 형이상학과 쇼펜하우어(Schopenhauer 1788-1860)의 형이상학이 나온다. (186)
50년간 이래로 형이상학의 거대한 체계는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개별적인 학설들을 발견한다. 형이상학의 관점(un point)을 연구하고 또는 이 측면들 중의 하나에 의해 형이상학에 접근한다. 그런데 형이상학의 미래는 어떤 미래이어야 하는가? 형이상학은 자기의 경력을 끝장냈는가, 또는 새로운 발전들의 가질 수 있는가? 말하자면 형이상학은 항상 수학들에 묶여 있어야만 하는가? 또는 형이상학은 수학들로부터 해방될 수 없는가? 그리고 자연(본성)에 대한 과학에 접근할 것인가? (186-187)
1) 만일 형이상학이 지금까지 항상 수학(la mathematique)에 묶여있다면, 그것은 매우 오랫동안 유일한 정합적 과학이었다는 것이다.
2) 새로운 과학들이 형성되었고, 이는 그 수학보다 아마도 더 큰 연속성을 소개하고 있다. 스펜서(Spencer, 1820-1903)에게서 진화 이론은 또한 생명으로부터도 생명적 사실로부터도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나 주권 원리(le principe souverain)는 아마도 어느 날 천재적 생물학자에 의해 폭로될 것이다.그 생물학자는 내부에서(du dedans) 그 원리를 연구하면서 생장의 비밀과 생명의 비밀을 발견할 것이다. 만일 형이상학이 실증과학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런 측면으로부터 방법(la méthode)이 우리에게 올 것이고, 그리고 우리들은 우리의 틀들을 – 공간, 시간 자유의 개념작업들을 - 변형하기로 또 다시 녹이기로 끌어들일 것이며, 이 개념작업들은 수학적 국면(l’aspect) 아래서 해결할 수 없는 것 같이 보인다. (187)
이런 측면으로부터 현대철학이 노력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방향에서 노력은 방향을 잡아야만 한다. 우리는 원인의 개념을 연구할 것이고, 어떻게 개념이 구성되었는지를 찾을 것이고 살아있는 실재성(la réalitévivante), 즉 의식을 연구할 것이다. (187)
(55PNA) (55Q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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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490 프로타고라스(Πρωταγόρας, Protagoras, 전490년경-410년경) 고대그리스 소피스트.
전428 플라톤(Πλάτων, 전428년-전347년),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 ‘아카데메이아’를 창설.
1596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 프랑스 수학자 의학자 철학자이다. 그는 새로운 철학의 방법을 제시하고, 당시 카톨릭의 비판을 피하여 네델란드에서 지냈다.
1632 로크(John Locke, 1632-1704) 영국 철학자로서 전통 청교도 가정에서 태어나, 목사직과 의사직 사이를 주저하였다. 그는 정치적 입장으로 프랑스를 전전하다가 1668년 명예혁명이후에 영국으로 되돌아갔다.
1646 라이프니쯔 (Gottfrid Leibniz, 1646-1716) 이 다재 다능한 철학자는 프랑스에 거주한 시간이 많아서 많은 작품을 프랑스어로 썼다. 그리고 그는 뉴턴과 서로 따로 미적분을 발명하였다. 새로운 논리계산(명제계산)을 발명하고자 했다.
1685 버클리(George Berkeley, 1685-1753) 영국계 아일랜드의 성공회 주교, 철학자, 과학자. 『시각신설론(視覺新說論, An Essay Towords a New Theory of Vision, 1709』,
1711 흄(David Hume, 1711-1776) 영국 에딘버러 출신으로, 프랑스 여행으로 또는 프랑스 대사의 비서로서 지냈으며, 루소와 친밀함과 서로 불화로 유명하다. 그의 회의론이 칸트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1724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현재로는 폴란드보다 더 동쪽에 있는 쾨니히스베르그 출신의 프러시아 공화국의 철학자이다. 인간의 표상적 인식의 조건을 규정하고, 도덕적 이성의 신에게 종속을 요청하고, 미적으로 신의 작업의 숭고함에 경건하게 기도하는 듯이 긍정한 프로테스탄트 철학을 구성하였다.
1770 게오르크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 독일 관념철학 대표.
1788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 독일 철학자.
1798 오귀스트 꽁트(Auguste Comte, 1798-1857) 프랑스 철학자, 사회학자. 1) 신학적 단계, 2) 형이상학적 단계 3) 실증적 단계: 현상 관찰, 가설 정립, 실험 과정을 통해 가설을 검증.
1820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 영국 철학자, 사회학자. 다윈의 학설을 응용하였다.
1882 슈발리에(Jacques Chevalier, 1882-1962) 프랑스 카톨릭 철학자. 1900년 ENS(이해부터 벩송 강의를 수강했다). 1903년 교수자격 2등. 베르그송(Bergson, 1926), 벩송과 대담들(Entretiens avec Bergson, 1959).
* 2강(187-192)
원인(cause) 관념은 내밀하게 사실(fait) 관념과 연결되어 있다. (187)
물체의 낙하의 예(例)가 있다. 하녀에 의해 부딪혔던 매달린 물건(une suspension)이 떨어졌다. 현상의 원인은 어떤 것인가? 그 집의 여주인, 노동자, 물리학자, 논리학자 등등은 이 사실에 다른 원인들을 부여할 것이다. (187)
하나의 사실이 있었기 위해 무엇을 필요한가? 그 사실은 사람들이, 공간에서든 시간에서든, 시초(처음)와 끝을 보는 그 사실이다. 그런데 사실의 처음을 정확하게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거기에 난점이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원인 만드는 관념은 경계짓기(délimitation)에 의존한다(참조 앞의 예). 다양한 판단들과 각 판단의 안정성(sûreté) 또는 정확성(précision), 이것이 설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187-188)
1. 이 판단들의 다양성(cette diversité)은 어떻게 가능한가? 만일 이런 해석들의 다양성에 순응한다면, 그것은 실재 상으로 경험은 고정된 경계짓기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며, 그것[경험]은 현존하는 사실들의 그 자체에 의해서 밀집(une agglomération)이 되는 대신에, 경험은 연속성이다. (188)
2. 다른 한편, 각 판단의 안정성(la sûreté)[정확성]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물리학자와 논리학자는 개념작업을 가지고 완전히 만들어진 것[사실]에 이른다. 그리고 그들은 실재적인 것을, 즉 사실들을 그들의 개념작업 속에 차곡차곡 쟁여 넣고자 애쓴다. 마찬가지로 노동자와 여주인은 일반적 규범(une maxime)을 가지고 [사실에] 이른다. 그 규범 속에서 그들은 개별 사실을 다시 들어가게 한다. (188)
과학들의 역사는 우리에게 제시하기를, 사실들은 법칙의 발견 후에야 만 해석되고 정의되었다(물체들의 낙하에 관한 갈릴레이법칙, 금속들(les métaux)에 관한 라브와지에법칙). 사회학적 사실은 마치 화학적 사실처럼 또한 물리학적 사실처럼, 이의 제기할 수 없는 법칙의, 사실들에 반작용하는 법칙의, 함수로 정의될 수 있다. 사실 관념과 법칙 관념은 서로 연대적(solidaire)이고 보충적이다. (188)
반대. 법칙은 사실들 사이의 관계일 뿐이다. 그런데 사실들 사이의 관계는 이런 사실들을 가정한다; 따라서 법칙은 무엇보다 먼저 사실들의 현존을 함축한다.
응답. 법칙에 앞서서, 법칙의 예감(le pressentiment)이 있다, 즉 반쯤 깔끔하고 반쯤은 혼재되어 있는 틀의 통찰이 있다. 그 틀[규격]에 사실들이 들어갈 것이다. 법칙의 예감에 의해 해석된 사실들은 더 깔끔하게 획득할 것이고, 그리고 법칙과 소통할 것이다; 이하 등등. 거기에는 순환적 과정이 있다. 단지 추진(l’impulsion)은 법칙으로부터 왔다. 따라서 이리하여 만일 우리가 사실들의 원인에 관하여 그리고 사실들을 경계 짓는 방법에 관하여 견해를 바꾼다면, 그러한 것은 다음과 같은 것에 기인한다.
1) 우리는 연속성에게 일거리가 있다[관여한다].
2) 마치 빛의 다발만큼이나 많은 필요들, 경향들, 선입견들이 이런 연속성을 향해 방향잡혀 있다. 이런 것(필요, 경향, 선입견)들이, 연속성을 효과 있게 하는 자를 위해서 단지 구별된 사실들로 자른다. (188)
사실들을 얻고 따라서 그것들의 원인을 찾는 대신에, 우리는 보다 높이 거슬러 올라가야만 하고, 우리 경험의 새벽[처음]에 자리 잡아야만 한다고 추정한다.그리고 한편으로 실재적인 것의 연속성을, 다른 한편으로 존재의 경향성들을 다루어야 만하고, 어떻게 사실들 자체들이 구성되는지를 보아야만 한다고 추정한다.우리 경험은, 마치 무지개처럼, 서로 용해되어 있는 색깔로 혼성되어 있다(composer). 따라서 경험론이 확립한 불연속성은 없다.그러나 다른 한편 합리론과 더불어 사실들의 다양체들(la multiplicité)에 마주하는 정신의 통일성(단일성)도 인정할 수 없다. (188-189)
더 높이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런 단위(통일성)도, 이런 다양체도 실재적이지 않다. 그것들은 극한에로 이행들(des passages)들이다. 이 둘 사이에 있는 실재성에 만족해야 한다. (189)
강의 진행 계획
1) 심리학적 분석. 어떻게 정신 속에서 사실관념과 연대하는 원인간념이 구성되는가?
2) 철학과 수학의 사색 속에서 원인 개념의 역사
3) 사람들은 원인의 개념작업을 넓일 수는 없을 것인가?
I. 심리학적 분석
검토해야할 것은 외부성의 물음, 즉 물질성 자체의 물음이다. 우리는 거기[물질]에 대해 적어도 물음의 해결을 위해 알아야 할 필연적이 무엇인지를 유보할 것이다.
따라서 물질적 대상의 관점에서 지각이란 무엇인가? 광학적[시각적] 신경에 의해 시각적 중추들과 소통하는 눈과 망막을 표상해보자. 대상AB는 망막의 기저에서 거꾸로된 이미지A‘B‘를 생산한다. 인상은 시각신경을 통해서 두뇌에 소통되었다. 두뇌에서 요소적인 감각작용들 x,y,z,가 생산된다. 요소적인 감각작용들은 무엇인가?
1) 이 탁자AB는 위치화되어 있었다.
2) 탁자는 삼차원이었다. (189)
그런데 이미지A‘B‘는 평면이며, 이차원일 뿐이다. 이런 평면은 진동들을, 비너비적이고 단순한 감각작용들 x,y,z,을 생겨나게 한다. 따라서 대상이 의식에 의해 파악되기 위하여 대상의 위치화를 상실해야만 한다. 마치 일차원 그리고 이차원과 같은 위치화를 상실해야만 한다. 이때부터 우리는 비너비적인 감각들, 실로 채색된 먼지 같은 감각들만을 갖는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런 탁자를 위치화하며, 내가 탁자를 마치 너비처럼 지각한다. 어떻게 그러한 것이 있을 수 있는가?
어떻게 감각작용들은 자기들의 외연(leur extention)을 재정복할 수 있었는가? 로체(Lotze, 1817-1881), 헬름홀츠(Helmholtz, 1821-1894), 분트(Wilhelm Wundt, 1832-1920)는 거기에 대해 설명한다. 이 감각작용들은 병치되어 있으며, 함께 혼융되어 있지 않다.감각작용들은 서로서로 결부되어(joint) 있다. 감각작용들은 너비적(étendue)가 아니라, 오히려 위치적 기호들(des signes locaux)이다(호텔의 관인(소인, 스탬프)에 비교한다). 기호들은 우리에게 너비있는 대상을 재구성하게 허용한다. 이제 이런 외재화, 이런 감각들의 투사는 매우 복잡한 과정을 따라간다. 망막 이미지는 공간에서 우리들 밖에 위치를 잡는다. 단지 이런 이미지는 이차원일 뿐이다. 어떻게 우리가 체적[삼차원]을 재구성하게 허용할 것인가? 이 철학자들에 따르면, 시각은 우리에게 요철의 지각작용을 부여할 수 없을 것이다.이것은 촉각에 의해 얻어진 지각작용일 것이다. 그러고 나서 시각의 지각작용들에게 조금씩 충만하게 연합될 것이다. - 예를 들어 투시화(des dioramas), 시각의 착각들, 태어나면서 맹인들. (190)
이러한 것이 [위의 생리학자들의] 설명이다. 이 모든 것이 꿈이 아니라고 누가 우리에게 말하는가? 이것이 우리에게 지각된 대상들의 실재성을 보증하는 원인성의 원리(le principe de causalité)이다. (190)
우리는 이런 설명으로부터 무엇은 보존해야 하는가?
1. 만일 내가 물질적 대상(un objet matériel)을 고려한다면, 나는 공간 속에 위치한 체적(un volume)을 갖는다. 이 두 속성들이 따로 검토될 수 있다. 내가 체적을 다루고, 나는 그것을 표면과 깊이로 해체할 수 있다. 이런 표면을 나는 분석할 수 있고 그리고 무한히 계속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신은 단순한 비너비적 요소들을 얻을 수 있고, 너비를 마친 이 요소들의 병치인 것처럼, 즉 요소들 사이의 관계들인 것처럼 고려할 수 있다. “너비는 비연장적 요소들 사이의 연관일 뿐이다.”(로체) 이러한 논리적 분석은 내가 전체로부터 추출했던 요소들을 가지고 전체를 재구축하는 것이다. (190)
2. 논리적 분석을 젖혀두고, 생리학적 연구가 있을 수 있다. 즉 두뇌의 단순한 진동들의 이전과 더불어 지각에 대해, 망막 위에 망막 이미지의 형성에 대해, 연구가 있을 수 있다. 그 과정은 생리학적으로 보다 정확하다. 그러나 그 과정은 내가 생리학적으로 검증할 수 없은 점(un point)이다. 그것은 단순한 진동들을 단순한 감각작용들로 소위 말해서 변형한 것이다. (190-191)
3. 만일 논리학적 관점과 생리학적 관점에서 우리가 조금씩 완전하게 지각작용의 이론을 인정할 수 있다하더라도, 심리학적 관점과 동일하지 않다. 너비를 비너비인 감각작용들을 가지고 재구성할 수 있기 위하여, 내는 이미 기억을, 너비에 대해, 특히 망막에 대해 개별적이든 조상적인 것이든, 가져야만 한다.마찬가지로 원심력적 투사의 메카니즘은 설명하기에 극히 어렵다. 어떻게 우리는, 요철의 지각이라는 이런 새로운 지각을, 고유한(sui generis) 지각을 얻을 수 있었는가? 만일 투시화[입체화]가 우리에게 요철의 착각을 준다면, 그것은 내가 이미 이런 인상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나에게 그런 요철의 착각을 주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태생적 맹인들의 예는 시각적 지각작용과 촉각적 지각작용의 두 양태가 있다는 것을 단지 증명한다. 두 지각작용이 서로 결합[결집]하는데 어떤 시간이 걸린다. [그래야] 만진다는 자료들이 보여진 자료들을 정확하게 말 수 있으나,그러나 한 지각 작용에게 다른 본성의 지각작용을 줄 수는 없다.
결국 공통감관을 지닌 인간은 자기 지각작용에 신뢰하고, 그리고 원인과 지각작용의 동일성과 원인과 결과의 동일성을 믿는다. 그는 지각작용을 매우 단순한 메카니즘처럼, 무매개적이면서 덩이인 것처럼, 생각한다.
왜 우리는 무매개적 의식의 자료들에 만족하지 못하는가? 왜 신체 속에 의식을, 두뇌 속에 의식을 위치화하는가? 내가 먼 대상을 지각할 때, 말하자면 나는 이 대상의 길이를 알지 못하는가? 사람들은 그것을 거부하는데, 왜냐하면 사람들은 만진다는 것을 근본적 감관으로 간주하기 때문이고, 또 사람들은 그 감관에 모든 다른 감관을 동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통감관은, 우리가 볼 때, 우리 의식은 보여진 대상 속에 있다고 판단한다. (191)
처음에 우리는 일체의, 전체의 지각작용을 갖는다. 이 전체의 가운에, 우리는 재빨리 한 물체를, 즉 다른 물체에 작용할 수 있는 우리의 신체를 구별하기에 이른다. 우리 신체 안에, 우리의 신경 체계 안에, 전체는 우리가 다른 물체들의 세계로부터, 이것들에게 작용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수적인 것을 추출하게 허용하는 방식으로 조직화되어 있다. (191-192)
이런 가설은 우리에게 잠재의식의 과정들을 거부하게 해준다. 즉 사람들이 지각작용을 설명하기 위하여 일반적으로 불러오는 미묘한 메커니즘들을 거부하게 해 준다. (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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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4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 이탈리아 천문학자
1743 라봐지에(Antoine Laurent Lavoisier, 1743-1794) 연금술에서 화학으로.
1817 루돌프 헤르만 로체(Rudolf Hermann Lotze, 1817-1881) 독일 철학자, 논리학자.
1821 헬름홀츠(Hermann von Helmholtz, 1821-1894) 독일 생리학자, 철학자, 물리학자.
1832 분트(Wilhelm Wundt, 1832-1920) 독일 심리학자, 철학자, 생리학자. 실험심리학 창시자. 헬름홀쯔 제자.
(11:11, 55QLG) (11:17, 55QMB)
첫댓글 벩송은 원인관념의 문제제기는 인식론에서 다루는 것이 아니라 형이심학에서 다루어야 한다고, 우주론(cosmologie)에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우주발생론(cosmogonie)에서 다루어야 한다고 한다.
- 원인의 관념은 시간에 앞서서 생기는 사실들이 시간이 지나서 결실 또는 결말들과의 연관을 다룬다. 대부분의 인관관계 문제는 원인과 결과라는 인식론적 판단으로 앞과 뒤 사이의 관계들이 일정하게 또는 습관적으로 이루어진다고 여긴다. 이들은 실험적으로 반복할 수 있거나 사고 실험에 의해 배열과 도치가 가능한 경우에 속한다. 그러나 생명과 영혼은 일회적이고 실험할 수도 없고 배열하여 순서를 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형이상학, 즉 형이심학은, 인식론과 지식이론과 달리, 원인 또는 기원에 대한 문제를 시간 지속에서 다루어 한다고 한다. 이런 문제의 인식은 표상(재현)의 문제가 아니라 재인식(기억론)에 속한다는 것이다. (55RK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