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학생운동야사
10월 27일 새벽의 만세 소리
때는 1979년 10월 27일 새벽. 봉천동 비탈길의 한 자취방에서 갑작스런 만세소리가 터져나왔다. 이 함성의 주인공은 류시민씨(당시 서울대 경제 2)와 그의 동료들이었다. 독재자 박정희의 죽음 앞에서 온 국민이 아연해하고 있을 때 이들 발랄한 청년들은 만세부터 부르고 만것이었다.
사실 10월 27일은 서울대 축제의 마지막날이었고 서울대의 전 학생운동 조직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말고 여성을 대동하여 27일의 쌍쌍파티에 참석하라 는 동원령이 내려져 있었다. 당시 학도호국단이 주도하는 축제가 대학문화를 오염시키고 있다고 판단했었던 서울대 학생운동 지도부는 78년도에도 쌍쌍파티 교란작전을 감행한 바 있었다. 즉 시위 때 주워놓은 최류탄 2개를 파티장에 터뜨렸던 것이다. 그러나 아깝게도 하나는 불발탄이었다. 류시민씨와 그의 동료들은 올해에는 기필코 성공할 것을 다짐하면서 전쟁박물관(시위용품 최루탄,방독면 등을 보관해둔 자취방)에서 가져온 최루탄들을 요리조리 두들겨보며 날을 새던 중 박정희씨의 피살소식에 접했던 것이다.
이 무렵 커다란 트렁크를 손에 들고 우울한 얼굴로 시내 모 호텔의 문을 나서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최영선(당시 서울대 사회3, 현 한겨레신문 기자). 밤새 호텔방에서 등사기로 박정희 타도를 호소하는 유인물을 밀어 가방에 담아 나오던 그는 아침뉴스를 듣고 밤새 헛일했구나 싶었던 것이다. 또한 앞으로 전개될 상황변화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그의 어깨를 무겁게 했다. 그는 당시 서울대 학생운동 조직의 최고 지도부 중의 한사람이었던 것이다.
한편 경찰서 유치장에도 10·26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그해 10월 5일경부터 영등포 경찰서 유치장에는 서울대 지하신문 제작·배포팀이 붙잡혀 들어와 있었다. 1학기 때부터 학내외에 불온(?) 유인물을 뿌려온 이들이 일망타진(?)된 것은 이 해 추석에 감행한 영등포 경원 극장 유인물 살포 사건때문이었다. 이 극장에 들어간 조가 극장 유리창을 통해 유인물을 뿌리자마자 캄캄한 극장에 일제히 불이 켜지고 일제히 비상벨이 울렸다. 이윽고 경찰은 관객들의 신분증을 조사 ,수상한 자들을 인근 영등포서로 연행했는데 이때 끌려간 유인물 배포조 중 한 사람의 시위경력이 드러나면서 주변수사를 통해 유인물팀 모두가 잡혀 왔던 것이다. 사실 이 때 영등포서는 당시 수사중이던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의 잔류자들을 잡기 위해 비상경계망을 펴고 있다가 엉뚱한 수확을 올린 것이라고 전해진다.
어쨌든 이들 팀의 일원이었던 한철희씨(당시 국문4, 현 돌베게 출판사 주간)는 10·26이 난 후 이놈들 박정희가 죽어 속이 시원하냐 는 형사들의 질문에 아주 곤혹스러웠다고 한다. 그런데 한철희씨 외에도 이 유인물팀 중 윤승룡씨(당시 국문2, 현 한국일보 기자), 조병래씨(당시 사회2, 현 동아일보 기자), 고세현씨(당시 국사4, 현 창비사 편집부장) 등이 현재 언론,출판계에서 활약하고 있다. 지하신문 에서 쌓은 기량을 지상신문 에서 발휘 하고 있는 셈이다.
10·26과 함께 선포된 계엄령으로 전국의 대학은 임시휴교에 들어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생한 첫 집회·시위가 11월 24일의 이른바 ‘YWCA 위장결혼식 사건’ 이었다. 제적학생 중심의 민주청년협의회가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 선출을 저지하기 위해 일으킨 이 사건에서 신랑역을 맡았던 홍성엽씨(연세대 사학과 73학번)는 아직까지 미혼이다. 주변에서는 그때 장가를 한번 가서 못 가는 모양 이라 놀려 대기도 한다.
류시민의 멱살잡은 이해찬
79년 당시 서울대에는 11-12개의 학회 비공개 조직이 있었고 각 학회의 대표들로 구성된 77학번 협의체가 서울대 학생운동을 지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77학번협의체내에서도 역할이 나뉘어져 있었다. 즉 학기 중에 데모를 주동할 사람들과 4학년 말까지 학내에 남아 최후까지 조직을 지도할 임무를 맡은 비공개 지도부가 있었고, 그 구성원은 최영선, 김명인(당시 영문4, 현 도서출판 풀빛 상임편집위원), 현무한씨(당시 독문4, 현 웅진출판사 근무) 등이었다. 한달간의 휴교기간 중 학생회 부활을 추진하기로 한 비공개 지도부의 방침에 따라 개학 후인 12월, 법대 1층 강의실에서 임시 3학년 과회장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 50여개 과 60여명의 과회장들이 참석했는데도 나서서 사회를 보려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회의는 위축된 분위기였다. 유신 하에서 운동권 학생들은 공식적인 직위를 맡지않고 얼굴없는 인물로 활동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므로 과회장들은 평범한(?) 학생들이었던 것이다. 이때 학생회 부활을 열렬히 주장하고 나선 인물이 후일 학림의 수괴(?)로 알려진 경제학과 과회장 박문식씨였다. 그의 열성에 의해 회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박문식씨가 ‘학생회부활 추진위원회’ (이하 학부추)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회의 결과에 당황한 것은 최영선씨를 비롯한 비공개 지도부였다. 그때만 해도 박문식씨는 학교밖에서 야학을 하고 있었을 뿐 학내 비공개학회의 회원이 아닌 알려지지 않은 인물 이었던 것이다.
학부추는 방학기간 중 학생회 회칙을 만들어 갔다. 2차례의 공청회를 거치면서 학부추가 궁지에 몰린 적이 있었다. 학생회장의 선출 방법 때문이었다. 당시 학생대중의 수준상 직선제로서는 대권을 잡기가 불안하다고 판단한 비공개지도부는 간선제 회칙을 만들었는데 체육관 선거=독재라는 생각에 젖어 있던 학생들 사이에서 반발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에 류시민씨가 나서서 “간선도 민주주의다”라는 연설을 하고 조직동원된 사람들이 여기에 일제히 호응하여 회칙은 겨우 공청회를 통과하게 된다.
이러한 산고 끝에 3월 28일 서울대 총학생회가 출범했다. 총학생회의 3역으로 총학생회장에 심재철(사범대 영어4, 현 MBC 기자), 대의원회 의장에 류시민, 학생활동위원장에 이홍동(정치4, 현 한겨레신문 기자)씨가 선출됐다.
4월경부터 이들 재학생그룹과 복학생그룹 사이에 가두진출문제를 둘러싸고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재학생지도부는 학내 집회·시위를 일정 정도 진행한 후 학생들의 열기를 모아 시민들의 호응을 받으며 가두로 나가자는 의견이었던데 반해 복학생들은 시국의 급박함을 지적하며 즉각적인 가두시위를 주장했던 것이다.
이들 사이의 첫 충돌은 복학생들이 가두시위를 조직할 목적으로 개최하려한 ‘김지하 문학의 밤’ 포스터를 재학생들이 찢고 다님으로써 시작됐다. 결국 이날 밤 재학생-복학생 간의 담판에서 가두진출은 모두의 합의에 의하기로 약속됐다. 그런데 4월 26일 집회에서 다시 충돌이 발생했다. 복학생들이 집회가 끝나는 즉시 연단에 뛰어 올라와 학생들에게 가두진출을 선동(?)할 계획임을 알아차린 재학생 지도부는 집회 순서가 끝나자마자 마이크의 전원을 차단해버린 것이다. 이에 화가 난 이해찬씨(사회학과 72학번, 현 국회의원)가 연단 위로 올라와 류시민 대의원회의장의 멱살을 잡았다. 그때 류시민씨의 반응이 걸작이었다. 뉘신지 모르오나 금번에 복학하신 선배님인 것 같은데 제가 명색이 학생대표인데 이러실 수 있습니까? 물론 이해찬씨인줄 뻔히 알면서 능청을 떤 것이었다. 88년 소설가로서의 길을 가고 있던 류시민씨는 광화문에서 우연히 만난 이해찬의원에게 붙들려 현재 그의 보좌관으로 있다.
한편 이무렵 서울대 총학생회 명의로 발표된 4·19 제20선언은 후세에 길이 남을 명문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이를 기초한 사람은 바로 김명인씨였다.
영화 리벤저와 전남대 방화사건
이 무렵 지방대학들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지방대학 중 가장 민주화의 열기가 드높았고 후일 광주항쟁을 촉발시키게 되는 전남대의 상황을 살펴보자.
10·26사건 당시 전남대 학생운동 지도부 모두가 중앙정보부(이하 중정) 광주지부 보호실 안에 있었다. 이른바 전남대 상담지도관실 방화사건 때문이었다. 상담지도관실이란 전남대 내에 있는 형사들의 집무실의 명칭이었다. 79년 10월 17일 유신헌법공포일을 맞아 정권측의 경계심과 학생들의 반발심이 함께 드높아져 가고 있을때 이 상담지도관실에 불이 난 것이다. 불을 지른 장본인은 고희숙씨(당시 영어교육3, 현 전교조 해직교사)였다. 그는 리벤저 라는 영화를 보다가 물에 적신 손수건을 유리창에 붙이고 유리를 깨면 소리도 안 나고 잘 깨진다는 장면을 목격하고 이를 실행에 옮긴 것이었다.
어쨋든 중정 광주지부는 전남대 불순분자들을 발본색원하겠다고 학생들을 닥치는대로 잡아들였다. 여기서 한술 더 뜬 것이 당시 전남대 총장의 발언이었다. 그는 30분간에 걸친 교내 방송을 통한 담화에서 신성한 학원에서 폭력학생들은 일망타진됐다. 학생들은 안심하고 학업에 열중하라 고 전남대생들을 위로(?)했던 것이다. 그러나 서슬 퍼렇던 중정도 김재규의 체포와 함께 풀이 죽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중정보호실에 있던 전남대 지도부 27명은 보호실 안에서 상황평가를 하고 앞으로의 대책을 논의하다가 얼마후 대부분 석방되었다.
이들 보호실 팀에 의한 첫 시위가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 선거일인 11월 30일 시위였다. 몰려든 학생들만 수천명. 경찰이 출동해 최루탄을 쏘았는데 그때까지도 전남대생들 중 최루탄 구경을 해본 사람이 드물었다. 몰려든 학생중에 전남대 깡패써클로 유명한 아인의 멤버 장호걸씨도 있었는데 경찰쪽에서 노란깡통이 휙 날아오자 그가 이를 손으로 탁 잡았다. 그 다음에 빚어진 상황은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
80년 4월 9일 전남대에서도 학생회가 출범하게 된다. 학생회장은 지난 82년 옥사한 박관현 열사. 그는 79년까지 광주지역 최초의 노동야학인 들불야학의 강학(배우면서 가르친다는 뜻)으로 일했었다. 그는 학생회장으로 나서는 것이 노동자들을 배신하는 것이 아닌가 고민하다가 80년 상황에서 학생회가 중요함을 깨닫고 주변의 권유를 받아들인 것이다.
선거유세때 양복은 윤상원열사에게서 구두는 또 다른 사람에게서 빌어 신고 나설 정도로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전국 최고의 지지율로 당선될 정도로 그는 전남대생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4월말 전남대생들이 어용교수 퇴진문제로 철야농성을 진행할 때도 그는 낮에는 수업 받고 밤에는 농성합시다 라는 방식으로 학생들을 지도할 정도로 대중감각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어용교수 퇴진 투쟁은 전남대생들을 하나로 뭉치게 한 사건이었다. 학생들이 지목한 4명의 어용교수들은 그 무렵 구성된 전남대교수평의회조차 제명시킬것을 결의할 정도로 악명 높은 인물들이었다. 그런데 이들 4명의 교수들은 퇴진 요구를 받자 일제히 전남대 병원 특실에 입원을 해버렸다. 게다가 교수평의회 대표로 찾아간 김정수교수(영문학)에게 몇개월만 지나봐라며 공갈을 치기까지 했다. 이에 기가 막힌 학생들은 그들을 반성할줄 모르는 반민주세력으로 규정, 전남대 본관 앞에 “반민주·반민족세력 여기 묻히다”라고 쓴 비를 묻음으로써 상징적인 단죄를 했다.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쫓다
80년 5월 2일. 서울대 아크로폴리스광장은 학생회를 성토하는 1만 2천여 학생들로 가득찼다. 학생회가 학원의 병영화를 막기 위해서 그간 거부해 온 문무대 입소에 응하기로 입장을 바꾸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서울대의 정원이 대학원생까지 포함해 1만 4천명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이날 집회에는 전 서울대생이 모인 셈이었다.
당시 진행되고 있던 문무대 입소 거부투쟁에 대해 정부측은 안보의식 결여라며 학생들을 몰아 붙였고 이 문제에 관한 한 여론도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서울대 지도부로서는 기존 결정을 포기해야 할 형편이었다. 그러나 학생대중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게다가 복학생들로부터 시위 이슈를 입소거부 에서 계엄령 철폐로 바꾸어야 한다는 압력도 거셌다. 재학생 지도부들은 밤을 새우며 머리를 짰다. 마침내 궁리 끝에 희생타를 날리기로 했다.
5월 2일 들끓는 1만 2천여 학생 앞에 대중연설가로서의 재능이 있는 박성연씨(정치4)가 나섰다. 그는 면도날같은 언변으로 학생회를 질타했다. 학생대중의 울분은 그 질타속에 함빡 녹아들었다. 그후 천재적인 대중연설가로 정평이 나있는 김부겸씨(정치학과 76학번, 현 진보정당을 위한 준비모임 부대변인)가 나섰다. 30여분에 걸친 감동적인 연설을 통해 그는 1만 2천여 대중을 학생회 지지 유신잔당 타도의 결의로 몰고 갔다. 상황은 끝이었다. 이후 한주일간 전국의 각 대학들은 축제기간에 민주화대행진이란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강연, 연극, 탈춤 등 다양한 행사들이 엄청난 열기 속에 계속되었는데 이중 특히 연세대에서 공연된 노래극 ‘공장의 불빛’이 공전의 히트를 치게 된다. 이 공연에 한국 노동자들을 쥐어짜는 일본인 사장 역을 맡은 공유상씨(경영학과 76학번, 복학생)는 횃불을 들고 달려드는 분노한 관객들에 의해 소사할 뻔 하기도 했다. 원체 체구가 작고 마른데다 앞머리도 약간 벗겨진 그가 머리카락을 사무라이처럼 잡아 매고 기모노 입고 게다 신고 탈반 출신의 춤솜씨까지 곁들여 “마라데쓰 마라데쓰 웃기지 좀 마라데쓰 산 넘고노 물 건너노 죠센땅이노 들어올 때 와다꾸시가 골이 비어 빈손으로 왔게데쓰까”라는 노래를 열창하다 불타죽을 뻔 한 것이다.
계엄상황에 대한 저항은 전국의 대학신문에서도 속속 나타났다. 80년 3월 내한한 북한 전문가 서대숙 교수가 연세대에서 강연회를 했는데 한 학생이 질문을 했다. “북한의 주민은 남한의 주민보다 잘 삽니까?” 이에 대해 서대숙 교수는 “북한 주민은 남한의 잘사는 사람보다는 못살고 남한의 못사는 사람보다는 잘산다”라고 답변했다. 연세춘추(연세대학 신문)는 이 강연회 초록을 5월 개교기념일 특집호에 실었는데 검열과정에서 미련한 계엄사 검열관이 진문은 놔두고 대답만 잘라버린 것이다. 당시 연세춘추 기자들은 기사가 잘려 허연 신문공백에 “언론자유 보장하라”는 글자를 박아넣었다. 그후 연세춘추사에는 서교수가 무엇이라 답변했느냐 는 문의 전화가 쇄도했다.
80년 5월은 두가지 흐름이 병존하는 시대였다. 하나는 찬란히 피어 오르는 민주의 봄 이었고 다른 하나는 당시의 역관계상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 할 반동의 겨울이었다. 당시의 학생운동 지도부도 가능한 최대의 힘을 모아 유신잔당과 싸운다. 그러나 지는 싸움임은 분명하다 라는 정세인식 속에 있었다. 자연히 그들은 흉흉하게 나도는 쿠데타 설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5월 12일 저녁 무렵 학내농성을 지도하고 있던 심재철 총학생회장에게 스스로 기자라는 사람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계엄군이 이동하고 있으니 빨리 피하라 는 것이었다. 이어서 비슷한 시민제보가 잇따랐다. 학내지도부는 사태가 심각하다고 판단, 농성을 풀고 학생들을 귀가시킨 후 자신들도 피신했다. 후일 이것은 서울 일원에서 계엄군이 교체했던 상황으로 밝혀졌는데 어쨌든 이날 밤 쿠데타는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날 등교한 서울대 지도부는 학교 대자보 판에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쫓다’ 라는 벽보가 붙어 있음을 발견했다. 대망신이었다.
운명의 5.15 서울역 회군
5월 13일 가능한 한 최대의 힘을 모은 후 가두진출 이라는 재학생들의 노선에 반대하는 각 대학의 복학생들이 스스로 전면에 나서서 가두진출을 성공시켰다. 연세대를 주축으로 한 시내 각 대학의 수천명 학생들이 세종로 일대에서 1시간반 동안 야간시위를 벌인것이다. 각 대학의 재학생지도부는 아연실색했다. 아직 나갈 때가 아니라는 판단 때문이었다.서울대 비공개지도부는 이때 「시민여론조사」라는 문건을 만들고 있었다. 여론조사를 빙자(?)한 시민홍보물을 전국 총학생회 조직을 통해 4-5백만장 규모로 보급하고 나면 가두시위=혼란이라는 당시 언론의 선전에 사로잡혀있는 여론의 방향을 어느 정도 돌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던것이다. 그러나 계속적인 가두진출을 요구하는 학생대중들의 열기는 드높았다. 가두진출=군개입이란 등식이 깨진 것이다. 더욱이 가장 필요한 것은 전 대학의 행동통일이었다. 이에 5월 13일밤 전국 27개 대학 총학생회장단 회의는 이후부터의 가두진출을 결의하게 된다.
5월 14일에 이어 5월15일은 최대규모의 시위대(당시 언론도 10만인파라 보도)가 서울역에 모여든 날이었다. 특히 고려대 시위대는 서울역으로 가는 길에 성북서에 들러 그곳에 잡혀있던 고려대생 안희대, 신태식씨 구출담판을 진행했다. 이 두사람은 긴급조치위반으로 투옥됐다가 80년 복학했는데 몇일 후 구속될 것이 확실했던 것이다. 당시 성북서장실에 협상(?)대표로 들어갔던 박계동씨(고대 정외과 72학번, 현 진보정당을 위한 준비모임 대변인)는 성북서장에게 두사람을 석방하지 않으면 서울역에서 돌아오는 길에 시위대가 성북서에 들를 것이라 공갈(?)을 쳤다. 실제로 15일 저녁 시위대를 인솔하고 고대로 돌아오던 박계동씨는 성북서장에게 지금 간다 는 전화를 3번 한 끝에 두사람을 구출하게 된다.
이윽고 수십만의 시위대가 서울역 광장에서 계엄철폐, 유신잔당 퇴진을 외치고 있는 가운데 광장 중앙의 서울대 스쿨버스 안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5·15는 유인물조차 준비하지 못할 정도로 급작스럽게 계획된 가두시위였다. 그러나 막상 집회시간이 되자 지도부의 예상을 엄청나게 뛰어넘는 인파가 서울역 광장에 모여든 것이었다. 비공개지도부는 물론 총학생회장단도 난생 처음 경험하는 대규모 대중집회였다. 계속 밀어부칠 것인가, 철야농성할 것인가, 해산할 것인가. 기로에 서 있는 이들 앞에 심상찮은 제보는 계속 날아들었다. 계엄군이 인근 효창운동장에 진주했다는 것이다. 어둠은 점차 광장에 깔리고 처참한 유혈사태에 대한 우려가 이들의 어깨를 짓눌렀다. 결국 오늘은 해산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인파틈에 섞여 있다 달려온 신계륜씨(당시 고대 학생회장)가 해산에 반대하며 주먹다짐까지 했으나 대세를 뒤엎을 수는 없었다. 비공개지도부도 인파틈에 묻혀 이 결정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현재 이 결정에 대한 대체적인 평가들은 “5·15회군이 5·17쿠데타를 불러 일으켰다”라는 것이다. 대중의 단결된 힘 앞에서는 군부도 꼬리를 감추게 된다. 최소한 열기 높은 철야농성이라도 하면서 군부의 쿠데타에 대한 유혹에 찬물을 끼얹었어야 했다는 것이다.
심재철씨는 80년 5·15 회군에 대해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당시 저는 긴급조치하에서 형성된 사고 방식을 가지고 80년 봄이라는 열린 상황에 대처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이후 수년간 그때의 잘못된 판단에 대한 괴로움으로 속만 태우고 있었습니다. 현재는 내가 과거에 그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라는 것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작으나마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려 하고 있습니다.”
5월 15일 밤 전국총학생회장단회의가 고대에서 열렸다. 이때는 12시 통금이 있을 때, 이때만 해도 심재철씨가 통금에 걸려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자 당시 경찰서장이 경찰 백차를 내줘 이를 타고 고대에 도착할 정도의 분위기였다. 후에 성북서장은 안희대, 신태식씨 석방건, 백차건으로 인해 파면조치 됐다. 당연히 5·17을 예상하지 못한 이들은 전국적 봉기를 위한 전국적 학생조직의 결성을 논의했다. 이 회의는 16일 밤 이대에서 속개돼 17일 아침까지 계속됐다. 전국적 봉기일자를 놓고 서울측은 빨리 지방측은 조금 늦추자는 논의들이 오가고 있던 오후 3시경 경찰이 이대에 투입됐다. 5·17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경찰이 들어오자 회의장 밖에 있던 백여명의 보도진들이 이를 취재하기 위해 밖으로 뛰쳐 나갔는데 경찰은 이를 학생들이 저항하려는 것으로 판단, 방독면을 착용하고 전투대형을 벌이는 등 부산을 떨었다. 이틈에 학생회장들은 이대 뒷담을 넘어 도망쳤고 즉각 이 사실을 각 학교에 알려 막상 5·17조치가 발표된 밤 12시에는 많은 학생들이 피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합수부의 데모자금 배정
광주의 전남대에서도 5월은 비슷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5월 14·15·16일에 걸쳐 전남대생들의 가두시위가 전개됐다. 단지 서울과의 차이라면 시위에 대한 시민들의 호응도였다. 박관현 학생회장이 도경국장과 담판한 결과 평화적 시위를 전제로 경찰이 시위를 막지 않은 것도 한 이유가 되겠지만 14~16일에 걸친 가두시위에 대한 광주시민들의 지지도는 대단했다. 일반시민은 물론 교수, 고교생들까지 집회·시위에 참여했고 대학생 자녀를 둔 아주머니들조차 자식의 데모참여를 걱정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서울과 마찬가지로 광주에서도 5·16회군이 있었다. 16일 도청앞 광장에서 화염병을 만들어 싸울 준비를 해야 한다는 광주지역 사회운동가들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열기에 사태를 낙관한 전남대 지도부는 5월 17일의 휴식을 결정한 것이다.
흔히 광주항쟁때 학생들은 달아나고 민중들은 싸웠다고 말해진다. 대체로 맞는 말이나 불충분한 말이기도 하다. 상황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5·17 휴식을 결정할 때 박관현 회장은 쿠데타가 일어나면 10시에 교문앞에 집결할 것을 선언했다. 과연 5·17이 일어난 다음날인 5·18, 전남대 일반 학생들은 교문 앞에 모였다가 시내로 진출하면서 열심히 싸웠다. 18~19일에 걸쳐 학생들은 광주천까지 가서 돌을 담아와 던졌고 맨 몸으로 돌진해 잠바를 벗어 페퍼포그의 화구를 틀어막기까지 했다. 또한 전남대 학생운동의 선배그룹인 복학생들은 화염병을 만들고 투사회보를 발간하면서 항쟁에 끝까지 참여했다. 녹두서점에 자주 모이던 김상윤씨 그룹, 전대 문화팀을 지도하던 전영호씨 그리고 들불야학을 중심으로 한 윤상원 열사 그룹이 바로 그들이었다.
항쟁이 일어나자 피신한 그룹은 바로 80년 봄 전남대 학생운동을 지도했던 사람들이었다. 70년대말 최루탄 구경도 해보지 못한 채 80년 민주화의 봄을 맞아 합리적인 대중운동을 주도했던 이들은 광주항쟁의 상황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경험이 없었던 것이다. 당시 전남대 지도부의 한 사람이었던 박영정씨(전남대 79학번, 현재 연극평론가)는 광주항쟁이 일어나자 우리는 이건 데모도 아니고 우리가 나설 계제가 아니다. 사태가 진정되면 다시 나와 운동을 하자는 정도의 인식 수준이었고 도망가는 것이 잘 하는 일인줄 알았다 고 말한다.
한편 이무렵 서울에서는 민주운동세력을 뿌리뽑기 위한 혹독한 수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신계륜씨는 이때를 ‘자라면서 엄마한테 맞고 친구들한테 맞고 군대가서 맞은 것을 모두 합친 것의 10배는 맞은 시기’라고 표현했다. 이때 학생간부들은 김대중씨에게 데모자금 받았다고 인정할 것을 강요받았는데 이때 수사(?)를 전담한 계엄사 합동수사부의 취조 방식중의 하나를 살펴보자. 우선 군인들이 복도에 2열로 마주 보고 늘어선다. 그 다음 학생간부로 하여금 그 사이를 통과하게 한다. 통과하는 동안 무수한 주먹, 워커발들이 날아온다. 복도 끝까지 가서 돈받았나 해서 안 받았다 하면 “뒤로 돌앗 앞으로 갓” 하는 것이다. 어쨌든 이때 경찰과 계엄사는 자금문제를 조작하기 위해 일대 소동을 벌였다. 5월 17일 학교에서 연행된 류시민씨의 경우를 보자. 우선 관악서로 간 류시민씨는 수사관들과 실갱이를 벌였다. 너 돈 받았지. 안 받았어요. 임마 신문에 니가 김대중이한테 돈하고 볼펜하고 메달 받았다고 났는데 왜 거짓말 해. 무수한 구타를 당하면서도 관악서의 구타는 견딜만 했던지 류시민씨는 버텼다. 하도 버티니 형사들간에 그 놈이 돈 받았을까 안 받았을까 하는 논쟁이 붙을 정도였다. 이 통에 궁금해진 관악서의 전경들까지 류시민씨에게 돈 받았는지를 물어보러왔다. 어쨌든 그는 얼마 후 치안본부 특수2대로 이첩됐는데 그의 뒤통수에다 대고 관악서 형사가 쏘아붙였다. 임마 가서 돈 받았다고 하면 죽어. 치안본부의 고문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류시민씨는 마침내 항복을 하고 20만원 받았다고 진술했다. 그런데 재판과정에서 주고 받은 돈의 합계가 안 맞았던지 검사가 류시민씨의 20만원을 공소장에서 빼버렸다. 80년 2학기 개학 직후 학생운동권은 극도로 침체되어 있었다. 광주항쟁을 목격한 학생운동권에는 다시 데모를 하면 전두환정권은 공수부대를 투입할 것이란 공포감조차 떠돌았다. 그러나 이것도 몇일 뿐이었다. 9월 9일 경희대 김경양씨가 동맥을 끊고 투쟁선언문을 낭독한 것을 시발로 다시 데모는 시작됐다. 그런데 이 시기 시위의 특징은 시위주동자의 대부분이 학생운동권 출신이라기보다는 80년 봄의 민주화운동과 광주항쟁을 지켜보다가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일수 없어 저항을 결심한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종잡을 수 없는 조직 무림
12월 11일 12시경 서울대 학생식당 앞, 돌연 4명의 학생들이 나타나 ‘반파쇼 학우 투쟁 선언’이라는 제목의 유인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이른바 무림 사건이 시작된 것이다. 이날의 상황은 남충희(철학과 77학번), 남명수(언어학과 77학번), 김회경(교육학과 76학번), 윤형기(토목과 77학번)씨가 주동한 유인물 배포를 목적으로 한 시위에서 그쳤다. 그러나 사건은, 수사과정에서 경찰이 배포조가 직접 유인물을 쓰지 않았다는 단서를 잡으면서 확대되기 시작했다.
사실 5·17 이후 구속된 학생회 간부들은 수사과정에서 학내조직이 노출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고 그 결과 5·17 이후에도 서울대 학생운동 조직은 거의 타격을 입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상황은 표변했다. 서울대에서 조사를 받은 사람만 2백 50여명에 달했고 구속, 강제징집당한 사람은 유인물 내용 검토자인 최영선, 현무한, 박남운(약대 77학번)씨와 유인물 작성자 김명인씨를 포함 70~80명에 이르렀다. 워낙 예상외로 많은 인원이 수사선상에 떠오르자 수사 당사자인 검찰조차 당황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조직이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는 안개 속의 조직이라 해서 무림이라 이름붙였다.
최영선씨 등 당시 무림의 지도부가 이 유인물의 배포를 결정한 의도는 이른바 ‘무·학논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2학기 개학 후 80년 서울의 봄과 광주항쟁을 거치면서 학생운동이 무엇을 잘못했으며 앞으로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란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 격화돼 경찰의 첩보망에 조직이 노출될 위기에 까지 이르자 무림지도부는 자신들의 입장을 공개 선언함으로써 그간의 논쟁의 난맥상을 정리하고자 했던 것이다. 즉 근로대중의 의식이 낮고 지도력도 부재한 현재 학생운동은 전체운동을 진행시키는 주도체이다. 따라서 학생운동은 시위만능주의를 버리고 내적 준비를 충실히 해야 한다는 것이 선언의 내용이었다. 어쨌든 무림사건을 담당했던 보안사의 한 분실장은 수사가 마무리 된 시점 쯤에 서울대 학생운동 조직은 일망타진됐다. 앞으로 짧으면 3년, 길면 8년은 서울대에서 시위가 없을 것이다 라고 호언장담했다. 과연 그랬을까?
서울대에 출현한 눈사람과 타잔
81년 3월 19일은 한국의 공안당국자들에게는 악몽같은 날이었다. 80년 말 서울대 무림 조직을 일망타진했다고 믿은 그들은 적어도 향후 3~8년간 대학가에는 시위가 없을 것이라 호언장담했었다. 그런데 개강 후 2주일이 채 되지도 않은 이날 바로 서울대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난 것이다. 이날 시위의 주동자는 유기홍씨(국사학과 77학번)와 문용식씨(국사학과 79학번) 등 5명. 이들은 5공치하의 삼엄한 대학에서 시위를 성공시키기 위해 고공전의 기법을 도입했다. 학생회관 3층의 한 방을 점거하여 플래카드를 내걸고 한 손엔 횃불을 들고 창틀에 올라서서 ‘반파쇼 민주화 투쟁선언’을 낭독한 것이다.
기습을 당한 학내 상주 경찰(이하 짭새)들이 도끼를 들고 달려왔다. 이들은 걸어잠근 나무문을 때려 부순 뒤 두사람에게 달려들었다. 잠시 후 횃불을 휘두르며 짭새들과 싸우던 문용식씨가 소화기 분말을 하얗게 뒤집어 쓴 눈사람이 되어 잡혀가는 순간 유기홍씨는 창틀에 매어 둔 자일을 타고 학생들 속으로 내려와 대열을 이끌기 시작했다. ‘타잔작전’이 성공한 것이다. 이날의 시위는 양동작전이기도 했다. 학생회관 맞은 편의 도서관 난간에는 박태견씨(국문학과 78학번)가 올라가 있었던 것이다.
뒷날 학교측은 아크로폴리스에는 장미꽃을 잔뜩 심고 도서관 창에는 철망을 둘러쳤다. 그러나 이것은 시위를 막는데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학생들은 장미꽃은 훌쩍 뛰어넘고 철망은 칼로 찢곤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이날 저녁 인문대 여학생 휴게실에서는 1학년 여학생모임이 열렸다. 모임의 목적은 ꡔ민중과 지식인ꡕ이라는 책을 가지고 독서토론을 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모여든 여학생들은 기왕의 프로그램은 제쳐두고 그 날 시위를 본 소감들을 얘기하기에 바빴다. 모두들 호의적인 반응들이었는데 유독 한 여학생이 시위학생들의 배후에는 불순세력이 있다며 끈질기게 시위를 비난했다. 모임이 끝나갈 무렵 주소록을 작성하기 위해 백지를 돌리던 모임의 주관자 석미주씨(종교학과 79학번)는 이 학생이 쓴 주소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는 바로 전두환씨의 딸 전효순씨였던 것이다. 몇일 후 총장을 통해 종교학과 과장에게 석미주씨를 조심시키라는 얘기가 내려왔다고 한다.
국풍 '81과 가수 이용
5공은 학생운동에 철퇴만을 가했던 것은 아니다. 대학생들의 문예활동을 친정부적인 것으로 이끌려는 문화정책도 구사했다. 허문도씨의 작품으로 알려진 ‘국풍 '81’의 개최전 그는 전국대학생탈춤반연합(이하 연탈) 대표자들을 만나 협박과 회유를 계속했다. ‘국풍 '81’에 참여하면 돈도 주고 활동도 보장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몽땅 깨버리겠다는 것이었다. 연탈지도부로서는 고민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광주항쟁 1주기를 맞는 5월에 여의도에서 놀자판을 벌이겠다는 정권측의 의도를 빤히 알고 있었던 연탈지도부는 전국을 돌며 각 대학 문화팀에 ‘국풍 '81’ 거부를 권유했다.
이래서 1백개에 달하는 전국 탈춤반 중 ‘국풍 '81’에 참가한 팀은 영남대 하나 뿐이었다. 아울러 춤, 노래, 연극 등 문화팀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서울대에서도 갤럭시라는 그룹사운드 하나 만이 ‘국풍 '81’에 참가하게 된다. 갤럭시 멤버 중 한 학생의 아버지가 현직 장관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국풍 '81’ 가요제 참가자 중 누가 봐도 제일 노래를 잘한 가수 이용(당시는 데뷔전)을 제치고 서울대 갤럭시가 그랑프리를 차지한 것도 ‘국풍 '81’의 정치적 의도를 보여주고 있다.
물론 학생운동권이 ‘국풍 '81’에 전혀 참가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국풍이 열리고 있는 여의도 광장에 운집한 인파 중 상당수는 운동권 학생들이었던 것이다. 단지 이들은 구경대신 살인정권 타도를 외치며 스크럼을 짜고 열심히 뛰어다녔다. 이래서 당시 ‘국풍 '81’을 중계하던 TV 화면에는 여의도에 인파가 몰리고 있으니 집에서 시청해 주십시오라는 자막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해 5월은 전국적으로 각 경찰서 전투경찰들이 매우 바빴던 달이었다. 5월 6일에는 연세대와 동국대에서 동시에 시위가 일어났다. 특히 동국대의 노세극씨(행정학과 78학번, 현 노동운동가)는 도서관 앞 은행나무에 올라가 시위를 주동하는 새로운 기법을 개발했다. 현재 동국대생들은 이 나무를 응봉지목이라 부르고 있다. 응봉은 노세극씨의 號였던 것이다.
또한 5월 12일에는 성균관대생들이 학내시위 후 종로4가 전매청 앞까지 진출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날 시위를 주동한 김 안씨(사학과 80학번)는 사범대 옥상에서 자신을 잡으러 온 경찰들을 들고 있던 빨래방망이로 두들겨패는 등 격렬하게 저항했다. 지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천여명의 학생들이 학내를 휩쓸고 돌아다니며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을 뒤쫓아 경찰병력과 페퍼포그차가 학교 깊숙히 들어간 뒤 학생들은 슬금슬금 교문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사히 교문을 통과한 성대생들은 종로4가에서 80년 5·15 이후 첫 가두 시위를 벌였던 것이다.
전투적인 학생운동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성균관대. 이들의 전투성의 근원은 무엇일까? 성대인들은 그 원인을 안정된 조직체계와 항상적인 교육, 훈련과정에서 찾고 있다. 80년대 초 성대 학생운동 조직은 1~2학년 때부터 학생들에게 여러가지 훈련들을 시켰다. 낙서, 스티커, 유인물 살포작업들이 그것이었다. 물론 실패하기 일쑤였다. 김현수씨(사학과 80학번)는 당시를 돌아보며 나이론 끈에 유인물을 묶어서 담배불과 함께 매달아 두고 멀리서 유인물이 살포되기를 기다려도 함흥차사라 가보면 담배불이 꺼져있곤 했다고 말했다. 이와는 달리 자금난으로 실패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즉 담배개비에 타도 전두환 등의 구호를 써서 강의실에 뿌려두는 것도 훈련프로그램의 하나였는데 당시 가장 좋은 담배인 거북선이나 솔의 경우 학생들이 잘 주워갔지만 돈이 없어 청자나 환희를 뿌려두게 되면 호응(?)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전두환 X 국풍 X
5월 27일에는 광주학살을 규탄하며 한 젊은이가 자신의 생명을 내던졌다. 그의 이름은 김태훈(서울대 경제학과 78학번). 광주태생으로서 80년 5월 광주에서 학살의 현장을 목격한 그는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 때문에 한해 동안 고민해 왔다. 김태훈씨는 운동권 학생이 아니었고 학과 공부를 열심히 하는 조용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서울대는 이 사건으로 연 3일간 시위를 벌인다. 이후 84년 복학생협의회는 김태훈씨를 비롯한 민주열사들을 기념하는 비를 세우는데 짭새들은 이것마저 훔쳐가는 만행을 저질렀다.
김태훈 열사가 도서관에서 자신의 몸을 내던진 날 외대 도서관에서는 재미있는(?) 유인물들이 떨어져내렸다. 전두환 X 국풍 '81 X 라고 갱지에 볼펜으로 쓴 유인물들을 쓴 장본인은 이재현씨(영문과 78학번). 5월 26일 저녁 유인물을 밀기 위해 등사용품 일체를 가지고 여관에 투숙한 이재현씨는 시간이 갈수록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전에 한번도 등사기를 사용해 본일이 없는 그는 선배들에게 들은 대로 열심히 원지를 긁어 롤러로 밀었으나 끝내 유인물을 만들어 내지 못했던 것이다. 새벽녘 등사를 포기한 이재현씨는 가지고 간 백지들에다 볼펜으로 성명서를 쓰기 시작했다. 40~50장 정도 쓰다 팔이 아파진 그는 1백장 가량은 구호만 쓰고 나머지 1백장엔 전두환 X 국풍 X 란 초미니 구호를 적어 넣었다. 현장에서 연행된 이재현씨는 경찰서에 가서도, 자신은 중학교 때부터 등사기를 자유자재로 다뤘다는 한 경찰관에게 설움을 당했다. 너는 애가 왜 그렇게 무식하냐? 등사기도 밀 줄 모르고.
81년 들어 학생운동의 투쟁력이 급격하게 회복되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지만 곳에 따라서는 지진아들도 있었다. 전남대가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이들은 광주항쟁때 전남대 학생운동권이 맥없이 도망치고 말았던 원인을 과학적인 이론의 부족에서 찾으면서 81년의 1차적인 목표를 체계적인 사회과학 학습에 두었다. 이러다 보니 광주항쟁 1주기에도 정작 현지인 전남대에서는 시위 한건 없이 지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5월이 저물어 갈 무렵 전남대 교정에는 다량의 유인물이 뿌려졌다. 아카시아 향기가 흩날리는 5월이란 매우 문학적인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유인물은 사회과학한다는 년놈들아 정신차려라 라는 욕설로 끝을 맺고 있었다. 재학생들의 미온적인 태도에 울화통이 터진 시인 박몽구씨와 몇몇 전남대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경고장을 보낸 것이다.
81년 학생시위에 나타난 새로운 양상 중의 하나는 여학생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정권측은 이러한 현상에 내심 당황해 하면서도 이것을 비방하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경향신문에 81년 12월부터 1월까지 연재됐던 학생운동 관계 연재물 대학가의 음영 (특별취재반 명의로 되어 있으나 실제 필자는 박순식기자)은 이화여대에서 6월 4일 시위를 주동한 조기숙씨(무용과 78학번)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C양(조기숙씨)의 보이프렌드 K군이 데모를 주동하기 직전 C양에게 남긴 말은 C양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나 같은 남자는 사랑만이 아니라 이념적으로도 일치하고 고난의 길을 같이 걷겠다는 여자라야 일생을 같이 할 수 있을 것 같애 몇일을 고민한 끝에 C양은 K군처럼 소요사태를 일으키고 형기를 마치면 K군과 결합할 수 있으리라는 결론을 내렸다.
80년 5월 당시 4·19에 참여하지 않았던 이대 선배들의 전철을 되밟지 말자는 각오로 서울역 시위에 참여했던 이대 학생운동권은 81년 당시 상당한 수준의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조기숙씨는 이러한 조직과 후배들을 보호하기 위해 수사과정에서 시위동기를 남자친구의 영향으로 진술했던 것이다. 이대 운동권의 제1의 목표는 이대는 데모 안하는 애들, 시집 잘 가려고 간판 따러온 애들 이란 인식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칼하게도 경찰 역시 그러한 이대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대에서 시위가 일어나도 배후조직을 캘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 덕분에 이대 운동권은 더욱 급속히 성장할 수 있었다.
노무현 의원의 의식화(?) 과정
학림사건에 대한 수사가 시작된 것도 6월 무렵이었다. 81년 상반기 들어 학생시위는 서울대, 연대, 고대, 성대 등을 넘어서 70년대에는 시위가 없었던 경희대, 외대, 동국대 등으로 퍼져나가고 있었으므로 공안당국은 무림 이외의 또 다른 조직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때마침 불온서적을(?) 지속적으로 출간하고 있던 도서출판 광민사 대표 이태복씨를 중심으로 꼼그룹이 형성되고 있다는 첩보에 접한 수사당국은 이태복씨 주변을 집중 수사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광민사 편집부장 이선근씨와 부산대 6·12 시위관계 수배자 김진모씨가 함께 있다가 잡힘으로써 공안당국은 뭔가 있다는 감으로 수사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결국 이선근씨 방에서 학림 중앙위원회 회의 자료가 압수되고 회의를 하러 그곳에 왔던 박문식, 민병두, 이덕희씨 등 중앙위원들이 몽땅 연행됨으로써 학림사건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당국은 이 사건 관계자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부치기 위해 무척 고심했다. 심지어 이들의 공소장에는 영국의 공산주의자 E.H. 카아가 지은 ꡔ역사란 무엇인가ꡕ를 탐독하고 라는 구절이 들어 있을 정도였다. 카아는 소련주재 영국대사를 역임하기까지 한 사람이었는데 이같이 황당한 공소사실 때문에 사법부는 영국대사관으로부터 항의를 받기도 했다.
아무튼 학림조직은 스스로 제기한 정치노선과 조직의 문제에 대해 일정한 성과를 내기 전에 깨졌지만 81년 상반기에 학생운동이 침체에서 벗어나 민주화 시위를 일상적으로 벌일 수 있게 한 데 기여한 바 크다고 할 수 있다.
학림이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의 목적의식적인 노력의 소산이었다고 한다면 학림의 여파로 그 해 8월에 터진 부림사건은 완전한 조직의 산물이었다. 부산대 학생운동 출신의 민주인사들을 잡아들여 국가보안법, 반공법, 집시법 등으로 옭아맨 이 사건은 그동안 부산지역 민주운동권의 성장에 불안을 느낀 5공의 싹쓸이 작전이었다. 부림사건과 거의 같은 시기에 터진 오송회·금강회·아람회 사건들을 볼 때 이 무렵 5공은 지방의 민주운동권을 전반적으로 정리하려는 스케쥴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하여간 이 사건은 부산 민주화운동권을 쑥밭으로 만들기는 했지만 이 과정에서 또 한 사람의 운동가가 탄생했다. 노무현 변호사가 바로 그 사람이었다. 당시 부림사건의 변론을 맡았던 김광일 변호사는 부산지역에서 민권운동에 참여해온 죄목으로 걸핏하면 부림사건의 공소장에 이름이 나오는 형편이었다. 이처럼 변호사가 아니라 피고 비슷하게 돼버린 김광일 변호사는 그때까지 시국사건을 맡아본 일이 없었던 노변호사에게 이 사건을 맡을 것을 권유하게 된다. 대학을 나오지 못했던 노변호사는 대학까지 나온 이 사람들이 왜 사서 고생을 할까 하는 궁금증에서 변론을 맡았다고 하는데 이것이 노무현씨의 인생에서 하나의 전환기를 이루게 된것이었다. 자신이 담당한 피고 송병곤씨를 연애하듯 자주 만난 노변호사는 공소장에 나온 책들을 거의 독파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마침내 의식화(?)가 된 그가 재판정에서 변론중 알리하고 포먼하고 권투시합을 하는데 김일성이 알리편을 들었을때 피고인들도 알리편을 들었다면 그것도 이적행위냐고 따져 묻자 당시 최병국 검사는 북괴를 찬양하는 발언을 삼가해 주십시오라고 소리쳐 폭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10.23 동해백주 사건
81년 2학기가 시작되던 무렵 색다른 사건이 하나 일어났다. 당시 연세대 신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영창씨가 ꡔ무림파천황ꡕ이란 무협지를 썼다고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된 것이다.박씨는 당시 아르바이트로 무협지를 쓰고 있었는데 자신이 쓴 무림파천황에다가 무림의 세계에서는 정파와 사파가 나뉘어 싸우지만 실제 사회에서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투쟁한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이 투쟁하다가 싸움이 발전하면 자본자계급이 타도된다 라는 구절을 써넣었다. 그런데 한 만화가게에서 이책을 보던 독자가 간첩 나타났다고 신고를 한 것이다. 박영창씨는 이일로 꼬박 징역 2년을 살았다. 현재 박영창씨는 무협지에다 그런 구절을 써넣는다고 무협지 독자의 의식이 바뀔리가 없으니 혹시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만두기를 당부하고 있다.
무림, 학림의 연이은 검거로 학생운동이 적잖게 위축되어 있을 때 서울대에서 큰 시위가 일어났다. 그런데 이날 시위가 성공하는데 크게 공헌한 물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동해백주였다. 81년 10월 23일에는 때이른 첫눈이 왔다. 아침에 학생식당에 모여있던 공대, 가정대 연극반원 10여명은 순간 환호성을 올렸다. 공대의 한 친구가 당시 새로나와 인기가 있던 동해백주를 가방에 몇병 사넣고 왔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첫눈이 날리는 아크로폴리스에 둘러 앉아 동해백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연극반원들의 술자리에 노래가 빠질 수 없었다. 81년 5월 노비문서 공연을 통해 박치음씨 작곡의 「전진가」를 보급한 것도 바로 이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학내에 상주하고 있던 짭새들이 이제나 저제나 시위가 터지나를 감시하고 있던 삼엄한 상황이었다. 연극반원들이 시위 발발의 본거지인 아크로폴리스에서 술을 먹고 노래를 부르자 이것이 무슨 조짐인가 하고 기겁을 한 학생과 직원들이 쫓아올라왔다. 티격태격 시비가 붙자 학생들이 몰려 들었다. 별 수 없이 동해백주팀은 쫓겨났는데 그로부터 10분후 시위가 터졌다. 주동은 지영근, 이상대, 박상영씨 등 사범대팀이었다. 결과적으로 동해백주 때문에 모여들었던 학생들이 몽땅 시위대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이날 시위에는 똥물병과 이단옆차기가 등장했다. 9월달의 시위가 문교부의 엄명을 받은 일부 보직교수들의 진압(?)으로 번번이 실패하자 이날 주동학생 중 지영근씨(체육교육과 77학번)가 교수들 가운데 가장 악질적이었던 학생처장을 이단옆차기로 날려버린 것이었다. 하여간 이들은 스승에게 똥물을 퍼붓는가 하면 구타까지 하는 패륜아들로 대서특필되었다. 하지만 이후 서울대 시위에서 교수들의 진압은 현저히 줄어들었고 이 시위에 이어진 일주일 간의 축제거부시위에서는 주동없이도 공연하러 온 연예인들에게 똥물을 퍼붓는 대중행동이 이어졌다. 국풍 '81식의 관제 향락문화로부터 학원을 지켜야 한다는 결의가 대중적으로 확산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시위후 동해백주팀은 박한석씨(당시 도시공학과 대학원 1학년)가 제명되고 학부생들이 정학을 당했다. 죄명은 학교에서 술 마시고 고성방가를 했다는 풍기문란 혐의였지만 시위 성공에 기여한데 대한 보복임과 동시에 성장하는 문화운동쪽에 쐐기를 박겠다는 의도였음은 분명하다.
없어진 총 2자루와 109인 사건
11월 7일은 고려대와 외대 1학년생들의 문무대 입소일이었다. 학생들은 군사교육을 통해 대학생들의 의식을 획일화시키려는 의미를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80년 병영집체훈련 싸움의 실패를 교훈삼아 일단 입소에 응하기로 하면서 나름대로의 전의를 다지고 있었다. 즉 획일적인 군사문화를 주입하려드는 것은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학생들은 문무대에 도착하자마자 스크럼을 짜고 노래를 부르며 광장을 돌았다. 그러자 대령 한 명이 법대학생 1~2명의 명찰을 뜯더니 끌고가려 했다. 주변에서 보고만 있을리가 없었다. 이래서 몸싸움이 벌어져 대령이 떠밀려 넘어졌다. 이것이 ‘고대 109인 사건’의 발단이었다.
다음날 아침 12중대 1내무반에서 소위 애국가 거부사건 이 벌어졌다. 조교가 아침점호를 한다고 학생들을 부동자세로 세워 놓고 애국가 제창을 명령하였다. 학생들은 조교의 고압적인 상명하달식 태도가 부당함을 지적하며 우선 애국가를 불러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라고 요구했다. 물론 학생들이 그 이유를 굳이 듣자는 것 보다는 분단, 안보, 구국의 논리로 학생들의 비판적 의식을 윽박지르려는 문무대 입소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그런데 이 광경을 지켜보던 보안대원이 어처구니 없게도 이들이 빨갱이다 라고 상부에 보고한 것이었다.
다음날 문무대로 달려온 고대 대학원장 등 4~5명의 교수가 이야기 좀 하자 며 12중대 1내무반을 찾아왔다. 그런데 뒷날 109명의 강제징집된 학생들은 이날의 대화내용이 고스란히 녹음되어 보안대에 보관돼있음을 알게된다. 불순분자(?)의 체크가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고대생들이 문무대에서 돌아오자마자 학교에는 제적설이 떠돌기 시작했다. 결국 82년 1월말부터 2월초 사이에 제적, 지도휴학 등으로 109명의 학생들이 강제 징집됐다. 외대도 사정은 마찬가지로 약 50명의 학생들이 강집되었다. 핑계는 이들이 퇴소한 후 총이 2자루 없어졌다는 것이다. 2~3개월 후 이 총을 훔쳐간 도둑을 잡았지만(학생들이 아닌) 강집된 학생들은 학교로 돌려보내지지 않았다.
심지어 문무대에서 영화로 본 북한 어린이들의 노래 ‘김일성 수령님 감사합니다’를 흉내내며 교문앞에서 놀고 있던 고대 의대생 7명까지 경찰서로 끌려가 두들겨 맞고 바로 강집되기까지 했다. 82년 3월 24일과 4월 9일 고대와 외대에서는 강제징집을 거부한 한대희씨(외대 독어과 81학번) 등에 의한 시위가 벌어졌다. 이들이 뿌린 유인물은 남한산성 반독재 투쟁선언 이라는 제하의 것이었다.
부미방으로 상금 탄 사람들
82년 3월 18일 남한에서 30년만의 반미투쟁이 전개됐다.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이하 부미방)이 일어난 것이다.
광주의 경험 이후 운동권 내에서는 미국을 보는 시각이 올바르게 자리잡혀 가고 있었지만 이것을 구체적으로 표출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생각들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국민들의 미국관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던 것이다.
부미방의 주도자들이 잡힌 것도 반미=간첩이라는 부산 시민들의 인식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문부식씨가 휘발유를 담을 물통을 맡겼던 한영식당 아주머니는 자주 들르던 문부식, 김은숙씨의 얼굴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사건 후 그는 신고를 하고 경찰과 함께 고신대학에 가 학적부를 뒤져 두 사람의 사진을 지목했다. 더욱이 방화자 중의 한 사람인 이미옥씨의 옆집 주인은 이미옥씨가 밤중에 책을 장독대에 숨기는 것을 보고 신고를 했다. 얼마 후 두 사람은 각기 1천만원과 8백만원의 상금을 받았지만 이웃의 정리는 그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그들은 결국 동네에서 더 이상 살지 못하고 타지로 떠났다고 한다.
부미방팀의 예상보다 불이 크게 번진 것은 김은숙씨의 말대로 휘발유를 무식할 정도로 많이 사용한 탓 이었다. 김은숙씨와 이미옥씨는 각기 양손에 벌건 휘발유가 든 물통을 들고 저게 뭔가 싶어 쳐다보는 사람들을 헤치고 문화원을 향해 50미터 가량이나 걸어서 문화원 현관에 4통의 휘발유를 쏟아 부었던 것이다. 방화 직후 도망친 김은숙씨 등은 라디오 뉴스를 들으며 안절부절을 못했다. 불이 꺼져야 되는데 계속 타고 있다는 뉴스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역사적인 사건 때문에 장사를 망친 사람이 하나 있었다. 이호철씨(부산대 77학번 현 노무현의원 보좌관)가 바로 그 사람이다. 이씨는 학림사건이 터지고 그 여파로 부산 지역에 부림사건이 일어나자 학림과 부림의 연결고리인 자신이 도피하면 사건이 축소될것으로 판단, 장기간의 도피생활을 시작한다. 81년 6월말부터 약 3개월간 시골에서 머슴살이를 하던 그는 9월경부터 서울에 올라와 명동에 있는 별셋주점에 취직한다. 아라이(접시닦기)에서 시작한 그는 몇달 후 실력을 인정받아 주방장 바로 밑 서열인 큰칼잡이까지 승진하게 된다. 그 후 주방 밖으로 나와 웨이터 중 서열 2위인 지배인 바로 밑의 홀장으로 보직을 옮겨 3월경까지 근무하던 이호철씨는 장기적인 은신을 위해 친구와 남대문시장에서 넥타이 장사를 하기로 하고 오랫동안 못 볼 부산의 동료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날이 3월 18일, 부미방이 일어난 날이었던 것이다. 시내 중심가에 전경이 쫙 깔려 있어 깜짝 놀란 이호철씨는 후배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부산을 빠져나왔는데 경찰은 바로 이호철씨를 찾기 시작했다. 이호철씨가 학림, 부림의 잔당이라는 점, 81년 6월 12일 부산대 시위 때 나무밑에 불을 질렀다는 점, 그리고 3월 18일에 이호철씨 비슷한 사람이 현장에 나타났었다는 점 등이 그의 혐의들이었다. 전보대에 몽타쥬가 나붙는 상황이었으므로 서울로 올라와 다시 주방으로 들어간 이호철씨는 끝내 넥타이 장사의 꿈을 이루지 못한채 별셋주점을 덮친 경찰에 연행되고 만다. 3월 18일 내려갔을 때 신변이 위험하게 된 후배에게 만약의 경우 찾아올 곳을 알려준 것이 결정적인 실수였던 것이다.
강원대 성조기 방화시위
부미방 이후 검거선풍이 인 부산은 물론 서울의 학생운동도 상당히 위축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강원대에서 부산학우들의 투쟁을 적극 지지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이름하여 ‘강원대 성조기 방화사건’.
김래용씨(자원공학과 80학번), 이헌수씨(교육학과 80학번), 이재영씨(경제학과 80학번) 등 8명이 20만평에 달하는 강원대 캠퍼스를 각각 분담해 벌인 이날 시위를 위해 송민석씨(성결교 신학대 80학번 휴학중)가 서울로 올라가 성조기를 사왔다. 그런데 송씨가 성조기만 사면 의심을 받을까봐 태극기, 일장기, 성조기 등 만국기를 사오는 바람에 이 팀의 시위 자금이 상당히 축나기도 했다.
4월 22일 12시 30분 학생회관의 한 방을 점거한 채 창틀에 올라선 김래용, 이헌수씨가 반미구호를 외치며 성조기를 태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뿔싸, 순간적으로 커튼에 불이 옮겨붙은 것이다. 이들은 태우던 성조기를 내던지고 커튼에 붙은 불을 끄느라 법석을 피워야 했다. 부미방이 일어난 후 언론은 주도자들의 반미 주장은 쏙 빼버린 채 이들을 방화범, 테러리스트로 몰아가고 있는 형편이었다. 강원대 성조기팀은 이 반미구호를 학원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시위를 조직했던 것인데 커튼에 붙은 불때문에 또 다시 방화범으로 몰려서는 곤란했던 것이다.
82년 초의 큰 사건들 때문에 위축된 듯 보였던 학생운동은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각 학교마다 지하써클 중심의 폐쇄적인 조직체계 외에 과, 단대 차원의 개방적인 대중조직을 건설해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82년에는 학도호국단, 대학신문, 교지 등 공개적인 공간에 대한 장악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아울러 학림이 깨진후 그보다 느슨한 선이기는 하지만 서울대, 연대, 고대, 성대, 이대를 중심으로 학교간의 연락체계도 갖춰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조직적 준비와 대중사업의 결과가 82년 9·24 가두시위로 나타난 것이다.
이날 저녁 종로거리를 꽉 메운 1만여명의 학생들은 당시 국민적인 분노를 사고 있던 일본 교과서 왜곡사건에 대한 정부의 종속적인 자세를 규탄했다. 80년 5·15 서울역회군 이후 처음으로 연합가두시위를 전개한 학생운동은 그간의 폭압의 긴 터널을 거치면서 투쟁력을 완벽하게 회복했음을 보여주었다.
9월 22일 동국대 시위는 82년 2학기 시위의 한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주동자인 김용식씨(임상학과 80학번), 김형민씨(물리학과 80학번)는 연행하려는 짭새들을 식칼, 쇠사슬, 깨진 병으로 위협하면서 시위의 기선을 잡았다. 시위학생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동국대 시위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스크럼 대열속에 반드시 장삼입은 승려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시위가 일어나면 앞장서서 돌을 던지며 짭새들과 싸웠던 승려들로서 진관스님(승가학과 78학번), 법우스님(불교학과 81학번) 등을 들 수 있다. 80년 10·27 법난으로 정권의 본질을 고난속에서 체득한 이들 승려들은 81년 겨울부터 절에서 야학을 시작하는 등 나름대로의 실천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동국대 학생운동의 이들 진보적 승려들의 움직임과 결합되면서 독특한 투쟁성을 키워왔다고 할 수 있다.
학생시위가 소수 운동권 학생 중심에서 대중투쟁으로 발전해 나가는 좋은 예를 10월 9일 경희대 ‘피의 111사건’에서 찾아볼수 있다. 사건의 발단은 공대의 수원이전 문제였다. 학교이전에 반대해 10월 7일부터 공대생들은 거의 전원이 모여 농성을 하기 시작했고 다음 차례는 문리대 라는 소문때문에 하루 이틀 지나면서 다수의 문리대생들이 이에 합세했다. 10월 9일에는 문리대 1학년생들이 서울에서 살렵니다라는 노래를 부르며 스크럼을 짜고 교내를 돌기도 했다. 경희대 운동권은 10월 7일로 예정했던 시위도 무산시키면서 이 농성에 합류했지만 농성대열 앞에서 노래를 지도하는 정도의 역할에 그쳤다. 농성이 계속되고 현장에 나와 있던 교수들에게 학생들은 총장이 직접 나와 이전문제를 해명할 것을 요구했다. 마침내 총장이 오기로 하고 교수들은 총장에 대한 예우라며 강의실로 들어갈 것을 권유, 학생들은 경희대에서 가장 큰 강의실인 정경대 111호 강의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잠시 후 나타난 것은 총장이 아니라 쇠파이프를 든 삼청교육대 출신의 깡패들이었다. 불시의 습격으로 강의실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머리가 깨져 피를 철철 흘리며 끌려나오는 학우들의 모습을 목격한 경희대생들은 분노하기 시작했다. 이후 전혀 주동이 없는 시위가 시작됐다. 학내를 휩쓴 시위대는 학교 밖으로 나와 가두시위를 시작했다. 구호도 바뀌었다. 수원이전 반대 구호는 사라지고 전두환 물러가라가 모든 학생들의 입에서 터져나왔고 이문파출소가 때려부숴졌다. 정권의 잔인성과 폭력성을 눈으로 지켜보는 과정에서 자연발생적으로 폭발한 이날의 시위는 82년말부터 경희대 학생운동이 대중적으로 정착되는 밑거름이 되었다.
이대생들에게 얻어맞은 짭새
82년 10월 12일 광주의 별 박관현씨가 옥중투쟁중 사망했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 시기는 81년 박몽구씨가 욕설을 퍼부었던 전남대의 사회과학 한다는 년놈들 사이에 자신들의 준비론적 자세에 대한 반성들이 퍼져나가고 있을 때였다. 전남대생들은 날마다 전대병원 분향소에 줄을 섰다. 1·2학년보다 오히려 3·4학년들이 더 많이 모여 들었다. 그들은 박관현씨가 학생회장을 지낼 무렵 학교를 다닌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14일에는 주동자 없이도 전남대 강당 앞에 6천여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누군가가 메가폰까지 갖다 놓았다. 제발 누가 나와 지도를 해달라는 전남대생들의 열기였던 것이다. 이날부터 전남대 학생운동권이 이끌기 시작한 시위는 매일 1만명 이상씩의 학생들이 참여한 가운데 1주일을 끌었다. 전남대 81학번들의 전투성의 기틀은 이때부터 잡혀나갔다고 말해진다. 그들은 사회과학하는 년놈이었음과 동시에 대규모 대중시위라는 경험을 함께 쌓을 수 있었던 세대였기 때문이다.
11월 3일에는 서울시내 각 대학에서 교내 시위가 있었고 오후부터 종로에서는 가두시위가 벌어졌다. 특히 중앙대의 김연명씨(사회복지학과 80학번)는 시위를 주동하면서 고추가루를 가지고 나무에 올라갔다가 미처 봉지를 풀기 전에 짭새들에게 붙잡혔다. 경찰서에서 김연명씨는 고추가루때문에 곤욕을 치뤘다. 그들은 이 고추가루를 시위용품이라 하여 압수해갔다.
학생운동에 대한 대중의 애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 11.3 이대시위일 것이다. 이날 학생회관에서 울면서 학우들에게 살인정권 타도를 호소하던 임규완씨(사학과 79학번)는 9월 22일 시위의 생존자였다. 9월 22일 짭새들에게 임규완씨가 잡혀 수위실로 끌려 들어갈 무렵 마침 근처에서 졸업사진을 찍고 있던 사학과 4학년 학생들이 일제히 규완아 하고 외치며 달려들었다. 그들은 수위실 창문을 부수고 짭새들을 걷어차고 때리고 꼬집고 하여 임규완씨를 빼냈던 것이다. 이리하여 학교를 빠져나온 임규완씨는 11월 3일 다시 한번 학내로 들어가 시위를 주동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날 학생회관 앞에서 임규완씨를 끌고가던 짭새들에게 또 다시 이대생들이 달려들었다. 학생들은 임씨를 빼내기 위해 짭새의 사타구니를 걷어찼다. 급소를 얻어 맞은 짭새가 주저 앉은 사이에 누군가가 임규완씨에게 바바리코트를 벗어 던져주었다. 임규완씨는 바바리코트 주머니에서 코트주인이 애인에게서 받은 것으로 보이는 염주를 발견했다. 그러나 이 염주를 주인에게 돌려주지도 못하고 임규완씨는 1년간의 도발이 생활을 해야했다.
소림사 주방장 전법
83년 1월 연세대 후문 근처인 봉은동의 한 자취방에서는 시끄러운 고성방가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이후 운동가요로서 전국을 휩쓴 ‘타는 목마름으로’의 집단 창작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자취방에 모여있던 사람들은 연대내 써클인 현대문화연구회 회원들. 그중 한 회원이 시원찮은 기억력으로 김지하 시인의 시 타는 목마름으로의 일부를 중얼거리자 다른 회원들은 제멋대로 곡을 붙여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고장난 악기들이 한꺼번에 불협화음을 내는 듯한 혼란기를 몇번 거쳐 그 중 호평을 받은 곡조가 오선지 위에 옮겨졌다. 이를 다시 다듬어 하나의 노래로 완성시킨 사람은 예능적인 재질이 있던 회정 이성현씨(경영학과 80학번)였다. 학생운동이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 만세를 외쳤던 1983년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83년은 학생운동에 있어서 질풍노도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각 학교의 서클, 학회는 신입회원으로 넘쳐 흘렀으며 서울대, 연대, 고대의 경우 학도호국단, 대학신문 등 학생통제를 위해 설치되었던 학내기구조차 운동권에 완전히 장악되었다. 게다가 70년내 학생운동가들이 대거 출판문화운동에 참여하면서 발간한 사회과학 서적들은 학생운동의 이념을 과학화하는 터전이 되었다. 이같은 대중적인 힘과 운동이론의 과학화는 83년 내내 학원을 정치투쟁의 격전지로 만드는 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심지어 4월 8일 1천여명이 참여한 서울대 시위에서는 당시 국회의장이던 윤길중씨의 아들 윤성주씨(동양사학과 80학번)가 주동자로 나서 정권측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런데 83년 시위의 한 특징은 전술적인 뛰어남에 있다. 학내에 짭새(사복경찰)들이 상주하며 시위의 초전박살을 노리고 있고 주동자들은 수년의 징역살이를 각오해야 하는 현실에서 시위주동자들은 그야말로 인생을 걸고 뛰어들어야 했다. 이것이 학사건(이전의 시위에서 주동자가 학우여 하고 외치는 순간 짭새들이 달려들어 끌고 가버리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이런 시위를 학사건이라 불렀다)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는 방안을 찾기위해 당시의 운동지도부들은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 조직의 무기, 육도삼략, 손자병법 등의 전술서들을 공부했다.
4월 21일 연세대 시위에 선보인 소림사 주방장 전법도 이러한 연구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점심시간, 학생들이 식사를 하러 몰려들 때 미리 식사를 하는 척하고 있던 운동권 학생들이 주동자의 신호에 따라 일제히 먹던 밥그릇과 식당에 쌓여있던 빈병들을 내던지며 식당 밖으로 몰려나갔다. 된장찌개, 순두부, 멸치볶음 등이 마구 날아오자 짭새들은 순간 멍해진듯 주춤했다. 이틈을 타서 학생들은 재빨리 대오를 형성했다. 일단 대오를 갖추는데 성공한 시위대는 학교 전역을 돌며 시위를 벌였는데 다음날부터 연세대 식당에서는 병음료수가 자취를 감추고 대신 캔음료가 등장하게 되었다.
여성만으로 만든 민주광장
이 해 4월 11일에 첫 발간됐던 비합법 유인물 「민주광장」도 이 시기 학생운동의 성과로서 특기할만하다. 당시 비합법 유인물로서는 최초로 제호를 가졌었고 삼엄한 사찰 속에서도 5외에 걸쳐 꾸준히 발간됐다는 면에서 「민주광장」은 비합법 정기 간행물의 효시라 할 수 있다. 경찰은 시위에서 학생들을 잡기만 하면 너 「민주광장」 기자지? 하고 추궁했으나 끝내 「민주광장」 발간팀을 밝혀내지 못했다. 여기서는 민주광장팀이 전원 여성으로 구성됐었다는 점만을 밝혀둔다.
83년 5월에는 서울사대의 한 1학년 여학생이 학내에서 짭새에게 강간을 당하는 비극적인 사태가 일어났다. 5공이 시위 예방, 진압을 위해 삼청교육대 출신 깡패들을 학원에 상주하게 함으로써 빚어진 비극이었다. 당시 김모 기자는 진상을 취재하기 위해 여학생의 집으로 찾아갔었으나 여학생의 부모가 아이의 장래를 위해 제발 보도하지 말아달라며 눈물로 호소하는 통에 되돌아 나올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5월 2일에서 5일까지 진행된 고려대 대동제는 대학축제문화가 변화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동안 진행된 서클, 학회 작업의 성과라 할 수 있지만 수천명의 학생들이 대운동장에 모여 해방가, 농민가 등의 운동가요에 맞춰 해방춤, 농민춤 등을 추는 통에 현장에 나와 있던 학생처장도 어이가 없어 말을 잇지 못 할 지경이었다. 대동제 마지막날인 5월 5일에는 고려대생들은 제기동, 청량리 일대에서 격렬한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때부터 고대생들은 가두로 나갈 때는 신주머니에 돌을 담아들고 다니는 버릇이 생겼다고 한다.
고공전 최고 기록을 수립하다
5월 18일 고대 시위에서는 가슴 아픈 광경이 벌어졌다. 이날 시위의 주동자들은 붉은 스프레이로 티셔츠의 가슴과 등에 광주학살 책임지라는 구호를 적어 넣었는데 짭새들이 달려들어 옷을 찢어 버리는 바람에 주동자중의 한사람인 임현주씨(정외과 80학번)가 브래지어 바람으로 끌려갔던 것이다.
여학생들의 이러한 수난에 대한 학생들의 대응은 성대 5월 23일 시위에서 나타났다. 이 날 시위에서는 사상 최초로 주동자 6명 전원이 여학생으로 구성되었던 것이다. 고미경(생활미술학과 80학번), 오경희(가정대 80학번), 조갑덕(철학과 80학번), 김희순(사학과 80학번), 원유미(의상학과 80학번) 등 6명의 여학생들이 도서관 옥상에서 가정대 건물에서 그리고 지상에서 차례차례 나타나 시위를 이끌자 학생들은 물론 진압경찰까지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이날 시위는 우연의 소산이 아니었다. 그간 학생운동권 내에서는 남학생에 비해 소수인데다 민감한 감수성을 가진 여학생들이 조직에 적응하지 못하고 탈락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이러한 운동경험을 평가하면서 성대에서는 여학생들만의 독자조직을 통해 학생활동가들을 길러내는 작업을 3년간 해온 결과 여학생들만으로 시위를 조직하기에 이른 것이다. 지금도 성대에서 벌어지는 시위에서는 스크럼 대열의 반을 여학생이 차지하는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
이 무렵 학생운동권에는 각 대학의 특징을 장난스럽게 풍자한 별명들이 나돌았다. 서울대는 기회주의적 소셜리스트(사회주의자)이고 연대는 리버럴리스트(자유주의자), 고대는 내셔널리스트(민족주의자)라는 것인데 성대는 테러리스트라고 불렸다. 성대가 이러한 애칭을 얻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선 각 시위에 대한 성대의 엄청난 물량투입(?) 때문이었다. 성대는 시위시간을 늘리기 위한 궁리 끝에 83년부터 인해전술을 사용하기로 했던 것이다. 당시 한 시위의 주동자수는 보통 3~4명 수준이었는데 3.22 시위에 9명을 투입한 성대는 5.25 시위에는 10명의 주동자가 시위를 이끈다. 진압경찰로서도 도무지 정신이 사나워 주동자들을 잡을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그날 시위에서 잡히지 않고 도망친 주동자들이 다음날도 계속 나타나 시위를 벌이는 바람에 5월 23일 시작된 성대 시위는 무려 닷새간 계속된다.
5.25 시위에서는 80년대 학생운동 사상 고공전 최고 기록이 수립됐다. 그 장본인은 손정진씨(산업심리학과 80학번, 현 이상수의원 비서관). 그는 성대 교수회관 뒷편에 있는 6~7층 높이의 굴뚝에 올라가 무려 1시간 30분을 버틴것이다. 손씨가 굴뚝에 올라가 구호를 외치자 교수회관 뒷담에 붙은 주택가에서는 아줌마, 아이들 심지어 개까지 나와서 구경을 했다. 그런데 메가폰을 갖고 먼저 올라 가기로 했던 후배가 짭새들에게 잡혀가는 바람에 손씨는 육성으로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굴뚝이 워낙 높아 이 소리가 잘 안들렸던지 멀리서 그를 본 학생들은 나쁜 놈, 굴뚝 위에까지 올라가 진압 지휘를 한다며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손씨가 뛰어내릴 것을 우려해 굴뚝위로 따라 올라갈 엄두를 못낸 경찰들은 어느 교수를 동원했다. 이 교수는 굴뚝밑에 오자마자 가장 아끼는 제자인 듯이 현수야 하며 애절하게 불렀다. 아닙니다. 정진인데요. 아뭏든 내려와라. 결국 손씨는 민방위훈련할 때 쓰는 자루를 타고 내려왔다. 하도 목이 말라서 가지고 올라온 우유를 마셨는데 그것이 상한 것이었다.
테러리스트라는 별명의 진면목
이날 시위의 주동자중의 하나인 최아무개(국문학과 80학번)는 테러리스트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이날 오후 최군은 가두시위 예정장소로 가기 위해 미아리 고개를 넘어가던 중이었다. 그런데 우연히도 길 건너편에 의 애인이 지나가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얼굴이나 한번 더 보려고 후다닥 길을 건너는 순간 최군의 등에 멘 쌕에 꽂혀있던 식칼이 근처에 있던 방범대원의 눈에 띄었다. 강도(?)를 잡으러 방범대원의 쫓아 오자 당황한 최군은 순간적으로 칼을 꺼내 방범대원을 위협하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강도야 하는 외침에 주변의 시민 수십명이 그를 쫓기 시작해 끝내 강도(?)는 시민들에게 체포되었다.
성대 3.22팀과 5.25팀은 재판과정에서도 법정투쟁의 새로운 전형을 창출했다. 검사에게 개새끼라고 욕설을 퍼붓는가 하면 신발을 벗어 판사에게 던지는 등 법정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5공의 존재를 단 한치도 인정할 수 없다는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흔히 운동권 학생들은 데모하느라 공부를 안한다고 지탄을 받는데 이것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 얘기다. 그들은 학기 중에는 시위하느라 수업을 빼먹기 일쑤였지만 일단 방학을 하면 합숙을 해가며 열심히 공부를 하곤 했다. 하여간 이들의 시험답안지는 장황하기는 해도 정답은 없는 것들이었는데 이에 짜증이 난 홍성찬 교수(연세대 경제학)는 시험감독으로 들어올 때마다 학생들에게 답안지에다 성명서 쓰지 말아요 하며 신신당부를 하곤 했다.
83년 7월경 춘천교도소에서는 재소자 구타와 부식 개선 문제로 구속 학생들이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이를 말리는 과정에서 한 교도관이 강원대 성조기 사건으로 구속된 송민석씨에게 빨갱이 새끼라고 욕을 했다. 이에 송씨는 검사도 법정에서 나더러 저항적 민족주의자라고 했는데 왜 빨갱이 새끼라 하느냐며 욕한 교도관을 모욕죄로 고소하겠다고 변호사를 불렀다. 당황한 교도소측은 부식 문제 등 제반의 처우개선 문제에 대한 해결을 약속하고 욕한 교도관도 송씨에게 사과를 했다.
그런데 이날 밤 학생들이 들어있는 감방의 식구통(감방에서 밥이 들어도는 구멍)문이 슬며시 열리더니 영계백숙이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학생들의 단체행동을 무마하려는 교도소측의 미소 작전이었다. 학생들은 이것을 먹느냐 마느냐로 입씨름을 했고 이통에 영계백숙은 다 식어 버렸다. 결국 다음날 아침 따뜻하게 데워서 영양보충도 하고 다른 방 재소자들에게도 나눠주기로 하고 모두들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뜬 우원석씨(연대 토목공학과 76학번)는 영계백숙이 사라져 버린 것을 발견했다. 성미급한 몇 명의 겸연쩍은 미소와 함께.
가장 온순한 친구의 죽음
83년 8월 14일에는 이 해 봄에 시위예비음모 혐의로 중부경찰서에 연행돼 바로 강제징집된 최온순씨가 목숨을 잃게 된다. 이 사건은 그와 같이 강집돼 같은 부대에 있던 최석민씨가 보안대의 감시를 피해 우리 주위에서 가장 온순한 친구가 하늘의 별이 됐다는 은유적 편지를 모교인 동국대로 보내옴으로써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의 사인은 최씨의 형인 최문순씨가 동생의 시체 앞에서 일주일을 버틴 끝에 정밀검사를 거쳐 타살임이 확인됐다. 이에 대해 부대측은 같이 근무하던 사람과 싸움 끝에 그가 쏜 총에 맞았다고 발표했지만 현재까지도 살인자가 누구인지를 밝히지 못하고 있다. 최온순씨처럼 강집당한 후 목숨을 잃은 젊은이는 6명에 달하고 있다.
83년 2학기 싸움을 연것은 연·고대였다. 당시 연·고대 학교당국은 83년 연고전을 일방적으로 최소했다. 물론 이것은 연고전 후 벌어질 가두시위를 막기 위한 조치였다. 연고전이 무산된 것과 시위 기회를 잃게된데 격분한 연·고대 학생들은 각기 격렬한 시위끝에 철야 농성에 들어갔다. 철야농성의 열기는 드높았지만 학생운동 지도부로서는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실로 80년 5월 이후 최초의 철야농성이 진행된다는 기쁨도 컸지만 5공의 잔악성을 잘 아는 그들로서는 밀폐된 공간에서 하는 농성의 위험성이 뼈저리게 느껴졌던 것이다.
9월 중반부터는 서울 시내 거의 모든 대학에서 시위가 계속됐다. 이러한 여세를 몰아 9월 30일 종로-명동-신촌의 코스로 진행된 연합가두시위는 역사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즉 학림조직이 깨진 후 학생운동은 학교간의 연대조직을 가지지 못했고 그것을 기피하는 분위기도 있었는데 이날의 시위는 그동안 내밀하게 진행돼온 서울대, 연대, 고대, 성대의 연계조직에 의해 지도된 최초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날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이 창립식을 가진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비공개 연계조직은 이 시위 후에도 정보기관에 포착되지 않음으로써 지속적으로 활동해 나가게 된다.
이 무렵 지방에서의 사정도 서울과 비슷했다. 10월 5일 부산대 시위에서는 경찰이 나무 위에 올라가 시위를 주도하던 하근씨(경제학과 80학번, 현 마산일꾼노동문제연구원 상담원)에게 마취총을 쏘아 연행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하씨가 도서관앞 나무 위에 올라가 에프킬라를 뿜어 이에 라이터로 불을 붙이며 오랫동안 저항하자 수군수군하던 경찰은 경찰서로 달려가 마취총을 가져다 하씨에게 쏜 것이다. 이 나무는 현재 부산대 교정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이 사건 후 학교측이 나무를 잘라버렸기 때문이다.
11월 8일에는 서울대 도서관 난간에서 시위를 주도하던 황정하씨(도시공학과 80학번)가 떨어져 숨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키가 크고 남자답게 잘 생겼으며 시위 때면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돌도 제일 큰것을 던지곤 했다는 황정하씨. 그의 사인에 대해서는 실족사다 혹은 경찰이 밀었다 라는 등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얼마 전 이수성 교수(서울대 형법학)는 그런 경우도 사실상 살인으로 봐야한다는 해석을 발표한 일이 있다. 즉 접근하면 뛰어내리겠다고 하는데도 경찰이 접근해 시위자를 죽음으로 몰고간 것도 살인으로 봐야한다는 것이다.
11월 10일 서강대에는 홍길순이 출현했다. 그의 본명은 김젬마(사학과 80학번). 김씨는 11월 10일 신촌로타리 가두시위를 주동한 뒤 피신해서 다음날 학내에 들어와 식당에서 다시 시위를 주동한 후 유유히 사라졌다. 경찰이 신경을 곤두세울만도 한 것이 11월 12일은 레이건 당시 미대통령의 방한일이었던 것이다. 세번째 날에도 학내에 들어온 김젬마씨는 끝내 홍길순 이란 별명을 얻었다. 그가 홍길순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서강대 뒷편 노고산 쪽의 학교 철조망에 나 있는 개구멍 덕분이었다. 이 개구멍은 노고산 기슭의 달동네에서 자취를 하는 경제적인 서강대생들이 학교를 빙 둘러 등교하기가 귀찮아 무허가로 뚫어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심재철과 김재철
11월 11일에는 레이건 방한 반대를 이슈로 83년 최대의 연합가두시위가 전개됐다. 이것 역시 학교간 연계조직에 의해 지도되었는데 여기에서는 새로운 가두시위 주동전술이 선보이게 된다. 즉 오동렬씨(서울대 철학과 80학번)와 윤철호씨(같음) 등 이 시위의 주동자들은 가두에서 어떻게 시위의 신호탄을 터뜨릴까를 고민하다가 시내버스를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즉 두 사람이 시내버스를 타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로 2가 종로서적 앞에서 대기한다. 이윽고 버스가 종로서적 앞을 지나갈 때 오동렬씨가 갑자기 버스 유리창을 때려부셨다. 그러자 놀란 운전기사가 버스를 세웠는데 앞뒤로 차가 연달아 서는 바람에 길이 꽉 막혀 버렸다. 이 순간 환기통으로 줄을 내려 그것을 잡고 버스 지붕 위로 올라간 오동렬씨는 유인물을 뿌리며 크게 외쳤다. 레이건 방한 반대한다!
83년 12월 22일 131명의 구속학생들이 석방됐다. 아울러 학내 주둔 경찰들이 철수했고 제적학생들을 복교시키겠다고 발표됐다. 소위 ‘자율화 조치’가 취해진 것이다. 대부분의 학생운동권에 있어서 이 조치는 전혀 예상 밖의 일이었다. 그러나 학교 밖의 일부 학생운동 출신자들 사이에서는 복학문제가 조만간 대두될 것을 예상하고 이에 대한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83년 10월 9일 서울대 78학번 모임에서는 류시민, 최민, 윤성구씨 등 3인으로 복학대책위원회를 구성, 복학문제를 바라보는 입장을 정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84년 1월 한달 동안 각 대학에서 복교대책위원회(이하 복대위)가 발빠르게 구성될 수 있었던 것은 사전에 이같은 준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12.22 조치를 통해 민주정부가 된 양 뽐내고 싶었던 5공은 제적생들이 복대위를 만들어 복학 이전에 진정한 사회민주화를 요구하자 당황하기 시작했다. 특히 곤란한 입장에 처한 것은 보안사였다. 복대위에서 설치고 있는 류시민, 김찬씨 등은 보안사에서의 녹화사업 결과 순화 완료된 자들로 보고돼 있었기 때문이다. 84년 2월초 수사기관의 추적을 피해다니다 잠깐 누나집에 들렀던 류시민씨는 시민아, 재철이다 하며 누나가 넘겨주는 수화기를 받아들었다. 그러나 전화의 주인공은 심재철(80년 서울대 총학생회장)이 아니라 보안사 수사관 김재철이었다. 결국 차에 실려 보안사령부까지 가게된 류시민씨는 그곳에서 대령진급을 눈앞에 두고 있던 서의남 중령(녹화사업의 발안자이자 실무 책임자)으로부터 간곡한 당부말씀(?)을 듣게 된다. 제발 앞에서 날뛰지만 말라는.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진급을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복대위 싸움은 3월경에 거의 마무리되었는데 복학자 수를 최대한 줄여 기만적 자율화 조치를 무색하게 한 성과를 냈다. 또한 이 모임들을 통해 최초로 조직적인 노동현장으로의 투신이 이루어졌다는 것도 특기할 만하다.
김향춘 사건과 가짜 의사
짭새가 철수하고 자율화 된 84년의 각 대학에서는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가 속속 결성되기 시작했다.
3월 29일 연세대 도서관 앞에서 학원민주화추진위원회(이하 학민추)를 결성한 학생들은 총장관저를 향해 행진을 시작했다. 대열이 대강당 앞을 지날 무렵 벤취에 앉아 학생들의 행진을 촬영하고 있는 사람이 눈에 띄었다. 학원에서 경찰철수라는 정부발표가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흥분한 학생들은 그를 끌고 도서관으로 돌아왔다. 정체를 밝히라는 추궁(사실 학민추 지도부는 그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정용준이라는 이름의 안기부의 연세대 담당 요원으로서 그동안 문제학생(?)들을 계속 사찰해오고 있었던 것이다)에 그는 기자라 발뺌했다. 학생들은 진상을 밝히기 위해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농성이 자정을 넘기면서 긴장감이 풀어질 무렵 갑자기 도서관 안에 이만기 장사를 연상시키는 거구의 사나이 5명이 들이닥쳐 학생들 가운데 앉아 있던 정용준씨를 빼내 도망쳤다. 순간 졸고 있던 학생들 중 1백여명이 벌떡 일어나 잡아라 하고 소리치며 그들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결국 1백여미터 정도의 추격전끝에 학생들은 정용준과 안기부 특공대들을 모두 체포해왔다. 날이 샌 후 학민추는 학교 당국과 몇가지 합의를 본 후 이들을 풀어줄 수밖에 없었는데 그들을 구타하거나 고문할 수도 없는 학생들로서는 결정적인 증거물을 확보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4월 4일 서강대에서 벌어진 김향춘사건은 이와는 달랐다. 서강대 학자추 집회를 인근 대흥동 동사무소 3층에서 촬영하고 있던 마포서 정보과 형사 김향춘씨를 5명의 체포조가 동사무소 2층 중대본부 사무실 캐비넷 안에서 체포해오면서 사건은 시작됐다. 그는 망원렌즈가 달린 시가 5백만원짜리 카메라를 들고 있었는데 필름을 꺼내 현상해 보니 수십장의 학자추 집회사진이 나왔다. 그런데 현장에 나와있던 모교수가 이 사람이 몹시 아픈 것 같으니 의사를 부르자고 했다. 김형사는 맹장수술을 받은 지 열흘밖에 안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의사가 왔는데 급히 병원에 입원시켜야 겠다는 진단이어서 학생들은 그를 새벽 1시에 내보낸다. 그러나 후에 이 의사가 가짜였음이 밝혀지는데 그는 서울시경의 간부였다고 한다. 하여간 이 두사건을 통해 학원사찰중지라는 발표가 말로만 이었음이 분명해진 셈이다.
5공이 자율화 조치라는 카드를 내민 속셈에 대해 여러가지 해석이 엇갈리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80년 서울의 봄의 경험을 살려 각학교에서는 각종 대중집회와 시위들이 계속되고 있었다. 2천여명이 운집해 3일간의 철야농성을 마감한 서울대 학자추 4월 12일 집회에서는 아크로폴리스의 장미꽃이 뽑혀지고 도서관의 철책이 잘라내졌다. 김태훈, 황정하씨 등 민주열사 추모비 건립을 위한 모금에서는 즉석에서 60여만원의 성금이 거둬지기도 했다. 집회가 마무리될 무렵 갑자기 한 사람이 도서관 6층 창문에서 밧줄을 타고 5층 난간으로 내려서며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물론 짭새들이 잡으러 뛰어오지는 않았다. 윤호중씨(철학과 81학번 당시 학자추 언론분과 위원장)가 벌인 이 깜짝쇼 는 경찰이 철수한 후 다소 해이해지고 있는 학생대중들의 분위기에 긴장감을 주려는 의미도 있었고 아울러 황정하 열사가 숨져간 바로 그 자리에서 사회민주화없이 학원민주화없다는 민주화투쟁선언을 선포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5월 25일 서울대, 고대 등에 의해 가리봉 5거리, 부천역 등지에서 이루어진 가두시위는 학생운동 최초의 민중지원투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전과는 달리 이날 시위에서는 노동3권 보장등 노동운동을 지원하는 구호들이 외쳐졌다. 예상치 못한 지역에서의 가두시위 였던지라 가리봉 5거리의 경우 시위대가 20여분간 거리를 휩쓸고 다닌 후에야 경찰이 출동할 정도였다. 이 시위 이후 학생운동에는 노학연대라는 개념이 생겨나게 된다.
일본공보원과 5분카레
8월에는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방일 일정이 발표됐다. 한반도 지배전략에 있어서 미국과 일본의 역할분담론 등에 대한 인식이 깊어져 가고 있던 학생운동권은 각종 방일 반대 시위를 벌였다.
8월 29일 정오 무렵 3백여명의 학생들이 정독도서관 근처 골목길에서 와 하는 함성과 함께 일시에 튀어나왔다. 약 3백미터 가량 떨어진 일본공보관 앞까지 쏜살같이 달려간 이들은 호주머니에서 꺼낸 돌을 일본공보관에 우박처럼 퍼부은 후 순식간에 흩어져 달아났다. 소요시간 약 5분. 그래서 이 작전은 5분카레 라 불리고 있다.
9월 21일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는 4년만에 부활되는 총학생회장 선거유세가 진행되고 있었다. 학교당국은 마이크의 전원을 꺼버림으로써 유세를 중단시키려 했다. 학생들이 마이크 코드를 보건진료소로 옮겨 꽂았으나 그곳도 전원이 끊겼고 다시 우체국에 갖다 꽂고하는 광경을 학생회관 3층 복학생협의회 사무실에서 내려다 보고 있던 문용식씨(국사학과 79학번)는 급히 플래카드를 만들었다. 다시 전원이 끊긴 순간 문용식씨를 비롯한 수명의 복학생들이 플래카드를 높이 들고 아크로폴리스로 내려왔다. 거기에는 전기를 쟁취하자 라고 씌어 있었다. 이 구호가 큰 호응을 얻어 순식간에 학생들은 전기를 쟁취하러 물밀듯이 본부로 들어가 총장실까지 몰려갔다. 결국 당시의 이현재 총장이 아크로폴리스로 나왔다. 그는 학생들에게 전원을 끊은데 대해 유감(그 무렵 방일한 전대통령에게 히로히또 천황이 과거사는 유감이었다고 했다해서 국민들의 분노를 사고 있던 단어임)이라 했다가 야유를 받기는 했지만 전기는 쟁취되었다.
그런데 9월 17일부터 26일 사이 서울대에서는 4명의 학원 프락치들이 연달아 적발됐다. 그런데 9월 26일 적발된 전기동씨의 경우는 구면의 프락치라 특히 학생들의 분노를 샀다. 그는 이미 1학기때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다 사회대 학생들에게 잡혀 추궁을 당했었다. 그런데 그때 몰려든 학생들 속에서 한사람이 유독 흥분하며 이 나쁜 놈, 혼이 나야 돼 나좀 보자 하며 그를 끌고 나가더니 둘이 같이 도망쳐버렸던 것이다. 그가 또다시 잡히자 그때 어이없이 그를 놓쳤던 학생들 중에서 성질 급한 몇명이 달려들어 전기동씨를 두들겨 팼다. 공안당국은 이 사건을 이용해 서울대 총학생회 간부들을 대거 구속, 수배한다. 이들 중 최후로 구속된 조원봉씨(국사학과 77학번 당시 복학생)는 인천에 있는 목재회사에 위장취업, 연말 상여금 쟁취투쟁을 하다가 85년 12월 24일에 검거됐다. 인천경찰서로서는 잡고보니 조원봉이라 2명이 1계급 특진을 하는 행운(?)을 누렸었는데 그가 법정에서 밝힌 프락치 구타행위에 대한 학설이 흥미롭다.
학생들이 프락치를 때린 데 대해서는 2가지 설이 있습니다. 순간적인 과잉반응이라는 설과 응징설이 그것입니다. 어느 것이 맞는 지는 운동권에서 판단할 일이지 법정에서 가릴 일이 아닙니다. 저는 학생들이 감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프락치를 응징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사건으로 서울대는 10월로 접어들면서 학원수호투쟁으로 들어가 중간고사를 거부했고 결시율이 85%에 달하는 등 대중의 호응도 컸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율화조치 이후 처음으로 약 7천명의 병력이 서울대에 투입됐다.
민정당사 농성에서의 생존자
그러나 운동권 일각에서는 학원수호투쟁이 아닌 청계피복노조 지원투쟁이 당면과제라는 비판이 일기 시작했다. 즉 서울대가 학원민주화투쟁에 빠져 사회적 문제에 대한 대응을 게을리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이러한 입장을 가진 쪽에서는 10월 12일 있었던 청계피복노조 합법성 쟁취대회에 열성적으로 참여해 고가도로를 점거하고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다 전원이 연행되기도 했다. 학생운동의 주요한 임무가 어디에 있는가를 둘러싼 이러한 견해 차이는 투쟁전술을 둘러싸고도 생겨났다. 즉 9월 28일의 민한당사 점거농성을 투쟁이 아니라 투정 이라 평가한 세력(이들은 당시 깃발 이란 비합법 유인물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었기 때문에 깃발팀이라 불렸다)은 투쟁이란 본래 이런 것이다는 점을 보여주려는 준비를 해나가기 시작했다.
11월 2일부터 연대에서 시작된 연합집회는 철야농성을 통해 6일까지 계속됐다. 경찰이 이 집회를 봉쇄할 것이 예상됐기 때문에 연대 총학생회는 연세대로 들어올 수 있는 모든 개구멍을 상세히 그려 각 대학에 전달했다. 11월 2일부터 3일 사이에 전국 42개 대학의 참가학생들이 50~100명 단위로 속속 개구멍으로 입장했다. 11월 3일에는 전국 42개 대학을 망라한 전국학생대표기구회의가 결성됐고 5일에는 선도적인 투쟁을 담당할 ‘민주화투쟁전국학생연합’(이하 민투학련)이 발족했다.
11월 14일 깃발팀이 준비해오던 선도투쟁이 모습을 나타냈다. 민투학련 지도하에 연대, 고대, 성대 264명의 학생들이 민정당사를 점거한 것이다. 공식적인 점거학생수는 264명이지만(이후 전원 연행) 실제로는 265명이다. 길을 잘못 들어 지하실로 내려간 김성택씨(연대 경제학과 83학번)는 혼자서 보일러실을 점거(숨어서)하고 있다가 인부들의 도움으로 퇴근하는 그들 속에 섞여 탈출했던 것이다.
당대표와의 면담을 요구하며 완강하게 저항하는 학생들을 벽에 드릴로 구멍을 뚫고 들어가 강제로 연행한 이 사건은 2·12 총선을 앞두고 있던 민정당의 이미지에 적잖은 타격을 주었다. 동시에 총학생회 간부 등 운동권 학생들에 대한 검거선풍이 불기 시작했다. 이때 서울대, 연대, 고대의 총학생회장 3인은 합정동에서 함께 하숙을 하고 있었다. 고대 총학생회장 김영춘씨가 불심검문에서 연행되면서 나머지 2사람도 차례로 붙잡히게 되는데 총학생회장의 명예를 훼손하기 위해 안기부는 매우 치사한 짓을 했다. 연행된 송영길씨(연세대 총학생회장)가 친구 형의 주민등록증에 자신의 사진을 붙여 위조한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있었는데 안기부는 송영길씨를 절도죄로 구속했던 것이다. 송씨로서는 친구가 주민등록증을 건네주었다고 진술할 수도 없는 형편이라 본인 몰래 집어왔다고 우겼는데 안기부는 이 점을 이용했던 것이다.
서울대에는 무서운 사람으로 통하는 인물이 하나 있다. 문교부 지도위원이라는 직책으로 서울대에만 30년을 근무하고 있는 임선웅씨가 그 사람이다. 임씨는 학생운동권에서 발간하는 합법, 비합법 유인물의 수집가로도 유명한데 종종 세월의 좋아지면 학생운동사를 써보겠노라는 포부(?)를 밝히기도 한다. 하여간 그는 학생운동 지도부들과 수시로 접촉하며 은근한 또는 예리한 질문들을 던지곤 해 수사기관에 보고하는 것을 자기업무로 하고 있다. 총선투쟁위원장 정현태씨(서울대 국어교육과 81학번)도 임선웅씨에게 걸려 혼이 났다. 깃발 3호 나왔다며? 하는 그의 질문에 무심코 아직 안나왔어요 했다가 연행된 뒤 깃발 2호까지는 확실히 본 학생이란 임씨의 보고 때문에 곤욕을 치렀던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정현태씨는 그로부터 반제의식을 배웠다고 했다. 나름대로의 상황평가도 곧잘하던 임씨는 84년말 깃발을 읽어보니 너희들 순빨갱이던데 이제 미국 대통령 선거도 끝났으니 너희들 이제 다 죽었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84년말부터 85년 초반까지 학생운동은 다 죽지는 않았지만 상당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국민은 2·12총선에서의 신민당 바람으로 이들의 투쟁에 응답했다.
시내버스 안에서의 카드섹션
2·12총선에서의 신민당 바람과 함께 열린 1985년은 학생운동이 새로운 전기를 맞는 해였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이는 당시 유행하던 가수 김범룡의 노래가사를 빌려 국민들의 반민정당 의식에 의해 반사이익을 얻은 신민당을 비꼬기도 했다. 그대 이름은 바람 바람 바람, 왔다가 사라지는 바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2·12 총선에서 신당바람을 만들어낸 국민들의 열기는 80년 이후 5년간 계속된 5공의 암흑에 대한 분명한 거부의 몸짓이었다. 이후 이 몸짓은 각계각층의 조직적 움직임으로 확산된다. 지금은 중산층 아파트단지로 변해버린 목동의 철거민들은 이 작은 몸뚱이 하나 마음 편히 둘 곳이 이 조선 천지에 없는겨? 라고 절규하며 철거반대투쟁을 벌였고 경동산업, 성원제강, 동일제강 등의 노동자들은 노조결성을 위해 활발히 움직였다.
이무렵 벌어진 2천여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파업은 학생운동가들의 가슴속에 역사의 주체로서의 노동자들의 힘찬 모습을 깊이 깊이 아로새겼다. 특히 위장취업이라는 단어를 우리사회에 등장시킨 학생운동 출신의 대우자동차 노동자 송경평, 박재석씨 등의 모습은 한국사회에서 지식인의 역할과 임무를 다시 확인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송경평, 박재석씨 등이 자신들의 투쟁에 대해 광주항쟁 당시 광주 시민들의 투쟁에 동참하지도, 서울에서 지원하지도 못하고 자신의 생존만을 도모했던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이 그 후 노동운동을 굳세게 전개해야겠다는 결의로 변해 가슴 깊은 곳에 자리 잡았다고 회고하는 것을 볼 때 민주화의 흐름은 5공의 빙벽 밑으로도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4월 17일 고려대에서 23개대 2천여명의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전국학생총연합(이하 전학련)이 발족했다. 그런데 84년말에 결성됐던 전국학생대표기구회의와 비교할 때 전학련은 학생운동의 실질적인 전국적 연합기구였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전학련은 전국을 4개 지역으로 나눈 지역별 학생연합과 서울을 4개 지구로 나눈 지구별 평의회를 구성하는 등 짜임새있는 연대틀을 갖춰나갔기 때문이다. 또한 전학련 산하에는 ‘민족통일 민주쟁취 민중해방을 위한 투쟁위원회’를 두었는데, 수사당국과 언론이 미문화원 점거농성의 배후에 삼민투가 있다고 몰아 붙임으로써 삼민투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다.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미국방문에 대한 규탄시위가 계속되고 있을 무렵 수천명의 학생들은 4·19를 맞아 전학련 주최의 4월혁명 25돌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수유리 4·19묘소로 향했다. 이를 위해 각 대학의 총학생회는 학교버스와 관광버스를 준비했는데 학생들이 쇄도해 좌석이 모자라자 일부 학생들은 시내버스를 이용하게 됐다. 그런데 서울대 앞에서 시내버스에 오른 한 무리의 학생들은 버스를 타고 가며 카드섹션을 벌여 시민들의 눈길을 끌었다. 이들은 ‘매/국/방/미/반/대/예/속/정/권/타/도’라 쓰인 12장의 종이를 버스 유리창에 붙였다가 제일 앞에 앉은 망보기 학생이 새다(=짭새다) 하고 소리치면 일제히 떼고 조금 가다가 다시 붙이곤 하는 기동력을 발휘하며 수유리까지 달려갔던 것이다.
4월 23일 고려대생들이 한미은행 천호동 지점에 돌을 던진 것도 드높아가던 반미의식의 소산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생겨나고 있던 한미은행은 미국계 은행이라 해서 눈총을 받고 있었는데 대학생들의 투석사건 후 은행원 가운데 몇 사람이 그만두기도 했다고 한다. 동족으로부터 돌팔매질을 당하는 곳에서 일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는게 그 이유였다.
전두환과 대머리는 동의어인가
5월 들어 전국의 각 대학에서는 전학련의 지도 아래 광주싸움이 전개된다. 그런데 5월 14일 연세대에서 있었던 전학련 제3차 보고대회에서는 하늘조차 전학련을 지지한다는 사실이 입증(?)된 사건이 일어났다.
대회는 식순에 따라 광주항쟁 진상보고, 미국에 대한 공개사과 요구, 광주학살 5적 화형식에 이어 5월민주화투쟁선언을 체택하는 것으로 마쳐졌다. 이후 학생들은 교문으로 진출, 경찰과 치열한 투석전을 벌였다. 그런데 이날따라 바람이 경찰쪽에서 학생들 쪽으로 불어대는통에(학생들은 이렇게 부는 바람을 파쇼바람이라 부른다) 학생들은 눈물, 콧물을 쏟으며 악전고투를 하고 있었다. 제갈공명이라도 불러 기도를 해야할까보다고 몇몇이 투덜대고 있을 때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했다. 학생들 쪽에서 경찰쪽으로 강풍이 불어 최류탄을 쏴도 가스가 모두 경찰쪽으로 몰려가게 된 것이다. 이 순간 민주바람이다 하는 함성을 터뜨리며 교문앞으로 달려나간 학생들은 칼 없는 장수 꼴이 된 경찰들에게 돌멩이들을 우박같이 퍼부었다.
광주항쟁 5주년을 맞는 5월 17일에는 전국 80여 대학에서 광주학살을 규탄하는 시위가 있었다. 이날 아침 고려대 총학생회 기획부장 최우영씨는 성북서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고대 총학생회는 이날 광주민중항쟁 5주년 기념식을 갖고 광주학살 5적에 대한 화형식을 거행할 예정이었는데 이를 미리 알아챈 성북서측이 전화로 당부의 말씀(?)을 전해온 것이다. 내용인즉 정호용이든 박준병이든 글라이스틴이든 다 좋은데 각하만은 빼달라. 안 빼주면 밀고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알았다고 대답한 최씨는 한 허수아비에 전두환 대신 대머리라고 써붙여서 화형에 처했다. 이를 약속위반이라 봤던지 성북서측은 집회가 열리고 있던 학생회관 앞에 최류탄을 난사해 부상자가 속출했다. 이에 분노한 고대생들은 이후 3시간에 걸쳐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날 서울대 정문 앞에서는 두명의 관악서 형사들이 울며 서있었다. 그들을 울린 사람은 당시 전학련 의장이자 서울대 총학생회장이던 김민석씨. 4월 4일 총학생회장에 취임한 후 걸핏하면 각종 수사기관에 연행돼 보호(?)를 받아야 했던 김씨는 5월 7일에도 또 다시 학교앞에서 연행돼 별다른 죄명도 없이 관악서 유치장에서 일주일동안 구류를 살았다. 광주항쟁기간을 무사히 넘기려는 관악서측의 애타는 노력(?)이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김씨가 구류를 다 산것은 5월 15일. 광주항쟁 기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할 수 없이 그들은 멀쩡한 김민석씨를 서울대 병원에 입원을 시켰다. 김씨는 나가기를 포기한 척하고 감시 형사 두사람과 장난도 치고 태평스럽게 낮잠도 잤다. 입원실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돼있는 병원규칙에 따라 몇차례 입원실 밖의 복도에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가도 꼬박꼬박 돌아오곤 해 그들의 신임(?)을 얻었다. 이래서 형사들의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또다시 담배를 피우려는 듯이 입원실 밖으로 나온 김씨는 무조건 계단을 뛰어내려와 서울의대 쪽을 향해 줄행랑을 쳤다. 선거유세때 낯을 익혀, 환자복을 입은 김씨를 용케 알아본 의대학생들의 도움으로 옷을 갈아 입고 관악캠퍼스에 무사히 잠입한 김씨가 총학생회실에서 한숨을 돌리고 있을 때 관악서 정보과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치사하게 그럴수가 있냐, 나오라는 것이었다. 잠시후에는 김민석씨의 부모까지 학교로 찾아와 너를 지키던 형사들이 엉엉 울고 있더라. 그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냐. 불쌍하니까 나가자며 김씨를 잡아끌었다. 김민석씨는 이 때를 회고하며 철들고 나서 사람 울린 것은 처음 이라며 굉장히 미안했다고 말했다.
미문화원을 지켜보는 눈동자들
5월 17일경부터 롯데호텔 전망대에는 미문화원쪽을 지켜보는 눈동자들이 있었다. 미문화원 점거농성을 위한 준비가 시작된 것이다. 삼민투가 점거농성장소로 미문화원을 선택한 것은 순전히 대사관보다 점거하기가 쉬울 것이라는 판단때문이었다. 이후에는 미대사관 담을 뛰어넘는 일도 생겼지만 당시만 해도 대사관에 뛰어들어 갔다가는 총맞아 죽는다고들 생각했었던 것이다. 그래서 상징성은 좀 떨어지지만 미문화원을 선택하게 된 것인데 오히려 농성이 진행되는 동안 제도언론에 의해 미문화원이 실질적으로 대사관의 임무를 수행하는 곳임이 확인되게 된다. 미문화원장이 바로 미대사관 대변인일 정도였다.
5월 22일 11시 40분 양복을 입거나 혹은 양복이 없어서 입던 옷을 깨끗이 빨아 입은 일단의 학생들이 주머니에 건전지와 박카스병을 넣고 미문화원 맞은 편인 롯데호텔 근처에 서서히 모여들었다. 그런데 전날까지와는 달리 미문화원 부근에 삼엄한 경계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계획이 샌 것으로 판단한 지도부는 점거를 포기하고 학교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날 저녁, 갑작스런 병력증강의 이유가 밝혀진다. 롯데호텔에서 외교사절들의 파티가 있었던 것이다. 결국 다음날 12시 5분 다시 롯데호텔 앞에 모여든 5개대 76명의 학생들은 미문화원 점거에 성공하게 된다.
미문화원 2층에 있는 도서관을 점거한 학생들은 유리창에 글씨를 쓴 종이를 붙이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외부에 전달했다. 열 수없게 밀폐셔시로 처리된 대형 유리창을 부수고 아래에 있는 기자들에게 육성으로 소리를 치는 것이 훨씬 편리했으나 정권측이 자신들을 폭도라 매도할 빌미를 주지않기 위해서 굳이 불편한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대사면담을 요구하는 학생들 앞에 오후 1시 50분경 라빈 미문화원장 겸 대사관 대변인과 던로프 정치 참사관이 나타났다. 이들과 수차례에 걸쳐 소위 대화를 한 함운경 서울대 광주투쟁위원장 등 대표학생들은 한결같이 이들이 시종 정중한 듯 하면서도 매우 교활하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즉 이들은 학생들이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측의 책임을 인정하고 공식사과할 것을 요구하는 데 대해 처음에는 광주에서 학살이 있었으며 이것은 비민주적이고 폭압적인 한국 정부의 책임이라는 등 당시로서는 국가보안법에 걸릴 만한 발언들을 계속하며 학생들의 분노에 동조하는 척 했다. 그러다가 미국의 책임 부분에 가서는 오히려 미국은 공수부대 대신 20사단을 보내 유혈참극을 방지했다는 식으로 시종 자신들의 책임을 변명했던 것이다.
연세대에 나타난 미대사관 1등서기관 엔글
미국측의 교활성은 사태를 끌어 나가는 자세에서도 드러난다. 애초에 미문화원 점거학생들은 점거 후 수시간 내에 경찰에 의해 강제진압당할 것으로 예상하고 음식물같은 것은 전혀 준비하지 않았었다. 당시 농성을 지도한 삼민투 위원 중의 한 사람이었던 박영군씨는 농성이 장기화될 것을 예상했다면 건전지나 돌멩이 대신 초콜릿이라도 사들고 들어갔을 것이라고 말했다. 농성 첫째날 학생들이 단식을 선언한 것은 이와 같은 전망 속에서였다.
그러나 24일로 접어들면서 농성이 장기화될것이 예상되었고 민통련에서는 학생들에게 제공할 음식물을 문화원측에 전달했다. 그러나 기자들에게 시종 농성을 대화로써 원만히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점잔을 뺀 미국측은 이 음식물조차 내주지 않고 학생들을 굶겼다. 나가면 내주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학생대표 가운데 신정훈씨(당시 고대 신방과 4년)가 미국인들은 음식물 가지고도 조건을 붙이는가? 한국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음식물에는 조건을 붙이지 않는다고 항의하기도 했다. 이처럼 학생들이 단식을 했다기 보다는 미국측이 학생들은 강제로 굶긴지 이틀이 넘어가자 약 일주일 간의 점거농성 준비과정에서 과로로 이미 피곤이 쌓여있던 학생들의 건강상태가 전반적으로 나빠지기 시작했다. 이때 현장을 취재하던 동아일보의 황모 기자는 미국측이 학생들에게 음식물을 주지 않은 것에 대해 한국 정부가 84년말 민정당 중앙당사를 점거 농성하던 학생들을 하루만에 폭력으로 끌어냈던 것에 비해 미국측의 단수가 높기는 높다. 음식물을 안 주고 굶기다가 구호차원에서 앰뷸런스를 대놓고 끌어 낼 계획인 것으로 안다고 했다.
한편 전학련과 삼민투 간부들이 모여 미문화원 점거농성 상황을 지켜보며 이후의 투쟁을 준비하고 있던 연세대 총학생회실에 5월 23일 저녁 요한슨이라는, 나이가 30여세 정도 돼보이는 미국인이 찾아 왔다. 외신기자라 생각하고 그를 만난 박선원씨(연세대 광주학살원흉처단투쟁위원장)에게 그는 나는 선교사이며 현재 연대 의대 본과 3학년에 재학중이다. 우리집은 3대째 선교사로서 한국에서 살고 있는데 광주사태 당시 나는 전남에 살고 있어서 잔인한 살상을 목격했다. 그래서 살상을 막아야 한다는 건의서를 들고 대사관을 찾아 갔었는데 대사관측은 민간인이 뭘 아냐?며 나의 요구를 묵살했다고 말했다. 이때 박선원씨 옆에 있던 학생이 그를 알아보았다. 그는 광주항쟁때 도청 안에서 시민군측 통역을 맡았던 인물로서 그 일로 뉴스위크지의 표지모델로 나왔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는 나는 그때 일로 출국 명령을 받았다. 겨우 사정을 해서 한국에 영주하게 됐다. 당시에도 기자들에게 보도하지 말라고 요청을 했는데 보도를 해버려 일이 그렇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기자를 믿지 않는다. 지금부터 하는 얘기를 결코 기자들에게 알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 박선원씨가 할 얘기가 뭔가라고 묻자 그는 이번 점거는 잘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평화적으로 해결을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또 살상이 일어난다. 내가 부대사를 만나게 해줄테니 대화를 해보라 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박선원씨는 우선 일의 성사 가능성 자체가 의심스럽다고 생각하고 알아서 해보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다음날 다시 찾아온 요한슨은 부대사는 어렵고 서기관으로 하자며 대사관으로 갈 수 있느냐고 물었다. 여전히 일이 성사될 수 있을지를 의심한 박씨는 내일 연대로 오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25일 저녁 8시 요한슨은 진짜로 대사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왔다는 1등 서기관 엔글과 역시 선교사이며 자신의 형이란 사람을 데리고 나타났던 것이다. 이래서 박선원, 김민선, 오수진씨(성대 총학생회장)가 학생회관 4층에 있는 기도실에서 이들과 대화(?)하게 됐다.
미국은 누구에게도 사과하지 않는다
이 자리에서도 역시 미국측은 광주학살에 대한 모든 책임을 한국의 독재권력에 미루려는 태도로 일관했다. 심지어 박선원씨가 위컴의 ‘들쥐발언’에 대해 사과하라고 하자 엔글은 미국은 지금까지 지구상의 어느 나라에 대해서도 사과해본 적이 없다며 이를 거부했다. 이에 오수진씨가 화를 벌컥내며 항의하자 엔글은 자신이 억류될 것으로 생각했던지 와들와들 떨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원경 외무장관이 워커는 개새끼다. 왜 경찰투입요청을 안하느냐? 투입하면 5분감도 안되는데라며 항의하고 있고 워커 대사가 이를 막느라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 줄 아는가라며 농성을 풀 것을 거듭 요구했다.
이에 세 대표가 미국이 공식사과하면 농성은 바로 푼다며 그렇지 않을 경우 반미운동은 당신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격화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떤 사태가 일어날 줄 짐작이 되느냐며 위협(?)하자 엔글은 사과는 죽어도 못한다며 요한슨의 형을 돌아보고 가자, 겁난다고 했다.
이때 요한슨의 형이라는 사람이 엔글을 제지하며 더 이야기 해보자면서 이후의 대화를 주도했는데 그 배포나 말하는 폼으로 미루어 박선원씨는 그가 CIA요원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고 했다. 이후 세 대표는 농성을 풀기를 원한다면 당신들이 먼저 한국의 독재정권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라고 요구했다. 뻔한 대답이 나오리라 생각하면서도 던져본 말이었다. 그런데 미국측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요한슨의 형은 한국에 정권이라고 있는게 전두환 정권밖에 없으니 만나는 것이지, 우리가 독재정권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나름대로의 애로사항(?)을 토로하는 것이었다. 이에 박선원씨가 그렇다면 돌아가서 함운경씨와 내가 통화할 수 있게 해달라. 그것은 사태를 빨리 해결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이때 전학련-삼민투는 농성을 장기화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한 학생에게 끝까지 투쟁하라 --- 전학련 삼민투라는 플래카드를 들려 미문화원 앞에 보낼 것을 검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던지 미국측은 가서 바로 전화를 개설해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연대를 떠났다. 게다가 요한슨의 형은 또 만나자. 끝까지 잡히지 말라는 말까지 남겼다. 그들이 돌아간 뒤 박선원씨 등은 혹시나 하고 전화 개설을 기대했으나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런데 3~4시간 후인 26일 0시 17분 미문화원 농성 학생들은 26일 정오에 농성을 풀겠다는 성명을 발표한다. 이들은 예상외로 장기화된 농성에서 미국측이 제공하는 일간신문들을 보며 농성진행방향을 스스로 판단할 수 밖에 없었다. 5월 28일부터 7년만에 재개되는 남북적십자회담에 북측대표들이 미문화원 점거농성때문에 오지 않으려 한다는 보도가 우선 농성을 계속하는데 가장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게다가 일간신문들은 북한방송이 점거농성학생들을 고무, 찬양하고 있다며 농성학생들을 좌경, 용공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무력진압하러 들어오는 경찰과 맞서 몸싸움을 벌일 경우 오로지 폭도로 매도되어 미문화원에 들어온 목적인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 이라는 문제는 국민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리지 않을까하는 우려도 컸다.
농성 도중인 25일 함운경씨가 기자들과의 일문일답을 통해 우리는 반미가 아니다 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아직 국민들이 반미=좌경=친북한이라는 도식에 젖어있는 상황에서 나온 이같은 발언을 미국측은 또 다르게 이용했다. 워커대사는 농성해제 직후에 가진 기자회견에서 학생들은 반미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것이 그와 미국의 희망사항이었음은 분명하지만 이후 학생운동의 전개과정은 미국이 한민족의 생존에 있어 가장 커다란 장애물임을 국민 앞에 분명히 드러내 놓았다.
파김치가된 성북서 전경들
미문화원 점거 사건으로 전학련-삼민투 지도부는 모두 공식 수배된다. 그리고 농성학생들의 성적표까지 공개해가며 그들을 매도하는 분위기 속에서 미문화원 점거농성투쟁의 성과를 확산시키기 위해 광주민중항쟁 및 군부독재에 대한 범국민자유토론대회가 6월 7일 서울대서 열리기로 예정된다.
김민석, 정태근(연세대 총학생회장), 허인회(고려대 총학생회장), 오수진, 고진화(성대 삼민투 위원장) 등 전학련-삼민투 간부 5명은 이 대회의 준비를 위해 6월 5일 밤 11시 압구정동의 한 만화가게에서 만나기로 했다. 김민석, 정태근, 허인회 세사람이 먼저 와서 만화를 보고 있었는데 이날따라 나머지 두사람이 안오는 것이었다. 이윽고 새벽 1시가 다 돼서 만화가게에 나타난 두 사람이 아무래도 미행당한 것같다며 불안한 표정을 짓자 이들은 황급히 김민석, 정태근, 허인회와 오수진, 고진화의 두 조로 나눠 택시를 타고 장안평으로 향했다. 그런데 택시가 동호대교를 조금 건너갔을 때 갑자기 전경들이 김민석씨 등이 탄 차의 앞차를 세우며 검문을 시작하는 것이엇다. 세사람은 얼굴이 새파래졌고 뒷차를 탔던 오수진, 고진화씨는 차에서 뛰어내려 달아났다. 나중에 알고보니 매일 새벽 1시면 정기적으로 하는 검문이었는데 이들 수배자들은 제 발이 저렸던 것이다. 하여간 무사히 검문을 통과한 앞차의 세사람은 운전기사의 눈치가 이상해 얼른 택시를 바꿔타고 한참가다가 길가에 보이는 여관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먼저 방에 들어가서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본 허인회씨가 새다 하고 소리치는 바람에 세사람은 또 다시 여관 비상계단으로 뛰어 달아나는 한밤의 탈주극을 벌여야 했다. 형사기동대 차량이 여관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다시 미아리로 달아나 겨우 휴식을 취한 세사람은 다음날 서울대 집회에서 고진화, 오수진씨와 감격의 상봉을 하게 된다. 뒷날 이날 밤의 일들은 우연의 연속이었다는것이 밝혀지는데 얄궂은 우연이 계속돼 이들을 바쁘게 한 셈이다. 그렇지만 실제로 이들을 잡기 위해 각종 수사기관들이 들인 노력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일례로 고려대를 담당하고 있던 성북서는 허인회가 치안본부나 안기부에 잡히면 줄초상이 난다는 위기감 속에 서장은 내가 옷을 벗어도 좋으니 최선을 다하라는 훈령을 내리고 직원들은 휴가를 반납하는 열기(?)에 차있었다. 게다가 성북서 형사들은 매일 나는 허인회를 잡기 위해 무엇을 했다라는 보고서를 작성해야 했다.
6월 29일 전방에 입소했다 돌아올 2학년생들을 맞을 준비로 고대 학생회 간부들이 학생회관에 모여 있음을 안 성북서는 한밤 중에 고대 총학생회실을 덮쳤다. 자다가 끌려와 정신없는 학생회 간부들을 조사실에 세워 놓고 양 뺨을 더 정신없게 때리며 허인회씨의 행방을 추궁하던 한 수사관은 한 학생이 얼결에 엉뚱한 친구의 자취방을 대자 득달같이 그곳으로 달려 갔다. 그는 문을 열어젖히며 야 인회야 일어나 하고 소리쳤으나 자고 있던 2명의 학생이 일어날 리가 없었다. 누구도 허인회씨는 아니었으므로. 또 다른 수사관은 한 학생을 붙들고 동서남북 중 한 방향만 찍어라며 애원(?)을 하는 바람에 시달리다 못한 그는 생각나는 대로 월계동에 있을 것 같다고 해버렸다. 그러자 이 한마디에 성북서는 전경 수백명을 동원해 월계동 일대를 하루종일 뒤져 그날밤 성북서 전경들은 파김치가 됐다.
삼민투를 도와준 카페아가씨
경찰의 이같은 노심초사(?)에도 불구하고 전학련-삼민투 간부들이 끊임없이 활동하고 피신할수 있었던 것은 정권의 매도에도 불구하고 삼민투에 애정을 갖고 있는 시민들의 도움도 컸다.
이해 7월 어느날 정태근씨는 약속장소로 자주 이용하던 강남의 한 카페에서 연세대 총학생회 간부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엽차를 들고 온 카페 종업원 아가씨가 정씨의 얼굴을 유심히 보는 것이었다. 이윽고 약속한 4사람이 모두 모였을 때 그 아가씨가 달려오더니 혹시 삼민투 아니에요 하면서 어제 시경에서 커다란 사진을 가지고 저 분(정태근씨)을 찾으러 왔었어요라고 낮은 목소리로 황급하게 말했다. 즉시 자리를 피한 이들은 얼마 후 시경팀이 그 카페를 덮친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이즈음의 일간신문에는 삼민투의 이같은 높은 인기(?)를 이용한 사기사건까지 보도되기도 했다. 즉 절도 등 전과 5범인 위형남씨(22)는 자신이 모대학 삼민투 위원장이라며 부산 모대학 1학년 최모양에게 접근, 민주헌금(?)을 요구하는 등 사기행각을 벌이다 전과를 하나 더 갱신한 것이다.
개학 직후인 9월 6일 전학련 주최로 고려대에서 열린 제2회 범국민시국대토론회는 허인회사건으로 유명하다. 집회를 마친 후 시위를 이끌다가 홀로 밖으로 걸어나온 허씨를 경찰들이 달려들어 서로 먼저 잡았다고 몸싸움을 벌이는가 하면 허씨의 연행을 둘러싸고 자수냐, 검거냐 하는 논쟁이 붙기도 했다. 그런데 9·6대회를 끝으로 먼저 감옥으로 가기로 한 허인회씨는 9월 4일 밤 안양의 도피방에서 동료들에게 고별공연을 했다. 원래 허씨는 예능적인 재질이 있어 시낭송이나 노래에 능했고 특히 그의 뱀장사 흉내는 일품이었다. 그러나 총학생회장에 당선된 후 품위유지를 위해 뱀장사만은 절대로 하지 말라는 주변의 압력으로 결코 하지 않던 공연을, 마지막으로 안양방에서 했던 것이다. 오수진씨는 그가 9·6시위에서 석유를 뒤집어 쓸 결심임을 알고 분신하면 안돼하고 당부하면서도 먼저 들어가는 그가 부럽기도 했었다고 했다. 경찰은 이들의 형, 동생들까지 잡아다가 벌거벗겨서 두들겨 패는가 하면 부모님들에겐 직장까지 찾아가 갖은 협박을 하는 통에 이들은 집회를 하러 학교에 들어갔다하면 울며 매달리는 어머니의 손길을 뿌리치면서 싸움에 나서야 했기 때문이다.
9월 들어 상황은 점점 경색돼가고 있었다. 구치소에는 한 방 건너 한 사람씩 학생들이 들어차기 시작했고 정기 연고전 준비를 위해 고대총학생회에서 만든 손수건이 빨간색이란 이유만으로 수천장이 그대로 성북서 창고로 직행하는 어이없는 일도 벌어졌다. 고대가 수십년 전부터 붉은색을 교색으로 해온 것을 역시 고대와 수십년간 거래(?)해온 성북서측은 알지 못했던 것일까.
9월부터 학생운동 내부에서는 개헌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를 둘러싼 논의가 시작되었다. 2·12 총선에서 신민당이 직선제 개헌을 공약했던 것을 계기로 개헌문제는 국민적인 관심사로 떠올랐고 국민들은 현실적 대안을 요구하고 있었다. 개헌투쟁에 대한 학생운동내의 첫번째 대안은 민주제 개헌투쟁론으로 제시되었다. 이것은 모든 민주화운동세력이 주체가 되어 노동자, 농민, 빈민, 청년, 학생들의 대표자가 참여하는 헌법제정의회를 구성, 새 헌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것은 다시 내용상 큰 차이가 없는 삼민헌법쟁취투쟁론으로 정리된다. 그런데 도대체 그것을 어떻게 이룩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대답하기 힘들었던 학생들은 우선 파쇼헌법철폐투쟁에 나서야 할 것으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게 된다.
한편 학생운동 진영의 일각에서는 개헌투쟁보다 미국의 수입개방압력에 대한 반대투쟁을 통해 정권의 예속성을 공격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었다. 이와 같은 각기의 주장에 의해 전학련을 중심으로 파쇼헌법철폐투쟁을 주장하던 학생들은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 점거투쟁을 벌이고, 반미투쟁을 주장하던 학생들은 주한미상공회의소, 새마을운동중앙본부 점거에 나서게 되는 것이다.
11월 18일 가락동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을 점거한 14개대 1백86명의 학생들은 역대 점거농성학생들 중 가장 장거리를 뛰어야 했던 사람들로 기록될 것이다.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은 웬만한 대학캠퍼스를 능가할 만한 규모인데 이들은 정문에서 점거예정장소인 강당이 있는 본관 건물까지 전경들의 추격을 받으며 드넓은 운동장을 전속력으로 질주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초에 이들이 점거를 계획할 때는 20~30분을 버틸 수 있을 지를 의심했는데 실제 점거농성은 3시간을 끌었다.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즉 민정당 연수원 본관 건물 안에는 생수병이 엄청나게 널려 있어 점거학생들이 이를 던지며 경찰에 완강히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이다. 민정당 사람들은 85년 당시부터 이미 수도물의 위험성을 익히 알고 여기에 대비, 생수를 마시고 있었던 것일까.
이후 개헌문제에 대한 학생운동의 입장은 계속 변화하기는 하지만 85년말의 이와 같은 개헌투쟁은 86년까지 이어져 한반도 남녘을 개헌투쟁의 열기 속에 휩싸이게 했다.
AIPDR이라는 괴물 의 등장
겨울방학 중인 86년 2월 4일 서울대에서 15개 대학 1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86년 전학련 파쇼헌법철폐 신년투쟁대회 및 개헌서명운동 추진본부 결성대회는 전학련-삼민투 주최의 마지막 집회였다. 이 집회는 전하련 2기 구성을 위해 간부들 중 끝까지 남아있던 오수진씨(성대 총학생회장)가 주도했는데 경찰은 이날 학생들을 서울대에 몰아넣고 싹쓸이를 하려는 듯 전혀 교문에서 출입을 통제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집회 도중 경찰은 학내로 들어와 1백89명의 학생들을 무차별 연행했다. 다급해진 오수진씨는 안내역을 맡은 서울대 학생 한사람과 가까운 건물로 뛰어들어가 마주보이는 방문을 두드렸다. 그곳은 대학원생 연구실이었다. 사정을 들은 대학원생들은 오씨를 그 건물의 암실로 데려가서 탁자를 겹쳐쌓아 밀폐된 공간을 만들고는 오씨를 그 속에 숨겼다. 안내학생은 눈물을 글썽이며 형, 살아남으면 내일 아침에 보자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그때부터 약 16시간 동안 오수진씨는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웅크리고 있어야 했다. 그의 뇌리에는 무슨 생각들이 스쳐갔을까? 마침내 날이 새고 다시 찾아온 안내학생과 오씨는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렸다. 대학원생들은 조반으로 라면까지 끓여주었다. 한편 오씨가 암실에 몸을 숨길 무렵, 서원선씨(연세대 부총학생회장)는 눈덮인 관악산을 넘어가고 있었다. 미끄러운 산길을 걷고 있는 서씨에게 한 사람이 다가왔다. 그는 서원선씨죠? 하며 자신도 경찰을 피해 산을 넘어가는 길인데 과천으로 가는 길을 자기가 아니까 안내하겠다는 것이었다. 원래 관악산은 길이 없는 산으로 학생들이 탐험정신을 발휘해 어설프게 넘어다니곤 했기 때문에 타기가 매우 어려운 곳이다. 잘됐다고 생각한 서씨는 그의 안내로 무사히 산을 넘었다. 과천 시내에 도착하자 그는 춥고 다리도 아픈데 차나 한잔 하자고 했다. 원체 사람이 태평하기로 정평이 나있는 서원선씨는 신세진것이 고맙기도 해서 그와 함께 근처 카페로 들어갔다. 안내자는 카페 공중전화에서 어디엔가 전화를 하고 서씨 맞은 편에 와서 앉았다. 그런데 조금 후 3~4명의 몸집이 큰 사내들이 들이닥치더니 서원선이지 하며 그를 끌고 과천경찰서로 갔다. 이는 훗날 서원선 유괴사건으로 명명되었다.
전학련-삼민투의 해였다고 할 85년. 그러나 이후 학생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조용하지만 격렬한 움직임이 싹트고 있었다. 당시에는 반제민중민주주의론(AIPDR)이라 불리던 이 이론은 자신의 주장을 담은 팜플렛 말미에 미국에 대해 불타는 적개심을 갖지 않는 사람은 운동을 할 생각을 하지 말라 는 구절을 덧붙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 어떤 이는 적개심만으로 운동이 되느냐고 빈정대기도 하고 아예 일부에서는 이 조류를 괴물로 취급하기도 했다. 훗날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론(NLPDR)의 모태가 된 이 괴물 이 가져올 엄청난 진통과 새로운 지평을 짐작했던 사람이 과연 있었을까?
눈을 감고 진행된 구학련 전대회
1986년 3월 18일 서울대, 한 학생이 한 손에 메가폰을 들고 싸이렌을 울리며 IMC관 앞으로 달려 나왔다. 거의 동시에 5동 건물 쪽에서 1백 50여명의 학생들이 반전반핵 양키고홈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IMC관 앞으로 집결했다. 메가폰을 든 학생은 반전반핵평화옹호투쟁위원회의 결성을 선언하고 투쟁선언을 낭독했다. 그의 이름은 이재호(정치학과 83학번), 서울대 반전반핵투쟁위원장, 이로부터 40일 후에 신림동 4거리에서 자신의 몸을 불사른 바로 그 젊은이였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이 집회가 시작된 지 불과 5분 정도 지났을 때 백골단이 투입되었다. 빗속에 투석전이 벌어졌다. 학내 집회조차 돌을 들지 않고는 열 수가 없었던 86년의 상황. 5공은 말기적 증상을 드러내며 파국을 향해 줄달음치고 있었다.
3월 18일 반전반핵 평화옹호투쟁위원회의 발족은 서울대 학생운동 조직에서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 즉 겨울방학 동안 진행되어온 단일 투쟁위원회 건설합의가 깨어지고 86년 서울대에는 민민투와 자민투라는 두개의 투쟁위원회가 탄생하게 될 것임을 예고하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2월까지는 조직적으로 나눠지지는 않았지만 훗날 민민투와 자민투로 분화하게 될 두 그룹은 한국사회의 성격 등 근원적인 문제는 물론 반미투쟁의 문제, 개헌문제등의 당면투쟁에 대해서도 입장을 달리하고 있었다. 반전반핵 평화옹호 투쟁위원회를 결성해 대중적인 반미투쟁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한 자민투 경향의 학생들에 대해 민민투 경향의 학생들은 파쇼정권 아래에서 평화옹호투쟁이 뭐냐? 반전반핵 반미구국 투쟁위원회로 하자고 맞섰다. 또한 개헌투쟁에 대해서도 전자는 민주적 제권리 쟁취투쟁이라 보는 반면에 후자는 권력쟁취투쟁이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오랜 갑론을박이 진행된 후 상부 투쟁위원회는 민족민주투쟁위원회로, 산하 투쟁위원회(이하 투위)들은 양자의 의견을 절충한 명칭으로 단일 투위를 결성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지고 이 내용이 대자보를 통해 공개된다. 결국 3월 18일 결성된 반전반핵 평화옹호 투쟁위원회는 이 합의안을 무시하고 출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자민투 계열의 학생들은 생각이 다르니 두개의 투위로 갈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었던 것이다.
3월 29일 서울대 자연대 건물 22동 404호에서 1백여명의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구국학생연맹(이하 구학련) 전대회가 열렸다. 구학련은 자민투계열 학생들의 비공개 대중투쟁조직으로서 비공개 활동을 하는 사람만을 조직원으로 했기 때문에 총학생회 간부들은 물론 자민투 위원장조차도 구학련 조직원이 아니었다.
이날 전대회는 강의실 밖에 망보기를 세우고 조직원들이 단과대별로 차례대로 입장해 눈을 감고 있는 속에서 진행되었다. 보안문제도 있는데 굳이 전대회를 할 필요가 있느냐는 의견도 있었는데 전대회 개최를 주장했던 정대화씨(법대 82학번)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현재 학생운동조직 앞에는 비민주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사업방식을 청산해야 할 과제가 놓여 있다. 그러한 과제를 담당해야 할 구학련은 가장 민주적인 형식을 거쳐 결성돼야 한다. 형식을 갖추지 않고도 모든 것을 다 얻을 수 있으면 좋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형식을 무시하다보면 비민주적으로 가는 경우가 많다.”
검거된 식빵들
4월 10일에는 반미자주화 반파쇼민주화 투쟁위원회(이하 자민투)가 발족됐다. 자민투 산하에는 먼저 출범한 반전반핵 평화옹호 투쟁위원회 외에 민주헌법쟁취 투쟁위원회, 노동자해방지원 연대투쟁위원회가 설치되고 자민투 기관지로 「해방선언」이 발간됐다. 이무렵 민족민주투쟁위원회(이하 민민투)의 발족을 알리는 대자보가 나붙었고 민민투 기관지로서 「민족민주선언」이 발간되었다. 투위가 두개 존재하는 기현상은 속속 심각한 부작용을 낳았다. 민민투가 집회를 하며 ‘헌법제정 민중회의’라는 구호를 외치면 자민투 계열의 학생들은 달려가 반전반핵을 외치며 훼방을 놓기 일쑤였고 자민투가 집회를 열 때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지도부가 만류를 해도 분파의식은 자연발생적으로 퍼져 나가 도서관 통로에서 스크럼끼리 부딪쳐 티격태격하는 일까지 생겨났다.
이 가운데 서울대에서는 자민투 우세의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나 타대학에서는 여전히 민민투라는 단일 투위가 활동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구학련은 4월을 총력 선전기간 으로 정하고 타대학에 대한 선전에 나서게 된다. 그러나 타대학의 공식창구들의 반응은 냉랭했다. 민민투만을 유일 합법정부로 인정하며 자민투측은 만나주지 않으려는 분위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구학련은 자민투 발족선언 반전반핵 평화옹호 투위 발족선언 등의 유인물을 타대학에 무작위 배포했다. 가장 강경한 민민투로 알려져 있던 성균관대에서는 총학생회가 이 유인물들을 수거해다가 불태워버리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래서 구학련은 조직원들의 인맥을 이용해 타대학에 접근을 시도하게 된다.
4월 20일경부터 총학생회와 반전반핵투위에 의해 전방입소 거부투쟁의 구체적인 준비가 시작됐다. 미국은 한국군을 예속화시키고 있으며 전방입소는 양키의 용병교육이므로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 투쟁의 의미였다. 전방입소 대상자인 2학년들은 과토론회, 단대토론회를 거쳐 속속 입소거부 결의를 발표하는 등 이 투쟁은 대중적으로 대단한 지지를 받았다. 당시의 2학년들이 양키의 용병교육으로서의 전방입소라는 투쟁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전두환 정권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감, 미국의 광주개입, 남북간의 불필요한 군사대결, 조국의 평화와 같은 문제들에 대한 광범위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었다고 한다.
총학생회 간부, 단대 학생회장, 반전반핵투위장으로 구성된 투쟁지도부는 입소 전날인 4월 27일부터 약 3~4일간 서울의대 연건캠퍼스를 점거, 농성하기로 결정했다. 점거 후 3~4일 정도 버티면 전방입소교육은 자연히 무산될 수 밖에 없으며 바로 토요일의 5·3 인천집회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1천 5백명 정도가 연건캠퍼스 농성에 참여할 것으로 예상되었는데 이같은 대규모 농성계획을 비밀리에 전달하느라 약속이 5분에 하나씩 있는 학생도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연건캠퍼스 점거농성은 계획누설로 2백여명이 연행된 채 실패로 끝났다. 이날 인근경찰서에는 연행학생들은 물론 그들이 사두었던 식빵들이 수북이 쌓이기도 했다. 그날 밤 인문대 학생회장의 하숙방에 모인 투쟁지도부는 이제 대중과 함께 싸우다 끌려가는 수밖에 없다. 학생회장들이 책임지고 정리하는 모습을 보여주자고 결의하고 28일 아침 10시 신림4거리에서 조직역량만이 참가하는 연좌농성을 결정했다. 그리고 주동자 2명이 신림4거리 건물 옥상에서 농성을 지도하기로 했다. 이때 김세진씨(자연대 학생회장)가 주동자는 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시간을 끌자고 해서 아침에 휘발유를 사가기로 했다. 그래도 고공전이 잘 안될 경우 밑에서 또 한 명이 나오기로 했다. 기타 세부적인 논의를 계속하느라 밤을 꼬박 밝힌 이들은 아침 7시경에 주동자를 선출했다. 우선 반전반핵투위장인 이재호씨가 결정됐고 나머지 인원은 학생회쪽에서 나가기로 했다. 총학생회장 김지용씨는 5·3투쟁을 맡기로 해서 제외되고 단대 학생회장 중 단대 역량상 사회대, 공대, 자연대 학생회장 중 한 사람이 나가는게 좋겠다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개인적인 조건을 봐서는 셋 중 누가 해도 상관없는 정도였는데 김세진씨가 자원을 했다. 그리고 고공전이 실패하는 사태를 대비해서 장유식(공대 학생회장), 이정순씨(인문대 학생회장)가 지상조를 맡았다.
역할분담이 결정된 후 이들은 서로 인사를 나눴다. 이재호씨는 먼저 들어가 청소하고 있을테니 나중에 와라고 했고 김세진씨는 앞으로의 반미자주화투쟁은 정말 중요하다며 우리 함께 열심히 싸우자 고 했다. 동료들과 악수를 나눈 두 사람은 잠 좀 자고 싶다. 들어가면 자겠지 하며 동원책임자에게 연락을 하기 위해 먼저 나갔다.
김세진, 이재호 그날 이후
두 사람은 9시 40분경 신림4거리 가야쇼핑센터 맞은 편에 나타났다. 둘 다 양복을 깔끔하게 입고 쇼핑백 2개를 들고 있었다. 하나에는 유인물, 나머지 하나에는 석유통이 들어 있었다. 두 사람이 퍼펙트 당구장이 있는 3층 건물 옥상에 올라간 것과 거의 동시에 가야쇼핑 옆길에서 스크럼 대열이 달려나와 차도를 가득 메웠다. 옥상 위에서는 두 사람이 성명서를 읽고 구호를 외쳤다. 이때 신림지하철역 안에서 백골단이 뛰어나왔다. 이들이 옥상으로 뛰어오르기 시작하자 두 사람은 올라오면 분신하겠다 고 소리쳤다. 백골단이 옥상 입구까지 올라갔을 때 그을음이 났다. 이재호씨는 뒤쪽의 창고 천막 위로 굴러떨어져 구급차가 실어갔고 김세진씨는 몸에 불이 붙은 상황에서도 구호를 외치다가 털썩 주저 앉았다. 그의 불붙은 옷조각이 떨어져 퍼펙트 당구장의 아크릴 간판이 3분의 1정도 녹아내렸다.
밑에서는 약 5백~6백명의 학생들이 깍지를 낀 채 차도에 드러누웠다. 경찰은 이들은 하나씩 떼어내 닭장차에 실었다. 걸어서 차에 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두 사람이 강남성심병원으로 옮겨진 지 3시간 정도 지났을 때 삼엄한 경비 속에서도 거침없이 이들의 병실로 들어서는 백발의 노인이 있었다. 여느때처럼 누런 국민복 차림을 한 계훈제 선생이었다. 열사들의 병실을 찾아다니는 데 이력이 난 계선생이 나 가족이야 하며 쑥 들어가는 통에 경비 경찰도 깜빡 속았던 것이다. 그가 병실로 들어섰을 때 김세진씨는 입구쪽에서 시트를 머리위까지 쓰고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고 이재호씨는 안쪽에 누워 있었다. 계선생을 보자 이재호씨의 첫마디는 선생님 오셨습니까? 세진이 어떻게 됐습니까? 였다. 결국 두 사람은 5월 3일과 5월 26일에 각각 숨졌다.
김세진씨를 아는 많은 사람들은 그가 목숨을 바칠 각오로 이 투쟁에 임했음을 증언하고 있다. 그가 목숨까지 바치게 된 것은 투쟁의 절박성을 누구보다도 가슴깊이 느꼈던 결과였다고 전해진다. 두 사람의 죽음은 여러가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86년은 서울대에 휴학이 가장 많았던 해였다. 학교앞 술집에는 노랫소리가 사라졌고 술만 먹으면 울곤 하는 사람이 늘어갔다. 학교가 무서워서 나오기 싫다는 사람조차 있을 정도로 대학생활에 대한 고뇌, 염증은 깊어 갔다. 운동권 학생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두 사람과 끝까지 같이 일했던 장유식씨는 그전부터 인문대 학생회장을 하던 친구가 곧잘 중얼거리던 인생이라 뭔지하는 말이 실감이 나더라고 했다. 선배도 아닌 친구가 죽으니 투쟁의 결의가 다져지기도 하지만 죽음은 너무나 가까운 것이었고 가까우니까 두렵기도 한 것이었다.
당시 2학년이던 손용후씨(국제경제학과 85학번)는 두분에 이어 이동수 학형까지 죽는 모습을 보며 엄청난 절망감과 피해의식에 빠졌었고 진실로 그 죽음의 의미를 깨닫게 된 것은 88년 이후였다고 말했다.
자신에게 가장 준엄했던 사람 박혜정
박혜정. 국문과 83학번. 아마 그는 86년 봄의 상황에서 한 개인으로서의 자신을 가장 극단까지 몰고갔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입학후 세계문화연구회라는 동아리에서 활동하던 그는 2학년 2학기중에 휴학을 하게 된다. 이 당시의 그의 고민은 친구에게 보낸 편지속에서 읽어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이 무척 좋아했던 김수영 시인의 먼곳에서부터 먼곳으로 가슴이 아프다. 가자 적의 적들과 함께라는 시구를 적은 뒤 먼곳에서부터 가슴이 아픈데 가자는 의지는 어디서 난 것일까? 라고 묻고 있다. 85년을 박혜정씨와 함께 고민하며 지냈던 같은 과 친구 권희선씨는 그 시기 우리들은 운동에서의 이유기를 맞고 있었다고 생각된다고 했다. 즉 운동에는 감성에서 과학으로 올라서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한데 현실에 대한 과학적인 전망을 획득하지 못한 채 방황했었다는 의미이겠다.
85년 내내 해야할 일을 안하고 있는 자신의 용기없음을 질책하며 지내던 박혜정씨는 86년 들어 학생운동을 다시 시작하려 했으나 1년간의 공백으로 알맞는 일을 찾기가 매우 어려웠다. 다시 일하는 것을 포기한 박혜정씨는 곧이어 김세진, 이재호씨의 죽음과 맞닥뜨리게 된다. 오랫동안 열심히 살수도 없으면서 죽을 수도 없는 자신의 용기없음을 질책해온 그가 여전히 하는 일 없이 술만 먹고 있는 자신에게 어떤 심판을 내렸을지를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5월 20일에는 이동수씨(원예학과 83학번)가 미제 물러가라고 외치며 학생회관에서 투신했다. 이후 벌어진 시위에 참여했던 박혜정씨는 이날 밤 과사람들과 밤새 술을 마셨다. 평소 군출신으로서 엄격한 아버지로 인해 외박은 생각도 못했던 그가 21일 아침에도 집에 들어가지 않고 친구집으로 갔다는 것이다. 저녁 8시까지 누워서 책도 보고 뭔가를 쓰다가 10시 경 친구집을 나선 그는 23일 한강 유역에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김세진, 이재호씨의 죽음을 구학련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4·28 이후 구학련 중앙위원들은 우리가 동지를 죽였다며 총사퇴한다. 두사람이 자신의 몸을 불살라야 했을 정도로 투쟁이 어렵게 풀려 나간 것은 자민투, 민민투의 대립에 가장 큰 원인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심지어 민민투측에서는 분신으로 사상투쟁 정리하려는 것이냐는 정도의 냉소적인 얘기까지 할 정도였다. 이에 구학련은 민민투측에 무조건적인 통합을 제의하는 동시에 타학교에 대한 연대사업정책도 공식창구를 통하거나 공동학습동아리를 만드는 방식으로 전환시켰다. 그러나 구학련의 통합제의는 민민투측의 거부로 끝내 결실을 맺지 못하고 만다.
품성론이 던진 충격
이무렵 민민투는 어떻게 움직이고 있었을까. 86년 1학기 연세대 학생운동은 민민투-총학생회를 지도체계로 하고있었다. 물론 총학생회는 민민투를 위해 봉사하는 것을 자기 임무로 했다. 그런데 5·3집회를 준비하면서 두 조직간에 의견대립이 생겨난다. 민민투측이 5·3 집회를 기해 전국민적 무장봉기가 일어날 것 이라는 상황인식을 갖고 혁명적인 시기에 축제가 뭐냐. 모든 상가는 철시하고 노동운동쪽에서는 동맹파업을 할 것이다. 학생운동도 이에 맞춰 당장 수업거부를 해야 한다고 지시한다.
그러나 대중의 감성을 파악하고 있는 총학생회측은 그와 같은 상황평가에 동의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일반 학생들이 헌법제정민중회의가 대체 무엇인지 이해하려면 책 한권은 읽어야하므로 운동권과 일반 학생 사이에는 책 한권의 차이가 있는 셈이었다. 그런데도 민민투 지도부는 헌법제정민중회의의 수립 을 5·3시위의 제1슬로건으로 체택하는가 하면 5월 3일 이후 수도권 일원에 위수령이 내려질 것에 대비, 그 대책회의를 공주에서 열 것을 결정할 정도의 극단적인 상황인식 속에 있었다고 할수 있다.
이같은 민민투 지도부의 지극히 주관적인 상황판단에 반발해 사표를 쓸 것까지 고려하던 오연호씨(총학생회 기획부장, 국문과 83학번)는 그래도 조직에 대한 충성심에서 단과대 학생회장들을 모아놓고 수업거부를 설득하기로 했다. 그는 이때 운동권 친구들이 이미 기계화되어버렸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처럼 대중정서와 유리된 투쟁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못하겠다로 반발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결국 수업거부는 일부 과만이 참여한 채 강행되었는데 온다던 결정적 시기를 기다리느라 2주를 끌었으나 결정적 시기는 오지 않았고 운동권은 대중과 점점 멀어졌다.
이무렵 운동권에는 품성론이라는 팜플렛이 나돌아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이 글은 운동가가 가져야 할 품성으로 솔직, 소박, 겸허를 들고 동지애와 승리에 대한 낙관주의를 강조했다. 어찌보면 너무나 당연하다할 이글이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품성론을 쓴 김영환씨(서울법대 82학번, 현 전민련 조국통일위원회 위원)에게 집필 동기를 들어보자.
“4년 동안의 학생운동 기간 동안 학생운동 주도자들이 품성에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습니다. 즉 많을 사람들로부터 인간적인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은 적고 많은 수가 소영웅주의적이고 거만하며 이것이 하부에 대해서는 권위주의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숱하게 목격하고 이것만은 해결해야겠다고 오랫동안 생각해왔습니다.”
당시 민민투쪽의 입장을 가지고 학생운동을 하던 사람들도 품성론에 대해서만은 공감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민민투 지도부가 대중의 상황과 유리된 투쟁방침을 하부에 강요하는 권위주의적인 모습 속에서 조직은 안으로 곪아들어가고 있던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다. 즉 상부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올바른 조직생활의 태도라고 자기자신을 강제하면서도 그 명령이 올바른 지도방침이라 믿을 수 없었던 학생운동가들의 내적 고민은 깊어갔다. 자연히 동료들간의 관계도 일만을 같이 하는 기계적인 것으로 될 수 밖에 없었고 조직활동은 이들의 인간성을 형해화시켜 갔다고도 할 수 있다. 이때 던져진 당신은 동지를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이 이들의 가슴에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동지에게 던져진 각목
5·3 이후 불어닥친 검거선풍으로 연세대 민민투 지도부는 모두 구속되고 대중앞에 남은 것은 총학생회뿐이었다. 1학기 동안 과연 무엇을 했던가를 밤을 새워 고민하던 총학생회 기획부장 오연호씨는 현실적으로 가능한 대중투쟁으로서 고교생에게 편지보내기 운동을 벌일 것을 결심한다. 입시의 노예가 돼가고 있는 고교생들에게 알기 쉽게 조국의 현실을 설명한 편지를 보내자는 계획이었다. 이 계획은 총학생회 차원에서 진행되어 커다란 호응을 얻었다.
연대생들은 자신이 아는 고교생의 주소를 쓴 봉투를 총학생회로 가져왔고 우표값 모금도 성공적이었다. 경찰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속에서, 등사된 편지를 봉투에 넣고 우표를 붙이는 작업은 학생회 간부들이 상경대 지하실에 숨어서 했다. 드디어 편지를 부치기로 한 첫날인 6월 24일, 수많은 학생들은 속옷 속에 편지를 품고 교문을 통과한 후 자기집 근처 우체통에 그것을 넣었다.
편지의 반응은 엄청났다. 연세대 총학생회로 계속 전화가 걸려왔다. 우리가 못하는 일을 자네들이 하고 있다고 격려하는 교사도 있었고 한 아버지는 아이가 선생님 말씀과 편지 내용 중 어느 게 옳으냐고 내게 묻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제발 공부나 하게 내버려두라고 하소연하기도 했다.
당시 서울시 교육감이 불순한 편지를 보내는 못된 대학생들이 있다. 편지를 받으면 신고하라고 중고생들에게 훈시를 해서 20통 정도가 신고되기도 했는데 이 바람에 편지는 더 유명해졌다. 경찰이 이 사건으로 오연호씨 등 4명을 국가보안법으로 구속하기까지 한데는 재미있는 해석이 있다. 경찰은 수사과정에서 누가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고등학생들 꼼짝없이 속아넘어가게 잘도 썼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사실 이 편지는 전자타자기로 깨끗하게 타이핑된데다 그림, 도표 등도 실려 있는 당시의 운동권 유인물로서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게다가 연애편지 사건으로 불릴 정도로 편지내용 또한 부드럽고 설득력있게 쓰여져 있었으니 당국으로서는 이 불온유인물의 진원지를 봉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편지를 쓴 사람은 뒷날 ꡔ말ꡕ지 기자로 명성을 날린 오연호씨였는데 연애편지사건은 그에게 첫번째 필화사건이었던 셈이다.
86년 고려대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85년말부터 고려대 학생운동에는 반파쇼투쟁을 중시하는 경향과 반제투쟁, 민생투쟁을 중시하는 두개의 흐름이 병존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같은 정치적인 차이가 묘하게도 학내운동의 주도권다툼의 양상을 띠면서 싸움은 감정적으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3~4월에 있었던 공동투쟁을 위한 노력은 무산되고 5월 8일 같은 시각에 두개의 투위가 발족하게 됐다. 더구나 한쪽이 각목으로 무장하고 다른 쪽이 집회하는 곳에 가서 앞에 서 있던 투위장 정범진씨에게 각목을 집어던지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당한 쪽의 일부 학생들이 달려나와 각목을 집어들고 싸우려는 것을 4학년생들이 겨우 뜯어말린 후 같이 교문으로 나가 경찰과 싸우자고 설득했다. 그러나 대열이 교문 앞으로 나갔을 때 5백명 정도 되던 학생들은 1백명으로 줄어 있었고 경찰도 최루탄을 쏘지 않았다. 경찰은 학생들이 서로 싸우는 모습을 다 보고 있었고 구태여 자극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시위 후 김신씨(정외과 83학번)는 후배들과 인촌묘소로 올라갔다. 상황을 보는 눈의 차이가 감정적으로 비약된 것 이라고 사태를 설명하고 원만하게 해결될 것이다라며 후배들을 설득하려 했으나 후배들은 죽어도 못믿겠다고 했다. 선배들은 민중의 고통을 끝장내기 위해 운동을 한다면서 동지들끼리 싸우느냐, 오늘의 사태가 실망스러워 운동을 포기하겠다고 하는가 하면 운동 자체는 올바른 것이므로 계속하겠으나 선배들의 옳지 못한 모습과는 끝까지 맞서 싸우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이것이 운동이구나
그런데 5월 셋째주 전방입소 거부투쟁의 방향을 둘러싸고 싸움은 재연되었다. 한쪽에서는 주한미군 철수투쟁을, 다른 한쪽에서는 헌법제정민중회의를 들고나온 것이다. 끝까지 전방입소를 거부했던 2학년생 4백여명은 우리들은 개인적인 모든 불이익을 감수하고 전방입소를 거부했다. 그런데 선배들은 투쟁방향을 놓고 서로 싸우는가 라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이 사건 후 학생운동에 대한 대중의 신뢰는 급격히 떨어졌고 양투위가 집회를 열어도 겨우 1백명 가량이 참여할 뿐이었다. 양지도부는 이 과정에서 책임을 통감하고 공동투쟁을 결의한다.
방학 동안에 무슨 일이 있어도 통일단결하고 후배들에게 힘을 주자며 진행된 통합운동은 결실을 보아 단일 조직을 건설하는 데 이른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8월 10일 고려대에서 개최된 연합집회에서는 대동단결 대동투쟁 이라는 구호가 끊임없이 울려퍼졌으며 집회를 마친 후 비가 내리는 대운동장에서 학생들은 서로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렸다. 김신씨는 이때 비로소 이것이 운동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됐다고 말한다.
똑같은 양상이라 할 수는 없으나 여름방할을 거쳐 대부분의 대학이 자민투노선으로 전환했다. 이후 서울대 구학련과 같은 성격의 조직으로서 고려대에는 애국학생회가, 연세대에는 구국학생동맹이 결성되었다. 이러한 전환의 배경에는 구학련이 끊임없는 연대사업을 벌여 각 학교에 학습동아리들을 조직했던 활동이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이같은 연대사업은 타학교를 뒤집는 식으로 진행되어 감정을 남기기도 했다. 그리고 학생운동에서 군소대학이라 할 수 있는 대학의 경우에는 1학기까지의 민민투 조직이 그대로 자민투 조직으로 바뀌는 경우도 있었다. 정희상씨(외국어대 83학번, 현 월간 말 지 기자)도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정씨는 1학기때는 외대 민민투 위원을 하다가 여름방학을 거치면서 외대가 자민투로 전환하자 산하 투위인 직선제쟁취투쟁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1학기때부터 대중앞에 섰던 탓에 경찰은 정씨의 인상착의를 조그만 놈 이라 기억했던 모양이다.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성남시에서 벌어진 가두시위에서 정씨가 주동으로 나섰을 때 경찰은 정씨를 에워싸고 있던 학생들 중 가장 조그만 김화택씨를 주동자라고 잡아가버렸다. 가운데 들어가 있던 정씨가 보이지를 않았던 것이다.
아시안게임의 화려한 현수막 뒤에서 학생운동에 대한 탄압은 노골화되어 갔다. 가을 정기 연고전의 첫날 행사를 마치고 연세대 학생회관 총학생회실에는 두 학교의 총학생회 집행부 등 50여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시가행진계획 및 주동자 선출 등의 회의를 거의 마쳤을 때 한 여학생이 경찰이다 하고 소리치며 1층에서부터 계단을 뛰어올라오는 것이었다. 그 여학생은 커피 자판기가 있는 1층에 내려갔다가 경찰들이 1층 유리창을 깨고 잠긴 문을 열려는 것을 보고 소리를 지른 것이다. 학생회 간부들이 3층에서 내려다보니 전경들은 학생회관 옆에 진을 치고 있었다. 학생들은 3층 입구까지 올라온 형사들을 각목으로 두들겨 패고 화염병을 던지고 해서 쫓아낸 후 바리케이드를 쳤다. 일부 학생들은 비밀문서를 태우고 연대 총학생회 간부들은 창문을 열고 핸드마이크로 소리쳤다. 교정에 계신 연고대 학생 여러분, 학생회를 지켜주십시오! 이때 한 학생이 연대 운동권 학생들이 자주 가는 신촌의 주점 페드라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알렸다. 평소부터 운동권 학생들을 극진히 아끼던 페드라 아주머니는 빨리 학교로 가라며 술값도 안받고 학생들을 쫓아보냈다. 이들은 인근 술집에 있던 학생들까지 모두 모아오는 바람에 잠시 후 학생회관 앞에는 3백~4백여의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이날 밤 학생들과 전경들은 새벽 5시까지 대치하다가 결국 경찰이 물러갔다.
애학투련과 남부군
10월 들어 ML당이니 반제동맹당이니 하는 조직사건을 계속 만들어내던 당국은 10·28 애학투련(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 투쟁연합) 결성식을 계기로 건국대사태 를 일으켜 1천 2백 74명을 구속했다. 검찰은 건대 농성학생들을 공산혁명분자라 규정했는데 이들에 대한 진압도 그와 같은 기준에서 이루어졌다. 10월 30일 경찰 헬기가 건대 상공에 나타나 전단을 뿌리고는 이 전단을 가지고 나오면 관용을 베풀겠다며 선무방송을 하는 모습은 영화 남부군을 본 독자라면 낯익은 광경일 것이다.
당국이 학생들을 공산혁명분자로 몰고가는 방법은 다양했다. 자민투 2대 위원장 정현곤씨가 외신기자와 통화를 하다가 6·25에 대한 질문을 받고 6·25에 대한 학계의 연구에는 남침설, 남침유도설, 북침설 등 세가지 입장이 있다고 얘기한 것을 바로 학생들이 6·25 북침설을 주장하고 있다고 왜곡 선전한 것이 그 대표적 예라 할 것이다.
10월 31일 개시된 농성진압작전은 그야말로 공산혁명분자 소탕작전 그 자체였다. 학생시위 진압사상 최초로 동원된 헬기는 옥상위에 있는 학생들을 조준해 최루탄을 쏘았고 건물 곳곳에서 치솟는 화염과 시커먼 연기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각 학교 총학생회실로는 계속 전화가 걸려왔다. 한 여학생은 헬기가 막 날아다녀요. 학생들 다 죽이나봐요 라며 울부짖었고 건대 옆에 산다는 한 아주머니는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 내 눈으로 봤다고 소리치기도 했다. 연세대 총학생회는 이러한 전화 제보를 속보판에 써붙였다. 그런데 뒤에 이것은 오보로 밝혀져 학생회의 위신이 크게 깎였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전화제보를 그대로 믿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연행자 명단이 발표된 후 분명히 건대에 들어갔던 모윤(연세대 경영학과 85학번)군의 이름이 보이지 않아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서대문 경찰서의 명단에는 물론 안기부에 문의해도 모윤이란 학생은 없다는 것이었다. 엄청난 상황을 겪은 뒤라 진압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일어나 한바탕 난리를 쳤는데 확인 결과, 모군이 경찰조사 과정에서 가명을 썼던 것으로 밝혀진다.
배정한, 송용일이란 악몽
86년의 학생운동을 얘기하자면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있다. 구학련 위원으로서 치안본부의 프락치 노릇을 했던 배정한씨(서울법대 83학번)가 그 사람이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배씨를 똑똑하긴 한데 의지가 약했다고 평한다. 배씨는 86년 여름 치안본부에 잡혀가 김영환은 간첩이다. 그와 연결되면 너는 죽는다며 김영환만 잡아주면 살려주겠다는 협박과 회유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김영환씨는 안기부에서 잡게 되고 실적을 못올려서인지 배씨는 11월에 청년동맹사건을 만들어 경찰에 넘기는가 하면 다수의 서울대 동료, 후배들을 치안본부에 잡아주었다. 그 방법도 교묘해서 사람들이 자꾸 잡혀가고 배씨가 의심을 받게 되자 배씨는 동료인 장유식씨가 프락치라는 소문을 퍼뜨려 조직 내에 의심과 반목을 조장했다.
이 무렵 배씨로부터 연락을 받고 소문을 확인할 겸해서 건대앞 그날 이후 라는 카페에서 배씨를 만난 장유식씨는 그날 이후 징역을 살게 됐다. 장씨가 배씨와 마주앉자마자 치안본부 사람들이 장유식 하며 그의 옆에 와 앉았던 것이다. 배씨는 마지막까지 시치미를 떼더니 그후에도 84학번 후배와 녹두출판사 사람들을 그런 식으로 잡아들이고 프락치 활동을 마감했다. 그는 서독으로 떠나기 전 길에서 우연히 학교 시절 같이 활동했던 동료를 만나자 어떻게 된거냐? 라는 힐난에 운동 자체가 반사회적인 것이고 나는 반운동권이다. 누가 이기나 해보자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87년 남노련 등 노동운동권에서 프락치활동을 했던 송용일씨(연세대 경제학과 82학번)는 배정환씨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충격을 던졌다. 85~86년에 학생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로서 지금도 그를 아는 사람 중에는 그의 프락치 활동을 믿으려 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그는 능력있고 성실한 학생운동가였다. 그가 프락치 활동을 하게 된 계기 역시 보안사에서 일주일 정도 연행된 사건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고문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신념을 꺾을 수는 있다 하더라도 8개월이란 오랜 기간 동안 노동현장에 뛰어들면서까지 프락치 활동을 하는 악질적인 변절을 하게 됐던 근본 원인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 것이다. 이에 대해 84년까지 그를 지도했던 과선배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지는 않지만 그가 운동이론에 대해서는 철저하려 하면서도 운동 자체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불안정함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끝내 고쳐주지 못했었다고 안타까워했다. 송씨는 행정적인 능력이 뛰어나고 만사를 명료하게 분석해내며 정연한 논리를 구사하는 언변을 가진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의 가정환경이나 성장배경 등 사생활에 대해서는 거의 얘기를 하지 않는 습관이 있었고 공식적인 회의에서 문제제기를 해서 풀어야 할 문제를 비공식적으로 제기한다든지, 검거되면 자신이 마땅히 책임져야 할 부분을 동료에게 미루어놓는다든지하는 문제점을 나타내기도 했다는 것이다. 87년까지 그와 같이 일했던 원창연씨(정외과 82학번)는 당시 이 친구가 기질적으로 좀 비겁하구나 하고 생각하는 정도에서 그냥 지나쳤다고 한다. 결국 그로 인해 검거된 뒤 원씨는 자신과 송씨가 나눈 대화의 내용을 수사관들이 훤히 알고 있는 현실 앞에서 송용일의 변질이라는 문제를 풀기 위해 몸부림치게 된다. 마침내 원씨는 송씨의 운동과정은 일을 열심히 하는 능숙한 운동관료로서의 성장과정이었다는 결론을 얻는다. 말잘하고 능력있다고 판단되는 사람은 선배들에 의해 선택돼 운동의 중심에 서게 된다. 그러나 거기서 그가 맺는 관계도 일을 중심으로 결합된 인간관계에 불과하며, 관료주의, 종파주의, 소영웅주의 등과 같은 독소들을 올바르게 해결하며 신념에 찬 운동가로 성장해 나가는 과정은 이같은 조직 어디에서도 채워질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 나라의 장래를 책임질 수 있는 사람들은 대중운동 속에서 고통스럽지만 묵묵히 단련되면서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지도자로 성장하는 것이라는 지당한 사실을 86년까지의 학생운동가들은 책에서만 배웠던 셈이다. 87년, 학생운동은 아니 80년대의 학생운동은 처음으로 대중과 부딪치게 된다. 그 속에서 그들은 무엇을 발견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