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가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사례를 살펴보자. 1983년 삼미는 한 시즌 팀 최다 완투인 36회를 기록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시즌 내내 한 번도 완투가 없었던 팀이 8개 팀이나 된다. 특히 LG는 완투가 없는 시즌이 두 번이나 있었다. 1983년 삼미 장명부는 8경기 연속 완투승을 거뒀는데, 이는 지난해 완투가 가장 많았던 롯데(7회)보다도 많은 것이다. 1987년 해태 선동열과 롯데 최동원은 연장 15회 완투 끝에 무승부를 기록했고 둘은 이 경기에서 각각 232개, 209개의 공을 던졌다. 지난해 최다 완투(5회)를 기록한 한화 류현진의 한 경기 최다 투구 수는 129개였다. 최동원은 8년 동안 124차례 선발 등판 가운데 80번을 완투했다. 현역 최다 완투를 기록하고 있는 류현진은 136차례 마운드에 올라 23번을 끝까지 던졌다.
투수들의 투구 이닝이 짧아지는 원인은 무엇일까? 불과 수십 년 사이 투수들의 어깨가 시구하러 나온 아이돌 여가수 수준으로 약해지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월드베이스볼클래식의 예를 따라 투구 이닝을 제한하는 규정이라도 만들어졌단 말인가. 투수를 보호하기 위한 분업화는 지도자들의 의식 변화에 따른 시대의 흐름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근본적인 요인은 프로야구 수준이 ‘상향평준화’를 이룬 데 있다고 봐야 한다.
1980년대만 해도 각 구단의 주력 투수들에게 상대 하위 타순은 고속도로 휴게소 같은 존재였다. 상위 타순을 상대로 전력으로 다해서 잡아 낸 뒤 하위 타순을 상대로는 투구 수를 조절하며 체력을 비축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 사정이 달라졌다. 웨이트트레이닝으로 타자들의 힘이 부쩍 향상되면서 예전처럼 하위 타순 타자에게 가운데 빠른 볼을 던졌다가 큰 것 한 방을 얻어맞는 일이 늘어난 것이다. 여기에 외국인 타자의 등장으로 강타자들이 한 타순씩 뒤로 밀려난 것도 하위 타순을 더욱 까다로운 상대로 만들었다. 이제 투수들은 1번부터 9번까지 쉬어갈 곳이 없게 됐다. 모든 타자를 상대로 어렵게 승부해야 하고 전력을 다해 던질 수밖에 없게 됐다.
상향평준화는 투수 분야도 마찬가지다. 투수들의 전반적인 기량이 눈에 띄게 좋아진 결과 과거에는 ‘패전 처리’로 취급되던 중간 계투 요원 가운데도 뛰어난 구위를 지닌 선수가 늘어났다. 이광환 전 LG 감독이 선도한 투수 분업화는 기량이 떨어지는 투수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능력 이상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구단들은 점차 경기 후반에 체력이 떨어진 선발 투수보다는 구원 투수를 투입하는 쪽이 승리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는 앞서 언급한 하위 타순 강화와 맞물려 선발 투수의 투구 이닝이 줄어드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지난 30년 사이 국내 야구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생각해 보라. 각 구단의 주력 투수들은 경기 도중 마운드에서 내려오는 일을 수치로 여겼다. 감독이 교체를 지시하면 화를 냈고 단지 중간 계투 요원이 불펜에서 몸을 푼다는 이유만으로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요즘의 경기장 풍경은 정반대다. 감독들은 불펜에 넘쳐나는 좋은 투수들을 써먹지 못해 안달이다. 5회 이전에도 선발이 조금만 불안하면 불펜 쪽으로 신호를 보낸다. 이는 선발진도 마찬가지. 애초에 9회까지 던진다는 생각으로 마운드에 오르지 않는다. 6회까지만 던져도 ‘퀄리티스타트’라는 이름으로 선발의 임무를 완수한 ‘이닝이터’의 훈장이 수여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완급 조절 없이 초반부터 전력 투구하고 정면 승부보다는 스트라이크존 외곽을 도넛 모양으로 공략하며 무수한 풀카운트 승부와 볼넷을 남기면서 6회까지 ‘완투’한다. 어쩌다 7회까지 던지기라도 하는 날은 개선장군이 따로 없다. 나이 어린 투수들은 위기가 찾아오면 스스로 극복하려고 하는 대신 불펜 쪽을 쳐다보며 누가 자신이 남긴 주자를 잔루로 만들어줄지 기대감을 나타낸다. 투수들의 오래 던지는 능력은 야구장 비둘기의 날개처럼 퇴화한 지 오래다.
선발 투수의 혹사가 줄어든 건 사실이다. 오히려 어떤 때는 과잉 보호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하지만 그 대신에 불펜 혹사라는 새로운 흐름이 나타났다. 싱싱한 어깨를 지닌 젊은 유망주를 선발 대신 불펜으로 보내 매일같이 던지게 하는 이 유행은, 과거 장명부나 최동원이 ‘전천후투수’로 던지던 시절에서 인원 수만 늘어났다 뿐이지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게다가 4~5점 차 승부가 될 수 있는 경기를 굳이 번트와 작전을 통해 1점 승부로 만드는 악습은 또 어떤가. 이런 전술은 반전이 있는 영화의 결말을 퍼뜨리고 다니는 것만큼이나 야구를 재미없게 만든다. 여기에 비하면 과거 선동열-최동원의 연장전 무승부처럼 가슴 떨리는 에이스 맞대결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아쉬움은 사소한 것이다.
앞으로 5회도 못 버티고 강판되면서 희희낙락해 동료들과 하이파이브를 나누는 투수는 자신을 소개할 때 선발이 아니라 ‘첫 번째 투수’라고 했으면 좋겠다. 5이닝짜리 투수에게는 선발 투수의 자격이 없다.
완봉승(shutout g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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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규칙 10.19ⓕ는 완봉승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