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회 牙山 飛龍登天形 명당 찾아 (忠南 牙山 2011년 5월 8일)
상쾌한 아침이다.
오늘도 전통의 풍수사상이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던 하늘과 땅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풍수의 성립 근거를 살펴보고, 풍수가 전하고자 하는 積善之家 必有餘慶이라는 윤리관에 따라 산을 오르고
물을 건너는 登涉之勞를 마다치 않고 참여하신 회원님들 감사합니다.
오늘의 踏山地 牙山방향으로 車는 8시 정각에 出發하여 중부내륙도로 이용 천안나들목을 통해 운봉에
도착하니 10시 20분 경이다.
오늘의 첫 번째 踏山地는 牙山 음봉면사무소 뒤편 飛龍山 龍脈에 癸坐丁向으로 자리 잡은 海平 尹氏 해위
윤보선 대통령과 그 가족들의 묘역이다.
예로부터 牙山 땅은 山水가 수려하기로 이름난 고장이다.
東쪽으로는 천안에 南쪽으로는 온양에 西쪽으로는 음천에 이웃하고 北쪽은 평택에 맞닿아 있으며, 동림산.
고용산. 연암산. 입암산. 월랑산이 東西南北으로 둘러싸고 그 사이로 맑은 시냇물이 흘러 인심이 평안하고
살기 좋은 고장이다.
<神道碑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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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飛龍登天形 海平尹씨 尹得實 墓域
黨派 싸움이 한창일 무렵 많은 선비가 벼슬길을 던지고 낙향하여 여생을 시골에서 보내는 선비 중에 한 사람
이 바로 議政府恭贊 벼슬자리를 버리고 아산으로 낙향한 海平尹氏 尹得實 公이다.
海平尹氏 陰宅이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은 得實公의 三男이신 찬정공 취동께서는 마흔이 넘도록 子女가
없어 항상 집 앞에 죽을 쑤어 놓는 등 많은 사람에게 積善을 하였는데 어느 날 병든 스님을 돌보아 준 그
보답으로 스님이 묏자리를 가르쳐주어 부친 得實公을 모시고 난 뒤 아들 형제를 얻게 되었고, 그 후 집안이
發福하게 되었다고 傳 한다.
`人間萬事 다 전생의 연으로 정해져 있어 物各有主`라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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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전해오는 牙山 8명당 중에 월랑산 落脈을 中心으로 東쪽으로는 飛鳳歸巢形, 南쪽으로는 金鷄抱卵形,
西쪽으로는 飛龍登天形. 北쪽으로는 行舟形으로 크고 작은 명당자리가 山勢를 따라 많이 맺혀 있다고 한다.
이곳 山川의 모양이 龍이 고개를 들고 하늘로 오르려는 모습과 닮았다는 飛龍山의 5대조 윤득실(尹得實)
묘는 癸坐丁向의 飛龍登天形 명당으로 風水人들에게 알려 졌다.
神道碑閣 오른편 層階를 따라 오르면
*첫 번째 묘가 윤형선 묘소(윤 대통령의 막냇동생)
<윤형선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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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묘가 高靈 申氏 묘소(윤 대통령의 증조부의 첫 부인)
<고령신씨 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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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묘가 동야치소 이범숙 묘소 (윤 대통령의 부모님)
(東野致昭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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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묘가 교동공 내외 묘소(윤 대통령의 큰 증조부 내외)
<校東公 내외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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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묘가 5대조 협판공 得實 내외 묘소(윤 대통령의 고조할아버지 내외)
무수한 산봉우리가 마치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구름 때 모양으로 동서남북에서 이 산을 감싸주고 있다.
주산 화방산에서 힘차게 내리뻗어 천변만화의 기세로 달려오다가 甲方에서 솟구치고 艮寅으로 束氣하여
右旋으로 용머리를 돌려 癸丑 龍에 癸 入首하여 癸坐丁向이다.
<5대조 협판공 得實 내외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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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윤보선 대통령, 공덕귀 勸士 내외 묘소로 주변이 조용하고 호젓하다.
<五代 祖와 대통령의 묘 사이에 잔디밭이 있고 한가운데 十 字形으로 나무가 심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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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平尹氏 家門의 明堂 發福의 근원지가 된 이곳에 後孫들의 무덤이 들어서고 윤보선 대통령의 무덤이
위쪽에 逆葬으로 되어 있다.
윤 대통령은 기독교 집안이지만 風水說을 인정하였고, 自身이 직접 五代 祖의 墓에 雜草를 뽑고 雜木을
배고 잔디를 심고 先塋을 明堂으로 가꾸는 일에 열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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案山 너머로 저 멀리 바라보이는 뾰족한 산이 雪華山으로 모양이 뾰족하기가 마치 촛불 같고 그 봉우리가
다섯 봉으로 일명 오봉산이라고 한다.
산 形局이 玉燭照天形으로 생겨 밝은 촛불이 하늘을 비추는 형상으로 그 산이 바로 朝山이 되는 것이다.
<안산과 조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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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대통령은 國立墓地에 갈 수도 있었지만, 이 先塋에 安葬 되었으며, 윤 대통령은 조상의 묘소보다 본인이
더 위쪽에 자리를 잡은 것에 대해 할아버지가 孫子를 어깨에 목말 태우고 계신 모습과 같지 않느냐고
생각했다고 하니 孫子의 애교라 만사형통이다.
*윤 대통령의 祖父 되시는 경제공영열은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객사리에 모셔졌으며, 또 대통령의 曾祖父
되시는 취동공의 묘는 충남 아산 둔포면 석곡리에 있다.
<태풍회원님들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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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將軍大座形 충무공 李舜臣 장군 묘역
牙山의 어라산(於羅山)에 위치한 이순신 장군의 음택을 찾아 음봉 삼거리에서 직진하니 웅장한 정조대왕의
어제신도비(御製神道碑)가 나그네를 반긴다.
우측 道路를 따르니 정류장이다. 입구의 시원한 泉水는 초여름 따사로운 햇살에 갈증을 가시게 한다.
근엄하면서도 한국인의 특이한 사랑과 꼿꼿한 선비정신이 녹아 있는 것 같은 충무공 이순신, 음봉 어라산
하에 모셔진 將軍의 음택을 찾으니 今年이 충무공 이순신 장군 탄신 466주년이라 감회가 깊다.
일설에 의하면 이곳 이순신 將軍의 墓는 두사충(杜師忠)이 소점하였다는 장군대좌형국이라 하나 증명할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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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의 본관은 德水. 자는 여해(汝諧). 아버지는 거사 이정(李貞)이며 어머니는 草溪卞氏이다.
1545년(인종 1년)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났으며, 형제로는 희신. 요신 두 형과 아우 우신이 있다.
이순신 장군은 일본의 도요도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퇴각을 서두르는 고니시 부대를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
과 함께 공격하는 와중에 1598년 11월19일 노량전투에서 적의 유탄을 맞고 세상을 떠났다. 이순신의 전사
소식이 전해지자 선조는 관원을 보내 조상하고 우의정에 추증했다.
1604년 선무공신 1등에 녹훈되고 덕풍부원군에 추봉되었으며, 좌의정에 추층되었다. 1793년(정조 17) 다시
영의정이 더해졌고, 시호는 충무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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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한 충무공의 시체는 남해대교 근처 충렬사에 잠시 안치되었다가 곧 본진이 있는 전남 완도군 고금도에
서 이듬해 충남 아산 금성산 밑에 장사 지냈다가, 16년 뒤 1614년(광해군 6년)에 현재의 자리로 移葬하였다.
主山은 월랑산 높은 봉이 되고 그 줄기가 다시 힘차게 솟구치어 생긴 산이 어라산(於羅山)으로, 속칭 투구봉
으로 불리는 어라산의 형상은 옛 將軍이 쓰던 투구와 같다 하여 투구봉 밑에 모셔져 있다.
主山에서 龍脈이 훌륭하게 내려오다가 胎를 만들고 기운이 힘차게 穴場에 맺혀, 전체적인 局勢는 아담하게
잘 짜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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穴場에서 得水를 살펴보니 右旋水하고, 白虎 肩이 약간 虛하여 살풍의 영향이 있으나 白虎가 내 本身에서
출발하여 나왔으므로 내 本身의 下砂는 穴場보다 약간 낮아도 큰 흠이 되지는 않는다.
墓의 구조는 일반 묘와 달리 조선 시대 고관 묘의 전형적 규격에 따라 9각형으로 되어 있고, 봉분 앞으로는
水脈이 형성되어 있어서 穴場의 氣運이 泄氣되는 것을 막아줘서 좋으며, 氣脈은 좌측의 虎石이 있는 곳으로
내려간다.
坐向은 癸坐丁向으로 靑龍은 가까이 감싸 약간 끊긴 듯하다가 다시 머리를 들어 주위를 감싸고, 白虎는
가지런히 혈을 護從하고 백호 밖에 뭇 봉우리는 連珠를 연상케 하니 文武를 겸한 將軍大座形局이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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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李舜臣은 애초에 영웅적인 행동을 의도하지도 않았을뿐더러 평범한 관료로서 처세에 무관심하고 시류
에 영합하지 않았다.
비록 學文을 했으나 당시의 주류인 文官이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평생 武를 업으로 삼아온 전형적인 무장도
아니었다. 勇將이라기보다는 오히려 智將이요 德將으로 일컬을 수 있을 것이다.
이순신은 선비의 풍모를 갖춘 무장이었다.
충무공의 삶 밑바탕에는 조선 성리학이 다듬어 놓은 선비정신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무관이었지만 문관인 서애 류성룡과 知己였던 것도 그렇다.
<너무나도 인간적인 묘역의 石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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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李舜臣의 삶의 애환과 시대에 대한 번민 그리고 죽음에 대한 사유를 묘사한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忠武公 李舜臣 장군이 남긴 인간적인 시조라 하겠다.
<멀리 설화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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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하는 이야기>
전설에 의하면 李舜臣 장군의 6대조 이소(李邵)의 묘는 경기도 개성군 중면 덕수리 왕대동 서쪽에 있는데
也字形의 명당이라고 한다.
중국의 地師가 조선의 혈맥을 따라 踏山하다가 이 묘에 이르러 매우 놀라며 6대 후에는 틀림없이 중국의
공자나 제갈공명, 그리고 이태백에 견줄만한 큰 인물이 나올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그의 예언대로 공자와 비유되는 이율곡이 나왔고, 제갈공명에 해당하는 李舜臣 장군이 나왔으며, 이태백에
해당되는 조선 한문학 4대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택당(澤堂) 이식(李植)이 나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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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韓末의 風雲兒 古筠 金玉均 묘역
음봉 李舜臣 장군묘소 바로 앞 삼거리에서 아산온천 방향으로 좌회전해서 들어가면 한 말의 開化派인 風雲兒
김옥균(金玉均)의 墓所가 있는 靈仁面 牙山里에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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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玉均의 墓所는 영인면 아산리 영인초등학교 뒷산, 현무봉 중심에서 한쪽으로 약간 치우쳐 보이는 곳에
한 말의 정치가이자 開化運動家였던 고균(古筠) 金玉均(1851~1894)의 墓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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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玉均은 고종 9년(1872)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은 호조참판에 이르렀으며 1884년 조국 개화를 위해
甲申改革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1894년 한. 청. 일 3국의 제휴 위한 삼화주의를 제창 동양의 백년대계를 위하여 청국의 실력자 이홍장과
의논하고자 텐진을 방문하던 중 동년 3월 28일 상해 도와 가로(東和洋行)라는 여관에서 수구파의 자객 홍종우
(洪鍾宇)에게 암살당하였으며 시체는 본국으로 돌아와 4월 13일 양화진에서 능지처참 되었다.
<古筠 金玉均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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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玉均 墓所 아래쪽에는 사당이 있고, 墓所는 牙山이라는 명칭의 유래가 되어 어금니 바위가 있는 영인산
아래에 있으나 무덤이라 하지만 사실은 屍身도 없다. 金玉均의 시신은 능지처참으로 갈가이 찢겼고 목도
효수되어 길거리에 매달리는 신세가 되지 않았던가. 그런 屍身을 그 누가 제대로 거두어줄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이 墓所는 실제 屍身은 없고 다만 1914년 9월 11일 일본 동경 청산외인 묘지(靑山外人 墓地)에 있던
의발(衣髮)을 가져와 貞敬夫人 兪氏와 合葬한 것이다.
<3日天下!. 꿈의 空虛함을 달래기 위해 멀리 아산 灣을 바라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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開化革命 꿈꾼 韓末의 風雲兒, 위대한 패배자 金玉均.
"三日天下"로 막을 내린 未完의 혁명이었으나 甲申政變의 원동력인 김옥균의 開化思想은 우리 근대사의
새벽을 찬란하게 빛내고 처절하게 불태웠던 혜성이었다.
風雲兒 金玉均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곧 韓末 비극의 대서사시가 아니고 무엇이랴.
`古筠居士安東金公玉均之墓 配貞敬夫人杞溪兪氏부좌`로 새겨진 시신 없는 빈 묘소의 비석만이 개화 혁신의
불타는 정신을 오래 전하리라.
<古筠 金玉均 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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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서휴게소 露天 홀에서 - 슬슬 시작해 봅시다. 술판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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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踏山에 수고하신 태극풍수회원!
한잔하시며 하루의 여독을 풀어 봅시다.
그리고 來日을 위하여 *******
항상 健康하시길 기원합니다. 끝.
2011년 5월 8일 淸虛堂 드림
첫댓글 회장님 우리 회장님 덕분에 많은 배우는 학생이 됩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