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之所惡(인지소오) : 뭇 사람들이 꺼리는 것이
唯孤寡不穀(유고과불곡) : ‘외로움(孤)’, ‘짝 잃음(寡)’, ‘보잘 데 없음(不穀)’이나,
而王公以爲稱(이왕공이위칭) : 임금은 이를 자기 호칭으로 삼는다.
故物或損之而益(고물혹손지이익) : 고로 만물은 잃어서 얻기도 하고,
或益之而損(혹익지이손) : 얻어서 잃기도 하는 법이다.
人之所敎(인지소교) : 사람들 가르치는 바를
我亦敎之(아역교지) : 나 또한 가르치려니,
强梁者不得其死(강량자부득기사) : 강하고 사나운(强梁) 사람 제명에 죽지 못한다는 것을
吾將以爲敎父(오장이위교부) : 내 가르침의 으뜸으로 삼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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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 하나(一)를 낳고,
하나가 둘을 낳고,
둘이 셋을 낳고,
셋이 만물을 낳으니,
만물은 음(陰)을 업고 양(陽()을 안아
텅 빈 기운(氣)으로 조화(和)를 이루게 하리라.
뭇 사람들이 꺼리는 것이
‘외로움(孤)’, ‘짝 잃음(寡)’, ‘보잘 데 없음(不穀)’이나,
임금은 이를 자기 호칭으로 삼는다.
고로 만물은 잃어서 얻기도 하고,
얻어서 잃기도 하는 법이다.
사람들 가르치는 바를 나 또한 가르치려니,
강하고 사나운(强梁) 사람 제명에 죽지 못한다는 것을
내 가르침의 으뜸으로 삼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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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만물은 음지를 등지고 양지를 껴안아
그 가운데의 기운을 조화롭다고 여긴다.
천하가 싫어하는 것은 오직 외롭고, 덕이 부족하며, 선하지 않은 것이나
왕공은 스스로 그것으로 이름한다
일이란 혹 덜어내려고 하여도 오히려 보태지고
보태려고 하여도 덜어지는 법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가르칠 때는
또한 이 뜻으로 가르쳐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강하고 굳세기만 한 사람은 옳게 죽지 못한다
나는 그것을 배움의 근본으로 삼을 것이다.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萬物負陰而抱陽, 中氣以爲和. 天下之所惡, 唯孤寡不穀, 而王公以自名也. 物或損之而益, 益之而損. 故人之所敎, 亦義以敎人. 故强梁者, 不得其死. 我將以爲學父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노자(삶의 기술, 늙은이의 노래), 2003. 6. 30., 김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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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강남 역>
道生一(도생일) : 도가 하나를 낳고
一生二(일생이) : 하나가 둘을 낳고
二生三(이생삼) : 둘이 셋을 낳고
三生萬物(삼생만물) : 셋이 만물을 낳는다.
萬物負陰而抱陽(만물부음이포양) : 만물은 음을 등에 업고 양을 가슴에 안았다
沖氣以爲和(충기이위화) : 기를 비움으로 조화를 이룬다.
人之所惡(인지소악) :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은
唯孤寡不穀(유고과불곡) : 고아, 과부, 보잘 것 없는 사람이지만
而王公以爲稱(이왕공이위칭) : 이것은 임금이나 공작이 자기를 칭하는 이름이다
故物或損之而益(고물혹손지이익) : 그러므로 사물은 잃음으로 얻기도 하고
或益之而損(혹익지이손) : 얻음으로 잃는 일도 있다
人之所敎(인지소교) : 사람들이 가르치는 것을
我亦敎之(아역교지) : 나도 역시 가르친다.
强梁者不得其死(강량자불득기사) : 강포한 자 제명에 죽지 못한다고 한다.
吾將以爲敎父(오장이위교부) : 나도 이것을 내 가르침의 으뜸으로 삼고자 한다.
<노바당 역>
도가 <하나>를 낳고
<하나>가 <둘>을 낳고
<둘>이 <셋>을 낳고
<셋>이 만물을 낳는다.
만물은 <음>을 등에 업고 <양>을 가슴에 안았다.
<기>가 서로 합하여 조화를 이룬다 .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은
<고아 같은 사람>, <짝잃은 사람>, <보잘 것 없는 사람>이지만
이것은 임금이나 공작이 자기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그러므로 잃음으로 얻기도 하고
얻음으로 잃는 일도 있다.
사람들이 가르치는 것
나도 가르친다.
강포한 자 제명에 죽지 못한다고 한다.
나도 이것을 나의 가르침의 으뜸으로 삼으려 한다.
<임채우 역>
42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으며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으며,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만물은 음을 지고 양을 품으며,
용솟음치는 기운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사람들은 외로움과 모자람과 덕없음을 싫어하지만,
왕공은 이것을 칭호로 삼나니,
만물은 덜어내면 오히려 더해지며,
더하려다가 오히려 덜어지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가르치는 것을 나도 가르치나니,
사납게 구는 자는 제대로 죽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가르침의 으뜸으로 삼으리라.
<James Legge 역>
1. The Tao produced One; One produced Two; Two produced Three; Three produced All things. All things leave behind them the Obscurity (out of which they have come), and go forward to embrace the Brightness (into which they have emerged), while they are harmonised by the Breath of Vacancy.
2. What men dislike is to be orphans, to have little virtue, to be as carriages without naves; and yet these are the designations which kings and princes use for themselves. So it is that some things are increased by being diminished, and others are diminished by being increased.
3. What other men (thus) teach, I also teach. The violent and strong do not die their natural death. I will make this the basis of my teaching.
<Lin Derek 역>
Tao produces one
One produces two
Two produce three
Three produce myriad things
Myriad things, backed by yin and embracing yang
Achieve harmony by integrating their energy
What the people dislike
Are alone, bereft, and unworthy
But the rulers call themselves with these terms
So with all things
Appear to take loss but benefit
Or receive benefit but lose
What the ancients taught
I will also teach
The violent one cannot have a natural death
I will use this as the principal of all teachings
<장도연 역>
제42장 강포한 사람은 명대로 살지 못한다
道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만물은 음을 등지고 양을 품어
음양 두 기운으로 새로운 화합이 된다.
사람은 외로움과 부족함, 궁핍함을 싫어하는데
왕이나 제후들은 이것을 자신의 칭호로 사용한다.
그러므로 사물은
감소하면 증가하고
증가하면 감소한다.
사람들이 가르치는 것을
나 또한 가르칠 것이다.
강포한 사람은
죽을 때 제대로 못 죽는다.
나는 그것을 가르침의 근본으로 삼을 것이다.
<왕필 노자주 / 임채우 역>
도는 일(一)을 낳고, 일은 이(二)를 낳으며, 이는 삼(三)을 낳고, 삼은 만물을 낳는다. 만물은 음을 지고 양을 품으며, 텅 빈(혹은 용솟음치는) 기운으로써 조화를 이룬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은 외로움과 (덕이) 모자람과 착하지 못함인데, 왕공은 이것을 칭호로 삼나니, 그러므로 사물은 혹 덜어내도 오히려 더해지며, 더하는데도 오히려 덜어지기도 한다.
<주석>
『노자』 39장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주석>
『설문해자』에 “충은 솟구쳐오름이다(沖 涌搖也)”라고 했다. 그러나 문맥상 왕필은 ‘충’(沖)을 ‘비었다’는 뜻으로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 人之所惡, 唯孤寡不穀, 而王公以爲稱, 故物或損之而益, 或益之而損.
온갖 사물과 형체는 모두 일(一)로 돌아간다. 무엇으로 말미암아 일에 이르는가? 무로 말미암는다. 무로 말미암아 일에 이르니 일은 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미 일이라고 했으니 어찌 말이 없을 수(혹은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말이 있고 일이 있으니 이(二)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일이 있고 이가 있으니 드디어 삼(三)을 낳게 된다. 무에서 유로 나아감에 여기에서 수는 끝나고(혹은 모든 수가 여기로부터 이런 방식으로 생겨나고), 이렇게 나온 것은(즉 일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잡다한 수들은) 도의 무리가 아니다.
그러므로 만물이 생겨남에 나는 그 주를 아니, 비록 온갖 형체가 있어도 충기(沖氣)는(즉 빈 무의 기운은, 혹은 솟구치는 기운은) 하나이니, 백성마다 각자 마음이 다르고 나라마다 풍속을 달리하지만 왕후는 일(一)을 얻어서 주가 된다. 일이 주가 되니 일을 어찌 버릴 수 있겠는가? 많아질수록 (도로부터) 멀어지고 덜어내면 도에 가까워지니, 다 덜어내 버려야 그 궁극을 얻는다. 일이라고 말했을 뿐인데도 오히려 바로 삼(三)이 되어 버리거늘 하물며 근본이 일이 아닌데 도에 가까울 수 있겠는가? 덜면 더해지고, 더하려면 덜게 된다는 것이 어찌 헛말이겠는가?
萬物萬形, 其歸一也. 何由致一? 由於無也. 由無乃一, 一可謂無. 已謂之一, 豈得無言乎? 有言有一, 非二如何? 有一有二, 遂生乎三. 從無之有, 數盡乎斯, 過此以往, 非道之流.
<주석>
『장자』 「제물론」(齊物論), “이미 하나라고 말했는데 또한 말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하나와 하나라는 말을 합하여 둘이 되고 둘에 하나를 합하면 셋이 된다. 이와 같이 하여 나아가면 아무리 셈을 잘하는 사람이라도 헤아릴 수 없으니 하물며 보통 사람들에게 있어서랴! 그러므로 무로부터 나아가도 삼에 이르는데 하물며 유에서 유로 나아감에 있어서랴!(.旣已爲一矣. 且得有言乎? 旣已謂之一矣, 且得無言乎? 一與言爲二, 二與一爲三. 自此以往, 巧曆不能得, 而況其凡乎! 故自無適有以至於三, 而況自有適有乎!)” 참조.
故萬物之生, 吾知其主, 雖有萬形, 沖氣一焉. 百姓有心, 異國殊風, 而王侯[得一者]主焉. 以一爲主, 一何可舍? 愈多愈遠, 損則近之. 損之至盡, 乃得其極. 旣謂之一, 猶乃至三, 況本不一, 而道可近乎? 損之而益, [益之而損], 豈虛言也.
<주석>
앞의 『노자』 22장 왕필 주, “自然之道, 亦猶樹也. 轉多轉遠其根, 轉少轉得其本. 多則遠其眞” 및 『노자』 48장, “爲學日益, 爲道日損” 참조.
세상 사람들이 가르치는 것을 나 또한 가르치나니,
人之所敎, 我亦敎之,
내가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은 억지로 따르도록 시키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그러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지극한 이치를 따르면 반드시 길하고, 어기면 반드시 흉하므로, 사람들이 ‘이를 어기면 스스로 흉하게 된다’고 서로 가르치게 되니, 내가 또한 사람들에게 어기지 말라고 가르치게 된다.
我之[敎人], 非强使從之也, 而用夫自然. 擧其至理, 順之必吉, 違之必凶. 故人相敎, 違之[必]自取其凶也, 亦如我之敎人, 勿違之也.
강포하게 구는 자는 제대로 죽지 못하나니, 나는 이로써 가르침의 어버이로 삼으리라.
强梁者不得其死, 吾將以爲敎父.
강포하게 굴면 반드시 제대로 죽지 못한다. 사람들이 서로 억세져야 한다고 가르치게 되면, 반드시 내가 사람들에게 억세게 굴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게 된다. 그 억센 것이 제대로 죽지 못하는 것을 예로 들어 가르치는 것은, 내 가르침에 따르면 반드시 길할 것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가르침을 어기는 무리들로서 바로 가르침의 어버이로 삼을 수 있다.
强梁則必不得其死. 人相敎爲强梁, 則必如我之敎人不當爲强梁也. 擧其强梁不得其死以敎邪, 若云順吾敎之必吉也. 故得其違敎之徒, 適可以爲敎父也.
<주석>
이 부분은 노자의 경문과 뜻이 맞지 않아 여러 주석이 나와 있다. 특히 ‘즉필여’(則必如) 세 글자를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 이 구절의 의미가 달라지게 된다. 도홍경은 ‘즉’(則)자가 ‘비’(非)자의 잘못이라 했고, 엄영봉(嚴靈峰)은 ‘필’(必)을 ‘불’(不)로 보았다.(『도홍경노자왕필주감오보정』(陶鴻慶老子王弼注勘誤補正) 참조.) 그러나 필자의 견해로 이 부분의 뜻은 바로 윗 단락의 왕필 주 “故人相敎, 違之必自取其凶也, 亦如我之敎人, 勿違之也”와 의미가 통하는 것으로, 특히 여기서의 ‘여’(如)자를 ‘응당’(應當)의 뜻이나(『左傳』 「昭公 二一年」 “君若愛司馬, 則如亡”), “순종ㆍ의조”(順從ㆍ依照)의 뜻(예를 들어 如約 如命의 경우, 『左傳』 「宣公 十二年」 “有律以如己也”의 杜預 注 “如,從也” 참조)으로 해석하면 전체적으로 앞뒤의 문리가 순통해서, 글자를 고칠 필요가 없다.
<Stefan Stenudd 역>
The Way gave birth to one.
One gave birth to two.
Two gave birth to three.
Three gave birth to all things.
All things carry yin and embrace yang.
They reach harmony by blending with the vital breath.
What people loathe the most
Is to be orphaned, desolate, unworthy.
But this is what princes and kings call themselves.
Sometimes gain comes from losing,
And sometimes loss comes from gaining.
What others have taught, I also teach:
The forceful and violent will not die from natural causes.
This will be my chief doctrine.
Violence Meets a Violent End
This chapter consists of two parts, which have so little to do with one another that they were surely not originally intended to be combined. The first part deals with the creation of the world, and the second with commendable attitudes in human life.
There have been many theories about what Lao Tzu might mean with the one, two, three, in the first few lines. One should normally be Tao, the Way. So, did it give birth to itself? Well, it sort of did, since it has no other creator. Tao emerged, which is a kind of birth, and ignited the creation of the whole world.
The two would normally be yin and yang, the classical Chinese duo behind all polarities in the world – such as light and dark, high and low, male and female, and so on. Lao Tzu has stated earlier that he regards the emergence of yin and yang as belonging to the creation of the world. So, this may very well be what he implies here.
What three were born out of the two is much more difficult to ascertain. Heaven and Earth would have appeared early in any creation story of ancient China, as well as in most other cultures, but what might the third be?
Some say man, others say ch’i (also spelled qi ), the vital breath. Man is more likely to be included among all things, appearing later, so the vital breath would be more likely here. The lines that follow do indeed support an early appearance of the vital breath.
Maybe the line should be read: “Two gave birth to the third.” The Chinese wording of the text allows for this reading. It would need to mean that ch’i emerged out of yin and yang. This is actually similar to the Chinese tradition on the matter.
Still, I’m not convinced that Lao Tzu intended for these lines to be interpreted that literally. Maybe he was only suggesting that as soon as Tao broke up the original unity, which might be called chaos, then things started to appear, one after the other, in no particular order. Soon, there were ten thousand things, the Chinese expression for all things. He found no need to specify the exact order of appearance.
What he says about the behavior of all things is much more significant and precise. They carry yin and embrace yang. This is an elemental yin and yang principle. Both exist in everything, although sometimes in unbalanced proportions. Earth is the very signature of yin, and the same goes for Heaven and yang. Everything in between the two should be mixtures of yin and yang.
All things then reach harmony by blending with the vital breath, the life energy ch’i . Without it they would not remain and not have the ability to move or change. They would not be alive. About the vital breath, see chapter 10. It’s also mentioned in chapter 55.
Orphaned, Desolate, and Unworthy
The second part of the chapter repeats what has been stated in chapter 39, about being orphaned, desolate, and unworthy. Here, Lao Tzu adds that gain can lead to loss, and loss to gain. This is an important warning. If rulers belittle themselves, their reputation gains from it. If they were to do the opposite, they would surely lose their reputation, eventually.
Still today, it’s easy to reveal bad leaders, because they are almost always the ones most eager to be praised. That simply means they strive for personal gain. Usually, they don’t seek just fame, but also fortune, increased power, and on and on.
The paradox of gain leading to loss is not only true for ruling, but for any endeavor. Aiming too high is bound to cause failure. Greed is costly, pride is shameful. In business, you can’t get profit without investment. Personal relations don’t last without compromise. Life is diluted if you only struggle to prolong it.
Moderation in all things is the most likely to succeed.
Violence
The last lines could very well be intended as separate from the preceding ones. It’s a simple statement. Those who live violently risk dying the same way. History has shown us countless examples of it.
Here, too, moderation is to recommend. Lao Tzu repeats that we should avoid any extremes. Although he rarely makes moral judgments on people’s life choices, he does confess that he is repelled by brutality, and by the search for personal gain gone wild.
He will come back to it in other chapters, but already here he is quite clear about it. Don’t rock the boat, especially not for personal gain. Nature is rich enough to support us all in abundance, if there are not some who forcefully claim much more than their share.
Still, that’s far from unknown to 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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沖(虛) 도덕경 비교
(3장) 虛其心, 實其腹, 弱其志, 强其骨
(4장) 道, 沖而用之, 或不盈
(5장) 天地之間, 其猶橐龠乎, 虛而不屈, 動而愈出
(11장) 三十輻共一轂, 當其無, 有車之用(유차지용)
(16장) 致虛極, 守靜篤
(22장) 豈虛言哉, 誠全而歸之
(42장)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
(45장) 大盈若沖, 其用不窮
(53장) 朝甚除, 田甚蕪, 倉甚虛,
母(牝, 陰) 도덕경 비교
(1장)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6장) 谷神不死, 是謂玄牝, 玄牝之門, 是謂天地根
(20장) 我獨異於人, 而貴食母
(25장) 有物混成, 先天地生, 寂兮료兮, 獨立不改, 周行而不殆, 可以爲天下母
(42장)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
(52장) 天下有始, 以爲天下母, 旣得其母, 以知其子, 旣知其子, 復守其母, 沒身不殆
(59장) 有國之母, 可以長久, 是謂深根固柢, 長生久視之道
(61장) 大國者下流, 天下之交, 天下之牝, 牝常以靜勝牡, 以靜爲下
抱 도덕경 비교
(10장) 載營魄抱一, 能無離乎
(19장) 故令有所屬, 見素抱樸, 少私寡欲
(22장) 曲則全, 枉則直, 窪則盈, 幣則新, 少則得, 多則惑, 是以聖人抱一爲天下式
(42장)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
(54장) 善建者不拔, 善抱者不脫, 子孫以祭祀不輟
一 도덕경 비교
(10장) 載營魄抱一, 能無離乎
(11장) 三十輻共一穀, 當其無, 有車之用
(14장) 故混而爲一, 其上不교, 其下不昧
(22장) 曲則全, 枉則直, 窪則盈, 幣則新, 少則得, 多則惑, 是以聖人抱一爲天下式
(39장) 昔之得一者, 天得一以淸, 地得一以寧, 神得一以靈, 谷得一以盈, 萬物得一以生, 侯王得一以爲天下貞, 其致之
(42장)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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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예전부터 일부에서는 여기의 하나·둘·셋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밝힘으로써 이 문장을 체계적 우주 발생론으로 이해하려고 했다. 가령 하상공은 '하나'가 무엇인지 밝히지는 않았지만 '둘'은 음양을, '셋'은 화기(和氣)·청기(淸氣)·탁기(濁氣)를 가리킨다고 하면서2) 이 화기·청기·탁기가 천·지·인으로 나뉘어지고 천·지·인이 만물을 낳기 때문에 "셋은 만물을 낳는다"고 하였다고 설명한다. 이영(송)은 이런 하상공의 해설을 좀더 구체화하는데, 그에 따르면 이 문장은 '허(虛: 도)' 가운데에서 일기(一氣)가 움직이고, 일기가 청·탁으로 나뉘어져 음양이 드러나며, 음양이 운동하여 삼재(三才)가 생겨나고 삼재가 만물을 낳는 우주 발생론을 보여준다. 이영의 해설 중에서 원기를 태극으로 바꾸거나(임희일) 삼재를 화기(和氣)로 바꾼 도식도 있지만(사마광) 대체로 같은 계열의 해설이라고 하겠다.
후대의 사상사적 발전을 생각하면 이렇게도 설명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이런 해설은 『노자』 자체에서 어떤 근거도 확보하지 못한다. 음양 우주론은 『주역』의 해설서, 곧 역전(易傳) 이전에는 완성되지 않으며, 삼재 관념은 한대에 형성된 것이다.3)
그러므로 우선 『노자』를 통해 『노자』를 보는 것이 순서다. 이때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노자』에 "도는 (만물을) 낳는다(51)"는 관념이 있다는 사실, 또 『노자』가 '하나'라는 추상적 범주를 운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미 설명한 것처럼 '하나'는 전국시대에 세계의 근원이자 만물의 시작을 의미하는 주요한 범주로 부상했다. 이 문장에서의 '하나' 역시 그러한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다. 지금 『노자』는 그러한 세계관에 "도는 하나를 낳는다"는 그 자신의 명제를 슬며시 덧붙이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노자』는 만물은 '하나'에서 시작된다는 세계관을 받아들이면서도 "도는 (만물을) 낳는다"는 자신의 형이상학을 관철시킨다. 곧 지금 『노자』는 전국 말기에 중시되었던 '하나'라는 범주 위에 도를 올려놓아 도의 우월성을 선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인·의라는 덕성 위에 도·덕을 올려놓아 도·덕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것과 같다.
특히 나는 지금 『노자』의 문장이 다음과 같은 『장자』의 글에서 영향받은 것임과 동시에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도에서 쓰이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장자』에는 이미 하나·둘·셋이라는 개념을 통해 만물의 발생을 설명하는 글이 있다.
천지는 나와 함께 태어나고 만물은 나와 함께 하나가 된다. 이미 하나가 되었으니 무슨 말이 있겠는가. 이미 하나가 되었다고 말했으니 어찌 말이 없겠는가. 하나와 말이 모여 둘이 되고, 둘과 하나가 모여 셋이 된다. 이 뒤로는 교묘히 계산하는 사람도 알 수 없는데, 하물며 평범한 사람이겠는가(「제물론」).
지금 『노자』는 이 발생론에 "도는 하나를 낳는다"는 새로운 명제를 덧붙이고 있는 셈이다. 왕필은 이 『장자』의 글에 기초하여 지금 『노자』의 문장을 설명하고 있는데, 그런 면에서도 두 글의 연관성이 확인된다.
그럼에도 "도는 하나를 낳는다"는 말은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 같다. '하나'를 근원과 시작으로 이해하는 세계관은 『노자』 이후에도 계속 득세했기 때문이다. 전국 말기 이후 한대의 분위기로 볼 때는 도도 근원적이지만 '하나'도 근원적이기 때문에 이 둘 사이에 '낳는다'는 관계를 설정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회남자』는 지금 『노자』의 문장을 해설하면서도 "도는 하나를 낳는다"는 말을 생략한다.
도는 하나(일)에서 시작되지만 하나로는 무엇인가를 낳지 못한다. 그러므로 나뉘어 음양이 되고, 음양이 화합하여 만물이 태어난다. 그러므로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고 하였다(「천문훈」).4)
「천문훈」도 『노자』의 문장을 우주 발생론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앞에서 거론한 하상공·이영 등의 해설은 「천문훈」의 해설에 빚을 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천문훈」은 "도는 하나에서 시작된다"고 하여 오히려 '하나'를 우위에 두는 듯하다. 우열을 이야기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면 최소한 두 범주를 동일시한다고는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도와 '하나'를 동일시하는 『회남자』의 전체적 입장에서 볼 때 지극히 당연하다.
「천문훈」뿐 아니라 「정신훈」도 지금 『노자』의 본문을 인용하면서 마찬가지로 "도는 하나를 낳는다"는 말을 생략한다. "무릇 정신은 하늘에서 받은 것이고, 형체는 땅에서 품부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고 하였다." 또한 『설문』에서도 "오직 처음 태시(太始)의 시절에 도는 하나에서 세워졌으니〔道立於一〕 그것이 천지로 나뉘어 만물을 화육한다"는 말을 발견할 수 있다. 『설문』도 도와 '하나'를 적어도 동등하게, 어떤 면에서는 '하나'를 더 근원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런 것이 한대의 분위기가 아니었나 싶다. 단지 『문자』만 「정신훈」을 거의 그대로 복사하면서도 "도는 하나를 낳는다"는 말을 추가로 인용한다(「구수」).
후대의 주석에도 이런 한대의 분위기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 적지 않다. 가령 범응원은 "도는 '하나'일 따름이다"라고 했으며, 마서륜·장석창 같은 근대의 주석가도 모두 같은 입장을 취한다. 하지만 이것은 『노자』를 글자 그대로 이해한 것은 아니다. 『노자』에서는 "도가 하나를 낳는다."
본문의 하나·둘·셋이 그에 상응하는 특별한 뜻을 지니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굳이 "셋은 만물을 낳는다"고 한 데는 어떤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
우선 3의 수비학적 함의에 주목하는 해설을 생각해보자. 『사기』 「율서」는 "수는 하나에서 시작하고 열에서 끝나며 셋에서 완성된다"고 하여 3이라는 숫자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사실 『사기』 「율서」뿐 아니라 『한서』 「율력지」 등 율력을 논한 모든 책에서 3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농경 사회였던 중국은 일 년 열두 달이라는 자연 현상을 보고 12율이라는 문화의 기본 요소〔律〕와 12지라는 시간의 기록 방법〔曆〕을 확정했고, 12는 3의 4배수로서 3과 긴밀히 연관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령 『사기』 「율서」는 종률(鍾律)과 오음(五音)을 설명하면서 항상 3을 주요한 요소로서 이용한다.5) 또한 율력이 3을 기본 요소로 한다는 사실은 점차 제도 전반에 유사과학적 자연성을 부여하는 데 3을 사용하게 했으며, 나아가 세계 및 우주의 탄생을 설명하는 데도 3이라는 숫자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전형적 사례는 『회남자』 「천문훈」에서 찾을 수 있다. 「천문훈」은 『노자』에서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는 문장을 인용하고는 "천지는 3개월을 한 계절로 삼으니 그 때문에 제사에서는 삼반(三飯)을 예로 삼는다. ……3으로써 사물을 연구한다"고 하여 곧바로 3으로 어떻게 세계가 설명될 수 있는지를 서술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그렇지만 이런 해설이 본래의 『노자』를 제대로 설명하고 있는가? 이런 식의 수비학적 우주론은 한대에 발전한 것이므로 그것을 『노자』에 적용시키는 것을 적절하지 않다. 오히려 『노자』 본문에서 '셋'이라는 관념은 뒤이어 나오는 '조화'라는 관점과 연결시키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한다. '둘'에는 항상 대립의 의미가 있을 수 있으므로 조화를 강조하는 『노자』는 자연스럽게 '셋'이라는 숫자를 선택했을지 모른다. 물론 이런 것도 추측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이 글(42) 전체에서 『노자』가 조화로움을 강조한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만물은 음지를 등지고 양지를 껴안아 그 가운데의 기운을 조화롭다고 여긴다
萬物負陰而抱陽, 中氣以爲和
여기에서 음·양이 어느 정도 추상화된 개념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곽점 죽간의 『태일생수』를 살펴보자. 『태일생수』는 죽간의 형태로 볼 때 『노자』와 관련이 있는 세 무더기의 곽점 초간 중 가장 크기가 작은 병조와 완전히 일치하며 정리조에 따르면 "노자 병조와 원래 하나의 책으로 묶여졌을 가능성이 있다(125쪽)."
태일이 수(水)를 낳고, 수는 거꾸로 태일을 돕는다. 이로써 하늘〔天〕이 이루어진다. 하늘은 거꾸로 태일을 돕고 이로써 땅〔地〕이 이루어진다. 하늘과 땅이 다시 서로 도와 이로써 신명(神明)이 이루어진다. 신명이 다시 서로 도와 이로써 음양이 이루어진다. 음양이 다시 서로 도와 이로써 사시(四時)가 이루어진다. 사시가 다시 서로 도와 이로써 차가움〔滄〕과 뜨거움〔熱〕이 이루어진다. 차가움과 뜨거움이 서로 도와 이로써 축축함〔濕〕과 건조함〔燥〕이 이루어진다. 축축함과 건조함이 다시 서로 도와 한 해〔歲〕를 이루게 된다.
여기에서 음양 관념은 아직 천지와 일치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아직 역전(易傳)의 단계까지 발전하지 않았으며, 세상의 모든 대립하는 것을 포괄하는 보편 개념으로 추상화되지 않았다. 문맥으로 볼 때 여기에서의 음양은 아마도 기후와 관련이 있는 개념인 듯하다. 음양은 신명과 사시(사계절)를 이어주는 개념이며, 사시 이후로는 기후와 관련이 있는 개념만 나온다.
음양은 원래 '구름이 해를 가리는 것'과 '해가 떠올라 마을에 깃발을 내거는 것'을 가리키는 글자였으며(양계초, 1925), 『묵자』와 『국어』, 『좌전』의 기록을 보면 춘추 말기까지도 기후와 관련된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서복관, 1969). 이후 전국시대에는 『순자』 등에서 음양 관념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역시 후대의 음양론과는 거리가 멀고, 역전이 등장하기 이전까지는 보편 이론으로서의 음양론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역전 이전의 문건인 『태일생수』에서 음양이 단지 기후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노자』의 음양 역시 『태일생수』의 음양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노자』가 『태일생수』 이상으로 음양 개념을 발전시켰다는 흔적은 아무 데도 없다. 그러므로 『노자』의 음양은 추상적 범주가 아니라 밝음이나 어두움 정도의 기후와 관련된 개념일 것이다. 사실 체계화된 음양론에 『노자』가 영향을 받았다면 그 흔적이 단지 이 짤막한 구절 하나에만 남아 있을 리 없다. 보편 이론으로서 음양론은 포식성이 대단히 강하기 때문이다.
현재 학계는 니담(Needham)의 영향을 받아 음양론을 유기체론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나도 한때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기계론과 유기체론을 대비시키는 것은 재미있는 발상이지만 그것이 옳은지는 좀더 생각해보아야 한다. 과연 음양론은 우주의 생명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가? 성급히 결론내릴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때로 음양론은 기계론적 특성을 띠고 나타난다. 음이 극하면 양이 된다는 것만큼 기계적인 도식도 쉽지 않다. 도의 모호함 뒤에 숨은 『노자』의 사유로는 음양론이 기계론처럼 보일 수도 있다. 『노자』가 초간문 병조와 같이 붙어 있던 『태일생수』의 우주 발생론을 자신 속에 흡수하지 않은 것은 그 기계론적 성격이 싫었기 때문이 아닌가도 싶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나는 "부음이포양(負陰而抱陽)"을 "음지를 등지고 양지를 껴안는다"고 해석한다. 이때 '부(負)'는 '배(背)'와 같은 의미다(『석명(釋名)』 「석자용(釋姿容)」). 단지 차가운 기운이라고 멀리만 할 수 없고, 따뜻한 기운이라고 달려들 수만 없기 때문에 만물은 음지와 양지가 교차하는 곳에서 등으로는 음지를 지고 가슴으로는 양지를 느끼고 있다. 만물이 음지와 양지를 동시에 포용하는 것처럼 인간도 밝은 곳과 어두운 곳에 적당히 걸치고 앉아야 안전할 수 있다는 것이 아마 『노자』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중기(中氣)'는 모든 통행본에 '충기(沖氣)'로 되어 있고, 범응원본만 '충기(盅氣)'로 되어 있다. '충(沖)'의 원래 뜻은 물이 끓는 것처럼 요동치는 것인데(『설문』), 과거에는 그 뜻을 그대로 살려서 해석하는 경우가 있었고, '충(盅)'과 같은 글자로 보고 '비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었다. 전자의 경우에는 '충기'가 음양의 기운이 서로 뒤섞인 것을 가리키고, 후자의 경우에는 원기(元氣: 하상공) 또는 충허의 일기(一氣: 오징)를 가리킨다.
하지만 백서에는 '중기'다. 통행본 『노자』에는 '충(沖·盅)'이라는 글자가 나오는 경우가 세 번 있다(4·42·45). 그 중 두 번은 백서를 참고해도 '충'이며, '비다'라는 뜻으로 새길 수 있다(4·45). 그때 갑본은 '충(
, 盅과 통함, 45)'이라는 글자를 썼고, 을본은 '충(沖, 4·45)'을 썼다. 초굉에 따르면 전자는 후자의 고자이므로 서로 통하는 글자다. 지금 갑본은 '중(中)'인데, 통행본의 '충'과 같은 의미라면 45장과 같은 글자를 썼지 구태여 '중'을 썼을 리 없다. 여기에서 다른 글자를 썼다는 것은 의미가 구별되기 때문이다. 곧 '중기'는 '중기'이지 '충기'가 아니다. 그리고 백서처럼 '중기'라면 기존의 해석과는 달라진다. 본문처럼 음지와 양지 어느 한쪽에도 치우지지 않는 '가운데의 기운'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사실 "도는 하나를 낳는다"는 말에 가려져 있었지만 이 문장에서는 만물이 음지와 양지 어느 한쪽에도 치우지지 않은 가운데의 기운을 통해 조화로운 상태를 유지한다는 마지막 구절이 중요하다. 『노자』는 다음 문장에서 극단으로 치우지는 것을 경계하고, 항상 조화를 유지하라고 권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순자』는 "뭇 별들은 서로 따라서 돌고, 해와 달은 번갈아 세상을 밝히며, 사계절은 교대로 찾아오고, 음양은 크게 변화하고, 비·바람은 온 세상을 적시며 불어가니 만물은 각각 그 조화로운 기운을 얻어서 살아간다(「천론」)"고 하였고, 『장자』에도 "지음(至陰)은 숙숙(肅肅)하고, 지양(至陽)은 혁혁(赫赫)하니 숙숙한 것은 하늘에서 나오고, 혁혁한 것은 땅에서 나온다. 이 둘이 서로 교통하여 화기를 이루니 이에 만물이 태어난다(「전자방」)"는 말이 있다. 만물 자연의 본래적 조화를 노래한다는 점에서 『노자』의 이 문장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왕공은 스스로 그것으로 이름한다
而王公以自名也
이미 설명했듯이 고(孤)·과(寡)·불곡(不穀)은 모두 왕공이 스스로를 낮추어 부르는 말이다. 왕공은 이미 존귀한 지위에 있으므로 조화로움을 얻기 위해서는 이렇게 낮추어야 함을 말한다. 노건에 따르면 『노자』에서 때로는 왕공이라고 하고, 때로는 후왕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운(韻)과 관련이 있다. 가령 여기에서는 '공(公)'과 '명(名)'이 운이 된다.
일이란 혹 덜어내려고 하여도 오히려 보태지고, 보태려고 하여도 덜어지는 법이다
物或損之而益, 益之而損
여기에서 '물(物)'은 구체적인 사물보다는 포괄적인 사태를 가리키는 말로 보아야 할 것이다. 오징에 따르면 '물'은 사람과 귀신을 함께 가리킨다(24장).
왕공이 스스로를 천한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지금 말하는 이런 사태와 관련이 있다. 귀하게 되기 위해 귀한 이름을 붙이는 것은 귀함의 극단으로만 달려가는 것이고, 그러면 거꾸로 귀함이 천함으로 돌변하는 때가 온다. "높아지려고만 하는 사람은 반드시 무너질 것이고, 부귀를 탐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근심이 있을 것이다(하상공)." 세상일이 어떻게 변화할지는 아무도 모르므로 항상 모자르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적당하고 조화로운 태도를 취하는 것이 좋다. "만물은 음지를 등지고 양지를 껴안아 그 가운데의 기운을 조화롭다고 여긴다"는 말은 이런 태도를 뒷받침해주는 사물의 자연적 상태다. 아울러 지금 이 문장은 앞에서 인용한 『여씨춘추』의 문장과도(다음 참조) 서로 통한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가르칠 때는 또한 이 뜻으로 가르쳐야 할 것이다
故人之所敎, 亦義以敎人
뒷구절은 을본에는 지워져 있고 갑본에는 "석의이교인(夕議而敎人)"으로 되어 있다. '석'과 '이'를 각각 '역(亦)'과 '이(以)'의 가차자로 보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의'는 왕필본 등을 따라 '아(我)'로 보는 경우도 있는데(고명), 백서의 글자를 존중한다면 마땅히 고환본이나 어주본 등을 좇아 '의(義)'의 가차자로 보아야 할 것이다. 현종어주본(고환)은 "여기에서 노군(老君)은 인군(人君) 중에 가르침을 세우고 남을 가르치려는 사람은 마땅히 나의 이 유약·겸허의 뜻〔義〕으로써 가르쳐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고 했는데, 이 설명이 백서와 부합한다.
하상공본의 경우 본문은 왕필본과 같지만 주해를 보면 전혀 달라서 이 문장 전체를 '사람들은 나에게 강하게 되라고 가르치지만 나는 약하게 되라고 가르친다'는 의미로 해설한다. 약하게 되라고 가르친다는 것은 현종어주본의 해설과 같다. 이를 보면 하상공본의 본문은 나중에 개삭된 것 같다. 아마도 '의'라는 글자가 『노자』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해서 '아(我)'로 바꾼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므로 강하고 굳세기만 한 사람은 옳게 죽지 못한다
故强梁者, 不得其死
'량(梁)'은 마룻대를 지지하는 들보 또는 물살에 견디는 나무 다리를 의미하는데, 둘 다 강하다는 뜻을 지닌다(오징). 따라서 '강량'은 강하고 또 강하다는 의미다.
"강하고 굳세기만 한 사람은 옳게 죽지 못한다"는 말은 『설원』 「경신」에 그대로 나온다. 그런데 「경신」은 이 말을 『노자』가 아니라 이른바 '금인명(金人銘)'에서 인용한다. 금인명은 공자가 주나라에 갔을 때 태묘(太廟) 오른쪽 계단 앞에서 보았다는 금인의 등에 쓰여 있던 명문이다. 이 금인명은 이 말 외에도 통행본 『노자』 5, 66, 79장과 유사한 글을 담고 있을 뿐 아니라 전체적인 내용도 『노자』와 같이 재앙을 경계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어 확실히 『노자』와 연관 있는 문건임에 틀림없다. 이 금인명은 『설원』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공자가어』 「관주(觀周, 주나라를 구경함)」에도 나온다. 두 기록은 비슷하다.
그런데 「경신」과 「관주」에는 주요한 차이가 있다. 「경신」과 달리 「관주」는 금인명을 인용하는 앞뒤로 이른바 공자가 노담에게 예를 물었다는 고사를 싣는다. 이 고사는 대부분 『사기』 「공자세가」에서 왔는데, 「관주」에서만 볼 수 있는 내용도 조금 있다.
그래함(1986)은 이 말썽 많은 고사에 대한 훌륭한 추론을 선보였다. 그는 공자가 노담을 만났다는 이야기는 실제 사건에서 연유되었지만 노담은 도가와 관련 없는 예의 전문가였으며 나중에 도가 집단이 노자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 이 이야기를 '노자'와 결합시켰고 아울러 진의 통일을 예언한 태사 담이 노자일지도 모른다는 설은 진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유포했고 태사 담 대신 노담이 거론되고 『장자』에서 노담이 유방의 출신 지역인 패(沛) 땅에 살았다고 한 것은 다시 한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했다. 나는 이 견해를 지지한다.6) 여기에서는 관련된 사실 몇 가지만 나열해보자.
「관주」에서는 공자가 남궁경숙(南宮敬叔)에게 노자를 만나보고 싶다는 뜻을 피력하자 남궁경숙이 노나라 임금 소공(昭公)에게 청하여 공자에게 수레를 하사하게 했고, 그 수레를 타고 남궁경숙과 공자가 주나라로 가는 내용이 나온다.
이때 남궁경숙은 소공에게 청을 드리면서 선신(先臣), 곧 죽은 아버지인 맹희자(孟僖子)의 말을 인용하는데, 맹희자가 죽은 해는 공자 나이 34세인 기원전 518년이다. 최술이 지적한 대로 이때 남궁경숙의 나이는 겨우 14살이었으며, 아직 상중이었으므로 노나라 임금에게 이런 청을 드릴 수도 없고 공자와 같이 주나라로 갈 수도 없다. 그리고 소공은 그 다음 해에 반란으로 인해 제나라로 쫓겨갔다. 그러므로 만약 남궁경숙이 청을 드린 노나라 임금이 소공이라면 남궁경숙과 함께 공자가 주나라로 노자를 찾아 예를 물었다는 사건은 있을 수 없다. 「공자세가」는 기록이 모호하지만 연대순으로 보아 공자 나이 17세 때 이 일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양옥승이 지적한 대로 이때는 남궁경숙이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이므로 불가능하며, 『장자』는 공자 나이 51세에 공자가 주나라로 노자를 찾아갔다고 하지만 51세 때 공자는 노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나라로 한가하게 여행을 할 겨를이 없었다.
이 설화와 관련된 『장자』의 기록도 신빙성이 떨어진다. 가령 「천도」에서는 공자가 책을 맡기기 위해 서쪽(주나라)으로 갔다고 했는데, 이것은 진의 분서를 염두에 둔 것으로 한대에 찬입된 글임이 분명하다. 결정적으로 해당 글에서는 '십이경(十二經)'이라는 말이 나온다. 중국 역사에서 '십이경'이라는 말이 나올 수 있는 시대는 한 선제 때이다. 이때 선제는 박사관의 인원을 7박사에서 12박사로 확충하면서 『춘추곡량전』 등을 경으로 받아들였다.
『예기』 「증자문」의 기록에 의거하여 공자가 주나라로 갔던 해 일식이 있었고, 『좌전』의 기록을 볼 때 이때는 공자 나이 50세였으므로 공자가 노자를 찾아간 것은 이해였다는 주장도 있다. 그렇다면 남궁경숙이 청을 드린 노나라의 임금은 소공이 아니라 정공(定公)이다.
그렇지만 이것도 문제다. 왜냐하면 「관주」는 공자가 노자를 만나고 노나라로 돌아왔을 때 제자가 많아져서 그 수가 3천을 헤아렸다고 했고, 「공자세가」도 공자가 노자를 만나고 나서 노나라로 돌아왔다고 했는데, 공자는 노나라에서 벼슬을 하다가 노 정공(定公)이 제물(祭物)을 하사하지 않은 것을 계기로 노나라를 떠나7) 70세가 되어서야 노나라로 돌아오기 때문에 노자를 만나고 다시 노나라로 돌아왔다면 벼슬하기 이전, 곧 50세 이전의 일이고 공자 제자 3천은 공자 학문이 가장 절정에 이르렀던 70세 이후 곧 방랑을 마치고 다시 노나라로 되돌아왔을 때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자가 노자를 찾아서 예를 물었다는 것은 단지 설화이고, 이 설화를 사실처럼 기록한 「관주」도 믿을 게 못 된다. 나는 「관주」의 금인명은 『노자』를 선전하기 위해서 『노자』를 노담에 의탁하고 공자가 노담을 찾아가 예를 물었다는 고사를 유포시킨 것처럼 『노자』 사상의 유구성을 보여주기 위해 공자를 다시 이용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회남자』 「도응훈」에도 공자가 환공의 묘당을 방문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금인명 이야기는 없다.
금인명이 조작되었다는 결정적 증거는 역시 최근의 고고학적 성과에서 얻을 수 있다. 정현(팔각랑)에서 출토된 한간에는 『유가자언(儒家者言)』이라는 글이 있는데, 이 글의 「공자지주(孔子之周, 공자가 주나라에 감)」 장에 보면 금인명이 나온다. 그런데 그 내용이 현재 알려진 금인명의 것과 전혀 다르다. "경계하고 경계하라. ……말이 많으면 허물이 많고, 일이 많으면 근심이 많다."8) 이것이 전부다. 「관주」의 금인명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나오지만 그 뒤로 『노자』와 관련된 글이 길게 딸려 나온다. 지금 해설하는 『노자』의 문장도 그 중의 하나다. 하지만 정현 한간 금인명에는 그런 게 없다. 곧 금인명의 『노자』 관련 부분은 나중에 『노자』를 선전하기 위해 삽입된 글이다. 공자가 주나라로 갔고, 환공의 묘당에서 금인명을 보았다는 이야기는 사실 여부를 떠나서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으나 기원전 55년 이전에는 금인명이 『노자』와 결합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도 『노자』를 둘러싼 여러 조작 중의 하나이다.
왕응린(王應麟)은 금인명이 「예문지」에 기록된 『황제명(黃帝銘)』 여섯 편 중의 하나라고 하였다. 그런데 곽말약(1947)은 황제라는 말이 제나라 위왕(威王: 기원전 356∼320)이 언급되는 청동기 명문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며 원래는 제나라의 조상신이었다고 했다(4장). 황제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9) 곽말약을 따른다면 『황제명』 같은 책은 위왕 이전에는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역시 참고할 수 있다.
나는 그것을 배움의 근본으로 삼을 것이다
我將以爲學父
'학부(學父)'는 대부분의 판본에 '교부(敎父)'로 되어 있고, 부혁·범응원본은 백서처럼 '학부'로 되어 있다. 범응원에 따르면 원래 왕필·엄준본 등은 '학부'로 되어 있었는데 하상공본에서 먼저 '교부'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범응원도 결국 『상서』에 따라 '학(學)'을 '효(斅: 가르치다)'로 새기고 있으므로 '학부'든 '교부'든 상관없이 보통은 가르침의 근본이라는 뜻으로 새긴다. 하지만 배움의 근본이라고 해도 의미의 차이가 없다. 여기에서는 글자 그대로 해석한다. '부'는 '본부(本父)', 곧 근본이라는 의미다(고환).
이미 하나가 되었으니 또 말이 있을 수 있는가
이미 하나라고 하였으니 또 말이 없을 수 있는가
하나와 말이 합쳐서 둘이 되고
둘과 하나가 합쳐서 셋이 된다
―『장자』 「제물론」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노자(삶의 기술, 늙은이의 노래), 2003. 6. 30., 김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