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어머니 3장 '어린양 혼인잔치'는 세계를 구원하는 등불 7. 인내없이 승리할 수 없습니다 1 "아이고 구두가 또 없어졌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옆 사람들이 혀를 끌끌 찹니다. 가난은 사람들에게 간혹 나쁜 마음을 먹게 합니다. 일요일 예배가 끝나면 신발장에 넣어둔 식구들의 구두가 한두 켤레씩 없어지는 일이 간혹 일어났습니다. 아직 믿음이 깊지 못한 우리 식구일 수도 있고, 통일교인이 아닌 다른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 왔다가 슬며시 좋은 구두를 신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2 나는 돈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차곡차곡 모았다가 그 식구에게 구두를 사주었습니다. 구두를 신고 간 사람이 열심히 일해서 다시는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를 올렸습니다. 3 행사가 열리면 200~300명씩 모였는데, 그들에게 식사를 대접할 쌀이 늘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큰 가마솥에 보리를 넣고 끓였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행사가 진행되는데 장작으로 불을 때 보리죽을 만들었습니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사발에 죽을 퍼서 나눠 먹으며 식구들은 오히려 감사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4 명절이 다가오면 설렘이나 기쁨보다는 안타까움이 먼저 찾아왔습니다. 보름 전부터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준비를 해야 사과 한 개, 사탕 한 알씩이라도 겨우 나눠 줄 수 있었습니다. 나는 임신했을 때 귤이 무척 귀했습니다. 그것을 눈치챈 식구 한 사람이 귤을 사와 그 자리에서 예닐곱 개를 순식간에 먹었습니다. 얼마나 고맙고 눈물이 났는지 모릅니다. 5 태어나서 성혼을 할 때까지 내가 걸어온 길은 하루도 평탄치 않았습니다. 성혼 후에도 갖가지 풍파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순종 그리고 사랑의 길을 한 번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내가 걸어온 길은 생각만 해도 견디기 어려운 가시밭길이었지만 그 무엇도 나를 굴복시키지 못했습니다. 6 사탄은 일찍이 예수님과 문 총재를 시험했듯이 나 역시 혹독하게 시험했습니다. 그 가혹하고 지독한 시련을 나는 인내와 헌신으로 이겨 냈습니다. 한편으로 그때는 나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깊이 느낀 때이기도 했습니다. 내가 고통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은 친히 나타나셔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7 나는 문 총재가 살아생전에 수많은 일들을 놓고 깊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우리 부부는 무한한 신뢰를 안고 많은 대화를 주고받았습니다. 많은 일을 겪으면서 눈빛만으로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문 총재가 겪은 노정과 내가 걸어온 길이 신비할 정도로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었습니다. 8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대단히 행복하고 모든 면에서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이라 여겼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독생녀로 인침 받으시고 원래 온전한 모습으로 태어나셨으니 아무 노력도 할 필요 없이 오롯이 그 자리에 오르신 분이다." 9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우주의 어머니로서 문 총재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삶을 즐기고 있지 않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생활의 단면만을 바라본 것입니다. 나는 세상 어느 누구보다 힘들고 고된 험산준령을 넘었습니다. 다만 세상 그 어느 아내보다 더 큰 남편의 사랑을 받으며 이를 극복하고 살아왔습니다. 10 14남매를 키우면서도 아이가 많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습니다. 아기 넷을 낳을 때까지 청파동의 어두컴컴하고 옹색한 방에서 출산했습니다. 다섯째부터 가까스로 병원에 가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것처럼, 어느 누구 하나 배 아프지 않고 낳은 자식은 없습니다. 11 그런데 그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겪어야 했습니다. 대여섯 살이 되어 골목에 나가 뛰어놀기 시작할 때부터 세상 사람들의 눈총과 따돌림을 받았습니다. "네 아버지가 문선명이지? 네 아버지는 뭐 하는 사람인지 넌 아니?" "통일교회 때문에 세상이 소란스러워." 12 나라 안에서는 문선명의 아들딸이라 하여 비난받고, 나라 밖에서는 동양 사람이라고 차별대우를 받았습니다. 단지 문선명 한학자의 아들딸이라는 이유 하나로 고통을 겪어야 하는 아이들을 품에 안고 나는 한탄하거나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13 우리 부부는 아이들을 사랑과 헌신으로 돌보았음에도 해야 할 교회 일과 뜻길이 너무 바빠 함께하지 못하는 날이 더 많았습니다. 문 총재가 세계순회를 떠난 어느 날, 세 살이 안 된 효진이가 방바닥에 앉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평상시에는 차나 자전거를 그리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날 따라 흰 종이에 어설프게나마 얼굴 하나를 그렸습니다. 나는 그 사람이 아버지라는 것을 알면서도 짐짓 물었습니다. "효진아, 이사람이 누구니?" 14 효진이는 대답하지 않고 다른 종이에 또 한사람을 그렸습니다. 처음과 다른 얼굴이었지만 이번에도 영락없는 아버지였습니다. 평소 활달한 효진이는 그날 얌전히 앉아 그림만 그렸습니다. 하루 종일 아버지 얼굴만 그리면서도 싫증을 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돌아왔을 때에야 길고 긴 그림 그리기를 멈췄습니다. 세상을 다 얻은 듯 아버지를 향해 환한 웃음을 지으며 품에 안기던 그 애틋한 뒷모습을 지금도 선명히 기억합니다. 15 만일 내가 기쁜 일만을 누려 왔다면 다른 사람의 깊은 내면의 모습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천국의 즐거움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는 지옥의 제일 밑바닥까지 통과하고 온갖 쓴맛을 다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나 스스로를 단련케 했습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지치지 않는 신앙과 굳센 의지 그리고 인내였습니다. 그것이 오늘의 나를 만들어 냈습니다. 16 누구라도 천국 가는 길에서 달콤함이나 즐거움만 얻을 수는 없습니다. 신앙적인 고통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느낄 수 있는 가장 귀한 축복입니다. 그 시험을 이겨 내야 참다운 인간으로 태어납니다. 인내의 쓰디쓴 열매가 알알이 맺혀 어느 날엔가 빛나는 자랑이 됩니다. |
平和の母 第三章 「小羊の婚宴」は世界を救う灯火 7. 忍耐なくして勝利することはできません 「あれ、また靴がなくなった」 その言葉を言い終わらないうちに、周りの人たちも残念そうにため息をつきます。貧困は時に、人間に悪い思いを抱かせるようです。 日曜日の札拝が終わると、下駄箱に入れておいた信徒の靴が一、二足なくなっていることがたまにありました。札拝中に教会に来て、こっそりと良い靴を履き、 出ていくのです。それは、まだ信仰の浅い信徒がしたのかもしれませんし、信徒ではない人がしたのかもしれません。 私はお金が少しでもできると、それをコツコツ貯めておき、靴を失くした信徒がいれば、新しいものを買ってあげました。また、靴を履いていった人が一生命働いて、二度と他人の物を持っていかないようにしてください、と祈りました。 行事の日には二、三百人が集まるのですが、彼らに食事を振る舞うとなると、米がいつも不足しました。そこで、教会の中で行事が行われている間に、火を起こして大きな釜で麦粥を作ったのです。行事後、わいわいと集まって座り、麦粥を分け合って食べました。 「これはすべて神様からの贈り物です」 十分なもてなしとは言えませんでしたが、信徒たちはみな、喜んでくれました。 名節が近づくと、胸の高鳴りや喜びよりも、 まず申し訳なさを感じました。半月前からあちこち駆け回り準備して、ようやく信徒たちにリンゴ一個、飴一粒を配ることができたのです。 私は妊娠中、ひたすらミカンが食べたくなるということがありましたが、当時、ミカンはとても貴重なものでした。それでも、私の気持ちを察した一人の信徒がミカンを買ってきてくれ、六、七個をその場であっという間に食べてしまったこともあります。ただただ、ありがたく涙が出て仕方ありませんでした。 聖婚するまで、私は一日も気が休まることがありませんでした。聖婚後はさらに、様々な波風が絶えず襲いかかってきました。しかし、神様に対する信仰と順従、そして愛の道から、一度も離れることはありませんでした。 私が歩んできた道は、思い出すだけでもぞっとする茨の道でしたが、何をもってしても、私を屈服させることはできませんでした。サタンは、イエス様と文総裁に試練を与えたように、私にも過酷な試練を課しました。その厳しく残酷な試練を、私は忍動と献身によって乗り越えたのです。 それは一方で、私に訪ねてこられた神様の恩恵を、最も深く感じた時間でもありました。神様は私が苦痛の中にたたずんでいるとき、親しく現れて、導いてくださったのです。 私は文総裁と、様々なことについて深い会話を交わしました。私たち夫婦はお互いに対する限りない信頼と共に、多くのことを経験しながら、やがて目を見るだけでもお互いを理解できるようになりました。文総裁が通過してきた路程と私が歩んできた道は、神秘的なほど似通っていたからです。 ほとんどの人は私のことを、大変恵まれて、すべての面において不足なものなどない人間だと思っていました。 「あなたは神様から独り娘として印を受け、恵まれた立場でお生まれになったのだから、何の努力をする必要もなく、ただその位置に上がられたのだ」 そう考える人が大勢いました。宇宙の母として、文総裁と出会い、幸せな家庭を築いて人生を楽しんでいるではないか、というのです。しかし、それは私の生活の一面だけを見ているにすぎません。私は世の中の誰よりも、険しく高い山を越えてきました。ただ違うとすれば、世の中のどの妻よりも、大きな愛を夫から受けながら越えてきたことです。 私は十四人の子女を生んで育てましたが、子供が多いと思ったことはありません。五人目の子供までは、青坡洞の薄暗く窮屈な部屋で出産し、六人目からようやく病院で生むようになりました。 みな等しく、私がおなかを痛めて生んだ大切な子供たちです。しかしその子供たちも幼い頃から不条理なことを経験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五、六蔵になって路地で遊び始めるや、世間の人から睨まれ、除け者にされたのです。 「お前の父親は文鮮明だろう?父親がどんなことをしているのか、お前は知っているのか?」 「統一教会のせいで、世の中が騒がしいんだ」 国内では文鮮明の息子、娘だと非難され、国外ではそれに東洋入だという差別が加わりました。ただ文鮮明、韓鶴子の息子、娘であるという理由だけで、苦痛を強いられる子供たち。しかし、私は子供たちを胸に抱きながらも、嘆いたり悲しんだりはせず、むしろ感謝の祈りを捧げました。 私たち夫婦は、愛と献身をもって子供たちを育てましたが、教会ですべきこと、み旨の道があまりにも忙しく、一緒にいられない日のほうが多くありました。文総裁が世界巡回に発ったある日、三歳にもならない長男の孝進が、部屋の床に座り、絵を描き始めました。 いつもは車や自転車の絵をよく描くのですが、その日は白い紙の上にたどたどしく、人の顔を描いたのです。それが父親の顔であることは分かりましたが、あえて尋ねてみることにしました。 「孝進、この人は誰?」 孝進は何も答えず、違う紙にまた顔を描きました。最初とは違う表情でしたが、今度も問違いなく、父親の顔でした。普段は活発な孝進が、その日はおとなしく座って、絵を描いてばかりいました。一日中、父親の顔を描いていても、飽きることがなかったのです。次の日も、その次の日も、孝進は絵を描くのをやめませんでした。 ずいぶん日が経って、父親が帰っってきてようやく、孝進は絵を描く手を止めました。世界をすべて手中に収めたかのように、父に向かって明るい笑みを浮かべ、 腕に抱かれたその後ろ姿を、今も切なさと共に、鮮やかに覚えています。 もし、 私がうれしいことばかりを経験していたなら、他の人の深い内面世界に気づくことはできなかったでしょう。また、天国の喜びも分からなかったでしょう。私は地獄のどん底まで私に必要なものは、 疲れを知らない信仰と、 堅固な意志、 そして忍耐でした。それらが今日の私をつくり上げたのです。 誰であれ、天国への道のりで、甘く楽しいことばかりを手にすることはできません。信仰的な苦難こそ、神様の恩恵を感じられる最も尊い祝福です。その試練に打ち勝ってこそ、真なる人間として新たに生まれ変わるこことができます。 忍耐という苦い種が一つ一つ実を結び、 いつの日か、光り輝く誇りとなるのです。 |
MOTHER of PEACE CHAPTER 3. THE MARRIAGE SUPPER OF THE LAMB 7. Victory through perseverance 'Oh, no, I've lost another pair of shoes.” Even before the member would finish his sentence, those around him would know what had happened. Poverty sometimes makes people do bad things. At the end of Sunday services, we often would find that a pair or two of shoes were missing from the shoe rack. So, whenever I had a little extra money, I would buy new shoes for members who had lost them. I also prayed that the person who had taken the shoes would set his or her life straight. Between 200 and 300 people would attend our services and other events, and there was never enough rice to serve them all. So we made porridge by boiling barley in a large iron pot. As the event progressed inside the church, outside we would make a wood fire and cook barley porridge. Members would sit down in little clusters and share bowls of porridge, and they were more grateful for this than anything else. “All of this is a gift from God,” they would say. When I was pregnant I craved tangerines, but we could not afford them; they were so expensive. One member learned about this, however, and bought some tangerines for me. I ate six or seven of them on the spot. I was so grateful, I cried. When a church holy day would approach, I felt more anxious than excited or happy. I would have to start making preparations two weeks in advance to organize the deliveries of the offering table towers of fruit and delicacies, banners, flowers and candles, hoping that there would be enough for each member to have an apple or a candy. Once we had made this offering to God, I would feel immense satisfaction. From my birth until my marriage, my path had not been easy, and after marrying, personal challenges impacted not just me but also our movement. So I never deviated from the path of faith, obedience and love for God. Just as Satan tested Jesus and Father Moon, he tested me. I persevered through those ordeals with ever-deepening devotion because it was at such times that I felt most keenly the grace of God. In the midst of pain, God came very close to me and guided me with pillars of cloud and fire. My husband and I always conversed intensely on various matters. We could do so out of our infinite trust in each other. We went through so much together that we could understand each other with only a look. The life of Father Moon and the path I have walked bear an uncanny resemblance. Most people assumed that I was so happy and that I wanted for nothing. “You received the seal from God as His only begotten Daughter,” they would think, “and you were born as a perfected being. Therefore, you attained your position with no effort.” Many people thought like this. They believed that as the Mother of the universe I blissfully had met Father Moon, formed a happy family and enjoyed life. That describes my life from one perspective, but I have scaled mountains as treacherous and impassable as any in this world. I was able to surmount them all with my husband's love, which was more than any wife has ever received. Although I had 14 children, I never once thought that I had too many. Nonetheless, my children had to go through difficult experiences. When they went out to play, local people would glare at them. 'Your father is Sun Myung Moon, isn't he?” adults would shout at an innocent five-year-old. “Do you know what your father does? The Unification Church is creating such a disturbance in the world!” While in Korea they were criticized for being the sons and daughters of Sun Myung Moon, and when we moved to the United States, they faced discrimination for being Asian. It pained me to see my children suffer, but I did not lament or blame others. I held them in my arms and set an example for them by offering prayers of gratitude. My husband and I cared for our children with love and devotion, but because we had so much work to do for the church and the providence, we were unable to spend much time with them. One day, when my husband was on his world tour, Hyo-jin, barely 3 years old, sat on the bedroom floor and began to draw. Normally he liked to draw cars or bikes, but that day he clumsily drew a face on the white paper. Even though I knew that it was his father, I asked him, “Hyo-jin, who is that?” Hyo-jin did not answer me, but drew a face on another piece of paper. Though it looked different from the first one, it was still without a doubt his father's face. Hyo-jin was usually very active, but on that day he sat quietly and continued to draw. He did not grow tired of drawing his father's face, even after spending the whole day at it. And he did not stop drawing it the next day or the day after. It was only when his father returned that he stopped drawing. I can still remember quite vividly how he smiled brightly at his father as he was embraced by him. It was as if he had been given the worl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