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장 황제의 비가
대환희 보살은 의아해하면서도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언제 혈도가 풀렸지? 하나 이미 중독되어 있는 이상 내가 오늘 남제를 내 수중에 넣지 않고 언제 또 이런 기회를 만날 수 있으랴?'
그녀는 지체 않고 불같이 호령했다.
"저 놈을 잡아랏!"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숱한 사내들이 일제히 단지흥에게 달려들면서 외쳐댔다.
"단지흥 이 놈, 네가 아무리 황제 노릇을 한다 해도 우리 대환희 보살님을 따르는 것보다는 못할 거다!"
하지만 단지흥은 조금도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난 이미 한 사람을 죽였다! 또 사람을 죽여야 한단 말인가? 이제 더는 살인을 해서는 안 된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 순간 한 사내의 고함소리가 다시 허공을 갈랐다.
"단지흥 이 놈! 어디 일양지를 펼쳐 보아라. 우리들도 견식이나 좀 넓히게……."
그 소리에 단지흥은 몸을 홱 돌리며 슬쩍 피했다. 창 한 자루가 마치 혀를 날름거리는 뱀마냥 그의 몸뚱이를 바싹 스쳐 지나갔다. 재빨리 몸을 피하지 않았더라면 몸뚱이에 구멍이 뻥 뚫릴 뻔했다. 사내는 창을 꼬나 쥐고 살기등등하게 소리쳤다.
"단지흥 이 놈! 빨리 손을 써라! 계속 그렇게 손을 쓰지 않다가는 당장에 송장이 될 테니!"
하지만 단지흥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만일 내가 화산에 가지 않고 그냥 영고와 함께 있었다면 영고의 아들은 내 아들이었을 게야. 그 애가 내 아들이었더라면 죽어 가는 걸 보고만 있었을 리 만무하지. 난 더는 살인을 할 수 없어!'
사내들은 단지흥이 중독된 줄로만 알고 용기백배하여 창과 칼을 마구 휘두르면서 시시각각으로 다가들었다. 사내들이 일제히 창과 칼을 치켜 들자 단지흥은 숱한 창과 칼 밑에 갇힌 꼴이 되고 말았다. 대환희 보살은 그 모습을 보고는 기뻐서 연신 입에 먹을 것을 집어 넣으면서 소리를 질렀다.
"장하다, 장해! 내 귀염둥이들이 참말로 장하구나! 누구든지 저 놈 몸뚱이에 상처를 입히기만 하면 난 그 녀석을 내 허벅다리 위에 앉힐 테다!"
대환희 보살의 허벅다리에 앉는다는 것은 이 사내들에게는 비할 바 없는 영광이었다. 그 말에 사내들은 저마다 죽음을 무릅쓰고 젖먹던 힘까지 다 짜내 단지흥에게 병장기들을 휘둘렀다. 그러나 단지흥은 이번에도 경공을 써서 창과 칼 밑을 뚫고 나왔다.
알몸인 단황과 여러 사내들의 대결은 그야말로 괴이한 싸움이었다. 사내들은 저마다 공을 세우려고 전심전력으로 공격을 들이댔으나 단지흥은 끝끝내 손을 쓰지 않고 그저 사내들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 다니기만 했다. 그러자 사내들은 단지흥이 자기들을 깔본다고 여기고는 더욱 악에 받쳐 덮쳐 들었다. 대환희 보살의 수하가 된 지 이미 오래 된 터, 세상사람들이 죄다 자신들을 깔본다고 여기고 있는 이들은 누구 하나 그런 기색만 내비쳤다 하면 물불을 안 가리는 것이
었다.
"단지흥, 이 놈아! 네 놈이 손을 안 쓴다고 해서 네 놈을 살려 줄 것 같으냐?"
그 말과 동시에 서릿발 같은 빛이 번쩍하더니 긴 검이 단지흥의 정수리를 겨냥해 똑바로 내리찍혔다. 단지흥이 용케 머리를 비키니 이번에는 더욱 아슬아슬하게 그의 목을 겨누고 검이 들어왔다. 단지흥이 또 몸을 피하자 그자는 이제 초수를 바꿔 공격해 들어왔다. 그는 이번에는 단지흥의 잔등을 겨냥하고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저 스치고 지났을 뿐 아무런 상처도 입히지 못했다. 사내는 그만 힘이 빠져 물러서고 말았다. 그러자 한 사내가 구리 철퇴를 휘
두르면서 덮쳐 왔다. 철퇴는 단지흥의 왼쪽 가슴을 겨누고 똑바로 날아왔지만 그는 역시 묘하게 몸을 피했다.
그때 단지흥은 얼핏 영고를 떠올렸다. 영고가 조금도 자기를 사랑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녀는 필시 자기를 사랑했었다. 사랑하긴 했으되 한 사내로서가 아니라 황제라는 자리에만 눈이 어두워 영고가 자기를 따랐다면 그는 그녀의 몸만 차지했을 뿐 마음은 차지하지 못한 셈이 아닌가.
그렇게 딴생각을 하다 보니 단지흥은 자연 틈이 생기고 말았다. 일순, 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철퇴가 단지흥의 잔등에 똑바로 내리꽂혔다. 그의 잔등에선 순식간엔 피가 솟구쳤다. 철퇴잡이는 기쁨에 넘쳐 환성을 올렸다.
"보살님, 찔렀습니다. 내가 단황을 찔렀습니다!"
대환희 보살은 희색이 만면하여 소리를 질러댔다.
"장하다, 장해! 내 이제 너를 매일마다 내 허벅다리 위에 앉혀 놓으마!"
그 말에 철퇴잡이는 더욱 으쓱해져서 달려들었다.
"단지흥 이 놈! 내 철퇴에 죽는 줄 알아랏!"
비록 피를 보긴 했으나 단지흥의 상처는 그다지 중한 편은 아니었다. 무릇 단지흥 같은 무림의 명수에게 중상을 입힌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철퇴가 몸에 닿는 순간 단지흥은 번개같이 몸을 돌려 그나마 그 무서운 일격을 피해 냈던 것이다. 철퇴잡이가 사기충천하여 고함을 치자 단지흥은 한결 머리가 맑아졌다.
'이자들은 나를 죽이려고 사생결단을 하는구나! 한데 왜 내가 이자들 손에 죽어야 하나? 나와 영고 사이에는 수 없이 많은 매듭이 있지만, 이자들하고야 아무런 원수지간도 아닌데 왜 이렇듯 악다구니로 대드는 걸까? 대환희 보살은 대리의 악물이다! 이 계집을 제거하지 않고서야 내 한도 풀 수 없으리라!'
일순 단지흥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다음 순간 고막을 찢어 놓을 듯한 고함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며 터져 나왔다. 고함소리는 수림을 뒤흔들어 놓고 밤 하늘을 향해 길게 꼬리를 끌며 울려 나갔다. 마치 한 마리 용이 울부짖기라도 하는 듯한 소리에 덮쳐 들던 사내들은 모두 주춤 제자리에 멈춰 섰다. 쏴하니 공포가 온몸을 휘감는 것이었다.
단지흥은 천천히 사내들을 향해 돌아서더니 선뜻 손을 뻗쳐 창잡이에게서 긴 창대를 잡아채서는 삽시에 두 동강을 내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러더니 훌쩍 몸을 날려 검잡이한테로 다가들어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그와 동시에 검잡이의 손에서는 검이 퉁겨 나가 젱그렁 땅에 떨어져 버렸다. 단지흥은 땅바닥에 떨어진 검을 발끝으로 퉁겨서 제 손에 잡자마자 검잡이의 몸뚱이를 비스듬히 내리쳤다. 검잡이는 삽시에 썩은 나무토막처럼 허리가 잘려 땅바닥에 털썩 나뒹굴
었다.
철퇴잡이는 눈앞의 광경에 벌어진 입을 채 다물지도 못하고 홱 몸을 돌렸다. 그러나 등뒤에는 대환희 보살이 버티고 있었다. 그러니 뺑소니를 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대환희 보살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도망을 치려구, 요 귀염둥이야?"
철퇴잡이는 뭐라고 말하려고 입을 달싹거렸다.
"변명은 듣기 싫다!"
대환희 보살은 쌀쌀맞게 내뱉고는 쓱 손을 뻗쳤다. 철퇴잡이는 보살의 손이 닿기만 하면 뼈와 살이 썩어 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터라 얼른 몸을 피했다. 하지만 대환희 보살은 그가 피하려는 쪽으로 냉큼 몸을 솟구쳐 머리로 그의 배때기를 들이받았다. 대환희 보살의 머리는 마치 무쇠로 만들어진 것인 듯, 다음 순간 철퇴잡이는 그 즉시 몇 길 밖으로 나가떨어져 땅바닥에 엎어지자마자 덜컥 숨이 넘어가고 말았다.
단지흥은 포위를 뚫고 나가려고 좌우를 살폈다. 그러나 진작에 사태는 일변해 있었다. 이제 사내들은 다 물러가고 뚱뚱보 여인들이 그를 빙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얼굴엔 잠시 당혹스런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보살은 의기양양하니 이죽거렸다.
"폐하, 왜 옷을 벗고 계십니까?"
그러더니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그래, 난 워낙 알몸으로 나선 황제를 더 좋아하지. 알몸이니 황제인지 뭔지 분별할 수도 없는 터, 뭐 무서울 게 있겠소?"
보살은 잠시 단지흥을 쏘아보더니 뒤를 향해 소리를 쳤다.
"게 아무도 없느냐?"
그러자 사내 하나가 득달같이 달려와 굽실 허리를 꺾었다.
"보살님, 무슨 분부가 계시옵니까?"
"어서 초롱에 불을 밝혀라, 황제의 몸뚱어리를 샅샅이 살펴보아야겠으니. 황제의 몸뚱어리가 범상한 인간들의 몸뚱어리와 뭐가 다른지 내 한번 봐야겠다! 무엇이든 다른 점이 있기에 우리 치주라는 년이 그토록 반했겠지!"
단지흥은 치주라는 말에 저도 모르게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만일 치주가 이 자리에 있다면 나와 대환희 보살 중에 누가 이기기를 바랄까? 그 애는 보살의 등살에 못 이겨 아마 나한테 호감을 나타낼 엄두도 못 낼 거야. 계집들이란 다 그런 거야. 계집으로 생긴 것은 할 수 없지……."
대환희 보살은 계속 말을 이었다.
"오늘은 좀 희한한 방법으로 겨루기를 해야겠다. 옛날에는 싸움을 할 때 초롱에 불을 밝히고 싸웠다는데 오늘 우리가 그걸 따른다 해도 남들이 비웃지야 않겠지. 이미 단황 나으리께서 대낮처럼 밝은 보름날 밤에 벌거벗고 나섰으니 이보다 더 우스운 일이 어디 있겠느냐? 나도 우리 폐하를 본떠서 알몸으로 나서려는데, 다들 어떻게 생각하나?"
대환희 보살의 말에 누구라고 감히 왈가왈부할 수 있으랴. 사내는 냅다 다가가서 보살의 옷을 몽땅 다 벗겨 주었다. 그러자 보살은 단지흥을 보면서 히죽거렸다.
"이제부터 난 폐하와 겨루겠으나 조금도 텃세를 하진 않겠어요. 아주 공평하게 겨루려고 해요. 그래야만 져도 불만이 없을 게 아닌가요?"
대환희 보살은 알몸으로 단지흥 앞에 버티고 섰다. 그 모습은 그야말로 가관이 아닐 수 없었다. 어찌나 살이 쪘는지 모가지는 거의 어깨 넓이와 비슷했고, 배에는 군살이 여러 겹으로 접쳐 있었으며, 그 아래로 뻗은 두 다리는 너무나 피둥피둥해서 다리인지 고깃덩이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이봐요 단황 나으리, 우리 둘이 어우러져 싸우다가 씨름판을 벌인다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아마 당신은 내 배 밑에 깔려 숨도 바로 쉬지 못할걸! 호호호……."
대환희 보살은 죽겠다고 킬킬거렸다. 그러자 유들유들한 군살이 일제히 흔들거렸다. 단지흥은 코대답도 않고 이를 악물었다.
'이런 능욕은 실로 듣도 보도 못했다. 내 오늘 사람을 하나 죽였지만 이제 너마저도 죽여 버리고 말 테다. 치주를 죽인 년, 네 년이 아니었다면 치주가 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단 말이냐?'
단지흥은 대환희 보살을 쏘아보며 단호하게 내뱉었다.
"대환희 보살, 넌 오늘 끝장이다. 공손히 죽음을 기다려라!"
"이봐요, 단황 나으리, 아무리 실랑이를 해도 당신이나 나나 하등 다를 게 없어요. 당신한테 귀비 년들이 수십 명이나 된다고 우쭐대지 말란 말예요. 나한테도 남첩이 수십은 되니까. 당신이나 나나 다 권세 있는 사람 아닌가요. 서로 합심해야 할 처지인데 왜 자꾸 생트집을 잘아요? 함께 화목하게 지내면서 향락을 누리는 게 옳은 게지 싸우기는 왜 싸운단 말이에요? 내 말이 틀린가요?"
단지흥은 한마디 대꾸도 없이 벽력같이 고함을 지르면서 달려들었다. 삽시에 두 사람은 한데 어우러졌다. 대환희 보살은 단지흥이 사정을 두지 않고 손을 쓰자 내심 덜컥 겁이 났다. 단지흥은 이미 화산 무예 시합에서 천하의 5대 고수 중 하나로 지목되었은즉, 그와 맞서 본대야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는 익히 알고 있었다. 뿐더러 중독된 줄 알고 있었는데 그도 아니었음이 분명했다. 하나 그녀 역시 운남에서는 소문이 뜨르르한지라 결단코 단지흥한테 녹녹하
게 보이지 않으려고 전심전력하고 있었다.
"자, 이제 내가 손을 쓰겠으니 조심하세요!"
대환희 보살은 말을 마치자마자 갑자기 휘파람을 불어대기 시작했다. 단지흥은 지금은 보살의 수하가 된 충피가 독충을 잘 부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충피가 오늘은 무슨 독충들을 부릴까 저어하며 정신을 바짝 차렸다. 아니나다를까 충피가 또르르 굴러 나오더니 능글맞게 웃음을 흘렸다.
"폐하, 그때 만일 그 숙녀동의 노파가 아니었더라면 단황 나으리는 벌써 저승 원귀가 돼 있을 게 아닙니까?"
충피가 한마디 내뱉자마자 스륵스륵 소리가 어지럽게 들려 오기 시작했다. 단지흥은 두 눈을 찌푸렸다. 수천 수백 마리나 되는 독사들이 땅바닥을 새까맣게 뒤덮고 벌벌 기어오고 있었다. 단지흥은 온몸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또 독사 떼를 풀어 놓았군! 이를 어찌한다……."
독사들은 이미 혀를 쌀름거리면서 그에게 바투 기어들었다. 충피는 연해 괴상한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장단 맞추듯 독사들은 일사불란하게 그에게 덮쳐 왔다. 단지흥은 손가락 하나를 곧게 펴서 앞으로 곧추 내질렀다. 그 찰나 쾅하고 굉음이 터지더니 독사 몇 마리가 삽시에 몇 동강이 났다. 비릿한 냄새가 쏴 번졌다. 그 냄새를 맡자 독사들은 기갈이 난 것마냥 더욱 사납게 그에게 몰려들었다. 그래도 단지흥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연신 손가락을 지르고 퉁겼다.
동강이 난 독사들이 순식간에 무더기로 쌓였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대리 단씨의 일양지였다. 대환희 보살은 보면 볼수록 뛰어난 무예라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외쳐댔다.
"훌륭하다! 훌륭해!"
보살의 수하들도 모두 숨을 죽인 채 단지흥 홀로 독사 무리 속에 우뚝 서서 태연자약하게 손가락을 휘둘러대는 것을 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대환희 보살은 일순 일양지가 너무나도 탐나 성마르게 소리를 질러댔다.
"단황 나으리, 나으리가 나를 따르기만 하면 좋은 점이 수 없이 많아요. 몸뚱이가 갈기갈기 찢기기 전에 잘 생각해 보세요."
단지흥은 내심 적이 당황하고 있었다. 충피한테 독사가 얼마나 있는지 알 턱이 없었다. 충피가 끊임없이 독사들을 불러내게 되면 아무리 재주가 용하다고 한들 그 역시 어떻게 막아낸단 말인가. 단지흥은 이때다 싶어 잠시 숨을 돌릴 심산으로 대환희 보살을 향해 소리쳤다.
"대환희 보살, 잠깐만 손을 멈춰 달라. 내 할말이 있으니."
하지만 대환희 보살은 못 들은 척 딴전을 피웠다. 단지흥은 다시금 다급하게 외쳐댔다.
"대환희 보살, 우리 둘 다 옷을 입은 후에 다시 겨루어 보는 게 어떤가?"
"이봐요, 폐하. 잔꾀 부리지 말아요. 오늘의 겨룸에서 끝내는 내가 폐하의 그 알몸 때문에 이기게 되는 거예요."
대환희 보살은 느물느물 대답을 늦잡았다. 단지흥은 일순 어리둥절해졌다.
'저나나나 다 알몸인데 왜 나만은 알몸이기에 지게 된다는 거야?'
"충피, 쉬지 말고 어서 독사를 몰아대라! 어서 저 놈을 물어 죽이라고 해!"
그리고는 다시 단지흥에게 내뱉었다.
"이봐요, 단황 나으리, 난 강호에서 굴러먹는 사람이니 알몸이라도 누가 뭐라 할까마는 당신은 일국의 황제가 아닌가요? 지고무방한 황제가 알몸으로 사람들 앞에 나선다는 건 말도 안 되지요. 난 당신을 생포하기만 하면 그 모양 그대로 대리국으로 끌고 가서 톡톡히 망신을 주겠어요!"
단지흥은 코웃음만 칠 뿐 아무 대꾸도 안 했다. 보살은 다시 충피를 재촉했다. 충피는 더욱 열심으로 괴상한 소리를 내질렀다. 수많은 독사들은 연달아연달아 단지흥에게 기어왔다. 단지흥은 또 손가락을 내쳐 독사들을 삼대처럼 쓸어 능했으나 끊임없이 달려 드는 독사 무리를 보고는 점차 기가 질렸다.
그때였다. 멀리서부터 웬 사람들이 길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필시 이곳을 향해 다급히 달려오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단지흥은 이내 길게 외치는 사람이 다름 아닌 대리국의 사대 시위의 한 사람인 농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대 시위들이 자기가 없어진 것을 알고는 이렇게 찾아 나선 것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사대 시위 역시 모두 독사들에게는 속수무책이지 않겠는가. 그러니 사대 시위들이 구하러 온다 해도 무슨 뾰족한 수는 없었다.
휘파람 소리가 한 번 휘익 울리더니 연달아 그에 화답하는 휘파람 소리가 또 울려 왔다. 마치 회오리 같은 소리가 연거푸 들리며 눈 깜짝할 사이에 사대 시위가 눈앞에 나타났다.
눈앞의 광경에 선비가 눈살을 찌푸리며 다급히 외쳤다.
"폐하, 어인 일이시옵니까?"
"자세한 얘긴 두었다 하고, 어서 옷이나 가져 오너라!"
선비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는 농부와 나무꾼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농부와 나무꾼은 자기 옷들을 한 가지씩 벗어 얼른 선비에게 넘겨주었다. 옷을 받아 쥔 선비는 대환희 보살을 건너다보면서 삿대질을 했다.
"대환희 보살, 네 년이 감히 황제를 모해하려 덤비다니. 아무리 악독한 수를 써도 다 헛수고다. 오늘 우리 대리국 신하들은 네 년을 사로잡고야 말 테다!"
대환희 보살은 펄펄 뛰며 소리쳤다.
"얘들아, 냉큼 저 놈들을 잡아죽여라!"
그녀의 한마디가 떨어지기 무섭게 한 무리의 뚱뚱보 계집들과 사내들이 일제히 사대 시위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어우러져 금세 일대 사투가 벌어졌다. 독사들은 충피의 괴상한 소리에 맞춰 시시각각으로 단지흥에게 몰려들었다.
사대 시위는 보살의 수하들과 맞서 싸우는 한편 틈만 나면 독사를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선비의 부채가 날리는 곳마다 독사들의 몸뚱이는 뭉텅뭉텅 끊어져 나뒹굴었다. 농부가 휘익휘익 바람을 일으키며 호미를 휘두를 때마다 역시 수많은 독사들이 널브러졌다. 나무꾼은 날렵하게 도끼를 휘두르면서 독사를 절단냈다. 어부의 낚싯줄도 만만치 않았다. 단번에 감아서 내칠 때마다 영락없이 독사의 몸뚱이는 두 동강이 나곤 했다.
사대 시위가 사생결단으로 초수를 펼쳐 내자 보살의 수하들은 겁을 집어먹고는 고함만 지를 뿐 감히 더는 다가들지 못하고 있었다.
"폐하, 조심하십시오!"
선비는 짤막히 외치면서 단지흥을 향해 옷을 휙 던졌다. 그러자 그 옷은 어부의 낚싯줄에 날아가 감기고 어부가 다시 휘익 낚싯줄을 던지자 이내 단지흥의 손에 들어갔다.
이를 지켜 보던 보살은 매우 다급해졌다.
"옷을 입지 마! 당신이 옷을 입으면 난 어떻게 해요?"
그녀는 부르짖으면서 단지흥 앞으로 곧추 달려왔다. 그녀가 몸을 솟구치는 모양은 마치 한 마리 곰이 재주넘기를 하는 것 같았다. 단지흥은 손가락에 옷을 걸어 허공에다 휙 뿌렸다. 그러자 묘하게도 그 옷은 그의 몸에 툭 떨어져 눈 깜짝할 사이에 온몸을 감싸는 것이었다. 다음 순간, 그는 보살을 향해 똑바로 손가락을 뻗었다. 일양지의 위력을 잘 알고 있는지라 보살은 더는 감히 다가서지 못하고 멀리서 고함만 쳤다. 두루마기까지 다 차려 입고 나서 단지흥은 훌쩍
몸을 솟구쳐 보살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훌륭한 솜씨이옵니다!"
그때 갑자기 수림 속에서 한사람이 나서며 소리를 질렀다. 모두들 일제히 고개들 돌렸다. 큰 키에 생김새도 적이 흉악스러운 라마 중이 하나 서 있었다. 그는 두 눈을 게슴츠레 뜨고 단지흥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폐하의 솜씨가 참말 이만저만이 아니옵니다. 그러니 이 운남 땅에 십여 년 동안이나 다른 풍파가 없었겠지요."
단지흥은 이 라마 중의 거동만 보고도 대단한 무예를 익힌 사람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저도 일찍이 화산에 갔사온즉 화산에서는 미처 여러분들을 뵙지 못했습니다. 다행히 천대평석까지 올라가기는 했으나 그때 일은 정말……. 그때 이후로 저는 중원 땅에 발을 들여놓지 않기로 작심했으나 아무래도 지금 저의 무예로는 다소 부족한 듯하여 고수 여러분께 가르침을 받고자 다시 이렇게 발을 들여놓게 된 겁니다. 그때 그 전진교의 주백통이라는 친구와는 일전을 겨뤘으나 그만 졌답니다. 그래 생각을 키우다가 오늘 이렇게 운남부터 들른 것입니다."
서역의 번승이 틀림없었지만 중원 말을 유창하게 했고 중원에 대해서도 아주 잘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단지흥은 섣불리 대할 수 없겠다고 생각하고는 공손하게 말을 건넸다.
"법사께서는 내가 지금 이 대환희 보살과 한참 무예를 겨루고 있는 줄을 모르십니까?"
라마 중은 지체 없이 말을 받았다.
"이 운남 땅에서 소승과 무예를 겨룰 수 있는 상대는 오직 단황 나으리 한 분뿐인 줄 아옵니다. 이따위 대환희 보살이야 어디 축에 들기나 하겠습니까. 한데 단황 나으리께서 이런 천치와 상대를 하시다니요."
라마 중이 대놓고 자기를 모욕하니 대환희 보살은 대로하여 대갈일성을 내질렀다.
"어디서 굴러 온 중 놈이 이렇게 방자하냐? 네 녀석은 하늘 높을 줄 모르고 주둥아리를 놀리고 있는데, 내 오늘 네 놈한테 대환희 보살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톡톡히 가르쳐 줘야겠다!"
보살은 대뜸 손을 휘두르면서 소리쳤다.
"충피야, 난 야금야금거리는 것은 딱 질색이다. 너는 책임지고 이 놈을 단번에 잡아 치워라!"
충피는 보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다시금 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소리는 방금 전의 소리와는 역력히 달랐다. 마치 목구멍에서 가까스로 짜내는 듯 매우 가늘어서 귀를 바싹 기울여야 간신히 들을 수 있었다.
라마 중이 보자니 너무나도 우스운 짓거리를 하는지라 그는 기도 안 막혔다. 그는 코웃음을 치며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그따위 허튼수작은 당장 집어치워라!"
그러나 충피는 아랑곳 않고 연해 소리를 냈다. 이윽고 나직하니 붕붕거리는 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눈앞이 새까매지며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시커먼 것들이 날아오는 것이었다. 점점 가까워올수록 붕붕거리는 소리도 고막을 찢을 듯 요란스러워졌다. 일순 선비가 고함을 내질렀다.
"독벌이옵니다!"
그 소리가 끝나자마자 독벌 떼는 이미 그들의 머리 위까지 날아와 있었다. 그들은 부랴부랴 병장기들을 내던지고는 저마다 독벌들을 쫓느라 두 손을 허우적거렸다. 독벌은 독사와 달라서 도끼로 찍어도 소용이 없고, 낚싯줄로 후려쳐도 소용없고, 부채나 호미 같은 것으로도 때려잡을 수 없었다. 몸 주위에서 맴돌면서 좀체로 떨어지지 않고 착 달라붙어 있으니 실로 속수무책이었다. 죽어라고 두 손을 허우적거리면서 쫓으면 잠깐 피했다가는 맥이 진한 틈을 타서 또 달려
들어 따끔따끔 쏘아대는 것이었다.
단지흥과 라마 중은 쩔쩔매면서 독벌 때들을 쫓느라 넓은 팔소매를 마구 휘둘러댔다. 그러나 한 떼가 물러서면 다른 한 떼가 날아들며 잠시도 틈을 보이지 않았다. 사대 시위의 처지는 더욱 비참했다. 그래도 선비는 부채를 휘둘러 독벌들을 얼마쯤은 막을 수 있었으나 다른 셋은 모두 적수공권이니 그저 아우성을 치면서 두 손을 허우적거릴 뿐이었다. 게다가 이 독벌들은 힘들여 훈련시킨 독종들이어서 내치면 내칠수록 더욱 독을 품고 달려들었다. 이들 세 사람은 젖 먹
던 힘까지 다 내 두 팔을 휘둘러 댔으나 독벌 떼를 조금도 물리칠 수가 없었다.
어느 한 순간, 불현듯 수림 속에서 뭔가 우람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진동하더니 수림이 사납게 울어댔다. 독벌 떼는 여전히 그들의 신변에서 맴돌았으나 아무래도 힘이 다했는지 기세가 점점 못해 갔다. 그 천둥 같은 소리는 끊길 줄 모르고 연거푸 들려 왔다. 단지흥 일행과 대환희 보살 무리들은 너나없이 놀라서 일제히 수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수림 속에서 마치 공중에 붕붕 떠 있는 듯한 형상으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이쪽으로 내처 다가오고 있는 것이 아
닌가.
자세히 바라보니 그들은 허공에 떠있는 것이 아니라 다들 코끼리 잔등에 타고 있었다. 이쪽 사람들은 모두들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뿐더러 그들은 모두 여인들이었다. 그녀들은 코끼리를 부리며 곧추 다가오더니 한 장 사이를 두고 멈춰 섰다.
코끼리 잔등에는 민대머리 독수리도 한 마리 앉아 있었다. 충피는 그 독수리를 보고는 독벌들을 얼른 거두어 들였다. 여인들은 거만하게 아래를 굽어보더니 개중 한 여인이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저기 저 사람이 대리국의 황제라는 사람이고, 저기 저 사람이 대환희 보살이라는 여자야."
이어 한 계집애가 깜찍한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이 사람들이 서로 편을 갈라서 싸움을 했는데 참말로 죽기 살기였어요. 저 대환희 보살은 독사를 풀어 놓기도 하고 독벌을 풀어 놓기도 하면서 싸움판을 벌였는데 참말 재미있었어요."
달빛에 비친 그 계집애는 열서너 살 될까말까 했는데 자그마한 가죽 치마로 아랫도리만 달랑 가리고 있었다. 계집애는 사람들을 보면서 해죽거렸다. 이 계집애를 보고 단지흥은 갑자기 두 눈이 환해지는 듯했다. 숙녀동의 바로 그 계집애였던 것이다.
계집애는 단지흥에게 대뜸 말했다.
"폐하, 왜 우리 할머니를 그렇게 소박했나요?……."
단지흥은 흠칫 몸을 떨었다. 자세히 보니 한복판에 선 코끼리 잔등 위에 올라앉은 여인은 바로 영고 뒤를 이어 무당 할미가 된 그 긴 손톱의 처녀였다. 그녀는 이윽토록 단지흥을 내려다보더니 일순 입을 열었다.
"단황 나으리께서는 아마 자기가 한 말을 죄다 까먹지는 않았지요? 그때 단황 나으리께서 어떻게 말씀하셨나요? 무슨 일이 있어도 영고를 잘 대해 주겠다고 하지 않으셨던가요?"
단지흥은 묵묵부답으로 말이 없었다. 그는 이 처녀한테 어떻게 그 사연을 말해야 할지 알 길이 없었고 더구나 누구에게든 영고의 일에 관한 한 다시는 입 밖에 옮기고 싶지 않았다.
계집애도 냉랭히 단지흥을 쏘아보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단황은 참말로 양심도 없는 사람이에요. 그때 내가 단황을 왜 구해 주었는지 아세요? 우리 할머니를 잘 대해 주라고 그런 것이에요."
계집애는 두 눈에 금세 눈물이 핑 돌며 울먹거렸다.
"어서 말해 봐요. 우리 할머니를 어떻게 대했는가 말이에요. 만일 똑바로 대답을 못하면 우리는 폐하를 죽여 버리겠어요. 코끼리가 밟아 놓고 독수리가 쪼아 놓게 하겠어요! 뼈도 추리지 못하게 만들겠다구요!"
단지흥은 쓴웃음을 지으며 사대 시위들을 들러보았다. 그들은 아직 지난밤의 내막을 모르는지라 물끄러미 단지흥을 마주 쳐다보기만 했다. 이들이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냥 멀거니 서 있기만 하자 처녀의 두 눈에선 점점 살기가 번뜩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매섭게 단지흥을 쏘아보면서 추상같이 따져 물었다.
"네 놈은 참말 심술 사나운 놈이야. 내가 네 놈한테 분명히 말했었지, 무릇 숙녀동을 떠난 사람은 우리 숙녀동과는 무관하다고! 아마 네 놈은 그 생각만 하고 우리 할머니를 박대했겠구나. 어떻게 굴었으면 하룻밤 새에 그 모양으로 변했겠느냐? 어서 말을 해!"
그래도 단지흥은 대답이 없었다. 영고와 주백통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어찌 입 밖에 옮긴단 말인가. 더구나 대환희 보살 무리들 앞에서 영고의 일에 대해서 어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단지흥은 씁쓸히 웃으면서 나직이 말했다.
"나와 영고 사이의 일은 우리 둘 사이의 은원(恩怨)이니 너희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러니 너희들은……."
계집애가 얼른 말을 가로챘다.
"글쎄 우리 할머니도 그렇게는 말했어요. 하지만 왜 우리와 상관없는 일이겠어요? 나는 할머니와 이 일에 대해 많은 말을 했어요. 아무튼 우리 숙녀동 여인들은 당신을 가만 놔두지 않을 거예요. 이 자리에서 사연을 똑똑히 말하지 않으면 운리 손에서 빠져 나가기 어려운 줄 알아요!"
숙녀동의 새 할머니가 된 그 손톱 긴 처녀는 자못 위엄이 서려있었다. 그녀는 단지흥을 쏘아보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다소 누그러져 있었다.
"폐하, 필시 무슨 고충이 있는 것 같은즉, 어서 나한테 말을 해요. 내가 듣고서 공정하게 시비를 가려 줄 테니. 하지만 그냥 덮어 감추려 고만 든다면, 당신이 아무리 대리국 황제라 하더라도 당신은 우리 숙녀동 여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예요."
숙녀동의 여인들은 모두 영고의 일을 알고 싶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단지흥과 영고는 무엇 때문에 싸우고 헤어졌는지, 영고는 왜 대리국을 떠나 다시 숙녀동으로 찾아든 것인지……. 숙녀동의 여인들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몹시 궁금할 터였다.
숙녀동 동주 처녀는 다시 한 번 오금을 박았다.
"단황님, 당신은 당신과 영고 사이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 우리 숙녀동 여인들한테 똑똑히 알려 줘야 해요, 필히요!"
단지흥은 처녀를 바라보면서 탄식했다.
"참 답답한 노릇이로구먼. 아무리 궁리해 봐도 그대들 숙녀동 여인들에게 이 일을 똑똑히 알려 줄 순 없노라. 이런 일일수록 그냥 파묻어 두는 게 상책이야!"
그러나 처녀는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안 돼요. 폐하께서 영고를 냉궁에 처넣었을 때는 꼭 무슨 잘못한 짓이 있다고 생각해서 그랬겠는데, 이에 대해서 똑똑히 알려 주지 않는다면 절대로 가만 놔두지 않겠어요."
단지흥은 이제 더는 가타부타 말을 안 했다. 그러자 처녀는 엄한 목소리로 횃불을 밝히라고 영을 내렸다. 그녀의 수하 처녀들은 너도나도 코끼리 잔등 위에서 뛰어내려 횃불을 밝히느라고 부산을 피웠다. 삽시에 널따란 공지는 대낮처럼 환해졌다.
"폐하, 그래도 말을 하지 않을 작정이세요?"
처녀는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단지흥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그순간 그 민대머리 독수리가 날개를 퍼득이면서 훌쩍 날아와 처녀의 팔에 앉았다. 민대머리 독수리는 백 근도 더 나갔지만 처녀는 마치 잠자리 한 마리가 날아와 내려앉은 듯 조금도 힘겨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것을 보고 단지흥은 내심 탄복을 금치 못했다.
이때 계집애가 또 한 추렴 들었다.
"폐하, 우리 할머니께서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만 알려 주면 용서를 받을 수 있어요!"
하지만 단지흥은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러자 처녀들은 중구난방으로 소리를 질러댔다. 그래도 아무런 대꾸가 없더니 한 순간 단지흥은 담담히 웃으면서 나직이 말했다.
"난 그대들한테 더 이상 할말이 없노라!"
동주 처녀는 호수같이 맑은 눈으로 단지흥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남녀간의 그 일을 겪어 보지 못해 폐하와 우리 할머니 사이에 대관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금도 짐작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이만한 사리는 알고 있어요. 우리 할머니가 하룻밤 새에 머리까지 다 세 버릴 때에는 마음속의 고통이 얼마나 컸겠는가 하는 것 말이에요. 스무 살도 안 된 젊은 여자가 하룻밤 새에 오륙십 먹은 노파처럼 됐으니 얼마나 속이 탔으면 그렇게 됐을까요? 폐하, 어서 우리 숙녀동 여인들에게 속시원히 털어놓으세요……."
"난……."난 말할 수 없어!"
단지흥은 확고부동했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말할 수 없었으며 또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 역시 얼마나 속을 끓였었던가. 그 일들을, 한두 번 아니게 다퉜던 그 일들을, 주백통의 그 일을, 자기가 어찌하여 영고의 아들 애를 구해 주지 않았는가를 어찌 몇 마디로 다 말한단 말인가. 말을 하려야 입이 떨어지지 않았을 뿐더러, 설사 입을 벌린다고 해도 어찌 똑똑히 말할 수 있으랴.
동주 처녀는 으름장을 놓았다.
"그럼 됐어요. 말하기 싫어하는데 강박은 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사전에 알려는 줘야겠어요. 오늘 이 밤 내로 폐하께서는 내 이 독수리한테 찢기고 코끼리한테 밟혀 죽는다는 것만 알아두세요."
단지흥의 사대 시위들도 여기에는 필시 무슨 곡절이 있으리라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단지흥이 기어코 말을 하지 않고 버티는 데는 또 단지흥으로서도 남들에게 알릴 수 없는 고충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선비는 나라의 정도를 보아서라도 숙녀동 여인들한테 영고와의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있는 대로 말하라고 단지흥에게 설득할 심산이었다. 얼핏 보아도 이 숙녀동 동주와 계집애는 기실 단지흥에게 호감을 품고 있음에 틀림없어 보였다.
"폐하……."
선비가 허두를 떼자마자 단지흥이 눈알을 부라리며 매섭게 소리쳤다.
"입다물지 못할까!"
선비는 흠칫 놀라 입을 다물었다. 자기들 시위에 대해서는 종래로 늘 너그러이 대하던 단지흥이 아니던가! 이처럼 매몰차게 눈알을 부라리는 것은 실로 처음이었다.
'오늘은 왜 저러실까? 얼굴에 저런 노기가 서린 것은 종래로 보지 못했다. 그 황비의 일에 대해 왜 저토록 말하기 싫어하실까?'
선비는 이리저리 생각해 보았다. 그 사이 단지흥이 숙녀동 동주를 보면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6년 전 숙녀동에서 입은 은혜는 참말로 백골난망이오. 하지만 나와 영고 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당분간 그대들한테 알려 줄 수 없소. 사실 난 지금까지도 내가 영고한테 미안한 짓을 했는지 아니면 영고가 나한테 미안한 짓을 했는지 분간을 못하고 있소. 아무튼 나는 오늘 밤 영고의 아들 애를 죽게……."
단지흥이 거기까지 말하자 처녀는 대번에 소리를 내지렀다.
"그럼 단황님께서 우리 할머니를 소박했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로군요."
단지흥은 처녀의 말에는 아랑곳 않고 고개를 들어 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 하늘에는 유난히 많은 별들이 총총거렸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하나도 똑똑히 들어오지 않았다. 이윽고 그는 고개를 떨구더니 한숨을 내쉬면서 중얼거렸다.
"허 참, 제가 한 일을 제가 모르다니……. 내가 어찌하다간 영고의 아들 애를 죽였는지 참말로 모르……."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계집애가 꽥 소리를 질렀다.
"단지흥 이 놈! 네가 우리 할머니를 구박했으니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난 독수리더러 네 놈을 갈기갈기 찢어 놓게 할 테다!"
계집애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휘파람을 휘익 불어 젖혔다. 삽시에 하늘을 가득 메우고 큰 새들이 날아들었다. 독수리들은 괴상한 소리를 내면서 곧추 아래로 날아 떨어지며 단지흥을 공격할 태세를 취했다. 단지흥은 급급히 손을 쓰기 시작했다. 일순 일진광풍이 일며 지풍이 일직선으로 쭉 뻗쳐 가더니 앞으로 곧장 내리꽂히는 독수리 한 마리를 그대로 갈겼다. 그 독수리는 마치 날카로운 칼날에 찍히기라도 한 듯 비명을 지르면서 날개를 퍼득거렸다.
그 광경을 보자 계집애는 분이 나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단지흥 이 놈! 아마도 네 놈은 그런 재주를 믿고 우리 할머니를 구박했겠구나."
계집애는 말을 마치고는 또다시 휘파람을 휘익 불었다. 갑자기 마른 하늘에 번개가 치는 듯, 바다에서 태풍이 이는 듯 코끼리들이 대가리를 쳐들고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 요란한 소리에 귀청이 다 터질 것만 같았다. 다음 순간, 숱한 코끼리들이 지축을 울리면서 터벅터벅 단지흥을 향해 내처 다가왔다. 이 코끼리 떼는 모두 평소에 그 처녀가 잘 길들여 놓았는지라 정연하게 대열을 지어서 단지흥에게 육박해 들어왔다. 사대 시위는 얼굴이 파랗게 질려 급급히 둥그렇게
진을 치면서 고함을 쳐댔다.
"폐하, 위험하옵니다!"
일단 이 코끼리 떼 속으로 휘말려들기만 하면 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를 가졌다 해도 도통 빠져 나올 수 없을 터였다. 하물며 이 코끼리들은 가죽이 바윗돌마냥 딱딱하고 두터운지라 아무리 창과 칼을 휘둘러도 소용이 없었다. 설사 상처를 입혔다 해도 죽지는 않으니 상처를 입은 후에라도 마구 짓밟아 놓을 수 있는 것이었다.
단지흥도 위험을 느끼고 있었지만 조금도 비킬 생각은 않고 멍하니 서 있었다. 그는 다시금 영고의 아들 애를 머리 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죽어 가는 애를 가만히 보고만 있었으니 내가 그 애를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 더욱이 이후의 화산 무예 시합을 염두에 두고 내력을 소모하지 않으려고……. 무고한 어린애의 목숨을 빼앗았으니 나도 죽어 마땅해. 그 누구를 탓할 일이 아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단지흥은 죽음 앞에서도 자못 초연해졌다. 그는 그저 태연하게 그 자리에 선 채 달려드는 코끼리 떼를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었다. 코끼리들은 질서정연하게 진을 치고 단지흥 앞으로 곧추 다가와서는 일제히 대가리를 쳐들고 한바탕 땅이 꺼지게 울부짖었다. 코끼리 앞에 버티고 서 있는 단지흥은 마치 한 마리 자그마한 벌레 같았다. 그래도 그는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고 꼼짝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라마 중은 코끼리들의 포위망을 뚫고 나가
려고 좌충우돌했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너무 성급하게 덤비다 보니 그만 돌멩이에 발뿌리가 채어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코끼리들이 각일각 라마의 몸뚱어리를 짓밟으려는 찰나 단지흥은 잽싸게 몸을 날려 라마 중을 구해 냈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라마 중은 고래고래 소리를 내질렀다.
"네 년들은 대관절 어떤 년들이야? 왜 이다지도 나를 핍박하는 거냐?"
그러나 동주 처녀는 그 말엔 대꾸도 않고 잠시 휘파람 불기를 중단하고는 대뜸 단지흥에게 쏘아붙였다.
"단지흥아, 이제 더 할말이 없느냐?"
단지흥은 정색을 하며 엄하게 꾸짖었다.
"설사 나와 너희들 사이에 원한이 있다고 해도 다른 사람하고는 상관도 없지 않느냐? 이 이방의 스님은 중원 사람도, 대리 사람도 아닌 한낱 무림의 과객이다. 그러니 이 스님만은 빠져 나가게 해야 할 것 아니냔 말이다."
처녀는 크게 웃어댔다.
"하하하, 페하께서는 지금 남의 사정을 봐주자는 겁니까? 폐하께서 아무리 재주가 빼어나다고 해도 이 코끼리 진은 뚫고 나가지 못할 거예요. 하지만 이제라도 어떻게 우리 할머님을 구박했는지 솔직히 말하기만 하면 놓아줄 수도 있어요."
그러자 단지흥은 낯색을 굳히며 한일자로 입을 딱 다물었다.
"폐하, 아무리 대단한 무림 영웅이라고 해도 결코 내 코끼리 진은 뚫지 못해요. 이제부터는 다른 말은 말고 어서 폐하와 영고 사이에 있었던 일이나 말씀하세요. 우리 숙녀동 자매들이 듣고서 시비를 가릴 테니까. 만일 단황님이 옳다면 순순히 놔주겠어요."
단지흥은 가벼이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대답했다.
"그대는 동주 노릇까지 하고 있으니, 이만한 이치야 알겠지. 옛 사람들이 이르기를 집안의 망신스러운 일은 남들한테 말하지 말라고 했다. 그대와 영고는 비록 숙녀동에서는 자매처럼 지내 왔을지 모르나 영고는 엄연히 나한테 시집을 왔으니 영고와 나는 한집식구이다. 그러니 집안일에 상관치 마라!"
그러나 처녀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제 집안 망신살 뻗친 일을 남들한테 알려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그렇게 따지면 기실 저와 단황님은 한집안 사람이 아닌가요? 단황께서는 왜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나요?"
단지흥은 무슨 뜻인지 몰라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처녀는 단지흥을 말끄러미 건너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는 우리 숙녀동 여자한테 장가들었으니 의당 우리 숙녀동의 모든 자매들과 친척이 되는 거예요. 우리한테 영고의 일을 감추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도 말아요."
처녀는 단지흥이 왜 저리도 고집을 부리는지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그냥 고집을 부리다가는 이 코끼리 진 속에서 송장이 될 터인데……. 그녀는 결코 단지흥 같은 영웅호걸이 코끼리 발에 밟혀 죽기를 원치 않았다. 하지만 단지흥은 여전히 끄떡도 하지 않았다. 오로지 라마 중만이 코끼리 진 속에서 벗어나려고 소란을 피워댔다.
"이 요사스런 계집아! 넌 기마코 내가 코끼리 진과 싸우는 걸 구경하려는 심산이구나."
라마 중은 대뜸 소리를 내질렀다.
"단황의 말씀이 지당해요. 당신은 서역의 중이니 먼 곳에서 온 손님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니 떠들지 말아요. 당신은 그 속에서 나갈 수 있도록 허락할 테니……."
라마 중이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둔탁한 채찍 소리가 울렸다.
그중에서 채찍 한 가닥이 날아오더니 중의 허리를 휙 감아서는 눈 깜짝할 사이에 코끼리 진 밖으로 끌어냈다. 채찍의 반동으로 땅바닥에 나가떨어진 라마 중은 한 바퀴 구르더니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는 고개를 돌려 코끼리 진을 바라보았다. 거무칙칙한 코끼리들이 빼곡하게 둘러싸고 있어서 단지흥을 찾아보려야 볼 수가 없었다.
이때 사대 시위들은 소리 높이 단지흥을 부르면서 코끼리 진 안으로 뚫고 들어가려고 달려갔다. 그러나 대환희 보살은 이때다 싶어 큰소리를 지르면서 달려나와 사대 시위의 앞을 떡 가로막고 병장기들을 휘둘러댔다. 사대 시위는 한시가 바빴지만 별수가 없었다. 그들은 코끼리 진 밖에서 대환희 보살 수하의 계집과 사내들을 막아내느라 허둥거렸다.
단지흥은 홀로 코끼리 진 안에 서 있었다. 그는 이처럼 경황이 없는 가운데서도 영고 생각에만 골몰했다. 그는 영고가 숙녀동의 자매들한테 그 일들에 대해 말했는지 어쨌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영고의 성미로 미루어 보아 그녀는 절대 말할 사람이 아니었다. 영고는 언젠가 꼭 복수를 하려고 할 것이다. 그때가 언제일까. 그때가 아니면 그녀는 영영 자기 앞에 나타나지 않으리라. 그는 불현듯 영고에게 미안한 마음이 솟구쳐 자기도 모르게 문득 하늘을 우러르더니
장탄식을 했다.
"영고! 이봐요, 영고! 그대가 만일 여기에 있다면……. 나는 그대가 마음대로 나를 찍고 베고 해도 가만히 있겠소. 그리하여 그대 마음에 가득 찬 울화를 풀어 버릴 수만 있다면……. 저런 계집애들 손에 죽느니 차라리 난 영고의 손에……."
하지만 아무리 뉘우치고 후회해도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영고가 어찌 그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으랴. 그는 일순 두 눈을 감았다. 그는 코끼리 떼가 자기를 향해 한걸음 한걸음씩 다가오고 있는 것을 육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일양지를 펼쳐 코끼리의 눈을 멀게 하고는 그 틈에 포위를 뚫고 나갈 수도 있었지만 그는 악을 쓰면서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조용히 죽음을 기다렸다.
숙녀동 여인들은 숨을 죽인 채 증오에 찬 눈길로 그 모습을 지켜 보고 있었다. 일순 코끼리 한 마리가 길다란 코를 휘둘러 단지흥을 감으려 했다. 계집애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꽥 질렀다.
"야단났어요!"
계집애는 코끼리가 코를 내미는 순간 단지흥이 그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코끼리 코를 밟고 몸을 솟구쳐 코끼리 잔등에 뛰어오를까 봐 덜컥 겁이 났던 것이다. 그렇게 되는 날이면 자기들이 단지흥의 출중한 무예를 막아내지 못할 것은 불 보듯 뻔하지 않은가.
하지만 단지흥은 여전히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코끼리는 삽시에 단지흥을 휙 감더니 허공으로 쑤욱 올렸다가 있는 힘껏 땅바닥에 내동댕이를 쳤다. 땅바닥에 내리꽂힌 단지흥은 사지를 쩍 벌 린 채 일어날 줄을 몰랐다. 코끼리는 곧 육중한 발을 들어서는 단통에 단지흥을 짓밟으려 했다.
사대 시위는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단지흥의 안위가 위험에 처했음이 분명했다. 그들은 일제히 고함을 지르면서 돌진해 들어갔다. 그들은 하나같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고 있었다. 어느새에 선비의 부채는 피가 낭자했다. 그는 두 눈을 부릅뜬 채 눈에 보이는 족족 부채로 내리쳐댔다. 한 뚱뚱보 여인은 직통으로 머리를 맞아 그 즉시 묵사발이 됐다. 그 여인의 머리에서 솟구친 피는 선비의 온몸에 점점이 튀어 박혔다. 선비는 벌겋게 눈이 충혈되어서는 천둥같
이 고함을 지르면서 몸을 돌려 또다시 부채를 내리쳤다. 이번에는 부채가 곧바로 한 뚱뚱보 여인의 젖통에 맞았다. 그계집은 퐁퐁 뛰면서 비명을 올렸다. 선비는 부채로 마구 내리치면서 고함을 쳤다.
"나를 막는 자는 죽는다!"
뚱뚱보 여인들은 기겁을 하여 엉겁결에 양쪽으로 쭉 갈라섰다. 선비는 그 사이를 뚫고 곧장 코끼리 진 가까이까지 육박해 들어갔다. 하지만 코끼리들이 어찌나 비좁게 몰려 서 있는지 비집고 들어갈 틈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선비는 틈을 보다가 훌쩍 몸을 솟구쳐 코끼리 잔등 위로 올라섰다. 하나 그의 두 발이 채 코끼리 잔등에 닿기도 전에 그의 발을 향해 칼이 휙 날아왔다. 선비는 잽싸게 칼을 피하며 다시 코끼리 진 밖으로 뛰어내렸다.
이때 농부 역시 코끼리 진 가까이 달려와 있었다.
"어떻게 하지?"
농부가 겁먹은 눈길로 다급히 물었다. 선비는 그에게 얼른 눈짓을 보내고는 급급히 소리쳤다.
"쌍뢰후(雙雷吼)!"
농부와 선비는 몸을 위로 솟구쳤다. 둘은 삽시에 공중으로 높이 솟았다. 이때 선비가 농부의 정수리를 콱 밟으면서 또다시 몸을 솟구쳐 코끼리 진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선비가 코끼리 진 안으로 들어섰을 때는 단지흥이 코끼리 발에 깔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는 등골에 오싹 소름이 돋으며 벽력같이 고함을 쳤다.
"폐하, 무릇 국사가 지엄하고 개인의 일은 경하옵니다. 나라 대사는 원전으로 돌리시고 이게 어인 처사이시옵니까?"
선비는 홱 몸을 날려 자기 몸으로 단지흥을 덮쳤다.
'코끼리가 밟아도 내가 먼저 죽겠지!'
선비는 단지흥의 몸을 덮고는 두 눈을 부릅뜨고 코끼리의 발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의 눈에는 돌기둥같이 육중한 코끼리 다리가 시시각각으로 달려들었다. 그는 이제는 정녕 죽었구나 생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