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殺人)의 천재(天才)
천진부(天津府)의 새벽은 수로(水路)를 통해 들어오는 상선의 일꾼들에 의해 깨어진다.
그네들은 매우 거칠고 투박하다. 그네들은 거친 물과 싸우느라 매우 강한 팔뚝과 더불어 심한 말투를 배우게 되었다.
지나가는 여인들만 보면 입에 담지 못할 음담패설을 마구 토해 내고, 그네들은 그러한 식으로 새벽을 일깨웠다.
눈이 그친 후인지라 대기(大氣)는 아주 차고 깨끗했다.
수부(水夫) 중 하나인 이운장(李雲章).
그는 허리띠를 끄른 상태로 강(江)을 보고 있다.
"어이, 시원하다!"
그는 분수처럼 뿜어지는 누런 물줄기를 보며 희희낙락해한다.
쏴아아… 쏴아……!
오줌발이 삼 장(丈)이나 뻗어 나간다.
"큿큿… 화월(花月)이년을 만족시키고도 남음이 있지 않는가? 화월이년이 게거품을 물고 떨어지면, 비화(飛花) 그년을 홀려야지. 비화 그년의 새서방인 이가놈은 세 번만 하면 나가 자빠져 빽빽거린다니… 클클, 비화 그년은 아마도 내가 기나긴 새벽을 즐겁게 해 주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을 것이다!"
이운장은 몸을 덜덜 흔들다가 허리춤을 조인다. 그리고 그는 방귀를 부욱 뀌어 대며 허리띠를 조르려 하다가는, 돌연 누런 코를 피잉 풀어 내며 욕설을 해댔다.
"젠장, 저 서생(書生)놈은 뭐가 그리 힘들다고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걸어간단 말인가?"
그는 십여 장 밖을 보고 있었다.
안개가 아스라이 흐르고 있다. 노르끄레한 옷을 걸친 황삼청년 하나가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제기랄, 네놈은 글줄깨나 배운 통에 편히 사는지 모르나, 퉤에! 나란 놈은 배운 것이 이 짓뿐이라, 늘 소피를 강에다 보고 산다!"
이운장은 투덜대다가 허리띠를 조이고 등을 돌렸다. 그리고 곧 그가 본 사람을 잊어버렸다.
이제 그가 생각하는 것은 오직 하나, 품삯으로 얼마를 받을 것인가 하는 것뿐이다.
강(江), 그는 강을 보며 나아가고 있었다.
쉬지 않고 칠천 리(里)를 돌아다닌 후였으나, 그는 조금도 지치지 않은 상태였다.
'마가(魔家)는 힘을 더욱 강화시켜 나간다. 조속히 처단하지 못한다면 온 천하가 마가에게 장악되리라.'
바로 백무엽, 그는 정법회에서부터 자신을 뒤쫓는 두 명의 동영출신인 자를 척살한 후 즉시 천진부로 돌아왔다.
저벅- 저벅-!
그는 무릎까지 쌓인 눈을 밟고 걸어갔다.
그는 평상시에는 무공을 쓰지 않는 습관을 들였는지라 답설무흔(踏雪無痕)을 쓰지 않고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현재 변체환용(變體換容)으로 얼굴을 바꾼 상태였다.
쾌활화림(快活花林).
문은 여전히 꽈악 닫혀 있었다. 백무엽은 주홍대문(朱紅大門)을 바라보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 지긋지긋한 곳도 정들고 말았다.'
그는 고향에 찾아온 기분에 젖어들었다.
이제껏 그는 어떻게 하든 인문(忍門)을 떠날 작정이었다. 한데, 이제는 전혀 달랐다.
이제부터는 그가 바로 인문이다.
'이제는 죽기 전에는 인문을 떠날 수 없을 것이다.'
백무엽은 내심 중얼거리며 주홍대문 가로 다가갔다.
몇 걸음 걸었을까? 그는 아주 차디찬 기운이 모공 속으로 스며듬을 느꼈다.
'살기다. 누군가 나를 노리고 있다. 숨는 데에는 꽤나 능숙한 자들이다.'
백무엽은 순간적으로 내공을 사지백해로 퍼뜨렸다. 살기는 모두 다섯 군데에서 흘러들고 있었다.
'대단한 신법으로 숨어 있다. 그렇다면……?'
백무엽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아주 천천히 걸음을 내딛어 한 그루 나무 앞으로 다가갔다.
무화과(無花果)나무, 그는 그 아래 서서 잔가지 하나를 가볍게 꺾어 들었다.
뚝-!
나무조각이 잘리는 그 순간, 다섯 사람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 왔다.
"좋아, 무화령! 들어가게!"
"큿큿… 화신이 정말 지독하군? 우리들마저 자네인 줄 몰라볼 정도로 교묘하게 화신을 하다니!"
"무화과 가지를 꺾어 자신을 밝힌다는 암호를 잊지 않았다면 자네인 줄 몰랐을 것이네!"
"어서 들어가 보게, 제십좌. 문주가 기다리시네. 아무래도 보통 일은 아닌 듯하네."
천일홍(千一紅) 철목성승(鐵木聖僧),
묵죽령(墨竹令) 제노인(帝老人),
연자령(燕子令) 풍진취개(風塵醉蓋),
황국령(黃菊令) 야유향(夜遊香),
설매령(雪梅令) 강룡사태(降龍師太).
다섯 사람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떠나지 않았다.
백무엽이 머물 결심을 했듯, 그들도 영원히 머물 결심을 한 듯했다.
"문주가 암호를 보내 모두를 모이게 한 것이네!"
"무슨 일인지 우리들도 아직 모르네!"
"클클… 아마도… 좋은 일일 거야."
"어서 가 보게!"
"가는 체하고 다시 와서 미안허이! 클클, 정(情)이 무엇인지…."
모두들 백무엽을 반가워하고 있었다.
백무엽은 이들 모두의 후예라고 할 수 있었다.
'고맙소이다, 여러분들! 다시 와 주시어서…….'
백무엽은 가슴이 뿌듯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다섯 사람이 살기를 거두는 순간, 사방에서부터 요기(妖氣)가 흘러들었다.
말할 수 없이 신비하고 음악한 기운, 감각이 뛰어난 백무엽마저 원천을 알지 못한 지극히 가는 기운이 거미줄같이 주위에 퍼져 있었다.
'기문진의 기운일까?'
백무엽은 조금 의아해하면서도 주홍문을 밀고 들어섰다.
너른 쾌활처럼 안은 산사(山寺)마냥 고적했다.
백무엽은 문 안으로 들어선 후부터는 족인(足印)을 눈에 남기지 않았다. 그는 눈을 밟고 빠른 속도로 걸어 나갔다.
"더 기다릴까요?"
"됐다. 안으로 들어선 것만 해도 우리는 성공한 것이다. 지금 들어선 자야말로 우리가 찾던 자 같다! 바짝 조여라!"
"모든 고수는 진도에 따라 움직여라!"
"특별한 명이 있을 때까지는 숨소리도 내지 말고, 절대 일백 장 안으로는 다가서지 마라!"
언제 나타났을까? 일대는 드넓게 포위되어 있었다.
머리 위에서부터 발끝까지를 흰 천으로 휘감은 자들이 나타나더니, 소리 없이 화림의 외곽을 둘러싸 버렸다.
화림은 철통같이 차단되어 있었다. 나는 새라도 한 번 들어서면 다시는 나가지 못할 정도로.
놀라운 것은 수천 명이 하나같이 절정고수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 중에는 반인반시(半人半屍)의 강시(彊屍) 경지에 이른 자들도 있었다.
아아, 진짜 무서운 바람은 이제부터가 시작인 듯했다.
계단은 일백팔 개였다.
화림의 지하에는 지상의 건축물보다 거대한 면적을 차지하는 지하궁전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 곳은 본시 십화궁의 터전이었다.
십화궁은 이 곳에서 자라났다. 그러다가 세력이 커지자 이 곳을 떠나 벽황산(碧皇山)이란 곳으로 갔고, 거기서 수십 년 간 천하에 군림하다가 혈화삼에 의해 와르르 무너졌던 것이다.
십화비궁(十花秘宮).
이 곳을 세우기 위해 만 근(斤)의 황금과 이만 근(斤)의 순은(純銀), 그리고 십만 관(貫)의 구리가 쓰여졌다.
한때는 천여 명이 기거했는데, 지금 기거하고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이었다.
설향(雪香).
이 곳이야말로 그녀의 연공관이었고, 지혜의 보고였다. 그녀는 서재(書齋)였던 곳을 거처로 쓰고 있었다.
백무엽은 서재 쪽을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설향에게 변괴가 생겼다면 견디기 힘들었으리라. 훗훗, 증오의 대상이던 설향이 내게 꽤나 귀중한 존재가 되다니… 이를 일컬어 인생은 유전한다 하는 것인가?'
백무엽은 묘한 웃음을 입가에 드리웠다.
그는 미끄러지듯이 이십여 장을 나아갔다. 그는 모퉁이 세 개를 지나 일대에서는 가장 환한 장소에 이르렀다.
문(門), 문은 세 치 정도 열려 있었으며 그 안에서는 자색 빛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백무엽이 문 쪽으로 다가설 때였다.
'이상한데? 냉기(冷氣)가 심하게 흐르다니?'
백무엽은 심맥(心脈)을 짜릿하게 하는 한기를 느꼈다.
그 기운은 방 안에서 흘러 나오고 있었다.
'어찌 된 일일까? 방 안에서 차가운 기운이 흘러 나오다니……?'
백무엽은 긴장된 표정을 하고 헛기침 소리를 냈다.
"내가 왔소이다!"
그는 약간 크게 말하며 문 쪽으로 조금 더 다가갔다. 그러자 한기가 더욱 심해졌다.
보통 사람이라면 느끼지 못할 지극히 미세한 기운이나, 백무엽은 탁월한 감각으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이를 가볍게 악물며 문 바로 앞으로 다가섰다.
"제십좌냐? 들어와라!"
방 안에서 꽤나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설향의 목소리다.'
백무엽은 한동안 긴장하던 마음을 버리고 불쑥 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거기 있었다. 자단목으로 된 작은 나무의자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데, 백무엽으로서는 그녀의 정면이 아니라 왼쪽 옆얼굴만을 볼 수 있었다. 얼굴은 흐트러진 머리카락에 가려져 있었다. 한기는 그녀의 몸에서 흘러 나오고 있었다.
'설향, 고생을 많이 했나 보구려. 수척해 보이니!'
백무엽의 뱃속에서는 따뜻한 마음이 일어났으나, 그의 눈빛은 여전히 차고 흐릿했다.
감정을 마음대로 드러내기에는 그간의 단련이 너무도 혹독했다.
"문주, 다녀왔소!"
백무엽은 짤막이 말했다.
"수고했다. 네가 음야홍 처단에 성공했다는 것을 소문으로 듣고 기뻤다!"
설향은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녀는 꽤나 냉담했다.
'조금 이상한데?'
백무엽은 일순 쩌릿한 기분을 맛봤다.
그의 입가가 약간 일그러질 때였다.
"한데, 귀로가 지연되었구나. 무슨 일이 있었느냐?"
"있었소."
"무엇이었느냐?"
"두 명이 쫓았소. 사실, 음야홍을 죽이는 일은 함정이었소. 마가에서 우리를 노리고 함정을 판 것이었소!"
"그래서?"
"둘 다 처치했소. 그 일 때문에 예정보다 사흘이나 늦게 돌아온 것이오!"
"흠, 그런 일이 있었다니 유감이다!"
"문주는 어땠소이까!"
"아주 쉬웠다!"
"다행이오."
"하여간 수고했다, 제십좌. 그래서… 네게 한 가지 하사품을 준비했다. 그것은 이것이다!"
설향은 몸을 틀지 않고 손목만 움직였다.
팟-!
작은 나무갑 하나가 백무엽 쪽으로 날아들었다.
백무엽은 아주 가볍게 목갑을 받아 들었다.
그는 천천히 목갑의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 든 것은 하나의 자색 단환이었다.
목갑이 열리는 순간, 말할 수 없이 강한 향기가 풍겨 나왔다.
<대환천령신단(大環天靈神丹)>
크기는 계란만했는데, 표면에는 금박으로 그런 여섯 자가 적혀 있었다.
'향기(香氣) 속에 이상한 내음이 스며 있다. 약과 더불어… 독(毒)이 들어 있는 듯이!'
백무엽은 그것을 바라보다가 눈길을 설향에게 돌렸다.
그의 눈빛은 일순 차가워졌고, 그것은 곧 정상이 되었다.
"고맙소, 문주!"
"너의 수고에 대한 보답이다!"
"문주, 충성할 뿐이오!"
"물론, 그래야 한다. 너는 단약을 먹고 더욱 강해질 것이다!"
"고맙소, 문주. 한데, 다음 살행(殺行)은 언제 시작할는지요? 지난번 내게 은밀히 말한 그 건(件)은?"
"그, 그것은……!"
설향은 말을 약간 더듬었다.
"지난번 내게 명한 것이 있지 않습니까? 그 일도 시급한 일이었는데, 이번 일로 인해 미루어졌지 않습니까? 그 일을 언제쯤 처리해야 할지요?"
"그 일은 곧 하기로 하자!"
설향의 대답이 거기에 이를 때였다.
"풋풋… 재미있군."
백무엽의 입술 사이에서 냉소가 터져 나왔다.
"무엇이 재미있느냐, 제십좌?"
설향이 다그치듯 반문했다.
"은자도 치르지 않은 채 연극을 보는 것이 재미있다는 말이다!"
"뭐라고?"
설향의 양 어깨가 움찔거렸다.
"훗훗……!"
백무엽의 웃음소리에는 살기가 스며 있다. 그와 함께 의자에 앉은 설향의 오른손이 천천히 쳐들리고 있었다.
'놈이 알아챘다. 내가 가짜라는 것을…….'
그녀는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체하며 금주머니를 움켜쥐었고, 일순 기합 소리와 함께 금주머니가 백무엽 쪽으로 섬전처럼 폭사되었다.
"핫-!"
금주머니는 한순간 허공을 가르며 다가왔고, 백무엽은 기다렸다는 듯 우장을 쳐냈다.
"방자한 것, 감히 설향 행세를 하다니!"
콰앙-!
폭음이 나며 금주머니는 백무엽이 격공장(隔空掌)에 의해 산산이 터졌고, 그 순간 매캐한 안개가 서재를 가득 메웠다.
시꺼먼 안개는 찰나적으로 방 안을 뒤덮었다.
치이이- 익- 치익-!
물이 끓는 소리가 나며 방 안의 기물이 스물스물 녹아 버리기 시작했다.
천흑부식산(天黑腐蝕散).
독성이 지극히 강하고, 부식력이 강해 쇠고 돌이고 간에 가리지 않고 찰나적으로 녹여 버리는 가공할 독약이다.
그것은 찰나의 위력을 발휘한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벽이 녹고 나무탁자가 썩어 문드러지는 동시에, 천흑부식산은 자취를 감췄다.
독분이 뿌려졌던 곳은 아수라지옥으로 화했다.
흐물흐물하게 썩어 버린 돌덩어리는 유황불에 타 버린 듯 검게 물들었고, 반경 삼 장 내의 모든 잡기는 한줌의 재로 화해버렸다.
두 눈, 요사한 두 눈은 그것을 보며 이를 빠드득 갈았다.
"눈치 빠른 놈, 그 덕에 너는 목숨을 단축한 것이다. 다른 놈들처럼 주는 단약을 눈치 없이 받아 먹었다면 그래도 목숨은 부지했을 텐데……."
아아, 이럴 수가?
그녀는 설향이 아니라, 설향의 얼굴과 몸매가 같은 다른 여인이었단 말인가?
다른 것은 완전히 같으나, 눈빛만은 달랐다. 여인도 눈빛만은 어찌할 수 없었기에 백무엽에게는 눈빛을 속였던 것이다.
"하여간 제일 골치 아픈 놈은 처단한 셈이다! 호호! 이 일로 인해 나는 지위가 꽤나 높아질 것이다!"
여인은 음사하게 말하며 손을 품에 넣었다. 그녀는 표면에 꽃무늬 영롱한 마적(魔笛)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것을 불면 구백 위사(九百衛士)들이 들이닥친다. 호호……!"
그녀가 웃으며 마적을 불려 할 때였다.
손(手), 돌연 희고 아름다운 손이 나타나 그녀의 목젖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노래를 부르기 이전, 자기 소개부터 하는 것이 예의가 아닐까? 어이해서 그녀의 가짜가 될 수 있었는지… 훗훗, 내 비록 인내심은 없으나 그 이야기라면 어떤 것이라도 묵묵히 참고 들어 줄 수가 있다!"
아아, 백무엽. 그는 마치 환상처럼 여인 앞에 섰다.
대인법(大忍法), 그것이 시전되었던 것이다.
백무엽은 흑무가 뿌려지는 찰나, 여인의 뒤쪽으로 몸을 날렸고 맥과 숨소리마저 끊어 여인을 속였던 것이다.
그의 손아귀에 강한 힘이 주어졌다.
설향으로 위장한 여인의 목뼈가 부러질 듯 우둑거리기 시작했고, 여인의 머리카락은 창날처럼 올올이 곤두섰다.
"제… 제발! 모, 모든 것은 그 나으리가 명해서 이루어진 일이다. 그, 그 나으리가……."
"누구 말이냐?"
"마, 마화삼(魔花衫)!"
가짜 설향의 낯색은 밀랍(蜜蠟)같이 희어졌다.
보라! 백무엽의 두 눈에서 폭사되는 잔혹한 혈광(血光)을.
그 빛은 쇠라도 녹일 듯 강렬했다.
"마화삼이란 자가?"
"그… 그렇다. 제일좌(第一座)란 자는 소림에서 마검환사(魔劍幻邪)를 암살하고 나서 추종당했다"
"마검환사가 누구냐?"
"고, 고엽선사를 죽이고 잠입한 마가의 마혼첩(魔魂諜) 중 하나로 제일외단주(第一外壇主)이다!"
가짜 설향의 뒷머리는 벽에 닿았다.
백무엽은 그녀의 목뼈를 부러뜨릴 듯 강하게 목을 조이고 있었다.
보라! 그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섬뜩한 살광을.
'이 자는 진짜 악마다.'
가짜 설향은 오줌을 펑 싸서 하의를 촉촉하게 적셨다.
"해태랑(海太郞)과 천태랑(天太郞)이 제일좌를 따랐고, 구백 위사가 그 계집을 잡았다."
"그래서?"
"내가 아는 것은 그것뿐이다. 나는 마화삼을 곁에서 모시는 마화비(魔花妃) 중 하나일 뿐이다!"
"마화삼이 무엇을 시켰느냐?"
"인문 사람을 모두 한 곳에 모으게 하고, 인문에서 가장 강한 무화령을 기다리라고 했다."
"그리고?"
"그, 그를 죽이라고 했다!"
"흠!"
"그리고… 죽이게 되면 마적(魔笛)을 불어 다른 자들도 다 죽이고, 죽이지 못하게 되면 한 가지 물건을 전하라고 했다!"
"무엇이냐?"
"내… 내 품에 있다! 은색 주머니다!"
"품?"
백무엽은 오른손으로 여인의 목을 강하게 조이며 왼손을 들었다.
그의 손이 흔들리며 여인 앞가슴 옷이 일순 찢어졌다.
찌익-!
옷이 찢어지며 봉곳한 젖가슴 두 개가 와락 튀어나왔다.
터질 듯 풍만한 젖가슴 위에는 까아만 유실(乳實)이 하나 매달려 있었다. 그것은 공포로 인해 단단히 뭉쳐 있었다.
계집의 젖가슴 사이에는 은주머니 하나가 끼워져 있었다.
백무엽은 그것을 떼어 낸 다음 활짝 열었다. 그 안에는 쪽지 한 장이 들어 있었다.
백무엽은 그것을 펴 보다가 입술을 악물었다.
'발칙한 놈!'
그의 눈에서는 더욱 지독한 안광이 쏟아져 나왔다.
그의 일생을 통해 이처럼 노한 순간이 또 있었을까?
<이 글을 보게 된다면 그대는 매우 늠름하고 멋진 대장부라 불려 마땅하고, 능력을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본좌는 마가의 소총사(少總師)로 인재를 구하고 있어, 특히 살기가 강하고 무공이 뛰어난 사람을 더욱 높이 산다.
바란다면 본좌가 휘하고수로 특채하겠다.
자객이란 본시 명분(名分)보다는 실리(實利)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니까!
그 계집은 죽여도 좋다! 귀하에게 잡힌 이상, 내게는 쓸모가 없으니까!
그런 벌레는 마가에 별로 쓸모가 없다.
본좌의 휘하에는 수십만 고수가 있다. 그대가 단독으로 날뛴다 해도 본좌의 아성(牙城)에는 전혀 영향이 없다.
전 마가의 힘은 천 년(年)에 걸쳐 뭉쳤으니까!
그리고 본좌는 중원인들끼리 싸우는 것을 지극히 혐오하고 있다. 그래서 진면목을 정식으로 드러내지 않고 암중에 만사를 처리하는 것이다.
설향이란 계집은 당분간 나의 몸종이 될 것이다. 돌려 받고 싶다면 수급(首級) 하나를 갖고 와라!>
정말 피를 끓게 하는 글이었다.
마화삼이란 자는 보통 마도인들과는 격이 달랐다. 그는 무자비했고, 동시에 병법에도 탁월했다.
그는 출관한 지 보름도 되지 않아 결국 인문의 모든 것을 알아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청부(請負)라니……?
<네가 죽여야 할 자는 여자(女子)로 나이는 십구 세(十九歲), 거주지는 자금성(紫禁城) 서쪽의 별궁(別宮)!
이름은 주화영(朱華影)!
영락제(永樂帝)의 육촌으로 군주(君主)이며, 화영친위대(華影親衛隊)를 이끌고 있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마화삼이 인문에 화영군주의 죽음을 청부하다니…….
화영친위대(華影親衛隊), 그들의 힘은 천하삼패(天下三覇) 중 하나로 여겨진다.
천외일패(天外一覇) 사천황궁(邪天皇宮),
천년제일패(千年第一覇) 마혼십가(魔魂十家),
자금성(紫禁城) 화영친위대.
화영친위대는 수 년 전부터 마가의 세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보름 안으로 그 계집이 암살당했다는 소문이 난다면 설향이라는 년은 돌아가게 될 것이다!
소문이 없다면 아마도 그 계집은 뭇사람에게 즐거움을 주게 될 것이고, 그 후 난도질되어 만두속이 되리라!
나는 한다면 하는 사람임을 말하지 않아도 알 줄 믿는다.
화영군주의 목을 청부하는 이유는 불행히도 본좌의 휘하에는 너 같은 전문가가 없기 때문이다.
너를 높이 평가한다! 그러니 본좌의 기대를 어기지 말고 그 계집의 목을 잘라 와라!
그리고 그 곳은 너만 나갈 수 있다. 다른 자들은 인질로 남아야 한다.
나갈 때, 사해동심초(四海同心草)라고 말한다면 본좌의 제자들은 너를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
글은 그렇게 끝이 났다.
백무엽의 손에는 땀이 흥건히 쥐어져 있었다.
"그 놈이 이것을 전했느냐?"
백무엽은 가짜 설향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대답을 하지 못할 처지가 되고 말았다.
보라! 그녀의 두개골이 순두부처럼 으스러진 것을.
벽에는 피와 뇌수가 질퍽하게 뿌려졌다.
'나도 모르게 힘을 가하고 말았어. 머리가 부서져 그만 죽고 말다니…!'
백무엽은 손에서 힘을 뺐다.
가짜 설향은 썩은 집단이 무너지듯이 앞으로 넘어졌다.
털썩-!
주위가 고적한지라 그녀의 시신이 나뒹구는 소리는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설향, 네게 무엇인가 한 마디 말을 해 주고 싶었는데… 잡히다니……!"
백무엽은 쓴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운명(運命)이란 놈은 나와는 거리가 먼 것 같군.'
백무엽은 힐끔 천장을 쳐다보았다.
"운명은 나를 비켜 가는지 모르나, 죽음만은 비켜 가지 않는다. 그리고 마화삼, 네놈도 조만간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개처럼 엎드린 상태에서!"
백무엽의 눈은 용암같이 뜨거워졌고, 곧 차분해졌다.
"좋아, 자금성으로 가자! 설향은 내가 이런 일을 하는 것을 싫어하겠으나, 나로서는 할 수밖에 없다!"
백무엽은 천천히 걸음을 내딛었다.
"그러나 쉽게 당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인문 사람은! 그리고 그것은 네가 곧 알게 될 것이다!"
너! 그 이름은 바로 마화삼을 부르는 이름이리라!
화림(花林) 하늘은 검게 찌푸려졌다. 아마도 이 겨울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눈이라도 쏟아져 내릴 듯했다.
백무엽은 느릿느릿 뜨락으로 걸어나왔다.
'구백(九百)! 많다면 많으나, 적다면 적다!'
백무엽은 입술을 잘강잘강 씹고 있었다. 그는 십 보 정도 느릿느릿 걸었다.
'동서남북 네 방위에서 모두 마기(魔氣)가 솟구치고 있다. 네 가지 진세가 쳐졌다는 증거다!'
백무엽의 입가에는 사악하기까지 한 미소가 떠올랐다.
가히 뇌쇄적인 미소, 용모를 바꾸고는 있으나 그 미소는 여전히 황홀했다.
그는 홍살문을 향해 걸어가며 뒷짐을 졌다.
'이미… 놈들은 완전한 진세를 구축했다.'
동(東), 그 곳에는 혈사무한쇄(血死無限鎖)라는 진세가 펼쳐져 있었다.
서(西), 가장 강한 마기는 거기서부터 일어났다.
창천혈화진(蒼天血花陣).
이백여 명이 펼치는 진세로, 최후의 하나가 죽어 쓰러질 때까지 진세가 유지되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남(南), 뇌정혈살대진(雷霆血煞大陣).
십대마가 중 하나인 뇌정마가의 비전진법이었다.
뇌정패(雷霆牌)와 우뢰도(雨雷刀), 마벽탄(魔闢彈)이라는 가공스러운 마병(魔兵)을 이용해서 펼치는 진세로 여차하면 동귀어진(同歸於盡)하는 특징이 있다.
북(北), 귀화명멸참혼진(鬼火明滅斬魂陣).
마등(魔燈)을 든 자들이 시전하는 진세로, 시야를 방해하는 가운데 적을 포박하는 효용이 있다.
사대절진에 갇힌 화림 일대는 가히 천라지망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백무엽은 조금도 초조한 기색이 아니다.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듯 태연하게 걸어 나갔다.
그가 지금 걱정하는 것은 단 하나, 화림 밖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 다섯 사람의 안위였다.
저벅- 저벅-!
그는 계속 걸어 나갔고, 몇 걸음 채 걷기도 전에 자신의 생각이 기우였음을 깨달았다.
다섯 사람은 어느 틈엔가 화림 안으로 들어와 있었고, 백무엽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미소를 짓는 것이 아닌가?
묵죽령(墨竹令) 제노인(帝老人), 그는 가장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제철점(蹄鐵店) 안에 의자를 놓고 앉아 있었다. 그의 근처에는 잡다한 철물들이 놓여 있었다.
과거의 마병지존(魔兵至尊) 제노인은 백무엽이 휘어이휘어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씨익 웃었다.
"어떤가, 문주는? 그래, 참새구이를 만들라고 하던가? 아니면 포자(飽子)를 만들라고 하던가?"
매우 묘한 말이다. 그리고 그 말은 백무엽을 미소짓게 했다.
"아셨습니까? 수백 마리 참새가 모여들었음을?"
"크크… 어이해 모르겠는가? 무공이야 자네의 오분지 일에 불과하나, 노련하기야 자네 이상이지! 크크, 다만 문주의 행동이 괴이쩍고 말을 하지 않기에 기다리고 있을 뿐이네! 한데, 문주가 바뀐 후일 줄이야!"
제노인, 그는 이미 구백 명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의 몸 근처에 늘어진 철물들은 하나하나 가공할 화기(火器), 암기(暗器)였다. 그 중 반만 써도 오천 명은 몰살시킬 수가 있다.
"불놀이가 좋겠지요?"
"좋아, 좋아!"
"동쪽에다 불을 지피십시오! 물론 이 곳의 땅값이 떨어지면 아니 되니, 너무 심하게 태우면 아니 됩니다."
"자네도 이제는 철이 들었군! 좋아!"
천야농부(天野農夫), 그는 잠깐의 시간이라도 대지(大地)에 쏟고 싶은 듯 무화과나무 숲 아래에서 호미질에 한참이었다.
푹- 푹-!
그는 호미로 흙을 파서 도랑을 만들고 있었다.
작은 흙두렁 이십팔 개가 만들어졌고, 흙벽도 여덟 개나 만들어진 상태였다.
"뜨락이 좋군요?"
백무엽은 다시 미소를 지었다.
"좋아! 백은 가둘 수 있어."
천야농부는 전음으로 말한다.
그는 호미질을 하며 진세 하나를 형성했다.
아직 위력이 나타나지는 않았으나, 호미질을 진의 중극(中極)에다가 가하는 찰나, 일대는 풍운(風雲)에 휘감긴다.
'달마무회진(達磨無回陣). 저 정도면 최소한 성승(聖僧)의 일신은 지킬 수 있다.'
금적산(金積山), 그는 쭈그리고 앉아 은자(銀子)를 세고 있었다.
"이백사십오, 이백사십육……!"
그는 은자를 차곡차곡 세다가는 백무엽을 보고 씨익 웃었다.
"요새 관 값이 얼마인지 아는가?"
"한 냥이면 주목관(朱木棺) 하나는 살 수 있습니다!"
"젠장, 물가가 왜 그리 비싼지 모르겠군. 노부도 이제부터는 표행(票行)을 때려치우고 장의사나 해야겠는데."
고적산은 머리를 긁으며 다시 은자를 헤아린다. 그도 만반의 준비를 갖춘 셈이었다.
철부(鐵斧), 그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다리를 조금 널찍이 벌리고 있는데, 그의 오른손에는 육중한 쇠도끼 하나가 들려 있었다.
백무엽은 그의 자세만 보고도 그가 지금까지 보던 중 가장 흥분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 이분들은 천이통(天耳通)으로 모든 것을 들은 것이다. 설향이 잡혀갔다는 사실을!'
벡무엽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철부, 그는 과거의 개방제일인이다. 그는 거지 옷을 걸치는 것을 소원으로 하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지금 개방의 무공 중 가장 패도적인 대력풍운부(大力風雲斧)의 기수식(起手式)을 취하고 있었다.
백무엽과 그와는 말이 별로 없던 사이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비급을 전하는 가운데, 깊은 유대감을 갖고 있었다.
철부, 아니 개방제일인 풍진취개는 백무엽이 지나쳐 가는 것을 보며 혜광심어(慧光心語)로 입술도 떼지 않고 말했다.
"노화자는 죽은 천마성(天魔星)의 몫까지 갚아 줄 작정이라네. 그러니 자네는 석중옥 노인의 몫까지 하게!"
그 또한 설향이 잡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백무엽의 생각대로 다섯 고수는 지하에서 나누었던 대화를 천이통으로 다 들은 것이다.
인문에서 가장 약한 사람은 석중옥이었다. 그 다음 약한 사람은 벽진자였고, 그 다음이 설향이었다.
가장 강한 사람은 백무엽, 그 다음 강했던 사람은 혈도 마운(血刀馬雲)이었는데… 그는 과거 깊은 내상을 입었기에 하위로 처지게 되었다.
다시 말해, 이 안에 있는 여섯 사람이야말로 인문의 진짜 기둥들이라는 것이다.
잡힌 설향은 뇌(腦)의 구실을 했었을 뿐이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인문에 있기로 했네."
"예?"
"훗훗… 물론, 자네도 함께 있어야만 하네!"
"물론이지요."
"우리는 떠났다가 다시 온 것이야! 자네도 그렇겠지만."
"아아……!"
"다른 이유는 없어! 우리들의 의발전인이라 할 수 있는 자네를 천하의풍(天下義風)을 일으킬 대맹주(大盟主)로 삼고, 가까운 곳에서 보필하기 위함이라네!"
"……!"
"훗훗… 인문은 사실 없어. 자네도 알 것이야. 인문은 시한부 생명이었거든. 잡힌 제일좌는 운이 좋게도 수하들이 다 떠나는 순간, 잡혔던 것이야. 새로 뭉친 사람들은 그녀의 부하가 아니라, 자네의 친구들이지. 그것을 명심하게! 그리고 우리는 설향 문주도 믿네. 잡히기는 했으나, 모든 것을 말하지는 않았다고 보네. 왜냐하면… 모든 것을 다 말했다면 여기 구백이 아니라, 구만이 왔겠지. 문주는 죽더라도 우리의 모든 것을 말하지 않을 걸세. 우리는 자네를 믿듯, 문주를 믿네."
백무엽을 울컥하게 하는 말이었다.
다섯 사람은 설향의 할아버지와 맹세한 기일 동안 인문을 지키고 얼마 전 떠나갔었다. 그리고 가다가 결심을 바꿔 되돌아왔는데, 그 때 설향이 잡히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우리들은 걱정 말게. 그리고 문주도 걱정 말게! 자네만 무사하다면 우리 모두 죽더라도 웃을 수 있다네. 문주도 같은 생각이라 믿네!"
강룡사태(降龍師太), 그녀는 눈을 감고 있는데 뺨을 타고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장님이나 청력이 뛰어나 사물을 정확히 알아보는 능력을 가진 노사태. 아마도 그녀는 자신이 저지르게 될 살계(殺戒)를 생각하고 눈물을 흘리는 듯했다.
"신호는 자네가 하게! 싸움은 그리 어렵지 않을 걸세. 적은 방심하고 있으니, 반시진이면 될 듯하네."
"예!"
"우리들은 걱정 말게. 그리고 돌아보지 말고 떠나게. 빨리 돌아오기 위해, 빨리 떠나가야 하지 않는가?"
"명심하겠습니다!"
"어디를 쳐야 할지 알고 있겠지?"
"물론이지요. 서쪽 진의 축(軸)을 제일 먼저 끊어야 한다는 것쯤은 압니다."
"좋아, 자네는 늘 든든해 보이는군. 특히 피비린내 나는 곳에서는……!"
강룡사태는 합장을 한다. 그 자세는 기원하는 자세가 아니라, 수미보리공(須彌菩提功)을 일으키는 자세였다.
"신호는 첫 비명입니다!"
폭풍 직전의 고요!
겉보기에는 너무나도 평화로운 쾌활림 일대에 고고한 죽음의 내음이 배어 있었다.
사위를 철저히 차단한 복면인들, 이들은 무엇이든 담을 넘을 경우 척살할 완벽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혈사무한쇄(血死無限鎖),
창천혈화진(蒼天血花陣),
뇌정혈살대진(雷霆血煞大陣),
귀화명멸참진(鬼火明滅斬陣).
네 가지 진세는 네 줄기 회오리바람처럼 쾌활림을 뒤덮고 있었다.
그리고 이 겨울을 마지막 장식하는 함박눈이 땅거미 지는 하늘 위에서부터 드넓은 백색 장막처럼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한설풍(寒雪風)이 사나워지기 시작할 때였다.
끼이이- 익-!
거대한 주홍문이 바깥쪽으로 밀리기 시작했고, 구백여 명의 마가고수들의 시선이 문 쪽으로 집중되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퍽-!
둔팍한 소음과 함께 정적을 깨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윽, 이미 나왔다! 성동격서(聲東擊西)다."
서쪽에서부터 피보라가 쭈욱 솟구치고 있었다.
백의복면인 하나가 피떡이 되어 날아오르고 있고, 회색 구름덩어리 하나가 숲에서부터 번개처럼 빠른 속도로 나타나고 있었다.
"단 하나만 남게 하겠다!"
잔혹한 음성이 들렸고, 어느 틈에 회색 그림자는 허공 가득 환영을 그리며 복면인들 머리 위로 떠올랐다.
"진세를 발동시켜라!"
"놈이 이미 알아차렸다! 제기랄!"
"젠장, 정말 노련한 놈이다. 그러나 도망가지는 못한다. 암호를 대지 않는 한!"
휘휙- 휙-!
사방에서 검은 그림자가 날아올랐다.
바로 그 순간, 화림 한가운데서부터 검은 구슬 백여 개가 잇따라 튀어나왔다.
"불놀이부터 시작하자. 클클……!"
시꺼먼 구슬은 메뚜기 떼가 튀듯이 사방으로 튀어 나갔고,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백여 군데에서 불기둥이 쭈욱 쭉 일어나며 검은 연기가 일어나 백 장 안을 완전히 휘감았다.
굉천뇌화탄(宏天雷火彈),
열화천신탄(熱火天神彈).
마병지존 필생의 역작들이 가공할 화염을 토하며 터지고, 불기둥으로 인해 하나의 엄청난 진세가 형세되었다.
대전(大殿)이 잿더미가 되어 무너지고 흙보라가 마귀의 머리카락같이 피어 올라 안계를 방해했다.
"으으… 악……!"
"우, 우리가 당하다니!"
"크으으… 윽……!"
사방에서 비명 소리가 잇따라 터져 나왔고, 불기둥이 현란한 화광을 뿜어 내는 가운데 돌연 은자(銀子)가 빗발치듯 쏟아져 나왔다.
팟- 팟- 팟-!
"캐액-! 이… 이미 머리 위에 떴다!"
"흐윽! 싸우는 데에는 천재들이다!"
혈우(血雨), 혈풍(血風)!
주위가 피로 질퍽하게 적셔지기 시작했다.
"적, 적을 너무 경시했다!"
"으으, 우리들의 진세를 모두 다 알고 있었다. 이제는 중과부적이 아니라, 다수이기 때문에 오히려 불리한 싸움이다!"
퍽- 퍽- 퍽-!
은자에는 눈이 달린 듯, 그것이 멈추는 곳에는 항상 단단한 두개골이나 이마빼기가 하나씩 있었다.
머리통이 부서져 쓰러지는 자, 화탄에 상체가 날아가 버리는 자, 어디서 날아드는지 모를 장력에 몸이 박살이 되어 쓰러지는 자, 죽은 자의 몸 위로도 시체가 쓰러진다.
매캐한 초연이 흐르는 가운데, 혈풍(血風)은 백 장 방원 안을 촘촘히 뒤덮었다.
집단처럼 쓰러지는 마가의 무사들, 이들은 지금 전신(戰神)들을 보고 있는 것이다.
"웨에에… 엑……!"
"누, 누가 나를 쳤지? 안개가 흐르는 듯하더니… 손(手)이라니?"
"마(魔)는 우리가 아니라, 저들이었다!"
푹푹 쓰러지는 자들, 그리고 밤과 눈이 화마(火魔)에 유린되었다.
아아, 천년마도사(千年魔道史) 중 오늘 같은 참패는 없었을 것이다.
육 대 구백.
상대도 되지 않을 싸움에서 구백을 몰살시키다니……!
첫댓글 r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