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전투를 알면 궁금증이 생긴다
어제 아침 6시 정도를 기해서 청산리전투의 대미였던 고동하곡의 전투가 끝이 났다.
청산리일대의 기후를 알기에 어제는 종일 전투에 참여한 독립군들의 신고에 가슴이 아리고 콧등이 시큰거렸다. 10월에도 서리가 내리고 영하의 추위로 얼어붙고 밤이면 더 낮아지는 청산리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무명의 독립군들에게 깊은 감사를 담아서 마음의 꽃다발을 바친다.
올해는 청산리전투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100이라는 숫자에 가슴 졸이며 지난 봄 부터 1920년 10월에 시작된 ❮경신참변❯에 관련된 글을 쓰며 일제의 조선인 대학살의 만행을 세세하게 곰곰 씹어보았다. 조상들의 살 냄새, 피 냄새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조선에서 기아와 학대에 시달리던 상놈들이 두만강을 건넜다. 그들이 척박한 만주 땅을 일구어 벼농사로 굶주리지 않고 살만하게 되었을 때 조선이 망하자 소위 지사들이 망명해왔다. 그들은 상놈들의 자식과 상놈들의 생산 활동을 기반으로 하여 구국 교육과 종교 활동을 펼쳤다. 상놈들은 조선이라는 나라로부터 아무런 혜택을 받아 본 적이 없지만 청나라 사람들에게 망국민으로 모멸과 토비와 마적들에게 약탈과 학대를 받으며 나라 없는 설움을 절절하게 느꼈다. 그들은 망국민의 고통을 처절하게 겪으면서 독립에의 열망을 품었다. 그리고 자녀들을 독립군으로 바치고 소작농으로 겨우 연명하면서도 독립의연금 모금에 서로 앞장섰다. 그들은 민족 독립에의 소망 때문에 경신년 대학살의 대상이 되어 처절하고 억울한 죽음, 한 맺힘 죽음, 끔찍한 죽음을 당하였다.
일제의 경신년 대토벌이 시작되자 독립군들은 조선 이주민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하여, 조선인 마을이 없는 산지로 피하였다. 화룡방면으로 진출한 아즈마지대는 독립군들을 추격하여 청산리일대에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독립군들에게 도리어 참패를 당하였다. 참패를 당한 일본군은 훈춘, 왕청, 연길, 화룡의 조선인마을들, 특별히 독립군들의 배후 기지가 되는 마을들을 더 철저하게 초토화시켰다.
청산리전투는 1920년 10월 21일에서 26일 사이에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 부근과 완류구( 와록구, 완루구, 만록구, 마록구, 왈류구, 만리구 등의 이칭이 있음) 북쪽 산 일대와 고동하강 일대에서 벌어진 대소 10여 차례에 걸쳐 있었던 독립군들과 일본군들의 사이의 전투를 총칭한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청산리전투를 우리 독립군이 대승을 거둔 하나의 독립된 전투로 인식하고 있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 청산리전투는 1920년(경신년)에 일제가 독립군의 배후세력이 되는 동만주와 서만주의 조선인 마을 특별히 독립군 단체들의 배후 기지가 되는 마을, 더욱 특별히 간도국민회 지회가 있었던 마을들의 초토화를 진행시키는 과정에서 일어난 전투이었다.
전투는 우리의 승리로 끝이 났지만 우리 독립군은 총알이 사진되었고 군량이 떨어졌으며 사방에서 포위망을 좁혀오는 일본군을 더 이상 감당할 수가 없어서 부대별로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독립군들은 중국 관리들의 권고, 조선인마을 대학살로 중국에서 더 이상의 활동이 어렵게 되자 러시아령 자유시로 넘어가서 자유시참변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되는 비극의 주인공들이 된다.
1. 청산리전투의 역사적인 배경
1) 설립되는 무장독립군단체들
1919년 용정 3.13만세 시위 후에 북간도 (동만주, 연변)에는 30여 개에 이르는 독립운동단체가 세워졌다. 독립운동단체들은 차츰 무장단체로 전환하며 무력투쟁을 위해 군인을 모집과 군사훈련을 위해 무관학교를 세우며 무장을 위해 의연금을 모으는 등 독립전쟁을 준비하였다.
홍범도는 러시아 연해주에서 대한독립군을 만들었으며 1919년 8월에 압록강유역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당시 대한독립군은 300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1920년 1월에는 연변일대로 부대를 이동하였다.
간도국민회는 안무를 사령관으로 추대하여 국민회군은 설립하였다. 국민회군은 450명의 대원에 총 560 개를 보유하였으며 1920년 5월에는 대한독립군, 군무도독부와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를 편성하였다.
서일은 현천묵, 계화와 함께 북로군정서를 만들었으며 휘하에 사관연성소를 두어 1920년 3월에 김좌진을 소장으로 임명하였다. 북로군정서는 1,600여 명의 병력을 갖고 있었다.
김규면의 대한신민단, 훈춘한민회의 급진단, 임창세의 야단, 이범윤의 의군부, 김성극의 광복단 등은 북간도(동만주, 연변)에서 군인을 모집하며 의연금을 모금하며 독립운동의 결전을 준비하였다.
남만주(서간도)에서는 서로군정서가 이상룡을 독판으로 이청천(지청천)을 사령관으로 추대하였으며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과 사생들로 편성된 무장대오를 갖추었다. 병력은 대략 의용군 제1중대 800~900명 정도였다.
2) 무장독립부대들의 국내진입작전과 봉오동전투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송하여 독립을 청원키로 하였던 조선인들의 대망이 보기 좋게 걷어 채이자 만주의 독립운동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봉오동전투이전까지 무장독립투쟁의 대부분이 조선국내진입작전 이였다. 홍범도의 독립군은 1919년 8~10월에 압록강을 건너 함경도의 혜산진, 갑산군과 평안도의 강계, 만포, 자성에까지 들어가서 일본군을 습격하였다.
상해임시정부 군무부는 1919년 연말에 독립군의 조선국내 진입작전이 3월 1일에서 6월초까지 32회나 전개되었고 일제 군경 등의 관서를 파괴한 것이 34개소에 달하였다고 확인 발표하였다.¹
조선총독부는 1920년 1월부터 6월까지 독립군이 조선 땅을 침입한 것이 32차에 이르렀다고 하였다.²
통계에 의하면 동만(북간도, 연변)에만 하여도 2,900여명의 무장독립군들이 있었고 그들이 두만강 남북에서 일제침략군과 싸운 횟수는 1920년 한해만 하여도 1,651차에 달하였다.³
일제는 독립군의 무장투쟁이 식민지 통치에 위협이 되며 만주와 시베리아 진출에 장애물 됨을 인식하고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국내진입작전을 마치고 돌아간 부대를 따라 중국영토에 침입하였다. 이 일로 말미암아 최초의 독립전투로 기록되고 있는 ❰봉오동전투❱가 발생하였다.
1920년 6월 4일, 도문시에서 서북쪽으로 대략 7 km 떨어진 춘화향(석현)에 본부를 둔 신민단의 30여 명의 대원들이 두만강을 건너 조선 강양동의 일본군초소를 습격한 후에 되돌아왔다. 그러자 남양의 일본군수비대와 제19사단의 월강추격대가 강을 건너서 독립군들을 추격하였다. 6월 7일, 최진동 도독부의 근거지인 봉오동에 집결해있던 대한독립군, 군무도독부, 신민단의 300여명의 독립군들은 일본군의 추격에 대한 정보를 확인하고 인근의 주민들을 대피시키며 전투에 유리한 곳에 매복하여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유인되어 오는 일본군들이 매복지점에 들어서자 맹렬한 사격을 가하였고 전투는 오후까지 계속되었다.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은 150여명의 사망자와 수십 명의 부상자를 내고 패배한 채로 조선으로 철수하였다.
봉오동전투는 독립무장단체들의 연합하여 중국내에서 정규 일본군과 벌인 최초의 전투였으며 최초의 승리로서 조선인들에게 무장독립운동에 대한 투지와 신념을 고양시켜주었다.
3) 일제의 독립군부대 토벌계획과 훈춘사건 조작
❰3.13❱용정만세시위 이후 일본은 무장독립운동단체들의 국내진입작전에 위협을 느꼈다. 일제는 1920년 5월 초에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아까이께를 봉천에 파견하여 동북3성 순열사 장작림과 중일공동 ❰수사반❱을 조직하여 봉천성과 간도일대의 조선독립무장부대를 토벌하기로 협정을 맺었다. ❰수사반❱은 5월 중순부터 8월 중순까지 남만의 안동, 환인, 관전, 집안, 무순, 유하 등지에서 수백 명의 독립지사들과 독립군들을 체포하고 학살하였다. 남만주에서는 장작림의 협조로 독립군 부대를 마음대로 토벌할 수 있었으나 간도방면에서는 길림성 성장 서정림의 완강한 반대로 중일공동 수사반이 제대로 가동되지 못하였다.
그러자 아까즈까 총영사는 5월 29일 봉천총영사관에서 마찌노 고문, 마루야마 총독부사무관, 히라마쯔 군참모 등과 함께 북간도 일대의 무장독립부대에 대한 토벌 대책을 세웠다. 그리고 마찌노를 조선에 파견하여 조선주둔군사령부와 총독부 관계자들과 상의하고 ‘길림성장의 취체가 철저하지 못하고 간도의 불령선인들의 정황이 악화되면 일본이 철저한 토벌을 주도한다.’는 결의하였다.
봉오동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일본은 조선인들의 독립군부대를 발본색원할 계책을 세웠다.
먼저 화룡현 관할지역내의 두만강 나루터를 모조리 봉쇄하고 교통을 단절시켰다. 또한 조선 변경지대 회령에서 삼봉까지 통하는 경편철도 열차의 승객과 화물 운송을 중지시키고 일본군대만 수송하였는데 6월 12일까지 총 3천여 명의 육군을 수송하여 종성, 동관, 창수, 삼봉 등지에 주둔시키고 수시로 월경 토벌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⁴
6월 9일, 북경주재 일본공사 오하다는 북경정부 외교총장대리를 회견하고 ❮봉천, 길림 지방장관으로 하여금 당지 일본 영사와 시급히 협력하도록❯압력을 가하도록 강요하였다.
7월 16일, 조선주재 일본군참모장 오노, 관동군참모장대리 기시, 군사고문 사이또, 마찌노, 조선총독부 경무과장 구니도모, 조선주둔군 참모 히라마쯔 등은 봉천총영사관에서 회의를 열고 아까쯔까 총영사가 토벌기한은 2개월로 하고, 출동 병력은 1개 연대로 하며, 토벌지역은 간도와 훈춘, 동녕현 일대로 할 것을 장작림과 교섭하여 ❮중국군대의 토벌에 길림독군 고문으로 사이또 대좌가 동행하며 만약 중국군대가 토벌 시 원조를 요구하면 일본군대도 참가할 수 있게 할 것❯을 결정하였다.⁵
8월 15일, 조선주둔군 참모장 오노, 총독부 경무국장 아까이께와 사이또 고문은 서울 회견에서 ❮간도지방에서의 불령선인에 대한 토벌은 사이또 대좌의 감독아래서 진행하되 중국관헌이 토벌에 성의가 부족하거나 노력이 충분하지 않을 경우에는 경고를 주며 필요시에는 중국관원에게 일중협동수사를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일중협동토벌은 그 영향이 크기 때문에 중국정부를 강박하여 우리의 출병을 요구하게 하는 것은 적합하지 못하므로 형세의 발전에 따라 중국관원과 협정에 의해 실시되도록 하여야 하며 외교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군당국의 금후 방침을 세워야 한다❯고 전략을 세웠다.⁶
길림당국은 일본이 조선독립군부대의 토벌을 위해 중국에 출병하는 것을 단호히 거절하고 중국군대를 출동해서 토벌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중국군경들은 토벌할 때 마다 토벌 소식을 사전에 누설해서 독립군들로 하여금 미리 이동하게 하였으며 그들이 미처 챙기지 못한 물건들을 수집하고 가옥과 병영을 소각하였다. 이런 정황을 포착한 일제는 중국군대의 토벌에 불만을 품고 조선독립군부대의 토벌에 직접 나서기로 하였다.
6월 17일, 일본 대장성(재정성)에서는 용정 일본총영사관 산하의 경찰인력을 2배로 증가할 것을 비준하였다.
7월 조선주둔군 사령부에서는 ❰간도지방 불령선인 토벌계획서❱을 작성하기 시작하였다.
8월 20일, 조선주둔군 사령부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러시아 간섭군으로 파견한 군사령부와 연락하여 일부 부대를 춘화의 토문자, 초모정자, 동녕현의 삼차구, 왕청현의 라자구 방면에 파견하여 조선주둔군의 작전에 협력할 것을 요청하였으며 육군성과 참모본부에 28만원의 경비를 신청하였다.⁷
8월 말에 ❮간도지방 불령선인토벌 계획서❯일체를 완성하였다.
계획서는 6개 부분으로 구성되었으며 토벌기간은 2개월로 첫 단계는 주로 독립무장부대에 대한 토벌을 실시하고 두 번째 단계에서는 잔여부대를 소멸하는 것이었다. 병력은 제19사단의 제37, 제38여단을 주력으로 하고 시베리아에서 철수하는 일본군 제 11사단, 제13사단, 제14사단의 일부를 훈춘과 동녕 일대에 포진하여 독립무장부대의 러시아행 퇴로를 차단하고자 하였다. 일본군은 연변을 두개의 토벌구역으로 나누고 훈춘, 왕청, 용정, 두만강연안 사면에서 포위하여 일시에 토벌하여 하였다. 그리고 관동군(북만주 주둔군)에게도 토벌계획서에 따라 만약의 경우 북쪽으로 퇴각하는 독립군무장부대를 도륙하도록 해림 방면으로 출동할 것을 명령하였다.⁸
일제는 간도에 출병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마친 후, 중국정부가 항의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세계 여론이 출병을 비난하지 못하도록 그럴듯한 구실을 만들기 위하여 1920년 9월 12일, 9월 30일 그리고 10월 2일 두 번에 걸쳐 비적을 동원하여❮훈춘사건❯을 조작하였다.
1920년 9월 12일, 동녕현 로흑산에 근거지를 둔 왕사해와 기꾸꼬라는 일본인 애첩을 거느리고 사는 친일비적 고산의 수하인 만순 등은 300~400명의 비적을 동원하여 훈춘현 소재지를 습격하였다. 그들은 아침 5시경에 훈춘현 소재지를 포위하고 변방 초소에 불을 지른 후 관은전호, 현공서, 세무국, 전부국에 쳐들어가 재물을 닥치는 대로 약탈하였다. 일본 경찰서와 영사관은 피해가 전혀 없었다. 비적들은 세 시간 정도 성안에서 행패를 부리다가 퇴각하였다. ❮갈장일보❯ 보도에 의하면 그들의 습격으로 상가지역 내 가옥 200 간이 불에 탔고 80여 명의 중국인과 6명의 조선인이 납치를 당하였고 약탈당한 재물은 1,500만조에 달하였다.⁹
그 후 9월 30일에 친일 비적 고산의 수하인 비적 진동이 훈춘현 대황구에 주둔하고 있는 중국군 공병영 제4련을 습격하여 20여 명을 납치하고 무기와 탄약을 탈취해갔다.
두 차례의 비적들의 훈춘현 습격사건은 문제가 되었으나 중국인, 중국군대 및 조선인에게만 피해를 주었고 일본 영사관이나 일본 거주민에게는 아무런 피해를 입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일제는 간도에 출병할 구실을 만들기 위해 새로운 사건을 조작해야 했다.
10월 2일 새벽 4시 비적 400여 명은 두목 진동과 만순 등의 지휘 하에 기관총 2정, 대포 1문을 가지고 동서로 나뉘어서 훈춘현 소재지를 공격하였다. 비적들은 대포로 서북 성문을 통제하고 기관총을 난사하며 일본영사관을 포위하고 폭탄을 던져 불태웠다. 이어서 6개의 상점을 방화하고 약탈하였다. 그들은 현금 12만원을 약탈하였으며 일본인 경찰 1명, 일본인 11명, 조선인 6명을 살해하고 200여 명의 백성들을 납치하여 철수하였다.¹⁰
두 번째 ❮훈춘사건❯의 사망자, 중상자와 경상자 대부분이 일본인들이었고 영사관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으므로 일본은 ❮최근 훈춘에서 발생한 흉변은 전적으로 불령선인들이 마적 그리고 과격파 로씨야인들과 손을 잡고 일으킨 것이다.❯는 여론을 대대적으로 조성한 후❮일본인의 생명의 안전을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간도에 25,000여 명의 군대를 파견하여 ❮불령선인❯이라 불리는 무장독립군에 대한 대토벌이 시작되었다.
무장독립부대는 중국군의 사전 고지를 따라서 이동을 시작하였다. 청산리전투가 일어나기 전에 대한독립군, 국민회군, 신민단, 한민회군, 의민단, 북로군정서 등 무장독립군부대들은 산악지대이며 지리적으로 조선과 가까운 화룡현 2도구와 3도구로 집결하였다.
2. 청산리전투의 서막
1) 무장독립군부대의 이동과 홍범도 연합부대 편성
무장독립부대의 이동
일제의 압력을 받은 중국정부는 연길주둔육군 제2혼성여단 보병 제1퇀장 맹부덕에게 무장독립군부대를 토벌하라고 명령하였다. 마지못해서 토벌을 수행하는 맹부덕부대는 자기들의 토벌은 ‘일제를 속이기 위한 것’ 이라고 하면서 독립군부대에게 요녕성과 길림성 변경오지로 가서 ‘요녕에서 토벌하면 길림으로, 길림에서 토벌하면 요녕성으로 피하는 작전’으로 대응하라고 알리고 토벌을 시작하기 전에 독립군부대에게 부대의 이동경로를 미리 통보를 하여주었다.¹¹
중국 정부의 토벌이 시작되자 독립군부대들은 8월 하순부터 근거지대이동을 시작하였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300여 명은 1920년 8월에 의란구에서 떠나 명월구를 거쳐 안도현과 화룡현의 접경지대인 어랑촌에 도착하였다.
8월 말에 연길현 의란구 이청배에 주둔하였던 안무의 국민회군 200여 명은 맹부덕부대의 토벌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안도현 방면으로 이동하여 9월 말에 어랑촌 부근에 도착하였다. 국민회군의 목적지였던 어랑촌 부근에는 청산리, 백운평, 십리평에 캐나다장로교 교회들이 이미 세워져 있어서 국민회군은 그들을 통하여 군수품의 보급을 받았다. 안무는 어랑촌 부근에서 홍범도 부대와 만난 후에 팔가자진 풍산촌으로 이동하였는데 풍산촌은 ‘구세동’으로 불리기도 했던 캐나다장로회 소속 교회가 있는 마을¹²이었다.
최진동의 도독부는 왕청현 라자구로 이동하였다. 한민회, 의민단, 의군부, 신민단 등 무장 단체들이 속속 어랑촌으로 집결하였다. 10월 13일 홍범도연합부대 출범 이후 광복단도 청산리방면으로 도착하였다.
북로군정서는 9월 9일에 사관연성소 졸업식을 마치고 12일에 교성대 (여행단)와 본대를 편성한 다음 이범석을 단장으로 하는 교성대가 먼저 왕청현 서대파, 십리평을 떠나 10월 12일과 13일 사이에 청산리에 도착하였다. 김좌진이 지휘하는 본대는 10월 16일에 도착하였다. 당시 북로군정서 병력은 약 600명이였다.¹³
독립군부대들의 회합과 홍범도 연합부대 편성
당시 어랑촌에 집결한 부대는 대한독립단, 국민회군, 의군단, 의민부, 신민단 등의 부대들이었다. 이들은 10월 13일 모임을 가지고 홍범도를 지휘관으로 하는 연합부대를 형성하였다. 이들의 부대 병력은 대한독립군단 300여 명, 국민회군 250여 명, 한민회 200여 명, 신민단 200여 명, 의민단 100여 명, 허근이 지휘하는 의군부 300여 명(연합모임 후에 참여), 광복단 200여 명(연합모임 후에 참여) 으로 대략 1550 여 명으로 추산된다.¹⁴
그러나 다른 기록도 있다.
...무산간도 류동 홍범도부대 약 300명, 안무가 거느린 국민회군 약 250명, 한민회 약 200명, 의군단 약 100명, 신민단 약 1100명, 합계 1950명 ¹⁵
또 다른 기록이 있다.
홍범도 장군의 지휘하의 독립군련합부대가 구성전후 또 의군부와 광복단도 련합부대에 합 세하여 더욱 큰 력량을 이루었다. 그 병력정황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대한독립군 약 300명(봉오동전투 참전, 홍범도 )
군민회군¹⁶ 약 250명(봉오동전투 참전, 캐나다장로회, 안무)
한민회군 약 200명 (이명순단장, 캐나자장로회)
의민단군 약 100명 (방우룡 단장, 천주교계))
신민단군 약 200명 (봉오동전투 참전, 김규면 단장, 기독교 성리교파)
의군부군 약 150명 (이범윤 단장 , 복고주의)
광복단군 약 200명 (이범윤단장, 복고주의, 위정척사)
7개 반일무장부대의 병력은 도합 1,400여 명이였다.¹⁷
북로군정서의 병력은 선발대(여행단, 교성대)와 본대를 합하여 1000여 명에 이르렀다. ¹⁸ 북로군정서의 병력이 1,800명¹⁹이라는 기록도 있는데 화룡문사자료 4집 89쪽에 의하면 이는 가족과 비전투원이 1,200여 명이고 전투원은 600여 명이라고 하였다. 김철수의 ❰연변항일 사적지 연구❱463쪽도 북로군정서의 병력을 600여 명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화룡문사자료 4집95쪽에 의하면 북로군정서 제1대대는 김좌진이 거느렸으며 제2대대 600명은 이범석이 거느렸다고 한다.
10월 13일 홍범도장군은 화룡현 이도구에서 대한독립군, 국민회군, 신민단, 의민단, 한민회와 함께 독립군부대 지휘자회의를 소집하였다. 그들은 홍범도를 사령관으로 하여 연합부대 편성하고 일본의 습격에 군사행동을 통일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통일된 작전 지휘부를 만들고 연합작전에 대한 5개 조항을 결의를 하였다.
1) 상술한 무장단체의 군사행동을 통일한다.
2) 국민회(간도국민회)에 등록된 자들을 총 동원하고 예정된 부서에 취임할 것.
3) 군량 및 군수품 징수에 급히 착수할 것.
4) 정찰대를 조직하여 각 방면에 밀행시켜 일본군대의 동정을 탐지할 것.
5) 일본군대와의 응전은 그 허를 찌르거나 또는 산간에 유인하여 필승을 기하도록 하고
그 외는 싸우지 말 것.
10월 19일 묘령에서 홍범도 연합부대와 북로군정서 수뇌부 회의를 열었다.
북로군정서에서 현천묵, 계화, 이범석 등이 참여를 하였고 연합부대에서는 안희(안무), 이학근, 홍범도, 박영희 등이 참여를 하였다. 당시 북로군정서 사령관인 김좌진은 묘령회의에 참석하지 않았으며 라월평에서 북로군정서 본대를 후방으로 이동시키고 있었다.²⁰
묘령회의는 청산리 전투를 이틀 앞둔 긴급회의로 일본군의 공습에 대한 대응책을 논의하였으나 북로군정서 부총재인 현천묵의 피전책이 대세가 되어 일본군 공세에 대응하지 않고 회피할 것을 결의하였다. 홍범도는 연합해서 전투에 임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북로군정서와 끝내 합의를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두 부대는 각자 일본군의 공격에 대응하여야 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포위와 급속한 추격은 독립군부대들로 하여금 피전책을 버리고 전투에 임하도록 몰아갔다.
2) 일군의 간도출병과 아즈마지대의 배치
일본군의 간도출병
토비를 동원해서 훈춘사건을 일으켜 만주 출병에의 여론을 형성한 일제는 10월 3일에 야스베부대( 보병 1개 중대, 기관총 1개 소대)를 조선의 훈융에서 훈춘으로 출동시켰다. 이어서 7일 경부터 일본군은 연변을 갑구 ( 훈춘, 초모정자 지방), 을구 ( 서대파, 하마탕, 백초구), 병구 (용정, 국자가, 투도구 ) 등 3개의 토벌구역으로 나누고 조선주둔군 제19사단 제38여단장 이소바야시가 이끄는 이소바야시지대 4,000명, 보병 제76연대장 기무라가 이끄는 기무라지대 3,000명, 제37여단장 아즈마가 이끄는 아즈마지대 5,000명을 출동시켜 두만강을 건너서 독립군의 배후 근거지가 되는 훈춘, 왕청, 용정으로 진격하였다.
일본은 3개 지대 외에 무장독립군부대의 북만에로의 탈출을 막기 위하여 하얼빈에 주둔하고 있는 관동군 제53연대 야스니시지대를 해림을 중심으로 한 중동철도연변에 파견하였고, 러시아 간섭군으로 시베리아에 출병한 제11사단의 히데시마 소좌가 독립군부대의 러시아 연해주행을 막기 위하여 훈춘 춘화지구로 출격하였다. 제 13사단의 하네이리대좌는 흑룍강성 동녕현 동부에서 중국과 러시아 변경을 막았으며 후에는 로흑산 부근으로 진격하였다. 제14사단 제28여단의 4,000여 명의 일본군은 훈춘과 용정으로 들어가 이소바야시지대와 아즈마지대를 강화시키고 일부는 나남으로 돌아갔다.²¹
또한 무산대안에 있는 무장독립군부대들을 견제했던 두만강변의 제19사단 제73연대의 2개 중대를 도강시켜서 무산대안 일대의 독립군을 토벌하게 만들었다.
간도각처에 주재하고 있는 일본총영사관, 분관, 경찰서들은 무장독립군부대와 항일민족의식을 가진 마을과 학교 명단을 작성하여 일본군의 토벌과 잔학행위에 협조를 하였다.
아즈마지대의 배치
일본군이 무장독립군부대 초토화를 목적으로 하고 사면에서 포위하며 압박하는 전술을 펼치기 시작했을 때 무장독립군부대의 일부는 북간도 서부 화룡현 밀림지역, 일부는 동부 라자구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그리하여 1920년 10월 하순에 화룡현 경내의 남쪽으로 삼도구의 청산리, 북쪽으로 고동하강반의 오도양차, 동쪽으로 이도구, 서쪽으로 봉밀구에 이르는 협소한 산악지역에서 아즈마지대의 5,000명 일본군과 무장독립군부대 2,400여 명이 쫓고 쫓기게 되어 일전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용정, 국자가, 두도구, 삼도구 일대의 초토화를 맡은 아즈마지대의 참전 부대는 보병연대와 기병연대, 포병, 공병, 헌병 등의 혼성부대였으며 지대장은 아즈마 소장이었다. 부대 구성은 아래와 같다.²²
지대장 : 육군소장 아즈마 세이히꼬
보병 제37여단 사령부
보병 제37연대
보병 제74연대 제2대대
기병 제27연대
야포병 제25연대 제1대대
공병 제19대대 제3중대
헌병 약간
5,000명의 정예군으로 구성된 아즈마지대는 10월 15일에 용정에 도착하여 작전을 개시하였다. 그들은 10월 17일 북로군정서 부대 500~600명이 청산리에 주둔하고 있다는 정보와 10월 18일 홍범도연합부대가 투도구 서쪽 약 5 리 정도 떨어진 산속에 있다는 정보를 접수하고 아즈마지대는 부대를 두 개로 나누어서 청산리와 어랑촌으로 출동하였다.
아즈마는 청산리 북로군정서 토벌을 야마다대좌에게 맡겼다. 야마다대좌는 자기 부대를 좌우종대로 편성하였고 좌종대는 자기가 직접 거느리고 팔가자, 삼도구(충신장), 송월평을 거쳐 20일에 청산리에 도착하였다. 우종대는 나까무라대좌가 거느리고 이도구를 지나 봉밀구로 우회하여 북로군정서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좌종대와 호응하여 북로군정서부대를 포위하였다. 야마다토벌대는 북로군정서를 대처하기 위한 부대로서 8,9백 명으로 추정된다.²³
다른 한편 아즈마소장은 홍범도 연합부대를 토벌하는 작전을 직접 지휘하였으며 보병제37여단 사령부, 보병제74연대 제2대대, 기병제27연대 전부 그리고 야포병, 공병, 제19사단직속부대를 총 망라하여 거의 모든 병력을 총망라하였다. 아즈마소장은 총지휘부를 어랑촌에 두고 본인이 이끄는 지대예비대와 이이노대대와 가노우기병연대를 각 방면으로 출동시켜 천보산, 이도구 어구, 봉밀구 부근, 와룡, 계령 및 동남지역, 남양촌, 어랑촌, 승평령 오도양차를 샅샅이 수색하게 하여 북와록구에 있는 홍범도 연합부대를 일거에 전멸시킬 태세를 취하였다.
아즈마소장은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에게 최초로 참패를 안겨준 대한독립군, 국민회군, 신민단의 연합부대인 홍범도연합부대를 철저하게 궤멸시킬 작정이었다.
3. 청산리전투
청산리전투는 1920년 10월 21일에서 10월 26일 사이에 우리 무장독립군부대와 일본군 사이에 일어난 백운평전투, 완루구전투, 천수동전투, 어랑촌전투, 맹가구전투, 맹가구서골전투, 만기구전투, 고동하곡전투 등 대소 십여 회의 전투를 통 털어 일컫는 것으로 북로군정서 백운평 매복전을 시작으로 하여 홍범도연합부대의 고동하곡전투로 끝이 났다.
1) 백운평전투
백운평전투는 청산리전역에서 북로군정서군이 일본군과 싸운 최초의 전투이다. 좀 자세하게 설명하면 10월 21일 아침에 북로군정서군의 연성대장인 이범석이 지휘하는 선두부대 (제1대대, 교성대, 여행단)가 야마다연대의 야스가와소좌 부대와 격전 끝에 30분 만에 90여 명을 전멸시킨 전투로 일본의 정예군과 겨룬 최초의 전투이며 최초의 승전이었다.
북로군정서 연성대(교성대, 선견부대, 여행대)는 10월 12일, 13일에 화룡현 삼도구 일대에 도착하였다. 북로군정서 본대는 10월 16일에 화룡현 삼도구 부근 대금창에 머물렀다가 송림평으로 이동하였다. 10월 19일 홍범도연합부대와 북로군정서 대표가 모인 묘령회의에서 피전책이 결정되고 난 후 10월 20일 새벽 야마다부대가 청산리골로 진격하고 있다는 정보를 접한 북로군정서는 꽤 넓은 평지인 송림평을 떠나 청산리 깊숙한 협곡 백운평 방향으로 이동하였다.
북로군정서의 수뇌부는 총재 서일, 부총재 현천묵, 재무부장 계화, 사령관에 김좌진, 참모부관에 나중소, 부관에 박영희(박두희), 연성대장에 이범석, 종군장교에 이민화, 김훈, 백종렬, 한근원(한건원), 보병대대장 김규식이었다.²⁴
10월 20일, 이범석이 거느린 선두부대 (제2대대, 교성대, 연성대, 여행대)는 송림평을 떠나 백운평에서 3, 4리 더 들어가 있는 직소택 부근에서 행군을 멈추었다. 이범석과 연성대 지도자들은 좌우 양편 험한 산기슭에 숲 속에 매복하여 폭이 아주 좁은 골짜기에서 전투를 치르기로 하였다.
본부대인 후속부대는 20일 저녁 무렵에 백운평에 이르러 직소택 건너편 사방정자(베개봉) 산기슭에 매복하였다. 선두부대의 이민화의 1개 중대는 우측에. 한근원의 1개 중대는 좌측에, 김훈의 우중대와 이교성의 좌중대는 직소택의 정면에 매복하였고 이범석은 정면에서 전반 전투를 지휘하였다.
그들은 그 날 밤 백운평주민들에게 식사를 부탁하였고 주민들은 식사를 마련하여 직소에 있는 선두부대에 전하였다. 20일 밤 부대원들은 심산에서 서리를 맞으며 꼬박 밤을 새웠다.
북로군정서 선두부대가 직소택에서 매복진을 벌려 놓고 일본군을 기다리고 있을 때, 야마다연대의 야스가와소좌가 지휘하는 선발부대 1개 중대 90여 명이 백운평 서쪽 2km 지점에서 북로군정서군의 야영자리와 화톳불 흔적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승기를 잡고자 경계를 강화하면서 성급하게 단서를 쫓아서 일렬로 직소택 쪽으로 올라와 매복권내에 들어섰다.
이범석의 총소리를 신호로 하여 사격이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독립군의 돌발적인 습격에 대응사격을 하였지만 독립군들의 매복지점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헛총질을 하였다. 약 30분간의 격렬한 전투 끝에 일본군 90여 명이 거의 사살되었다.
백운평 직소택전투에서 승리한 북로군정서군은 직소택에서 2km 지점에 있는 봉밀구로 이동하였다. 김좌진이 본대를 거느리고 먼저 이동하면서 선두부대에게 본대 철수를 엄호할 것, 22일 새벽 2시 전에 봉밀구 갑산촌으로 집결을 명하였다. 선두부대는 본부대의 철수를 엄호한 후에 한근원중대를 후위로 갑산촌으로 철수하였다.²⁵
이 전투에서 독립군의 손실은 전사 및 실종자가 22명이고 일본군의 손실은 1920년 11월 20일자❰독립신문❱에 의하면 200명이였다.
백운평전투는 청산리전투의 최초의 전투이자 최초의 승전이라는데 큰 의미가 있다.
2) 완류구전투
완류구전투는 10월 22일 청산리전역에서 홍범도연합부대가 전략과 전술로 아즈마지대 일본군과 싸운 최초의 전투이며 아즈마 주력부대에 최대의 타격을 입힌 최고의 전투이다.
완류구는 왈리구, 와록구, 마록구 등으로도 불리며 현재의 어랑촌에서 서북방향으로 뻗은 골짜기이다. 어랑촌에서 7.5km 들어가면 남완류구가 있고 거기서 서쪽으로 좀 올라가면 영마루가 있는데 이 영마루가 남완류구와 북완류구의 영마루이며 완류구전투 지점이다.
봉오동전투의 패배를 설욕하고자 하는 19사단의 아즈마소장은 예비대를 이끌고 홍범도연합부대를 찾아 10월 21일 와룡에서 숙영을 하였다. 22일 아침에 홍범도연합부대의 종적을 찾아서 계곡을 따라서 5km 정도에서 골짜기 끝에 도착하였다. 이 때 남양촌에서 숙영하였던 이이노부대도 아침 일찍 강을 건너 북완류구로 올라왔다.
홍범도는 정찰병으로 부터 일본군의 동태를 파악하고 북완류구와 남완류구의 중간지대인 등마루에 부대를 배치하였다. 홍범도연합부대는 천리봉 기슭 양 영마루에서 남완류구와 북완류구에서 올라오는 일본군에게 반격을 가한 후에 산 고지대로 후퇴하는 것처럼 작전을 써서 아즈마예비대의 측면을 공격하였다. 아즈마예비대는 홍범도의 주력부대가 산의 고지대에서 공격하는 줄 알고 고지대를 점령하였다. 고지대에 오른 예비대는 북완류구에서 올라오는 이이노부대의 사격을 받았다. 이이노부대는 예비대를 홍범도연합부대로 착각하였다. 이이노부대의 공격을 받은 예비대도 이이노부대를 홍범도의 부대인줄로 알고 맹렬히 반격을 가하였다. 홍범도연합부대도 예비대를 향하여 맹렬히 사격을 하였다. 그리하여 아즈마의 예비대는 홍범도 연합부대와 이이노부대의 협공으로 거의 전멸되었다.
홍범도연합부대는 일본군들이 서로 살상을 벌이고 있는 틈을 타서 봉밀구로 철수를 하였다.
완류구전투에서 홍범도연합부대는 7명 이상의 손실을 보았으며 일본군 전사자는 400여명에 이르렀다.
아즈마소장은 홍범도연합부대를 일거에 전멸시키려 하였지만 그는 전략과 전술에 뛰어난 홍범도연합부대와의 첫 전투에서 완패를 당하였다. 완류구전투의 전사자 대부분이 아즈마지대의 주력부대였으므로 아즈마는 큰 타격을 받았다. 일본군은 회령에서 급파되어 온 고데다대좌가 거느린 임시산포대(포 4문, 말 82필, 인원 약 150명)을 10월 23일자에 바로 이도구로 공수하여 아즈마지대를 돕게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파괴되었던 것이다.²⁷
홍범도연합부대의 전술은 청산리전투 사상 최고의 전투였다. 인원이나 무기로서는 이기기 어려운 전투였다. 그러나 지형지물을 이용한 부대배치와 치고 빠지는 이동, 적군을 혼란에 빠트려 같은 일본군끼리의 전투를 유도하고 적군에게 타격을 가하는 전술로 홍범도연합부대는 재야 독립군부대의 저력을 보여주었으며 아즈마지대의 예봉을 꺽었다.²⁸
❰독립신문❱은 완류구 전투의 일본군 전사자를 400명, 당시 상해에서 출판된 간행물인❰진단❱은 1,200명으로 보도하였다. 이는 완류구전투의 전과가 다른 전투에 비해 크다는 강조이며 완류구전투가 청산리전투에서 최고의 전투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3) 천수동전투
천수동전투 (천수평전투)는 북로군정서군이 천수동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기병 1개 소대 40 여명을 습격하여 달아난 4명을 제하고 전멸시킨 전투이다.
백운평전투에서 승전한 북로군정서군은 10월 22일 새벽 2시 30분에 봉밀구의 갑산촌에 집결하였다. 그들은 이른 아침밥을 지어 먹고 그 곳 주민들로부터 천수동에 적군 기병 1개 소대 40여명이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북로군정서군은 그들을 치기로 하고 이범석이 지휘하는 여행단 (제1대대, 선두부대, 연성대) 80여 명을 파견하였다. 그들은 새벽 5시경에 천수동 앞 남산에 도착하여 잠자고 있는 일본군을 기습하였으나 누군가의 오발로 그들이 깨여났다. 일본군들 중 4명이 달아났고 나머지는 몰살을 당하였다. 북로군정서군은 2명이 전사하였고 17명이 가벼운 부상을 당하였다.²⁹
북로군정서군은 노획한 일본군의 문서에서 아즈마지대의 본부가 어랑촌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북로군정서군 지휘부는 천수동은 어랑촌 서남쪽 약 7.5km 되는 곳에 위치해 있고 갑산촌은 어랑촌 서남쪽으로 10km에 위치해 있었으므로 아즈마의 일본군 주력부대의 일전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김좌진은 대부대의 공격을 예상하면서 일부 부대를 서남쪽 3리 남짓이 되는 산고지에 파견하여 일본군의 진로를 막고 주력 부대를 거느리고 천수평 입구에 있는 야계골 양측의 고지를 선점하였다. 한편 천수동에 독립군이 나타났다는 급보를 접한 아즈마지대는 가노기병연대를 파견하여 천수평 입구로 몰려들었다. 그리하여 어랑촌전투가 시작되었다.³⁰
4) 어랑촌전투
어랑촌전투는 청산리전투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치열한 전투였다. 전투는 10월 22일 오전 9시에 시작되어 저녁 7시까지 야계골 고지에서 북로군정서군, 홍범도연합부대와 일본군 아즈마지대 주력부대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처음에는 북로군정서군과 가노우가 지휘하는 제27기병연대 주력부대와 일부 보병이 전투를 벌였다. 몇 차례 야계골 고지 진공에서 실패한 일본군은 기병대를 동원하여 우회하는 전법을 썼으나 이 또한 여행단의 집중사격으로 실패하였다. 그러나 12시 30분에 홍범도연합부대를 추적하던 이이노대대와 아즈마소장의 주력부대가 어랑촌전투에 참여하였다. 오후 2시경, 전투가 더욱 치열해지며 북로군정서군이 열세에 몰리며 야계골이 점령될 위기에 직면하였을 때 홍범도연합부대가 전투에 참전하였다. 당시 그들은 완류구전투를 끝내고 봉밀구쪽으로 퇴각하는 중에 어랑촌전투에 대한 정보를 접하고 야계골로 들어왔고 북로군정서군보다 더 높은 고지를 점령하여 북로군정서군을 향해 진격하는 일본군들에게 맹사격을 퍼부었다.
홍범도연합부대의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었다. 일본군은 승리를 눈앞에 두고 부대가 분산할 수밖에 없었고 공격하는 입장에서 양쪽의 부대의 공격을 받는 입장이 되었다. 일본군과 독립군부대는 어두워서 전투를 할 수 없게 될 때 까지 혈전을 벌였다. 장시간 계속된 전투로 허기진 독립군부대는 그 당지의 백성들이 생명을 걸고 날라 온 음식으로 힘을 얻으며 독립에의 의지를 불살랐다. 어두워지자 일본군의 공습이 잦아들었고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연합부대 또한 어둠을 타고 퇴각하였다.
어랑촌전투는 3,000명³¹ 이상의 대병력이 충돌한 대규모의 전투였다. 그러나 다른 전투와 마찬가지로 양측이 어느 정도 피해를 입었는지 명쾌하게 밝혀주는 자료는 없다.
일본은 사상자를 숨기고 전사 3명, 부상자 11명이라고 보고하였으나³² 그 후 육군성에서는 10월 22일 봉밀구전투에서 74명이 죽거나 다쳤다고 보고하여 앞의 조선군사령관의 보고가 거짓임을 드러내주었다.
이범석은 ❰우등불❱에서 독립군에게 살상된 일본군은 가노우연대장을 비롯하여 1,000명이라고 하였으며 독립군의 전사자와 부상자도 100여명에 이른다고 하였다.
중국지방관청에서는 1,300명이라 추산하였다.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의 보고는 살상된 일본군은 연대장 1인, 대대장 2인, 기타 장교 이하 1,254인(적의 자상격살 500여인)이며 부상자는 200인이라고 하였으며 아군의 사망자는 1인, 부상자 5인, 포로 2인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자상격살은 어랑촌전투가 아닌 완류구전투에서 일어난 사건이므로 서일총재의 어랑촌 승전 기록에 완류구전투가 포함된 것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박은식도 ❰한국독립운동지혈사❱442쪽에서 “일본 영사관의 비밀보고에 의하면, 이도구 전역에서 카노연대장을 비롯하여 대대장 2명, 소대장 9명, 하사이하 병사 사상자가 800여 명에 달한다”고 하였다.
당시 독립군측 피해에 대하여 상해에서 출간되던 ❰진단❱에도 독립군의 전사자 200여명이라고 기술하였다.³³
어랑촌전투는 청산리전투 중에 규모가 가장 크고 치열한 전투였으며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연합부대가 함께한 연합전투였다. 쌍방이 참전한 병력도 가장 많았고 전투시간도 가장 길었으며 쌍방의 손실도 가장 컸다. 당시 야계골 고지를 점령한 북로군정서군은 공격해 올라오는 일본 적군의 진격을 필사적으로 방어하였으며 홍범도연합부대의 참전으로 위기에서 벗어나자 사기충천하여 역전의 기회를 잡았다. 일본군은 우수한 화력으로 대포까지 동원하여 연속적인 공격을 하였으나 끝내 고지를 점령하지 못하였고 어둠으로 전투를 중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총체적으로 볼 때 어랑촌전투는 우리 독립군부대의 판정승으로 끝난 셈이다.
어랑촌전투는 연합의 길이 민족의 나아갈 길이며 살길임을 보여주었으나 독립운동계는 청산리전투 이후 연합이 아니라 분리와 분열, 분산의 길로 나아갔다.
5) 맹개골전투, 만기구전투, 맹개골 시거우전투, 천보산전투
어랑촌전투가 끝난 후 홍범도연합부대와 북로군정서군은 어둠 속에서 와룡북쪽 장인강상류지대로 이동하였다. 북로군정서군은 퇴각을 하면서 맹가구, 만기구, 맹가구서골, 천보산에서 소소한 전투를 치루었고 홍범도연합부대는 천보산에서 전투를 벌였다. 그 후 홍범도연합부대는 와룡방향으로 되돌아와서 와룡향경내인 고동하반 오도양차에서 전투를 치렀다.
맹개골 (맹가구)전투는 북로군정서군소부대가 10월 23일 오후 3시경에 맹개골 삼림 속을 통과하다 일본군 기병 30여 명이 골짜기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매복전을 벌여서 적의 기병 10여 명을 사살한 전투이다.
맹개골전투에 대하여 홍범도나 일제가 남긴 기록이 없고 1921년 3월 12일에 발간된❰독립신문❱제 98호에 김훈이 기고한 ❮북로우리독군실전기❯2편에 나오는 기록뿐이다.³⁴
만기구전투는 북로군정서군이 같은 날에 맹개골전투에 이어서 만기구에서 일본군 30여명을 사살한 전투이다. 맹개골전투에서 승리한 북로군정서군이 10km를 행군하여 만기구 삼림 속에서 쉬고 있을 때 일본군 보병 100여명이 행군해오는 것을 보고 일제히 공격을 하여 적군 30여명을 사살하였다. 이것이 만기구전투 이다. 이에 대한 기록 또한 김훈이 ❰독립신문❱에 기고한 글로만 확인될 뿐이다.³⁵
맹개골 시거우 (맹가구 서골)전투는 맹개골 시거우에서 북로군정서군이 일본군과 접전한 두 차례의 전투이다. 만기구전투에서 적을 살상한 북로군정서군은 황구령 방면으로 행군하다가 23일 밤 삼림 속에서 숙영을 하였다. 24일 아침 맹개골 시거우로 행군하던 중 일본군 보병 100여 명이 포 6문을 끌고 행군하는 것을 발견하고 즉각 공격하여 포병과 보병부대에 타격을 주고 후퇴하였다. 이어서 일본기병 1개 소대가 삼림좌측에서 삼림 쪽으로 올라오는 것을 발견하고 급습하여 대부분 살상하였다. 이것이 맹개골 시거우전투이다. 이에 대한 기록 또한 김훈이❰독립신문❱에 기고한 기록뿐이다.³⁶
천보산전투는 일제의 기록과 이범석의 기록이 있다.
이범석이 인솔하는 북로군정서소부대가 24일 밤 8시와 9시에 은동재 부근에서 천보산 부근의 은동광을 수비하고 있던 일본군 수비대 1개 중대를 습격한 전투와 홍범도연합부대가 식량조달을 위하여 일본군수비대를 습격한 전투를 말한다.
6) 고동하곡전투
고동하곡전투는 청산리전투의 마지막 전투로서 1920년 10월 25일 밤중에 시작하여 26일 새벽까지 홍범도연합부대가 일본군 이이노추격대의 야습에 다시 반격하여 적 2개 소대를 섬멸한 전투이다.
어랑촌전투 이후 홍범도연합부대는 장인강상류지대로 이동하여 천보산에서 전투를 벌인 후에 와룡방향으로 되돌아서 10월 25일 저녁 무렵에 고동하강반에 도착하였다.
어랑촌전투 이후 일본군은 독립군을 찾아 사방으로 헤매었다. 기병연대는 오도양차방면에서 독립군이 화집령과 묘령, 고동하곡을 지나 안도방면으로 이동하는 길을 봉쇄하였다. 어랑촌서남쪽으로 수색을 담당한 예비대는 23일 오전 9시경에 어랑촌을 출발하여 고동하상류지역에서수색을 하다가 23일 오후 4시에 홍범도연합부대의 흔적을 발견하고 계속 추격하였다. 그들은 3일 째 되는 날 밤 10시경에 고동하곡 오도양차 10km 부근에서 홍범도연합부대의 숙영지를 발견하였다. 이이노소좌는 밤 12시에 예비대를 나누고 자신 휘하의 2개 소대 병력으로 홍범도연합부대에 야습을 가하였다. 갑작스런 습격에 홍범도연합부대는 적지 않은 손실³⁷을 입었지만 침착하게 협곡으로 부대를 분산, 매복시키고 은폐하여 반격을 가하였다. 반격전은 격전이 시작된 지 1시간도 채 못 되어 적의 2개 소대 병력을 전멸시켰고 패잔병들은 홍범도연합부대에 쫓기여 인근의 가장 높은 고지로 후퇴를 한 후에 철수하였다.
고동하곡전투에서 홍범도연합부대는 적 2개 소대 약 100명을 전멸시켰다.³⁸
고동하곡전투를 마지막으로 하여 26일 낮부터 홍범도는 국민회군, 소수의 군정서군, 광복단 대원을 거느리고 안도현으로 들어가서 아즈마지대의 포위 토벌 사정권에서 벗어났다.
4. 청산리전투 승리와 평가
1) 승리의 요인과 승전 결과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으로 승승장구하며 동북아시아의 패자가 된 일제는 한일병탄으로 조선을 삼키고 21개조 조약으로 중국의 정치를 좌우하였으며 러시아의 반혁명 세력을 지원하기 위하여 시베리아간섭군까지 파견하여 국내외에 무력을 과시하였다. 그러나 용정 3.13 만세시위 후에 만들어진 간도의 조선 무장독립군부대의 국내진공작전에 수시로 공략을 당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대동아 행보에 걸림돌이 되는 독립군들을 일거에 전멸시킬 계획으로 봉오동에 쳐들어갔으나 연합부대인 대한북로독군부의 유인, 매복전에 걸려서 참패를 당하였다.
일제는 봉오동에서 패배당한 수치를 만회하고 조선 내 식민지 통치와 만주에서의 일본세력 불식에 방해물인 만주의 무장독립군부대를 제거하고자 한중수사반을 꾸리고 훈춘사건을 조작하여 ❰불령선인초토화계획❱으로 연변에 침입하였다. 그러나 자기들의 계획대로 무장독립군부대의 주력부대와 지도부를 궤멸하지 못하였고 도리어 봉오동에서 보다 더한 참패를 당하였다. 10월 21일부터 26일에 진행된 청산리전투는 실로 홍범도연합부대와 북로군정서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우리 무장독립군부대의 승리는 참으로 눈부신 것이었다.
군인과 무기, 식량과 기타 장비가 일체 보급되는 일본 정규군 대부대를 식량과 무기뿐만 아니라 군인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는 재야 무장독립군 소부대가 싸워서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재야 무장독립군연합부대는 일본 정규군을 이긴 자랑스러운 청산리전투의 승리를 나라를 잃고 슬퍼하는 망국의 백성들에게 그리고 우리 후손들에게 선물로 남겨 주었다.
승리의 요인을 북로군정서가 임시정부에 제출한 보고서에는 “생명을 불고(不顧)하고 분용결투(噴湧決鬪)하는 군인들의 항일정신이 먼저 적의 지기(志氣)을 압도함이요”라고 하였다. 이는 군인들의 생명을 건 전투의식과 의지, 즉 군인들의 사기가 충천해서 일본군의 기운을 제압했다는 말이다. 무장독립군부대 군인들의 용기와 불굴의 정신이 승리의 요인이라는 것이다.
말 그대로 군인들의 태도와 자세가 전투의 승리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임이 분명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나라가 없는 상황에서 독립을 열망하여 무장단체에 가입하고 자식을 군인으로 바치고 의연금을 내서 무기를 구입하도록 한 간도조선인들의 애국애족의 희생정신이다. 그들이 없었으면 간도 3.13만세시위도 없고, 무장독립운동단체도 없고, 봉오동전투나 청산리전투가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은 자식을 바치고 의연금을 내는 것으로 모자라서 전쟁 장비를 직접 실어 날라 주고 전쟁 중에도 밥을 해서 나르고 심산유곡에서 길잡이를 해주고 적의 정보를 정탐하는 일까지 맡아 주었다. 간도 조선인들이야 말로 청산리전투를 가능하도록 만든 자들이요, 끝내 승리할 수 있도록 생명을 걸고 무장독립부대를 지원한 사람들이다.
간도조선인들의 독립을 위한 헌신 위에 승리의 요인 한 가지를 더한다면 그것은 무장독립부대들의 연합이다. 당시 기독교 백그라운드를 가진 대한독립군, 국민회군, 신민단군, 의민단군, 한민회군은 10월 13일에 어랑촌에서 대표자 회의를 열고 홍범도를 사령관으로 하여 연합부대를 창설하였다. 모임 후에 광복단과 의군부가 어랑촌에 도착하여 연합부대에 들어왔다. 그들은 청산리 전투에서 함께 작전을 계획하고 함께 진격하며 함께 고난을 헤치며 어랑촌전투에서 패배로 막을 내리게 될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냈다.
각 무장독립군부대의 연합 위에 승리의 요인을 한 가지 더하자면 홍범도연합부대의 철저한 지역요해와 식량 확보 및 마을주민과 협력관계를 꼽고 싶다. 홍범도부대는 한 달 전에 미리 들어와서 남완루구와 북완루구의 영마루 요지에 본부를 두었으며 군사훈련을 시켰다. 안무의 국민회군도 9월 말에 들어와 홍범도부대와 함께 하였다. 그들은 10월 13일 모임에서 국민회(간도국민회)에 등록된 자들을 총 동원하고 예정된 부서에 취임하게 하였고, 군량 및 군수품 징수에 급히 착수하였으며, 정찰대를 조직하여 각 방면에 밀행시켜 일본군대의 동정을 탐지하여 아즈마지대를 맞이할 준비를 하였던 것이다.
청산리전투의 승리의 원인은 훈련된 용감한 군인들, 헌신적으로 독립군과 무장단체를 지원하는 용감한 주민들, 명예욕과 경쟁의식을 버린 무장독립군부대들의 아름다운 연합, 독립군 부대지도자들의 철저한 지역 요해와 작전 구상, 군수품 준비의 결과였다.
승전 결과에 대하여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4전의 격전에서 1천여 명의 적을 섬멸했으나 아군은 1명의 희생자도 없고 단지 5명이 가벼운 상처를 입었다고 하였다.³⁹ 이범석은 그의 회고록 ❰우등불❱에서 일본의 사상자는 3,300명인 반면에 독립군부대는 전사 60며 명, 부상 90 여명, 실종 200여 명이라고 하였다. 상해에서 나오는 잡지 ❰진단❱1920년 11월 14일자에는 일본군 전사자는 1,200명, 독립군 전사자는 200명으로 밝혀져 있다. ⁴⁰
황필항노인은 1920년 삼도구지방과 독립군부대 사이에서 통신연락을 했던 자로서 백운평계곡에서 일본군이 죽은 장병들의 머리를 세 마차나 실어 내렸다고 실증하였다. 또한 1920년에 19세였던 이형권노인은 어랑촌 전투 후 일본군이 죽은 장병들의 머리를 네 바퀴 달린 중국 마차 세대에 실어 투도구를 경유하여 용정으로 내려갔다고 하였다. 이런 증인들의 회상을 참고하면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의 전사자가 1,000명이라는 것은 단순한 과장만은 아니다.⁴¹
그러나 일제는 역사보관서류에 청산리전투에서의 구체적인 패배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들은 패배의 기록을 축소하고 은폐하였다. 물론 우리 측의 기록도 그 신빙성을 재고해보아야 하겠지만 비교적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전사자의 숫자가 과장되었든 축소되었든 간에 일본군은 패배하였고 조선의 재야 무장독립부대들이 승리한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2) 평가와 문제제기
청산리전투의 역사적 평가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일본이 중국 땅 간도에서 활동하는 한국 독립군을 전멸시키기 위해서 일으킨 토벌 중에 일어난 전투이지만 중국은 관심을 가질 일이 없고 중국 조선족이 관심을 가지고 있으나 민족주의자들의 전투이기 때문에 치열하게 연구를 하는데 한계가 있다. 일본은 기록으로 청산리전투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연구자가 있을 리가 만무하다. 한국은 전투현장이 중국에 있고 청산리전투 70년이 되는 해까지 접근이 어려웠기 때문에 연구가 어려웠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홍범도연합부대의 지도자인 홍범도와 안무가 공산당에 가입한 것 때문에 임정에서 홀대를 받은 것이, 반공을 국시로 내세운 이승만 정권에서도 계속되어서 청산리전투 전반에 대한 바른 연구가 어려웠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앞으로 이념으로부터 자유로운 차세대에서 청산리전투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일어나 전투의 진면모가 밝히 드러나며 역사에서 공정한 평가가 이루어지길 바란다.
연변의 조선족 학자들이 말하는 청산리전투의 역사적 의의는 첫째는 만주 조선인들의 항일투지를 고무시켰을 뿐만 아니라 전 중국인들의 항일의식을 추동하였다는 것이다. 둘째는 청산리전투 보도에 고무된 전 중국의 청년들과 백성들이 항일시위와 집회를 열어 일본의 만행을 폭로하고 일본 침략군의 철군을 강력히 요구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셋째는 항일부대의 전투는 침략자인 일본에 대한 반침략전으로 세계만방에 조선독립에의 의지를 각인시켰다는 것이다. 넷째 일본군이 계획한 ❰불령선인초토화계획❱의 야망을 좌절시켰으며 만주 침략에 대한 계획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⁴²
청산리전투는 무장독립부대가 간도에 자기들 마음대로 침입하여 중국의 주권을 엄중히 유린한 일본군에게는 참패의 충격을 주었으며 중국인에게는 연대와 항일의식을 불러일으켰고 망국 백성 조선인에게는 독립에의 희망과 상징이 되었으며 동시에 독립은 피 흘림의 무장투쟁을 통해서 오는 것이란 각성을 주었다.
분단의 시대를 사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청산리전투가 주는 의미를 깊이 생각하면서 공부하며 글을 쓰는 내내 일어난 의문 몇 가지를 정리하며 마치고자 한다.
첫째 북로군정서군은 전투를 치루기 위해 서부로 이동하면서 왜 1,800여 명의 사람들을 대대 적으로 동원했을까? 그리고 기록에 나오는 1,200여 명의 비전투요원들이 동행한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둘째 10월 19일, 묘령에서 열린 각 부대 대표자회의에 북로군정서 사령관인 김좌진은 왜 참 여하지 않았을까? 북로군정서는 왜 끝까지 연합을 거부하고 피전책을 주장하였을까?
셋째 백운평전투에서 직소택에 부대를 매복시키는 작전을 계획하고 실행한 사람은 연성대장 이범석인데 모든 공로는 왜 김좌진에게 돌려지고 있을까?
넷째 천수평에 40여 명의 일본기병대가 있다는 정보를 듣고 이범석과 여행단 (교성대, 선두부 대) 80명을 새벽에 파견할 필요가 있었는가? 이는 천수평에서 이십 리도 못 되는 거리 에 아즈마지대의 주력부대가 있다는 정보를 몰랐다는 말인데 이는 군부대로서, 사령관으 로서 가당한가?
다섯째 천수평전투로 말미암아 잇대어 일어난 어랑촌전투에서 북로군정서군이 전몰할 위기에 ⁴³ 빠졌다가 홍범도와 안무의 연합부대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난 북로군정 서와 김좌진이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주역처럼 우리 독립운동사에 각인된 이유는 무엇일까?
여섯째 홍범도와 안무는 봉오동전투 때도 4개의 부대를 연합시켰고 청산리전투에서도 7개 부 대를 연합시킨 지도자들이고 김좌진은 봉오동전투에 참여하지도 않았고 청산리전투에서
도 연합을 거부했는데 왜 그가 독립운동의 주요인물로 떠오른 것일까?
일곱째 어랑촌전투는 결코 연합작전이 아닌데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연합부대의 연합작전의 성 공이라고 표현할까? 전멸당할 위기에 있는 북로군정서군을 홍범도연합부대가 협공하여 구출했을 뿐 만 아니라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는데...
여덟째 북로군정서를 만들고 군인을 양성하며 장비를 구입하는 총체적인 업무를 감당한 사람
은 총재 서일, 부총재 현천묵, 재무부장의 계화인데 1919년 8월에 왕청에 도착해서 1920년 3월에 서일에 의해 사관연성소의 소장으로 임명되고 1920년 9월 즈음에 북로군 정서 서부전선 사령관으로 임명받은 김좌진이 북로군정서를 만든 대표처럼 역사에 등장
하였을까?
박은식은 청산리전투에 대하여 “ ~ 인류 역사상 미증유의 대 전공이라 하여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비록 막판에 식량이 떨어지고 총탄이 다하여 물러서기는 했더라도, 그 무용을 과시한 아군의 면목은 역력히 빛났다.”고 찬탄하였다.
식량이 떨어지고 총알이 다 사진되어 더 이상 싸울 수 없었던 슬픈 우리 재야 무장독립군들을 우리시대의 정치이념으로 매도하거나 왜곡하거나 과장하거나 축소하거나 짓밟아서는 안 된다. 어느 한 사람만 클로즈업하여 특별히 영웅화시키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왜냐하면 청산리전투는 홍범도연합부대의 완루구전투, 고동하곡전투와 그들이 구원군으로 참여해서 역전시킨 어랑촌전투가 주요전투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독립을 열망해서 무장독립운동단체에 가입하고 자식을 군대에 바치고 독립의연금을 내준 모든 간도 조선인들이 모두가 재야 독립군인으로 참여하여 함께 승리를 거둔 전투이기 때문이다.
2020.11. 5. 목
우담초라하니
미주
1. 김춘선 외 2인, ❰최진동장군❱, 98쪽,
2. 같은 책, 98쪽
3. 김기봉 외 2인 편저,❰일본제국주의의 동북침략사❱,71쪽
4. 김춘선 외 2인, ❰최진동장군❱, 150쪽
5. 현천추,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1 개벽❱,❮반일부대에 대한 일제의 토벌계획❯, 501쪽
6. 같은 책, 501쪽
7. 같은 책, 503쪽
8. 김철수, 김중하,❰룡정3.13반일운동 80돐기념문집❱,“일제의 경신년대토벌에 대하여”230쪽
9. 심영숙,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1 개벽❱,❮훈춘사건❯, 506쪽
10. 김철수, 김중하,❰룡정3.13반일운동 80돐기념문집❱,“일제의 경신년대토벌에 대하여”
281쪽
11. 허송남,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1 개척❱, ❰청산리전역❱510,511쪽
12, 김철수, ❰연변항일 사적지 연구❱,461 쪽
13. 김철수, 같은 책, 463쪽
14, 장세윤, ❰봉오동. 청산리전투의 영웅 홍범도❱, 167~172쪽
15. 김택 주필 외 ❰걸출한 조선민족영웅 이름난 독립군사령관 홍범도장군❱, 173쪽
16. 국민회군의 다른 칭호.
17. 김택 주필 외, ❰걸출한 조선민족영웅 이름난 독립군사령관 홍범도장군❱,183쪽
리광인, 김송죽 저 ❰백포 서일장군❱, 378쪽은 1,000여 명 정도로 계산함.
18. 리광인, 김송죽 저 ❰백포 서일장군❱, 354,355쪽
19. 김택 주필 외, ❰걸출한 조선민족영웅 이름난 독립군사령관 홍범도장군❱,188,189쪽
20. 김철수, ❰연변항일 사적지 연구❱,468 쪽
21. 같은 책, 403쪽,
22. 김택 주필 외, ❰걸출한 조선민족영웅 이름난 독립군사령관 홍범도장군❱, 184쪽
23. 김철수, ❰연변항일 사적지 연구❱,465 쪽
24. 김택 주필 외, ❰걸출한 조선민족영웅 이름난 독립군사령관 홍범도장군❱, 193쪽
허송암,❰룡정3.13반일운동 80돐기념문집❱,“ 청산리전역에 대하여” 301쪽
25. 김철호, ❰중국 조선족, 그 력사를 말하다 상❱, 136,137쪽
허송암,❰룡정3.13반일운동 80돐기념문집❱,“ 청산리전역에 대하여” 303쪽
26. 김철호, ❰중국 조선족, 그 력사를 말하다 상❱,143쪽
27. 김철수, ❰연변항일 사적지 연구❱,502 쪽
28. 같은 책. 503쪽
29. 김택 주필 외, ❰걸출한 조선민족영웅 이름난 독립군사령관 홍범도장군❱, 202쪽
30. 김춘선 외, ❰항일전쟁과 중국조선족❱, 146쪽
김택 주필 외, ❰걸출한 조선민족영웅 이름난 독립군사령관 홍범도장군❱, 202쪽
31. 홍범도연합부대 1,400명, 북로군정서군 600, 일본군 1,000명으로 계산할 경우
3,000명의 병력으로 추산이 된다. 아즈마지대 병력 5,000명 중에서 어랑촌전투에
1,000명이 참전했다는 주장은 화룡시역사지판공실의 역사연구가인 허송암, 연변대
민족역사연구소 소장이자 교수인 김춘선의 글을 참고함.
32. 장세윤,❰봉오동.청산리전투의 영웅 홍범도❱, 184쪽
33. 김철수, ❰연변항일 사적지 연구❱,525 쪽
34. 김철수, ❰연변항일 사적지 연구❱,534 쪽
35. 김철수, ❰연변항일 사적지 연구❱,535 쪽
36. 김철수, ❰연변항일 사적지 연구❱,537 쪽
37. 김철수, ❰연변항일 사적지 연구❱,532 쪽
38. 장세윤,❰봉오동.청산리전투의 영웅 홍범도❱, 188쪽
39.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 442쪽
40. 김택 주필 외, ❰걸출한 조선민족영웅 이름난 독립군사령관 홍범도장군❱, 208쪽
41. 리광인, 김송죽 저 ❰백포 서일장군❱, 381, 382쪽
42. 연변조선족사 집필사조편, ❰연변조선족사 상❱, 161쪽
43. 리광인, 김송죽 저 ❰백포 서일장군❱, 380쪽
김춘선 외, ❰항일전쟁과 중국조선족❱, 146쪽
참고서적
1.리광인, 김송죽, ❰백포 서일장군❱, 민족출판사, 연변인민출판사, 2015
2.장세윤, ❰봉오동.청산리전투의 영웅 홍범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2017
3.심영숙,❰중국조선족 력사독본❱,민족출판사, 2016
4.김철호,❰중국 조선족, 그 력사를 말하다 상❱, 연변교육출판사, 2018
5.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서문당, 2019
6.김춘선 외 2인, ❰최진동장군❱,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2006
7.반병률, ❰홍범도 장군 자서전 홍범도 일지와 항일무장투쟁❱, 한울아카데미, 2019
8.김삼웅,❰홍범도평전❱(사) 여천 홍범도기념사업회 ,2019
9.정협화룡현문사자연구위원회 편집❰화룡문사자료4집❱, 김석 ❮청산리대첩❯,1992
10.최성춘,❰연변인민항일투쟁사❱,민족출판사, 2005
11.김기봉 외 2인❰일본제국주의의 동북침략사❱, 연변인민출판사, 1987
12. 김춘선 주필외 ❰중국조선족통사 상권❱, 연변인민출판사, 2009
13. 호이전 주필 외 ❰연변문사자료 제 8집 종교사료전집❱,1997
14. 김철수, ❰연변항일 사적지 연구❱, 연변인민출판사 , 2001
15. 김춘선 주필 외, ❰항일전쟁과 중국조선족❱, 연변인민출판사, 2015
16. <연변조선족사> 집필소조편,❰연변조선족사❱, 2011
17. 한국근현대사학회, ❰한국 독립운동사 강의❱, 한울 아카데미, 2016
18. 김택 주필 외, ❰걸출한 조선민족영웅 이름난 독립군사령관 홍범도장군❱,연변인민출판사, 1991
19. 김양 주편,❰항일투쟁반세기❱, 료녕민족출판사, 1995
20. 최삼룡편, ❰승리의 기록 항일전쟁 승리 70돐 기념문집❱, 연변인민출판사, 2015
21 룡정기념사업회 외,❰룡정3.13반일운동 80돐기념문집❱,“ 연변인민출판사, 1999
22 제1책 ❮개척❯ 편집위원회 ,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1 개척❱, 민족출판사,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