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한 죽음을 위하여 변주
“엄마, 이게 무슨 소리야?”
초등학교 4학년 여름, 새벽에 자다 옆집에서 들리는 통곡소리에 잠이 깼다. 한여름이었는데도 누군가의 곡소리를 듣자 뭔지 모를 무서움에 소름이 돋고 어깨가 뻣뻣해졌다. 엄마를 부르며 겨우 입을 뗐는데 이내 엄마가 새벽예배 드리러 교회에 가고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자 더 무서워졌다. 설상가상 갑자기 코피까지 나서 입고 있던 메리야스에 피가 뚝뚝 떨어져 뭔가 더 정신없고, 혼자 있는 상황이 못 견디게 두려웠다. 코피만 대충 막은 후, 울먹이며 입은 옷 그대로 집에서 나와 교회를 향해 뛰었다. 달리면서도 도대체 무슨 소리가 싶어 옆집 쪽을 바라보니 새벽인데도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긴 것 같다는 예감을 안고 당시 교회에 도착해 창문에서 쳐다보며 예배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다행히 예배는 금방 끝났고 나는 엄마를 불렀다. 그런데 내 꼴을 본 엄마와 다른 교인분들이 깜짝 놀라셨다. 피가 묻은 채로 메리야스만 입고 왔으니 충분히 그럴 만 했다. 나는 놀란 마음으로 자초지정을 설명했고, 엄마와 마을 어른들은 곧 옆집 00이의 아빠가 왔나 보네 하며 이야기를 나누셨다. 얼핏 들으니 옆 섬에서 일하셨던 00이의 아빠가 돌아가셔서 집으로 모시고 왔다는 것이다. 그제서야 나도 울음소리의 의미를 이해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뒤부터였다. 그 시각만 되면 갑자기 자다가 깨어나는 것이다. 몸에 그날의 통곡이 각인이 된 것인지, 누군가의 죽음을 소리로 접한 경험이 강렬했던 것인지 그 날 이후 나는 알 수 없는 공포에 시달리고 있었다. 엄마가 새벽에 예배 보러 간 후, 혼자 잠이 깨면 교회에 찾아가 서성이는 일이 잦아지자 엄마는 예배 보러 가기 전에 나를 깨워 데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예배를 드리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 교회 예배당은 좌식으로 방석을 깔고 예배를 드리던 곳이어서 뒤쪽에 방석이 많이 쌓여있었는데 나는 그 방석을 깔고 누웠다. 그리고 방석을 이불삼아 머리부터 발끝까지 덮고선 잠을 자거나 아니면 자는 척 했다. 최대한 내가 없는 것처럼 보이고 싶었다.
얼마나 한참 지났을까. 수요일 밤 예배를 드리고 나서는 길, 보름달이 환하게 떠 밝게 길을 비추던 밤. 당시 개척교회 사역자로 오신 전도사님이 웃으며 말씀하셨다.
“아따, 오늘밤은 보름달이 환해서 내일 현화가 새벽예배 오는 길 편하겄네이.”
그 말에 주변 교인들이 다들 웃으시고 나는 얼굴이 빨개졌다. 아니, 내가 새벽예배 때 뒤에서 (철저하게 방석으로 가리고) 몰래 누워있던 걸 전도사님께서 알았단 말인가? 뭔가 창피해서 몸을 배배 꼬며 집에 돌아온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인 80년대 중후반까지도 병원이 아닌 집에서 장례를 치렀다. 우리 고장은 독특한 장례 풍습이 있는데 초상이 나면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 밤새 불을 환하게 켜놓고, 마이크를 대고 온 동네가 떠나가라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떠나고 50대 이후의 사람들만 남은 동네에서 초상났다는 소리는 꽤 자주 들었던 소리였다. 나는 비단 그 날의 새벽뿐 아니라 많은 날들 동안 곡소리를 듣고(새벽은 아니었지만), 밤새 노래를 듣고, 상여가 나가는 장례 행렬을 보며 죽음을 가까이서 보고 자랐다.
늦둥이로 태어난 나에게 가장 큰 걱정은 엄마였다. 혼자 자식들을 키우고, 농사일에 바빠 제 몸 하나 돌볼 여력이 없던 엄마는 나이를 먹을수록 허리가 굽어지고, 늘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잠을 잤다. 그럴 때마다 엄마가 혹시나 많이 아프면 어쩌나, 내가 중학생이 되거나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돌아가시면 어쩌나, 혹시 스무 살이 넘어서 돌아가시면 덜 슬플까 하는 생각들로 밤을 뒤척이곤 했다.
그러나 스무 살에 서울에 올라오고, 대학교와 직장을 다니며 바쁘게 살면서 엄마에 대한 걱정은 점점 희미해졌다. 전화통화를 하며 매일 아프다는 소리를 들어도 아무렇지 않아졌다.
“그러니까 얼른 병원 가라고 했잖아.”
나는 더 이상 엄마를 잃을까 걱정하며 기도하던 어린아이는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겨울. 엄마는 69살이 되던 2월 새벽에 교회에 가다 빙판에 넘어져 병원에 입원을 했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 83세로 요양원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기나긴 세월을 수술하고 입⸳퇴원하는 생활을 반복하며 사셨다. 심장 판막부터 척추 문제, 직장암까지 무한 반복되던 엄마의 질병수난사는 곧 나의 간병, 돌봄 노동의 기나긴 힘든 시간을 의미하기도 한다.
10년 넘도록 엄마의 병원스케줄에 따라 나의 일상이 통제 당하자 나의 입에서 엄마의 고통을 무시하는 소리가 자주 새어나왔다. 어릴 적 엄마가 돌아가실 까봐 전전긍긍했던 그 아이는 어디로 갔을까. 자꾸 입원하는 기간이 길어지면 한숨만 팍팍 쉬고, 이 고생을 언제까지 해야 하나 막막해서 울었던 순간들이 문득 떠오르면 괴롭다.
그래서일까. 엄마가 요양원에서 눈을 감으신 후 나는 많은 죄책감에 시달렸다. 마지막 1~2년 요양원에 모셔두고 자주 찾아가지도 못했던 것, 혹시나 내가 품었던-이제 그만하면 안 되나 했던 생각들이 엄마의 심장을 찌른 건 아닌지 늘 괴로웠기 때문이다. 돌아가신 후 엄마는 종종 꿈에 나타나 나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거나 애처로운 미소를 지었는데, 나는 그때마저도 어떻게 간병생활을 또 해야 하나 하며 동동거렸다.
작년 메타포라 수업 때 그런 괴로운 마음을 담은 글을 썼다. 그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마음 속 응어리를 처음 풀어낸 것이다. 목이 메이고 눈물이 쏟아져 제대로 읽지 못하는 동안 여러 학인이 함께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많은 위로를 받았다. 그때 학인들 앞에서 쏟아낸 덕에 나의 마음 깊은 곳에 있던 후회와 죄책감이 덜어졌는지 신기하게도 그 날 이후 더 이상 엄마는 꿈에 찾아오지 않는다. 꿈속에서도 엄마의 간병을 걱정하며 엄마가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걱정하는 못된 딸, 자고 일어나면 그 생각에 더 괴로워하고 힘들었던 시간들이 마법처럼 사라졌다.
엄마를 간병했던 세월동안 병에 걸려 고통을 받는 장수가 과연 축복일까 하는 생각을 자주 했다. ‘긴 병에 효자 없다, 한 사람이 아프면 온 집안이 흔들린다’ 는 말은 입원실에서 자주 들리는 소리이기도 하다. 장수를 하며 별다른 큰 질병을 얻지 않거나, 혹은 얻었어도 재력이나 다른 여건들이 충족되어 따뜻하고 충분한 보살핌을 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긴 병상생활이 이어질수록 한 사람의 고유한 인생은 퇴색되고, 환자의 목소리는 지워지며 간병하는 사람들의 고통만 남는 걸 많이 지켜보았다.
인간에게 죽음이란 피해갈 수 없고, 또 시기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병상생활 동안 한 사람이 아픈 환자로만 납작해지지 않고, 그것이 삶의 아름다운 마무리, 삶의 완성이라는 의미를 얻도록 할 수는 없는 것일까. 그러기 위해서는 환자 뿐 아니라 환자를 돌보는 가족의 고통을 알아주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그래야만 지치지 않고 환자를 돌보며 환자에 대한 존엄을 지켜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질병으로 고통 받고 병원을 전전하며 오래 산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 될 수 있다. 가족이 있어도 그런데 돌봐줄 누군가 없이 외롭게 혼자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은 어떠하겠는가. 간호간병통합서비스 같은 제도가 시행되고 있지만 대상과 범위가 아직은 넓지 않다. 좀더 국가에서 다양하고 적극적인 방안을 마련할 때이다. 더 이상 가족들과 환자들이 지치지 않고, 삶과 죽음을 통해 서로를 귀하게 바라보는 시간들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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