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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동학,증산 스크랩 동학과 천도교 개관ㅡ 옥계산인님 글 옮김
멩이 추천 0 조회 53 08.01.26 09:1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동학과 천도교 개관>

 

                          글쓴이 : 옥계산인

 

목  차

 

1. 들어가는 말


2. 동학의 창도와 새 세상 지향

   1) 동학 출현의 시대적 배경

   2) 동학 천도의 탄생 과정

   3) 동학의 핵심 시천주 신앙


3. 동학의 성장과 시련

   1) 해월의 양도(養道)와 동학적 영성

   2) 역사의 소용돌이-동학농민혁명


4. 천도교의 탄생과 시대경영

   1) 동학의 현도-천도교의 탄생

   2) 국권 상실기의 시대 경영


4. 맺는 말




<동학과 천도교 개관>


1. 들어가는 말


  깊어 가는 가을밤에 홀로 숲 속에 앉아 막막한 하늘을 바라보면 그 어둠의 장막에 무수한 별들이 깜빡이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별들은 나에게 사랑하는 듯 미워하는 듯 어서 오라는 듯 끊임없이 반짝인다. 저 무한한 우주에서 나에게로 달려오는 저 별빛은 언제쯤 별을 떠나서 나에게로 오고 있는 것일까? 나는 어찌하여 이 숲 속에 홀로 앉아있고 저 별들은 어찌하여 하늘에서 저리도 아름답게 빛나고 있는 것일까? 신비로운 이 가을밤에 풀벌레 소리는 한없이 적막한 산골짜기를 흐르고 흐르는데 나는 어찌하여 여기에 있는 것일까?

  이렇게 대자연의 품속에서 고요히 명상을 하노라면 이렇게 명상하는 내가 참으로 영묘한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 나는 사람이고 이 무한한 우주에서 참으로 기이한 존재이다.  이 무한한 울인 대 우주자연 속에 나는 이렇게 신비롭고 존귀하게 존재한다. 그런데 이 우주에서 나만 홀로 존귀한 것이 아니다. 나와 더불어 사는 모든 사람들이 나와 마찬가지로 존귀하고 나와 함께 이 누리에 사는 날짐승 길짐승도 모두 존귀하다.

  이런 생각에 사무치노라면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가야 할 터전인 이 누리에서 자기의 욕심만을 차리면서 처참하도록 서로를 미워하고 학대하면서 살아온 우리 인간의 삶을 반성하고 새로운 세상, 모두가 한 몸처럼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세상, 그 희망찬 세상을 위해 자신의 귀한 목숨을 버리신 분들이 생각난다. 바로 해 뜨는 동방의 나라에서 태어나신 동학의 창시자 수운 최제우 선생과 해월 최시형 선생, 의암 손병희 선생, 춘암 박인호 선생 등 동학 천도교의 스승님들이다.


2. 동학의 창도와 새 세상 지향


  1) 동학 출현의 시대적 배경


  18세기 서유럽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자본가를 비롯한 새로운 시민 사회 계층이 형성되었는데, 이 새로운 시민계층은 기존의 봉건사회를 붕괴시키면서 근대적 자본주의 사회를 급격하게 열어나갔다. 바야흐로 서유럽은 인류 문명사에서 신석기 혁명이후 최대의 문명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시장경제의 발달과 더불어 과학기술도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는데 생산품에 대한 소비시장의 확보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면서 서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새로운 시장을 향하여 눈을 돌리게 되었으며 이 결과는 결국 유럽 이외의 세계에 대한 식민지의 개척으로 귀결되었다.

  압도적인 경제력과 군사력으로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동양의 여러 나라들을 향하여 세력을 뻗어오기 시작했다. 소위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물결이 거세게 일어난 것이다. 동양의 수많은 나라들은 속수무책으로 서유럽 나라들의 식민지로 급속하면서도 광범위하게 전락하였다.

  서유럽의 나라들이 동양에서 경쟁적으로 상품시장을 확보하려는 가운데 영국이 중국으로 수출하던 아편에 대하여 중국이 자국의 경제가 파탄이 나고, 관료와 병사의 아편 흡식으로 인해 국가의 기능조차 마비될 지경에 도달하게 되자 아편의 금수조치를 취하였는데 영국은 이를 빌미 삼아 무력으로 중국을 공격하였다.

  흔히 아편전쟁이라고 불리는 영국의 중국에 대한 이 침략전쟁은 2차에 걸쳐서 진행되었는데 결국 영국의 승리로 돌아가게 되었으며 중국은 치욕적인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중국의 옆에 있는 조선의 백성들에게도 소문으로 들려왔다.


  2) 동학 천도의 탄생 과정


  이때 조선에는 한 젊은 사람이 보따리를 짊어지고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 경주 사람 수운 최제우 선생이다. 그는 벌써 몇 년째 행상을 하고 있는 중이다. 경주의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나 재가녀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과거의 문과 시험을 볼 수도 없었고 집안 경제가 어려워지자 가난한 집안의 처자식을 부양하기 위하여 부득이 행상을 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전국을 돌아다니다 보니 세상의 풍속을 누구보다도 잘 알게 되었다. 온 나라가 모두 질병과 가난에 시달리는 나라 안의 정황은 물론이려니와 중국의 아편전쟁이나 태평천국의 난 등에 관해서도 소문을 들어서 알 수 있었다.

  온 나라는 전정 군정 환곡과 같은 정책이 극도로 문란한 상태에서 성리학 사대부들이 장악한 나라의 관리들은 기층 인민들에 대하여 끝없이 착취하고 있었으며 백성들은 고통에 신음하고 있었다. 서양의 세력이 동양을 향하여 거침없이 밀려오는 상황인데도 정부에서는 위기의식조차 가지지도 않았고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와 능력은 더욱 없었다.

  이를 어찌해야 할 것인가? 젊은 수운의 고뇌는 참으로 컸을 것이다. 그리고 이같이 비참한 현실을 살아가야 하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질문을 끝없이 자신을 향하여 던지고 던졌을 것이다. 현실 인민들의 비참한 삶은 최제우라는 젊은이에게 근본적이고 종교적인 고뇌를 가중시켰을 것이다.

  이 풀리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그는 천성산에 올라가서 49일 기도를 드리기도 했다. 그가 남긴 시문들을 보노라면 그는 문학적 감수성이 상당히 예민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기에 수 년 간에 걸친 사색과 기도는 그의 내면 세계를 점점 더 넓어지고 깊어지게 했을 것이다.

  이러한 사색과 수련의 결과 1860년 음력 4월 5일 하늘님의 영이 몸에 이르러 하늘님과 대화를 하는 기이한 체험을 하게 되고 다함 없이 큰 도를 창도하게 된다. 세상의 혼란을 막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은 하늘님을 경외하면서 그 도리를 배우고 그 미덕을 닦아서 군자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다. 그의 종교사상은 아주 간단하여 성정이 바른 사람은 한 시간만 설명을 들어도 당장에 믿음을 일으켜서 수련을 할 수가 있는 것이었다.


  3) 동학의 핵심 시천주 신앙


  수운의 동학 천도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시천주(하늘님을 모심)에 대한 설명은 사람마다 다를 정도로 다양한 해석이 있다. 유일신론적인 해석을 비롯하여 범신론적 해석까지 참으로  다양한 해석들이 있어왔지만 이러한 해석들이 모두 수운의 신앙관과 일치한다고 할 수는 없다.

  야뢰의 범신론적 해석은 그래도 철학적 소견이나 있었다고 하지마는 현재에 와서는 심지어 쓰레기 속에도 하늘님이 계시고 살인마도 하늘님이라는 해석까지 하고 있는 교인들도 있는 실정이다. 수운의 시천주 신앙이 무엇인지 교단 차원에서도 확실하게 개념을 정립하고 포덕을 하지 않은 결과가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된 이유일 것이다.

  수운의 동학, 수운의 신앙은 참으로 쉬운 것이라고 수운 자신이 말하였으며, 호리라도 변치 말라고 하였다. 즉 제멋대로 해석을 하지말고 순수하게 수운의 신앙을 본받으면 되는 것이라는 뜻일 것이다. 수운은 제자들에게 나의 글을 공경하여 받으라고 하였건만 후학들은 스승의 말씀을 자기 생각대로 해석하였다.

  나의 생각을 때려부수고 스승의 생각과 믿음을 따라가기보다는 스승의 생각을 왜곡 해석하여 나의 생각을 정당화하는데 이용한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결국 천도교의 쇠운에도 커다란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수운의 신앙은 그가 직접 말한 대로 21자의 주문 속에 모두 들어 있는 것이다. 그 속에는 하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구체적인 방법들이 들어있다. 방법도 아주 쉽고 간단하다. 언젠가 수운이 <나의 도는 넓으면서도 간단하다. 별다른 도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정성과 공경과 믿음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하였다. 또한 <이같이 쉬운 도를 자포자기 한단 말인가?>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수운의 말씀은 높은 지적 능력을 가진 지식인들을 향해서 한 말씀이 아니라 일반 민중들을 향해서 알기 쉽게 설명한 것이다. 이것을 너무 철학적으로 어렵게 해석하면서 자신의 신념체계를 정당화하는데 이용한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소위 난법난도란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시천주 사상에 대한 설명은 일체의 선입관을 버리고, 나의 개인적인 견해도 모두 버리고, 단 한 번만이라도 마음을 활짝 열고, 스승의 글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진지하게 읽어본다면 단번에 이해가 될 것이므로 여기서는 설명을 생략하기로 한다.

  그래도 한마디를 덧붙인다면 수운의 시천주 신앙은 하늘님을 극진하게 믿고 공경하고 정성을 드리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핵심이라고 강조하고 싶다. 주문도 하늘님을 위하는 글이라고 했다. 여기서 위한다는 말은 존경하고 사랑한다는 뜻이다. 하늘님에 대한 끝없는 존경과 사랑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이것이 사람이 해야 할 도리이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방법임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늘님과 더불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다.


3. 동학의 성장과 시련


  1) 해월의 양도(養道)와 동학적 영성


  1875년 추석날 해월은 충북 단양군 남면 장정리에 있는 자택에서 유인상, 전성문, 등 지도자 몇 사람과 동학의 새 출발을 다짐하는 모임을 열었다. 수운 선생이 정한대로 제수 음식을 마련하여 하늘에 새 출발을 고하는 제사를 올렸다.(표영삼 선생이 쓴 「동학2」에 이 제사에 대한 기록이 있다.) 수운선생이 대구의 장대에서 순도하신 지 벌써 11년이 지난 해이다.

  그동안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영해교조신원 운동을 비롯해서 수많은 교인들이 희생되기도 했다. 끊임없는 도피생활로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고난도 겪었다. 수운 선생의 부인인 박씨 사모님을 비롯해서 아드님인 세청과 세정도 환원하였다. 관의 지목도 좀 느슨해져서 단양에 정착할 수 있었다. 단양에서 맞이한 김씨부인 사이에 솔봉이가 태어나서 현재 7개월이 되었다.

  바로 이곳 장정리 송두둑에 집까지 마련하여 정착한 이후 해월은 본격적으로 제도화와 조직화를 통하여 동학을 재건하는데 온갖 힘을 다 기울였다. 11월에는 정선 유시헌의 집에서 고천제례를 지냈고 후에 구성제, 인등제 등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집단제례를 통해 도인간의 결속을 도모하였다.

  생활실천 11개조 등 도인들이 지켜야 할 준칙도 정하였으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경전의 간행도 이루어졌다. 이렇게 하면서 동학은 위기를 극복하면서 조선 민중들의 마음속으로 깊고 넓게 파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실로 용담의 물줄기가 사해로 흘러가는 모습이 보이는 것이다.

  정선 무은담에서 개접을 한 이후 동학도인들은 나날이 늘어갔으며 해월은 전국을 누비며 포덕에 혼신의 노력을 다하였다. 이렇게 20년이 흐르면서 동학은 조선 인민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거목으로 성장하였다.

  그런데, 당시의 동학이 거대한 나무로 자랄 수 있었던 것은 해월의 고난과 노력도 있었지만 당시 동학 도인들을 구성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식의 병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영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임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일제 침략기 시절에 소위 지식인들이 일제의 압력에 굴복하여 친일의 길을 택한 것은 그들에게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영성과 믿음이 부족한 것이었음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수운이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순도를 택하였고 해월도 역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지식이 많아서가 아니라 하늘님에 대한 한없는 믿음과 경외지심이라는 동학의 영성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임을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할 것이다.

  동학에서 이 동학적 영성이 사라지고 철학만 남아서는 안된다. 만약 영성이 사라지고 철학화하여 학술계의 연구대상으로만 남아버린다면, 동학은 그 강한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인류의 삶의 현장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 역사의 소용돌이-동학농민혁명


  1894년 음력 1월 10일 새벽이었다. 전봉준이 이끄는 500여 명의 농민들이 총과 죽창을 들고 고부 관아를 습격하였다. 역사에 길이 남을 탐관오리의 대명사 조병갑의 학정을 끝내 견디지 못한 농민들의 분노가 결국 폭발한 것이다. 사전에 기미를 알아차린 조병갑은 순창을 거쳐 전주로 도망을 쳐서 목숨을 건진다.

  이 사건이 바로 동학농민혁명의 서곡이 되는 데, 동학농민혁명은 처참하게 수탈 당하던 농민과 몰락한 양반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물리력을 사용한 사회변혁운동이다. 그러나 순수하게 능동적인 사회변혁운동이라기보다는 탐관오리의 학정과 사회모순에 항쟁하는 수동적 의미가 오히려 동기적인 측면에서는 더욱 강하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 물리력을 촉발시킨 원인이 성리학 사대부들이 장악한 모순된 사회제도와 탐관오리들의 학정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동학농민혁명이 사회 모순에 대한 항쟁과 개혁의 성격을 띠고 정부를 대상으로 수행되었으나, 정부가 일본의 군대를 불러들임으로써 반외세의 성격을 띤 전쟁으로 수행되었다. 결국 전쟁의 결과는 참담한 패배로 끝났다. 그러나 전쟁은 패배하였으나 이 동학농민전쟁은 인류사에 엄청난 흐름의 변동을 가져오게 했다.

  청일전쟁을 촉발시켜 일본이 승리하고 이 기세를 몰아 러일전쟁까지 승리한 일본이 동아시아의 또 다른 제국주의 강대국으로 떠올랐으며 청나라와 제정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는 몰락하여 사라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즉 동학혁명은 전 세계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것이며 이 결과들에 따라 전 세계의 힘의 균형이 재편된 것이다.

  우리는 흔히 인도의 간디를 비폭력 민족 운동의 대명사로 인식한다. 깡마른 간디가 물레를 돌리고 있는 사진을 보고 전 세계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감동을 받았는지 모른다. 수운은 본래 비폭력 운동가였다고 볼 수 있다. 강압적인 서구세력의 폭력행위인 침략을 바라보면서 대안으로 창시한 동학이기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이른바 수운이 말씀한 무위이화(無爲而化)는 강압적인 힘, 물리적인 힘을 통해 억지로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하늘님을 모시고 하늘님의 덕을 행하는 군자가 되는 것, 즉 인간 완성을 통하여 세상을 개혁하려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수운은 근본에 착목했고 먼 미래를 보았다. 이른바 수운이 해월에게 유언으로 말한 <높이 날아서 멀리 달려라>라는 말씀도 이런 수운의 정신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탐관오리의 극심한 탄압과 사회 도처에 자리잡은 고질적 모순은 처참한 생활을 하던 민중들의 인내심에 한계를 넘게 하여 결국 녹두 장군 전봉준과 민중들이 폭력적 방법을 동원하여 당장에 사회현실을 개혁하려는 운동으로 나가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은 결국 달성되지 못하고 만 것이다. 그렇다고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조금이라도 훼손하려는 의도는 없다. 동학농민혁명은 또 다른 시각에서 우리나라 민중 혁명의 위대한 선구라고 분명하게 인정하기 때문이다.

  수운의 정신을 계승한 해월 최시형 또한 세상은 무위이화로 변화되어야 하는 것으로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비폭력적인 개벽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나 결국 도도하게 흘러가는 민중 정신과 역사의 흐름 속에 함께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 많은 동학 농민들이 죽어갔고 동학은 더욱 탄압을 받게 되었으며 결국 위대한 지도자 해월 최시형이 1898년 원주 송골에서 체포되어 교수형을 받아 순도함으로써 그가 스승에게 받아서 30년 간 목숨을 다해 가꾸어온 동학의 시대, 곧 해월의 양도시대(養道時代)는 드디어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4. 천도교의 탄생과 시대경영


  1) 동학의 현도-천도교의 탄생


  해월 선생이 순도한지 2년이 지난 1900년 풍기에서 거행된 설법식에서 교문의 종주(宗主) 지위를 확고하게 세운 의암 손병희는 동학의 진로에 대하여 깊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성도주 손천민이 관군에게 체포되어 순도를 당하고 신도주 김연국도 종신형에 처해지자 가까운 제자들과 상의한 다음 손병흠 이용구와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의암은 일본에서 체류하면서도 국내의 동학의 조직을 계속 이끌며 개화파 관리들과 교유하면서 근대화 이론을 받아들였다. 의암이 일본에 있으면서 지도한 갑진개혁운동을 시작으로 전국에 진보회가 결성이 되었고 단발을 시행하고 검은 옷을 입기 시작했다. 이는 동학의 근대화를 지향하는 실천적 의지가 상징적으로 표현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일진회는 일본이 후원하고 있는 단체였는데 이들이 정부의 동학 탄압을 강력하게 비판하자 정부에서는 김연국을 비롯한 모든 동학교도를 석방하였다. 비로소 국가의 공인을 받게 된 동학의 진보회는 1904년 12월 2일 일진회와 공식적으로 합동하여 회의 이름을 일진회라고하고 강령은 진보회의 강령으로 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1년 후인 1905년 12월 1일 의암은 동학을 온 세상에 알리기로 결심하고 제국신문에 광고의 형식으로  <천도교>를 알리게 되었으니 비로소 동학의 뒤를 이어 종교로서의 천도교가 탄생한 것이다.

  이제 동학을 이은 천도교를 온 세상에 선포하였으므로 의암은 두 달 뒤인 1906년 1월 28일 일본에서 귀국하여 본격적으로 천도교의 기반을 다지기 시작하였다. 2월 16일에는 천도교의 대헌을 반포하고 조직을 정비하여 서울에는 중앙총부를, 지방에는 교구를 설치했다.

  천도교가 현도된 다음 가장 당면한 문제는 교단내의 개화파 관료 출신과 일진회를 이끌었던 국내파의 갈등이었다.  갈등이 심각하게 되자 8월 23일 의암은 정교분리를 표방하면서 천도교와 일진회를 분리하였다. 다음 해 1월에 춘암 박인호에게 대도주의 직임을 승임하고 의암은 성사의 이름으로 활동하였다


  2) 국권 상실기의 시대 경영


  천도교는 국권이 상실되어가던 역사적 상황에서 현도되었다. 천도교의 현도는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조약이 체결된지 불과 12일이 지난 시점에 이루어졌다. 외교권이 박탈되었다는 것은 사실상 나라가 망했다는 의미이다.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이 나올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의암은 이렇게 대한제국이 일본에게 침몰 당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천도교를 현도한 것이며 이것은 천도교의 이후 활동 방향과 관련하여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현도 이후의 천도교는 정교분리의 원칙을 가지고 종교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면서도 아울러 개화정책을 광범위하게 추진하였다. 특히 교육, 문화예술의 분야에서는 그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근대교육의 대표적인 사업으로는 천도교 초창기 203개의 사립학교 원조, 1910년 재정난에 빠진 동덕여자의숙 원조 및 보성학원 인수, 1912년 동덕여학교 인수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문화예술은 천도교의 가장 자랑스러운 활동일 것이다. 초창기부터 자체 출판시설을 갖추고 월보를 간행할 만큼 의욕적이었던 천도교는 <개벽> 등 문예지를 통하여 수 많은 문인들을 육성함으로써 한국 현대문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개벽지에 실렸던 주요작품으로는 시에 황석우의〈발 상한 순례의 소녀〉(4호), 김형원의〈무산자의 절규〉(13호), 이기영의〈가난한 사람들〉(49호), 조명희의〈봄 잔디 위에서〉(46호), 이상화의〈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70호) 등과 소설에 현진건의〈빈처〉(7호)․〈운수 좋은 날〉(48호), 염상섭의〈표본실의 청개구리〉(14~16호), 김기진의〈붉은 쥐〉(53호) 등 한국 현대문학에 빼 놓을 수 없는 작품들이 있다.

  소파 방정환의 어린이운동, 여성운동 등의 사회운동도 빼 놓을 수 없는 천도교의 활동이다. 갑진개화운동으로 신문화운동을 열은 천도교는 국권 상실기 신문화운동의 주역으로 그 왕성한 에너지를 계속 발현시켰다. 천도교는 처음 탄생했을 때부터 그 역동적 에너지가 넘치고 있었다. 천도교는 암울한 국권 상실의 시기를 살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와 같은 희망은 또한 삼일운동과 무인멸왜기도운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5. 맺는 말


  위에서 말한 내용의 배경이 되는 시기는 대략 80년 정도이다. 조선말의 험난한 세상에서 결국 국권을 상실한 암울한 시절까지이다. 우리 민족사에서 이보다 더한 고난과 격동의 세월은 다시없을 것이다. 칠흑보다도 더 캄캄한 우리 민족의 한 밤중에 희망의 횃불들 들고 온몸을 던지고, 목숨을 불사르면서 앞장서 달리면서 살아온 것이 바로 동학이요 천도교이다. 실로 동학 천도교는 고난의 어두운 세월 속에 장엄한 불꽃을 일으키면서 뜨겁게 살아온 우리 민족의 혼이요 불멸의 정신이다.

  그러나 이제 21세기의 발전한 나라에서 천도교는 오히려 커다란 쇠운에 처해져 있다. 실로 사활이 걸린 위기의 상황에 처하여 있다. 후천 오만 년의 원대한 꿈을 가진 동학, 천도교가 겨우 목숨만 붙어있는 형국인 것이다. 슬픈 일이다.

  이제 어찌해야 할 것인가? 이 쇠운을 저지하고 성운으로 전환하여 세계문명을 지도하는 천도교가 되기 위해서는 어찌해야 할 것인가? 지금 병상에 누워서 신음하는 천도교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 이 지극한 쇠운의 원인이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지만 당초 수운의 동학이 천도교에서 변질됨으로써 그 영성적 에너지를 상실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현재의 천도교는 동학과는 다른 것이다. 어느 분이 말씀한 대로 천도교는 동학의 이단이며 사이비가 된 것이다. 일단 해월선생 이후의 법설들은 모두 제켜놓고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에 기록된 하늘님 모심에 대한 신앙을 회복하고 그 영성적 진보와 발전을 위해 노력할 때 비로소 천도교가 동학의 정통성을 이었다는 평가를 받을 수가 있을 것이며 더불어  쇠운을 극복하고 성운의 길로 접어들 수 있을 것이다. 그 구체적인 방법은 뜻이 있는 도인들이 함께 진지하게 탐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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