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환봉사 / 먼저 올린 8조의 소[先上八條疏] 갑술년(1574, 선조 7) 11월
선조 | 1 | 1568 | 무진 | 隆慶 | 2 | - | 館學儒生 趙憲 등이 先生과 金宏弼ㆍ趙光祖ㆍ李彥迪의 文廟從祀를 疏請하다. 이후로 해마다 疏가 올려지다. |
성묘의 배향[聖廟配享]
신이 보건대 가정(嘉靖) 10년(1531,중종26)에 문선왕(文宣王 공자를 추봉한 시호)의 호(號)를 고쳐서 지성선사공자지위(至聖先師孔子之位)라 하고, 안자(顔子) 이하는 모두 작명(爵名)을 고쳤던 까닭으로 묘액(廟額)을 대성전(大成殿)이라 하지 않고 선성묘(先聖廟)라고 했습니다.
위패(位牌)의 길고 짧음은 헤아려 보지 않았습니다. 다만 공자(孔子)는 붉은 바탕에 금박(金箔)으로 썼는데 길이는 약 1자쯤이요, 폭은 2치 남짓하며, 사성(四聖 안자ㆍ증자ㆍ자사ㆍ맹자) 이하는 조금 짧아 1자가 조금 못 되고 붉은 바탕에 먹으로 썼습니다. 종사(從祀) 이하는 더 짧고 부방(趺房 신주를 받치어 괸 물건)도 쓰지 않았으며 나무를 깎아서 대(臺)를 만들어 안치하였는데 모두 독(櫝 신주를 덮어 씌우는 궤)이 없었습니다.
신이 금년 5월에 내리신, 위패의 치수를 고사(考査)하여 아뢰라는 교시를 보고 생각하건대, 신의 소견으로는 융경(隆慶) 연간에 나온 태학지(太學志)에 기록된 척수(尺數)는 주척(周尺)이지 포백척(布帛尺 바느질 자)은 아닐 것입니다. 또 태학(太學)의 동무(東廡)ㆍ서무(西廡)에 위(位)마다 각각 향로(香爐)가 있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향로를 하나로 겸설(兼設)하였으니 이런 일은 마땅히 의논해서 고쳐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같이 어리석은 사람이 뒤에 도면(圖面)을 그려 올리오니 성명께서는 잘 살피시어 정하시기를 바랍니다.
신이 생각하건대 문선왕(文宣王)을 공자로 고친 것은, 한 평제(漢平帝) 때에 왕망(王莽)이 간사한 꾀를 쓰기 위해 포성선니공(褒成宣尼公)이라 했고, 당 현종(唐玄宗)이 처음으로 문선왕이라고 시(諡)를 지었으며, 안자 이하는 차례로 공(公)ㆍ후(侯)ㆍ백(伯)이라고 했습니다. 왕(王)과 공(公)으로 봉한 것은 부자(夫子)의 이른바 군군(君君)ㆍ신신(臣臣)ㆍ부부(父父)ㆍ자자(子子)의 도(道)에 일체 어긋나는 것인데, 성인을 높이는 체하여 천하를 속이는 것입니다.
일찍이 가신(家臣)의 거짓을 꾸짖고 대부(大夫)의 대자리[簀]를 바꾸었다고 하였는데 어찌 일각인들 편안히 그 이름을 누리겠습니까? 하물며 황제라고 자칭하고 신자(臣子)를 봉하여 강제로 왕이라 한 것은 더욱 성인을 높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가정(嘉靖) 10년에 태학사(太學士) 정부경(程孚敬)의 건의로 천 년 동안의 과오를 고쳤는데, 우리 조정에서는 여전히 오랫동안의 누습(陋習)에 젖어 있으니 마땅히 논의해서 고쳐야 할 것입니다. 대개 그 사람을 받드는 것은 그 도(道)를 쓰려고 하는 것인데, 세상의 임금은 다만 외모의 경(敬)만 학자에게 보일 뿐 성현의 말씀은 능히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천하가 잘 다스려지는 일은 적고 어지러운 일이 많은 것입니다.
노 정공(魯定公) 같은 이는 공자를 등용하여 사구(司寇)로 삼아, 협곡(夾谷)의 모임에서 내이(萊夷)를 물리친 공을 좋아하긴 했지만,‘여악(女樂)이 마음을 좀먹는다.’든지 ‘임금 노릇 하기가 어렵고 신하 노릇 하기도 쉽지 않다.’는 말들에 대해서는 자기 나라를 일으킬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공자가 씻던 쌀을 움켜쥐고 국경을 넘어간 것도 모르고 있었으므로 노(魯) 나라는 점점 쇠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 선왕(齊宣王)은 맹자(孟子)를 빈사(賓師)로 대접하여 ‘소를 양과 바꾸는 마음’으로 잠시 보민(保民)에 관한 설을 믿기는 하였으나, 공리(功利)에 눈이 먼 나머지 ‘백성과 함께 즐긴다.’는 말을 왕 노릇 하는 데 맞지 않는 것이라고 의심하였습니다. 그래서 ‘집을 주어 제자를 기르게 하겠다.’는 말로도 맹자가 주(晝) 지방에서 나가는 것을 막지 못하였으니 제(齊) 나라는 속히 망하였던 것입니다.
역대의 이른바 성현(聖賢)을 받든다는 자들은 성의는 노 정공과 제 선왕만 못하면서 정치는 그들 이상이 되기를 바라니 너무 어렵지 않습니까? 이것은 한갓 겉모양만 존숭하는 까닭이니 성상께서는 깊이 경계하셔야 할 것입니다.
신이 또 살펴보건대 동무와 서무의 서열(序列)에 임방(林放), 거원(籧瑗), 공백요(公伯寮), 진염(秦冉), 안하(顔何), 순황(荀況), 대성(戴聖), 유향(劉向), 하휴(何休), 가규(賈逵), 마융(馬融), 정중(鄭衆), 노식(盧植), 정현(鄭玄), 복건(腹虔), 범영(范寗), 왕숙(王肅), 왕필(王弼), 두예(杜預), 오징(吳澄) 등은 그 가운데에 있지 않고, 후창(后蒼), 왕통(王通), 구양수(歐陽脩), 호원(胡瑗), 양시(楊時), 육구연(陸九淵), 설선(薛瑄) 등은 모두 그 열(列)에 들어 있습니다.
대개 종사(從祀)하는 법칙은 성문(聖門)에 공(功)이 있는 것을 숭보(崇報)하여 후학의 취향(趣向)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진염과 안하는 참고할 바가 없고, 임방과 거원도 승당(升堂)의 서열은 못 되며 정중, 노식, 복건, 범영 등도 순유(純儒)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종사에 참여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거원이 예(禮)를 좋아한 것과 임방이 과실(過失)이 적은 것은 남의 스승이 될 만하며, 정중 이하 여러 사람들이 경학(經學)을 보익한 공은 기념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각기 그 지방에서 향사(享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공백요는 몸은 성인의 문(門)에서 놀면서 오히려 부자(夫子)의 도(道)를 해치려 했고, 순황은 인성(人性)이 악한 것이라고 주장하여 자사(子思)와 맹자가 천하를 어지럽힌다고 말하였으며, 대성은 장리(贜吏)로 전락했고, 유향은 신선을 즐겨 말하였으며, 가규는 참위설(讖緯說)을 우겨댔으며,
마융은 욕심이 많고 야비하여 권세 있는 사람에게 붙어 양기(梁冀)를 위해 조서(詔書)를 써서 이고(李固)를 죽였습니다.
하휴는 《춘추(春秋)》를 해석하면서 주(周)를 내치고 노(魯)를 왕으로 했으며,
왕필은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종지(宗旨)를 따랐고,
왕숙은 사마소(司馬昭)를 도와 위(魏)를 찬탈하였습니다.
두예는 관리가 되어서는 청렴하지 못하였고 장수가 되어서는 의롭지 못하였으며,
오징은 진퇴가 바르지 못하였고 학문도 선(禪)에 기울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마땅히 유학(儒學)의 열에서 배척되어야 하며 많은 선비에게 표장(表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정관(貞觀), 원풍(元豐), 정통(正統) 연간에 조정에 참된 선비가 없었던 탓으로 이를 잘 가리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단림(馬端臨)도 일찍이 이를 거론했으며 홍치(弘治) 연간의 제신(諸臣)들도 빼기를 청했으나 예부(禮部)의 저지로 의논이 끝내 행해지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 명(明)의 세종 황제(世宗皇帝)가 태학사 정부경(程孚敬)의 진언(進言)을 따라 단호히 개정하여 전대(前代)의 잘못된 견해를 씻었습니다. 선성(先聖)께서 미워했던 옳은 듯하면서도 그른 것이, 이제는 거의 후생의 이목을 현혹시킬 수 없을 만하게 되었는데, 우리 조정에서는 아직까지도 종사의 서열에 두었으니 마땅히 의논해서 빼야 할 것입니다.
후창은 최초로 예서(禮書)를 주해하여 대대(大戴)ㆍ소대(小戴)의 예학(禮學)이 여기에 힘입어 세상에 전해졌고, 왕통은 학문이 정(正)에 가까워 교훈될 만한 말이 순자(荀子)ㆍ양자(揚子)도 이르지 못한 곳이 있으며, 구양수는 성도(聖道)를 부지(扶持)하고 이단을 물리친 공으로 주자(朱子)가 인의지인(仁義之人)이라고 칭찬하였습니다. 호원은 내 몸을 닦고 남을 다스리는 학문에 의거하여 처음으로 수(隋)와 당(唐)의 이(利)를 추구하는 풍습을 씻었으며, 양시는 동남 지방에서 도(道)를 제창하여, 위로는 정씨(程氏)의 학문을 이어받고 아래로는 나예장(羅豫章)과 이연평(李延平)에게 전하여 주자에게 미치게 하였습니다.
설선은 학문이 끊어진 것에 분발, 뜻을 돈독히 하고 힘써 행하여 조정에 나아가 벼슬을 하게 되면서 뛰어나게 높은 절조(節操)로 급류(急流)에 지주(砥柱)가 되었으며, 벼슬에서 물러나 학문을 강할 때는 한 구절의 미묘한 말이라도 중천에 떠 있는 일월과 같이 명확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홍치(弘治) 연간에는 양시를 종사케 하였고 가정(嘉靖) 연간에는 구양수, 호원, 설선을 더 종사케 하였으니 우리나라에서도 마땅히 강구하여 이를 따라야 할 것입니다.
육구연의 학문만은 예의(禮義)를 강론하지 않고 오직 돈오(頓悟)에만 힘썼으므로 당시 주자가 그 설(說)의 해됨을 걱정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학설이 더욱 멀리 전파되어 사람들의 침혹이 더욱 심하여 온 세상이 모두 선학(禪學)에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감히 횡의(橫議 멋대로 지껄이는 논의)로 주자를 비방했던 왕수인(王守仁) 같은 자를 오히려 종사하자고 청하였으니, 이것은 필시 강서(江西) 사람들이 평소에 익히 견문하다가 벼슬한 자들이 많기 때문이며 힘써 상산학파(象山學派)를 지지함으로써 위로는 조정을 그르치고 아래로는 사학(斯學)을 그르치게 된 것입니다. 이 말은 왕지부(王之符)와 태학사(太學士)에게서 들은 것이다. 신은 이와 같은 자들을 본받아 구차히 따라서는 안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신이 보건대 성묘(聖廟)의 서북쪽에 또 계성묘(啓聖廟)가 있는데, 계성공(啓聖公) 공씨(孔氏)는 북에 있고, 선현(先賢) 안무유(顔無繇)ㆍ공리(孔鯉)는 동에 있으며, 증석(曾晳)ㆍ맹손(孟孫)은 서에 있고, 동무(東廡)에는 선유(先儒)인 정향(程珦)과 채원정(蔡元定)이 있으며, 서무(西廡)에는 주송(朱松)만이 있습니다. 대개 학궁(學宮)이라는 곳은 인륜을 밝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안자(顔子)ㆍ증자(曾子)ㆍ자사(子思)는 사당 가운에 언연(偃然)히 선향(先享)하고, 안노(顔路)ㆍ증점(曾點)ㆍ백어(伯魚)는 아득히 밑에 있으니 상인(常人)에게도 불안한 바가 있는데 하물며 성현에게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웅화(熊禾)와 홍매(洪邁)가 일찍이 묘(廟)를 따로 설치하자는 의견을 제시한 일이 있으며, 홍치(弘治) 연간에는 정민정(程敏政)이 또 건의하였는데, 명 세종(明世宗) 때에 이르러 별묘(別廟)를 짓고 춘추 석전(春秋釋奠) 때와 같이 행하였습니다.
이른바 ‘자식이 비록 성현이라도 아비보다 먼저 먹지 않는다.’는 것이니 이렇게 되어야 유감이 없는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우리나라도 문묘(文廟)의 서쪽에 빈 땅이 있으니, 거기에 사당[啓聖祠]을 세우고 춘추로 함께 제사를 지낸다면 거의 윤리가 온전해지고 의(義)가 정립되어, 일국(一國)의 아비와 자식된 자의 분수가 정해질 것입니다.
신은 또한 중국의 종향(從享)하는 사례에 깊이 감명받은 바가 있습니다. 대개 사습(士習)의 추세는 모두 윗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따르는 것인데, 전하께서는 얼마 전 관학 유생(館學儒生)들이 제현(諸賢)을 종사하기를 청하는 여러 차례의 상소를 윤허하지 않으셨으며, 근신(近臣)이 경연석상(經筵席上)에서 계문(啓聞)한 것도 승낙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실로 온 세상이 선(善)으로 향하는 마음을 막는 것이니, 신은 그것을 민망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대저 김굉필(金宏弼)은 처음으로 도학(道學)을 일으켜 계왕개래한 업적이 있으며, 조광조(趙光祖)는 이어서 사도(斯道)를 밝혀 세상을 구하고 사람들을 착하게 한 공이 있고, 이언적(李彦迪)은 도(道)를 본받기를 순독(純篤)하게 하여 기울어지려는 도를 부지(扶持)한 공이 있습니다. 이 세 사람을 중국에서 찾아본다면 허형(許衡)ㆍ설선(薛瑄) 밖에는 짝할 만한 이가 드물며, 우리나라에서는 설총(薛聰)ㆍ최치원(崔致遠)ㆍ안유(安裕) 같은 이도 그 정도에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더구나 이황(李滉)은 동유(東儒)를 집대성하였고 주자의 적통을 이어받아, 벼슬에 나아가서는 임금을 옳은 도리로 인도한 정성이 장소(章疏) 가운데에 간절하게 나타나 있으며, 물러가서는 인재들을 가르치는 뜻이 강론할 때에 간절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리하여 착한 사람은 말씀을 듣고 경모(景慕)하였으며 악한 사람도 멀리서 그 풍모를 우러러보고 스스로 몸을 바로 잡았던 것입니다.
지금의 선비들이 차츰 임금을 높이고 어버이를 사랑하며 예의와 염치가 있는 것은 모두 그의 덕(德)에 훈도(薰陶)되어 흥기한 것입니다. 다만 국가에서 생시(生時)에 능히 대용(大用)하지 못하였으므로 식자(識者)들이 그 태평한 때를 보지 못한 것을 탄식하였는데, 사후(死後)에도 기꺼이 숭장(崇獎)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질투하고 방탄(放誕)한 무리들이 방관하며 몰래 기뻐할 뿐만 아니라, 앞서 분발하던 사람들도 모두 마음이 저상(沮喪)되었습니다.
심지어는 그 문하를 거친 사람들도 명예와 이익에 빠져 버린 사람이 있으니, 그 문에 이르지 못한 사람이야 장차 무엇에 의거하여 선(善)을 행하겠습니까? 아! 따르고 따르지 않는 것이 크게 관계되지 않는 듯하오나 사습의 옳고 그름이 여기에서 판가름 납니다. 전하께서는 중대하고 난처한 일이라 해서 이것을 따르지 않으시겠습니까?
무릇 후창(后蒼) 같은 이들은 비록 전대에는 종사되지 않았지만, 세종 황제가 밝게 그 어짊을 알아보았으므로 종사하는 데 의혹됨이 없었고, 공백요(公伯寮) 같은 이들은 비록 전대에는 종사되었지만, 세종 황제가 그 어질지 못함을 알았으므로 출향(黜享)하는 데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임방(林放) 같은 이들은 모두 취할 만한 장점이 하나는 있으니 각각 그 고향에 제사 지내게 하여 그 착한 것이 민몰되지 않게 하였고, 기타 근세의 제현인 장무(章懋), 오여필(吳與弼), 진헌장(陳獻章), 호거인(胡居仁), 진진성(陳眞晟), 채청(蔡淸) 같은 이는 모두 사문(斯文)에 공이 있었으므로 황상께서 각각 그 고향에서 제사 지내게 하였고, 선조(先朝)에서 미정(未定)한 일이라 하여 꺼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요동의 성중(城中)에서도 관영(管寧), 왕렬(王烈), 이민(李敏), 장승(張升), 호심(胡深), 하흠(賀欽) 같은 이에게 서원(書院)에 사당을 짓게 하여 사액(賜額)과 함께 서책을 내려 주지 않음이 없습니다. 요컨대 숭장(崇獎)이란 오직 그 사람의 학문이 높고 행실이 뛰어나 후학에게 널리 장려될 수 있는 사람에게만 있을 뿐인 것입니다. 예나 지금에 구애되지 않는 것이 이와 같은데, 더구나 김굉필 등 네 분의 군자(君子)를 마땅히 종사해야 한다는 논의에 대해서는 조정에서도 이견이 없고 선비들도 이론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를 미루시는 것은 그들이 어질지 못하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입니까?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속히 사현(四賢)을 포장(褒獎)하시고 종사에 배열하시어 그분들을 높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분들의 말씀을 반드시 쓰되, 일찍이 흉금을 털어놓고 말씀드린 것은 모두 취하여 날마다 앞에 놓고 성치(聖治)에 도움이 되게 하시기를, 사현이 면류관 앞에서 친달(親達)하는 것처럼 하소서. 그리고 그 나머지도 추장(推獎)하시어 팔방의 선비들로 하여금 공경하여 표본으로 삼을 바를 알게 하면, 포숭(褒崇)과 향용(嚮用 성심으로 임용함) 두 가지 의(義)가 온전하게 되어, 문왕(文王)을 기다려서 일어날 자들이 울연히 범민(凡民)에게서 일어날 것입니다.
[주-D001] 주척(周尺) : 1자가 곡척(曲尺)의 6치 6푼에 해당하는 자이다.[주-D002] 가신(家臣)의 …… 바꾸었다 : 증자(曾子)가 장차 임종하려 할 때 그가 깔고 있는 대자리가 대부(大夫)의 쓰는 물건이어서 곱고 화려하므로, 자신의 신분에 맞지 않는 물건을 쓰게 한 가신(家臣)들을 꾸짖고 이내 그것을 바꾸게 한[易簀] 뒤 곧 임종하였다. 《禮記 檀弓》[주-D003] 노 정공(魯定公) …… 했지만 : 노 정공과 제 경공(齊景公)이 협곡(夾谷)에서 회동(會同)하였을 때, 내이(萊夷)가 오랑캐의 풍악을 울리므로, 정공(定公)을 보필하고 있던 공자가 이에 대해 항의함으로써 노공의 위신을 찾고, 또 경공에게 빼앗겼던 땅들도 되찾게 되었다. 《史記 卷47 孔子世家》[주-D004] 여악(女樂)이 마음을 좀먹는다 : 공자가 노(魯) 나라의 사구(司寇)로서 정공(定公)을 보필하고 있을 때, 제(齊) 나라에서 여악(女樂)을 보내매, 계환자(季桓子)가 이를 받아 3일씩이나 즐기는 등 정사를 게을리하므로 공자가 실망하여 노 나라를 떠났다. 《論語 微子》[주-D005] 임금 …… 않다 : 노 정공이 공자에게 “나라를 일으킬 수 있는 비결을 한마디로 한다면 어떤 말이 있겠느냐?” 하니, 공자가, “만약 임금 노릇 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안다면 한마디로 나라를 일으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論語 子路》[주-D006] 공자가 …… 넘어간 것 : 제(齊) 나라에서 도(道)가 행해지지 않으므로 공자가 제 나라를 떠날 때, 밥을 지으려고 물에 담궈 놓은 쌀[接淅]을 건져 가지고 급히 떠난 일이 있는데, 여기서는 노(魯) 나라의 경우로 쓴 것이다. 《孟子 萬章下》[주-D007] 제 선왕(齊宣王)은 …… 하였으나 : 제 선왕이 맹자(孟子)에게 “나 같은 사람도 보민(保民)을 할 수가 있겠느냐?”고 물었을 때 맹자가, 왕이 죽으러 가는 소를 양으로 바꾸게 하라고 한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이러한 마음이 있는 이상 족히 왕도를 펼 만하겠습니다.” 하였다. 《孟子 梁惠王》[주-D008] 후창은 …… 전해졌고 : 《대대례(大戴禮)》와 《소대례(小戴禮)》는 모두 한(漢) 나라 때 예학(禮學)의 대가였던 후창(后蒼)에게서 예를 배운 대덕(戴德), 대성(戴聖)이 지은 예학서(禮學書)이다.[주-D009] 강서(江西) 사람들 : 강서성(江西省) 출신인 육구연을 비롯한 양명학파(陽明學派)에 속해 있던 인물들을 말한다. 상산(象山)은 육구연의 호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박성봉 (역) | 1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