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이전, 유럽 강대국은 식민지 건설에 막대한 자본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중, 영국은 ''징고이즘''을 내세워 당시 발전하고 있던 산업혁명에 힘입어, 경제적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식민지 평챙정책을 펼쳤다. 그중 하나가 아프리카 종단 정책이다. (일명, 3C정책이라 한다.) 이에 반해, 프랑스는 아프리카횡단정책을 하여 모로코를 점령하는데서 식민지졍책을 시작하였고, 러시아는 2P정책으로 발칸을 노려 남하정책을 추진하였다. 당시 영국과 경쟁적 관계에 있던 독일은 비스마르크 퇴임 후, 빌헬름 2세의 지시로 3B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식민지 정책에 강대국간의 심각한 대립으로 이루어진 것이 삼국동맹과 삼국협상이다. 그리고 이들의 대립은 제국주의 시대의 비극,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유럽 강대국의 대립과 삼국 동맹, 삼국협상의 과정
러·일전쟁 후의 세계정세의 새로운 전개는 이미 전쟁 중인 1904년, 영국·프랑스협상 성립에 의하여 시작되고 있었다. 이 2대 식민제국은 세계 각지에서의 양국의 대립을 해소하고, 특히 이집트와 모로코를 서로 상대국의 보호령으로 인정하여 협정을 맺었다. 이어 영국과 러시아도 러·일전쟁 후 중국에서의 대립이 완화됨으로써 접근하기 시작하여, 독일의 근동진출과 이란에서의 입헌혁명이 직접적 계기가 되어, 양국은 이란에서 서로의 세력권을 확인하는 등, 1907년 영국-러시아협상을 성립시켰다. 이렇게 성립된 3국간의 협상체제는 이들 3국이 세계 가운데서의 식민지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힘의 과시인 동시에,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 3국동맹에 대항하여 유럽의 세력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외교관계였다.
한편, 3국동맹 내에서는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와의 대립에서 프랑스에게 접근하기 시작하였으므로 독일은 점차 국제적 고립을 더하여 갔다. 3국협상과 3국동맹의 대립의 주축은 영국과 독일로서 그것은 세계시장에서 이미 우월한 지위를 차지한 식민제국과 그 경쟁에 뒤늦게 참가한 신흥 제국주의국간의 대립을 나타내고 있었다. 양국 대립의 근원은 18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80년대에 시작된 영국의 3C정책(Calcutta·Cairo·Capetown을 잇는 지배권)과 독일의 3B정책(Berlin·Byzantium·Baghdad를 잇는 지배권) 간의 암투는 90년대에 들어오면서 독일의 공업과 무역이 영국의 구세력을 위협하자 더욱 첨예화하였으며, 양국은 세계시장에서 격렬한 경제 경쟁을 전개하였다. 뿐만 아니라, 1898년에 독일이 대함대 건설에 나서면서 건함(建艦) 경쟁이 일어났으며 이로써 양국간 경쟁은 더욱 격화하였다. 이와 같은 정세하에서 독일은 프랑스의 모로코 보호령화에 반대하여 1905년 3월, 제1차 모로코사건을 야기시켰으나, 오히려 국제적으로 고립하였고, 영·프의 협력관계는 더욱 강화되었다. 또한 11년 7월의 제2차 모로코사건에서도 영국은 프랑스를 지지하여 전쟁도 불사한다는 강경 태도를 취하였으므로 독일의 외교공세는 두 번 다 실패하였다. 한편 1903년 이래, 독일은 투르크에서 바그다드 철도의 건설을 추진하였고, 또 투르크 육군의 근대화를 지도하여 이 나라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여 갔다. 그리하여 국제적으로 고립함에 따라 독일의 대외 진출의 중점은 근동으로 옮겨졌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의 독일의 3B정책은 지중해로의 진출구인 다르다넬스·보스포루스 해협의 지배를 노리는 러시아의 진출과 함께 대영제국의 생명선을 잇는 3C정책에 대한 위협으로 느낀 영국과의 마찰을 증대시켰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전의 국제 대립에서 이른바 주역을 담당하였던 영국과 독일은 서로 예리하게 대립하면서도, 그 행동은 신중하였다. 양국은 1908~12년 해군 군축 교섭을 계속하였고(불성립), 또 근동에서도 오랜 교섭 끝에 타협에 도달하였다. 결국 대전은 양 대국의 직접적인 충돌에서가 아니라, 협상 대(對) 동맹이라는 두 개의 블록 사이의 대립, 특히 양 진영 내에서의 조역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발칸 반도에서의 대립을 직접적 계기로 하여 발발하였다.
그밖의 보충자료
3B정책 ( 3―B policy)
3B란 베를린·비잔티움·바그다드의 머리글자를 딴 것으로, 독일본토―동남유럽―발칸―소아시아―페르시아만을 연결하는 독일의 근동 진출책을 표시한다. 독일제국은 비스마르크 사임 후 1890년대 후반부터는 오스만제국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독일자본을 중심으로 하는 바그다드철도를 페르시아만까지 부설하는 권리와 오스만제국 육군을 지도하는 권리 등을 얻어 강력하게 육로를 통해 직접 근동으로 진출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 3B정책은 발칸으로 향해 남하정책을 진척시키고 있었던 러시아, 투르크 보전정책을 유지하고 있었던 영국, 근동의 기득권익을 고집하는 프랑스에게 위협을 주어 열강의 제국주의 경쟁을 격화시킴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의 중요한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3C정책 [三-政策, 3C Policy]
남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 이집트의 카이로, 인도의 캘커타를 연결하는 정책으로, 세 지역의 머리글자가 모두 C이므로 이렇게 부른다. 영국은 다른 제국주의 열강보다 먼저 세계 각지에 식민지를 획득하였으며, 1858년 인도를 직접 지배하게 되었다. 인도에 이르는 안전교통로 확보를 위해, 1875년 수에즈운하의 주(株)를 매수하여 이집트의 지배권을 강화하고,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아프리카를 종단(縱斷)하여 남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에 이르는 지역 지배를 강화하려 하였다.
아프리카 종단정책은 프랑스의 아프리카 횡단(橫斷)정책과 충돌하여, 1898년 파쇼다사건을 야기시켰다. 또한 카이로에서 인도의 캘커타를 연결하려는 정책은 처음에 러시아의 남하정책과 충돌하였으며, 뒤이어 근동 진출을 꾀한 독일의 3B정책과 충돌, 제1차 세계대전의 근본 원인이 되었다.
삼국협상 (영-프-러)
삼국협상이라는 조약이 체결된 것이 아니라, 동맹이나 협상을 통하여 맺어진 3국의 협력체제를 가리킨다. 독일제국은 성립 이래 비스마르크의 교묘한 외교 수완으로 프랑스를 고립시키고, 러시아를 자기 진영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1888년 빌헬름 2세가 즉위하자 적극적인 제국주의 세계정책을 추진하려 하였고, 1890년 비스마르크를 실각시켰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그의 제국주의적 침략은 유럽·아프리카의 각지에서 영국·프랑스·러시아의 제국주의 제국과 대립·충돌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비스마르크 시대에는 교묘히 분리되었던 영국·프랑스·러시아 3국이 독일에 대하여 강한 경계심을 품고 서로 가까워지게 되었다. 독일을 고립화시키기 위하여 1891년 러·프 동맹, 1904년 영·프 협상, 1907년 영·러협상이 각각 체결되어 외교적·군사적 동맹체제를 정비하였다.
3국협상과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로 구성된 삼국동맹의 제국주의 국가끼리 대립이 시작되어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으나, 전쟁 중인 1917년 러시아의 혁명발발로 러시아가 탈퇴하자, 3국협상체제는 붕괴하였다.
삼국동맹(독-오-이)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1879년 2국동맹을 체결하였는데, 1881년 프랑스가 튀니지를 점령하여 보호국화하자, 일찍부터 곳에 야심을 품고 있던 이탈리아가 프랑스의 튀니지 점령을 인정하지 않고 1882년 5월 20일, 5년 기한으로 독일·오스트리아와 함께 이 동맹을 체결하였다.
내용은 주로 가맹국이 다른 열강, 특히 프랑스로부터 공격을 받을 경우, 상호 군사원조를 한다는 것으로 1887년, 1891년, 1896년, 1902년, 1907년, 1912년 6차에 걸쳐 갱신되었는데, 1890년 독일의 비스마르크가 은퇴하기 전에는 비스마르크 안전보장체제의 일환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20세기 초에 들어서면서, 3국협상과의 대립이 격화함에 따라 지중해에서 영국과 대항할 힘이 없으며 오스트리아와는 미수복지 문제로 대립했던 관계로, 이탈리아는 점차 소극적이 되어, 이탈리아-터키전쟁, 발칸전쟁 이래 영국·프랑스에 접근하고 프랑스와는 비밀동맹을 체결하기도 했다.
그 때문에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이탈리아는 동맹국 원조의무는 방어전쟁에만 국한된다는 구실로 중립을 선언하고 결국 1915년 5월 3국동맹의 폐기를 선언한 뒤, 협상측에 가담하여 참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