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코드라마
전미란
머리가 아닌 행위로 자신을 만나는 사이코드라마(psychodrama)의 막이 오른다. 모인 사람들 중에서 자신과 이미지가 비슷한 사람을 찾아 짝을 짓고 동그란 원을 만들어 마주 선다. 한사람은 거울이라는 사물이 되어 주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사람거울’에 자기를 비추기 시작한다.
그녀는 생판 모르는 ‘사람거울’ 앞에서 주뼛거리며 어색하게 손 빗질로 머리를 만진다. 이어서 눈 꼬리를 치켜 올려보기도 하고, 손가락으로 콧구멍을 후벼 파는 짓도 해본다. 계속해서 옆에 사람이 다음 거울이 되어 마주 선다. 또 다른 거울, 다음, 다음, 거울은 계속해서 불어난다. 짝이 된 ‘사람거울’은 상대가 하는 대로 오롯이 비춰내느라 정신이 없다. ‘사람거울’마다 그녀를 다르게 투영시키고 통과해 간다.
그녀는 길을 가면서 외부 사물에 투영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걷는 질긴 습관이 있다. 상가 골목길, 유리창에 비치는 희붐한 실루엣을 흘겨보며 걷는다. 무채색 영사 필름 같은 유리창에 흐리게 또는 진하게 휙휙 지나가는 모습이 마치 유령이 출몰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녀는 머릿속 셔터로 찰칵찰칵 순간을 찍어낸다. 그리고는 잘 못 찍힌 사진을 골라내면서 표정을 부드럽게 고치고, 허리를 곧추 세워 보기도 하고, 머리를 쓰다듬는 듯한 헛 시늉까지 연출한다. 스스로를 계속 인화해 내며 걷는다.
상점들의 통유리담장은 거대한 수족관이며 그녀는 그 속에서 유영하는 물고기다. 자신을 검열 할 수밖에 없음으로 수족관에 갇힌다. 몸을 물에 실어야 헤엄을 칠 수 있듯이 열길 물속 같은 사람들의 시선에다 전신을 띄운다. 선명하기 보다는 아련하게 비쳐 보이는 자신의 모습을 착각하고 반하기도 한다. 그럴 때면 제 살 속에서 끊임없이 찔러대는 날카로운 가시를 다소곳이 숨기고 지느러미를 유유히 팔랑거린다. 그러다가도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 때면 무성한 사람수풀에 몸을 숨기며 허우적거리기도 한다.
나이 먹을수록 거울 속에 그녀는 끝없이 불어났다. 처음에는 거울 밖에 있는 그녀가 거울 속에 한명인 줄 알았다. 그러나 두 명에서 세 명, 빠른 속도로 계속 불어났다. 유리벽 속에 살고 있는 그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불편하다. 그녀는 겉으로 침묵하면서 걸어가지만 속으로 낯이 익은 그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그래서 더 이상 나타나지도 따라오지도 말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그들은 배반을 하고 제 멋대로 생겨났다.
유리벽이나 ‘사람거울’은 거대한 화면이다. 외출중인 그녀가 주인공인 드라마는 실시간 생방송으로 진행된다. 마지막 장면으로 CCTV가 있는 엘리베이터에 문이 닫히고 피로에 지친 얼굴의 그녀가 현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서면 사이코드라마는 끝이 난다. 그리고 자막이 내려온다.
연출자: 타인의 시선.
등장인물: 자폐적으로 고정배역만 연기하는 그녀1, 그녀2, 그녀3……
가끔 공사 중인 건물 앞에 외부인 출입 금지 나일론 줄이 매어져 있다. 그 안쪽에 쓰인 ‘유리조심’. 투명 해진 사이코드라마 습관이 의식되는 순간, 나는 비로소 유리벽 속에서 걸어 나올 수 있다.
단추
전미란
뻥 뚫린 철로를 따라 한기가 몰려온다. 도시의 겨울은 아무리 두껍게 옷을 입어도 으슬으슬한 기운이 스며든다. 옷을 여미려고 습관적인 손놀림으로 외투 단추를 더듬는다.
“어떡해…”
어디서 떨어져 나간 것일까. 단추가 매달려 있던 빈자리를 더듬는데, 나를 기다리고 있을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다겸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의 초대를 받고 그녀의 집으로 가는 길이다. 지적이고 빈틈없어 보이는 그녀는 피부가 희고 눈동자가 검다. 이름처럼 다 겸한 듯 보이는 그녀의 얼굴은 늘 입안에 사탕을 빨고 있는 듯한 뺨이 인상적이다.
어느 날 그녀가,
“난 수면제를 먹어야 잠이 와요.”
뒤척였던 고통의 밤을 길게 말했다. 나는 수면과다에 시달리고 있었으므로 그녀의 말에 무감각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날들이 질병처럼 길게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무기력증에 빠진 나는 틈만 나면 잠을 잤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눈을 뜨고 있는 그녀와 한낮에도 멍하니 누워있는 나. 어쩌면 같은 시간의 물결 위를 표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사는 동네에는 퓨전요리 집과 카페, 소품가게들이 깔끔하게 줄지어 서있었다. ‘돌아온 싱글’ 영주가 먼저 도착해서 다겸과 함께 마중 나와 있었다. 세 여자는 ‘자아통합’이라는 주제의 세미나에서 처음 만났었다. 강의를 듣고 난 후 집단으로 나눔을 가졌고, 그 때부터 내면의 상처들을 나누어 가지는 사이가 되었다.
초고층 아파트 다겸의 거실은 삼면이 유리로 둘러싸여 있어 투명 돔에 갇힌 기분이 들었다. 소실점이 없는 바깥 풍경 때문인지 바닥없는 허방에 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거실 사물들의 조화를 가늠하고 판단하는 감정관 같은 시선으로 실내를 살폈다. 어쩌면 그녀를 좀 더 깊이 알 수 있는 실마리를 찾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잡동사니가 전혀 없는 이 집은 항상 차가 울 것 같은 빈방처럼 느껴졌다.
잠깐의 탐색이 지나고, 그녀가 단추 떨어진 내 외투를 받아 들더니 드레스 룸으로 간다. 같이 따라 들어간 영주와 나를 향해 그녀는 옷을 걸다 말고
“이거 야하지?”
습자지 같이 찢어질 듯 얇은 란제리를 보여 준다. 들어 비치는 검은 레이스 천에 깔린 붉고 화려한 장미꽃무늬가 저돌적이기까지 하다. 어쩌면 그녀가 은밀하게 피워 올린 열정이 저런 무늬일까. 푸른 이파리 하나 없는 붉은 꽃숭어리들이 뜨겁다. 그 뜨거움에 데일 것 같다는 생각을 잠시 괄호 속에 묶어둔 채,
“…그 정도면 야한건가요?”
되묻는 내 대답은 안착할 곳을 찾지 못하고 부메랑이 되고 만다. 남편의 품을 갈망하는 그녀는 출근하는 남편에게 플라토닉사랑은 언제 끝낼 거냐고 슬쩍 운을 떼어 보기도 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아내의 욕구는 집안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야 고상하고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그녀의 남편. 어둔 밤 잠 못 이루는 꽃으로 깨어있는 그녀는 남편과 채워지지 않는 사랑의 간격으로 괴로워했다.
그녀가 깊은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뜬금없이,
“흙 장미 같아.”
라고 말한다.
“장미요?”
나는 의아하다는 듯이 웃기만 했다.
“꽃잎이 벨벳처럼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검붉은 장미…….”
그러면서 이어지는 말,
“가시를 숨기고 있는…….”
“……”
그녀와 이어지지 않는 대화 사이가 바람처럼 부풀어 오른다. 내가 언제 꽃이었던 적이 있기나 했던가. 스무 살 무렵부터 절대적으로 순결해야 된다는 강박관념에 갇힌 나는 나비 날개처럼 부서지기 쉬운 순결을 꽁꽁 동여매었다. 보수적인 시골마을, 어머니는 마치 정해 놓은 배필이라도 있는 것처럼 행실을 단속했다. 우셋거리가 될까봐 벼락처럼 떨어지던 어머니의 꾸지람. 바람만 스쳐도 몸 물이 돌던 시절을 무사히 건너기 위해 몸에 꼭 지녀야 했던 부적이 순결이었다.
넘치도록 황홀하고 아름다운 장밋빛 세계를 지키는 길은 결국 감당하기 어려운 가시를 품는 일이라는 것을 깊이 새겼다. 자칫하다가는 세상의 인습이라는 날카로운 가시들이 다 내게로 향할 것만 같아 두려움에 떨었다. 안에서는 끈질긴 욕망이 솟구치고 바깥에서는 강한 흡인력이 내게 손을 뻗어 올 때마다 터부시했고, 불순하고 저급한 감정으로 치부했다. 착실히 접힌 꽃잎 속에 숨어 욕구를 눌렀다. 이런저런 금기로 그을린 검붉은 나의 장미는 채 피어나지 못했다.
숨은 가시라는 말이 꽤 부정적으로 들렸지만 내게 꽃이라 이름 붙여준 그녀의 관심이 싫지는 않았다. 하지만 속으로 당신은 아직 나를 표면적으로 파악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 나에 대해서 말해주거나 규정해주면 그 이미지에 꼼짝없이 갇힐 때가 있었고, 설명으로는 불가능한 나는 상대에게 꼼짝없이 그런 사람일 뿐일 때가 많았다.
영주는 석류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알맹이를 상처 나지 않게 빼내느라 애쓰는 모습이 왠지 애잔해 보인다. 이혼의 아픔을 삼켜버린 그녀는 말이 없는 편이다. 그녀는 쉽게 열 수 없는 꽉 다문 자신의 입을 벌려 보려고 애쓰고 있는 듯 보인다. 으깨진 석류의 붉음이 흘러나오자,
“석류물이 손에 묻으면 꼭 핏물 같아.”
손을 씻어가며 속살을 파낸다. 그녀는 자신의 응어리진 욕망의 가슴을 빠개 젖히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오래된 결별의 통증을 파내 버리고 있는 것일까.
“완벽한 남자를 원해요?”
내가 물었다. 그녀는 덧없는 사랑의 이력을 추가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 또다시 결혼하지 않기를 선택하고 있는 그녀. 꿈꾸는 남자는 현실에서 만날 수 없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을 사랑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열매주머니 속에 엉겨있던 알갱이들이 알알이 윤을 내는 개체가 되어 또 다른 모서리를 맞대며 접시에 담겨졌다. 깊고 시린 단맛의 석류알. 선연한 붉은색. 태풍과 천둥, 그리고 땡볕 없이는 저절로 붉어지지도 영글지도 않았으리.
우리들은 붉음 앞에서 그 동안 차마 꺼내지 못했던 욕망을 토해낸다. 결혼과 이혼이라는 삶의 밑그림 위에서 맞서기도 하고 때로는 치이기도 하면서 겪어야 했던 세 여자의 이야기는 끝이 없다. 석류 알맹이처럼 겉으로 보이는 마음들은 서로 비슷하지만 눌린 감정의 모서리는 다르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 다겸의 드레스 룸에서 외투를 받아 걸친다. 눈동자가 빠져나간 퀭한 단추 구멍이 나를 빤히 올려다본다. 지금쯤 길거리 어디에선가 누군가의 발길에 채이고 있을 잃어버린 욕망의 눈빛. 두껍고 꽉 조인 인습이라는 외투에서 얼마나 조바심치다 지쳐 떨어져 나간 것일까.
그 미미한 것의 사라짐. 너무 사소한 것이어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길수록 오히려 마음에 자국으로 남는 까닭은 무엇일까. 작은 고리 속에 끼워진 단추 같은 부속품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들 세 여자의 자화상이기 때문은 아닐까.
마네킹
전미란
거대한 진열장 속으로 권태가 걸어 들어간다. 인공 향과 여러 색조의 조명들이 만들어 내는 분위기는 이부자리를 털고 일어날 때의 무기력한 기분을 일시에 누그러뜨려 준다. 젖과 꿀이 흐르는 현대인의 가나안이라는 백화점, 상품들로 넘쳐나는 풍요로운 계곡에 체포되는 순간 두 눈은 빛을 발하며 분주해 진다. 그리고 북적대는 매대에 달려들어 사람들과의 자리전쟁에 정신이 팔려 나간다.
젖은 장작 타는 듯한 한 낮의 무료함에 쫓겨 어디로든 나서지 않을 수 없을 때 집 근처 백화점만한 곳도 없다. 도시가 내게 준 선물 같은 장소다.
옷 매장에서 눈을 사로잡는 것은 여기 저기 진을 치고 있는 플라스틱 장승들이다. 지긋이 내리 깔은 눈, 만사를 초월 한 듯한 눈빛, 몽롱하게 풀어 헤쳐지고 있는 우수, 그러면서도 누구와도 쉽게 상대하지 않을 것처럼 당당하고, 차갑고, 도도하다. 감각적인 유행과 품격을 한껏 뽐내고 있는 마네킹들이 혀를 날름거리듯 브랜드 상표를 꼬리표로 달고 존재를 외쳐대고 있다.
유행에 쫓겨 바싹 마를 대로 마른 어깨 위로 비스듬히 잘려나간 머리는 어디로 갔을까. 그러니까 생각하는 기능은 굳이 필요 없고 몸뚱이만으로 사람들을 사로잡아야 하는 마네킹 마케팅. 아무 의식도 느낌도 없이 만들어 내는 퍼포먼스가 시선을 사로잡는 까닭은 무엇일까. 동작이 경직된 채 멈춰버린 불안전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그들에게 내가 모르는 제3의 어떤 생명감이 깃들어 있는 것 같다.
화려한 세계에 사는 그들은 ‘눈으로만 만지세요.’ 라고 말하면서 사람들의 감정을 읽어 내고 있다. 에스컬레이터에 실려 층층으로 빙글빙글 돌고 있는 내 마음의 경로를 내시경처럼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계산 빠른 그들은 내 지갑 속 형편을 훤히 들여다보며 손에 넣기 어려운 욕망을 부추겨 언제나 나를 가난뱅이로 만들어 버리고 만다. 그리고 눈으로만 포식한 동물적 충동욕구로 배만 불러오게 하고 다른 감각들은 꽉꽉 틀어막는다. 그들은 싱싱한 시간이 토막 나고 있는 현장에서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으로 기진맥진 해진 나의 얼굴을 지켜보며 즐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
가끔 매장 후미진 구석에 옷이 벗겨지고 팔 다리가 떨어져 나간 채 나뒹굴어져 있는 마네킹들과 맞닥뜨릴 때가 있다. 섬뜩한 괴담의 한 장면 같기도 한, 민망하게 발가벗겨진 몸뚱이들, 노브라의 희멀건 가슴들, 날림으로 만들어져 기관이 없는 인공신체를 보는 순간, 왜 갑자기 그것들이 나 자신과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일까. 유행을 걸쳤던 그들의 최첨단 멋은 어디로 다 날아가고 추악한 몰골들인가. 뭇 여심을 공략했던 화려한 마케팅의 정지된 몸짓들은 모두 허상에 불과 했다고 폭로하듯 옷을 다 벗어버린 나체들의 시위. 우리들은 단지 옷걸이, 행거였을 뿐이라고 아무 장식도 가림도 없이 정직하게 외쳐대고 있는 것 같다.
들어서서 나갈 때 까지 따라다니던 극진한 친절과 기분 좋은 상냥함으로 써먹다 만 것 같은…. 순간 묘한 배신감과 패배감이 든다. 가슴 안쪽이 허해진다. 등을 돌리려는데 도도하고 매력적이던 화신들이 쓰러진 채 뒤채며 특유의 고독한 화법으로 내게 말을 걸어온다.
“가여워 하지 마세요. 우리들은 사실 허깨비들이니까요. 당신은요? 당신은 허깨비가 아니신가요?”
“......”
“쉿!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이곳에 권태라는 생활 쓰레기를 버리러 온 당신의 속내가 드러나면 쫓겨나고 말테니까요.”
남모르는 내적 소란함으로 필요 이상의 감정비용까지 지불하며 바가지를 쓰고 있는 나 자신. 의식의 부재로 서 있거나 나뒹굴고 있는 마네킹들과 무엇이 다른 것일까.
<전미란>
약력
2002 <수필과 비평등단>
창작문예수필 작가회 회원
첫댓글 남다른 작가만의 시선이 느껴지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너무 사소한 것이어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길수록 오히려 마음에 자국으로 남는 까닭은"
중요한 것들을 사소한 것이라고 치부하고 살아온 댓가를 처러야할 때가 있는 것일까요.
제 자신에 대해 생각하게 하네요.
여기 저기 클릭하며 돌아다니다가 수비회원님의 글이 나오기에 스크랩했습니다.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뭇 여심을 공략했던 화려한 마케팅의 정지된 몸짓들은 모두 허상에 불과 했다고 폭로하듯 옷을 다 벗어버린 나체들의 시위' 참으로 정제되고 사유 깊은 표현입니다. 그 곳에 남자 마네킹은 없었나 봅니다 ㅋㅋㅋ
개성있게 확실한 글 쓰는 전미란샘님 글 다시한번 자세히 읽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