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브리스트
‘시베리아’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시베리아 유형’이라는 말도 하나의 관용구로서 우리 입에 익어 있다. 이르쿠츠크는 혁명과 유형의 역사가 깊이 새겨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1825년 12월 러시아의 젊은 귀족 장교들은 황제에 대항하여 혁명을 시도한다. 나폴레옹 전쟁으로 서 유럽의 자유로운 기운을 맛본 그들은 조국의 암담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봉기한 것이다. 이들을 데카브리스트라 부른다. ‘데카브리’는 러시아어로 12월이라는 뜻. 그러니 데카브리스트는 ‘12월 당원’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혁명은 성공하지 못한다. 핵심들은 사형에 처해지고 1백20여명의 젊은 귀족들은 시베리아로 유형을 오게 된다. 그들은 이르쿠츠크에서도 동쪽으로 수백 킬로 떨어진 치타에서 강제노역을 하게 된다. 20킬로가 넘는 쇳덩이가 달린 발목 족쇄를 차고....
감동적인 것은 유형수들의 부인들 이야기다. 11명의 데카브리스트 부인들은 귀족의 모든 특권을 포기하고 사랑하는 남편을 찾아 시베리아로 온다. 혹독한 추위로 오는 길에 죽은 사람도 있다고 한다. 트루베츠코이 공의 부인은 유형지에 도착해 눈물을 흘리며 남편의 발목에 채워진 족쇄에 입을 맞추었다고 한다. 감동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10년간의 유형생활을 마친 그들은 이곳 이르쿠츠크에 살도록 허락을 받는다. 트루베츠코이도 여기에 집을 짓고 살게 된다. 이곳에서 살면서 그들은 음악회를 개최하고, 연극 공연을 하며, 문학적인 만남을 갖는다. 이런 테카브리스트들의 활동이 이 도시를 문화향기 넘치는 도시로 만들었고 ‘시베리아의 파리’라는 별칭을 갖게 한 것이다.
오후에 트루베츠코이의 집을 방문했다. 이 집은 현재 기념관으로 꾸며져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아파트 생활을 하는 현대 한국 사람의 눈으로 보면 집은 대 저택으로 보인다. 반 지하를 포함해 3층이나 되고 건물의 면적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루베츠코이가 페테르부르크에서 살던 집의 사진을 보면 이 집은 오두막 수준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귀족으로 그가 살던 집은 ‘궁전’이었다.
- 데카브리스트 기념관으로 공개되고 있는 트루베츠코이 공의 집. 전통적인 목조건물이다.
외투를 맡기고 1층 현관을 들어서니 집주인을 그린 큰 유화가 시선을 끈다. 트르베츠코이는 70년을 살았다. 그림 속의 그는 상당히 노쇠한 모습이었으나 눈빛만은 형형해 젊은 시절 혁명을 꿈꾸던 사나이의 면모를 잃지 않고 있다.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이긴 하나 반 지하로 되어 있어 햇살이 들어온다. 그 공간은 하인들을 위한 공간이었다고 한다. 죄수였지만 그는 역시 귀족 출신이었다. 구석에 족쇄와 삽이 놓여 있다. 저 족쇄를 발목에 차고 저 삽을 들고 10년을 하루같이 강제노역을 했을 것이다.
벽면에는 기록화가 수십 장 전시되고 있었다. 나이 많은 아주머니 직원의 설명이 따른다.
“이 그림들은 데카브리스트들이 치타에서 강제노역 하던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데카브리스트 중에 솜씨 좋은 어떤 사람이 그린 것이지요. 그런데 이 그림들은 후에 사정이 있어 프랑스의 어떤 개인이 소장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기념관에서는 이 그림들의 복사 본이라도 전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마침내 작년 12월 이 그림들을 복사해 와서 이제 이렇게 전시하게 되었습니다. 그 작업이 10년이 걸렸습니다.”
대단한 정성이다. 이 조그만 기념관에서 그런 노력을 10년간에 걸쳐 기울이다니. 러시아의 저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돈이나 무기보다 문화가 강하고 깊어야 선진국인 것이다.
설명을 듣고 다시 기록화를 찬찬히 뜯어봤다. 밀짚모자 같은 모자를 쓰고 삽과 곡괭이 같은 장비를 어깨에 맨 채 막사 같은 숙소로 돌아가는 데카브리스트들의 모습이 생생하다. 프랑스라고 하는 나라는 뭐든 한번 수중에 넣으면 잘 내놓지 않는다. 뺏기지 않도록 조심할 일이다.
지하실 창문 곁에 조그만 푸쉬킨의 흉상이 저녁 햇살을 받고 있었다. 푸쉬킨은 그 자신이 거사에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데카브리스트들과 뜻을 같이하고 있었다. 그는 데카브리스트와 부인들을 위해 시(詩)를 남기고 있다.
....쇠사슬은 끊어지리라. 감옥도 신념 앞에서 열리고 자유가 네 앞에 비칠 것이니 형제들은 너에게 칼을 주리라.
1층 거실에는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고 피아노 위에는 바하의 흉상이 있다. 이 공간이 바로 이루크츠크의 문화가 꽃피던 곳이었을 것이다. 다른 방에는 벽에 가족들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두 딸의 사진도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두 딸의 죽은 연도가 한 사람은 1918년, 다른 한 사람은 1922년으로 되어 있었다. 그들은 볼셰비키 공산혁명을 보고 죽은 것이다. 아버지가 백년 전에 시도했던 그 혁명을....
즈나멘스키 수도원
박 교수가 이끄는 대로 찾아간 곳은 즈나멘스키 수도원이었다. 수도원은 본래 수녀원이었는데 지금은 일반 교회의 기능을 하고 있다. 수도원 뜰에는 트루베츠코이 부인과 그 자식들의 무덤이 있었는데 무덤 위에는 장미 한 송이와 오렌지가 하나가 놓여 있다. 도대체 망자들과 어떤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꽃을 바칠까.
- 녹색과 흰색의 조화가 아름다운 즈나멘스키 수도원
성호를 그으며 수도원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따라 나도 들어갔다. 신자들이 의자도 없는 홀에 선 채 예배를 드리고 있다. 아름다운 남녀 합창이 들리고 집전 신부의 부드러운 음성이 홀을 가득 메우고 있다. 홀의 모든 벽면은 성화로 장식되어 있다.
러시아는 10세기에 그리스정교를 받아들였다. 그 당시의 러시아 땅은 키에프 공국이 주인이었다. 그러니 정교는 1천년 이상 동안 러시아 사람들의 종교로 이어져 온 것이다. 정교를 받아들이고 민족적인 색채가 가미돼 후엔 러시아정교로 불렸다. 그리스정교와 마찬가지로 성호를 그을 때는 오른 손을 위에서 아래로 그은 다음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으로 긋는다. 카톨릭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긋는다.
수도원을 나서면서 박 교수가 물었다.
“러시아가 왜 하필 기독교를 받아들였는지 아십니까?”
내가 알 리 없다. 러시아 역사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것이 없는 것이다. 박 교수가 자답한다.
“이슬람교는 술을 못 마시지 않습니까? 유대교는 2천년 간 방랑한 민족의 종교이고... ”
“..................”
- 키로프 광장의 수도원 첨탑.양파 모양의 첨탑은 황금으로 도금되어 있다.
보드카 좋아하는 박 교수의 농담 같은 해석이지만 맞는 답인지도 모른다. 사막에서는 술을 마시면 힘들지만 러시아에서는 술을 마시지 않으면 힘드니까.
휴일 저녁의 앙가라 강변
해가 많이 기울었다. ‘한샘’ 을 타고 마지막 방문지인 키로프 광장으로 갔다.
광장 한 복판에는 ‘영원의 불’이 타고 있다. 불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시베리아 출신으로 나라를 위해 싸우다 숨진 용사들을 기리는 기념물이다. 허리정도 높이의 널따란 정 사각형 대리석 판 중앙에 큰 별이 돋을 새김으로 새겨져 있고 그 별의 가운데에 나 있는 구멍에서 불길이 솟고 있다. 불꽃은 너울너울 타는 것이 아니라 버너 불꽃처럼 세차게 위로 솟구쳤다.
- '영원의 불'이 힘차게 솟구치고 있다. 젊은 학생들이 묵념을 하고 있다.
이 키로프 광장은 이르쿠츠크에서 가장 볼 것이 집중되어 있고 시민들이 많이 모이는 공원이다. 바로 옆으로는 앙가라 강이 흐르는 곳이다. 사람들의 발길이 잦은 그런 명당 한 가운데에 전몰병사에게 바치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처럼 외진 곳에 대규모의 국립묘지를 마련해 시민들의 발길이 닿기 힘들게 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박 교수한테 질문을 했다.
“저 불이 ‘영원의 불’이라고 불리고 있는데 처음 불을 붙이고 난 뒤로 정말 한번도 안 꺼졌을까요? 그리고 앞으로도 안 꺼질까요?”
“사람의 시체를 80년 동안 안 썩게 보관하는 기술을 가진 나라입니다.”
난 질문을 하면서도 이런 멍청한 질문을 왜 하고 있을까, 라고 생각했는데 박 교수는 그렇게 즉답을 내 놓았다. 너무 신속하고 확신에 찬 답변에 난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굳이 따질 일은 아니지만 그 두 가지 기술에 무슨 직접적인 상관이 있을까? 물론 러시아의 시체보존 기술이 대단하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다. 레닌도 아직 멀쩡하다. 그 기술 덕분에 모택동과 김일성도 아직 썩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영원의 불은 그것과는 좀 다른 종류의 기술이 아닐까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기계적인 설계, 부품의 내구성 등이 관건이 아닐까? 어쨌든 이 불은 사람들이 보는 중에는 절대로 꺼져서는 안되기 때문에 간단해 보이기는 하지만 상당히 고난도의 기술을 감추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좀 쓸데없는 생각을 해봤다...
강가로 나갔다. 시민들이 여유롭게 산책을 하면서 휴일의 오후를 즐기고 있다. 강변에서는 한 쌍의 연인이 지는 해를 배경으로 정열적인 키스를 나누고 있다. 고만 고만한 청소년 녀석들 넷이 광장에서 강가 쪽으로 걸어왔다.
그런데 그 녀석들 손에는 어김없이 맥주가 한 병씩 들려 있다. 이 추운 날에 어린 청소년들이 술병을 들고 공원을 어슬렁거리고 있는 것이다. 다 좋은데 그 술병이 좋은 정경을 망쳤다. 하기야 러시아는 이슬람 국가가 아니니까... 이렇게 생각하면서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다.
- 앙가라 강변의 청소년들. 손에는 어김없이 맥주병이 들려있다.
앙가라 강이 세차게 흐르고 있다. 흐름이 빨라서 아무리 추워도 얼지 않는다고 한다. 바이칼 호수에서 흘러나온 강이다. 드디어 내일이면 바이칼에 간다. 먼길을 돌아 여기까지 왔다. 기다려라 시베리아의 초승달이여! (13회에 계속)
시베리아의 초승달 바이칼 (13)
이로써 나의 이르쿠츠크 시가지 관람은 끝났다. 애초에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느낌은 매우 좋다. 아직 때묻지 않은 조용한 도시, 교육과 문화의 도시, 앙가라 강이 있는 도시, 목조주택이 아름다운 도시다. 모든 것이 다 좋다. 그러나 오전부터 시가지를 다니면서 내가 보고 감탄한 것은 다른 것이다. 바로 오래 된 목조주택의 창틀 장식이다.
시가지 곳곳에는 거의 1백년이 다 되어 가는 목조주택들이 있다. 한 채만 따로 있는 것도 있고 여러 채가 연이어 있는 것들도 있다. 그러나 그 많은 집들이 똑 같은 모양을 한 것은 단 하나도 없다. 비슷한 것도 없어 보인다.
이 지역의 주택은 그 환경 상 목조주택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추운 지방에서 나무로 집을 지으면 에스키모의 얼음집과 같은 투박한 모양의 집이 만들어질 법도 한데 어쩌면 저렇게도 여유를 부리고 멋을 부린 집을 지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 멋 내기는 처마와 창틀 장식에 집중되어 있다.
- 내가 매혹당한 이르쿠츠크 목조주택의 창틀. 낡았지만 독특하고 격조있다.
- 이 사진은 국립민속박물관에 근무하는 김미겸씨가 2002년 9월 이르쿠츠크에 갔다가 찍은 사진이다. 김미겸씨는 2003년 3월 12일자 중앙일보에 난 나의 사진과 기사를 보고 이 사진을 메일로 보내주었다. 이처럼 이르쿠츠크의 목조주택은 여행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사진의 창틀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소박한 멋이 일품이다.
처마는 중세 귀족들의 소매장식처럼 화려하다. 나무를 다루는 솜씨가 정교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그 아래 창틀에 모든 여유와 치장이 집중되어 있다. 창틀은 집의 크기에 따라 적게는 두 개에서 많게는 대여섯 개까지 나 있는데 그 테두리가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창틀의 위 부분은 왕관을 씌운 듯 특히 화려한데 집집마다 그 모양과 크기가 달라 개성이 있다. 회오리 모양, 꽃 모양, 심지어는 우리 귀면와(鬼面瓦)같은 얼굴 모양, 물고기 문양 등 다양하기가 끝이 없다.
색상도 특이하다. 짙고 어두운 색조의 벽면에 액센트를 주듯 밝은 색을 사용했는데 시베리아의 눈과 파란 하늘을 상징하는 흰색과 하늘색이 주조를 이룬다. 밝은 녹색도 많이 썼다.
멀리서 보면 거리에 면해있는 주택은 같은 액자가 연이어 걸려있는 미술관의 한 벽면 같은데 이르쿠츠크 거리는 이렇게 수천 점의 그림이 걸려 있는 야외미술관 같았다.
- 이르쿠츠크 시내에서 만난 레닌 상. 꽃을 머리에 쓰고 있고 주위는 낙서로 어지럽다.
바이칼 호수
앙가라 강의 해돋이
아침 일찍 일어났다. 오늘은 바이칼에 가는 날이다. 그리고 여행의 실질적인 마지막 날이기도 하다. 오늘밤까지 이곳에서 머물다 새벽 3시 비행기로 블라디보스톡으로 떠나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8시. 일행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옷을 챙겨 입고 카메라를 들고 숙소 밖으로 나왔다. 숙소 바로 곁으로는 앙가라 강이 흐르고 있다. 바이칼에서는 볼 수 없는 일출을 이곳에서라도 보고 싶었다. 통나무집에서 강까지는 1백 미터 남짓. 길은 아름다운 자작나무 숲 사이로 나 있다. 주위는 벌써 많이 밝아 졌지만 해가 뜨려면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다. 주황색 새벽달이 자작나무 숲 사이로 서서히 지고 있다.
강은 두꺼운 솜이불 같은 눈에 덮여 있다. 이쪽 강변은 날씬하고 순결한 자작나무 숲이 장관을 이루고 있고 맞은 편 강변은 침엽수의 바다. 그 침엽수와 하늘이 맞붙은 먼 쪽 하늘이 약간 붉은 기운을 띠고 있다. 멋진 일출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을 헤치고 자작나무 숲으로 들어갔다. 나무의 피부를 맨손으로 가만히 쓸어본다. 하얀 가루가 손바닥에 묻어 난다. 여인의 화장한 얼굴을 쓰다듬는 것 같다. 자작나무는 정말 특이한 느낌을 주는 나무다.
사실 따져보면 난 이 자작나무를 처음 보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왜 이다지도 친밀한 느낌이 드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나의 의식 속에도 그 옛날 조상들이 자작나무의 껍질을 말아 태우면서 혼례를 올리던 잠재 기억이 흐르고 있는 것일까.
- 자작나무 숲 속에서 하늘을 올려다 본 모습이 이렇게 황홀했다.
- 앙가라 강변의 자작나무. 희고 날씬한 몸매가 아름답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날씬한 자작나무의 몸뚱이가 나의 시선을 따라 파란 하늘을 향하고 있다. 아! 나는 정말 시베리아에 와 있구나. 자작나무 숲에 들어와 있구나. 아무도 없는 이 새벽에, 혼자서......
절실하고 행복한 느낌에 가슴이 벅찼다.
하늘이 점점 붉어지고 있다. 이제 곧 해가 뜰 것이다. 기대와 긴장으로 가슴이 벅차다. 그렇지만 기온은 영하 20도는 되는 것 같다. 거의 한시간 동안 눈밭을 헤맸더니 발이 시려오고 손가락은 끊어질듯 시리다. 카메라도 작동이 잘 안되기 시작한다. 렌즈가 돌아가지를 않는 것이다.
드디어 강 맞은 편 침엽수 위로 붉은 해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아침 첫 햇살이 강렬하게 눈을 찌른다. 선홍(鮮紅)으로 붉은 빛, 맑은 기운이 강을 뒤덮은 눈을 황금빛으로 물들인다. 자작나무도 일제히 몸의 색깔을 바꾸기 시작한다. 순결한 흰빛은 아침 햇살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난다. 세상이 모두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 아침 햇살이 앙가라 강변의 눈밭을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아! 그곳에는 또 내가 모르던 신비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다. 자작나무의 여린 가지 끝마다 맺혀 있던 얼음 방울들이 햇살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인다. 수많은 보석들이 잉크 빛 하늘에서 가늘게 떨리고 있다. 신라 왕관의 자작나무 이파리 장식처럼....
해는 이내 높이 떠올랐다. 극적인 순간의 팽팽했던 긴장감은 사라지고 주변은 환한 햇살로 가득 찼다. 내가 언제 혼자서 아침 해를 맞이해 본 적이 있던가. 사십 년이 넘는 세월동안 처음이다. 충만한 기쁨을 안고 숙소로 돌아왔다. 바이칼 여행은 이렇게 멋진 일출로 시작되었다.
호수로 가는 길
아무리 좋은 곳이라 해도 그곳에 이르는 길이 아름답지 못하다면 의미가 반감된다. 가는 길에서 마음의 준비를 해야하기 때문이다. 부안 내소사를 가 본 적이 있다. 그 절은 6백 미터에 달하는 아름드리 전나무 길을 걸어 들어가야 비로소 일주문이 나온다. 주차장에 내려서 사하촌(寺下村)을 걷는 동안에도 시끄럽던 탐방객들이 이 전나무 길을 백 미터만 걸어 들어가면 이내 조용해진다. 장엄하고 청정한 숲이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오대산 월정사에 들어가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일주문을 지나 전나무 길을 한참 걸어서 들어가는 길이 있고 새로 난 포장 도로를 따라 차를 몰고 가서 주차장에 내린 다음 다리 하나를 건너 바로 절에 들어가는 길이 있다. 어느 길이 좋은 지는 설명할 필요가 없다.
바이칼 가는 길은 아름답다. 침엽수와 자작나무 숲 사이로 난 길은 정결하다. 전봇대도, 고압선 철탑도 없고 광고판도 없다. 원시림 속에 곧은 길이 깨끗하게 나 있을 뿐이다. 눈은 길 양쪽으로 말끔하게 치워져 있고 오가는 차도 거의 없다. 성소(聖所)에 이르는 길 답다. 차가 달리는 내내 가장 앞자리에 앉아 숲이 눈앞에서 갈라지는 것을 보면서 기대감에 충만했다.
- 바이칼 가는 길은 이렇게 아름답다. 이르쿠츠크에서 60킬로미터의 길이 시종 정갈하다.
바이칼에 도착하기 전에 박물관 한 곳을 들리기로 했다. 목조건축 박물관인 ‘탈취’. 이곳에는 시베리아 개척 초기 러시아 인들이 지었던 성채와 교회, 주택들이 다른 곳에서 옮겨져 오거나 복원되어 있다. 또한 몽골리언인 예벤키족과 부리야트족의 주거지와 민속자료들도 잘 정돈되어 전시되어 있다.
17세기를 전후해 이 시베리아 땅에서 어울려 살던 러시아인과 원주민들의 흔적을 한 자리에 모아 놓은 것이다.
- 탈취 박물관의 모든 것은 나무로 만들어져 있다. 교회의 양파모양 첨탑까지도...
모든 것이 나무로 만들어졌다. 집도, 담도, 교회도, 심지어 교회의 양파모양 첨탑도 나무였다. 우리 나라의 맷돌과 똑같이 생긴 맷돌도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것조차 통나무를 잘라서 만든 것이었다.
지붕 모양을 보니 암키와 수키와처럼 통나무를 V자로 홈을 파서 맞물려 놓았다. 러시아인들의 주택에서는 현대 러시아 건축의 원형이 보였고 몽골리언의 주택에서는 우리의 살림집과 생활도구의 원형이 보였다. (14편에 계속)
시베리아의 초승달 바이칼 (14)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20분 정도를 더 달리니 멀리 호수의 수평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바이칼에 도착한 것이다. 가슴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열차를 사흘이나 타면서 시베리아를 횡단하고 이르쿠츠크에 도착해서도 하루를 머물며 기대를 키운 끝에 드디어 마음속의 성소에 도착한 것이다.
내가 왜 바이칼을 순례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성소로 여기는지는 나 자신도 잘 모르겠다. 난 그저 자연이 좋다. 배낭을 매고 혼자서 지리산 능선을 걸어가면 세상에서 묻은 먼지가 모두 씻겨 나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언젠가 바이칼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 난 그곳을 ‘반드시 가봐야 할 꿈의 답사처’로 여겼다. 바이칼이 그 위대한 순수와 자연성으로 나의 몸과 정신을 정화시켜 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야트막한 언덕 위에 차를 세우고 모두 내렸다. 나무 둥치에서 굵은 줄기가 뻗어 나가듯이 앙가라 강은 바이칼로부터 흘러나가고 있었다. 물결이 세차다. 박 교수가 강 한가운데를 가리키며 말했다.
“강 가운데 바위가 보이죠? 저 바위를 샤먼 바위라고 부릅니다. 수면 위로 노출된 부분은 작습니다. 그러나 거대한 바위가 물 속에 숨어 있어서 강물이 큰 소용돌이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저 바위 주변 수 킬로미터는 아무리 추워도 얼지 않습니다.”
멀어서 그런지 그리 커 보이지 않는 바위가 물살을 가르고 있다. 멀리 보이는 호수는 얼음에 덮여 있는데 바위 주변은 물이 소용돌이치며 흐르고 있다.
“그런데 저 바위가 샤먼 바위라고 불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부리야트족 샤먼들이 저곳에서 바이칼 신에게 제사를 지냈기 때문입니다. 먼 옛날 이 곳에 살던 부리야트족은 저녁에 범죄자를 저 바위 위에 올려놓았다가 다음날 아침까지 살아 있으면 무죄방면하고 범죄자가 사라졌으면 바이칼 신이 그를 수장 시켰다고 믿었습니다.”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공포의 형벌이었을 것이다. 살아 남기 위해서는 소용돌이치는 물결 위에서 밤을 지새워야 했는데 그 바위의 위치나 형상으로 봐서 어지간한 강심장과 체력이 아니면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 같다.
박 교수는 그 샤먼 바위에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설이 있다고 했다. 강이 발원하는 첫머리에 있는 바위에 전설이 없다면 오히려 이상하다.
“옛날 이 호수에는 바이칼 할아버지가 3백36명의 아들들과 외동딸 앙가라와 살고 있었습니다. 바이칼은 외동딸 앙가라를 이르쿠트라는 용감한 청년에게 시집보내려고 마음먹고 있었지요. 이르쿠트는 앙가라로 유입되는 물결이 사나운 강이지요.
그런데 바이칼에 사는 갈매기들이 앙가라에게 속삭입니다. 멀리 북쪽에 예니세이라는 멋진 청년이 있다고...
이때부터 앙가라는 예니세이를 사모하게 됩니다. 이것을 눈치챈 바이칼 할아버지는 앙가라를 감시하게 되죠. 앙가라는 아버지가 잠든 사이에 몰래 예니세이에게로 도망갑니다. 잠에서 깨어난 바이칼 할아버지는 큰 바위를 집어 딸에게 던집니다. 이 돌에 목이 맞은 앙가라는 그만 죽고 맙니다.
그 바위가 지금의 샤먼 바위이고 죽은 처녀 앙가라는 목에 샤먼 바위가 박힌 채 지금도 청년 예니세이에 대한 연모의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샤먼 바위를 위해 지어낸 재미있는 이야기다. 그러나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앙가라 강은 그녀의 희망대로 북쪽으로 흘러 예니세이 강과 만난다. 그리고는 시베리아 땅 북쪽 끝까지 흘러 북극해로 흘러 들어간다.
바이칼 생태박물관
샤먼 바위의 전설을 듣고 있는 동안 날씨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눈발도 약간씩 날리며 호수가 희뿌연 연무에 뒤덮히기 시작했다. 아침 일출이 그렇게 맑고 찬란했는데 왜 갑자기 흐려지는지 알 수 없다.
재작년인가. 지리산 천왕봉에 올랐을 때 구름에 가려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하산했을 때가 생각났다. 그래서는 안 되는데.... 도대체 내가 여기를 어떻게 왔는데 뿌연 안개만 보고 간단 말인가.
나의 그런 심정을 아는 박 교수가 민망한지 한마디한다.
“웬일인지 바이칼이 환영을 하지 않는 것 같네요. 그렇지만 호수 주변의 날씨는 급변합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다시 맑아 질 수도 있습니다. 일단 생태박물관을 관람합시다. 어차피 반드시 봐야하는 곳이니까요.”
별 수 없었다. 날씨가 나빠진 것도 순식간이니 금새 좋아지기도 하겠지, 하는 생각을 하며 생태박물관으로 향했다. 박물관은 호수 바로 곁에 있다. 건물 외관이 초라하고 작아서 제대로 된 곳일까 하는 의심이 들었으나 박 교수는 ‘다른 곳은 몰라도 여기는 꼭 봐야한다’고 하면서 일행을 인솔했다. 입장료는 96루불. 약 4천 원 정도였는데 이번 여행의 관람료 중 가장 비쌌다.
박물관은 한 개 층만을 전시공간으로 사용하고 있고 다른 공간에는 사무실과 연구실이 들어 있다. 그러나 내부는 전시물과 자료들이 가득 차 있다. 다른 곳에서는 설명을 대충 하고 ‘마음의 눈으로 보십시오’ 라는 태도를 취했던 박 교수가 본격적인 ‘강의’를 시작한다.
“바이칼은 세계에서 가장 깊은 호수입니다. 깊이가 1,637m에 이릅니다. 호수의 단면을 잘라서 보면 바이칼은 마치 맥주 잔이나 밥그릇을 닮았습니다. 이에 비하면 세계의 다른 호수들은 그 단면이 접시처럼 생겼습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좌측 호안(湖岸)은 물 속이 급경사로 되어 있습니다. 맞은편은 상대적으로 경사가 완만하지요.”
벽면에는 바이칼의 단면도가 크게 걸려 있었다. 수면 아래의 지형을 보여주고 있는데 좌측은 거의 90도의 절벽으로 깊이 파여 있다.
- 생태박물관에 걸려 있는 호수의 단면도. 왼쪽은 거의 수직에 가까운 절벽이다.
“그래서 수량이 아주 많습니다. 많다고만 해서는 느낌이 별로 없을 겁니다. 수치로 설명을 해 볼까요? 인류 전체가 40년을 먹을 수 있는 양, 세계 민물의 20퍼센트, 세계 식수의 80퍼센트. 어떻습니까? 놀랍지요.”
세계 식수의 80퍼센트라니... 정말 놀랍다.
바이칼 물은 생수로 판매되고 있다. 미네랄이 과다하지 않고 인체에 꼭 이상적인 양만큼 함유되어 있으며 산소 량은 많단다. 생수는 수심 4백 미터의 물을 채취한다고 한다. 박물관 한 구석에 페트병에 든 생수 두 개가 유리관에 들어있다. 10년 전에 채취한 바이칼 물이라는데 아무 침전물도 없고 이끼도 없다.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호수의 남북 길이는 6백40킬로미터, 최대 폭은 80킬로미터입니다. 조금 있으면 밖에 나가서 호수 맞은 편을 보시겠지만 우리가 있는 위치는 호수 폭이 40킬로미터 정도입니다.”
그렇다. 바이칼은 그렇게 길쭉한 모습으로 시베리아에 떠 있다. 워낙 큰 호수이기 때문에 아무리 작은 지도에도 반드시 표시된다. 난 지도를 보면서 그 초승달 같은 모습에 매료됐었다.
“바이칼이라는 말은 타타르어로 ‘풍요의 호수’라는 뜻입니다. 말 그대로 호수와 그 주변에는 2600 여종의 생물이 살고 있고 그 가운데 1200 종의 동물과 600 종의 식물이 다른 지역에는 없는, 오직 바이칼에서만 사는 희귀종입니다. 가히 지구의 생태박물관이라 할 만하지요. 호수의 나이가 세계 최고령인 2500만 년이 넘는 탓이죠.”
- 호수변 좌판의 오물. 내장을 제거한 뒤 건조시키고 있다. 그러나 훈제는 내장을 제거하지
않은 상태로 훈제통 속에 넣어 익혀낸다.
2천5백만 년이라..... 어림도 하기 어려운 정말 긴 세월이 아닌가. 그 긴 세월 탓에 바이칼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생태가 존재한다. 바다표범이 서식하는 것이다. 네르파라 불리는 이 바다표범은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민물에 사는 바다표범이다. 어떻게 해서 바다표범이 민물인 바이칼 호수에 살게 되었을까?
오물이라는 생선도 마찬가지다. 이미 열차 안에서 먹어봤지만 오물은 바다 생선인 청어와 거의 비슷하다. 맛이나 모양이 청어와 닮았다. 학자들에 의하면 먼 옛날에 예니세이 강과 앙가라 강을 거슬러 올라와 민물에 적응하였다고 한다. 말로 하니 간단하지만 오랜 세월이 걸렸을 것이다.
“그리고 바이칼은 아직도 조금씩 움직이면서 자신을 모습을 진화시킵니다. 말하자면 살아 움직이는 것이지요. 내부 지진활동이 활발하고 150년 전에는 강도 10의 지진이 발생하여 여섯 개의 마을이 호수 밑으로 가라앉았습니다. 인명피해가 많았고 지형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
박물관 구석에는 지진계가 설치되어 있고 컴퓨터 모니터에는 미세한 떨림이 계속 기록되고 있다. (15편에 계속)
시베리아의 초승달 바이칼 (15)
날씨가 맑게 개었다. 박물관에서 나오니 투명한 햇살이 비치고 있고 연무는 깨끗하게 사라지고 없다. 멀리 수평선 위로 바이칼 산맥이 신기루처럼 떠 있다. 4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데 손에 잡힐 듯 하다. 나의 간절한 염원을 바이칼 할아버지가 알아챈 걸까.
- 언덕 위에서 본 바이칼 호수. 40킬로 떨어진 맞은 편 산맥이 신기루처럼 수평선 위에 떠 있다.
호수 가의 조그만 마을 리스트비안카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섰다. 드디어 바이칼과 마주한 것이다. 바이칼은 깊이 침묵하고 있다. 얼음과 눈으로 뒤덮인 호수는 겨울잠을 자고 있다. 출렁임도 없고 반짝임도 없이 그렇게 차갑게 얼어 있다.
맑게 갠 하늘엔 태양이 강렬하게 빛난다.
깊이 숨을 들여 마셨다. 차가운 공기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킨다. 머리도 맑아진다. 언덕 위에서 얼어있는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좌에서 우로, 또 우에서 좌로. 시야에 아무 것도 걸리는 것이 없다. 내가 서 있는 곳은 바이칼의 한 귀퉁이인데도 그 넓이가 짐작되지 않는다.
언덕을 내려가서 조심스럽게 얼음 위로 발을 디뎠다. 옛날 바이칼 호수에 살던 원주민들은 이 호수를 향해 돌도 함부로 던지지 않았다고 했다. 나 또한 삼가하는 마음으로 호수의 안쪽을 향해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호수의 가장자리는 얇은 얼음이 깨진 채 엉겨 얼어 있다. 초겨울, 얼음이 처음 얼기 시작할 때 호수에 파도가 일면 얼음은 이렇게 부서졌을 것이고 그런 과정은 여러 차례 반복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강한 추위가 몰아쳐 파도를 잠재웠을 때, 그 모습 그대로 이렇게 얼어붙은 것이리라.
- 깨진 얼음으로 덮인 바이칼 호수 위로 태양이 강렬하게 빛나고 있다. 얼음은 5월이 돼야
녹는다.
눈이 바람에 쓸려간 곳은 얼음이 그 투명한 몸을 드러냈다. 수심 40미터에 가라앉아 있는 동전조차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바이칼의 물은 투명하다. 그러니 얼음이 이렇게 수정처럼 맑다. 앉아서 얼음 속 깊은 물 속을 들여다보았다. 박물관에서의 설명대로라면 이곳은 수심이 천 미터가 넘는다.
- 빙렬을 보면 얼음의 두께가 짐작된다.
하늘을 우러른다. 이제 하늘은 아침 일출 때 봤던 새파란 잉크 빛을 회복하고 있다. 눈이 맑아지는 것 같다. 바람이 차갑지만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시베리아의 초승달에서 어찌 포근한 날씨를 바라랴. 오랫동안 마음속으로 그리움을 키워왔던 바이칼의 그 널따란 품에서 한껏 행복에 겨워했다.
그때 멀리서 ‘꽈르르릉’하는 소리가 났다. 동굴 깊숙한 곳에서 돌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 같다고 느낀 순간 ‘쫘자자작’하는 파열음이 번개처럼 내 곁을 지나간다. 장마철 여름 밤하늘을 찢어 놓는 벼락소리 같다. 엄청난 충격이다. 순식간에 두 다리에 힘이 빠지고 이마에 땀이 배어 나온다. 도대체 무슨 소릴까. 지진이라도 난 걸까.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보니 그것은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였다. 자세히 보니 두꺼운 얼음에는 수많은 빙렬(氷裂)이 나 있다. 깊은 호수의 심연에서 조그만 뒤챔이 생기면 그 힘은 동심원처럼 커져 호수 면의 얼음을 압박할 것이고 그러면 얼음은 온몸으로 그 충격을 견뎌내면서 제 몸을 가르는 것이다. 이렇게 넓고 깊은 호수에서만 있을 수 있는 소리, 바로 태고의 소리다. 난 바이칼이 나의 방문을 환영하는 소리를 낸 것이라고 해석했다.
호수에 손을 담그다
해는 아직 몇 시간 남아 있다. 그 자리에 서서 바이칼의 일몰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호수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있었으므로 막심을 앞세우고 샤먼 바위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샤먼 바위 주변은 얼지 않는다. 그래서 강 이쪽과 저쪽을 잇는 배가 오간다. 그 배가 오가면서 얇게 얼어있던 살얼음을 깨면 수많은 조각으로 갈라진 얼음은 유빙이 되어 천천히 앙가라 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그 장면은 바이칼이 만드는 연작 추상화였다. 그 유빙에 매혹 돼 언덕을 내려갔다. 얼지 않은 호수 물에 손을 담가보고 싶었다.
- 강을 오가는 배가 살얼음을 깨면 이런 멋진 그림이 호수면에 펼쳐진다.
바이칼 물에 손을 씻으면 5년, 세수를 하면 10년, 목욕을 하면 30년을 더 산다고 한다. 러시아의 세 가지 자랑거리로 여자, 보드카, 바이칼 물을 일컫기도 한다. 러시아 사람들이 바이칼 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얼음과 물이 만나는 지점으로 다가갔다. 신통하게도 경계지점이라고 해서 얼음이 얇지는 않다. 50센티는 넘어 보인다. 얼음 위에 조심스럽게 엎드렸다. 투명한 물 아래 깨끗한 자갈이 깔려있다. 손을 뻗어 물 속에 손을 담갔다. 차가운 기온이 온몸으로 전해 왔다.
한 모금, 두 모금 물을 마셨다. 마침내 온전히 바이칼과 만났다는 성취감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호수를 뒤덮고 있는 얼음을 보고 바이칼의 속살은 전혀 볼 수 없다는 아쉬움이 있었는데 이제 내 손으로 그 물을 마셨으니 더 바랄 것이 없다.
- 호수에서 발생한 수증기가 리스트비앙카 마을 뒷산의 나무에 설화를 꽃피웠다.
해가 기울고 있다. 아침에 맞이한 그 찬란한 태양이 이제 호수 건너편 산맥위로 서서히 지고 있다. 일몰은 호수 한가운데에서 지켜보고 싶었다. 얼음 위로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호숫가에서 오물 훈제를 하던 장사들이 날 바라봤다. 그들은 우리와 모습이 같은 몽골리안 들이다. 그렇지. 오물은 열차에서도 먹어봤지만 바이칼에서 먹어봐야 제 맛이 아니겠는가?
금방 훈제 통에서 익힌 오물을 두 마리 샀다. 그리고 맥주도 두 병 샀다. 건배를 하자고 하니 막심이 묻는다. ‘러시아 사람들은 건배를 할 때 뭘 위하여 잔을 드는지 아느냐’ 고... 내가 알 리가 없다. 그런데 막심의 대답이 의외로 인상적이다. 러시아 사람들은 가장 먼저 ‘만남을 위하여’ 잔을 든단다. 그 다음이 ‘부모를 위하여’, ‘사랑을 위하여’는 셋 째라고 한다.
막심과 ‘만남을 위하여’를 외친 다음 맥주를 마시고 오물을 먹었다. 오물은 벌써 차갑게 식었지만 비린 맛은 없었다.
바이칼 일몰
해가 많이 기울었다. 태양은 선명하게 붉은 색을 띠고 있다. 서쪽 하늘도 붉게 물들고 있다. 차가운 바람이 호수 건너에서 불어와 얼굴이 따갑게 시려다. 부서진 채 삐죽삐죽 호수 면에 튀어나온 얼음 조각들이 이제 붉은 빛을 띠기 시작한다.
- 해가 기울기 시작하자 부서진 얼음이 서서히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해가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한다. 이제 호수는 온통 핏빛이다. 바람이 더 세졌다. 카메라를 잡고 있는 손가락이 끊어질 듯 하다. 마치 대결을 벌이듯이 해와 마주서서 셔터를 눌렀다. 언제 다시 이런 순간을 맞이하랴. 바이칼에 다시 온다고 하더라도 저런 빛깔의 태양을 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 석양의 붉은 빛에 얼음이 보석처럼 빛난다. 황홀경이 따로 없다.
해는 이제 맞은 편 산맥에 내려앉고 있다. 넓은 호수에 온통 붉은 색 보석이 뿌려진 듯하다. 황홀경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절정의 붉은 색이 일시에 빛을 잃는다. 해가 자취를 감춘 것이다.
- 바이칼 호수에 해가 지고 있다. 제트기의 비행운이 태고의 정적을 깨뜨리고 있다.
아침에 앙가라 강에서 찬란하게 떠오르며 나에게 터질 듯한 긴장감을 선사했던 그 해는 이 저녁에 온통 붉은 빛을 나에게 뿌리고는 사라져 버렸다. (마지막 16편에 계속)
시베리아의 초승달 바이칼 (16-마지막 회)
어둠이 내린 바이칼을 떠난다. 아쉬운 마음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바이칼을 보는 것이다. 아침 일출로부터 저녁 일몰까지 다양하고 신비로운 모습을 봤다. 그런데도 자꾸 아쉬운 마음이 들고 뒤를 돌아보게 된다.
얼음은 5월이 돼야 녹기 시작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 시기가 바이칼이 가장 순결하고 깨끗한 때라고 한다. 6월 중순부터 8월 중순까지가 바이칼의 여름인데 이 시기가 날씨가 가장 좋고 호수에는 여객선도 규칙적으로 다닌단다. 그때 다시 오고싶다. 출렁이는 물도 보고 싶고 파도소리도 들어보고 싶다.
일행을 태운 ‘한샘’이 밤길을 달리다가 숲 속으로 난 좁은 길로 접어든다. 아름드리 전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숲이다. 사우나를 하러 가는 길이다. 바이칼의 마지막 일정에 러시아 식 사우나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난 별로 내키지 않았다.
난 대중목욕탕에 가서도 탕에 온몸을 담그지 않고 하반신 정도만 담그는 반욕을 즐기는 체질이라 사우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황토 실이니, 옥 사우나 실이니 하는 그 뜨거운 방에 한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나 혼자서 다른 걸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해서 다른 사람들 하는 걸 구경이나 하자는 생각으로 가는 것이다.
숲이 끝나는 곳에 통나무집 사우나가 보인다. 바로 앙가라 강변이다. 강변의 전나무 숲 속에 통나무로 지어진 사우나실이 1백 미터 정도의 간격으로 띄엄띄엄 늘어서 있다. 바로 앞에는 앙가라 강이 하얀 눈에 덮인 채 운동장처럼 펼쳐져 있다. 멀리 강 맞은 편에는 전나무 숲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그 위로는 맑은 보름달이 쟁반처럼 휘영청하다.
천혜의 자연조건이다. 난 사우나라고 해서 답답하고 뜨거운 것만 생각했는데 이런 곳에서라면 경험 삼아서라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러시아 식 사우나실은 모든 것이 나무로 되어있다. 통나무집과 베란다, 강으로 내려서는 계단, 실내의 의자와 탁자들이 모두 전나무로 만들어져 있다. 페인트는 칠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무의 투박한 질감을 그대로 느낄 수 있고 향기는 그윽하다.
두꺼운 옷을 하나씩 벗고 심호흡을 한 다음 사우나 실로 들어섰다. 난생 처음 해보는 사우나다. 뜨거운 기운에 숨이 턱 막힌다. 일행들은 사우나 도사들인지라 벌써 자세를 잡고 편안히 쉬고 있다. 조금 지나니 뜨거운 기운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다. 구석에 아궁이가 있다. 아궁이는 실내를 향하여 열려 있었고 그곳에는 장작불에 달구어진 돌들이 들어 있다. 사우나실 밖에 나있는 아궁이에서 불을 때고 있는 것이다.
막심이 바가지로 물을 떠서 아궁이 안으로 뿌렸다. ‘훅’하는 소리와 함께 열기가 뿜어져 나온다. 비오듯이 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추위에 떨던 몸이 풀리기 시작한다. 5분쯤 지났을 때 막심이 뜨거운 물통에 담겨있던 자작나무 묶음을 들더니 나보고 누우라고 했다. 여름철에 채취해서 갈무리 해둔 이 자작나무 묶음은 향긋한 여름 내음을 아직 간직하고 있다.
자작나무 평상에 배를 깔고 길게 누웠다. 막심이 자작나무 가지로 등을 가볍게 두들기기 시작했다. 철썩 철썩.... 한참을 때리더니 이번에는 문지르듯이 등에다 빙글빙글 돌려준다. 아, 그 시원함이란.... 강렬한 오르가즘이 온 몸을 휩쓸고 지나가는 듯한 쾌감이다.
이번에는 무릎을 구부려 발바닥이 위로 향하게 하더니 발바닥을 두들겨 주었다. 일주일이나 두꺼운 등산화에 갇혀있던 두 발이 시원하게 풀리면서 온 몸의 피로가 말끔히 씻겨나간다. 다음엔 몸을 돌려서 누웠다. 가슴과 아랫배, 허벅지까지 자작나무 가지가 온몸을 두드리고 지나간다. 몸에는 온통 자작나무 이파리가 달라붙었다.
드디어 운명의 순간이 다가왔다. 이제 얼음 구멍 속으로 들어가는 순서인 것이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뜨겁게 몸이 익은 탓에 춥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가끔 방송을 통해 북 유럽 사람들이 얼음물에 뛰어드는 모습을 본 적이 있긴 하다. 그러나 그런 일은 추위에 단련된 그 지방 사람들이나 하는 걸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내가 그 ‘무모한 일’을 해야하는 것이다. 강물에는 들어가지 않겠다고 했으나 ‘몸이 완전히 익으면 전혀 춥지 않다’고 한 박 교수의 말에 용기를 낸 것이다.
통나무집에서 얼음 구멍까지는 약 30미터가 떨어져 있었다. 얼어 있는 앙가라 강을 맨발로 걸어서 가야하는 것이다. 걸어가는 길은 강에서 잘라낸 얼음을 블록처럼 사용해 1.5m정도의 담을 양쪽으로 쌓아놓았다. 젖어 있는 발이 얼음에 착착 달라붙는다. 30미터가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얼음 구멍은 에스키모의 이글루처럼 만들어진 얼음집 속에 있었다. 얼음집 천장에는 백열전구가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다. 두꺼운 얼음을 깨서 만든 직경 1미터 정도의 얼음 구멍에는 얇은 살얼음이 얼어 있다. 구멍 속으로는 자작나무 계단을 설치해 천천히 물 속으로 몸을 담글 수 있도록 돼 있다. 깊고 새파란 앙가라 강이 입을 벌리고 있다.
어쩌랴. 여기까지 왔는데. 나무 계단을 손으로 잡고 발부터 담갔다. 그리고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한기가 온몸을 휩싼다. 머리칼이 곤두서고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드디어 목까지 완전히 몸을 담갔다. 차가운 기운이 금새 뼛속까지 스몄다.
신음소리가 꽉 깨문 이 사이로 흘러 나왔다. 하나, 둘, 셋... 열을 헤아리고 물 속에서 빠져 나왔다. 피부는 그 사이 얼음처럼 식어버렸다. 다시 30미터를 달려 사우나 실로 들어갔다. 그 뜨겁던 사우나실이 이제 그리 뜨겁게 느껴지지 않는다. 턱이 덜덜 떨린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흐르자 다시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침례(沈禮)를 받듯이 앙가라 강의 차가운 물에 세 차례 몸을 담그며 난생 첫 사우나를 경험했다. 바이칼 물에 목욕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난 30년을 더 살 수 있게 된 것인가?
돌아오는 길
러시아 항공기를 타다
새벽에 이르쿠츠크 공항으로 이동했다. 세시 비행기를 타고 블라디보스톡으로 이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심야의 여객청사에서 조용히 수속을 밟았다. 비행기는 다른 곳에서 와서 우리를 태우고 블라디보스톡으로 간다고 한다. 박 근우 교수, 막심과 작별했다. 새벽에 만나서 새벽에 헤어진다. 48시간 동안 같이 있었는데 각별한 정이 들었다. 같이 보드카를 마시고 바이칼을 여행하고 사우나를 했다. 사람은 어디서 만났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 사람들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기억될 것 같다. 바이칼의 기억과 함께.
수속을 마치고 게이트 밖으로 나오니 셔틀버스가 대기하고 있다. 그런데 그 버스의 모양이 참 특이하다. 앞부분은 트럭의 운전석 모양이고 승객이 타는 부분은 버스인데 앞부분과 객차는 분리되어 있고 연결부분은 관절처럼 좌우로 굽혀지도록 되어있다. 세계의 어느 공항에서도 보지 못한 모습이다. 객차의 내부는 많이 낡아 있다. 의자의 비닐은 다 떨어져서 나무가 드러나 있다. 아무도 앉지 않았다.
짧은 거리를 이동한 버스가 멈추자 사람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국내선은 지정석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뛰어간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처음 당하는 일이다. 순간 좌석이 없어서 선 채로 비행을 하는 나의 모습이 연상됐다. 나도 뛰었다.
트랩에 도착해서 줄을 섰다. 활주로에는 모질게 추운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다. 트랩위로 오르던 사람들이 멈춘다. 사람들이 좌석에 앉고 짐이 정리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트랩 위에 서서 비행기 동체를 보니 BLADIBOSTOK AIR 라고 쓴 글씨가 큼직하게 씌어져 있다. 러시아 항공기는 처음 타 본다.
차갑게 언 몸으로 안으로 들어가니 빈 좌석이 거의 없을 정도로 승객이 가득하다. 대부분 몸을 웅크리고 잠을 자고 있고 일부는 맥주를 홀짝거리고 있다. 앞으로 이동해서 겨우 빈자리를 차지했다. 그런데 배낭을 올려놓을 곳이 없다. 하는 수 없이 발 사이에 배낭을 놓다보니 몸을 꼼짝도 할 수 없다.
좌석도 형편없이 좁다. 무릎이 앞좌석에 닿고 어깨도 거의 옆 사람과 붙는다. 침대도 그렇고 비행기 좌석도 그렇고 도대체 왜 이렇게 작게 만드는지 모를 일이다. 덩치는 큰 인간들이..... 네 시간을 이렇게 꼼짝없이 기야 한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그런 중에도 비행기는 이륙했고 잠시 지나니 기내식을 제공한다. 새벽 세시가 넘은 시간에, 꼼짝도 하기 어려운 의자에 않아 뭘 먹을 수 있단 말인가. 물만 한 잔 받아 마시고는 겨우 ‘버티고’ 있는데 여승무원들이 오가면서 서빙을 하다가 내 머리를 심심찮게 건드린다. 피곤한 가운데 짜증이 났는데도 그들은 내 뒤통수에 대고 ‘익스큐즈 미’라고 짤막하게 말할 뿐이다. 절대 웃는 법 없이.
깜빡 잠이 들었다가 깼는데 비행기는 어느새 블라디보스톡 공항 활주로를 굴러가고 있다. 시계를 보니 아침 7시, 현지 시간으로는 9시다. 열차를 타고 60시간에 걸쳐 달린 거리를 네 시간만에 도착한 것이다. 낡고 불편한 러시아 비행기지만 그 효용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블라디보스톡
블라디보스톡은 포근했다. 해안 도시라 바람이 불긴 했지만 그 바람도 차갑지 않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이 한반도와의 국경이니 벌써 집에 도착한 기분이 든다. 도시를 한 바퀴 돌면서 관광을 했지만 바이칼을 보고 온 나를 감동시킬만한 것은 없다. 역에 있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시발점, 중앙광장, 잠수함 박물관 등을 돌아봤다.
거리 곳곳에는 삼성과 LG 등 한국 기업들의 광고판이 즐비하다. 버스들은 거의가 한국산 중고다. 한국 여러 도시의 시내버스, 좌석버스, 관광버스, 학원버스, 전경버스 들이 그 페인트 칠 그대로 거리를 메우고 있다. 버스만 본다면 서울 거리 한 복판에 있다는 착각을 할 정도다.
- 2차 세계대전 당시 활약하던 대형 잠수함을 일반 관광객들이 둘러볼 수 있도록 전시해
놓고 있다. 붉은 별이 새겨진 네 개의 구멍은 어뢰 발사기다. 필자가 그 사이에 서서 기
념사진을 한 장 찍었다. 제법 길었던 여행의 마지막 날, 많이 지쳐보인다.
오후에 백화점에서 간단히 쇼핑을 하고 우리 일행의 전용 버스에 올랐다. 그런데 운전기사가 ‘손님 중에 혹시 대구에서 오신 분이 없냐’ 고 물었다. 방금 라디오를 통해 방송됐는데 오늘 오전에 대구 지하철에서 테러가 발생해 4명이 사망하고 30명이 다쳤다는 것이다. 좀 놀랐지만 사고의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은 모양이라고 위안하면서 호텔로 돌아왔다.
위성TV를 켰더니 BBC가 대구 사고를 긴급뉴스로 방송하고 있다. 화면은 지하철역 입구에서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고 소방대원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사이 사망자는 30명으로 늘어나 있다. 대구는 형제와 조카들, 친지와 친구들이 많이 사는 곳이다. 갑자기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회사 동료들이 취재현장에서 악전고투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호텔 카운터로 뛰어가 국제전화를 신청했다.
나의 시베리아 여행은 그렇게 블라디보스톡에서 마치 꿈에서 깨어나듯이 끝나고 말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