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로 말하자면 개인적으로 전설의 명작을 연속적으로 보고 있는 나날들이다. 일상에서는 그리 복될 게 없는 형국이나 영화에 관련된 운수로서는 상당한 행운을 보유하고 있달까.
우선 디비디플레이어를 장만한(엄밀히 얘기하자면 국내 유명 영화 주간지 정기구독 행사에서 저렴하게 구입했다.) 와중에 얻게된 스탠리큐브릭의 초기 명작들-킬러스 키스, 킬링, 영광의 길-을 '화면절단'없이 스크린 비율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그러하다. 스탠리큐브릭이 누군지 모르신다면 비디오 가게에서 '아이즈 와이드 샷'이나 '풀메탈 자켓(출시명-메탈자켓)'의 껍데기를 살펴보시면 대강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될 것이다. 여하튼 이사람은 천재라는 사실을 말해 두고 싶다. 천재라는 수사에 걸맞게 냉혹하고 비관적이며 냉소적인 카메라를 구사한다.
두번째의 행운은 멕시코 영화제가 열리는 서울 아트 시네마-정독 도서관 주변에 위치-에서 본 '엘 토포'라는 작품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라는 어려운 이름을 지닌 감독의 데뷔작인데 영화 사상 가장 독특하고 기괴한 웨스턴이다. 70년대 이 영화는 미국의 심야 극장 죽돌, 죽순이들에게 열렬한 숭배의 대상이 되었으며 팝아트로 20세기 중반에 미술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앤디 워홀까지 달려 가서 봐준 영화라고 한다. 외국의 어느 영화 평론가에 의하면 '페데리코 펠리니(길, 8 1/2로 유명한 이탈리아 감독)가 웨스턴을 만들었다면 이러할 것이며, 구로사와 아끼라(라쇼몽, 가케무샤, 7인의 사무라이로 유명한 일본 영화계의 천황)가 성서를 영화로 만들었다면 이러할 것이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문제적 장면들이 가득한 영화다. 10여 년 전 영화 교과서에서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그래서 내 생애에 필름으로 목격하기란 불가능할 것만 같은 느낌을 주었던 이 영화를 드디어 보게 된 것이다. 때마침 부천 영화제가 겹쳐서 사람들이 덜 몰렸지 그렇지 않았다면 게으르고 느려터진 나로서는 볼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의 영화가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것은 아니다. 브래드 피트가 나오는 '세븐'의 개봉 즈음에 '산타 쌍그레(성스러운 피)'라는 영화가 개봉된 적이 있었으니까. 이 영화도 상당히 논쟁적인 화면을 선사했으나 그 정도의 상상력은 이미 당시에 익숙한 얼굴로 비춰지기 시작했고 이미지의 힘도 상당히 약화되었기 때문에 큰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영화 '엘 토포(두더지)'는 카톨릭적 세계관에 대한 모독, 수많은 비정상인들(freaks라는 단어에 걸맞는)의 출몰, 동양적 세계관에 대한 관심, 그리고 무엇보다도 서구에서 믿어 의심치 않았던 '명민하고도 굳센 자아의 틀' 혹은 '초인적 자아'를 깡그리 부숴 버리는 영상적 은유가 돌진해 들어온다. 초현실주의적 분위기가 농후하지만 결코 지루하지않은 영화이니 관심있는 분들은 꼭 보시기를... 국내에서는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르니... 혹 미국에 있는 '달과 육백원'은 동네 시네마떼끄에서 운 좋으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세번째 운세는 지루하기 짝이 없고 쓰레기 같은 너저분한 영화만 틀어주던 케이블 tv에서 코엔 형제의 전설의 데뷔작 '블러드 심플(분노한 저격자라는 이상한 제목으로 오래 전에 출시되었는데 비디오 테이프 값은 그 임자가 정한다. 구매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면 된다.)'을 보게 되었다는 것. 원래 케이블 영화채널들은 명작들을 동트기 한 두 시간 전에 아무런 예고 없이 도둑과 같이 틀어 주기 때문에 24시간 365일 눈 떼지 않고 경계하지 않는 이상 처음부터 시청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어제는 우연찮게도 이 희귀한 전설의 명작을 온전하게 깨끗한 화면으로(아마도 DVD타이틀이었던 것 같다) 처음부터 끝까지 보았던 것이다.
혹자는 코엔 형제의 최고 걸작은 '바톤핑크'라 하고 혹자는 '밀로스 크로싱'이라고 하며 누구(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개인적으로는 나도 이 쪽에 들어가 있었다. 이 영화를 목도한 지금에서는 이렇게 말하겠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코엔 영화 팬이 있다. '블러드 심플'을 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는 '파고'라고 하지만-약간의 흥분으로 인한 거리두기의 시선을 잠시 거두고 과장을 섞어 말하자면- 진정한 최고의 걸작은 '블러드 심플'이었다.
여전히 그들의 영화는 훌륭하지만 '블러드 심플'의 하드보일드는 이제까지 본 동류의 영화에서 보지 못한 아우라를 풍겨낸다. 걸작을 망막의 한 구석에 담아낼 수 있게 되었다는 발견의 감동과 카메라를 매만지던 손을 슬그머니 접게 만드는 절망을 동시에 느끼게 해주는 이 영화는 어쩌면 내 인생의 영화 목록에 자리잡을 것만 같다. 군데군데 성긴 부분이 있지만 그것은 거장의 젊은 시절에서 항상 발견하게 되는 매끄럽지 않은 표면일 뿐이다.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목재이기에 더욱 빛을 발하는 이 영화는 명기로 피어오르는 전의 야성이 살아숨쉬는 건조한 베이스의 음역과 같다. 아직 생나무였던 시절의 기억을 온몸으로 간직하고 있는...
네번째와 다섯번째의 행운은 부천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발견한 후카사쿠 긴지의 '의리없는 전쟁'과 호금전의 '대취협'이다. 후카사쿠 긴지는 외국에서는 그리 알려지지 않은 노장 감독이다. 그 이유는 그의 영화가 지나치게 '잘 만들어진 일본의 스튜디오 영화'를 추구해 왔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가 우리에게 인상적으로 소개된 것은 아마도 '배틀로얄'인 듯 하다.
'배틀로얄'을 보게 된 것은 나의 절친한 친구이자 재야 야구인이기도 한 그와 '봄 여름 가을 겨울' 콘서트를 보러가기 전 남아도는 시간을 죽이기 위해서 였다. 별 다른 기대를 가지지 않고 보았던 이 영화에서 나는 나의 오만한 선입견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이 영화의 기이한 작법 때문이었다. 이 영화는 외면적으로는 당대의 하이틴 유망주들이 총출동한 학원 폭력물이었지만 정작 속을 뒤집어 보면 사회적 함의가 녹록치 않게 들어가 있었다. 보통의 감독들은 이 두 가지 이율배반적 상황-관객으로 하여금 상업적 흥취를 노골적으로 즐기게끔 배려하면서 동시에 사회적 문제에 대한 날카로운 발언을 제시하는-에서 어느 하나에 방점을 찍고 작업에 들어간다. 그러나 후카사쿠 긴지에게는 이러한 방점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영화는 2%쯤 부족하게 느껴졌다. 이것은 나에게 흥행과 평단의 어느 쪽에도 자신을 두지 않으려는 감독의 의도로 보였다.
감독이 누구에게도 적이 되지 않으려 하거나, 언제나 모든이에게 환영받을 심산으로 영화를 만들어 냈다면, 보통의 경우 나는 그러한 감독에게 일말의 사정도 두지 않는다. 하지만 '배틀로얄'의 후카사쿠 긴지에게는 예외였다. 난 이러한 예외가 발생한 것에 대해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그의 영화를 많이 보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그 이유는 그의 기묘한 영화적 스타일 때문이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는 액션의 연출에 뛰어나다. 그러나 그 스타일은 구식-60, 70년대 유행하던 우리나라 깡패 영화들의 아이콘과 작법의 세련화 된 형태가 그의 70년대 '의리없는 전쟁' 시리즈이다.-이다. '배틀로얄'에서 목격한 액션의 정조는 우리가 익히 보아왔던 조직 깡패 영화들의 그것과 유사했다. 조직 깡패들의 액션 정조란 터무니없이 어깨에 힘이 들어간 유치찬란함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후까사꾸 긴지는 이것을 다른 쪽으로 전환 시킨다. 잔뜩 힘이 들어간 어깨는 여전하지만 한 켠에는 절망적 허무가 존재하며 동시에 냉혹한 다큐멘터리적 화법으로 예의 방법으로 구축되었던 나르시시즘을 중화 시킨다. 그러면서 동시에 느린 화면과 정지화면, 그리고 자막을 통해 강조되었던 객관적 화법의 거리두기를, 바로 그것으로 또 다시 관객 동일시로 전환 시킨다. (이러한 정조는 '내일의 죠'와 '고르고 13'을 연출한 애니매이션 감독 데자끼 오사무에서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후카사쿠 긴지에게는 객관화의 분위기가 강하다)
이러한 이율배반은 그의 야쿠자 영화 '의리없는 전쟁'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다큐이면서 동시에 드라마이고 객관이면서 동시에 상업적 나르시시즘을 부여하는 이 스타일은 평단과 관객을 아리송한 박수를 보내도록한다. 그의 영화는 액션의 나르시스적 정서에 심취하기에는 너무 무겁고, 미학적 스타일과 사회적 함의를 호평하기에는 너무나 가볍기 때문이다.이러한 감독의 상황은 마치 야쿠자 세계의 어느 한 편에도 속하지 않으려는 '의리없는 전쟁'의 주인공과 같다. 그의 자취는 평단에도 없으며 관객에도 없다. 그저 그는 후카사쿠 긴지의 영화에 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사진이 야쿠자의 모습과 닮아 있다. 굵고 두꺼우며 알이 큰 갈색 선그라스를 즐겨 쓰는... '배틀로얄2'의 제작 중 숨을 거둔 그가 새삼 아쉽다.
다섯번째 행운은 이미 말했듯 호금전의 '대취협'이다. 마침 쇼브라더스 무협 특별전의 첫 상영일이라 나름의 이벤트도 있었다. '와호장룡'의 '푸른여우'(장쯔이의 스승. 그녀는 주윤발-리무바이-의 스승을 죽였기 때문에 리무바이에게 응징당한다.)로 나왔던 정패패와의 대화 시간. 정패패는 '대취협'의 여주인공 금연자(황금제비)로 나온다. 37년 전에 관객에 선보인 이 영화에서 그녀는 놀라울 정도로 앳된 모습으로 귀염성을 간직한 액션을 선보인다. 다소 서툰 그녀의 몸짓은 세상으로의 발걸음을 갓 내민 어린 처자의 밉지않은 자부심과 건강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호금전은 오늘날 중국 무협영화의 아버지격이다. 그의 영화를 보기 시작한 것은 재수시절 비디오가게에서 찾아낸 '소오강호'를 보게 되면서 부터였다. 물론 소오강호는 그의 영화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오히려 서극의 영화라고 봐야한다. 호금전의 영화에서 목격되는 경극적 풍취가 이 영화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쨋든 홍콩 신무협-서극과 정소동이 합자해낸 SF무협-의 원류를 목격하고자 한 나는 기회가 있을때마다 동네의 모든 비디오 가게를 뒤져 어렵게어렵게 그의 영화를 섭렵할 수 있었다. 그때 보게 된것이 '용문객잔(용문의 결투로 출시됨. 후에 신용문객잔이라는 엉터리 신무협 영화로 리메이크됨)' '영춘각지풍파' '협녀' 등이었다.
비디오로 목격한 그의 영화는 사실 실망이었다. 뭐가 그리 대단해서 내가 꼬박꼬박 보고 있나 싶을 정도로 참 웃긴 영화였다. 그러나 오늘 필름으로 본 '대취협'에서 나는 비로소 호금전에 대한 호의적 평가에 대해 약간 납득할 수 있었다. 그는 경극의 응용자 였다. 그의 영화에서 빛을 발하는 연출은 실내, 특히 객잔에서의 격투씬이다. 사실 그의 영화에서 격투라 할 만한 것은 없다. 오늘날 홍콩의 현란한 격투는 모두 장철의 무술감독들을 시발로 정소동이 발전시킨 것으로 와이어와 특수효과, 그리고 아크로바틱 액션을 주로 하지만 호금전의 영화는 무협영화라 해도 액션의 현란함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그의 영화는 고전의 재해석이며 재구성이다. 사실 활자에서 무협의 전통은 중국에서 상당히 오래되었다. 그 시원을 혹자는 사마천의 사기열전에서 찾기도 한다. 거기까지는 올라가지 않는다 해도 무협은 원나라 때 이야기꾼들의 구전 공연에서부터 발전되기 시작했다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한족의 왕조가 멸망당하고 이민족에게 지배당하던 백성들은 자신들의 치욕감을 무협의 가상적 영웅들의 활약에서 씻어냈으며 이것은 다시 연희형식으로 발전하고 소설고 정착되기 시작한다. 이들 서사에서 영웅은 모두 협의의 기개와 보국의 충절, 그리고 안민의 정신을 지닌 이들로 그려진다. 이것을 바탕으로 시작된 것이 경극이다. 경극은 일종의 뮤지컬로 노래와 춤(무예)이 섞여 들어간다.
호금전의 영화는 이러한 경극을 필름으로 재구성해낸다. 그래서 그의 연출력이 돋보이는 지점이 객잔씬이 되는 것이다. 실내의 협소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연무는 상징적이고 함축된 형태로 드러나며 격투는 재주의 겨룸에 다름 아니다. 그가 몰두한 액션의 지점은 칼과 칼의 합이 아니라 그 사이에 존재하는 여백이다. 이렇게 본다면 그의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서사도 무협액션도 아니다. 정작 그러하다면 호금전 영화보기는 일반적 영화 감상의 방법과 궤를 달리한다. 영화 내내 벌어지는 사건의 고리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벌어지는 격투와 그 여백의 흥취를 일별하는 파편적 방식이 보다 적절할 것이다.
내일도 부천에서의 나의 순례는 계속될 것이다. 혹 나의 영화순례에 동참할 생각이 있으시다면 부천에서 우연히 조우하기를 바란다. 당분간 순례자의 태도로 부천을 떠돌기로 작정한 나로서는 휴대전화에 신경을 쏟을 겨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한길석)
첫댓글 오빠 글 쓰는 스타일이 바뀌었다고 할라 했눈데..한길석..^^;;나도 엘토포 보고 싶었눈데..이 사람 부럽다..ㅠㅠ 참 이사 축하해요..^^;; 아닌가? @.@?
dvd로 들어오셨네요. 축하드리구요... 저는 코엔형제것중에는 별로 본것이 없지만 '아리조나 유괴사건'과 '하드서커대리인'을 보고 영화를 참 재미있게 만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블러드심플은 아직 못봤어요.
요즘 얼굴 보기 힘드네요.. 바쁜가요? . 근데 한길석이 누구죠?
이번정모때 얼굴이나보자
마이붐 나도 보고시포,, ㅎㅎ 한길석 친구는 영화같이 하는 후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