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유럽을 방문했을 때 겪었던 이른바 문화충격의 하나는 물과 관련된 것이다. 어느 식당이나 카페에서든지 마시는 물을 공짜로 주는 곳은 없었다. 우리야 어느 식당에서든 자리를 잡으면 의례 한 잔의 물이 손님에 대한 인사처럼 따라나온다. 그 당시 마시는 물을 사서 마신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웠다.
마시는 물을 오렌지 주스나 콜라처럼 돈을 내고 주문을 해야만 한다는 것은 내게 문화적인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사서 마시는 물의 가격이 만만치가 않았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어디에서나 공짜로 마실 수 있는 물 한 잔의 값이 1달러가 넘었다.
또 우리와는 다른 점 한 가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물이나 콜라가 들어있는 병이 하나같이 작은 것이라는 점이었다. 우리의 병 크기가 300ml가 넘는 큼직한 것이었던 데 비해 그들의 것은 겨우 200ml 정도의 훨씬 작은 것이었다. 우리가 서양의 문화 중에서도 미국의 큼직한 것들을 받아들이다 보니 우리 음료수 병의 크기 또한 미국식으로 큼지막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시는 물이 그만큼 귀하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거대한 신대륙 아메리카에서 보다는 무엇이든 더 작고 절약하는 문화를 갖고 있는 유럽의 모습이 나에게는 각별한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그들이 마시는 물조차도 비싼 가격으로 사서 마시지 않으면 안 되었던 그들의 사정을 알게 된 것은 내가 스위스의 알프스 지방을 방문해서였다. 알프스의 만년설이 녹아서 내려오는 물이 스위스 사람들이 쓰는 물의 주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스위스 북부의 알프스 산정을 오르는 입구라고 할 수 있는 산촌 도시 인터라켄(Interlaken)으로 흘러내리는 물의 색깔이 뿌연 회색의 탁한 물이 아닌가! 그것은 유럽 산지의 토양이 석회석인 때문에 그 성분이 물에 녹아내려 흘러내리는지라 물의 색깔이 회색빛을 띄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물을 식수로 사용해야하자니 물이 귀할 수밖에 없었고, 물 값 또한 비싸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같은 해 내가 방문했던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Buenos Aires)의 북단으로 흘러내리는 라플라타(La Plata) 강의 드넓은 어귀의 강물은 그 색깔이 짙은 황토색이었다. 볼리비아와 안데스산맥으로부터 발원하여 파라과이와 우루과이를 거치는 수천 킬로미터의 강줄기가 아르헨티나 북부의 강 어귀에 이르러서도 그토록 무거운 색깔의 흙물이라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마찬가지 남미 대륙의 대서양 연안으로부터 내륙 쪽으로 1,000Km 이상이나 멀리 떨어져 있는 아르헨티나 멘도사(Mendosa) 주의 얏다마우까(Yatamauca) 지역을 흐르는 강물이 찝찔한 맛이 난다는 점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곳 사람들의 설명으로는 수억 년 전 그곳이 바다였던 관계로 그곳에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염분으로 인해 소금기가 함유된 강물이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남미 대륙 대부분의 강들은 연약한 표토가 쉽게 씻겨내려 강물의 색깔이 붉은 황토 빛이라고도 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강으로 거대한 모습으로 흘러내리는 남미대륙의 아마존(Amazon) 강의 빛깔 역시 붉은 황토색이어서 이 강의 하구의 바다 쪽 수십 킬로미터가 황토 빛의 물색을 띈다고 했다.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로 해외근무 발령을 받았던 1992년 여름 나는 가족들과 함께 우리의 반도 남단 지역을 일주일 쯤 여행한 적이 있다. 제주도를 제외한다면 우리 반도 최남단의 섬이라고 할 수 있는 보길도(甫吉島)가 그 여행의 하이라이트였다. 보길도로 가기 위해서는 땅끝마을이라고 우리에게 더 잘 알려진 해남의 갈두리 토말(土末)이라는 마을의 작은 항구에서 작은 카 풰리에 자동차를 실어야만 했다. 보길도는 노화도(蘆花島)라는 제법 큰 섬을 거쳐서 다시 작은 풰리 목선을 타고 작은 바다 하나를 더 건너야만 했다. 보길도에서 이름이 있는 곳은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를 쓰며 윤선도(尹善道) 선생이 그의 유배 중에 머물렀다는 세련정(洗然亭)과 상록수림을 따라 검은색 조약돌 해변이 길게 펼쳐진 예송리(禮松里)해수욕장이었다.
보길도는 면적이 불과 10여 평방 km 밖에는 되지 않는 작은 섬이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 섬의 물맛이 워낙 좋아서 이 작은 섬의 지하에서 뽑아 올리는 물을 이웃의 큰 섬인 노화도의 주민들에게 까지 공급해주고 있었다. 이 작은 섬 어느 곳에서나 땅 속에 파이프를 박으면 맛좋은 샘물이 얼마든지 솟구쳐 올라온다니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바다로부터 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도 짠물이 나오는 땅에 비하면 우리의 땅은 얼마나 축복받은 땅이란 말인가. 우리에게는 그 곳 뿐만이 아니라 오염이 되지 않은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깨끗하고 맛좋은 샘물이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바닷가의 조약돌 해변에서 텐트를 치고 이틀을 지냈던 우리는 먹을 물을 긷고 샤워를 하기 위해서 하루에 한번씩은 민박집에를 들리고는 했다. 저녁 무렵 바닷물에 끈끈해졌던 몸을 깨끗하고 시원한 물에 씻어내는 기분이란 말로 표한할 수 없을 만큼 개운하고 상쾌한 것이었다. 맑고 깨끗하며 맛좋은 물로 축복받은 우리의 땅과 산하, 나는 이 고마움을 또 다른 나라들을 여행하며 아주 쉽게 재확인할 수가 있었다.
수시로 스프링클러를 돌려대며 물을 흔하게 쓰기도 하지만 귀한 물을 아껴 쓰기 위해 특단의 물 절약 프로그램을 시행하는 나라, 오스트레일리아. 샤워나 허드레 물로 밖에는 쓸 수 없는 자카르타의 수돗물. 먹는 물은 아주 먼 곳의 산록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정수하여 배달해주는 아쿠아(Aqua)라는 상표의 물을 사서 마셔야만 했다. 그러나 그도 물 값을 부담할 수 있는 중상류층의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 나머지 사람들은 석회질이 섞여있는 개운치 않은 물을 그대로 마셔야만 했고 누구나 석회질이 섞여있는 그 물로 샤워를 하거나 세탁을 하지 않으면 안됐다. 그래서 수돗물이 고여 있던 물자리가 마르고 나면 항상 하얀 석회석 성분이 남겨져 있었다. 또 그 물을 마시고 사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다른 곳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이 담석이라는 질병에 시달려야만 한다고도 했다. 이 나라에서도 강물의 색깔은 항상 탁한 색깔의 황토 빛이었다.
강물의 색깔이 황토 빛을 띠고 있었던 것은 아르헨티나나 인도네시아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태국의 수도 방콕의 연안으로 흘러드는 챠오 프라야(Chao Phraya) 강이나 베트남을 흐르는 대부분의 강도 마찬가지였다.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를 끼고 길게 흘러내리는 홍강(紅江)의 물색도 이름 그대로 붉은 흙빛을 띠고 있었다. 물색이 붉다고 해서 그 강의 이름을 ‘붉은 강’, 그들의 말로는 ‘쏭 홍(Song Hong)'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4,000여 km의 거리를 흘러내려 베트남의 남부 구룡(九龍)지역으로 여러 개의 지류를 만들어 바다로 빠져드는 메콩(Mekong강의 물색도 흙탕의 무거운 색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내가 찾았던 미토(My Tho)강은 메콩강 하구의 아홉 개 지류중의 하나였는데, 널따란 강의 물줄기가 마치 장마 물과도 같이 검붉은 색을 띠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내가 본 베트남의 강 중에서 베트남의 중부지방에 자리 잡고 있는 고도의 하나인 후에(Hue 和順)라는 도시를 관통해서 흐르고 있는 향강(香江)이라는 강만큼은 우리의 물색과 같은 밝은 물색을 띠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결코 예사롭지 않은 이 푸른 강의 이름을 그들은 '향기로운 강(Perfume River)'이라고 이름하고 그 곳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뽐내며 자랑하기도 했다.
에비앙(Evian)이라는 브랜드를 가진 프랑스산 생수가 우리에게도 소개되어 있다. 이 물의 산지는 프랑스에서 알프스를 구경하거나 스키를 즐길 수 있는 명승지의 하나인 샤모니(Shamonix) 지방. 알프스의 최고봉인 몽블랑(Monc Blanc) 지역의 만년 빙하를 녹여서 만드는 천연의 청정수라는 광고 문구가 들어있는 이 물은 그야말로 이역만리 먼 곳으로부터 수송되어 온 값비싼 물이라고 할 수 있다. 유럽산, 그도 프랑스산이라고 하면 무조건 좋아라하는 듯한 우리네의 많은 사람들이 이 프랑스산 물 또한 마다하지 않을 리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프랑스산 물만큼은 한국의 시장에서 그렇게 큰 위력을 발휘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비싼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사람들이 물만큼은 우리의 샘물이나 광천수의 맛이 더욱 좋다는 것을 알고 있는 때문이비도 할 것이다. 만년 빙하를 녹인 물이라고는 하지만 어찌 땅속으로 깊숙이 스며들어 걸러지고 맛이 든 우리의 물과 감히 경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으로부터 백여 년 전 우리의 강토 구석구석을 탐사했던 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 여사가 우리의 맑고 깨끗한 우리 강의 모습에 한결같이 감탄을 금치 못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녀는 산업화를 거치며 이미 더렵혀진 그들의 강과 물을 안타까워하며 아직 때 묻지 않은 우리의 물을 부러워했을 것이다. 우리 스스로는 잘 깨닫고 있지 못하고 있던 우리 강들의 푸르고 깨끗한 물의 귀중함을 그녀는 우리보다도 한 발 앞서 깨닫고 있었던 것임이 분명하다.
우리의 깨끗하고 아름다운 강들도 이미 심하게 오염되어 먹을 수 없는 물이 되어버린, 한때는 깨끗하고도 아름다웠던 유럽의 강, 다뉴브(Danube)강과 같은 운명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제 우리도 머지않아 식당에서 비싼 값으로 물을 사서 마셔야하는 때가 오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는 아니 될 것이다. 우리의 강에 흐르는 물을 그대로 마실 수 있을 만큼 우리들은 우리의 강토를 잘 지켜나가야만 할 것이다. 아직은 맑고 깨끗한 우리의 강과 물을 우리 모두가 아끼고 지켜나가야만 한다. (2003. 9. 12.)
첫댓글 환경오염으로 인한 수질은 앞으로 큰 재앙으로 다가올 것 같습니다. 우리가 버리는 쓰레기가 엄청 많아 향 후 50년이 못가서 바닷물조차 오염이 심각해질 것이라는 예측이 있습니다. 석유보다 물값이 더 비싸질 것이라는 예측도 허언이 아닌 것 같습니다. 석유는 없어도 살 수 있지만 물이 없다면 인류는 생존할 수 없지요. 동유럽국가의 수질은 석회석이 많아 위생에 큰 위협이 되고 있죠. 저도 그곳에 있을 때 주방 싱크대에서 실감했습니다. 설거지하고 난 후 싱크대가 뿌옇게 얼룩져있는 것을 발견했지요. 그러니 음수는 비쌀 수밖에 없습니다. 석회석 함량이 적을 수록 비싼 것은 당연하지요. 에비앙 같은 물은 매우 비싸서 그냥 사서 먹을 수 없어요. 금수강산의 별명을 가진 우리나라도 물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생활이 피폐해질 것은 뻔하지요.
우리나라가 삼천리 금수강산이란 그냥 미사여구가 아닌것 같아요
우리나라는 지진ㆍ태풍ㆍ화산으로 부터
안전하고 사계절이 뚜렷하며 게다가
마시는 물까지 청정수니 참으로 축
복의 땅이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