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고문서
▶ 고문서의 가치
사료학의 관점에서 볼 때, 그간의 국학분야 연구는 큰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그것은 국가의 관찬사료, 혹은 지배층인 양반 사대부들이 만든
연대기류, 문집류 등의 사료에 너무나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필연의 결과로서, 우리 국학분야 연구는 중앙(국왕) 중심,
지배층(양반) 중심의 역사, 철학, 문학이 되고 말았다.
이에 딸이 자기 조상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모시겠다는 주체적 여성의 모습이나,
소가 남의 밭 곡식을 뜯어먹자 이를 한탄하면서 쓴 제주도 보통사람들의 시심(詩心),
그리고 관부의 관권과 사족의 신분적 영향력이 농축되어 있으면서 평민들의 삶의
몸부림이 숨쉬어 있는 거제도 어촌 구조라리 마을의 풍경 등이우리 문화 연구의
뒤편에 설 수밖에 없었다.
우리 문화의 주인공이 전체 ‘인간’이라 할 때 이것은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할 과제라 하지않을 수 없다.
고문서는 바로 이러한 편향적인 국학분야 연구를 지양하고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문화 서술을 가능케 하는 자료이다.
즉 고문서는 일정한 시기 일정한 지역적 범주에 살았던 전 인간에 관한 삶의 기록이다.
지배층인 양반이라 할지라도 문집과 달리 그들이 남긴 고문서에는
그들 내면의 세계와 긴박한 삶의 문제를 담고 있다.
따라서 고문서가 그려주고 있는 인간상은 부분적이고 일시적이지만 구체적이고 사실적이다.
한마디로 사료로서 꾸밈과 왜곡이 적다. 고문서의 사료로서의 가치를 몇 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대부분의 고문서가 유일무이한 존재로서 일차 사료라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문집을 비롯하여 공각된 기록물은 복본이 있다.
예컨대 인쇄된 문집은 발행자 주체인 사가(私家)에서 없어지면 다른 곳,
예컨대 다른 개인이나 도서관, 박물관등에서 찾아질 수 있다.
하지만 고문서의 경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 부만 작성되기 때문에
대개의 경우 그 자체가 유일성을 가진다.
고문서가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둘째, 조선왕조실록 등 관변측 자료나 개인 문집 등에서 찾을 수 없는
생활사의 여러 단면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개인간에 서로 주고받은 간찰, 매매 등의 일상생활과 관련된 계약 문서,
혹은 관혼상제 관계 문서, 각종 분쟁에 관련된 소송문서, 재산상속에 관한 문서,
관청에 대한 민의 청원서 등이 그것이다.
셋째, 지방사(향촌사) 연구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자료라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전통시대 자료는 거의 전부가 중앙 중심의 기록인데 반해
고문서는 비록 관부와 관련된 문서도 있지만 향촌사회의 구조와 운영의 실체,
그리고 개인의 일대기를 밝혀주는 기록이다.
우리의 역사를 비롯해 문학과 철학은 중앙중심으로 서술되었거나 연구되고 있으나
고문서는 지방의 역사, 민속, 신앙, 향촌사 등에 관계된 부분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에
우리 한국문화 연구의 체계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자료이다.
그러면 과연 고문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간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고문서의 개념은 협의의 개념과 광의의 개념으로 구분하여 정의할 수 있다.
우선 협의의 개념에 따른 고문서의 정의를 살펴보자. 이 경우 고문서의 형식적 요건은
발급의 주체와 객체가 존재하고 그 사이에 관계성이 내재되어 있어야 한다.
이에 김동욱은 고문서의 작성 및 효력에 있어서 ‘타동적(他動的)’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타동적이라 함은 문서를 작성함에 있어 수수자(授受者) 사이에
어떤 작용을 미치는 요건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승희의 경우도 ‘문서는 반드시 특정 대상이 있어야 하며, 갑이라는 주체가 을이라는
특정의 대상에 문서가 전달됨으로써 그 구실을 하게 된다고 하였다.
즉 문서는 발급자가 수취자가 필수요건이며 양자 사이에 문서를 수수하는 목적이 있어야 한다’ 고 하였다.
현재까지 고문서의 정의를 분명히, 그리고 학술적으로 정리한 이론이다.
하지만 고문서의 요건을 이와 같이 수수자와 그 목적이 있어야 한다는 측면으로만 한정시킬 때
고문서의 범주는 매우 축소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정의를 자료의 조사·수집·정리, 그리고 사료로서의 ‘이용’의 차원에서 본다면
수많은 기록류가 여기서 제외된다.
古書誌學에서는 그 주요 연구대상이 판본 활자 중심의 古書이다.
따라서 그간 성책 및 낱장의 고문서는 정리와 연구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그러한 자료로는 치부류(秋收記, 田畓案, 奴婢案), 촌락문서류(鄕案·洞案 등),
문중문서류(族契 등), 개인생활기록류(日記類), 토지대장류(量案 등), 호적문서류(戶籍臺帳 등),
혼상제례류(扶助記, 時到記 등), 등록류(謄錄類)가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 자료는 특정 대상과 수수한 문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우 ‘고기록(古記錄)’이라는용어를 쓰기도 하여, 또 다른 범주의 문헌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도서관 등에서 이러한 분류 영역을 두거나 채택하여 시용하고 있지 않은 실정이다.
이러한 고문서 개념은, 史料로서의 가치나 학술적 이용의 차원에서 볼 때 지나치게 제한적이다.
이 때문에 한국학중앙연구원 등 고문서를 직접 조사·수집·정리하는 기관에서는
이 같은 개념을 적용하지 않고 있다.
광의의 개념에서 고문서를 정의하는 연구자로는 정구복을 들 수 있다.
정구복은 우리의 전통적 문서개념은 ‘사료적 가치가 있는 모든 기록’을 의미하였다고 지적하고
고문서란 ‘현대이전의 1차 사료로서의 유일한 가치를 갖는 필사된 기록’이라고 정의하였다.
특히 정구복은 낱장으로 전형적 고문서 이외에 필사된 기록류에 대하여 그 의미를 적극적으로 부여하였다.
이에 문집도 간행 이전의 초고본(草稿本)이라면 고문서로 간주해야 한다고 보았다.
윤병태는 이러한 광의의 고문서 개념을 받아들여 고문서분류체계를 완성하였는데
한국고문서정리법(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4)이 바로 그것이다.
고문서의 정의는 자료의 조사 수집과 정리, 나아가 목록의 유형과 정리방법에까지도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국학계의 커다란 학문적 쟁점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고문서학 자체가 사료학에서 출발한, 다시 말해 사료를 효과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전제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고문서의 개념에는 사료로서
유의미한 것들을 최대한 포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이에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는 넓은 의미의 고문서 개념을 채택하여, 자료를 조사·정리·간행하고 있다.
동 연구원에서 실시하고 있는 일련의 고문서 조사사업의 경우, 고문서 개념이나 정의에 구애됨에 없이
고문서 뿐만 고서와 필사본을 비롯한 사료적 가치가 있는 모든 자료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 고문서의 주제
1. 관료생활
고문서 가운데 그 보존율이 가장 높은 것이 관료로서의 자격과 임명에 관한 문서이다.
조선시대의 경우 사회적 지위 및 부(富)를 증진시키는 데에는 과거를 통해 관료가 되는 것이 첩경이었다.
따라서 관료 진출 자격시험인 과거에 합격한 증서, 또는 국왕 또는 해당 부처에서 내려 준 고신(告身)은
사회적 지위의 상징이었고, 가문의 경우 가격(家格)을 알아 볼 수 있는 기준이었고 척도였다.
고신은 통칭하여 교지(敎旨)이라 통칭하기도 하는데, 이 때의 교(敎)는 사대 문자 가운데
하나로서 중국 천자가 발하는 칙(勅)에 대하여 제후국 왕이 발하는 명령서였다.
즉 교지는 국왕이 신하나 백성들에게 관직,품계,자격,시호 등을 내려주는 문서로서
오늘날의 임명장,사령장과 같은 것이다.
고신교지는 고려대에는 관고(官誥), 조선초기에는 왕지(王旨) 또는 관교(官敎)라고도 하였고
황제국가로서 그 위상이 바뀐 대한제국 시대에는 칙명(勅命)이라고도 하였다.
이는 국왕의 신하에 대한 권위의 상징이며, 봉건적 관료정치의 유물이다.
따라서 고신 교지는 그 가문이나 선조의 권위를 나타내는 자료로 양반가문에 전래되어 오는
고문서 가운데 주종이 되고 있다. 교지의 종류를 좀 더 세분해 보면 다음과 같다.
■ 고신교지(告身敎旨) : 관리에게 벼슬과 품계를 내려주는 일종의 사령장.
■ 급제ㆍ입격교지(及弟ㆍ入格敎旨) : 문ㆍ무과와 잡과 등 과거 합격자에게 내려지는 홍패ㆍ백패.
■ 추증교지(追贈敎旨) : 후손이 고관이 됨으로써, 당사자의 처, 부모, 조부ㆍ조모의 품계를 내려 주거나
올려주는 교지.
■ 시호교지(諡號敎旨) : 관원이 죽었을 경우 등 심사를 거쳐 그 사람의 업적과 관련된 시호를 내려주는 교지.
■ 사패교지(賜牌敎旨) : 왕이 특별히 노비ㆍ토지를 하사하거나 신역(身役)을 면제해 주는 교지.
조선시대에 관료 혹은 그에 준하는 직임은 크게 국가 임명직 관원과, 이들 중
지방수령이 임명하는 지방직 관료가 있다.
국가 임명직 관원의 관계(官階)ㆍ관직의 수여는 크게 5품을 기준으로 발령 부서가 달라진다.
인사 부서인 이조와 병조에서는 (왕의 명령을 받들어) 5품 이하 관원을, 그 이상은 국왕이 친히 발령자가 된다.
관계 관직임명의 특징은 추증(追贈)과 대가(代加)에서 잘 나타난다.
전통사회는 신분사회였고, 특정인의 영달은 곧 그 일족의 영광으로 치부되었다.
이러한 태도는 관료임명 특히추증제도에서 잘 나타난다.
추증은 관료로 임명되거나 승진되는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의 처, 부모, 조부ㆍ조모의 품계를 함께 내려 주거나, 올려주는 제도이다.
그 중에서도 공신이 된다는 것은 그 자신뿐 만 아니라 대대로 그 후손들에게
명예와 부를 물려줄 수 있음을 의미한다.
공신에게는 여러 가지 특권이 주어진다. 먼저 공신임을 증명하는 문서 공신교서(功臣敎書)이며
관복을 입은 모습을 그려서 내려주는 영정이 공신도상(功臣圖像)이다.
시호는 조선 초기까지는 왕과 왕비, 왕의 종친, 실직에 있었던 정2품 이상의 문무관원과
공신에게 내려준 명칭이며, 이 때 그 업적을 기록한 것이 시장(諡狀)이다.
송시열이 쓴 정경세(1563-1633)의 시장은 관청에 보관된 원본이다.
이 시장은 서경(署經) 과정을 비롯하여 각 관부의 관문서가 첨부되어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
일단 관료가 되면 각기 해당 부처의 관원들과 공적 혹은 사적인 모임을 갖는다.
가장 흔한 회합은 이른 바 같은 부서에 근무하는 동료 관원들과의 모임이고
또 한편으로는 과거 동기생들과의 모임이다.
이들 모임은 단순히 시문을 짓거나 오락에 그쳤던 것이 아니라 그 모임의 자체를 기록으로 남겼다.
동관(同官) 및 동방(同榜)의 계회도, 계회첩, 시첩 등이 바로 그것이다.
같은 부서에서 함께 근무했거나, 사마 혹은 대과에서 같은 시험에서 합격했다는 사실은 그 구성원들의
관료로서의 진출, 학문적 정치적 성향 등 해당 인물의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1602년 용만가회사마방록, 1630년 임오사마방회도, 1823년 금오시첩 등이 이에 해당한다.
한편 1585년~1590년 사이에 그려진 이응인(李應仁)의 인동감시시관계회도, 1610년
사림오현(士林五賢)을 문묘에 배향할 때 집사로 참여한 정경세의 성정계첩은 기록화
가운데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것으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1729년에 작성된 권이진(權以鎭, 1668~1734)의 무수동도(無愁洞圖)는 그가 호조판서로 서울에
거주할 때 고향마을이었던 공주목 산내면 무수동 일대를 화공에게 그리게 한 것이다.
이는 엄격히 말하자면 관료로서 행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중앙의 관직을 수행하면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한 인간의 고뇌와 체취를 느끼게 하는 작품으로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한편 이 그림은 전통시대 마을의 경관을 실경과 흡사하게 구현하였다는 점에서 회화사뿐만 아니라
사회사와 생활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여 진다.
2. 지방자치와 민원해결
1) 지방자치
현존 고문서는 그 작성의 지역적 배경이 대부분 지방, 그리고 그 속에서 세거해 온 가문이다.
지역인으로서 한 개인은 마을(동) - 군현으로 이어지는 행정조직과, 가중(家中), 문중(門中),
향중(鄕中), 계중(契中), 원중(書院中), 교중(鄕校中)가 같은 자치조직에 의해 수행되는 교화, 교육,
향사(享祀)와 같은 내용을 매개로 하여 거미줄처럼 교차되는 삶의 그물망에 의해 통제되고 교화된다.
이 가운데 지역주민의 삶과 가장 밀접한 연관성이 있는 부분이 향약과 동계이다.
이것은 경상도 경주의 양동마을의 경우에서도 생생하게 구현된다.
양동마을은 하회마을과 더불어 반촌(班村)으로서 유명하지만, 사족간 혹은 같은 마을
사람을 대상으로 한 향약과 동약이 시행되었고 그 기록이 온전히 전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 마을은 조선시대 초기이래 경주손씨(慶州孫氏)와 여강이씨(驪江李氏)가
지배 사족으로서 대대로 동족마을로 계승하여 왔다.
1819년 양좌동초안(良佐洞草案)에 의하면 마을의 당시 호수는 91호 정도였고
근대적 호구 조사가 이루어진 1973년에는 손씨가 28호, 이씨가 88호를 차지하였다.
두 문중은 외손 관계로서, 동민 교화와 사족지배질서의 확립과 그 유지를 위해 협력을
아끼지 않았는데, 이에 관한 문서가 향약과 동약의 운영과정에서 남긴 각종의 기록들이다.
양동향약안(良洞香約案)은 1689년부터 1782년의 100여 년의 시기에 걸쳐
작성된 것으로, 양동마을에 거주하는 경주손씨와 여주이씨의 두 가문 인물들이
지켜야 할 각종 규약 및 참여한 사람의 좌목을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1609년부터 1769년 사이에 작성된 양동동안은 마을의 동약에 참여한
인원의 좌목 등을 기록하고 있는 자료로 상ㆍ하계로 구분되어 있어,
손씨와 이씨의 두 사족뿐만 아니라 서자나 양인 및 천민들도 동계 동약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자료는 사회분화의 모습을 분명히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그 밖에 양동동중완의(良洞洞中完議)가 있는데, 이는 19세기 접어들면서 이완되고
해이해지는 동민들의 풍속을 다잡기 위해 마을 구성원들의 합의사항을 적은 것이다.
2) 민원해결
양반과 평ㆍ천민을 막론하고 왕이나 관청에 자신의 민원이나 청원을 제기하는 방법은 여러 경로가 있었다.
왕에 대하여 선비들의 경우는 상소, 백성들은 신문고를 두드리거나 징을 치는(擊錚)의 방법을 쓰는
방법이 존재한다. 하지만 가장 일반적인 민원, 청원의 방법은 흔히 소지(所志), 상서(上書)라
통칭되는 청원서를 통해 관청에 그 내용을 전달하는 방법이었다.
이 청원ㆍ민원의 처리절차를 보면 소지를 수령이나 관계 관청에 올리면 해당관원은
그 소지에 대한 판결을 내리게 되는데 이를 제음(題音)이라 한다. 제음이 내린 소지는
청원을 한 사람에게 되돌려주어 그 판결의 지속성을 유지하고, 또 증거자료로서 보관하였다.
소지는 내용상의 차이보다는, 발급주체의 신분이나 형식에 따라 다시 발괄(白活),
등장(等狀), 단자(單子), 원정(原情), 의송(議送) 등으로 구분된다.
소지의 수급자는 관찰사, 감사, 군수, 현감, 어사 등이다. 이러한 민원의 처리과정에서
소지보다 법제적인 효력을 갖도록 한 것이 완문(完文)과 절목(節目)이다.
다만 완문과 절목은 청원이 아닌 경우에도 관청이나 향청(鄕廳), 질청소지는 사인(士人)과 서민의
생활 중에서 생긴 제반 문제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당시 사회의 생활상, 활동상을 반영한다.
특히 지방의 경우 지방의 실정과 개인의 고민, 그리고 그 처리내용을 반영하므로
지역사 연구에는 필수적인 자료이다. 또 관청과 관청사이, 관청과 일반백성 사이,
백성들 사이의 제반 다양한 문제들을 통해 그 시대인들의 의식의 범주와 사회 성격도 엿볼 수 있다.
경주손씨가에는 현존 최고(最古)의 결송입안(決訟立案)이 전한다.
이 자료는 1560년 사돈간인 손광현(孫光睍)과 최득충(崔得忠) 사이에 벌어진
노비 소송에 대한 것으로, 법제사적 가치뿐만 아니라 여성의 지위와 그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성사 연구의 중요한 사료이다.
3. 경제생활 -매매와 상속
1) 노비ㆍ토지의 매매
명문(明文)이란 개인과 개인, 또는 다자(多者) 사이에 특정사안에 대하여 합의하고
그 사실을 문자를 통해 공표함으로써, 상호간의 권리와 의무관계를 밝힌 문서를 말한다.
명문은 매매 이외에 분재기 등에도 광범위하게 쓰여진 용어였다.
하지만 명문의 대부분은 토지, 가사(家舍), 노비(奴婢) 등을 매매할 때 사용된 계약서이다.
토지명문에는 매매, 전당, 상환 등 그 내용에 따라 몇 가지로 구분된다.
일정기한을 정해 돈을 빌리면서, 전답을 저당 잡히는 문서를 흔히 전당(典當)문기라고 부른다.
정작 고문서에는 이러한 문서를 수표(手標), 수기(手記) 혹은 불망기(不忘記)라 하기도 했다.
상환문기란 말 그대로 매매 당사자끼리 서로에게 편리한 다른 물건으로 교환하는 내용을 담은 문서를 말한다.
매매의 경우, 토지와 노비를 막론하고 계약이 있은 지 100일 이내에 관에
신고하여 관부의 공증문서인 입안(立案)을 받도록 법에 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노비 거래의 경우에만 입안이 철저하였고 토지의 경우 조선 중ㆍ후기 이후에는
입안을 생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명문의 내용은 작성 시기, 발급자와 수급자, 해당 물건의 전래경위, 매매사유, 매매내용,
가격, 약속 위반 시의 조치사항 등을 기재하고 있다.
또한 이와 함께 매매 당사자 및 증인ㆍ필집인(筆執人:집필자)의 서명이 있어야 한다.
서명은 수결(手決)이라고 통칭하기도 하는데, 작성 시기나 남녀, 신분 또는
당사자의 지위(官人, 私人의 여부) 등에 따라 호칭, 서명방법과 내용이 차이가 있다.
요컨대, 사대부 남자의 경우 착명서압(着名署押) 또는 서압(署押), 부녀자는 도서(圖書)를 한다.
일반 양인과 노비를 비롯한 천인은 수촌(手寸), 수장(手掌) 등 수형(手形)을 표시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2) 재산상속
개인 또는 조직(문중,또는 계)의 경제적 토대와 그 경위를 알려준다는 점에서
재산 상속에 대한 기록은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재산을 상속한 내용을 기록한 문서가 곧 분재기(分財記)로, 분재기란 재주(財主)가
노비 토지 가사(家舍) 우마(牛馬) 가재도구 등 재산을 자녀들에게 상속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재산상속은 재주가 살아있을 때 분재하는 경우와 재주가 죽은 뒤 시행하는 두 경우가 있고
그 방법에도 몇가지 차이가 있다.
따라서 분재 시기나 상속방법에 따라 분재기를 분류하면,
① 금급문기(衿給文記) 혹은 분금문기(分衿文記),
② 별급문기(別給文記)
③ 유서(遺書) 혹은 유언(遺言)
④ 화회문기(和會文記) 등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금급은 ‘깃급’으로 읽으며, 재주(주로 부모)가 자식 각자의 몫(衿)을 나누어주는 것을 말한다.
이 때 ‘몫’이란 상속 주체가 상속인 개인의 능력, 처한 입장, 또는 사회 관행에 따라
정해 진 상속의 양을 뜻한다. 따라서 자식 각자의 몫은 시대 상황이나 가족 구성상의 처지에 따라 달랐다.
주로 남녀, 장자ㆍ차자 여부, 그리고 봉사(奉祀) 여부가 상속의 양을 규정하는 요소가 된다.
예컨대, 평균분급(平均分給)이 일반적이었던 조선전기의 경우 자식간의 균분(均分)된 양,
과거 등으로 인해 별급 받은 양 등이 각자의 몫이다.
별급은 과거합격, 혼인, 득남, 효성, 봉사(奉祀) 등 본인의 능력이나 처한 입장에 의해
재주가 ‘특별히 재산을 증여하는 것’을 말한다.
유서ㆍ유언은 재산상속과 관련하여 자손들에게 특별히 당부할 필요가 있을 때 작성되었다.
주로 서모(庶母)나 양ㆍ천첩자녀(庶孼), 봉사자(奉祀者)를 배려하기 위해 행한 경우가 많다.
궁극적으로는 훗날의 분쟁을 막고, 분재의 이견을 없애기 위해 행해졌다.
화회 분재는 재주의 사후, 자식 등 후손들이 한 장소에 모여 만장일치로 행한 상속행위를 말한다.
재주에 의한 금급 분재나 동생(同生)들에 의한 화회 분재는 대개 그 가문의 전통에 따르는 경우가 많다.
분재기 양식은 대체로 재산을 상속하는 배경, 자녀별로 나누어진 토지와 노비, 가옥, 가재(家財)의
내용과 수가 기재되고, 마지막으로 재주, 증인, 필집 등의 서압(署押)과 도서(圖書)를 행하였다.
이러한 분재기는 공신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소송의 증거자료로 빈번히 제출되기도 하고
판결의 유용한 자료로 채택되기도 했다.
재산상속은 복잡한 가정사만큼이나 여러 가지 조건이 있고, 어떤 때에는 분재 때문에
부모자식 혹은 동생들끼리 긴장관계가 형성되기도 한다.
하지만, 비록 집집마다 사연이 많고 여러 분재원칙이 있었을지라도 이들 원칙을 포괄하는 대원칙이 있다.
조선전기의 경우 대체로 그 원칙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 균분 원칙
∙ 금득(衿得)한 재산에 대한 배타적 처분권 부여
∙ 손외여타(孫外與他) 금지
균분원칙이란 남녀 혹은 장ㆍ차자를 막론하고 부모(상속자)가 남긴 재산은
양적 질적으로 ‘정확ㆍ철저하게’ 나누어 가진다는 뜻이다.
이에 따라 노비의 경우 노(老:50세 이상)ㆍ장(壯:16~49세)ㆍ약(弱:0~15세)으로 구분해
분재했으며, 심지어 그 분배 기준으로서 미(迷), 즉 노비의 지능까지도 구분하였다.
전답의 경우 수확량 단위인 결부( 結負)를 기준으로 분재하였다.
즉 면적 단위인 두락지(斗落地:마지기)보다는 파(把) - 속(束) - 負(卜) - 결(結)의 소출량 단위로 분재하였다.
물론 이 방법도 분재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전답에서의 이러한 분재 과정을 분재기에서는 ‘집주분금(執籌分衿)’이라 하였다.
집주 분금이란 ‘산대(算臺)를 잡고 일일이 정해진 원칙과 관행, 그리고 법에 따라
몫을 계산해 나누는 행위’를 말한다.
1510년에 작성된 손소자녀칠남매화회문기(孫昭子女七娚妹和會文記)에는
7명의 자식들의 노비 18~19구씩 정확하게 균분하고 있고, 뿐만 아니라
동일한 문서를 7매 작성하여 각기 나누어 가진다고 명기하고 있다.
일단 분재가 된 뒤 그 재산은 부변(父邊)ㆍ모변(母邊) 등 금득별(衿得別)로 치부해 두며
각자 몫에 대한 처분권은 결혼 뒤일지라도 부부 각자에게 있다.
따라서 타인 몫을 상속하거나 방매 할 때에는 반드시
금득자의 허락, 즉 동의(同議) 절차를 거쳐야 했다.
예컨대 분재기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란히 서명하거나 도서를 찍는 것은 분재행위에 대하여
부부가 동의하고 승낙한다는 표시이다.
손외여타 금지란 ‘자손 이외 타인에게 재산을 주지 말라’는 재주의 의지를 반영한 것으로서
조선초기 문서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다. 혈연 즉 ‘피’가 제도나 의례(儀禮)보다도
우선한다는 것은 인간의 원초적 본능인 동시에 사회의 전근대성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재산의 자녀간 균분, 그리고 상속재산의 자녀별 관리와 처분권 인정에 관한 문제는
조선사회의 사회 경제적 구조와 관계된 중차대한 문제이다.
즉 자녀간 균분상속은 부의 집중과 확대 재생산을 방해하는 조건이 되었고 부변 모변과 같은
몫별 재산상속의 종말은 필연적으로 여성의 경제적 지위를 하락하게 되는 요인이 되었다.
호주제 개폐 등 오늘날 쟁점이 되고 있는 사회문제의 초점은 이와 같은 조선조 사회의 구조적 요인,
특히 사회 경제적 요인의 분석 위에 그 해답이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4. 여성생활
유교사회에서는 남녀유별(男女有別)이라는 역할분담 원칙에 따라 집 밖에서
이루어지는 제반사는 남자들의 몫으로 돌렸다.
그러나 유교이념 특히 주자가례가 사회 전반에 확산되지 않았던 조선전기까지만 하더라도
여성의 사회활동이 남성의 보조적 차원에서 행해진 것은 아니었다.
여성의 사회활동은 전통시대에 있어서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다양했다.
다만 그 활동을 알려주는 기록이 빈약할 뿐이다. 연구사를 통해 보면, 17세기 이전의 상속 및
가족제도를 통해 여성의 참모습들이 일부 조명되고 있다.
하지만 이것도 사료에서 확인된 것만을 부조적으로 드러낸 것에 불과할 뿐이다.
고문서에는 여성의 생활상과 그 의식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많다.
그 보편성 여부는 접어두고서라도 여성의 다양한 측면을 그려주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있는 기록이다.
명분이 우선하는 조선조 사회에서 제사문제는 여성의 재산상속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다.
우선 제사의 유형부터 살펴보자. 상속과 제사문제의 본질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17세기 중엽 이전의 관행을 살펴보아야 한다.
자식의 입장에 섰을 때 남녀간 균분(均分) 상속은 하나의 권한이었지만, 제사는 이에 수반하는 의무였다.
즉 재산 상속의 반대급부로서 자식들은 부모 및 조상에 대하여
봉양과 제사봉행이라는 의무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제사의 방법은 윤회봉사와 분할봉사로 크게 구분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우리 선조들은
윤회봉사를 채택하였다.
윤회봉사란 자식들이 번갈아 가면서 선대의 각종 제사를 전담하여 설행(設行)하는 것을 말한다.
이 때의 자식이란 남녀 혹은 장자 지차를 막론하고 모든 자식이 윤회봉사의 주체가 된다.
윤회의 경우, 대상이 되는 제사는 기제(忌祭) 뿐만 아니라 사명일(四名日:정월 초하루, 한식, 단오, 추석)
제사, 묘사(墓祀) 등 그 종류가 다양하다.
윤회봉사는 하나의 관행이기에 문서로 남아있는 예는 흔치 않다.
그런데 고산 윤선도의 아들 윤인미(尹仁美, 1607-1674)의 처가 문화유씨가에서는
그 사실을 문서로 남기고 있다. 유씨가의 <忌祭ㆍ墓制次例>에 의하면, 기제의 경우
시대봉사(四代奉祀)의 예법에 따라 고조부ㆍ모, 증조부ㆍ모, 조부ㆍ모, 부주(父主
모주(母主) 등 조상의 제사를 각각의 자식들이 분담, 윤행하였고, 묘제는 정조(正朝,정월초하루),
한식, 단오, 추석 때에는 제사의 담임자는 제물을 직접 장만하고 제사를 모셨다.
딸의 친정 제사 윤행(輪行)은 여성의 사회 경제적 지위와 관련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제사는 자식 된 자의 당연히 해야할 의무였지만, 재산의 균등분배는 그 의무에 대한 권리였다.
그러나 제사를 모시지 않는 다는 것은 의무의 불이행이자 권리를 포기였다.
17세기 중엽 제사의 윤회가 해소되면서 여성에 대한 차등분재가 새로운
관행으로 굳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여성의 차등 분재에 대해 양반가의 논리는 매우 정연하면서도 단호하다.
그 논리의 과정을 추적해 보자. 사대부가에서 딸이 제사에 참여한다는 사실은
그 남편인 사위(女婿)와 그 자식인 외손이 제사를 주관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조선후기 이른 바 유교적 예제의 성립과 발전은 사위 및 외손의 처가,
외가 제사에 대한 인식의 대전환을 가져온다.
세간의 사대부가에서는 사위 집에서 제사를 윤행하는 것이 흔하게 있어왔다.
그러나 일찍이 남들의 사위 및 외손들을 보건대 제사를 (뒤로)미루거나 왜곡시키거나 빠트리는 자가 많다.
비록 제사를 모시더라도 제물(祭物)은 정결하지 못하고 제례(祭禮)에는 정성과 공경함을 결여하고 있으니
이는 도리어 제사를 행하지 않아서 나음만 같지 못하다.
‘처삼촌 벌초하듯 한다’는 속담이 있다.
바로 조선후기 사위, 외손의 처가 제사에 대한 태도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이러한 논리의 연장선상에는 딸 자식을 제사 윤행의 대상에서 제외시키는 것이었으며
궁극적으로는 남녀의 평등분배라는 분재권을 제약, 또는 축소시키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다.
그 논리는 한마디로 ‘딸 자식은 부모 생전에 봉양의 도리도 못하고, 사후에도
행제(行祭)의 예법도 차리지 못하니 남자들과 재산을 등분(等分)할 수 없다’ 는 것이었다.
17세기 중엽 전라도 부안의 부안김씨의 경우, 결국 딸에게는 남자의 1/3에 해당하는
재산만을 분재하도록 하는 변화된 원칙을 만들어 대대로 준수토록 했다.
즉 남자 상속분의의 1/3만을 분재한다는 정식(定式)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딸이나 아들이나 부모의 자식이라는 데에서 차별성이 없어 그 분재권은 인정되지만
여자는 부모 봉양과 조상에 대한 봉사라는 의무를 다할 수 없기 때문에, 의무를 이행치
못하는 만큼 그에 상응하는 재산상의 불이익을 주겠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상속제의 변화는 17세기 이후 이른 바 종가 및 동성촌(同姓村)의 형성과 발전
그리고 남귀여가혼의 해소와 직접적 관련성이 있다.
특히 주자가례에 다른 종법제의 벌전은 남자 중심으로 가계(家系)를 상속토록 하는
이른 바 종통(宗統) 의식을 확산시켰고, 이에 따라 변화된 혼속이 영부제(迎婦制)였다.
영부제는 시가에서 며느리를 맞이하는제도로서 오늘날 가부장적 유교사회의 유산 가운데 하나이다.
17세기 혼속 및 상속제의 변화에 따라 나타난 관행은 가기(家基) 및 전답 노비를 남자에게만
지급하는 현상으로 낳았다.
이에 조상 전래의 전답이나 노비는 딸에게 더 이상 분재의 대상이 아니었고, 가문을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재산을 반드시 남자에게 주어, 대대로 상속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은 17세기 중엽을 기점으로 생긴 약 250년 간의 전통에 불과한 것이었다.
여성상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민원의 제기와 해결과정에서 보여주는 여성의 역할이다.
이 과정에서 여성들은 특유의 섬세하고 자상하며 구체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가정내의 양자(養子) 및 서자(庶子) 문제는 여성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하였으므로 그 대응에 있어서 보다 적극적이었다.
따라서 여성이 주체가 되어 작성한 고문서 가운데에는 이에 관한 것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1634년 <이지처고령신씨발괄(李遲妻高靈申氏白活)>이 경우가 바로 이 경우에 해당한다.
남편과 자식을 일찍 여윈 신씨는 매득(買得) 문서가 소실된 것을 기화로 주위 사족이
그 매도 사실을 부인하고 그 소유권을 부정하였다.
이에 신씨는 관련 사항을 구체적으로 적시하는 한편 적극적으로 나서 자기 의사를 관부에 개진하여
소유권을 방어한다. 시집간 딸의 친정 재산권 유지 문제, 그리고 그가 자식없이 죽었을 경우의
재산 귀속문제는 여성의 사회 경제적 위상을 가름하는 하나의 척도가 되었다.
초기 조선왕조실록에는 이에 관한 기사가 빈번하다.
시집간 딸은 친정으로부터 대개 두 번에 걸쳐 재산을 상속받는다.
첫 번째는 혼인할 당시로서, 이른바 신노비(新奴婢)를 받는다.
신노비는 신부가 생활하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유모(乳母) 혹은 사환을 목적으로 분재된 노비였다.
대체로 2~4명을 받는데, 남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그 친가에서 노비를 상속받는다.
두 번째는 부모 혹은 자식들에 의해 전 재산을 일시에 나누어 가지는 경우이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문서를 ‘도문기(都文記)’라 하였다.
분재에 있어서 논란거리 가운데 하나는 딸이 시집가서 자식이 없이 죽었을 경우이다.
이 때 그 딸이 친정으로부터 이미 지급받은 재산을 친정측과 시집측이 어느 비율로 나누어
가지는 것이 논란의 핵심이다.
법전의 내용을 요약하면 자식 없이 죽은 전모(前母) 측(친정측)과
의자녀(義子女, 시집측)의 상속비율은 기본적으로 사대 일(4:1)이었다.
그러나 후처의 자식으로 죽은 딸의 제사를 모시게 되는 의자녀가 가계(家系)를 계승하는
승중자(承重子)일 경우 3분(分)을 더해 주도록 했다.
즉 대개의 경우 본족인 친정측과 시집측은 4 : 4의 비율로 재산을 나눠 갖게 되었던 것이다.
여성이 자식이 없을 경우, 또 하나의 방편은 조카 등 시집의 인물 가운데
적당한 사람을 시양자(侍養子)로 삼아, 그에게 재산을 상속하는 방법이다.
1539년 <안동부상속입안(安東府相續立案)>이 바로 그러한 유형에 속한다.
여성의 사회활동에서 한자(漢字)는 여러 가지 면에서 걸림돌임에 틀림없었다.
따라서 한글의 창제는 여성들의 의사소통 수단의 큰 변혁이었다.
한글의 가장 큰 의의는 여성들이 그들의 의사를 자기 손으로 직접 기록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한글창제이후 서간에서뿐만 아니라 투서, 진정 등의 수단으로 꾸준히 한글이 사용되었으며
조선왕조실록에는 이와 관련된 기록이 빈번히 등장한다.
한편 민간에서는 여성들이 소지를 올리면서 한글을 사용하는가 하면 문집 등에서 시문을
창작하면서도 한글을 구사하였다. 그러나 가장 빈번히 한글이 사용된 것은 편지였다.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여성들이 언간을 통해 자기 의사을 분명히 전달하고 있는 가문은
충청도 회덕(懷德)의 은진송씨(恩津宋氏) 가문이 아닌가 한다.
재월당 송규렴 종가, 동춘당 송준길 후손가 등지에는 다수의 언간이 전하는데, 이것은
송씨 가문 고문서의 특징이기도 하다.
1705년 <호연재언간(浩然齋諺簡)>이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이는 여류문인으로도 유명한
호연재 안동김씨의 언찰을 모은 간찰첩이다.
호연재 안동김씨 자신은 간찰뿐만 아니라 <오두추치(鰲頭追致)>, <호연재유고(浩然齋遺稿)>
<자경편(自警篇)>등의 시문을 남긴 인물이다.
하지만 이는 이 가문의 간찰 가운데 극히 일부로 호연재 안동김씨와 그 후손되는
며느리들은 대대로 언간을 통해 의사를 주고받았다.
이 가문에는 17세기~20세기에 이르는 약 3세기 동안 약 300 여 통의 언간이 전한다.
▶ 옛 사람들의 문화
1. 찬란한 인쇄문화
직지심경과 팔만대장경이 웅변하듯 우리의 인쇄술은 서양인들조차 탄복한 우수한
문화로서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계승되면서 화려한 꽃을 피웠다.
특히 조선시대는 문치주의의 기치 아래 경사ㆍ문집ㆍ족보류 등 서책의 출간이 보다
다양화되어 인쇄ㆍ출판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문헌 자료의 특성상 다량의 고문서가 소장된 집에는 그에 상응하는 고서가
소장되어 있기 마련이고 고판본의 존재 역시도 가문의 역사와 맥락을 같이하였다.
자료의 수집ㆍ정리에 있어 고문서와 고서를 별개로 여길 수 없고, 연구자의 구미에 맞은
표적조사가 지양되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결국 문헌 조사는 고문서ㆍ성책본ㆍ고서 분야의 전문가가 공동으로 수행할 때
그 효과가 배가될 수 있고, 무지에 따른 귀중한 문화의 사장을 최소화 할 수 있을 것이다.
본원의 고문서 조사는 전형적인 고문서는 물론 성책본, 고서에까지 확대
적용하는 방식으로 추진되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번 전시회에 소개된 고서들도 모두 이렇게 수집,정리된 자료들이다.
우선『통감속편(通鑑續編)』은 조선초기 인쇄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자료로서
현재 국보 제283호로 지정되어 있는 귀중본이다.
그리고 만당(晩唐) 시인 26인과 신라 시인 4인의 시 10수씩을 수록하여 간행한『십초시(十抄詩)』역시
조선초기 목판 인쇄술의 우수성을 감상할 수 있는 귀중본이다.
특히 본서에 소개된 본은 현존하는 여러 종의 십초시 중에서도 형태와 내용에 있어 가장
선본으로 꼽히고 있어 고대의 문학과 역사 연구에 크게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 된다.
『통감속편』과 『십초시』는 15세기 중반 손소, 손중돈을 배출하며 가문의 전성기를 누린
경주손씨 서백당(書百堂) 소장본인데, 위 두 고서 역시 이들 부자에 의해 입수,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서백당에서는 최근 원나라 말기의 법전인『지정조격(至正條格)』이 추가로
발굴되어 인쇄문화 연구의 보고로 인식되고 있다.
진주 단목리 담산종중 소장의『응제시(應製詩)』역시 조선초기 인쇄문화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현재 이와 동일한 판본이 더러 남아 있고 그 중에는 보물 1090호로 지정된 것도 있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응제시는 책장이 결락되거나 보사(補寫)되었고, 또한 책 전반에 걸쳐
부분적으로 마멸 또는 오손되어 정교하지 못한 것이 대부분임에 반해 담산종중 소장본은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여 낙장과 마손이 없고, 인쇄가 정교하여 책의 품위가 한결 돋보이는 선본이다.
소장처 담산종중은 조선초기 이래로 진주 대곡면 단목리에 세거한 양반가문으로 16세기
중엽부터는 다수의 학자를 배출하며 남명학파의 핵심으로 활동한 유서 깊은 집안이다.
특히 이 가문은 예로부터 문헌의 보존ㆍ관리가 남달라서 현존하는 문헌만도
응제시를 포함해 고서가 2,000여책, 고문서가 3,000여점에 달한다.
발굴된 응제시에는 소장자 하택선의 10대조 하응운(1676~1736)의 인장인 <습정재여등인(習靜齋汝登印)>과
증조 하우식(1875~1943)의 인장 <하우식담계(河祐植澹溪印)>이 날인되어 있어 이들 두 사람이 특히
애독했던 수택본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하응운은 재야의 학자로서 문집『습정재집』을 남길 정도로 학식이 깊었고
또 일가의 문헌 정비에도 열성이 깊어 1700연대 초반경에는 집안에 전해오는
모든 고전적들을 정리하여「장서목록」에 수록해 두었다.
본 응제시에 찍힌 그의 인장은「장서목록」정리시에 날인된 것이다.「장서목록」에 수록된
고서 중에는 응제시 외에도 희귀본들이 많은데, 조선중기의 시인 어득강(魚得江)의
시문집『관포집(灌圃集)』도 그 중 하나이다.
한편 16세기 이후의 조선은 유교문화가 사회 전반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종족 의식
또한 보다 강화되면서 족보나 문집의 간행이 활발하게 이루지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족보가 간행된 것은 고려말에서 조선초기로 추정되지만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족보는 1476년(성종 7) 서거정 등이 간행한『안동권씨성화보』이고
그 다음으로 1565(명종 20)에 간행된『문화유씨족보』와『강릉김씨족보』가 있다.
물론 비록 실물은 남아 있지 않지만 간행 기록이 전하는 것까지를 포함시킨다면
그 수는 훨씬 더 많아질 수 있겠지만 적어도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일부 특정 성관에
한해 족보 간행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임란 이전에 간행된 족보의 중요한 특징은 내외손에 대한 구분이 없고
자녀를 출생순에 따라 수록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17세기에 접어들면서 주자가례에 따른 종법질서가 강조되고
재산상속에 있어 자녀균분의 관행이 약화되면서 사회 전반의 분위기도
점차 장자나 종손을 중시하는 체제로 이행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딸이나 사위,외손의 지위는 약화된 반면 친족 중심의 종족의식은
더욱 강조되면서 족보 간행이 활발해졌던 것이다.
이에 종전까지는 가첩이나 가승을 통해 계보를 기록해 왔던 대부분의 가문에서
체제를 갖춘 족보를 경쟁적으로 간행하게 초간보 간행의 붐(Boom)이 일어나게 되었다.
17세기에 초간보를 간행한 집안은 밀양박씨, 전주이씨, 파평윤씨, 은진송씨, 청주한씨,
광주이씨, 한산이씨, 함양박씨, 의령남씨, 영양남씨, 여산송씨, 진성이씨, 순흥안씨,
경주김씨 등 그 수가 적지 않은데, 이번에 전시한『진양하씨족보』는 1606년 함양,
진주 일대의 하씨들이 중심이 되어 합천의 해인사에서 목판으로 간행한 족보이다.
이 족보는 17세기에 간행된 족보 중에서도 시기적으로 가장 이를 뿐만 아니라
인쇄 상태도 매우 뛰어난 선본이라는 점에서 이 시기 민간 또는 사찰 출판의 수준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특히 족보의 간행처인 해인사는 팔만대장경의 장판처로서 고려시대 이래로 승려들을 통해
인쇄 기술이 전수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하씨 족보의 간행은 바로 이러한 기술적
집약을 양반ㆍ사족들이 십분 활용했음을 의미한다.
한편 조선시대에 있어 양반 신분을 유지해 나가는 양대 요소는 역시 벼슬과 학문이었다.
전통적으로 서울ㆍ경기 일원의 양반들이 사환 지향적 속성이 강했다면 3남으로 통칭되는
지방 양반들은 벼슬보다는 학문과 저술에 전념하는 경향이 있었다.
관료에 대한 평가 기준이 공훈이나 청백, 그리고 경세가로서의 면모 등에 있다면
한 개인의 학문적 성취 여부는 문집이나 저술로 얘기되기 마련이었다.
특히 문집은 개인의 학문적 온축은 물론 그 가문의 사회,학문적 위상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었다.
그리하여 조선후기에 이르면 족보 못지 않게 문집 간행도 활성화 되었다.
그 열기는 현재 전국 각처의 서원이나 재실, 누정, 사찰 등에 보관되어 있는
책판들을 통해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다.
그러나 문집의 간행은 워낙 고비용의 문화 사업이라 자손이나 후학의 경제적 준비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었기 때문에 당사자의 사후 수백년이 지난 뒤에 간행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물론 일부 문집 중에는 위선 의식이 지나쳐 수준 이하의 간행물도 적지 않지만 조선후기에 들어
문집 간행이 횔성화 되었다는 것은 민간 출판이 그만큼 활발했음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문화사적으로 중요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번에 전시한『관감록(觀感錄)』목판 및 능화판은 임진왜란에서 큰 전공을 세운
박의장(朴毅長)의 실기인『관감록』의 책판과 표지 제작에 쓰인 능화판의 원본이다.
관감록은 속집을 합해 총 180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목판의 양면을 사용함으로써
간행에 소요된 책판은 90재이며, 현재 본원에서 책판의 전량을 위탁 보관 중에 있다.
그리고 책판의 옆면에는 각수의 이름이 새겨진 것도 있어 조선후기 민간출판을 연구하는데
좋은 재료가 될 것로 생각된다.
여기서 한가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책판의 보관과 보존 문제이다.
현재 전국 각처에는 매우 귀중한 책판들이 방치되어 훼손, 마멸되고 있으며
심지어 도난의 표적이 되어 상품으로 유통되는 안타까운 실정에 있다.
세계 일류의 인쇄출판문화를 이끌었던 선조의 유산이 온존하게 계승되지 못하고
훼손과 도난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아닐 수 없다.
일부 뜻있는 국학기관에서 이를 수집ㆍ보존하는데 노력을 다하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기는 하지만 범국가적인 대책이 하루 빨리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2. 학문과 예술
1) 왕들의 글씨
조선은 왕의 절대권력을 인정하는 왕조국가였다.
따라서 왕은 만기(萬機)를 주관하는 절대적 존재였고, 국가의 모든 권력은 왕으로부터 나왔다.
동시에 왕은 도적적으로 수양이 되고, 수준 높은 교양과 학식을 지닌 인격자라야 했다.
이것이 조선 사회가 추구했던 바람직한 왕의 모습이었다.
이런 권위와 위상에 걸맞게 왕은 당대 최고의 유수한 사대부 가문과 혈통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출생에서 사망에 이르기까지 온갖 특전을 누리며 생활하였다.
우선 단계별로 설정된 교육과정을 통해 당대 최고의 석학들로부터
군왕이 지녀야 할 학문과 덕목을 충분히 교육받을 수 있었다.
아가 궁중에 비치된 각종 희귀한 서적은 물론 글씨,그림 등의 뛰어난 예술작품을 열람,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기 때문에 왕과 왕실의 인사들 중에는 서화에 두각을 드러낸 사람들이 많았다.
조선 초기에는 세조ㆍ안평대군ㆍ문종ㆍ성종, 중기에는 선조, 후기에는
숙종,영조ㆍ정조가 명필로 이름이 높았다.
주지하다시피 세종의 아들 안평대군은 송설체의 대가로서 당시의 예단(藝壇)을 주도한 인물이었고
세조는 수양대군 시절에 이미 활자의 저본 글씨를 쓰는 등 탁월한 재능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한호의 석봉체(石峯體)를 익힌 선조는 작품활동이 매우 왕성하여 무수한 작품을 남겼고
이 글씨들은 후일 아들 의창군(義昌君)과 손자 낭선군(朗善君)에 의해「선조어필」,「열성어필」등에
수록되기에 이르렀다.
숙종은 조부 효종의 영향을 받아 송설체의 명서가로 이름이 높았다.
필자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해주오씨 추탄종택(秋灘宗宅)에 숙종어필이 전하고 있다.
어필의 대외 반출을 철저히 제한했던 당시의 관행을 고려할 때 이것은 숙종어필 중 진적,
묵적 형태로 사대부 집안에 전하는 몇 안되는 작품의 하나라는 점에서 중요성이 크다.
한편 영조ㆍ정조는 학문과 예술세계에 있어 군왕의 권위를 크게 격상시킨 왕이었다.
영조는 경연에서 신하들을 대상으로 강의할 정도로 학문적 자부심이 컸고
글씨 역시 상당한 경지에 올라 있었다.
그리고 정조는 역대 어떤 군왕보다 호학의 군주로서 스스로를 만천명월주인옹(萬天明月主人翁)으로
표현하는 등 정치ㆍ학술ㆍ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신료들을 압도했던 명군이었다.
특히 정조는 글씨는 물론 그림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현존하는 파초도는
정조의 그림 솜씨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명품이다.
이러한 왕들의 글씨는 왕실의 권위와 우수성을 드러내고, 후왕들을 위한
교본용으로 쓰기 위해 여러 명칭의 어필첩으로 간행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낭선군이 역대 왕들의 글씨를 모아 간행된『열성어필』이고
각 왕별 단독 어필첩으로『태조대왕어필』,『선조어필』,『영조어필』,『정조어필』,『헌종어필』등이 있고
중종연간 신공제가 간행한『해동명적』에도 문종ㆍ성종의 어필이 수록되어 있다.
이 외 낱장 또는 첩책 형태로 전하는 어필도 적지 않고, 대비,공주,왕자 등
왕실 인사의 글씨들도 상당수 남아 있다.
이번 전시에 포함된『선조어필』,『해동명적』,『열성어필』,「대로사비(大老祠碑)」는 그 중의
일부로서 부족하나마 역대 왕들의 글씨를 감상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이 중 송시열의 사당인 여주 대로사의 내력을 적은「대로사비」는 용인에 소재한 채제공의
뇌문비(誄文碑)와 더불어 정조의 대표적인 어제ㆍ어필비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사대부가에서 어필첩을 소장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여기에 전시된 어필들의 소장처는 우복종택, 서백당, 수당고택, 운문종택 등 영남, 호서의 고가들이다.
우복종택 소장의『선조어필』과『열성어필』은 17세기 초반 영남학파의 대표적 학자이며
인조조에 이조판서를 지낸 정경세 때 입수되었을 가능성이 크고, 서백당 소장의『해동명적』은
중종조에 우참찬을 지낸 손중돈이 중종으로부터 하사받은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운문종택 소장의「대로사비」는 영남내 노론의 명가였던 하씨 가문에서 노론 기호학파의
종사 송시열에 대한 존모심에서 이를 탁본하여 첩으로 꾸민 것으로 생각된다.
2) 학문의 자취와 자경(自警)
조선시대의 선비ㆍ학자들은 지행합일을 실천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고 선현들로부터
본받을 점이 있으면 이를 수용하거나 답습하는 데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학문하는 사람으로서 자기 관리에 충실하여 일상에서의 말과 행동의
조절을 통해 인격의 완성을 갈망하였다.
그리하여 자신의 학문활동에 참고가 되는 훌륭한 저술이 있으면 이를 필사하여 애독하였고 자신의
정신세계나 취향에 부합되는 자료가 있으면 이를 임모해 둠으로써 학문의 지평을 넓히고자 하였다.
이 점에서 식산종택 소장의「도서첩(圖書帖)」과「무이도첩(武夷圖帖)」에는 이만부의 학문적 관심과
영역, 그리고 주자학이라는 자신의 학문 원류에 대한 경모와 열정이 느껴지고 있다.
지식의 축적 자체가 학문의 궁극적 목표일 수 없었던 조선시대의 학인들에 있어
학문과 덕성을 겸비는 지난하지만 힘써 추구해야할 과제였다.
수신을 통한 인격과 덕성의 완성을 위해서는 극기가 필요했는데, 극기에 있어
빼놓을 수 어없는 것이 바로 스스로를 경계하는 자경이었다.
자신의 언행 및 내면의 경계를 위해 당시 사람들은 장재의 동명(東銘)과 서명(西銘), 정자의 사물잠[시잠(視箴
청잠(聽箴)ㆍ언잠(言箴)ㆍ동잠(動箴)], 주자의 경재잠(敬齋箴)을 널리 애송하였는데
이 잠명은 서예 작품의 주된 소재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조선시대의 학인들 중에는 자경을 위해 직접 잠과 명을 짓는 경우도 매우 많았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 이언적의 원조오잠(元朝五箴)과 안정복의 순암명(順菴銘)을 들 수 있겠다.
한편 자경을 위한 당시인들의 노력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풍류 문인들이 거문고에 금명을 새기는 것은 흔한 일이었고, 남명학파의 종사 조식이
패도에 명을 새긴 것은 익히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안동 순흥안씨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수오재경침(守吾齋警枕)은 천연목으로 이루어진
목침에 명을 새겨 자경의 의지를 다졌는데, 여기서 우리는 선인들이 자기 관리를 얼마나
철저히 했는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3) 문인들의 아회(雅會)와 전별(餞別)
옛 사람들, 특히 조선의 문인들은 삶의 격조와 운치를 누구보다 소중히 여긴 사람들이었다.
그러한 격조와 운치는 학문 연찬의 역경과 환로의 다단함으로터 과감히 탈피할 수 있었던
여유의 산물이었고, 동시에 그것은 일상에서의 활력소를 재충전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君子 以文會友 以友輔仁」이란『논어』의 한 구절은 당시 사람들이 벗을 사귀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고
여기에 취향이 같고 의기마저 상통한다면 더없이 좋은 없는 아회의 대상이 되었다.
문인 아회의 기원은 역시 중국이었다.
동진 시대의 명필 왕희지의 그 유명한 난정수회(蘭亭修會)는 그 격조와 풍취가 극진하여
아회의 전범처럼 여겨져 왔고, 사마광의 진솔회(眞率會), 백낙천의 향산구로회(香山九老會)
역시도 우리나라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신라 포석정이 말해주듯 유상곡수로 표현되는 난정수회류의 놀이와 모임은 이미 통일신라
시대에 그 흔적이 보이고 있고, 이런 경향은 고려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노인회 또는 기영회의 성격을 지녔던 진솔회ㆍ구로회는 조선시대 기로회의 유행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문인들의 아회가 그림이나 계회도첩으로 확인되는 것은 고려말~조선초기이다.
1476년 이증 등의 우향계(友鄕稧), 중종연간 이굉의 진솔회(眞率會), 낙사회(洛社會)를 비롯한
수많은 아회가 문인 사회에 깊이 뿌리를 내리면서 동향간, 친구간, 동갑간, 친족간, 동방간에
정담을 나누고시주로써 아취를 즐기는 일이 잦아지게 되었던 것이다.
본서에 수록한「난정수회첩」은 비록 중국 문헌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 문인들의 아회계회의
연원으로 언급되는 난정고사가 파노라마 형식으로 담겨져 있어 옛 사람들의 놀이 문화를 이해하는데
한결 효과적이다. 그리고 「섬사편」은 1754~1755년 여주이씨 성호(星湖) 일문의 인사들이
덕산현(지금의 예산) 탁천장(濯泉莊)에서 개최한 시회첩인데, 이 작품은 조선후기 선비들의
소박하고 진솔한 아회의 진면목을 살펴볼 수 있는 명품이다.
특히 유려한 시문과 글씨, 아회의 장면을 묘사한 정감어린 삽도, 고졸함이 느껴지는 인장 등에서
친족간의 정의를 다지고 시주로써 회포를 풀고자 했던 모임의 취지가 짙게 묻어나고 있다.
한편 조선시대 문인들에는 송별 또는 전별로 불리는 문화가 있었다.
전별은 주로 친구 또는 동료의 외직 부임시, 죄를 입어 유배를 떠날 때,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나 사명을 받아 중국으로 떠날 때 관례적으로 이루어졌다.
전별시에는 잔치를 열어 창수화답하며 이별의 아쉬움을 토로하고 선정이나
임무의 완수를 당부하고 격려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림을 그려 행사를 기념하기도 했는데, 1508년 이현보(李賢輔)의
전별연을 그린「한강점음도(漢江飮餞圖)」가 그 대표적인 사례에 속한다.
그리고 이 때 지으진 시문은 이날의 모임을 기념하기 위해 첩이나 축으로 꾸며져
보장(寶藏)되곤 했는데, 현재 유수한 가문에 소장된 별장첩(別章帖), 송별시축(送別詩軸),
연행증언첩(燕行贈言帖) 등이 바로 여기에 속한다.
문인, 관료들의 전별이란 것이 어찌보면 매우 호사스럽게 비쳐질 수도 있겠지만 당시의
관행으로 볼때는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었고, 또 시로써 정감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지식인들의 아취가 느껴지는 고급 문화라 할 수 있었다.
본서에 수록된「연행증언(燕行贈言)」은 1609년 봄 정경세(1563-1633)가 동지사에
임명되어 명나라로 떠날 때 지구ㆍ문인들의 송별시를 수록한 시첩이다.
여기에는 이호민(李好閔)ㆍ 심희수(沈喜壽)ㆍ이정구(李廷龜)ㆍ이정겸(李廷馦) 등 당대
일류 문인들의 격조 높은 시가 친필로 씌여져 있고, 사용된 종이 역시 색감이 다채롭고
다양한 종류의 인장까지도 날인되어 있어 첩의 품위가 한결 돋보이는 명품이다.
이 시첩을 통해 선인들의 전별 문화를 마음껏 느껴보기 바란다.
참고로 1614년 김중청(金仲淸)이 천추사(千秋使) 겸사은사(兼謝恩使)의 서장관으로서
명나라로 사행할 때 작성된 송별시첩인「조천별장(朝天別章)」역시도 수록된 인사들의 사회적 지위나
시문의 격조, 장첩의 솜씨 등을 고려할 때 현존하는 여러 연행송별첩 중 단연 주목되는 선본이 아닐까 싶다.
4) 명현들의 글씨
현존하는 고문서, 특히 성책고문서류 중에서 보관ㆍ보존 상태가 가장 완벽하고
소장자들이 가장 중요시 하는 자료는 역시 서첩ㆍ필첩류일 것이다.
서첩류는 크게 우리나라 명필의 글씨를 모은 것과 비록 명필은 아니지만
학문, 사회적 비중이 높은 인사들의 필적을 모은 것으로 구분된다.
전자는 작품성에 주안점이 있고, 후자는 이른바 명현에 대한 경모심이 글씨의
수장과 작첩으로 표현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두가지 요소를 다 갖춘 것은 더욱 애장 가치가 높아져 일가의 진장 문헌으로 세전되면서
전란이나 산업화의 와중에서도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다.
게중에는 명필도, 명현도 아니지만 추원의 뜻에서 선대의 유묵ㆍ서간을 모은 이른바
선적류의 서첩은 웬만한 가문이면 하나씩은 지니고 있다.
특히 명필의 글씨 중에는 진적여부가 확실치 않은 작품이 적지 않아 보다 철저한
검증이 절실히 요구되는 실정이다. 진적여부를 판명하기 어려운 주된 이유는 모본의 유행에서 기인한다.
옛 사람들은 명필, 명현의 글씨에 대한 소장 욕구는 더없이 높았으나 현실적으로 이를 소장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여건에서 요즈음과 같이 복사, 복제장비가 없었던 당시인들에게 있어
특정인의 글씨를 가질 수 있는 가장 부차적인 방법은 진적을 임모하는 것이었다.
이는 글씨에 대한 애착과 존경심에서 바탕하는 것으로 고의적인 위조와는 근본적인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다.
하지만 임모 능력이 워낙 뛰어난 나머지 수백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진적과 임모본을 명확하게
가릴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른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이런 여러가지 해결해야할 과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명필,명현의 글씨는 예로부터
가치롭게 여겨져 왔고, 그러한 가치 때문에 요사이는 도난, 매매의 표적이 되어
시중의 고서거리에서 상품적으로 유통되고 있어 안타까움을 남기고 있다.
본원에서 수 년간 동안 수집, 정리한 서첩류는 약 1,000점에 이르고 있으며
그 중에는 서예사 및 문화사적인 가치가 높은 유일본,희귀본이 적지 않았다.
본 도록에는 그 중 일부를 선별하여 수록한 것인데, 여기에 포함된 작품들 역시
자료적 가치거 높은 귀중본들이다.
먼저 1525년에 간행된「선우추ㆍ김생법첩」은 중국의 명필로 초서의 대가였던
선우추와 우리나라 신라의 명필 김생의 글씨를 합본한 것으로 현존하는 양인의
서첩 중에는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이다.
특히 이 서첩은 중종이 손중돈에게 내린 내사본이라는 점에서 출처도 분명하여
서지학적으로도 주목되는 작품이다.
그리고 흔히「소릉간첩(少陵柬帖)」으로 불리고 있는 이상의(李尙毅)의 간찰첩은 표제와는 달리
서첩의 모두에 축소 모사한 초상화까지 수록되어 있어 서화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서첩의 주인공 이상의는 선조~광해군조의 명신으로 시문에 능했고, 명필로도 이름이 높았다.
여기에 수록된 글씨는 비록 간찰이기는 하지만 이상의의 서예 세계를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그리고 모두에 수록된 초상화는 아버지 윤두서(尹斗緖)를 이어 그림으로 명성을 날렸던
윤덕희(尹德熙)의 작품이란 점에서 매우 주목되고 있다.
「천금물전(千金勿傳)」은 숙종조의 문신 이하진(李夏鎭)의 서첩으로 10첩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이하진은 이상의의 손자로 글씨로 이름이 높았고, 아들 이서(李漵)는 소위 동국진체의 창시자로
잘 알려져 있는 명필이다. 종전까지 이하진은 명필로만 알려져 있었을 뿐 그의 서예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진행되지 않았는데,,
한편 진양하씨 담산종중 소장의「남명비첩(南冥碑帖)」은 글씨 자체보다는 역사성이 깊은 작품이다.
이 글씨는 송시열이 찬한 조식의 신도비명을 후학인 전우가 쓴 것을 1920년에 목판으로 간행한 것으로
묵적이 아니다. 주지하다시피 남명의 신도비는 정치적 파란에 따라 여러차례 개수(改竪)되는
곡절을 겪다가 최종적으로 송시열이 찬한 비문을 새긴 것이 남게 되었다.
그런데 이 비문을 전우가 친히 서사했고, 전우의 후학들이 이를 다시 간행한 사실에서
당시 남명학파권에서 차지하는 노론 기호학파의 학문적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전우는 당시 노론 학계를 대표하던 학자로 필치가 독특하기로 유명하였는데, 이 글씨는
장중함이 엿보이는 그의 역작이라 할 수 있다.
명현의 글씨와 관련하여 주목할 인물은 이만부(李萬敷)이다.
그는 남인의 명가 연안이씨 출신으로 원래 서울 태생이었으나 17세기 후반 상주로 낙남하여
일생 학문에 전념한 학자였다. 특히 그는 남인의 학문ㆍ정신적 구심점이었던 허목(許穆)의 문인으로
글씨에 있어서도 스승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전서는 상호 식별이 어려울 정도로 유사하다.
이만부는 글씨는 물론「누항도(陋巷圖)」를 그릴 정도로 그림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글씨는
여러 서체에 두루 능했는데, 전서에 특장이 있었다.
본서에 수록된「식산당전법(息山堂篆法)」과 「고문(古文)」은 그의 대표작으로 조선후기
서예사 연구의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이 외「창계수묵(滄溪手墨)」,「선적(先蹟)」등 창계가문 소장의 서첩 역시도 서예사적 가치가
돋보이는 명품들로서 관련 연구자의 충실한 검토가 있기를 기대해 본다.
3. 선비의 유향 -동춘당 명품특선
조선왕조 500년 동안 유교적 이념과 가치에 충실하고, 예의염치를 지키며 지행합일을 추구했던
학인이 적지 않았겠지만 여기서 소개하고자 하는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역시 한시대의 귀감이요.
본보기가 되는 진정한 선비의 한사람이 아닐까 싶다.
이런 조심스런 평가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양질의 교육을 받았고, 학문은 깊되
출세와 영화를 탐하지 않았던 자족과 겸양, 치우침 없이 인협(寅協)할 수 있었던
온유함과 포용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본원에서는 2003년 2월 대전 은진송씨 선비박물관 소장의 고문서를 조사,정리하는 과정에서 여러
종류의 동춘필적을 접하고 분량의 방대함과 장첩의 섬세함에 있어 일견 일가의 진장문헌임을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동춘당의 서예에 대해서는 일부 연구가 되기는 했지만 이 많은 자료를 두루 섭렵한
종합적인 연구는 없었고, 일반일들 역시 동춘당의 다양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이에 본원에서는 이번 전시를 계기로 학술적 고찰을 진전시키고, 일반의 문화 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동춘당의 글씨 13점을 엄선하여 선비의 유향이란 기획 코너를 설정한 것이다.
수록된 13점의 글씨 중 우곡잡영(愚谷雜詠) 등 동춘당의 행서ㆍ초서가 수록된「동춘필적」하나만
진주정씨 우복종택 소장본이다. 이 글씨가 우복종택에 소장된 것은 동춘당이 정경세의 사위라는
혼인관계에 따른 것으로 서첩의 주된 내용인 우곡장영 역시도 정경세(鄭經世)의 글이다.
본서에 수록한 13점의 글씨는 서체에 있어서는 해서ㆍ행서ㆍ초서, 내용에 있어서는
간찰ㆍ시고, 자대에 있어서는 대자ㆍ소자 등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
특히 맨 마지막에 수록한 한글서간에서는 한문과는 다른 색다른 감동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단 비갈 등 금석문 글씨를 수록하지 못한 것이 한가지 아쉬움으로 남는다.
수결(手決)
▶ 관직에 있는 신분계층에서만이 쓰는 부호.
‘一心’ 두 글자를 뜻하도록 고안하고 있다. 즉, 수결의 특징은 ‘一’자를 길게 긋고 그 상하에
점이나 원 등의 기호를 더하여 자신의 수결로 정하는 것으로, ‘일심’ 2자(字)를 내포한다.
따라서 수결은 곧 사안(事案) 결재에 있어서 오직 한마음으로 하늘에 맹세하고
조금의 사심도 갖지 아니하는 공심(公心)에 있을 뿐이라는 표현으로 써 왔다.
중국이나 일본에는 일심결(一心決)의 수결제도는 없고 서압만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수결은 조선시대에 한하여 사용하였던 것이다.
수결의 형태는 ‘일심’을 뜻하고 언뜻 보아도 ‘일심’으로 보게 하지 아니하면 안 된다.
수결은 직함 밑에 일심결을 사람마다 다르게 두고 있었으며, 후세에 일견하여
그 수결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사서(史書)를 뒤져 그 당시 누가 그 직(職)에 있었는가를 알아보지 않고서는 그 수결의 본인을 알 수 없다.
1759년(영조 35) 한성부(漢城府)의 호적(戶籍)은 모두 직함 밑에 성자(姓字)도 없이 수결을 두고 있다
또 한성부 호적 1789년(정조 13) 분을 보면 당상(堂上)의 수결은 직접 붓으로 두지 아니하고
나무도장으로 수결을 새겨 찍은 예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구전(口傳)되는 수결의 이야기로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이항복(李恒福)은 산적한
시무(時務)를 처리함에 있어 일일이 수결을 두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고안한 그의 수결은 다만 ‘一’자로 그 상하에 아무런 가점(加點)이 없었다.
어느 사안의 결재가 논의되었을 때 자신의 수결을 둔 기억이 없어 결재한 바 없다 하였으나 담당관은
오성의 수결이 있는 문건(文件)을 제시하여 이것은 분명 대감의 수결임에 틀림없지 않느냐고 했다.
그러나 ‘一’자 수결이 틀림없으나 그 자신의 것은 아니라고 하고, 자신이 손수 둔 수결과 대조하라고 하였다.
이들을 비교한 결과 진짜 수결에는 ‘一’자 좌우 양단에 바늘구멍이 뚫려 있었고, 가짜 수결에는
좌우에 구멍이 없어 진가(眞假)가 판명되었다.
산적된 시무의 처결(處決)에 가장 간단한 수결로서는 ‘一’자수결 이외에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하였던
이항복도 이 사건 이후로는 다른 수결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군왕의 수결로는 고종의 어압(御押 : 임금의 수결을 새긴 도장)이 마패 등에 주조되거나
조칙(詔勅)이나 조약문서에 나타나 있음을 볼 수 있다. 고종은 임자년 7월 25일에 탄생하였다.
그리하여 어압(御押 : 임금의 수결을 새긴 도장)은 수결과 함을 겸하였으되, 그 탄생
연·월·일이 모두 포함되게 고안하였으니, 곧 여기에는 ‘壬子’·‘七‘·‘卄五’가 다 존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