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랑에 물이 맑으면 나의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나의 발을 씻는다."
무슨 뜻인가. 조정에 어진 신하들이 있으면 나아가 벼슬
하고, 조정에 간신배가 득실되면 물러나 초야에 묻힌다는
말이다.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잡은 세조 때에는 공신들이 조정을
주름잡았다. 이들을 훈구파라 한다. 그러나 성종이 즉위
하자 신숙주와 한명회가 죽어 1세대 공신들이 사라졌고
성종은 훈구파를 견제하고자 재야에서 학문에 힘쓰고
있던 사림을 등용했다. 그 선도자가 점필재 김종직
이었다. 김종직은 정몽주와 길재의 학통을 이은 성리학의 적통이었으며 많은 뛰어난 제자들을 길렀다.
그런데 김종직의 제자 중에 탁영 김일손이 있었다.
스승이 출사하여 닦아 놓은 사림의 길을 탁영은 가고자
출사를 결심했다. 지금에야 말로 창랑에 나가 갓끈을
씻을 때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탁영은 창랑에 맑은 물만 있는게 아니고 흐린
물도 같이 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다.
사림을 중용했던 성종 임금이 승하하고 혼군 연산군의
시대가 된 것이다. 피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탁영 김일손은 기개있고 대쪽같은 곧은 성품의 소유자
였다. 오늘날 그를 소환한다면 검찰총장이나 감사원장
감으로 제격일 것이다.
그는 불의를 알고는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임금이건
훈구파 대신이건 그의 예봉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세조의 아들 의경세자는 사후 덕종으로 추존되었는데
후궁에 소훈 윤씨와 권씨가 있었다. 시아버지 세조는
며느리인 두 소훈에게 전답을 하사하는 등 유달리 총애
하였는데 세조가 이들 며느리를 겁탈하려 했다는 것이다.
탁영은 이를 사초에 기록했다. 세조의 손자인 연산군이
격노하여 탁영을 일러 난신적자가 따로 없다고 했다.
탁영은 전라도 관찰사 이극돈이 정희왕후 국상 중에
관사에서 기생을 끼고 유흥을 즐긴 일에 대해 봐달라는
이극돈의 청탁을 거절하고 이것 또한 사초에 기록했다.
또한 탁영은 세조와 정희왕후의 총애를 받았던 고승
학조가 세종의 8남 영응대군의 군부인 송씨가 절에
불공을 드리러 갔을 때 여종이 낮잠을 자는 틈을 타 둘이
간통한 사실에 대해서도 성종의 면전에서 비난하였다.
세조는 자신의 꿈에 나타나 자신을 괴롭히는 문종의 비인
현덕왕후의 묘를 파헤쳐 강가에 버리게 했다.
현덕왕후의 능을 소릉이라 하는데 탁영은 소릉의 복위
를 주청했다. 즉 이는 세조의 행동이 그릇되었음을 거론
한 것이다. 세조의 손자인 연산군 입장에선 왕의 정통성
에 도전한 것으로 여길 수 있는 문제였다.
조부를 욕보인 것에 대해 격노한 왕 연산군, 자신이 관찰
사로 있을 때의 비위를 까발리는 것에 분노한 이극돈,
그 옛날 자신을 소인배라고 업신여긴 김종직에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희대의 간신 유자광.
자, 탁영을 죽일 악의 편대가 구성된 것이다.
너무나 많은 적을 만들었으니 어찌 살 수가 있겠는가?
연산군에 의해 사형 명령을 받았는데 그 형벌이 능지처사
였다. 능지처사형은 사람의 사지를 찢어 죽이는 극악한
형벌이다. 탁영 김일손은 몸이 갈기 갈기 찢겨져 죽었다.
어찌 그 뿐이랴. 연산군은 사람을 보내 김일손의 두 딸의
목을 베고 그 머리를 저잣거리에 효수케 했다. 효수란
잘린 머리를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거리에 장대를 세워
걸어 놓는 것이다. 부인과 자식 등 온 가족을 몰살시겼다.
조선의 선비 중의 선비 탁영 김일손. 그는 청사에 붉은
피를 뿌리고 선명한 자국을 남기고 사라져 갔다.
창랑의 물은 탁했는데 어이 성급하게 갓끈을 씻었는가
주인은 가고 홀로 남은 거문고가 그날을 증언한다.
탁영금은 1490년에 제작한 것으로 탁영 김일손이
이웃집의 100년 된 오동나무 문짝을 구해서 직접 만들
었다고 한다. 탁영은 거문고에 탁영금이라 글자를 새기
고 즐겨 연주했다고 한다.
탁영은 문짝 오동나무로 거문고를 만들면서 그 감회를 이렇게 글자로 새겼다.
만물은 외롭지 않으니 物不孤
마땅히 짝을 만나게 되는데 當遇匹
백세의 긴 세월이 멀어지면 曠百世
필히 만나기도 어렵지만 惑難必
아, 이 오동나무는 噫, 此桐
나를 저버리지 않았으니 不我失
서로가 기다린 게 아니라면 非相待
누구를 위해 나타났을까. 爲誰出
거문고 걸이에도 명문(銘文)을 달았다.
‘금(琴)이란 내 마음을 단속(禁)하는 것이니
(琴者禁吾心也)
걸어두어 소중히 여기는 건 소리 때문만은 아니로다.
(架以尊非爲音也)’
탁영 김일손이 거문고를 타고 아낀 이유는 선비로서 마음을 단속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그의 고고한 기개를 엿볼 수 있다
ㆍ무오사화로 죽은 김일손은 1486년(성종 17년) 과거에 2등으로 급제하고 춘추관 기사관이 돼 성종실록의 사초를 작성하고 있었다. 김일손이 작성한 사초에는 훈구파들의 부정과 비행뿐만 아니라, 그의 스승 김종직이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을 항우(項羽)가 의제(義帝)를 죽인 사건에 빗대 표현한 ‘조의제문(弔義帝文)’도 기록돼 있었다. 수양대군은 문종의 적장자로서 정당하게 왕위를 계승했던 단종의 왕위를 빼앗았고, 수많은 충신들을 죽이면서 왕이 됐다. 게다가 자신에게 협력한 자들을 공신에 봉하고 그들과 사돈관계까지 맺으며 권력 기반을 굳건히 해 주었으니, 바로 그들이 훈구파다. 그 뒤 반세기가 흐르면서 수양대군과 훈구파의 불의와 무능을 절감한 지식인들의 불만이 팽배했다. 그런 인식이 바로 김일손의 사초로 나타났다.
명분과 의리를 앞세우고 도덕적으로도 우위에 있던 사림파는 훈구파의 무능과 부정을 비판하는 데에 거침이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권력은 훈구파의 손에 있었다. 결국 성종실록 편찬의 책임자 중 하나였던 훈구파 이극돈이 유자광과 승지 신수근(연산군의 처남)과 함께 폭군을 부추겼다. 그 결과 김일손은 사지가 찢기는 형벌을 받았고 그의 사초는 불태워졌다. 훈구파의 존립 근간이 의롭지 못한 사실을 비판한 대가는 참혹했다. 그러나 훈구파는 그 대가를 영원토록 치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잠자던 연산군의 살인 마성을 깨워버리는 치명적인 실수를 했고 그 결과 6년 뒤 자신들도 똑같이 당했다. 인과응보였다.
첫댓글 http://xn--vg1b002a5sdzqo.kr/read.php3?no=9556&read_temp=20080707§ion=6
학맥상으로는 백이정과 안향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백이정, 안향→이제현→이색→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일손으로 이어진다.
백이정, 안향→이제현→이색→정도전
→이숭인
→정몽주→권근
→권우→세종대왕
→정인지
→길재→김숙자→김종직→정여창
→김굉필→조광조
→김안국
→김정국
→주계부정 이심원
→김일손
→김전
→남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