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주가 흐르는 삶
그림을 그리며 음악을 듣는다.
내가 좋아하는 연주자 ‘스테판 하우저’의 첼로 음악이다. 그는 클래식뿐 아니라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대중에게 선사한다. 뛰어난 연주 실력과 준수한 외모, 쇼맨십까지 갖춰서 전 세계에 수많은 팬이 있다. 세계 각국의 명소에서 자유롭게 맨발로 연주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악기 중에서 인간의 육성에 가장 가까운 소리가 ‘첼로’ 소리라 한다. 그래서인지 첼로 음악을 들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작품에 열중하게 된다.
잠시 느슨하게 쉬고 싶을 때 영화감상을 한다. 예전엔 영화관을 찾았는데 요즘엔 주로 집에서 TV를 통해서 감상한다. 최신영화는 아니지만, 원하는 명화를 무료로 감상할 수 있어서 즐겨본다. 새로 출시되었거나 예전에 본 영화 중에서 괜찮았던 영화를 선택하기도 한다. 영화는 감독과 배우, 스태프들이 호흡을 맞추고 음악, 미술, 의상 등 모든 예술이 동원되는 종합예술이다.
오늘은 집에서 ‘대니쉬 걸’이란 영화를 감상했다. 풍경화 화가인 남편과 초상화 화가인 아내, 우연히 알게 된 남편의 성 정체성의 혼돈 속에서 부부가 함께 겪는 시련의 과정을 그린 내용이다. 아내는 남편의 이중성을 함께 겪으며 고뇌한다. 사랑하는 남편을 여성으로 떠나보내야 하는 아내의 고통에 공감한다. 1930년대에 선구적으로 성 전환 수술을 하게 된 실화를 영화로 만들었다.
얼마 전에는 ‘이 안’ 감독의 ‘브로크 백 마운틴’이란 영화를 감상했다. 예전에 봤을 때 로키산맥의 인상 깊었던 장관을 떠올리면서. 두 카우보이의 우정을 넘은 사랑 이야기다. 각자 결혼생활을 유지하면서 짧은 만남과 긴 그리움이 20년의 세월 속에 반복된다. 스토리 위주로 기억했던 영화인데, 다시 보니 깊은 내면의 갈등이 더 잘 보인다. 두 영화의 공통점이 성 정체성을 다룬 내용이란 건 우연의 일치였다.
영화는 현실에 존재하는 이야기나 가상의 세계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들여 다른 각도로 전해준다. 예전에는 내용 위주로 감상했는데, 다시 보니 인간의 내면에 흐르는 이중구조를 보게 된다. 주변 사람에게 배타적인 시선을 받고, 시대 배경 속에서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상황, 또 다른 자아를 숨긴 채 고통받는 이들의 심리가 배우의 뛰어난 연기력을 통해 잘 드러난다. 어떤 이념이나 종교, 가치관을 떠나 인간적인 시선으로 들여다본다.
어릴 때부터 신문에서 문화면을 즐겨 찾아 읽었다. 자연히 음악이나 미술품 전시, 영화, 공연 소식을 접하며 감상할 기회가 많았다. 그림이나 음악에 친숙했던 집안 분위기도 한몫했을 것이다. 바쁜 일상에서 문화생활을 위해 따로 시간 내기란 쉽지 않다. 시간이 부족해도 짬을 내어 좋은 영화나 음악회를 찾아다녔다. 누군가와 동행하려면 서로 시간을 할애하며 맞춰야 하니 주로 혼자 다녔다. 자연히 사람들과의 교류보다 예술세계가 벗이 되었다. 사람은 실망감을 주기도 하지만 문화생활은 정서를 풍요롭게 해준다. 때로 고독하지만 스스로 선택한 길이다.
가족과 화합하며 창작활동을 하려면, 끊임없이 현을 다루는 연주자의 손놀림처럼 분주하다. 애들이 어렸을 때는 등교시킨 후에 곧장 집을 나선다. 이론 강의를 듣고 창작활동을 위해서. 집안일이나 음식도 직접 하니 항상 시간에 쫓겼지만, 추구하는 꿈을 한시도 놓지 않았다. “그 댁 애들은 언제 대학교에 들어가나요?” 하던 작업을 멈추고 부리나케 짐을 챙기는 내게 동료들이 주로 하던 말이다.
일찍 하교하는 애들의 간식을 준비하며 엄마의 부재를 느끼지 않도록 노력했다. 가족이 집에 있을 때는 작업 중에도 식사 시간이 되면 붓을 놓는다. 글쓰기나 그림에 몰입하니 가족에게 잔소리를 덜 하게 된다. 이제 전시를 앞둘 때는 무심하던 남편이 작품을 포장해 주고 차로 실어다 주기도 하니 고맙다. 생활과 예술, 이중주의 삶이 부부의 화음까지 이룰 수 있게 해줘서 다행이다. 예술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준다.
잠시 붓질을 멈추고 생각에 잠긴다. 내게 예술이란 무엇인가. 예술은 삶을 재생산하는 것이라니 내 삶의 친밀한 동반자다. 생활을 좀 더 유연하고 풍요롭게 유지하기 위해서 예술세계를 즐기는 것이다. 언뜻 생각하면 예술과 현실은 동떨어진 것 같지만, 오히려 그 반대이다. 우리가 선택하는 모든 것들의 색채와 디자인, 생활과 연결되지 않은 것이 없지 않은가. 정신적인 사치가 아닌, 누구나 향유할 수 있는 것이다.
어느덧 ‘하우저’의 첼로가 바이올린과 조화를 이루며 이중주를 연주한다. 애절함이 가득한 헝가리 민속무곡인 ‘차르다시’다. 서로 강약을 조절하며 속삭이다 절정의 선율이 화음을 이루며 방 안에 흐른다. 현실에서 예술과 조화를 이루고자 안간힘 쓰는 건, ‘내 삶의 이중주’를 연주하는 모습이 아닐까.
첫댓글 첼로는 내면의 소리, 울림이 그 무엇보다도 깊은 아픔과 슬픔의 선률을 만들어내는 듯합니다. 우울할 때 첼로의 연주를 들으면 치유를 받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비운의 천재 첼리스트 자클린 뒤 프레를 추모하여 독일의 첼리스트 베르너 토마스가 첼리스트 자크 오펜바흐가 죽은 지 100 여 년이 지난 뒤에 발견한 그의 미발표 작품에 붙인 "자클린의 눈물"이라는 제목의 첼로 곡 연주를 울적한 때면 듣고는 합니다~
나도 6년이상 독거생활을 하다보니
나는 누구고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
로 가는가? 나의 존재의 본질은 무
엇인가? 나의 삶에 알찬보람은
어떤것인가등을 많이 생각하던군요
그래요. 예술은 삶의 사치가 아니라
삶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