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10년 동안 장제스와 함께 전국을 누비면서 쑹메이링의 발자취가 중국 전역에 닿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쑹메이링은 항상 장제스의 충실한 외교 고문을 맡으면서 구미 각국들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서양 학문에 대한 뛰어난 식견으로 장제스의 공군 건설을 완벽하게 보좌하였습니다. 이 외에도 그녀는 정치 사회활동에 폭넓게 참여하여 여성단체와 아동복지단체에서 단체장 등을 맡았습니다.
1936년 12월 시안(西安)에서 장제스가 장쉐량(張學良)과 양호성(楊虎城)에게 감금되는 사태가 발생하였을 때, 그녀는 위험에 처한 장제스를 구하기 위해 직접 시안으로 달려가서 사태의 평화적인 해결을 지원하는 과감성을 보여주었습니다.
항일전쟁 시기에 그녀는 항공위원회 비서장을 역임하였고, 1943년에는 장제스를 따라 카이로회담에 참석하여 통역을 맡았습니다.
1948년 장제스를 대신하여 미국으로 건너가서 원조를 요청하였으나, 1949년 장제스의 국민당이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당과의 패권 전쟁에서 패하여 대만으로 철수하자, 미국에 체류하고 있던 그녀도 1950년 1월 대만으로 건너갔습니다. 이때 패권 쟁탈에서 실패한 장제스와 쑹메이링은 비운의 영웅 초패왕(楚覇王) 항우(項羽)와 비극의 여주인공 우희(虞姬)의 신세와 다름 없었습니다.
1950년대 초는 대만의 정국이 가장 불안한 시기였습니다. 만약 쑹메이링이 비겁한 여인이었다면 그녀는 결코 대만으로 들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녀는 장제스와 국민당을 위하여 언제든지 몸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대만으로 건너갔던 것입니다. 쑹메이링이 단순히 장제스의 권력을 흠모하여 그와 결혼하였다고 한다면 그녀의 이러한 행동은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1974년 국민당 10기 5중전회에서 쑹메이링은 '중산훈장(中山奬章)'을 받았습니다. 1975년 4월 5일 장제스가 병사하자 그 해 9월 17일 쑹메이링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2003년 쑹메이링은 뉴욕에서 향년 10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청대 말기, 민국 시기, 군벌 혼전과 일제 침략을 거쳐 2차 세계대전을 경험하고, 냉전시대의 도래와 퇴출, 양안 관계의 긴장 해소 등을 목도하면서 106년의 세월을 살았습니다. 19세기에 태어나 20세기를 거쳐 21세기에 이르기까지 3세기를 살아온 그녀의 가슴에 묻혀 있는 중국 현대사의 상흔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쑹메이링의 저서로는 ≪서안사변(西安事變)≫, ≪중국의 평화와 전쟁(中國的和平與戰爭)≫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