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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1. 묵상글 (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 문을 열자.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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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1.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문을 열자.
문을 닫으면 아무것도 들어올 수 없습니다.
문을 열면 고통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문을 닫으면 고통이 들어오지 않지만
그다음으로 들어올 은총도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을 엽시다.
고통이 들어오면 그것을 은총으로 만들고,
은총이 들어오면 그것으로 사랑을 만들고,
사랑이 들어오면 그것으로 선행을 실천합시다.
오늘 주님은 자선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바오로 사도는 선행에 대해서 말하는데,
선행은 사랑에서 오고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씨를 뿌려야 거두고,
많이 뿌려야 많이 거둔다고 얘기한 다음
하느님은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과 먹을 양식을 마련해 주시는 분"이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모든 은총을 넘치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언제나 모든 면에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가져
온갖 선행을 넘치도록 할 수 있게 됩니다."라고도 얘기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문을 합니다.
나는 언제나,
모든 면에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가지고 있고, 넉넉히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넉넉히 가지고 있지도 않고, 넉넉히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넉넉히 가지고 있지 않다면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주셔도 받지 않았거나 주시는 분이라고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우리가 넉넉지 않다면 그것은 곳간의 문을 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넉넉히 주시고자 하나 우리가 문을 열고 받지 않았기 때문이고,
열지도 받지도 않은 이유는 하느님께 바라지도 믿지도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신을 믿었던 것이고,
자신이 가지려고 했던 것이며,
그래서 넉넉지 못했던 것이고,
그래서 나누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문을 열자고 말씀드립니다.
열린 문으로 하느님의 사랑도 받고
열린 문으로 이웃에게 사랑을 나눕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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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1.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 6,1)
산상설교에서 “의로움”은 중요한 주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섯 가지의 의로움에 대한 말씀을 마치신 다음, 여전히 “의로움”에 대한 연장선상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 6,1)
이는 의로움의 본질이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임을 말해줍니다. 곧 의로움이란 남에게 보이기 위한 처신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놓인 처지임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사람들 앞에 드러난 행동이나 결과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 생각을 보십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의로운’ 생활의 중심은 세 가지였습니다. 그것은 ‘자선’과 ‘기도’와 ‘단식’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사람들은 의로움을 통하여 하느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맺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의로움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곧 의로움을 통해 하느님이 아닌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고 보상받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혹 우리도 그렇지 않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우리의 기도나 봉사나 사랑을 통해서도 그럴 수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나의 경건함을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도구가 되고 있다면 말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께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자신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있다면 말입니다. 진정, 우리는 겉모양이 그리스도인인 것이 아니라, 뼈 속에서부터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오늘 진정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의 현전을 마주하고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마태 6,6)이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기광고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 광고는 오히려 자신을 파괴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아무리 드러내려 해도 드러내 지지 않는 것이 있고, 아무리 드러내려 하지 않아도 드러나는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적어도 하느님을 섬기는 척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도 저는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사실, 저는 어둠이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어둠과 놀면 저도 어둠이 되고 말 것입니다. 또한 저는 빛이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빛 앞에 머무르면 저도 빛의 옷을 입게 될 것입니다. 저는 천사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 노래하고 하느님을 섬긴다면 천사가 될 수 있습니다. 저는 마귀가 아닙니다, 그러나 마귀의 영을 따라 산다면 마귀 같은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하지도 않은 선을 행한 것처럼 과시하지도,
저지른 악을 가리고 숨기며 거짓으로 치장하지도 않게 하소서!
마음의 단식으로 당신을 섬기게 하시고, 기도할 때 제 마음이 순결하게 하소서!
늘 빛이신 당신 앞에 머무르게 하시고, 당신의 영으로 차오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 6,1)
주님!
선을 과시하지 않고, 악을 거짓으로 치장하지 않게 하소서!
제 마음이 당신 사랑에 씻기어지고 마음의 단식으로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의로움을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지 않게 하시고, 마음이 기도로 순결하게 하소서!
오늘도 당신의 영으로 차오르고 당신 앞에 머무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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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1.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의 시선을 의식하라
순수한 의향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최선을 다했을 때 결과에 구애 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공에로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는 것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결과가 아무리 좋아도 의향과 과정이 바람직하지 않다면 추합니다. 의학이 발달한 요즈음 M.R.I 를 통해 사람의 곳곳을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PET-CT를 통해 암을 찾아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마음은 들여다 볼 수 없습니다. 아마 사람의 마음을 그렇게 들여다볼 수 있다면 많은 이들의 태도가 달라질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주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분이십니다.
받으려 노력하지 않아도 주어진 몫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면 상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는 그 모습자체가 바로 상입니다. 남에게 잘 보이려고 하거나 허풍을 떨어서는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 하느님 앞에 부끄러움만 더할 뿐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듣고 은인이라는 소리를 들을지언정 그것은 세상의 상일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것을 추구하고 하늘로부터 오는 상을 받아야 합니다. 세상의 것은 결국 모두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약속된 천상을 지향하고 지금 여기서부터 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는 척, 가진 척, 잘난 척, 있는 척...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겉치레는 구원에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기도를 하든, 자선을 베풀든, 단식을 하든 그 자체가 아름다움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자선은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하며 단식은 나 자신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합니다. 그런데 기도나 자선, 단식을 함에 있어 사람의 시선을 의식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시선을 의식해야 관계가 회복됩니다.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면 마음이 갈라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시선을 명확히 하면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선행이나 악행이 M.R.I 보다 더 정확한 주님의 마음에 찍힌다는 것을 생각하면 감히 나의 처신을 함부로 할 수 없는 법입니다. 지금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아름답고, 그리고 최선을 다하다 보면 주님의 상급이 주어질 것입니다. 상을 보지 말고 지금 할 수 있는 것에 마음을 쏟을 수 있으면 그것이 기쁨입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모든 것이 결코 남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일이 아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오로지 주님 마음에 드는 것으로 감사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길 희망합니다.
“성인은 숨어서 남모르게 일한다.”고 했습니다.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입니다. “외적인 드러남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심지어 의로운 일마저 드러내려고 하는 시도를 자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함께야). 우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기에 앞서 하느님의 시선을 마음 안에 간직해야 합니다. 공연한 인간적 명성은 참된 길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게 됩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의 시선을 느끼는 하루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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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1.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지순례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기도로 시작하는 성지순례는 은총이 열매 맺는데 기도하지 않는 성지순례는 문제가 생깁니다.” 기도하면 불평할 것들도 감사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기도하면 곤란한 상황에서도 서로 격려하게 됩니다. 기도하면 작은 들꽃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단체로 이동하기에 시간 약속이 중요합니다. 성지순례를 하면서 모두들 약속 시간보다 이른 시간에 모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신랑을 기다리는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출발시간 전에 버스에 앉아 계시는 순례자들을 보는 것은 기쁨입니다. 버스에 탑승하면 먼저 기도로 순례를 시작합니다. ‘아침기도, 가정을 위한 기도, 부부를 위한 기도, 사제를 위한 기도, 성소를 위한 기도, 삼종기도, 묵주기도’를 함께합니다. 순례를 마치면서 ‘저녁기도, 수호천사에게 드리는 기도, 삼종기도’를 바치고 사제의 강복을 받습니다. 혼자 하는 기도는 자칫 소홀할 수 있고, 건너 뛸 때도 있는데 함께 하니 순례가 더욱 풍요로워 집니다.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마치는 순례는 감사와 찬미의 순례가 됩니다.
평화신문은 ‘자선’을 베푸는 사람들에 대한 기사를 보도하곤 합니다. 어떤 분은 고인이 된 아들을 추모하면서 신학교에 아들에게 줄 유산을 장학금으로 기부하였습니다. 어떤 분은 평생 폐휴지를 모아서 마련한 돈을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헌하였습니다. ‘사랑이 피어나는 곳’을 통해서 전해지는 사연을 읽고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코로나만 전염력이 강한 것은 아닙니다. 나눔도 분명 전파력이 있습니다. 교회는 영리를 목적으로 사업을 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공동체의 헌금과 교무금으로 운영됩니다. 공동체의 기부와 자선은 가난한 이들에게, 아픈 이들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지면을 통해서 어려운 이웃을 소개하는 것은 두 가지 좋은 점이 있습니다. 도움을 받는 사람은 받아서 좋고, 도움을 주는 사람은 주니까 좋습니다. 본당에서 볼리비아 선교를 위한 기금 마련 골프대회를 하였습니다. 운동을 하면서 선교를 위한 나눔을 하니 좋은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좋은 날씨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기도와 자선은 새의 날개와 같습니다. 기도와 자선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기도하였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깨어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는 것은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하는 시간이 줄어들면 마귀는 어느새 우리의 마음으로 들어옵니다. 기도하는 시간이 줄어들면 우리는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측은한 마음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과 물고기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런 나눔으로 오천 명이 배부르게 먹고도 12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성체성사는 예수님께서 몸과 피를 나누어주신 것을 재현하는 것입니다. 되로 주면 말로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넘치게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기도와 자선’에 대한 태도를 말씀하십니다. 위선과 가식을 드러내는 기도는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위선과 가식을 드러내는 자선은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일, 생색내는 일,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일을 경계하십니다. 다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면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하느님께서 알아주신다고 하십니다. 중용 23장은 이러한 삶을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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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1.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삶
-무욕의 맑고 향기로운 삶-
요즘 은은하고 그윽한 자귀나무꽃 향기가 한창입니다. 대추꽃 향기도 이와 비슷합니다. 꽃보다 향기맡고 찾아내는 꽃입니다. 멀리까지 그 향기가 미칩니다.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피어나는 자귀나무꽃말은 ‘가슴 두근 거림’, ‘환희’로 며칠전 써놓은 시가 생각납니다.
“자귀나무꽃
향기맡고
찾아내는 꽃
한참가다
향기맡고 뒤돌아 보는 꽃
자귀나무꽃
존재의 향기
생명의 향기
사랑의 향기
겸손의 향기
당신은 이런 분이시다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
오늘 말씀 묵상중 떠오른 시가 참 반가웠습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무욕의 맑고 향기로운 사람을 상징하는 듯 했습니다. 꽃마다 향기가 있듯이 사람에게도 향기가 있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한결같이 하느님 중심의 무욕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서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납니다. 자귀나무꽃처럼 존재의 향기, 생명의 향기, 사랑의 향기, 겸손의 향기를 발산합니다. 은은하고 그윽한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바로 오늘 기념하는, 꽃다운 23세 나이에 애덕활동중 병사病死한 예수회 신학생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가 그러합니다. 1585년 예수회에 입회하여 신학공부에 전념하던 차, 4년째 되던 해 1590년 로마 전역에 페스트가 퍼졌고, 헌신적으로 병자들을 간호하다 이듬해 3월초 자신도 페스트에 전염되어 같은 해 6월21일 23세의 젊은 나이로 선종합니다.
-성 알로이시오는 신중하고 분별력있게 모든 일을 잘 처리하는 뛰어난 학생이었습니다. 그는 수도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악습들을 극복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으며 자신의 자존심과 이기심을 이기기 위한 수련을 끊임없이 실천했습니다.
그의 시성 절차는 빠르게 진행되어 1605년 교황 바오로 5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726년 교황 베네딕도 13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고 청소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됩니다. 다음 임종 얼마전 어머니께 드린 편지도 얼마나 하느님 중심의 철저한 효심깊은 삶이었는지 감동적이라 그 일부만 인용합니다.
“존경하올 어머니, 성령의 은총과 끊임없는 위로를 누리시길 빕니다. 어머니이 편지가 제 손에 닿았을 때 저는 아직도 산 이들의 땅인 이 세상에 있었습니다. 이제 심혈을 기울여 산 이들의 나라에서 영원하신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는 천국을 갈망해야 합니다. 저로써는 벌써 그곳에 가 있고 싶었고 이미 그곳으로 여행을 떠난 줄로 진정코 생각했습니다.
존경하올 어머니, 어머니와 우리 온 가족이 제 죽음을 하느님의 기쁜 선물로 생각해 주십사고 간절히 희망하면서 이 모든 말씀을 드립니다. 제 희망의 성취인 그 항구를 향해 바다를 건너가는 동안 어머니께서 저를 친히 축복하시어 보호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들로서 어머니께 바쳐야 하는 존경과 사랑을 더 확실히 보여 드릴 방도가 없기에, 어머니께 기꺼이 이 편지를 쓰게 된 것입니다.”-
놀랍습니다. 20대 초반에 이런 성덕에 도달해 있다니 성덕은 나이에 무관함을 느낍니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하느님 중심이 아닌 자기 중심의 이기적 삶을 산다면 성덕은 요원할 뿐이겠습니다.
어제의 깨달음의 은총과 더불어 물리치료를 받게 된 감사한 사실도 나누고 싶습니다. 나름대로 주님의 전사로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려고 노력했는데 수행생활에 허점이 있었던 듯 81.5kg 과체중이 되었습니다. 어쨌든 하느님 중심의 수행생활에 소홀했음이 분명합니다. 34세 수도원 입회시 62kg 이었는데 몇년후 68kg, 그리고 평균 74kg을 유지하던중 60대 중반을 넘어 80kg을 넘게 된 것입니다. 예전 초등학교 교편시절이나 서품때 사진은 지금과는 판이합니다.
법정 스님의 수행자는 출가시 체중을 유지해야 한다는 말씀을 들을 때는 늘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만, 어제 뜻밖에 수도원 정원에서 봉사하는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한결같은 저보다 2세 연상의 세례자 요한 형제가 제가 대접한 배즙을 계기로 이야기가 전개되어 약 보름간 체중감량을 위한 집중적 물리치료를 해주겠다 하여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원장수사에게 알렸더니 다음과 같은 짧은 답신도 받았습니다.
“최고입니다. 하느님 뜻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무욕의 삶이 참으로 아름답고 매력적이며 맑고 향기롭습니다. 우리의 모든 수행이 결국은 하느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하기 위함입니다. 바로 오늘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통적인 수행인 자선과 기도, 단식을 통해 하느님 중심의 수행의 진수眞髓를 보여줍니다. 자기 중심의 수행과 하느님 중심의 수행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1.“네가 자선을 베풀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네가 자선을 베풀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올바른 자선에 대한 구체적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되는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불가의 성철 스님이 극찬했던 내용입니다. 인색함보다 추한 것은 없습니다. 인생 노년에 노욕에 인색함까지 더한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숨겨진 자선의 선행은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교회 신도들에게 이런 자선의 실천을 강력히 권고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모든 은총을 넘치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언제나 모든 면에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가져 온갖 선행을 넘치도록 할 수 있게 됩니다. ‘그가 가난한 이들에게 아낌없이 내주니, 그의 의로움이 영원히 존속하리라.’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부익부 빈익빈의 진리가 영적 현실에도 그대로 통하니 바로 자선의 수행을 통해서입니다. 날로 내외적으로 부유해지는 하느님 중심의 자선의 삶입니다.
2.“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 들이 받을 상을 이미 다 받았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3.“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자기 중심과 하느님 중심의 수행이 얼마나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지요! 침통함, 심각함, 우울함은 결코 영성의 표지가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감쪽같이 자연스럽게 숨겨진 수행이 제일입니다.
자기 중심의 삶의 특징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무지하고, 외적이고, 육적이고, 부수적이고, 얕고, 닫혀있고, 드러나 있고, 허영, 교만으로 요약됩니다. 본말전도의 무지에 눈먼 알맹이가 아닌 껍데기의 삶입니다. 결코 무지와 허무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결코 악순환의 늪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세상에, 우상에, 이기적 가아假我에 노예된 삶입니다. 아, 이건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잊으니 저절로 나도 잊습니다. 완전히 좀비같은 유령같은 삶입니다.
반면 하느님 중심의 삶은 참사람이, 성인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합니다. 지혜롭고, 내적이고, 영적이고, 본질적이고, 깊고, 하느님과 이웃과 나에 활짝 열려있고, 숨겨져 있고, 진실, 겸손으로 특징지어 집니다. 말그대로 무욕의 맑고 향기로운 삶이요 아름답고 매력적인 삶에 존재의 향기, 생명의 향기, 사랑의 향기, 겸손의 향기를 발산하니 그대로 그리스도의 향기요 천리향, 만리향같은 존재들입니다.
이런 이들이 진정 신비가요 관상가요 영성가요 각자覺者요 현인이요 내적 자유에 내적 부요의 참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여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늘 나라를 사는 이들입니다.
영적 삶은 은총이자 선택이자 훈련이자 습관입니다. 두말할 것 없이 하느님 중심의 삶을 선택하여 이에 따라 자선, 기도, 단식은 물론 모든 수행의 부단한 자발적 훈련을 습관화하시기 바랍니다. 날로 주님을 닮아 참나의 실현이 이뤄질 것이며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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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1.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예수님께서 받으셨던 광야의 유혹이 생각났습니다. 특히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라는 말씀이 떠오릅니다. 분명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만을 섬기라고 가르치셨고 주님 자기 삶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어떤 모습인지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을 섬기는 척하면서 나를 섬기는 유혹에 빠지는지 말씀해주십니다. 자선을 베푸는 것은 하느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그러나 자선을 드러내는 순간 하느님이 아닌 나를 섬기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자선에 대한 영광과 찬미가 나에게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기도의 공로와 헌신을 드러내는 순간 그 기도는 더 이상 기도가 아닌 내 허영으로 둘러싸인 자랑이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쉽게 이런 유혹에 걸려 넘어집니다. 저 역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악마의 유혹은 참으로 간교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런 유혹에 빠지면 하느님의 영광을 나의 영광을 돌려버립니다. 우리는 간혹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 단체는 나 없으면 안 돼.
우리 성당은 나 없으면 안 돼.
이러한 유혹은 사제인 저를 비롯한 우리가 자주 걸려 넘어지는 유혹입니다.
우리의 선행과 자선과 사랑이 모두 하느님의 영광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복을 내리시기를 희망해봅니다.
또우장
또우장을 아시나요?
중화권 아침 거리를 거닐면
길거리에서 흔하게 만날 수 있는 것이 ‘또우장’입니다.
우리말로 하면 ‘두유’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물론 두유랑 조금 다릅니다만 거의 비슷합니다.
예전에 언어 공부하러 학교 다닐 때
아침마다 이 ‘또우장’을 마셨습니다.
설탕을 넣어서 마시기도 하고, 그냥 마시기도 하고….
그리고 저렴한 그 한잔의 ‘또우장’은 저의 든든한 아침이 되어주었습니다.
가끔 그 따끈한 ‘또우장’이 그립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음식이 있을까요?
한잔 혹은 한 끼가 나를 든든하게 만들어준 기억이 있을까요?
그리고 신앙 안에서
한 번의 기도가, 한 번의 위로가
우리 마음을 든든하게 만들어준 기억이 있을까요?
추억의 ‘또우장’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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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1.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공부는 참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공부는 언제까지 하는 것일까요? 배워도 배워도 끝이 없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즉, 철들어서 배우기 시작한 다음부터 죽을 때까지 고삐를 늦추지 말고 공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아무리 공부해도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얼마나 진보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공부하면 할수록 더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공부의 어려움이 더 드러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공부의 보상은 무엇일까요? 단순히 좋은 성적을 맞아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것일까요? 이는 공부에 대한 좁은 생각입니다. 공부는 인생을 뜻있게 사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알면 알수록 바른길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공부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필요합니다. 누구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도 아니고,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는 책을 많이 읽습니다.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해 책 읽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살고 남과 다른 삶을 산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함도 당연히 아닙니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지혜를 얻게 되고, 조금씩 성장하는 저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의 시선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습니다. 스스로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기에 책을 읽습니다. 만약 남의 시선만을 생각한다면 항상 사람이 많은지를 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으로 과연 책이 눈에 들어올까요? 사람만 눈에 들어올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전부터 유다인이 실천하고 있었던 종교적인 신심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자선을 베푸는 것, 기도하는 것, 단식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다인은 이를 율법을 넘어선 한 단계 위의 선행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이를 통해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보상을 받고, 율법을 잘못 지킨 데 대한 보상도 얻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심판 때, 이 공로로 다른 사람을 도울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자체로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우리가 실천해야 할 자선, 기도, 단식입니다. 문제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실천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예수님께서는 나쁘다고 경계하십니다. 자기 이름을 드러내기 위한 행동이라면 이를 위선자라고 하십니다. 우리를 위해 필요한 자선, 기도, 단식이지만, 다른 사람의 시선에 집중하다 보니 이 덕행이 주는 은총을 누릴 수가 없게 됩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서 갚아주실 것인데, 남의 시선만 신경 써서 덕행을 제대로 실천할 수 없어서 은총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자선, 기도, 단식은 우리를 위해 필요한 덕목입니다. 그러나 그 자체의 의미를 잘 알고 제대로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그 은총을 충만히 누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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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남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자기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납득할 수 없어 한다(양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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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1.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보이는 나 앞서 있는 나>
난 말이야
하느님과 내가
함께 빚은
나란 말이지
그래서 이렇게
내가 있거든
내가 있으니
내가 보이기는
할 테지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내가 있는 만큼
내가 보이면
참 좋겠어
하지만
내가 있는 만큼
내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래도 괜찮아
내가 보이지 않아도
나는 있는 거니까
그러니 괜히
어떻게든 보이려고
애쓰지 말고
하느님과 내가
함께 빚은
고운 나로 있자고
있음에 오롯하지 않으며
보임에 기웃거린다면
하느님과 나를
부끄럽게 여기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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