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어쨌든 간에 아버지가 성장했던 시기에는 인간 종을 구분하는 식민주의적 위계가 인종에 대한 서구인들의 사고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예컨대 '몽골로이드'[황인종]는 '코카이소드' [백인종] 밑이지만 니그로이드[흑인종]보다는 위라는 식이다). 아버지는 아시아인이 근면성실한 모범적 소수자[model minority]라서, 당신 같은 사람들이 조금만 도와주면 백인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믿음을 내면화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백인 정체성을 거부하는 것을 보고 아버지는 실패감을 느꼈으리라.
아버지는 인종적 지배가 KKK 백인 테러리스트가 앞마당에서 십자가를 태우는 형태로만 나타나는 게 아님을 이해하지 못했다. 인종 차별주의는 당신과 함께 사는 남자, 당신이 사랑하는 남자의 모습일 수도 있다. 자기 아내를 찾는 곳, 당신이 태어난 나라를 변호하는 남자일 수도, '이 사람들은 한국이 더 이상 제 3세계가 아니라는 걸 모르나?' 하지만 아버지가 엄마를 만났던 1960년대의 한국은 ― 적어도 아버지의 정의에 따르면 ― 제 3세계였다.
아버지는 당신이 아시아를 왕래할 수 있었던 기회가 미군과 미군이 점령한 나라 간의 불평등하고 폭력적인 관계에서 왔다는 사실 역시 이해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필리핀, 괌, 오키나와, 한국에서 지낼 수 있었던 건 그곳에 있느미군 기지 때문이였고 미군을 지원하는 선원 역할을 하며 군인의 일원으로 여겨졌던 아버지에겐 현지 여성을 접할 공식적인 기회를 비롯해 각종 특권이 주어졌다. 우리 엄마 같은 현지 여성 말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나도 이런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멀어져 마음을 추스려보려 했지만, 몇 주전 오빠가 한 말이 모깃소리처럼 귓가에 맴돌았다.
"아버지는 네가 흑인 남자랑 데이트할까 봐 걱정된대." 내가 누구랑 데이트하든 아빠가 뭔 상관인데? 이런 생각이 들어 다시 아버지 서재로 들이닥쳤다. "내가 흑인 남자랑 데이트할까 봐 걱정된다면서요. 그럼 흑인 여자면 좀 났겠어요?" 데이트할 만한 사람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내가 어울리는 사람은 대부분 흑인이나 갈색인종이었고, 퀴어 친구도 점점 더 많아졌다.
내가 들먹인 이 가상의 시나리오는 아버지에게 당신 딸이 거의 백인에 가까운 사람도 아닐뿐더러, 빌어먹을 퇴폐 종자들 중 하나라는 말로 들렸다.아버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네 엄마는 네가 뭔지 알아?" 낭비할 시간이 시간이 없었다. 아버지가 말하기 전에 엄마한태 먼저 얘기해야 했다. 나는 거실로 달려가 소파에 있는 엄마 곁에 앉아서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엄마, 나 엄마한테 물어볼 게 있어요."
"뭔데?"
"내가 여자를 좋아한다고 해도, 엄마는 나를 여전히 사랑해줄거예요? 그러니까 로맨틱하게 사랑한다고 해도?"
엄마는 잠시 눈을 돌렸다가 나지막하고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 너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인 건 아니지?" 하지만 곧바로 엄마는 내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당연히 사랑하지, 흠! 세상에 자기 자식을 안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아버지는 내 "퇴폐적인 생활 방식"을 두고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사랑하는 아빠"가로 끝맺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마무리 인사는 "아빠"로 바뀌었고 나중엔 그것마저 사라졌다. 그 시점에 나는 아버지 편지를 열어보지 않게 되었다.
대학 졸업 후 1년이 지나 내가 남자친구 세사르와 이후 10년 동안 이어질 동거를 시작할 때까지 아버지에게 내 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일은 없었다. 오빠는 이렇게 전했다. "아빠는 맥시코 사람이어도 괜찮대, 남자라서 다행이래."
대학생일 때는 아버지의 편협함이 용서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아버지가 속한 사회적 맥락 안에서 아버지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 일생에서 대부분의 시간 퀴어 섹슈얼리티는 도덕적인 결함이자 범죄, 또는 질병으로 취급되었다. 워싱턴주에서 동성간 성행위는 1976년까지 불법이었고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관람 편람』도 1980년까지 동성애를 정신 장애로 분류했으며, 1990년까지는 동성애를 근거로 미국 이민이 거부될 수도 있었다.
아버지는 1919년 미국에서 백인 남성으로 태어났다. 우드로 윌슨이 흑인에게 자유를 허용하면 어떤 위험이 생기는지에 대한 경고로 백악관에서 「국가의 탄생 The Birth of a Nation」을 상영하고 불과 4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아버지가 다섯 살 때. KKK는 셔헤일리스에서 가장 큰 규모의 '초대형 집회' 중 하나를 개최했다. 동네에 망토와 후드를 쓴KKK 단원이 동네 주민들보다 열두 배나 많은 숫자인 7만 명 규모로 붐비는 광경은 일평생 의심의 여지 없이 가장 대단한 볼거리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