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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 보길도
완도국제항으로부터 12km 되는 거리에 있는 보길도는 일찌기 고산 윤선도가 배를 타고 제주도로 가던 중 심한 태풍을 피하기 위해 이곳에 들렀다가 수려한 산수에 매료되어, 이곳 동명을 부용동이라고 명명하고 머물 것을 결심했던 곳이다. 10여 년을 머물면서 세연정, 낙서재 등 건물 25동을 짓고 전원 생활을 즐겼으며, 그의 유명한 작품 "어부사시사"도 이곳에서 태어났다. 이 섬에는 은빛모래 혹은 자갈밭이 펼쳐진 해수욕장이 세 곳 있어, 여름피서지로도 인기가 있다. 그 중 섬 남쪽에 위치한 예송리 해수욕장은 모래없이 작은 자갈밭이 1.4km나 펼쳐져 있어 천연기념물인 예송리 상록수림과 어우러져 더욱 아름답다.
아열대성 식물이 무성하게 자라 투명한 바다와 신비스런 조화를 이루며, 특히 보길도로 향하는 남해 뱃길에는 푸른 바다 위에 크고 작은 섬들이 펼쳐져 있어, 아름다움을 더한다. 이 곳에는 또한 고산 윤선도 유적 외에도 조선 숙종 때 우암 송시열의 글씨가 새겨진 바위도 있다. 우암은 세자 책봉 문제로 상소를 올렸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83세의 노령으로 제주도로 귀양가게 되었는데 도중에 보길도 백도리 끝 바닷가의 병풍처럼 생긴 바위에 탄식의 글을 새겨 넣었다고 한다. 이 바위를 "글씐바위"라고 한다. 그밖에도 예송리 일출과 보족산, 선창리 일몰, 부용리 동백림 등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이다.
심 산
동천석실
윤선도의 이상세계인 부용동을 바라볼 수 있는 낙서재 앞산 중턱으로 자리하는 동천석실은 보길도 최고의 경관을 보여주는 하늘의 정원이다. 넉넉한 산속 우거진 숲 사이를 걸어가면 하늘이 툭 열리듯 보길도와 부용동을 한눈으로 담는 자리에 한 칸으로 만들어진 정자가 자리한다. 윤선도 스스로가 신선이 머무는 곳이라 칭하며 가장 사랑하는 공간이었다는 이곳은 작은 봉우리들이 부용동을 감싸듯 자리하고 있다. 한 칸으로 지어진 정자는 선비의 소박함보다 홀로 아름다움을 즐기고 싶어 하였던 윤선도의 욕심이 느껴지는 것 같다.
절벽 위로 계단과 석축을 쌓아 층마다 화원을 꾸미고 작은 다리와 연못을 만들었으니 신선의 놀이터가 이보다 더욱 아름다울까 싶다. 넓고 편평한 바위 위로 작은 홈을 내어 찻상다리를 고정하게 만들어 차를 즐기고 두 갈래로 갈라진 바위틈으로 나무로 만든 도르래를 달아 필요한 물품들을 날랐다고 하니 놀라울 뿐이다. 윤선도는 부용동 너른 터를 닦아 자신의 살림집을 만들고 낙서재라 이름 지었다. 비록 낙서재는 흔적만 남아 있지만 푸른 숲에 둘러싸인 낙서재와 하늘을 바라보는 동천석실을 오가며 독서를 하고 차를 마시며 경관을 즐겼을 윤선도의 삶은 상상만으로도 부럽다.
보길도의 보석,세연정
우리말의 아름다움은 고산 윤선도가 보길도에서 지은 「어부사시사」를 통하여 찬란하게 빛난다. 그리고 아름다운 노래 가사를 탄생시킨 보길도와 그 중심으로 자리하는 세연정은 단순한 아름다움을 넘어 안빈낙도의 이상세계를 구현하려 하였던 윤선도 사상의 정점을 구현하는 곳이다. 세연정은 「어부사시사」만큼이나 아름답다.
그가 보길도에서 지은 20여 곳의 건축물 중 세연정은 유희의 공간이었다. 닭 울음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깬 윤선도는 독서를 하고 후학들을 가르치다가 오후가 되면 가마에 술과 음식을 담아 무희와 함께 세연정으로 향했다. 악공들의 연주소리에 인공의 연못 사이로 작은 배를 띄워 무희들의 노래를 들으며 술과 음식을 즐겼다고 한다.
신선들의 놀이터 같았을 세연정의 풍경은 현재 남아 있는 모습만으로도 상상할 수 있다. 낚시를 즐기던 칠암바위, 인공폭포와 구름다리의 구실을 겸한 판석보, 악공들의 연주를 위하여 석축으로 쌓은 단상인 동대, 서대 등이 자리 잡았고 산 중턱의 옥소암으로 악공과 무희를 보내 악기를 연주하거나 춤을 추는 모습이 연못에 비추는 모습도 즐겼다 하니 생각만으로도 대단하다.
판석보를 건너 숲길을 따라 옥소암으로 올라보자. 세연정의 경관을 한눈에 담으며 멀리 남해 바다가 어우러지는 경관은 정원 감상의 백미다.
윤선도 영정
낙서재(樂書齋)
고산 윤선도가 살았던 집터로 동천석실의 석실과 마주 보이는 곳이 격자봉 밑의 낙서재이다. 초가로 집을 지었다가 나라에서 송금령(松禁令)으로 소나무를 못베게 하자 잡목은 베어 세간집을 지었다. 고산 당대에는 초가였던 것을 후손이 기와집으로 개축하였고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는데 고산은 이곳에 거처하면서 시를 짓던 창작의 산실이다. 낙서재 남쪽에 잠을 자는 무민당(無悶當)이라는 집을 지음.무민당 옆에 연못을 파고 연꽃을 심었으며, 낙서재와 무민당 사이에 동와(東窩)와 서와(西窩)의 각한칸집을 지었고 소은병(小隱屛)이라는 바위가 남아있다.
곡수당
낙서재에서 건너다 보이는 계곡가에 이유적이 있다. 고산 윤선도의 자제 학관이 기거했던 곳이다. 지금은 논밭으로 변해버려 옛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곳은 작은 개울을 중심으로 고산의 아들이 조성한 초당, 석정, 석가산, 연지, 화계, 다리 등의 다채로운 조원이 조성되어 있다. 세연정보다는 비교적 규모가 작은 정자였다. 고산은 경승의 바위나 산봉우리마다 상징적인 이름을 붙이기도 하였는데 격자봉 서쪽 깊은 계곡에는 유상곡수를 즐기고 목욕을 하던 암반이 있었으며 이곳을 낭음계라 하였다. 현재 낭음계는 저수지로 변하였다.
예송리해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