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좋고 물도 좋다 - 부안
1.개요
부안군은 전라북도에서 서해와 맞닿은 옥구,김제,부안,고창의 4개 군 중에서 해안선이 99킬로미터로 가장 길며 삼면이 바다에 둘러 쌓여 있다. 농경지가 전체 넓이의 42%를 차지하는데 여기에는 간척지의 개발이 한몫을 차지하고 있다.
유홍준은 남도답사 일번지를 강진과 부안이 거의 동격으로 볼 수 있다고 하였다. 강진과 부안은 여러가지 면에서 유사한 환경을 가지고 있다.강진이 월출 산,강진만 구강포,정약용의 목민심서,시인 김영랑,무위사와 백련사,사당리 청자도요지,대흥 사와 반남고분이 있고,이에 대하여 부안은 변산,줄포만 곰소,유형원의 반계수록, 시인 신석정,내소사와 개암사,유천리 정자도요지,선운사, 고인돌이 있다.
원래 서해안은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심한 곳인데 그 중에서도 줄포만은 물이 빠지면 2킬로미터 내지 4킬로미터의 개펄이 드러난다.그래서 이 일대에는 수십 년 전부터 소규모 간척지가 많이 생겼다. 1962년에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국토건설단을 동원하여 조성한 서북쪽의 계화도 간척지는 2,741헥타의 논을 새로 만들었다. 그리고 운암댐 건설로 수몰된 임실군민 1만 여명을 이곳으로 이주시켜 농사를 짓게 했다.근레에 새만금 간척사업으로 인하여 또 다시 생태계 파괴가 과연 유효한 것인가 하는 논란을 계속 불러 일으키고 있다.
부안은 삼한시대부터 고을을 이루고 있었으며,고려시대에 부령현과 보안현으로 나뉘어 졌고,조선조 태종 때(1416년)에 부안이라 부르게 되었다.현재 1개 읍과 12개 면으로 행정구역을 갖추고 있는데,동고서저형의 일반적 지형과 달리 동쪽이 낮고 서쪽이 높은 반도형태로 남서부는 변산이 차지하고 북동부에 넓고 비옥한 평야를 가지고 있다.
부안의 답사는 읍내에 있는 동문안 당산과 서문안 당산에서 시작된다.각기 한 쌍의 돌솟대와 장승을 갖추고 있는데 이는 원시시대부터 내려온 땅과 연관된 동제복합문화의 상징이다.솟대는 마한의 소도와 같은 성역의 상징으로 돌장승은 마을의 수호신과 이정표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데, 이는 토테미즘에서 시작하 여 불교와 유고를 거쳐 전통민속의 한 형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동문안 할아버지 장승
고려시대에는 전남의 강진과 더불어 청자의 생산지로 이름을 날렸으며,조선 시대에는 명종 때의 명망 높은 예언가 격암 남사고가 <남격암십승지론>에서 전란기에 난을 피해 살기 좋은 곳으로 공주의 유구와 마곡,‚무주의 무풍, ƒ보은의 속리산, „부안의 변산, …성주의 만수동, †봉화의 춘양, ‡ 예천의 금당곡, ˆ영월의 정동상류, ‰운봉의 두류산, Š풍기의 금계촌”을 꼽아,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난을 피해 이곳에 들어와 살기도 하였다.깊은 산속으로 지금은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 곳이 대부분이다.
부안군 전체의 2/3 넓이를 차지하는 변산반도는 해안지대인 외변산과 산악지대인 내변산으로 나뉘 는데,<택리지>에서는 “변산의 바깥은 소금 굽고 고기잡이에 알맞고 산중에는 기름진 밭이 많아 농 사를 짓기에 알맞다.주민들이 산에 오르면 나무를 하고 산에서 내려오면 고기잡이와 소금 굽는 일을 하며 땔나무와 조개 따위는 값을 주고 사지 않아도 될 만큼 풍부하다”고 했다.
호랑가시나무 숲,후박나무 숲,꽝꽝나무 숲,미선나무 숲 같은 천연기념물이 있고, 개암사, 내소사,월명암 같은 절과 봉래구곡,직소폭포,선계폭포 같은 절경이 있는 내변산은 나무가 울창하여 버섯과 약초가 많이 나고 목재가 곧고 단단해서 고려시대부터 궁궐을 짓거나 배를 만드는데 징발되었다. 고려시대 원이 일본원정을 위하여 전함 구백 척을 만들 때 이곳의 나무를 썼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나온다.
일제 때부터 있었던 변산해수욕장이나 격포해수욕장은 일반적인 서해의 해수욕장과 달리 물이 맑고, 특히 수억 년간 쌓여 굳어진 퇴적물이 바다의 융기현상으로 만들어 진 채석강이나 적벽처럼 기암괴석으로 인하여 경관이 뛰어나 전국의 피서객이 몰려드는데 특히 근래에는 <가장 피서가고 싶은 곳>으로 선정되기도 한 곳이다.
채석강의 단애
채석강 풍경
부안에는 청동기 시대의 유물인 고인돌이 백 여 기가 있다. 특히 구암리에는
집 안마당에 13개의 고인돌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집이 있어 그 내력을 자세히 쉽게 볼 수 있다.동네 이름도 그 고인돌이 거북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부안을 빛낸 인물로는 조선시대 뛰어난 문인이었던 이매창과 현대를 대표하는 서정시인으로 신석정(1907-1974 목가시인,서정시인 촛불,슬픈 목가 등 시가 있다.
산비탈 넌지시 타고 내려 오면/ 양지밭에 흰 염소 한가히 풀 뜯고/ 길 솟든 옥수수밭에 해는 저물어/ 먼 바다 물소리 구슬피 들려 오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나라를 아십니까
비록 이곳에서 출생하지는 않았지만 여기에 삶의 터를 마련하여 후학들을 양성하고 사회전반에 걸친 과감한 개혁을 주장했던 실학의 대가 반계 유형원과 성리학의 대가로 많은 제자들을 길러 낸 전우도 있다
이곳에는 ‘변산팔경’이라 하여 웅연조대, ‚직소폭포, ƒ소사모종, „월명무애, …서해낙조, †채석범주 ,‡지포신경,ˆ개암고적 을 꼽았다.
부안의 특산물은 ‘생거부안’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풍부하고 다양하다.해산물 로는 조기를 비롯한 어류,백합과 바지락을 비롯한 패류, 김과 쭈꾸미 등 그 종류가 셀 수 없고,특히 멸치나 새우를 비롯한 젓갈류는 곰소염전의 풍부한 소금생산과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명물이다.
곰소 염전
계화도 간척지에서 생산되는 계화미는 최고의 미 질을 자랑하며,산에서 나는 각종 나물과 약재 또한 풍부하다.
부안군의 남쪽 어항인 곰소에서 서쪽으로 두시간 정도 가면 위도라는 섬이 있는데,우리나라 4대어장에 드는 칠산바다의 중심지가 이곳이다.이곳에서 잡히는 조기가 바로 영광굴비의 원조가 되었던 것이다. 지금은 어획량이 현저하게 줄어 쓸쓸한 섬으로 변했지만,해마다 정월보름에 풍어를 기원하며 치뤄지는‘띠뱃굿’의 전통은 지금도 이어져 오고 있다.
2.매창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하노라”
라는 시조를 쓴 조선의 명기생인 매창 이계생이 1573년 바로 부안에서 태어났다.
조선시대 2대 명기하면 송도의 황진이와 부안의 매창을,3대 명기하면 여기에 성천의 김부용을 포함하여 일컫는다. 유희경,직소폭포와 더불어 부안삼절로 꼽힌 그녀는 현리였던 이양종의 서녀로 태어났다. 가무와 시문에 유달리 뛰어났던 그녀는 천민출신의 시인 유희경,당대의 반항아이며 혁명가를 꿈꾸던 허균과 교분이 두터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매창의 묘
1573년 태어났으며 본명은 향금 기명은 계생으로 아호가 매창이다.1655년 부안의 시인단체인 <부풍시사>에서 묘비를 처음 세우고 제사를 지내 왔는데,1917년 마멸로 다시 세웠다 한다.부안현감 서우관,이귀,촌은 유희경-침류대시첩(강화사람,1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3년간 시묘살이.이에 남언경이 가례를 가르침.상례에 밝아 국상까지도 자문함.임재왜란 때 의병몹집 등 활약을 하였음.종2품 가의대부.93세 죽음.한성판윤을 추증함그의 재능을 높게 여기고 예술을 사랑하는 부안사람들이 그녀를 봉두산 언덕 매창뜸에 묻어주고 지금도 해마다 제사를 지내주며 38세에 요절한 가엾은 넋을 기리고 있다 한다.
매창공원에서
지금은 매창공원으로 잘 정비된 이 곳은 원래 공동묘지였던 곳으 로 일제시대 판소리로 이름을 날린 이화중선(여류명창. 부산 출신으로 근세 여류명 창의 최고봉을 장식하였다. 다섯 명창의 한 사람인 송만갑에게서 판소리를 공부하 여 여류로서 일가를 완성하였다. 1923년 전국 판소리대회에서 당대의 명창 배설 희를 능가하며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그의 고운 목청은 전무후무한 것으로 일세를 풍미하였으며, 수 많은 음반이 남겨져 있다.
특장은 [적벽가],[춘향가]이다. 1943년 일본에 끌려간 한국인 노무자를 위한 일본 공연을 떠났다가, 규슈에서 배가 난파되는 바람에 죽고 말았다)자매의 무덤도 같이 있다.<매창집> 개암사에서 개간되었는데,찾는 사람이 많아 목판을 불살랐다 하며,현 재 간송미술관,서울대 도서관,하바드대 도서관에 소장중이다.
기생이란 노래나 풍류로 주연석이나 유흥장에서 흥을 돋구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관기,민기,약방기생,상방기생 등 예기의 총칭.기생을 크게 분류하면,예술적 기능이 있는 기생과 그저 남성에게 육체만을 상대하던 창기 곧 유녀가 있다.
그 원류는 신라 24대 진흥왕 때에 여무적 직능의 유녀화에 따른 화랑의 원화에서 발생하였다고 한다.정약용과 이익은 고려 때 “백제 유기장의 후예인 양수척 중 이의민이 남자는 노를 삼고 여자는 기적을 만들어 주었으니 이것이 기생의 시초”라고 하였다.전쟁포로 중 부녀자를 노비화 하였는데,김유신이 좋아한 천관녀가 이에 속하나 이야기로 보아 재주와 미모가 뛰어나고 종교적 성향까지 지닌 명기로 보인다.
관기는 고려 문종 때 팔관연등회에서 여악을 베푼 것이 최초이며,이후 조선 조에 보편화 되었다.지방 기생들은 궁중이나 대감집에 자리를 차지하면 부귀와 영화가 보장되기 때문에 뇌물을 써서라도 서울진출을 노렸다.그러나 궁종연회가 항상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궁중재정이 부족하면 의녀, 음식,바느질을 담당하기도 하였다.여염집 여자가 치마를 왼쪽으로 여미는 대신 이들은 오른쪽으로 치마를 여미었다고 한다.
역대 왕중에 기생을 즐긴 왕으로 세조,성종,연산군(흥청망청,임사홍, 장녹수), 양녕대군, 안평대군을 들 수 있다.종종 때는 연산군의 패륜을 의식해서 의녀,창기 의 연회참여를 금지시키기도 하였다.기생을 관장하는 기생청이 있었는데,가무 등의 기예는 기본이고 행의,시,서, 화 를 가르쳤으며 상류사족의 교양을 연마시켰다.
구한말에는 권번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으며 서울과 평양에 기생학교가 있어 15-20세의 처녀를 교육시켰다.이외에 성천,해주,강계, 함흥,전주,경주가 유명하였으다. 시문으로는 황진이,매창,부용, 홍랑,소백주가 있고,의기로 계월향,논개,홍련을 들 수 있다.
기생제도는 조선시대에 발전하여 자리를 굳혔는데 사회계급으로 천민에 속하지 만,대부붐의 여염집 규수가 울타리를 벗어나보지 못한 폐쇄된 생을 사는 가운데 그 들은 자유분방한 사고를 기본으로 하여 의식이나 능력은 교양인으로 대접 받을 만 큼 시대를 앞서 간 특이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칠거지악 : 불순구고,무자거,질투,음행,악질,구설,도절
삼불거 : 시집와서 부모의 삼년상을 치룬 경우,조강지처,아내가 갈 곳이 없는 경우
3.주류성
변산반도는 나라 잃은 백제 유민들이 통일신라에 저항하여 백제부흥운동을 벌인 곳이기도 하다. 복신과 도침이 힘을 합쳐 의자왕의 아들 부여 풍을 중심으로 뭉쳐 격렬하게 저항하던 주류성이 충남 연기,한산 또는 예산이라는 설도 있으나, 최근에 바로 이 곳 ‘우금산성’이라는 설이 강력하게 대두되고 있다.그러나 복신 이 도침을 죽이고 풍왕이 복신을 죽이고 고구려에 망명함으로써 백제는 멸망하게 되었다.
변한의 왕궁터에 지어졌다는 개암사는 아담한 절로 닫집이 화려한 대웅전에서 바라보는 울금바위의 모습이 일품이다. 부처님의 궁궐을 상징하는 화려한 보궁에 아홉 마리의 용이 요동을 치는 대웅전 내부는 조선 정조시대 뛰어난 진경문화의 소산이라고 볼 수 있다4.청자도요지변산반도 주변은 전라남도의 강진과 더불어 우리나라 문화재의 백미인 고려 청자의 생산지로 알려져 있다.
강진에선 188개의 가마터가 발굴되었는데 이는 전국 에 있는 숫자의 절반에 해당하는 것이다.전국 박물관에 전시된 청자의 70% 정도가 강진에서 생산된 것으로 보면 틀림이 없다.즉,왕실과 귀족층에서 사용하는 고급청자를 생산한 것이다.
부안의 유천리나 진서리에도 수십 기의 가마터가 발견 되었는데, 가장 완숙한 상감청자가 이곳에서 만들어 졌고 분청사기나 백자도 생산 한 것으로 알려졌다.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모두 파헤쳐 깨어진 도자기 조각마저 모조리 가져가 버려 이제는 흩어진 사금파리 들만이 옛 영화의 흔적을 말해 주고 있다
유천리 도요지 기념비
흙과 물과 불이 있어야 자기가 나온다.이것이 자기 생산지로서의 입지조건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다. 깨지기 쉬운 자기를 대량수송하기에는 해상운송 이 절대적이던 시절에 가마터가 바닷가에 위치할 수 밖에 없는 한계도 있다.
도자기는 토기(1만년 전),도기(육조시대 기원 4-5세기),자기(8세기 당나라)를 합친 말이다. ‘불의 마술’이라 일컫는 도자기는 산화와 환원이라는 화학적 과정을 통하여 만들어 지는 것이다.산화는 공기와 접촉하여 변화하는 것을 말한다.도자기의 원료인 태토에는 철분이 함유되는데 철분은 불의 도움을 받다 더욱 빠르게 산화(FE2O3)하는 것이다.이것이 1300도씨 이상의 열을 받으면 환원작용(FEO)이 일어나 더욱 단단해지는 성질은 요즘의 우주선 제작에 쓰는 슈퍼세라믹에서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독일산 쌍둥이 칼이 녹이 슬지 않는 이유는 고열처리를 통한 환원작용의 결과로 이것이 첨단 기술이 되는 것이다.
자기제작 과정은 제토-성형-장식-초벌구이(섭씨700-800도)-시유(석회질유약 사용)-재벌구이(섭씨1300도 전후)를 하는데 이때 온도가 너무 높거나 낮으면 산화번조가 생기고 적정온도에서 산소의 공급을 차단하면 도자기 유약 속에 있는 산소가 빠지면서 환원번조가 생겨나며 푸른색을 띄게 되는 것이다.
토기는 섭씨800도,도기는 1,000~1,200도,자기는 1,300도 정도에서 구워지게 되는데 불이 약하면 황색이나 갈색이 나온다.유약은 나무재와 장석을 원료로 만든다.청자는 9세기 통일신라 후기부터 생산되었는데 아마도 당나라에 유학을 간 선종의 승려들이 제작기법을 국내에 전파했을 가능성이 있다.초기에는 문양이 없는 순청자만 만들다가 중국청자의 장점을 수용하고 이를 바탕으로 독자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청자,백자문화를 동시에 가진 나라는 중국과 우리나라 뿐이다,중국의 월주요 (지금의 상해지방으로 오월동주의 고사가 생겨난 월나라 지역의 땅이다.
오왕부차와 월왕구천의 ‘와신상담’이라는 고사가 생겨난 곳이다.당시 미인계로 이용한 서시는 중국의 역대 4대미녀 가운데 한 명이다.천어 서시,비월 초선,낙안 왕소군,수화의 양귀비가 이에 속하는 인물들이다.
중국은 2세기에 이미 자기를 개발한 것이다.선종불교의 영향에 따른 차문화 발전과 제기로서의 용도로 청자가 사용되었던 것이다.자기는 지금의 반도체에 비견되는 당시로서는 첨단 하이테크 산업이었던 것이다.장보고의 해상권 장악은 당나라의 자기무역에서 생긴 자금을 바탕으로 직접 제조,판매까지 장악하는 것이 가능했을 것으로 본다.1976년 신안 해저유물은 송대 청자로 고양이 밥그릇을 보고 동생이 신고하여 10년간 2만여점을 발굴하였고,1983년에는 완도에서 청자 3만701점이 발굴되었다.대부분 순청자류의 생활도자기로 배는 침몰한 무역선으로 추정한다.
통상 햇무리굽으로 시작된 순청자는 9세기에 사라졌는데 인종 때에 절정기를 이루며 의종 대에는 상감청자가 절정을 이루었다.초기의 작품은 병이나 주전자 등 강한 이미지를 주는 것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후기에 가면 선이 부드럽고 전체적 으로 유연한 국면으로 바뀐다.송나라 사신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에서 고려청 자의 비색(비가 온 뒤에 말게 갠 하늘)을 극찬하였다.
陶器色之靑者 麗人謂之翡色 近年已來 製作工巧 色澤尤佳 얇게 바른 유약이 두꺼운 유약 때문에 문양이 거의 없는 중국식과 다른 점이다-빙렬.회백색의 태토와 비색의 어우러짐이 백미.그릇의 형태도 중국 것처럼 과장됨이 없이 단순 온화함.문양도 생활주변의 것을 그대로 그려넣음.가장 획기적 특징은 상감 기법(태토로 만든 위에 적당히 마른 상태에서 무늬를 새기고 백토나 흑토를 채워 넣어 800도 정도로 초벌구이를 하고,유약을 발라 1300도로 재벌구이를 함)으로 우리나라에만 있는 고유의 기법이다.그 이전 금속공예의 은입사 기법이나 나전칠기 기법을 자기에 응용한 뛰어난 기술로 중국에도 없던 기술이다.
청자의 특징은 1)유약에 있다.은은하고 밝은 명랑한 색을 띄고 있는 것이다. 2)형태에 있다.중국청자는유약이 두꺼워 과장되고 딱딱한 느낌을 가지나 우리 것은 아주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것이다.왜냐하면 아이디어를 자연에서 가져왔기 때문이다. 3)문양에 있다. 생할주변의 것을 소재로 하여 독창적 형태의 시적,회화 적 분위기를 연출한 것이다. 4)동화에 있다.붉은색을 최초로 개발했지만 남용하지 않았다.
고려시대 최고의 문인 이규보는
나무를 베어 남녘 산이 벗겨지고
불을 지펴 연기가 해를 가리웠지
푸른 색 자기술잔을 구워내
열에서 골라 하나를 얻었네
선명하게 푸른 녹 빛나니
몇 번이나 짙은 연기 속에 묻혔었나
영롱하기 맑은 물을 닮고
단단하기 바위와 맞먹는데
이제 알겠네 술잔 만드는 솜씨는
하늘의 조화를 빌었나 보구려
가늘게 꽃무늬를 점 찍었는데
묘하게 정성스런 그림 같구려
푸르게 빛나는 옥은 푸른 하늘에 비치네
한번 보는 내 눈조차 맑아 지는 것 같아라 (목은시고) 중에서
이 글에서 보듯 청자의 성공확률은 10% 정도이며 기술이 발전한 지금도 20%를 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문양을 새기는 방법으로는 1)파이게 하는 방법 2)도드 라지게 하는 방법 3)찍는 방법 4)입체적으로 만들어 붙이는 방법 등이 있다. 초기에는 병이나 주전자 등 강한 이미지를 가진 것을 만들었으나 후기로 가면서 유연한 모양,원만한 모양으로 전환되었던 것이다.원의 공출을 막기 위해 자신의 눈을 찌른 양노인의 전설과 간송 전형필 선생의 애국심 20세기 초 일본인들의 도굴 과 처벌(쌀 2가마,징역 1개월)
유천리 도요지에서
1980년 대 초 요업과 교수팀과 도예공 팀의 고려청자 재현 시험에서 교수들이 참패 했다.이유는 과학적 분석을 통하여 사용한 유약보다 경험에 의한 전통적인 방법이 노의 온도,소성방법,날씨 등과 더불어 더 정확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청자의 기원은 중국이나 우리가 전혀 다른 문화의 창조물로 승화시킨 것이 다.건물의 모양에서도 우리나라의 독창성을 읽을 수 있다.
일본은 17세기 임진왜란-일명 도자기전쟁- 때 우리의 사기장들을 납치해가면서 비로소 자기를 만들 수 있었고,영국,프랑스,독일,덴마크,헝가리 (로얄달톤,웨지우드,로얄우스터,로얄앨버트,앤슬리,첼시,리모쥬,마이센,로얄코펜하겐,헤렌드,야드로) 등 유럽은 18세기에 비로소 자기를 만들기 시작하였다.일본인이 완전히 매료된 분청사기의 탄생과 왜구의 침략 문제.상감,박지,인화,귀얄,덤벙,철화분청 기법. 일본의 공예부문 국보 1호로 지정 된 기자에몽의 이도다완은 조선의 막사발이다.거칠어 보이지만 완숙함과 실용성과 자유분방함에 아마추어리즘이 결합된 것이다.
분청사기는 고려 말 신흥사대부의 주자학 문화와도 깊은 연관성이 있다.이것이 조선 조의 백자로 이어지게 된다. 백자는 고령토(백토)라는 철분이 거의 포함되지 아니한 순도 높은 태토를 가지고 만들어 낸다.
이른바 청화백자는- 코발트 안료,동화백자는-산화동,철화백자는-산화철안료를 사용한다.이중 코발트 안료는 ‘회청’ 이라 하여 아라비아에서 수입한 것이기 때문에 청화백자의 그림은 사기장이 아닌 화가가 직접 그림을 그려넣는 방법을 썼기 때문에 청화백자에 수준 높은 작품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이다.
5.내소사
벡제 무왕 33년 혜구두타 스님이 창건하엿다.해마다 정월 대보름이면 동네의 주민들과 스님들이 재를 지내준다는 절 입구 할머니 당산나무와 절 안의 할아버지 당산나무가 유명한 내소사는 백제 무왕 때 혜구두타 스님이 창건하였다 한다.일주문(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전나무 숲이 보이질 않게 함)을 지나 절로 들어가는 입구 6백미터의 전나무 숲이 아주 아름답다(눈내리는 날의 전나무 숲은 거의 환상적인 모습임).
내소사 대웅보전
채석강의 자연미에 비견되는 세련된 인공미를 이곳에서 느껴볼 수 있다.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대웅보전은 사미승의 장난 때문에 재목이 한 개가 빠진 채 못을 쓰지 않고 지었다는 도목수의 고집스런 집념(1000일 기도를 하며 재목을 정성스럽게 다듬음)이 서려있는 대웅전과 역시 사미승의 참을성 부족으로 단청을 칠하다 죽었다는 새의 전설(역시 100일 동안)이 아름다운 이 절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언제나 어머니의 품이 생각나도록 푸근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
대웅전의 꽃창살
조선시대 후기의 대표적 건축물로 화려한 다표계 양식을 사용하였으나 단청이 퇴색하여 오히려 고색창연한 맛을 느끼게 해 준다.꽃무늬를 새겨 넣은 문창살은 부처님께서 계시는 연화장세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물고기를 물고 있는 용의 모습은 물고기도 피안의 불국토 세계로 가자는 뜻을 담고 있다.주존은 아미타불이며 관음과 대세지보살이 좌우를 협시하고 있는데 중생을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반야용선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봉래루는 자유분방한 건물로 기둥의 굵기가 모두 다르며,주춧돌 또한 다듬지 않은 자연석으로 그랭이법이라는 우리의 독특한 기법을 이용하여 기둥을 아주 튼튼하고 안정감 있게 세워 놓았다.
절 입구 해안당대종사비에 “海眼凡夫之碑’라고 썼으며,’生死於是 是無生死’ 라는 글도 보인다.화두 하나 들고 수행하는데 더 없이 좋은 전국제일의 월명암도 있다.
6.반계유허지
보개면 우동리에는 조선시대 실학의 꽃을 피운 <반계수록>의 지은이인 유형원이 할아버지를 따라 이 곳에 내려와 기거했던 유허지가 있다.병자호란 때 도탄에 빠진 농민들의 모습을 보고 벼슬을 포기한 채 이곳에 눌러 앉아 정치,경제,군사 농업 등사회전반에 걸친 개혁을 주장하는 글을 남겼는데, 이 책은 다산이 강진에 유배되어 목민심서와 흠흠신서를 쓰는데 참고서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200년 후에는 동학혁명의 불이 이 책으로 인하여 지펴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반계 유허지
나라를 부강케 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는 방법(부민부국)으로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농민에게 최저기본량의 경작토지를 제공(경자유전)하고,농병일치의 군제개혁(지금의 예비군제도),부역의 균형,국민균등의 세제정리,국가재정의 확립,상공업의 장려,과거제 폐지와 공거제 채택,관아의 정비 등을 통한 이상국가 건설을 주장하고 심지어 노예제 폐지와 같은 혁명적인 발상을 하였다.(天下之理非物不着 성인지도 비사불행)
7.곰소항과 염전
곰소는 칠산어장의 조기잡이가 한창 성하던 때에 전국의 장사치들이 몰려 들어 북새통을 이루던 곳으로 지금은 조기떼가 사라져 옛 영화를 누리지는 못하고 있다.하지만 이곳 염전에서 풍부하게 생산되는 천일염을 원료로 하여 각종의 젓갈류를 생산하면서 서서히 옛 영화를 회복하려는 기미가 보이고 있다.
걸쭉한 입담을 주고 받으며 만선의 꿈을 기다리는 포구 아낙네들에게서 도회지 에서는 느껴 볼 수 없는 정겨움을 느끼게 되며,논처럼 바닷물을 가두어 놓고 소금을 만드는 염전과 시커먼 판자를 군데군데 지어 놓은 소금창고를 보며 옛날의 향수를 더듬어 보는 것도 멋진 추억거리가 될 것이다.
8.위도 띠뱃놀이(중요 무형문화재 제82호)
위도는 변산반도 격포항에서 14km 떨어진 서해안 에서 큰 섬으로 섬 생활은 고기잡이가 주업이다. 따라서 풍량을 달래고 풍어를 비는 토속신앙으로 옛부터 독특한 띠뱃놀이를 해온 민속이 있었다. 점차 사라져 가는 우리의 전통민속을 보존해 온 위 도 띠뱃놀이는 국민속민속예술경연대회(1978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이 띠뱃놀이가 전승되고 있는 곳은 파장금에서 8km쯤 덜어진 대리마을로 위도의 서쪽에 자리잡고 있다. 띠뱃놀이는 제사를 지내는무당과 화주와 기타임원을 마을원로회의에서 선출하고 제물 등 필요한 준비를 마련한다. 제삿날은 5색으로 된 사방깃발을 중앙에 대장군 깃발을 앞세우고 풍물을 치면서 마을 뒷산에 있는 원당으로 올라가 7신의 화상을 모신 당집에서 무당굿을 순서대로 지내고 내려온다.
한편, 산에서 띠를 베어다 부둣가에서 일일이 엮어 길이 4m 정도의 배를 만든 다음, 그 앞에 제상을 차리고 용왕제를 올린다. 제물은 용왕에 바치고 액운을 담은 인형을 짚으로 만들어 띠배에 태운다.
채석강에서
풍물을 흥겹게 치면서 모선이 5색기를 나부끼며 띠배를 바다로 인도하면 다른 배들이 호위하며 따르고 섬사람들은 떠나는 디배를 아쉬워 한다. 2km 쯤 가다가 띠배를 띄워 보내고 모선과 호위선들이 돌아온다. 망망대해에 띄워진 띠배는 파도따라 어딘가로 사라지고 섬사람들은 모두 나와서 뒷풀이 놀이로 밤을 새운다.
9.우동리 줄다리기
우동리는 부안읍에서 줄포 쪽으로 가다가 영전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꺽어 3km정도 가면 실음거리가 나오고, 이 마을 중간에서 변산 기슭으로 1km 정도 들어가면 마을 입구에 지름 2m 높이 15m 정도의 당산이 서 있고 그 아래 줄이 감겨진 입석이 눈에 보인다.
4개 부락이 참여하는 우동리 줄다리기는 줄 만드는 방법이 독특하다. 미리 마을 전체가 공동추렴으로 제물을 준비하고 짚다발을 거두어 정월 보름날 아침 일찍부터 부인들은 제물을 장만하고 남자들은 마을 앞길에서 줄을 꼬아 만든다.
줄은 위에 달아 매어놓고 아래서 꼬아 올리지 않고 길을 따라 양쪽에서 짚을 넣어 돌리면서 이를 하나로 합쳐 꼬아 가는 방법이 특별하다. 이렇게 수백m의 긴 줄을 만든 다음 이를 다시 합치고 합쳐 지름이 40cm 길이가 1백여m정도의 암줄과 숫줄을 각각 만든다. 한편에서는 아침부터 풍물굿이 어울려지며 분위기가 고조된다. 마을 노인들은 풍물을 앞세우고 100m 떨어진 당산으로 나가 금줄을 치고 제물을 차리고 앞세우고간 솟대를 당산에 세우고 제사를 지낸 다음 줄다리기를 시작한다. 줄다리기는 남녀가 나누어 암줄과 숫줄을 어깨에 메고 마을을 한 바퀴 돌아 나와 숫줄은 신랑을 , 암불은 신부를 태우고 양쪽이 마주쳐 격돌을 하여 승부를 낸다. 여자편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하여 언제나 여자편이 이기기 마련이다. 이처럼 우동리에서는 하루를 즐기면서 풍년을 빌고 나아가 한마을이 화합하는 공동체의식을 두터이 하는 민속이 이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