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중간 / 최정란
시간도 공간도 아닌 이 세계
미간도 행간도 아닌 이 세계
잠기고 불타고 녹아내리는
혼 놓고 백 놓고 허깨비로 헤매는
엎어지고 자빠지는
허방과 늪과 흙탕과 끌탕, 무르고 정처 없는
머리도 꼬리도 없는
절벽도 골짜기도 없이
천 길 뚝 끊어지는 가파르고 뭉클한
마음이 수시로 떨어져 내리는
엉겁결에 비명의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취한 것도 맨정신도 아닌
마신 것도 안 마신 것도 아닌
마셔도 마셔도 목마른
망치거나 낙화하거나 추락하거나 몰락하거나
슬프고 고프고 아프고
하소연과 엄살과 허세의 바닥에서
목젖에 이끼 끼도록 침묵하는 수도자로
침 튀기며 떠벌거리는 속물로
민달팽이처럼 꿈틀거리는 이 세계
원숭이처럼 비틀거리는 이 세계
불도 물도 아니면서 불과 물인
학생도 선생도, 선수도 코치도 아닌
곤도 붕도 아닌, 속도 성도 아닌
세간도 출세간도 아닌 이 세계
취한 술병의 빨간 엉덩이를 보여주는 이 세계
나비도 애비도 모르는 반풍수의 이 세계
가파르고 뭉클한 이 세계
희미한 희망의 손을 간절하게 내미는
점선의 측은만 남은 이 아름다운 세계
ㅡ 계간 《시산맥》 2023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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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정란 시인
1961년 경북 상주 출생. 계명대 영문학과 및 계명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졸업
2003 〈국제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장미키스』 『입술거울』 『여우장갑』 『독거소녀 삐삐』.
2019년 최계락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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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어중간 / 최정란
군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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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2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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