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마혈세전 色魔血洗傳 제1권 제갈천 - 차 례 - 1. 탄생 2. 부모님의 횡사 3. 무공입문(武功入門) 4. 최초의 살인 5. 환광검을 얻다. 6. 광란의 정사 7. 은하전장 8. 혼례식 9. 당초혜와의 재회 1. 탄생 영락 십 년, 연왕(燕王) 주체(朱逮)가 보위를 찬탈(簒奪)한 지 벌써 십 년의 세월이 지났는지라 모든 정변이 정리되어 황궁도 중원무림 도 평온함을 되찾은 지 이미 오래였다. 중원의 서쪽 사천성(四川省) 중심에 위치한 성도(成都)는 북경에서 서남향으로 약 사천 리나 떨어진 도읍이지만 쾌적한 날씨와 비옥한 토양으로 곡식과 채소가 풍부하게 생산되는 산지이다. 따가울 정도의 일광(日光) 또한 풍부한 곳인지라 매운맛이 나는 사 천요리는 종류도 많았고, 맛 또한 기가 막혀 일품으로 소문나 있었 다. 관에서조차 이곳으로 부임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뇌물을 바쳐야 한다 는 소문이 떠돌 정도로 살기가 좋은 곳이었다. 하여 이곳 양민들은 고향을 등지는 법이 없었다. 성도는 유비가 천하를 셋으로 나누자는 무후(武侯) 제갈공명(諸葛孔 明)의 뜻을 받아들여 촉(蜀)을 세우고 조조와 손권에 대항했던 곳이 다. 하여 이곳에 삼국시대 촉나라 재상이었던 제갈공명의 사당이었 는데, 그의 사후 충무후(忠武侯)란 시호를 받았기에 무후사라 불렀 다. 무후사는 남북조시대에 세워졌으며 명조초(明朝初) 유비의 사당인 소열묘(昭烈廟)와 병합되었지만, 그의 명성이 주군인 유비를 능가하 였기에 계속 무후사라는 이름을 지킬 수 있었다. 무후사는 유비전(劉備殿), 제갈량전(諸葛亮殿), 문신무장랑(文臣武 將廊) 등의 주요 건축물로 이루어졌으며, 역사적 인물의 망상(望像 : 찰흙동상), 비각(碑閣), 종(鐘), 북(鼓)등이 있어 지난 세월의 역 사를 보여주고 있었다. 경내(境內)에는 유비의 봉분인 혜능(惠陵)이 있는데, 높이가 사 장 이고 둘레는 무려 육십 장이나 되었다. 문신무장랑에는 유비의 부하였던 조자룡과 마초, 황충, 등지, 등윤 등의 망상이 실물 크기와 흡사하게 만들어져 있었고, 유비전에는 유 비상 좌측에 제갈량의 유명한 출사표가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향화를 올리는 방문객은 거의 대부분 줄을 서서 제갈량전에 들었다. 그래서 이곳은 향화가 끊이지 않는 곳으로 유명하였다. 무후사에는 오늘 따라 방문객이 많아 기다란 줄을 서며 차례를 기다 리고 있었건만, 수십여 명의 삼엄한 호위를 받으며 비단화복(緋緞華 服) 가슴 복판에 금사(金絲)로 당(唐)자가 수놓아져 있는 인물이 들 어서자 모두들 비켜섰다. 육 척 신장에 당당한 체격을 한 그는 날카로운 광망(光芒)을 발하는 안광을 드러내고 있었고, 툭 불거져 나온 태양혈(太陽穴)은 그가 높은 무공을 지녔음을 짐작하게 하였다. 범상치 않은 기도를 발하는 이십대 중반의 사내의 손에는 굵은 향이 들려져 있었다. 그가 천천히 제갈량전으로 다가서자 줄지어 서있던 방문객들은 서둘러 허리를 숙이며 비켜났다. 그는 사천성에서는 현령보다 더 위세가 당당한 사천당가의 가주였고 , 폭발물을 만드는데 신의 손을 지녔다고 해서 비폭장신(飛爆匠神) 이란 외호로 불리는 당무천(唐武天)이었다. 사실 유비전에 가서 향화를 올리고 싶었지만, 세가의 가주나 문주가 나라를 세운 유비전에 향화를 올린다면 반역죄로 처단을 하였기에 제갈량전을 찾은 것이다. 그는 약관의 나이에 자신보다 한 살 더 많은 한우림(瀚宇林)과 혼례 를 올렸지만 오 년만에 부인이 회임(懷妊)을 하여 만삭(滿朔)이 되 었기에 순산(順産)과 태어날 아이가 영특하길 기원하기 위해 무후사 를 찾았던 것이다. 향화를 올리고 향이 타기를 기다리던 당무천은 지난 과거를 회상하 며 미소를 지었다. 사천성에서 가장 큰 화원인 만화원(萬花園)의 원주 한우림은 어려서 부터 화초를 정성스레 가꾸는 것으로 이름나 있었다. 그녀의 나이 십팔 세가 되던 해 홀로 지내던 부친이 이승을 떠나자 만화원주직을 승계하게 되었다. 그 즈음 그녀의 화초 재배술은 중원 천지에서 가장 뛰어난 경지에 달하고 있었다. 방년의 나이가 된 그녀는 화용월태(花容月態) 침어낙안(侵魚落雁)이 란 표현이 부족할 정도의 미녀로 소문나 있었다. 그녀는 한 뿌리에서 나온 화초에 서로 다른 꽃을 피워냈기에 이화접 수(異花接手)란 외호로 불렸다. 언젠가 대명의 황제인 영락제가 사 람을 보내 그녀의 화초를 구입해 갔다는 소문이 퍼지며 더욱 유명해 졌다. 당무천의 부친인 수라추혼(修羅追魂) 당천화(唐天華)는 화탄(火彈) 제조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던 그는 새로운 화탄 제조실험을 하다 실수로 화탄을 떨어트리는 불의의 사고로 생을 마감했다.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진 셈이다. 부친상을 당한 당무천은 조화(弔花)를 구하기 위해 만화원으로 수하 를 보냈으나 빈손으로 돌아오자 분개하여 만화원을 찾았다. 당무천이 씩씩거리며 만화원으로 들어설 때 허름하면서도 수수한 의 복을 걸치고 머리에 낡은 두건을 두른 여인이 호미를 들고 화초를 가꾸고 있었다. 그녀가 바로 만화원주인 한우림이었다. "낭자가 만화원주요?" 당무천이 거친 음성으로 말하자 찾아 온 이유를 짐작하였는지 여인 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자신의 신분과 꽃을 보내지 않은 이유를 밝혔다. "그래요! 소녀가 바로 만화원주 한우림이에요. 공자께서 오신 이유 는 충분히 짐작해요. 허나……." 여인의 음성은 은쟁반에 옥구슬 구르는 듯하였고 당당하였다. 화초는 꽃이 피는 시기가 정해져 있는데 가을에 피는 국화를 당장 내놓으라는 억지에 최소한 하루만 기다리라고 하였더니 화를 내며 그냥 돌아가 버렸다는 말이었다. 그녀의 말에 당무천은 아무런 이의도 제기할 수 없었다. 국화가 피 기에는 너무도 이른봄이었기에 그는 말없이 당가로 돌아가야만 하였 다. 다음날 아침 당가에는 활짝 핀 국화가 수천 송이나 배달되었고, 덕 분에 당무천은 분묘를 국화로 도배하다시피 치장하여 효자란 칭송을 들을 수 있었다. 무사히 부친상을 치르고 안정을 되찾아갈 즈음 그는 고마움을 표하 기 위해 다시 만화원을 찾았다. 이는 꽃을 보내준 것보다는 전에 보 았던 그녀의 미모에 이끌려 찾은 것이었다. 수하들을 거느리고 만화원을 찾았을 때 한우림은 그들이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의 발에 짓밟힐 화초가 염려된다는 이유 였다. 홀로 안내된 당무천은 내실에서 이화접수 한우림이 손수 장만한 차 를 마실 수 있었다. 차를 따르는 그녀의 섬섬옥수(纖纖玉手)는 곱고 우아하였으며, 부드러워 보였다. 또한 소매를 걷고 차를 따르고 있 었기에 희디흰 팔목이 드러났는데 매끄럽고 탄력이 넘쳐 보였다. 쪼르륵―! 당무천은 두건을 벗고 마주앉은 한우림의 경국지색(傾國之色)의 용 모를 보며 자신이 왜 이곳에 왔는지 모를 지경이 되었다. '아! 세, 세상에… 정말 아름답구나… 저런 여인과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다면…….' 머리카락은 삼단처럼 검었고, 머리숱이 많고 둔부에 닿을 정도로 길 었으며 은은한 광택과 향기가 흘렀다. 감히 만져볼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머릿결은 젖은 비단처럼 부드러울 것 같았다. 넋을 잃고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뜨거운 시선을 감당하기 어려 워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옥용을 붉히자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한 동안 말없이 앉아 있던 당무천의 입에서 침묵을 깨며 느닷없는 말이 튀어 나왔다. "소저! 소, 소생과 혼례(婚禮)를 올려주시겠소?" "예에……?" 그녀가 놀라는 표정을 짓자 당무천은 느닷없는 자신의 말에 스스로 실책을 깨닫고 사과했다. "어엇? 소, 소저……! 고마움을 표하러 왔다가 소저가 너무 아름다 워 소생도 모르게… 죄송하오!" "호호호호……!" 사과인지 칭찬인지 모를 말을 더듬거리며 말하는 당무천을 바라보던 한우림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교소를 터트리자 그는 더욱 당황하여 몸둘 바를 몰라했다. 둘 사이에 잠시 적막이 흘렀고, 너무도 당혹스러워 고개를 숙이고 있던 둘이 거의 동시에 고개를 드는 순간 시선이 마주치자 마치 최 면에라도 걸린 듯 그대로 정지되었다. 그녀 역시 사천 사람인 탓에 그의 사람 됨됨이를 익히 알고 있었는 지라 호감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느닷없는 청혼(請婚)의 말에 그 역시 자신처럼 당황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저… 소녀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일생이 걸린 중대사를 쉽게 결정할 수 없으니……." 그날 당무천은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하고 어깨를 늘어트린 채 돌아갔 는데 눈만 감으면 아름다운 그녀 생각이 간절하여 틈만 나면 만화원 을 찾았고, 결국 그녀와 새록새록 정을 쌓는 사이로 발전하게 되었 다. 반년이 지난 후 만화원을 찾은 당무천은 드디어 혼례를 승낙하는 답 을 듣고는 서둘러 돌아가 마치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혼례준비를 하여 그녀를 아내로 맞이했다. 그가 무후사를 나서 당가로 돌아가고 있을 때 높은 담 너머로 산모( 産母)가 출산을 하며 지르는 신음(呻吟)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가모의 침실에선 당무천을 애타게 부르는 한우림이 마지막 산고의 고통에 못 이겨 신음을 토하고 있었다. 침실 안은 금은보화로 온갖 치장을 하여 화려하기 이를 데 없어 웬만한 부호(富豪)들의 침실도 비교하지 못할 정도였다. 신음은 극에 달해 있었고 이제 출산은 마지막 단계에 접어들고 있는 모양이었다. "으으으으윽! 으으으으으윽……!" "마님……!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힘을 주세요!" 시비들이 힘을 더 주라며 격려하는 소리가 들리고 약 일 각쯤 지나 자 아이가 세상 밖으로 나왔는지 고고성이 울려 퍼졌다. "응애……! 응애……!" 힘차게 세상을 향해 고고성(呱呱聲)을 터뜨리는 아이를 시녀들이 따 뜻한 물을 적신 건포로 조심조심 닦아주자 기분이 좋은지 잠시 후 울음을 멈추었다. "매월(梅月)아! 남아냐? 여아냐?" 산모가 힘없는 목소리로 물어보자 매월이라는 시녀가 크게 웃으며 답했다. "호호호……! 가모님! 수고하셨어요. 장군감을 나으셨으니 경하드려 요." 희소식을 숨죽이고 기다리던 식솔들에게 주모께서 아들을 순산하셨 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가주의 모친인 귀면파파(鬼面婆婆) 반추하(潘 秋河)가 맨발로 뛰어들며 덩실덩실 춤을 췄다. 젊었을 때 천상옥녀(天上玉女)라 불릴 정도로 미모가 출중했던 반추 하는 부군인 당천화가 실수로 광천뢰를 떨어트렸을 때 근처에 있다 가 전신에 생명에 지장을 줄 정도의 화상을 입었었다. 간신히 목숨은 건졌지만 상처가 아물며 피부가 오그라들어 끔찍하게 보이는 안면을 지니고 있어 듣기에도 거북한 귀면파파란 별호로 불 렸다. "네 이름은 당혁린(唐奕麟)이다. 조부께서 살아 생전에 지어 놓은 이름이지만 네게 딱 맞는 이름이구나! 흘흘흘……!" 한참 동안 손자를 안고 춤을 추던 귀면파파가 자애스런 눈빛으로 말 했다. "아가야! 정말 수고했구나……! 이렇게 잘 생긴 아들을 낳을 거면서 왜 그토록 시어미의 간장을 녹였누……? 정말 고맙구나……!" 고부간에 다정스레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에도 외원(外院)의 마구간 옆, 하인들이 살고 있는 작고 허름한 방에선 신음성이 끊이지 않고 새어 나오고 있었다.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한 당가에 이런 곳도 있을 가 싶을 정도로 허 름한 방에는 삼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구레나룻을 기른 건장한 체격 을 가진 사내가 흙바닥에 거적을 깔고 누워 있는 여인의 손을 잡고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풍성한 몸매의 여인은 태산만큼 부풀어 오른 배를 움켜쥐고 신음을 토하고 있었다. "아아악……! 여보! 너무 고통스러워요." 같은 말을 수없이 반복하는 여인은 비 오듯 땀을 흘려 의복이 축축 하게 젖어 있었고, 몹시 지친 듯 보였다. 그러나 사내의 손을 잡은 여인의 손아귀에는 일반 여인의 힘이라고는 믿지 못할 엄청난 힘이 들어가 있었다. 사내는 산고를 겪는 아내가 지금 어떠한 고통 속에 있는지 먼저 자 식을 본 다른 사람들에게 들어 잘 알고 있었다. "여보! 힘내구려. 이제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아아악……!" 사내는 말하는 도중 갑자기 아내가 비명을 지르며 눈을 뒤집고 흰자 위만 보이자 너무 놀라 펄쩍 뛰었다. "여, 여보……!" 화들짝 놀란 사내가 다급하게 아내를 부를 때 양수가 터져 나왔는지 거적을 흠뻑 적셨다. "아아아아악……!" 만 하루 동안 산고를 지켜보던 사내도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으 나, 아이의 머리가 보이기 시작하자 어디서 힘이 솟는지 아내를 격 려했다. "여보! 힘줘……! 아이의 머리가 보여. 그러니 더 힘을 주라고……. " "으응……! 으응……!" 사내의 격려를 받은 여인은 혼신의 기력을 모아 힘을 주기 시작했고 , 아이는 모친이 힘들어한다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지 너무도 쉽게 빠져 나왔다. "어엇! 여, 여보, 나왔어! 나왔다고……." 사내는 가쁨에 겨워 말을 잇지 모하고 있었다. 헌데 아이가 고고성 을 터트리지 못하자 깜짝 놀라 살펴보니 아이의 목에 탯줄을 감겨 있었는데, 자궁을 빠져 나오며 질식했는지 전신이 새파랗게 보였다. 황급히 사내가 목을 감은 탯줄을 풀고 아이의 입을 벌리자, 세상의 기운을 모두 흡입하려는지 가슴이 부풀도록 숨을 들이마시고 마침내 우렁차게 울기 시작했다. "응애……! 응애……!" 아이가 울기 시작하자 그제야 사타구니를 바라본 사내의 입이 함지 박만큼 벌어졌다. "으하하하……! 아들이구나! 아들……! 하하하……!" 여인은 너무도 기뻐하는 사내를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 말할 기력 도 없는 듯 보였다. 사내가 탯줄을 끊고 아내의 산후조리를 하는 동 안에도 아이는 우렁차게 울고 있었다. 전신이 새파랗게 변해 있었던 아이의 피부는 붉은 홍조를 드리우고 있었는데, 가슴부위에 있던 도화(桃花)모양의 붉은 점이 슬며시 사 라졌다. 멀리 자신의 집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오자 비폭장신 당무천은 가마를 메고 있는 수하들을 다그쳤다. "출산한 모양이다. 빨리 가자!" 가마를 메고 있는 수하들의 발놀림이 빨라져 분진을 날리며 쏜살처 럼 가고 있었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얼마나 우렁찬지 정문 밖까지 들려오자 당무천은 몹시 흡족하게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 울음소리의 주인은 전삼(全 三)과 홍아영(紅娥瑛)이라는 하인의 아이였다. 정문을 들어서고 나서야 아이의 울음소리가 두 군데서 들려온다는 것을 알아차린 비폭장신 당무천은 미소를 지었다. '으음……! 맞아, 전삼도 오늘내일한다는 소리를 듣고 내가 착각을 했군. 가문에 경사가 겹쳤구나! 내 자식이 귀하다면 그들에게도 몹 시 귀한 자식이겠지……?' 그가 미소를 지은 채 서둘러 내원으로 통하는 문을 넘어서자 귀면파 파가 금방 출생한 손자를 비단보로 얼싸안고 그들 반겼다. "가주! 대를 이을 건강한 아들을 보았소. 이 어미는 이제 죽어도 여 한이 없구려. 지하에 묻히신 부친도 가주가 대를 이은 것을 알면 기 뻐할게요." 귀면파파가 아이를 건네주자 당무천이 조심스레 받아들었는데, 아이 는 금방 울던 것을 멈추고 아비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키는 듯 하 였다. "하하하……! 너를 세상사람 모두가 부러워 할 정도로 잘 키워주겠 다. 헌데 네 이름을 뭐라 지을까?" 누워 있던 한우림이 아픈 배를 잡고 피식 웃었다. "호호……! 가주, 그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요. 그런데 아이를 낳은 소첩에겐 한마디 말도 없다니 섭섭하 네요. 아이의 이름은 어머님께서 혁린이라 지어주셨어요." 당무천이 누워 있는 한우림에게 미소를 짓고 다가가 이마의 땀을 닦 아주며 말했다. "부인 미안하오! 너무 기뻐 잠시 부인을 잊고 있었구려. 고맙소! 부 인이 너무 사랑스럽구려……." 미소짓던 한우림이 정색을 하며 입을 열었다. "가주! 어머님께서 계신데 말을 가려서 하세요." 귀면파파가 그녀의 땀에 젖은 섬섬옥수를 꼭 쥐며 말했다. "아가야! 괜찮다. 오늘 같이 기쁜 날 가주가 그리하는 건 괜찮으니 다른데 신경 쓰지 말고 산후조리나 잘하거라." 귀면파파가 당무천을 바라보며 물었다. "가주! 부친께선 가주가 대를 이을 자식을 보면 당혁린이라고 짓겠 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오. 물론 자식의 이름을 부모가 지어주 어야겠지만 이미 고인이 되신 부친을 생각하여 그리 부르도록 하오. " 당무천은 무후사에서 돌아오며 수없이 많은 이름을 작명하고 어떤 것이 좋을까 행복한 고민을 했었는데, 선친께서 지으셨다는 이름도 자신의 마음에 들었기에 아이를 번쩍 들며 말했다. "하하하……! 당혁린! 앞으로 사천당가를 번성시킬 네 이름이 당혁 린이다. 하하하……!" 그날 당가에서는 아이를 낳은 가모의 산후조리를 위해 정숙(靜淑)을 유지하라는 가주의 엄명이 내려졌다. 그리고 무슨 일인지 당무천이 마구간지기를 불러 전삼은 지체 없이 발에 불이 나도록 뛰어왔다. "하하하……! 전삼! 자네도 자식을 보았다니 축하하네. 그런데 아이 의 이름은 지었는가?" 가주의 축하를 받는 전삼은 황송해서 쩔쩔맸다. "가주! 소주께서 태어나셨음을 경하(敬賀)드리옵니다. 소인은 글을 몰라 아직 이름을 짓지 못했습니다요." 당무천은 빙그레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린아와 한날에 태어난 것은 전생에 깊은 인연이 있는 것 같으니 특별히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겠네. 청명한 가을에 태어났으 니 소추(昭秋)라 지으면 어떻겠나?" 전삼은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감사합니다요. 가주! 그대로 따르겠습니다요. 정말 감사합니다요." 당무천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총관을 불렀다. "총관!" 가주의 조카벌인 총관 추혼철갑(追魂鐵匣) 당천수(唐天手)가 나타나 부복을 하였다. "가주! 찾으셨습니까?" 당무천이 전삼을 가리키며 말했다. "전삼의 처가 산후조리를 하는데 모자람이 없도록 하게. 그리고 한 달 간 푹 쉬게 하게나. 물론 전삼도 쉬게 하고… 마구간 치우는 일 을 당분간 다른 하인에게 시키도록 하게." "존명!" 추혼철갑은 전삼과 함께 나갔다. 전삼은 머리가 좀 둔하기는 했으나 근력이 좋았고, 우직한 성품에 게으름 피는 일이 없어 온갖 궂은일을 거의 도맡아하였기에 당가에 서 그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종복의 몸이라 혼례를 올릴 나이가 한참이나 지났지만 아무도 그에게 시집을 오려는 사람이 없어 노총각으로 나이를 먹어갔었다. 이를 측은히 생각한 총관 당천수가 거금을 들여 홍루(紅樓)에서 몸 을 팔던 기녀 홍아영을 사왔다. 그렇게 하여 전삼과 맺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처음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점차 그의 성실함과 근면 함이 마음에 들어 차츰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이제 홍아영은 전삼 과 더불어 당가에서 제일 부지런한 종복(從僕)이 되어 있었다. 전삼은 총관의 덕택에 장가도 들고 아이까지 낳게되었다며 감사의 말을 올렸고, 가주께서 친히 이름을 지어주셨다며 침까지 튀기며 자 랑했다. 당가의 총관인 당천수는 항상 좌수에 철로 만든 장갑(掌匣)을 끼고 있었는데, 독사(毒沙)와 독침(毒針)을 뿌리는 그의 독술은 경지에 올라 추혼철갑이라 불렸다. 그는 광에 들러 전삼에게 작은 주호(酒壺:술병)를 내주었다. "이보게 전삼! 오늘은 기쁜 날이니 술이나 한잔 마시게. 가주께서 명을 내리셨으니 내일부터 한 달간은 쉬어도 좋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사라지는 전삼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그의 얼굴 에는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다음날 아침 내원에서 시중을 드는 시비들이 전삼 내외가 기거하는 방으로 조반을 차려 가지고 왔는데, 갖가지 요리와 전복과 동자삼을 넣어 만든 죽을 가지고 왔다. 홍아영은 삼을 넣어 약간 쌉싸롬한 맛이 났지만 배가 부를 때까지 죽을 비웠다. 게눈 감추듯 죽을 먹던 홍아영이 고개를 들고 그제야 생각이 났는지 전삼에게 말했다. "여보! 이렇게 맛있는 죽은 처음 먹어봐요. 그런데 음식이 너무 많 아 남으니 당신도 좀 드세요." 전삼은 홍아영이 맛있게 죽 그릇을 비우는 것을 보며 답했다. "후후……! 나는 당신이 맛있게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오. 그리 고 이런 기름진 음식에 길들여진다면 나중에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지 니 먹지 않겠소. 그러니 어서 당신이나 많이 드시오." 홍아영이 조반을 마치고 조금 누워 있으려니 아이가 잠에서 깨어 울 음을 터트렸고, 젖을 물려주자 작은 입을 오물거리며 열심히 빨아대 었다. 아이는 배불리 먹었는지 슬며시 눈을 감더니 쌕쌕거리며 잠이 들었 고, 이런 모습을 바라보던 전삼이 몸을 일으켰다. "여보! 가주께서 우리를 이렇게 아껴주시는데 놀고 지낼 수는 없지 않겠소……? 힘들더라도 좀더 열심히 일을 해서 은혜를 갚아야 하니 무슨 일이 생기면 부르시오." 홍아영은 밖으로 나가는 전삼이 평생 일만하고 마음 편히 쉰 적이 단 한번도 없기에 말리고 싶었으나, 말린다 하더라도 소용없음을 알 고 미소만 짓고 있었다. * * * 성도 저잣거리 맨 끝엔 보름마다 우시장(牛市場)이 섰다. 소는 농사 에 꼭 필요하기에 많은 소들이 거래되었다. 관도에는 수많은 인파로 붐비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가느다란 초적( 草笛) 소리가 들려왔다. 삐리리―! 사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텁석부리 장한(壯漢)의 손엔 고삐가 쥐어 져 있었고, 황소의 등에 올라탄 소년이 부는 초적(草笛)에선 듣기에 도 매우 상쾌한 음률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소년은 체격이 커 십오 세 정도로 보였는데, 치기(稚氣) 어린 눈동 자는 소년의 나이가 더 어리다는 것을 짐작하게 하였다. 피부색은 약간 검은 듯 했으나 귀밑까지 뻗친 짙은 검미가 마치 붓 으로 그린 듯 시원하게 보였고, 까만 눈동자의 안광은 깊은 심연의 깊이를 느끼게 하였으며, 오똑하게 솟은 콧날과 붉은 입술은 소년의 인상을 더욱 돋보이게 하였다. 소년이 입에서 초적을 떼고 장한에게 물었다. "아버지! 총관께서 이놈을 은자 이십 냥에 팔라고 했으니 더 좋은 값으로 팔아 어머니 선물을 사면 어떻겠어요?" 장한은 소년에게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소추야! 아비는 평생 정직하게 살았단다. 만일 더 좋은 값을 받는 다면 당연히 총관께 드려야지 맘대로 사용하면 되겠느냐?" 소년은 사천당가의 하인 전삼의 아들 전소추였고, 십이 세의 나이라 곤 도저히 믿기지 않을 만큼 체구가 당당했다. 전소추는 부친의 말에 빙그레 미소지으며 입을 열었다. "헤헤헤……! 아버지! 총관께서 스무 냥을 넘게 받으면 제 맘대로 써도 좋다는 허락을 하셨어요. 그러니 이번만큼은 소를 팔 때 제가 나서서 팔도록 해주세요." 전삼은 전소추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오늘만 눈감아주겠다. 하지만 이런 일이 반복되면 눈 밖에 날것이니 다음부터는 총관께 무리한 요구를 하지 말거라." "헤헤! 알았어요. 아버지!" 전소추는 다시 초적을 입에 물고 흥겨운 가락을 연주하며 우시장으 로 향했다. 거기는 이미 입추의 여지도 없이 인파로 북적댔기에 구 석진 곳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우시장엔 황소뿐 아니라 물소도 거래되었다. 하지만 물소보다는 육 질이 좋아 황소의 가격이 높았다. 보통 스무 냥 안팎에 거래가 성사 되었는데, 전소추가 타고 온 황소는 뿔도 가지런하게 자라났고, 다 른 소에 비해 무게가 더 나가는 편이었다. 거간꾼이 나서서 매매를 성사시키고 일 할을 떼어 갖는 것이 통례였 지만, 전소추는 남에게 일 할을 떼어 주고 싶지 않아 우시장이 떠나 가도록 소리를 질렀다. "황소 사세요. 털에 윤기가 반지르르한 이 황소를 사세요." 어린 소년이 팔러왔다고 생각했는지 싸게 사려는 사람들이 황소를 보며 투덜거렸다. "이런! 덩치만 컸지 별 쓸모가 없겠군." 전소추는 투덜거리는 사내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아저씨는 농부가 아닌 것이 확실해요. 이 소는 발굽도 튼튼하고 발 목이 굵어 힘이 무척 강해요. 여기에 계신 분들 모두 잘 알고 계실 텐데 아저씨만 모르시는 것 같군요." 트집을 잡아 소를 싸게 구입하려다가 어린 소년에게 핀잔을 받자 사 내는 슬그머니 사라졌다. 전소추는 소의 체형과 뿔, 귀, 꼬리부분에 흠잡을 곳이 없다고 설명 했고, 특히 힘이 세어 밭을 일구는데 최고라고 말했다. 구입하려는 사람들은 대부분 농민이었기에 이견이 있을 수 없었다. 한 농민이 소의 등을 툭툭 쳐보며 말했다. "스물두 냥을 줄 테니 내게 팔아라……." 전소추는 그 사람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아이참! 만일 아저씨 집에 보물이 있는데 헐값에 팔라고 하면 파시 겠어요?" 완곡한 거절의 뜻이었다. 다른 농민이 나서서 스물넉 냥을 불렀지만 전소추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한 냥씩 대금이 올랐지만 그때마다 전소추는 고개를 저었고, 결국 스물여덟 냥을 부른 사람에게 고삐를 넘겨주었다. "아저씨! 운이 무척 좋으세요. 이 같이 튼튼한 소는 성도에 몇 마리 없을 거예요." 전소추는 은자를 건네 받아 전삼에게 주며 말했다. "아버지! 이제 저쪽 저잣거리로 가서 선물을 사야겠어요." 전소추는 전삼의 손을 잡고 사람들 틈으로 빠져나가 장신구를 파는 곳으로 향했다. 전삼은 스물넉 냥만 받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스물여덟 냥을 받 자 입이 벌어졌다. "하하하! 추아가 생각보다 좋은 값에 소를 넘겼구나. 이 아비는 목 이 컬컬하니 곡주(穀酒)나 한 잔 해야겠다." 전삼은 전소추에게 은자 세 냥을 쥐어주고는 객잔으로 성큼성큼 걸 어 들어갔다. 그러자 전소추는 장신구를 파는 곳으로 달려가 여기저 기를 기웃거리며 구경을 했다. 이것저것 물건값을 물어본 후 철비녀(鐵婢女)와 동그란 동경(銅鏡), 그리고 빤짝거리는 작은 노리개 한 쌍을 샀다. 모친의 발가락이 보일 정도로 닳은 목혜(木鞋)를 보고 마음이 아팠 기에 부드러운 혁피화(革皮靴)도 한 켤레 구입했다. 대나무로 만든 기다란 담뱃대와 반질반질 윤이 나는 바둑돌 그리고 바둑판을 구입하니 구리동전 삼 문밖에 남지 않았다. 여기저기 먹거리가 많아 먹고 싶었지만 삼 문으론 만두 두 개밖에 살 수 없었다. 그것을 순식간에 먹어치운 전소추는 부친이 술을 마 시고 있는 객잔 앞에서 나오기를 기다렸다. 미시(未時) 끝 무렵이라 배에선 꼬르륵 소리가 들렸지만, 저잣거리 에서 산 물건들을 만져보니 시장기가 사라졌다. 전삼이 모처럼 저잣거리에 나와 곡주를 마음껏 마셨는지라 몹시 취 한 상태로 객잔을 나오자 전소추는 얼른 부축하였다. 부친의 체구가 장대하여 힘에 부쳤지만, 선물꾸러미를 든 전소추는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당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전삼이 전소추의 부축을 뿌리치고 갈지(之)자로 흐느적거리며 혀 꼬 부라진 음성으로 말했다. "좋구나, 좋아……! 야, 이놈아! 아비가 좀 취했기로서니 네게 부축 을 받을 정도는 아니다. 넌 당가를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로 열심히 일해야한다. 그래야 가주께 은혜를 갚는 것이다. 알았지?" "알았어요. 어서 가기나 해요." 전소추는 사천당가의 장자(長子)인 당혁린과 한날에 태어났다는 이 유로 가주와 총관을 비롯한 대부분의 식솔들에게 종복으로서는 과분 한 대우를 받아 항상 명랑하고 쾌활하였다. 그리고 가주의 특별 배려로 당혁린과 같이 수학(修學)하였기에 마치 친형제와 같은 우애(友愛)를 쌓아왔다. 전소추는 글을 읽히는 것을 무척 좋아하였기에 당혁린의 거처 서가( 書架)에 있던 사서삼경(四書三經)과 제자백가(諸者百家)등 일반 서 책은 물론 적은 수량이었지만 불경(佛經)과 산해기서(山海奇書)와 같은 기이한 내용을 적은 서책도 접했었다. 당가에서 종복에겐 무공을 전수하지 않았으나, 당혁린은 자신이 익 힌 무공 중 일부를 남몰래 전소추에게 전수하곤 하였다. 물론 내공심법 같은 것은 전수해주지 않았지만 암기술(暗器術)이나 용독술(用毒術), 해독술(解毒術) 등의 구결은 전소추의 뇌리 속에 깊이 각인(刻印)되어 있었다. 전소추는 가끔 당가에서 멀리 떨어진 산 속에 들어가 연습을 하였고 , 지금은 나는 새를 떨어트릴 정도로 암기술을 익혔다. 비록 내공이 없는 상태에서 시전하는 것이었지만 작은 돌멩이만 있 다면 너무 먼 거리의 표적이 아니라면 무엇이든 맞출 수 있는 경지 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어린 전소추가 당가의 무공을 배우 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그런 전소추는 상전과 종복의 신분을 구분할 정도의 나이가 들자 당 천빈을 대하기가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당혁린은 전소추와 함께 지 내는 시간이 즐거워 늘 그를 가까이 하려고 하였다. 당혁린에겐 세 살 어린 당초혜(唐草慧)라는 누이가 있었는데, 전대( 前代)를 통 털어 당가에 그와 같은 미모를 지닌 소녀는 없을 정도로 예쁜 소녀였다. 남들이 없을 때에는 당초혜 또한 전소추를 오라버니라 부를 정도로 사이가 좋았기에 맛있는 것이 생기면 그에게 갖다주곤 하였다. 부친과 함께 당가에 돌아온 전소추는 먼저 총관을 찾아 담뱃대를 전 하고 모친에게 달려갔다. 전삼은 술에 만취해 비틀거리며 소를 판 대금을 전했다. "딸꾹! 헤헤헤……! 총관께 감사드립니다요. 소추에게 은자 이십 냥 만 가져오라고 하셨다기에 남는 돈으로 술을 한잔했습니다요." 당천수는 전삼이 준 대금이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 대체 얼마에 팔았는데 이렇게 많이 가져왔나? 소추에게 마음대 로 쓰라고 했거늘……." 전삼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총관! 소추녀석은 이 아비보다 똑똑해 소를 제값 이상을 받고 팔았 습니다요. 딸꾹……! 제 어미에게 줄 선물을 샀으니 아마 그것으로 족할 겝니다." 당천수는 딸꾹질을 하는 것을 바라보며 나직이 혀를 찼다. "쯧쯧쯧……! 술을 많이 마셨군. 가서 쉬게나." "헤헤……! 알겠습니다요." 돌아선 전삼이 비틀거리면서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며 마구간으로 향 하자 당천수는 담뱃대를 매만지며 미소지었다. '음……! 다음에도 소추를 딸려보내야겠군.' 전삼이 마구간 옆의 침소에 돌아왔을 때 전소추가 모친의 발에 혁피 화를 신겨주며 하는 말이 들려왔다. "어머니! 이것을 신으면 발이 아프지 않다고 하니 이제 목혜는 버리 세요. 다음엔 더 좋은 걸 사드릴게요." 홍아영은 철비녀를 꽂고 동경에 얼굴을 비춰보며 웃었다. "호호호……! 이렇게 반짝거리는 동경에 내 얼굴을 비춰보는 것도 오랜만이구나. 동경만으로도 행복한데 게다가 철비녀와 부드러운 혁 피화까지 선물하다니……! 고맙구나… 이제 어미의 발이 아프지 않 을 거야." 전삼이 방문을 열어제치며 들어와 벌렁 누우며 말했다. "여보! 소추가 사 가지고 온 것이 그리도 좋소……? 딸꾹!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술을 마시지 말고 당신에게 선물을 한가지 더 해줄걸 그랬소. 딸꾹! 소추야! 내 것은 없냐……?" 전소추는 전삼에게 이불을 덮어주며 답했다. "아버지는 은자 한 냥으로 술을 드셨잖아요. 힘드실 테니 쉬세요. 저는 잠깐 다녀올 곳이 있어요." 전삼은 취기에 못 이겨 금방 잠들었고, 코를 골았다. 드르렁―! 드르렁―! 홍아영이 나가보라고 손짓을 하자 전소추는 마구간을 나와 내원(內 院)으로 달려갔다. 거기엔 커다란 연못이 있었는데 형형색색의 물고 기들이 한가로이 노닐고 있었고, 중앙에 작은 가산(假山)도 있었다. 가산은 폭이 좁은 운교(雲橋)로 연결되어 있었고 온갖 화초로 뒤덮 여 있었다. 가산에 있는 정자에서 글을 읽던 당혁린은 전소추가 내 원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서책을 내려놓았다. "소추야! 여기야 여기……." 전소추가 교각을 건너 당혁린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소주! 소인이 저잣거리에 나갔다가 선물을 샀어요. 변변찮은 물건 이지만 제 성의를 생각해서 받아주세요." 바둑돌과 바둑판을 내밀자 당혁린은 몹시 마음에 든다는 표정을 지 었다. "소추야! 이곳은 아무도 없는데 어릴 때처럼 그냥 이름을 불러라. 네가 날 그렇게 대하니 거북하잖아……?" 전소추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소주! 장차 가주가 되실 분에게 무례를 범할 수는 없어요. 사리분 별 할 나이도 들었고, 어차피 종복의 신세를 벗어날 수 없으니 이제 하찮은 저를 친구로 대하시는 것은 그만 두세요." 전소추의 말을 듣던 당혁린이 언성을 높였다. "소추! 내가 언제 널 종복으로 대한 적이 있었어? 만일 네 신분 때 문이라면 아버님께 말씀드려 종복의 신분을 면하게 해주겠어… 한번 만 더 소주란 칭호를 쓴다면 다시는 널 보지 않을 것이니 그리 알고 나를 전처럼 친구로 대해 줘. 알았지?" 전소추가 입장이 난처하여 고개를 들지 못하자 당혁린은 자신이 너 무 심하게 말을 한 것 같아 미안해하였다. 둘 사이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동안 때마침 그곳을 지나던 당초혜가 운교를 건너왔다. "오라버니들!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거예요?" 당혁린과 전소추가 다소 어색한 분위기를 모면하려는 듯 미소를 짓 자, 당초혜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전소추가 들고 있는 장신구를 바라보며 웃었다. "호호호……! 오라버니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여인들이나 쓰는 장신 구잖아? 누구의 물건이지?" 전소추가 장신구를 내밀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씨 드리려고 소인이 샀어요." 장신구를 건네 받은 당초혜는 이리저리 살펴보며 기뻐했다. "우와……! 정말 예쁜데? 정말 날 줄려고 샀단 말이지……?" 당초혜는 자신의 머리에 꽂혀 있는 오색영롱한 보석이 박혀 있는 장 신구를 떼어내고 전소추가 선물로 준 것을 꽂으며 물었다. "오라버니! 나 예뻐? 호호… 난 이담에 오라버니와 혼례를 올릴 거 야. 그래도 괜찮지?" 당혁린은 밝게 미소를 지은 당초혜를 바라보며 답했다. "그럼! 너만 좋다면 소추와 혼례를 올리는 것을 이 오라비는 반대하 지 않을 거야." 당초혜는 얼굴을 붉히더니 뒷걸음질쳐 운교를 건너며 말했다. "오라버니가 예쁜 것을 줬다고 어머님께 자랑할거야." 당초혜가 멀리 달려가는 것을 본 당혁린이 전소추를 직시했다. "소추! 우린 어렸을 때부터 벗으로 살아왔어. 네가 날 대하는 태도 가 바뀐지도 벌써 사 년의 세월이 흘렀지… 하지만 네가 어떻게 생 각하든 나는 널 영원히 벗으로 대하겠다." 그의 말에 전소추는 콧날이 시큰해지고 눈물이 글썽여 그것을 감추 려고 하늘을 올려보았다. 푸른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바라보던 전소 추가 입을 열었다. "혁린! 네가 날 벗으로 대해주는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내가 만일 당가의 종복이 아니었다면 나도 마음 편히 널 벗으로 대할 수 있었 을 거야. 훗훗……! 하지만 현실은 우리 사이를 갈라놓고 있고, 우 린 이제 이 상황을 받아들여야 할 때가 지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잖 아? 휴우……! 나도 마음속으론 너와 영원히 벗으로 지내고 싶다. 하지만……." 당혁린은 전소추의 손을 마주 잡고 미소를 지었다. "알았다. 알았어……!" 둘은 상대의 눈을 바라보며 무언의 대화를 나누는 듯 하였고, 그날 이후 전소추는 당혁린을 철저히 종복의 신분으로 대했다. 하지만 당혁린은 전소추를 언제나 웃으며 반겼고, 가끔 그를 불러 엉성한 솜씨로 바둑을 두곤 했다. 가주 당무천에겐 독심수라(毒心修羅) 당무룡(唐武龍)이란 배다른 동 생이 있었다. 선대가주 당천화가 젊었을 때 동정호를 여행하다가 평 소에 잘 마시지 않던 술을 접하고 대취하여 그곳을 구경나온 여인을 취했던 것이다. 술김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책임감이 남달랐던 당천화는 여인의 부모 에게 허락을 받아 그녀를 당가로 데려왔다. 그녀는 박색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천상옥녀와 같이 뛰어난 미모를 지니지도 못했다. 그저 수수할 뿐 더도 덜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어쩌다 한번씩 갖는 잠자리에서 요부(妖婦)처럼 행동 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아 나중엔 당천화가 스스로 자신을 찾게 만들 었다. 일년 후 그녀가 남아(男兒)를 낳았는데, 그가 바로 당무룡이 었다. 그가 열 살 되던 해에 생모는 전염병에 걸려 목숨을 잃었고, 그때까 지만 해도 형제의 우애도 깊고, 밝고 명랑하던 당무룡은 차츰 성격 이 괴팍해져만 갔다. 부친이 자신보다 형을 더 총애(寵愛)한다는 강 박관념이 그의 뇌리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당무룡은 부친에게 사랑 받으려고 이를 물고 당가의 가전무공을 익 혔고, 그의 용독술(用毒術)과 암기술(暗器術)은 이미 그때부터 당무 천의 경지를 뛰어넘고 있었다. 전 가주 수라추혼 당천화는 장자인 당무천보다 당무룡이 더 무공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가주직을 누구에게 물려줄 것인가를 고민하였 었다. 당무천은 동생보다 용독술과 암기술이 뒤떨어졌으나 성품이 뛰어나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고, 당무룡은 성격이 괴팍하여 그를 가까이 하 려는 사람들이 적었기에 고민을 거듭했다. 결국 사천당가를 위해서는 가주의 무공이 막강해야 했지만 장래를 위해 당무천을 차기(次期) 가주로 낙점 하였다. 당천화가 당무천에게 가주직을 승계 시키려는 이유는 그가 당무룡에 비해 비록 무공은 약했지만, 폭탄제조에는 자신보다도 폭발력이 더 우수한 광천뢰를 만들어냈기 때문이었다. 그런 당천화는 장자에게 가주직을 잇게 하겠다는 발표도 하기 전에 당무천이 만든 광천뢰와 자신이 만든 광천뢰를 비교하다가 실수로 폭발하는 바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 당시 사천당가의 대부인 천상옥녀(天上玉女)는 붕대로 전신을 칭 칭 감은 채 장로들과 상의하여 당무천을 가주로 결정했다. 그 후 당무룡은 부친의 장례가 끝난 후 사천당가를 떠나 자취를 감 췄다. 당시 많은 세인(世人)들은 그가 가주직을 형에게 전해준 것을 시기하여 떠났으니 언젠가 돌아와 당가를 접수할 것이 분명하다는 소문이 파다했었다. 그런 당무룡이 얼마 전 어린 남매를 앞세우고 당가로 돌아왔다. 그 가 돌아왔다는 기별을 받은 당무천이 의사청(議事廳)에서 그들을 반 갑게 맞이했다. "무룡아! 잘 돌아왔다. 네가 떠나 우형(愚兄)이 무척 섭섭했는데 돌 아오니 마음이 든든하구나. 이 아이들이 조카냐?" 당무룡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가주! 소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이제 당가를 위해 모든 것을 걸겠습 니다. 이 아이들은 제 자식들입니다." 당무룡은 자신의 하의 춤에 몸을 숨기고 있던 자식들을 앞으로 내밀 며 말했다. "백부(伯父)께 인사 올리거라." 당무룡의 자식들은 당무천에게 쪼르르 다가가 대례를 올렸다. "백부님! 안녕하셨어요? 아버지께 말씀 많이 들었어요." 당무천이 아이들을 좌우 무릎에 앉히며 물었다. "너희들 이름이 뭐냐?" 사내아이의 눈은 약간 위로 치켜 올라가 있었는데, 어린아이의 눈초 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기이한 안광을 발하고 있었다. "저는 당혁기(唐奕麒)구요. 제 누이는 당빙옥(唐氷玉)이라고 해요. 그런데 여기서 살아도 돼요? 그 동안 산서성(山西省)의 태원현(太原 縣)에서 살았는데 어머니께서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당무천은 몹시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조카들을 끌어안았다. "그럼! 되고 말고……! 너희들도 분명 당가의 후손이니 이곳에서 살 도록 하렴." 당무천의 명으로 그들이 머물 전각을 새로 짓는 동안 당혁기는 당혁 린과, 당빙옥은 당초혜와 같이 생활하였다. 당혁기는 부친 당무룡에게 무공을 배워 무공만큼은 나이가 어리지만 이미 당혁린의 경지를 뛰어넘고 있었고, 당빙옥은 생긴 것은 깜찍 했지만 하는 짓은 매우 잔인하였다. 독술을 연마한다는 핑계로 토끼나 오리와 같은 작은 짐승을 일부러 중독 시킨 후 죽는 모습을 관찰하곤 하였던 것이다. 당초혜는 그녀가 하는 짓을 보고 매우 진저리를 치며 하루라도 빨리 전각이 지어지길 원했다. 당혁기는 당혁린에게 형이라 호칭을 하였지만 자신보다 무공이 약한 것을 알자 약간 깔보는 듯한 태도를 취하였다. 이는 당혁린이 무공 에 정진하는데 있어서 좋은 자극이 되었다. 굴러온 돌에 채일 수 없었던 당혁린은 부친과 호법들을 졸라 무공연 마에 매달렸던 것이다. 당무천은 당혁린이 무공을 제대로 전수 받기를 원하자 식솔을 풀어 인형설삼(人形雪蔘)을 힘들게 구해 복용한 후 가주의 침실을 통해야 들어설 수 있는 원형으로 만든 석실 중앙에 당혁린을 정좌시키고 장로들이 그 주위에 빙 둘러앉게 하였다. 장로들은 흔쾌히 돌아가며 자신들의 공력을 당혁린에게 아낌없이 나 누어줘 그가 인형설삼의 약효를 완전히 흡수하게 하였다. 덕분에 당 혁린은 생사현관(生死玄關)이 타통되어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무 려 이 갑자나 되는 공력을 지니게 되었다. 가주에게만 전해지는 무공을 익히기 위해 당혁린이 연공실 들어간지 도 벌써 두 달이나 훌쩍 지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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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즐독 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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