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모님의 횡사 당무룡이 자식들을 거느리고 온 이후 당가에서 일하는 종복들은 너 나할 것없이 괴로움에 시달려야했다. 당무룡이 지나치게 혹독하게 대하는 것은 둘째 치고라도 당혁기와 당옥빙 남매의 처사는 도를 지나친 것은 물론 오만방자하기 이를 데 없었다. 불과 한달 만에 그들이 머물 만독각이라 이름 붙인 호화로운 전각이 새로 지어졌고 그곳에서 일할 종복들이 배치되었다. 정결하기로 소문난 당무룡은 먼지하나가 발견되면 태형을 가하였기 에 팔, 다리가 부러진 종복들의 비명소리가 들리곤 했다. 당무천은 내심 종복들이 안쓰럽기도 했지만 그들을 나무라지 않는 대신 은밀히 부상당한 종복들을 치료하게 하였다. 부상당한 그들이 치료를 받는 동안에 다른 종복들이 배속 받아 일하 다가 또 트집을 잡혀 부상을 당하곤 했으니 당가의 종복 중엔 몸 성 한 이가 별로 없었다. 전소추의 부모 전삼과 홍아영이 몸이 성한 이유는 마구간을 워낙 잘 치웠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장정 세 사람 분의 일을 전삼 혼자 감 당하였기에 누구도 마구간 담당이 되고 싶지 않았으나, 이젠 몸 성 히 지내는 그를 부러워하였다. 당혁기와 당빙옥은 자신들의 침소를 청소하는 종복들을 괴롭혔는데, 자신들이 물건이 없어졌다고 혼내는 일이 다반사였고, 그들을 중독 시켜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깔깔대고 웃기도 했다. 물론 총관에 의해 수시로 가주에게 보고가 되었으나 당무천은 그들 에게만큼은 너무도 관대하였다. 당초혜는 당혁기와 당빙옥에게 정을 붙일 수 없어 될 수 있는 대로 그들 남매와 마주치는 것을 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라버니 당혁린이 언제 연공을 마치고 나올지는 전 혀 몰랐기에 몹시 심심하였던 당초혜가 마구간을 치우고 있던 전소 추를 찾았다.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마구간을 정리하고 있어 당초혜가 마구간 앞 에 쭈그리고 앉아 자신을 주시하고 있음을 몰랐다. "오라버니!" 전소추가 아침 일찍 산에 올라 베어온 말에게 먹일 풀을 한아름 들 고 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니 당초혜가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을 보고 자신도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씨께선 이런 누추한 곳에 나오시면 안됩니다. 그리고 어른들이 들으시면 소인이 화를 당하게 되니 오라버니라 부르지 마시고 소추 라고 불러주십시오. 헌데… 무슨 일로 이곳까지 납시었습니까?" 당초혜가 토라진 듯 입을 뾰쪽하게 오므리며 말했다. "오라버니! 이곳은 아무도 없는데 왜 그래……? 흥! 이제 내가 미워 진 거지……?" 전소추는 싱긋 미소지으며 안고 있던 건초를 내려놓고 이마에 흐른 땀을 쓱쓱 닦으며 말했다. "아씨처럼 예쁜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아참! 소인의 어머님만 빼고요. 그러니 화를 푸시고 말씀해 보십시오." 당초혜는 사촌오라버니 당혁기와 사촌동생 당빙옥과 어울리기 싫다 는 이야기를 하자 전소추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 "아씨! 그들은 아씨의 일가 친척입니다. 지금은 어려서 그런 것이니 그들에게 정을 주시도록 하세요.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사이가 좋 아질 것이고 그때는 지금처럼 행동하진 않을 겁니다." 당초혜는 전소추의 말을 듣고 반박했다. "흥! 오라버니가 몰라서 하시는 말이야. 말이 사촌이지 쳐다보는 눈 길이 마치 독사 같이 느껴지니 눈도 마주치기 싫은 걸? 그러니 내가 그들을 피하는 것이야… 근데, 하던 일을 멈추고 나와 같이 바깥 구경을 하면 안돼……?" 전소추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후후, 아씨! 바깥구경은 가주께 허락을 받으시면 소인이 모시겠습 니다." 당초혜는 부친 당무천이 오라버니가 연공실로 들어간 이후 자신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아 소외된 느낌을 받고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부친에게 바깥 구경을 하고 싶다는 핑계를 대고 애교를 부릴 심산으 로 안채로 뛰어갔다. 전소추는 당초혜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뒷모습을 바라보다 말에게 먹일 풀을 들고 다시 일하기 시작했다. 마구간 옆엔 오백 년 된 고목이 있었는데 둘레가 이 장 정도로 굵었 으며 높이가 십 장 이상 될 정도로 높았다. 고목은 여러 곳이 썩어 들어갔지만 매년 꽃을 피우고 잎사귀도 무성하게 자라 여름이면 전 삼 내외에게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었었다. 그 고목 중간 움푹 패어진 곳에 체구가 작은 인영이 차가운 안광을 발하며 전신을 부르르 떨며 앉아 있었다. 그 인영은 바로 당빙옥이 었다. '흥! 우리 남매를 독사와 같다고 입에 올리다니 기회만 생기면 초혜 언니와 저놈을 혼내줘야겠어. 흥! 세상에서 제일 예쁜 사람이 네놈 의 어미란 말이지……?' 누가 지켜보는지 모르는 전소추는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고, 곧 전 삼 내외도 나와 마구(馬具)를 손질하고 말에게 먹이 주는 것을 거들 었다. 그들은 힘든 일을 하면서도 미소를 지우지 않았으며 대화를 나누며 가끔 박장대소를 하기도 하였다. 고목 위에 있던 당빙옥은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떨어져야 했기에 행 복하게 보이는 그들 가족에게 심한 질투심을 느꼈고, 그들을 행복을 짓밟아 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당빙옥에게 기회는 의외로 빨리 돌아왔다. 당초혜가 총관과 함께 마구간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전삼 내외와 전 소추는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숙여 예를 취했다. "총관께서 아씨와 함께 웬일이십니까?" 추혼철갑 당천수가 명령했다. "전삼! 아씨와 내가 탈 말을 준비해주게. 그리고 준비가 되면 소추 는 말을 끌고 문 앞에서 대기해라." 총관의 명을 받은 전삼은 명을 받기가 무섭게 안으로 뛰어들어가 화 려한 안장을 얹어놓고 양손에 고삐를 쥔 채 나타났다. 검은 윤기가 흐르는 체구가 당당한 흑마와 그보다는 약간 작지만 잡 티 하나 없이 눈처럼 흰 백마를 끌고 나온 전삼은 전소추에게 고삐 를 넘겨주며 나직한 소리로 말했다. "소추야! 아씨의 말이 발정기가 되었는지 요즘 갑자기 날뛰곤 하니 오늘 낙마하시지 않도록 잘 모셔라." 전소추는 가끔 당초혜의 나들이에 동행을 해왔는지라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버지! 저 말들을 누구보다 잘 아시면서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절대 그런 일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전소추가 말들을 끌고 정문으로 나가자 총관과 당초혜가 기다렸다는 듯 마상으로 사뿐히 올라탔다. "소추야! 나도 오랜만에 나서는 것이니 저잣거리에 새로 생긴 곳이 있으면 안내하거라." 총관의 명을 들은 전소추가 웃으며 답했다. "후후… 총관께서 가시자고 하신 곳은 아씨께서 가실 곳이 못됩니다 . 그러니 쌍류하( 流河)로 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당초혜가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소추! 내가 가보지 못하는 곳이라니 어떤 곳이지?" 총관이 옆에 있어 하대를 하는 당초혜는 무척 미안한 표정을 지었고 , 전소추는 입에 올리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으며 어물쩍 넘어가려 했다. "아……! 그러니까 그게…… 홍(紅)" 추혼철갑 당천수는 전소추의 입에서 튀어나올 말을 짐작한 듯 헛기 침을 하며 말했다. "허험! 소추야 되었다… 네 말대로 쌍류하로 가자꾸나." 전소추가 앞장을 서고 말을 탄 총관과 당초혜가 그 뒤를 천천히 따 랐다. "호호호……! 오랜만에 외출하니 가슴이 확 트이는 것 같네." 당초혜는 나들이를 하게된 기쁨에 재잘대며 즐거워했다. 그들이 사라지는 것을 고목 위에서 지켜보고 있던 당빙옥의 두 눈이 사악한 빛으로 반짝였다. '호호호……! 오늘로서 저 소추라는 놈의 행복이 사라지겠지?' 당빙옥은 전삼 내외가 안으로 들어가길 기다렸다가 고목의 구멍에서 빠져 나와 어디론가 사라졌다. 한참 후 다시 모습을 드러낸 당빙옥은 마구간 안으로 들어가 전소추 가 해온 풀 속에 무엇인가를 뜯어 잘게 만든 후 섞어 놓더니 조그만 약병을 열고 근처에 뿌렸다. 전삼 내외는 안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고, 그녀가 나타났다 사라진 시각이 극히 짧았기에 그녀가 다녀간 것을 보지 못하였다. 하지만 급히 떠나느라 자신의 발자국이 남겨진 사실을 깨닫지 못한 당빙옥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콧노래까지 부르며 자신의 처소로 들 어가 규방(閨房) 안에서 책을 큰 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잠시 후 외원(外院)의 마구간에선 식사를 마친 전삼 내외가 전소추 가 베어온 풀을 말들에게 나눠 먹였다. 한동안 풀을 맛있게 먹던 말들이 갑자기 전신을 부르르 떨더니 침을 흘리며 날뛰기 시작했다. 히히힝―! 히히힝―! 한두 마리가 아니고 모든 말들이 한꺼번에 날뛰기 시작하니 마구간 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영문을 모르는 전삼부부는 말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다가갔다가 그만 뒷발질에 가슴을 채여 쓰러졌다. "아악―! 으아악―!" 히히힝―! 히히힝―! 말들은 순한 동물이라 절대 살아 있는 생물을 밟지 않는다고 알려졌 지만 시뻘겋게 물든 말들은 눈에 뵈는 것이 없는지 좁은 마구간에서 펄쩍펄쩍 뛰며 쓰러져 있는 전삼 내외를 마구 짓밟았다. 급기야는 마구간의 기둥과 벽을 차 무너트려 버렸고, 그중 몇 마리는 아름드 리 서까래에 깔려 죽었다. 나머지는 뛰쳐나와 사방으로 흩어져 날뛰 기 시작했다. 놀란 외원에 있던 식솔들이 뛰쳐나와 말들을 잡으려 하였으나 너무 도 사납게 날뛰는 말들에 채여 부상만 입게 되자 멀찍이 피해 어쩔 줄 몰라하며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 말 중에는 붉은 기가 도는 한혈마(汗血馬) 한 마리 끼어 있었는 데 그놈은 가주가 특별히 아끼는 애마였다. 한혈마는 사방에 몸을 부딪치며 날뛰다가 마구간 근처 고목을 머리 로 받아 뇌수와 피를 흘리며 죽고 말았다. 내원에서 이 소동을 듣고 무사들이 나와 말들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그들 역시 아무 소용이 없었다. 바라만 보고 있는 사이 결국 모든 말들은 피를 토하며 하나 둘씩 절명하였다. 당무천이 소식을 듣고 나왔을 때는 이미 상황이 종료된 상태였고, 여기저기서 다친 식솔들의 신음소리가 나고 있었다. 무사들이 쓰러진 마구간의 잔재를 들어내자 전삼 내외의 참혹한 시 신이 드러났다. 형체(形體)를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짓이겨진 전삼 내외의 시신은 무사들의 무심한 손길에 의하여 수습되었다. 당무천은 말들의 죽은 모습을 보고 즉시 중독되어 그랬다는 것을 알 아챘기에 배를 가르게 하였다. 말의 위와 내장을 갈라 보니 풀들이 가득 들어 있었는데 소량이었지만 특이한 향이 나는 풀이 섞여 있었 다. 광혼망령초(狂魂亡靈草)라는 독초가 바로 그것이었다. 말의 사료로 먹이는 잡초와 비슷하게 생겨 일반인은 구별하지 못하 는 풀이었지만 소량만 먹어도 일각의 시각이 지나면 미쳐 날뛰다 피 를 토하고 죽는 맹독을 지닌 독초였다. 사천지방에선 거의 발견되지 않았지만 유독 성도현 주변 야산에 자 생하고 있어 군락을 이룬 곳도 있었기에 이곳에선 쉽게 구할 수 있 는 독초(毒草)라 당가에서도 많이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만일의 사고를 대비하여 당가에선 광혼망령초가 자생하는 곳 에 절진을 쳐서 외부와 차단을 하여 위험요소를 미연에 방지하고 있 었다. 마구간을 맡은 전삼 내외뿐 아니라 당가의 식솔을 비롯한 성도현 사 람들 중 광혼망령초를 모르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전에 이것을 먹은 짐승들이 미쳐 날뛰는 것을 여러 차례 목격한 사 람들은 그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한 광혼망령초가 죽은 모든 말들의 배마다 들어 있었다. 그 정도 양이면 말들이 미쳐 날뛰는 것은 당연하였기에 당무천은 혀 를 차며 내원으로 들어갔다. "쯧쯧쯧……! 당가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지나던 개가 웃 을 일이다. 모두 함구하고 밖으로 소문이 퍼지지 않도록 조심하도록 해라. 그리고 총관이 올 때까지 아무도 현장에 접근하지 못하게 막 도록 해라." 대전으로 돌아온 당무천은 태사의(太獅椅)에 앉아 이마에 손을 얹고 신중히 생각하고 있었다. '흐음……! 전삼 내외는 누구보다 광혼망령초에 대해 잘 알고 있었 는데 절대 그들이 실수로 섞어 넣지는 않았을 것이다. 외원을 지키 는 무사가 근무교대를 하며 먹이 주는 것을 보았다고 했는데 말들이 중독되어 날뛰기 시작한 것이 그 즉시라니 그것이 좀 이상하구나… 당무천은 수하를 불러 서둘러 총관을 찾아오라는 명을 내렸다. 그 시각 쌍류하의 계곡 커다란 나무 그늘 밑으로 흐르는 시원한 물 에 발을 담근 당초혜와 전소추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가끔 작고 예쁜 물고기들이 그들이 담근 다리 사이로 한가롭게 헤엄을 치고 지나기도 하자 당초혜가 잡아달라고 졸랐다. 아직 유월이라 수온이 차가웠지만 전소추는 즉시 종아리 깊이의 물 속으로 뛰어들어 물고기를 잡느라 이리저리 헤집고 다녔지만 맨손으 로 잡기엔 너무 빨랐다. 법석을 떠느라 물이 흐려지자 당초혜가 새하얀 치아를 드러낸 채 웃 었다. "소추! 그래가지고 어떻게 고기를 잡겠어? 물이 흐려지면 고기가 숨 쉬기가 나쁠 거야. 이제 그만하고 나와." 전소추는 머쓱해져서 머리를 긁적이며 물가로 나와 당초혜의 곁에 앉았다. "아씨가 원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생각했는데 작은 물고기 하 나 잡지 못하니……." 당초혜는 전소추가 의기소침(意氣銷沈)해 있자 그의 어깨를 토닥이 며 말했다. "아잉……! 흙탕물이 되어 발이 지저분하게 되었으니 닦아줘." 전소추는 흙탕물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맑은 물이 흐르자 앙증맞은 발을 닦아주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당초혜는 간지러운지 발을 빼며 소근거렸다. "오라버니! 난 이다음에 오라버니에게 시집을 갈 건데 그때도 지금 처럼 내 발을 닦아줄 수 있어요?" 전소추는 고개를 저으며 정색했다. "아씨! 나이가 들면 저 같은 하찮은 종복이 아씨의 발을 보는 것만 으로도 벌을 받아야 할텐데 그리 하기에는 신분 차가 너무 높습니다 ." "흥! 내가 싫은 거구나……?" 당초혜는 뾰로통해져서 돌아앉자 그는 그렇게 하겠다는 약조를 할 수 밖에 없었다. "하하! 알았어요. 그렇게 할 터이니 이제 그만 화를 푸세요." "호호호! 그럼 약속한 거야… 알았지?" 당초혜가 해맑은 미소를 지며 돌아앉았는데 그런 그녀의 얼굴을 바 라보는 전소추도 같이 따스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실 나이가 어려 사랑은 모르지만 둘 사이에는 깊은 정이 흘러 넘 쳐 세상 만사를 잊은 듯 즐겁게 대화를 계속하고 있었다. 쌍류하에 도착하자마자 전소추에게 아씨를 잘 모시고 있으라는 명을 내린 총관은 급히 숲 속으로 말들을 끌고 들어가 지루하게 교미하 는 것을 지켜보고 있어야 했다. 그곳으로 오는 동안 백마가 발정기가 되어 암내를 풍겨 흑마가 흥분 하여 날뛰곤 하여 하마터면 낙마를 당할 뻔하였었다. 총관은 전소추와 당초혜는 아직 어려서 말들의 교미모습을 보고 충 격을 받을까 노심초사하여 자신이 끌고 왔던 것이다. 이윽고 격렬히 교미를 마친 말들이 떨어지자 당천수는 숲 속에서 말 들을 끌고 나와 나무에 고삐를 묶어 놓은 후 물장난을 하던 당초혜 와 전소추 곁으로 다가왔다. "어흠……! 소추야, 내가 없는 동안 무엇을 하였느냐?" 전소추는 어색케 하는 총관을 바라보며 키득거리며 말했다. "킥킥킥……! 총관께선 말들 때문에 시간을 빼앗기셨네요. 아씨께서 기다리시느라 지치셨어요. 해가 떨어지기 전에 돌아가려면 서둘러 야겠어요." 총관은 시간이 없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섰다. "아씨! 이제 물기를 닦아내고 당혜를 신도록 하세요." 전소추는 소매로 물기를 대강 닦은 후 목혜를 신고 마른 수건을 당 초혜에게 가져다주었지만 오랜만에 쌍류하에 나온 그녀는 떠나기가 아쉬운 듯 선뜻 일어나지 않았다. 기다리던 당천수가 다가와 서둘러 그녀의 발에 뭍은 물기를 닦아주 고 있는데 갑자기 하인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들려왔다. "헉헉……! 총관! 지금 당장 급히 들어오시라는 가주의 명이 있으셨 습니다." 당천수가 돌아보니 하인은 얼마나 숨가쁘게 달려 왔는지 전신에 땀 이 흘러 볼썽 사나울 정도였다. "웬 호들갑이냐? 무슨 일이기에 가주께서 나를 급히 찾으신다는 게 냐?" 하인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말했다. "크, 큰일났습니다요. 가주께서 명을 전하는 즉시 총관을 황급히 모 셔오라는 엄명을 내리셨습니다. 빨리 가보시지요." 당천수는 전소추에게 당초혜와 말을 타고 오라는 말을 남긴 후 하인 의 소매를 잡고 허공으로 솟구쳐 사라졌다. 전소추는 집안에 무슨 일이 있으랴 생각했는지 말을 천천히 몰다가 불안한 느낌이 들자 당초혜에게 물었다. "아씨! 소인과 누가 더 빨리 달릴 수 있나 해보시겠어요?" "호호……! 좋아요." 따그닥―! 따그닥―! 전소추가 달리기 시작하자 당초혜도 박차를 가해 그의 뒤를 따랐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기마술에 능통한 그녀는 곧 그를 스치듯 추월하고 앞서서 내달렸다. "아씨! 같이 가요." 그들은 반 시진이 지나서야 당가 근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말에서 내린 전소추가 흑마와 백마의 고삐를 쥐고 정문으로 향했는 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평시에 활짝 열려 있던 정문이 굳게 닫혀 있었던 것이다. 쿵쿵쿵―! 문을 두드리자 무사가 문을 열어주었고, 그들이 들어서자마자 문을 급히 닫아 버렸다. 그는 당초혜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씨께선 빨리 내원으로 향하시라는 명이 내렸습니다. 소추는 말의 고삐를 내게 넘겨주고 대전으로 향하거라." 당초혜가 내원으로 달려가자 전소추도 대전으로 달려갔다. 대전엔 당가의 가주를 비롯한 원로와 총관이 모여 숙의(熟議)를 하 고 있었다. 전소추가 대전 앞에 모습을 보이자 그가 왔음을 알리고 대전에 들어가게 하였다. 그는 영문을 몰라 쭈뼛쭈뼛 고개를 숙인 채 들어갔다. "소인 소추이옵니다. 찾으셨습니까?" 가주 당무천이 전소추를 측은하게 보며 물었다. "소추야! 사실대로 말해야한다. 새벽에 네가 산에 가서 말에게 먹일 풀을 베어왔느냐?" 전소추는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예! 소인이 베어왔습니다." 대전 안에 있던 중인들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리자 전소추는 고개를 들었는데 모두 노기를 띈 모습이었다. 총관 당천수가 광혼망령초를 전소추에게 보여주며 물었다. "소추야! 이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겠지?" 전소추는 괜한걸 물어본다는 듯 답했다. "제가 어찌 그것을 모르겠습니까? 성도에 살면서 광혼망령초를 모르 면 천치(天癡) 게요? 광혼망령초는 잎 뒤에 아주 작은 가시가 있어 서 쉽게 구분할 수 있거든요." 총관이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소추야! 우리가 외출한 사이 네가 베어온 풀을 먹은 말들이 모두 죽었고, 말의 뱃속에서 광혼망령초가 나왔다." 전소추는 크게 놀라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예에……? 그, 그럴 리가 없어요. 지난봄에 말들에게 먹일 풀을 베 어오는 곳에 새순이 돋을 때 광혼망령초는 모두 뽑아 버렸어요. 지 금 그곳에 가셔서 확인해 보세요." 가주 당무천은 전소추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충직했던 전삼과 마찬가지로 어릴 때부터 그는 거짓말을 입에 담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찌되었건 말은 두 필만 남겨 놓고 모두 죽어 버려 세인들의 우스 개 거리가 되었기에 확실하게 진상을 파헤쳐야 했다. 가주의 명으로 전소추가 풀을 베었다는 곳을 헤매고 다녔지만 그 근 처에선 아무도 광혼망령초를 발견할 수 없었다. 총관 당천수는 이미 마구간을 샅샅이 뒤지고 다닌 후 그곳의 흔적과 족적(足跡)을 파악하여 가주에게 전음으로 보고하였다. '가주! 현장에서 폭혈미혼분(爆血迷魂粉)이 소량 검출되었습니다. 그리고 작은 족적이 있어 따라가 보니 당빙옥의 규방으로 이어졌습 니다. 설마 나이 어린 조카께서 장난하지는 않았겠지만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고 판명되면 또다시 형제간에 곤란을 겪으실 겁니다. 전삼 내외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들의 실수로 죽은 것으로 하는 것이 좋겠 습니다.' 총관의 전음을 들은 당무천은 안색이 하얗게 변색되었고 머리 속이 텅 비어지는 것 같았다. 총관의 말이 사실이라면 도저히 수습이 되 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당무천은 아래에서 꼼짝하지 않는 전소추를 바라보았다. 이미 날이 어두워져 대전 안엔 불을 밝혔고, 그때까지 자신의 부모 가 누군가의 음모에 의해 처참히 돌아 가셨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 한 채 대전에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전소추는 빨리 자신의 결백이 밝혀지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전소추를 바라보는 당무천은 어찌할 가를 고민하다가 입을 열 었다. "소추야! 네가 혜아와 나들이를 하는 동안 풀을 먹은 말들이 미쳐 날뛰다가 너의 부모가 말발굽에 깔리는 사고를 당했다." 전소추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고 가주를 바라보았다. "예에……? 지, 지금 뭐라 말씀하셨습니까? 사고를 당하셨다고요? 어, 어디에 계십니까……? 크게 다치시지는 않으셨겠지요?" 전소추는 너무나 놀라 계속 질문을 퍼부어 대었고, 당무천은 계속하 여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총관 당천수가 전소추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소추야! 네 부모는 이미 죽었다. 네 말대로 초지엔 광혼망령초가 없었지만 말들의 배에는 분명 들어 있으니 너의 부모가 모르고 베어 와 먹인 것이 분명하구나." 전소추는 총관의 말에 도리질을 하며 외쳤다. "아,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어요. 부모님께서 돌아가실 리가 없어 요. 흑흑흑……! 우리 부모님을 살려주세요." 전소추는 울부짖다가 혼절하였고 그 모습을 보는 가주와 총관은 가 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맛봐야했다. '아……! 내가 가문의 위명(威名) 때문에 저 어린것에게 거짓말을 하여 한을 심어주다니 잘한 짓인지 모르겠다.'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하는 일이었기에 총관은 스스로 총관직을 사직 하겠다는 뜻을 전해 올렸으나 가주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랜 고심 끝에 가주는 전소추를 당가에서 쫓아내 떠나게 하라는 명 을 내렸고, 전소추가 혼절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정문에 내다 버렸다 . 혼절에서 깨어난 전소추는 무사에게 가주의 명을 전해 들었지만 부모님의 시신이라도 보게 해 달라고 비오듯 눈물을 흘리며 떠나질 않았다. 그 소식을 들은 총관은 자신이 지니고 있던 은자 백오십 냥과 금원 보 하나를 들고 나와 전소추의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 "소추야! 이제 넌 당가의 식솔이 아니니 이곳에서 떼를 써도 들어줄 사람이 없을 게야. 그러니 멀리 떠나거라… 내 너의 부모의 시신은 잘 합장해 줄 테니 다시는 사천 땅을 밟지 말거라. 그리고 넌 이제 종복의 신세를 면했으니 네가 알아서 생활해야 한다. 많지는 않지 만 떠나면 이것을 밑천 삼아 자리를 잡고 잘 살기 바란다. 이제 그 만 가거라……." 전소추는 금원보와 은자를 도로 돌려주며 말했다. "흑흑흑……! 총관어르신!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는데 어째서 절 내쫓는 것입니까? 이런 금붙이는 모두 소용없으니 부모님을 도로 살 려주세요." 총관은 전소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제 넌 떠나거라. 조금 있으면 날이 밝아올텐데 네가 이곳에서 울 고 있으면 당가에 이상한 소문이 날 것이고 그것은 가주께 죄를 짓 는 일이다. 알겠느냐?" 총관은 전소추의 소매 속으로 은자와 금원보를 넣어주었다. "소추야! 될 수 있으면 멀리 떠나거라. 다시는 이곳에 발을 들이지 말기를 부탁한다." 전소추는 총관에게 대례를 올린 후 가주가 머무는 전각을 향해서도 대례를 올렸다. 마지막으로 그 동안 부친이 일하던 마구간이 있던 곳을 향해 대례를 올린 전소추는 힘없이 돌아섰다. '친구여 안녕……! 얼굴도 대하지 못하고 떠나는 날 용서해라. 초혜 ! 다시는 너의 예쁜 얼굴을 못 보겠구나… 흐흑! 아버님, 어머님… …! 흐흐흑……!…' 전소추는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며 어디로 떠 날 것인가를 생각해보았다. 태어나면서 당가에서만 자란 전소추는 부모에게 일가 친척이 없어 갈곳을 정하지 못하고 배회하다 걸음을 멈춘 곳은 무후사(武侯寺) 앞이었다. 전에 부친의 손을 잡고 무후사를 방문했던 적이 있던 전소추는 자신 도 모르게 무후사를 찾은 것에 대해 감사했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한 분향을 올려야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비전에 들려 서둘러 분향을 마친 전소추는 제갈량전으로 향했다. 날이 밝지 않아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고 어둠 속을 터덕터덕 걷는 전소추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제갈량전 안에는 희미하지만 사물을 분별할 정도의 밝기로 등불이 켜져 있었다. 총관이 준 은자 열 냥을 선뜻 제단에 바치고 분향을 올렸다. "흐흑! 아버님, 어머님 부디 극락왕생하세요……." 엎드려 부모님이 편히 망자의 세상으로 떠나게 해달라고 기원하던 전소추는 향이 타오르며 연기가 곧게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는 자신 의 막막한 앞길도 곧게 뻗기를 기원했다. 종복의 신세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되었건만 오라는 곳은 없고 반길 사람 하나 없는 처량한 신세를 생각하며 한숨만 푹푹 내쉬던 전소추 는 이제 이곳을 보는 것도 마지막이란 생각에 제갈량전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오래 전에 축조된 건축물이었지만 관리를 잘해 옛것이라고는 믿어지 지 않을 정도로 화려하였고, 제갈량의 망상 또한 얼굴에 난 잔주름 까지 세밀히 만들어져 있었다. 제갈량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던 그는 두 눈의 채색(彩色)이 잘못 되었는지 한쪽이 다른 쪽보다 흐릿한 것 같이 느껴졌다. 예(禮)에는 어긋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먼지 때문인 줄 알고 닦 아주려고 제단을 밟고 올라선 전소추는 팔이 닫지를 않아 털어 낼 수 없자 망상의 팔 부분을 밟고 흐리한 눈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이내 먼지가 제거되어 본래의 색을 되찾았고 전소추는 만족한 듯 망 상의 두 눈을 비교해보았다. 이번엔 밝아 보였던 눈이 더 흐릿해 보여 전소추는 이왕 올라선 김 에 먼지를 털어 내려고 손을 뻗어 눈을 문지르는 순간 망상의 팔이 아래로 급격히 향하자 그만 균형을 잃고 말았다. 철커덕―! 끄르르릉―! 순간 제단이 좌우로 벌어지며 깊이를 추측할 수 없을 정도의 어두운 공간을 만들어 내었고, 전소추는 무엇에 이끌리듯 어두운 공간으로 떨어졌다. "으아아아악……!" 끄르르릉―! 전소추의 신형이 어둠의 공간으로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제단은 순 식간에 다시 합쳐졌고, 누구도 그 속에 공간이 있다는 것을 알리지 않겠다는 듯 분진이 일어나 제단을 덮고 있었다. "으아아악……!" 계속 비명을 질러대며 한없이 떨어지던 전소추는 떨어지는 속도를 줄이기 위해 사방을 향해 손을 휘저었지만 손에 잡히는 것이라곤 물 기를 머금은 미끄러운 이끼가 전부였다. 그래도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사지를 움직였고, 두 세 번 정도 사지 에 엄청난 충격이 가해졌다. "으아아아아악……!" 그때마다 비명을 질러대던 전소추는 의식이 점점 혼미해졌고 사방이 좁아지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 곧 부모님 곁으로 간다는 생각이 들 자 마음이 편해지자 비명을 멈추고 양손을 머리위로 향한 채 떨어졌 다. 점점 좁아지던 사방은 이내 사람 한 명이 겨우 빠져나갈 정도로 좁 아지자 가속도가 붙던 속도를 조금씩 줄여주었건만 빠른 속도로 떨 어지는 것을 완전히 멈출 수 없었다. 다행히 원형의 암굴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졌는지 매끄러웠고, 그 위 에 이끼가 두껍게 자라 있어 충격을 완화 시켜주고 있었다. 한참을 수직으로 떨어져 내리던 전소추는 암굴이 완만한 경사를 이 루며 휘어져 있다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붙잡고 있던 의식의 끈을 놓고 말았다. 쿵―! 전신이 으깨지는 듯한 지독한 고통에 의식을 잃고 있었던 전소추는 두 눈을 떴다. "으윽……! 여, 여기가 어디지? 으으윽……!" 빛이 눈을 자극하자 어둠 속을 빠져 나오느라 열려 있었던 동공이 수축하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잠시 후 전소추는 불빛이 말로만 듣던 야명주(夜明珠)라는 것을 알았고, 자신이 바닥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여기가 유, 유부(幽府)인가……?" 몸을 일으켜 세우려고 하였으나 전신 곳곳에 성한 곳이 없었고, 엄 청난 통증 때문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어디가 망가져도 단단히 망 가진 모양이었다. "으윽……! 내가 죽었다면 통증이 없을 텐데 어째서 아프지? 내가 아직 죽지 않았단 말인가……?" 한동안 누워 있던 전소추는 천장에 야명주가 일렬로 박혀 있는 것을 보고 자신이 어떤 곳의 통로의 끝에 있다고 판단하고 간신히 몸을 뒤집어 기어가기 시작했다. "살, 살아야한다……! 내가 죽지 않았다면 부모님이 억울하게 돌아 가신 이유를 반드시 밝혀야한다!" 고통을 참고 이를 물고 기어가는 전소추는 초인(超人)의 의지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의지만으로 버티기엔 고통은 너무도 엄청나 다시 의식의 끈을 놓아야만 했다. 똑―! 똑―! 머리위로 떨어지는 물방울이 그의 의식을 되찾게 해주었지만 이미 며칠의 시간이 지난 뒤였다. 의식이 돌아오자 배에선 꼬르륵 소리가 들려왔고, 이젠 고통보다 배고픔이 더 그를 괴롭혔다. 이때 간신히 고통을 참고 사방을 더듬던 전소추의 손에 무엇인가 잡 혔다. 시원한 물기를 머금은 이끼였다. 전소추는 맛도 볼 겨를 없이 우적우적 이끼를 씹어 넘겼고, 자신의 손에 잡히는 곳의 이끼를 모두 뜯어 삼킨 후에야 어느 정도 갈증과 허기를 면했다. "으음……! 이제야 살 것 같구나." 워낙 양이 적었기에 아직 여전히 배고픔을 달랠 수 없었던 전소추는 어떻게든 움직여 보려고 애를 썼다. 전소추가 삼 장 정도 전진하였을 때 갑자기 복통이 일어났다. "으아악……! 아이고 배야. 내가 먹은 이끼가 독 이끼였나……?" 뱃속에서 마치 수백 개의 빙칭(氷槍)을 삼킨 듯 인세에서 겪지 못할 엄청난 고통이 일어나 전소추는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아아아악……!……." 고통을 참지 못한 전소추가 양손을 뻗어 사방을 휘젓고 있었는데 갑 자기 뭔가 뜨겁고 물컹거리는 것이 잡혔다. 자신도 모르게 입에 가져가 물어뜯자 뜨겁고 비릿한 액체가 목구멍 으로 넘어갔다. 그러자 전소추는 이제 살았다는 듯 빨아대기 시작했 다. 손에 잡혀 있는 것은 무엇인지 모르지만 빠져 나가려고 몹시도 꿈틀거렸지만 전소추는 죽지 않겠다는 의지 하나로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꿀꺽―! 꿀꺽―! 마지막 한 방울까지 모두 삼킨 그는 물컹거리는 것이 축 늘어지자 그제야 손을 놓았고, 그것이 두 자는 됨직한 선홍색 뱀의 유난히 하 얀 비늘로 덮여 있는 목 부분이라는 것을 알고 놀라 던져 버렸다. "이, 이런……!" 뱀의 머리에는 왕관과 같은 돌기가 있었고, 몸통을 따라 금색의 비 늘이 양쪽으로 길게 나 있었으며, 목에는 백색의 비늘이 있었는데 전소추가 물어뜯은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일단 뱃속이 따뜻해지며 빙창(氷槍)으로 찌르는 듯한 고통이 사라지 자 살 것만 같았다. 그런데 따뜻하기만 했던 뱃속에서 이번에 엄청 난 열기가 일어나며 뜨거워지는 것이 아닌가? "으아악……! 뜨, 뜨거워……!" 전소추는 또다시 복통을 견뎌내지 못하고 바닥을 굴러야했다. 손에 이끼가 잡히자 다시 뜯어먹고 뱃속이 청량해짐을 느끼자 다시 얼음 창으로 쑤시는 듯한 고통이 찾아왔다. 전소추는 본능적으로 뱀이 떨어져 있는 곳으로 다가가 씹어 삼키려 했지만 워낙 비늘이 단단하여 먹을 수 없었다. 백색의 비늘이 있던 곳은 전소추가 입에 물어 상처가 나 있었기에 머리를 잡고 가죽을 벗긴 후 허겁지겁 씹어 넘기고 있었는데, 뱀의 뱃속에 있었는지 단단한 구슬이 같은 것이 치아에 씹혔지만 개의치 않고 삼켜 버렸다. 다시 불에 타는 듯한 고통이 찾아왔건만 한줌의 기운도 남지 않은 그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혼절했다. 전소추의 전신은 시커멓게 변색(變色)되었다. 우드득―! 우드득―! 한 시진 정도가 흐르자 전소추의 전신의 피부가 벗겨지더니 저절로 혈관이 꿈틀거리고 뼈마디가 제멋대로 뒤틀리기 시작했고 전신이 늘 어났다 줄어들기를 반복했다. 그 와중에 걸치고 있던 의복은 모두 찢겨져 나가 완전한 나신(裸身)이 되어 버렸다. 잠시 뒤 전소추의 전신에서 서서히 서기(瑞氣)가 흘러나오며 바닥에 서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태어날 때 있었던 가슴 부위의 도화모양의 붉은 점이 완연히 드러나 서기와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퍼퍼퍽―! 생사현관(生死玄關)과 임독양맥(任督兩脈)이 타통(打通)되었고, 허 물을 아홉 차례나 벗겨내고 나서야 바닥에 내려앉았다. 그의 몸은 그가 이곳에 들어올 때와는 판이한 육 척의 키에 만지면 미끄러질 것과 같은 팽팽한 피부로 변했다. 또한 태양 빛에 그을려 검게 보이던 피부색은 약간 창백하다 싶을 정도로 변했고, 먹물로 그린 듯한 짙은 눈썹에 오뚝한 코, 붉은 입 술은 그의 오관을 더욱 준수하게 변했다. 그가 혼절하고 있는 사이에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탈태환골( 脫胎換骨)이 이뤄졌고, 불괴지체(不壞之體)가 되었건만 막상 그는 자신에게 이러한 기가 막힌 기연(奇緣)이 일어난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또 다시 한참 뒤에야 의식이 돌아왔는지 눈을 뜬 전소추는 사물이 대낮처럼 보이자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떠보았는데 혼절하기 전에는 밝게 보이지 않았던 사물이 훤히 보이자 신기해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그것도 잠시, 전신에 일던 고통이 사라졌음을 알아채곤 기쁨에 겨워 손을 짚고 일어나려 했다. 쿵―! 전소추의 신형은 붕 떠오르더니 일 장 높이의 천장에 머리를 박고 돌가루와 함께 떨어져 내렸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영문을 모르던 전소추는 그제야 자신 의 머리를 만져보았는데 상처하나 없이 말짱하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응? 내, 내가 어떻게 천장까지 날아올랐지……?" 전소추는 자신의 사지를 휘둘러보니 전신에 충만 된 기운이 철철 흘 러 넘치는 것을 알고 환호성을 쳤다. "이얏호! 이젠 상처가 나았으니 여길 빠져나가야겠다." 전소추는 일단 사물이 환하게 보이자 주변을 살폈다. 자신이 먹은 이끼가 보였는데 처음 보는 청태(靑苔)였다. 그리고 자 신이 벗어놓은 허물을 만져보며 무엇인가 궁금해했지만 그게 무엇인 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뱀은 가죽만 남겨둔 채 모두 먹었기에 뱀의 이름이 무엇인지도 알 수가 없었고, 다만 그것들을 복용하였기 때문에 자신이 부상을 회복 하고 기연을 만났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자신이 무려 이 갑자의 내공을 얻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더욱이 탈태환골하며 몇 배나 커져 버린 자신의 양물(陽物 )은 나이가 어려 음양화합의 조화를 모르는 전소추에게는 거추장스 럽기만 하였다. "그런데 왜 몸이 이렇게 커 버렸지……?" 처음 자신이 떨어져 내린 곳으로 가보니 천장에 시커먼 구멍이 보였 는데 체구가 커진 지금은 그곳으론 빠져나갈 수 없다고 판단되자 야 명주가 곧게 박혀 있는 통로를 따라 걸어 들어갔다. 통로엔 이끼가 잔뜩 끼어 있었는데 자신이 먹은 푸른색의 청태는 거 의 없었고, 시커멓게 말라죽은 이끼가 대부분이었다. 전소추는 이끼를 떼어내고 안의 재질을 살폈지만 그저 표면을 곱게 다듬어 놓은 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독히도 오랫동안 떨어져 최소한 자신이 지표면에서 천 장 이상 아 래로 추락했을 것이란 생각에 불안한 마음이 가득했다. 하지만 호흡을 하기에 전혀 어려움이 없고,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인 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그에게 빠져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던 져주기에 충분했다. "으음! 누군가 이곳을 만들었다면 분명 어딘가에 나갈 길이 있다는 것일 거야……." 통로는 그리 길지 않았다. 오십 장 정도의 곧게 뻗은 통로의 끝은 반대쪽과 마찬가지로 막혀 있었고, 막힌 벽에는 이끼가 울퉁불퉁하게 자라 있다는 것이 틀릴 뿐이었다. 전소추가 이끼를 제거하기 시작하자 문자가 음각(陰刻)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 제갈가주지묘(諸葛家主之廟) > 전소추는 글을 읽고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다 엉덩방아를 찌었다. "아이쿠……! 이런… 내가 빠진 곳이 무덤이었단 말인가?" 전소추는 공포감이 밀려드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는 아직 십이 세의 어린아이였고, 가끔 어른들이 하는 귀신이야기 를 들었는지라 무서워 견딜 수 없었다. "엉엉엉……!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여기에 빠졌지? 난 그저 먼 지를 털어 주려고 한 것뿐이었는데……." 한참동안을 공포에 떨며 울던 전소추는 지쳐 잠이 들었다. 꾸르르르릉―! 진동음에 잠을 깬 전소추는 막혀 있던 벽이 위로 올라가는 것을 보 고 뒤로 물러났는데, 통로보다 밝은 빛을 내뿜고 있는 안에서 사람 의 형체가 나오는 것을 보고 소리쳤다. "아아악……! 귀, 귀신이닷." 전소추는 양손으로 눈을 가리고 머리를 숙여 계속 절을 올리며 중얼 거렸다. "영면(永眠)을 깨워 죄송합니다. 제발 절 살려주십시오." 안에서 나온 사람의 형체가 전소추가 엎드려 있는 곳으로 유령처럼 다가왔다. "엉……? 너는 제갈세가의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이곳에 어 떻게 들어왔느냐?" 창노한 음성이 들리자 전소추는 자신이 겪은 일을 소상히 아뢰고 자 신을 살려달라고 부탁했다. 괴인은 묵묵히 전소추의 말을 듣고 있었는데, 청태(靑苔)와 홍사(紅 蛇)를 복용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흠칫 놀라는 표정이었다. 이윽고 전소추가 말을 마치자 괴인은 전소추를 뚫어지게 바라보다 입을 열 었다. "소년은 고개를 들라." 전소추는 무서움을 떨치고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선풍도골의 인자하 게 생긴 노인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귀, 귀신이 어떻게 신선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 노인이 혀를 차며 전소추에게 말했다. "쯧쯧쯧……! 이놈이 이곳으로 떨어지며 뇌의 기능이 상실되었나? 산 사람하고 죽은 귀신하고 혼동을 하다니… 따라오너라!" 노인이 뒤돌아서 안으로 향하자 전소추는 엉거주춤 일어나 도살장에 소처럼 뒤를 따라 들어갔다. 노인과 전소추가 안으로 들어서자 육중한 문은 저절로 닫혔다. 꾸르르르릉―! 노인을 따라가는 전소추는 그곳도 통로이며 천장과 벽뿐 아니라 바 닥에도 무수한 구멍이 나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궁금증이 일었지만 입을 다물고 따라가던 전소추는 노인이 통로의 끝에서 빨리 오라는 손짓을 하자 급히 뛰어갔다. 노인이 우측 벽에 있는 칠성모양의 움푹 꺼진 곳을 장(掌)으로 이상 한 순번(順番)으로 누르자 미세한 진동이 일어났고, 좌측면에 있던 반장 두께의 벽이 위로 올라갔다. 스르르릉―! 노인이 좌장(左掌)으로 누른 곳도 있었고, 우장(右掌)으로 누른 곳 도 있었으며 양장(兩掌)모두 한번에 누른 곳, 두 번 세 번 겹치게 누른 곳도 있었지만 전소추는 모두 뇌리에 깊이 새겨두었다. "기억할 수 있겠느냐?" 노인은 일부러 보이기 위해 천천히 한 것 같았고, 전소추가 고개를 끄덕이자 안으로 들어섰다. 이번엔 제법 규모가 큰 석실이었는데, 바닥엔 백석(白石)과 흑석(黑 石)이 바둑판 모양으로 놓여져 있었다. 노인은 전소추가 무공을 전혀 모른다고 이야기하였기에 전소추를 허 리에 꿰고 백석과 흑석을 이곳 저곳을 밟으며 석실을 통과했다. 전 소추의 체중은 무거웠지만 노인은 전소추를 마치 마른 장작과 같이 가볍게 느끼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전면 중앙에 있는 세 번째 흑석을 밟았고, 그 다음엔 흑석 의 좌측에 있는 백석을 다음엔 우측 네 번째 있는 백석, 그 다음엔 전면 다섯 번째 있는 흑석을 밟았고, 한동안 그런 수순을 밟더니 점 점 빨리 발걸음을 빨리 떼며 통과하며, 오 장 거리를 사뿐히 박차 날아가기도 했다. 전소추는 자신이 직접 돌을 밟고 건너는 것이 아니라서 노인이 밟은 곳을 기억하기 위해 애를 썼다. 노인이 석실 반대편에 도착하여 전 소추를 내려놓으며 다시 물었다. "이번에도 기억할 수 있겠느냐?" 전소추는 자신이 모두 기억을 했다고 생각하여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뒤돌아 바둑판 모양의 바닥을 쳐다보니 도대체 어느 곳을 밟았는지 기억을 할 수 없었다. 엎드려서 본 것은 노인의 발과 돌의 색이었기 때문이다. 전소추가 한숨을 내 쉬었다. "휴우……!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노인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후후후……! 네가 기억을 하지 못한다면 진법을 완벽하게 깨우치지 전엔 이곳을 빠져나갈 생각을 버려야 할 것이다." 노인을 따라 원형의 석실과 팔각형 석실을 조심스럽게 통과한 후, 철로 만든 문을 지나 넓은 대전으로 들어선 전소추는 수많은 사람들 이 지켜보고 있자 고개를 숙이며 일일이 예를 취했다. "소인 전소추가 여러분께 인사 올립니다." 노인이 전소추의 귀를 잡아당겨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이놈아! 인사를 올리려면 제대로 해야지… 저기 분향하는 곳이 있 으니 향을 피우고 예를 올리거라." 전소추는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모두 산 사람이려니 했다가 노 인의 말을 듣고 자세히 바라보니 위패가 하나씩 서 있는 것을 알고 실수를 했음을 알았다. 전소추는 제단에 마련된 향을 피워 청동향로에 꽂고 물러나 대례(大 禮)를 세 번 올렸다. "영면에 드신 제갈가의 가주님들께 미천한 소인 전소추가 인사 올립 니다." 전소추가 예를 마치고 노인의 발 아래에 엎드려 간청했다. "할아버지! 소인은 미천한 출신이지만 이곳에서 나가 부모님이 돌아 가신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제발 이곳을 벗어날 방도를 가 르쳐 주십시오." 노인이 전소추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쯧쯧쯧……! 이곳은 곧 죽을 사람만 드는 곳이니라… 나가는 방법 은 조금 전 네가 들어온 곳으로 나가야 하느니라.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선 지혜와 무공을 겸비해야 하는데, 넌 아직 지혜도 모자라고 무공도 익히지 못했으니 나갈 수 없구나……." 전소추는 눈물을 흘리며 더욱 간절히 애원했고, 노인은 측은히 바라 보다 입을 열었다. 노인은 울며 애원하는 전소추의 모습에서 그의 중후한 인간성을 느 낄 수 있었는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내게 구배지례(九拜之禮)를 올리겠느냐?" "예에……?" 전소추는 노인이 대체 왜 구배지례를 요구하는 지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러면 이곳을 벗어날 방도를 알려 줄 것 같았다. 전소추는 무림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기에 그것이 사부가 제자를 맞이할 때 하는 예식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전소추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벌떡 일어나 경건한 모습으로 노 인에게 구 배를 올렸다. 노인은 흐뭇한 표정으로 전소추를 바라보며 말했다. "노부는 제갈세가의 오십이 대 가주 제갈황(諸葛皇)이다. 죽기 전에 뭔가 아쉬움이 남았었는데, 수명(壽命)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널 힘껏 가르치겠다. 허허! 이건 아마도 조상들의 뜻인가 보구나……." 전소추는 자신을 가르치겠다는 제갈황의 말을 듣고 즉시 무릎을 꿇 었다. 미련하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노인은 전소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상한 목소리를 토했다. "오냐……! 내게 남겨진 시간이 별로 없으니 지금부터 당장 널 가르 쳐야겠구나." 노인이 전소추에게 이곳을 만든 유래와 이유를 말하자 경청하는 전 소추의 표정은 진지하기만 하였다. |
첫댓글 잘 보고 겁나더.
감사합니다.
잼 납니다
재미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