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최초의 살인 먼동이 떠오르고 있었다. 동향으로 걸음을 옮기던 전소추는 이름 모를 산 정상에서 일출을 구 경하며 탄성을 올렸다. "와아……! 일출이 이리 아름답다니……!" 먼 산 위로 떠오르는 태양은 대지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었고, 어렸 을 때 매일 보던 태양과는 전혀 다른 감흥을 주고 있었다. 그는 정상의 널찍한 바위에 결가부좌를 취하고 태양의 정기를 전신 으로 받아내며 자신이 살아 있음에 행복해하였다. 반개(半開)한 채 붉게 타오르는 태양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자신이 누구이며 부모님의 원한 따위는 망각하고 득도한 고승처럼 고요히 있던 그는 산새의 청아한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산을 내려가며 앞으로의 계획을 세웠다. 일점혈육(一點血肉)도 없는 그가 지금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고민을 거듭하다가 일단 억울한 사람들을 돕다보면 무림에서 유명해질 것 이고, 그때 당가를 찾는다면 적어도 문전박대는 당하지 않을 것이라 고 생각하게 되었다. 장강(長江)의 지류가 흐르는 수수현(遂守縣)에 모습을 드러낸 전소 추는 관도 위를 유유자적 걷고 있다가 허기를 느끼고 천향객잔(千香 客棧)이란 현판이 걸려 있는 허름한 객잔으로 들어섰다. 조반을 해결하기 위해 십여 명이 여기저기 좌석에 흩어 앉아 음식을 먹고 있었고, 아직 이른 아침인데도 벌써부터 술을 마시는 사람도 눈에 띄었다. "헤헤! 어서옵쇼……!" 배가 불쑥 나온 장방이 기름때가 반질반질 흐르는 의복에 젖은 손을 닦으며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전소추는 장방이 정해주는 좌석에 앉으며 말했다. "만두와 차를 주시오." 장방이 주방으로 향하자 전소추는 옆에서 조반을 먹는 일행들이 하 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 하하하……! 마연(馬沿)! 어디 말 같지 않은 소리 집어치우게… 하남성(河南省)의 그 유명한 단목세가가 쑥밭이 되었다니? 그걸 나 보고 믿으란 말인가? 얼굴이 말처럼 길쭉한 사내가 침을 튀기며 성을 냈다. - 이봐! 평삼(平三). 자넨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참말일세. 이건 들은 이야기인데 혼세삼천마(混世三天魔)라던가… …? 하여간 엄청난 마공을 구사하는 세 명의 마인이 그곳을 쓸어 버 렸다고 했네. 우리 같이 그저 흘러가는 세월만 축내는 양민들이야 무림의 일에 끼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네. 그곳에 살던 일반 양민들 도 몰살했다고 하더군. 평삼이란 사내가 정색을 하며 물었다. - 이, 이보게 마연! 그럼 단목세가주인 철혈무존(鐵血武尊) 단목풍( 段木風) 대협이 죽었다는 겐가? 마연이란 사내는 고개를 저으며 답하였다. - 자네 철혈무존이란 별호가 무림에서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는가… …? 단목대협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면 그런 일이 발생하지도 않았 을 것이야. 지난달 중순 하북성(河北省) 천진현(天津縣)에 있는 독 고세가에서 가주의 회갑연을 연다는 연락을 받고 그곳을 방문한 사 이에 그런 일이 발생한 것이라고 들었네. 마연과 평삼이라는 사내들은 자신들이 흥분하여 목소리를 크게 내어 안에 있던 식객들이 자신들을 주시하고 있음을 안 탓인지 갑자기 목소리를 작게 줄였다. 전소추는 그들의 대화 내용을 듣고 흥미를 느껴 하북성으로 가봐야 겠다고 결심하였다. 이때 주방에 들어갔던 장방이 김이 나는 만두접시와 다구(茶具)를 가져와 전소추가 앉아 있는 식탁에 내려다 놓았다. '우와! 맛있겠다…' 전소추는 오랜만에 먹어보는 만두를 입에 넣은 후 맛을 음미하며 먹 었다. 쓰디쓴 지령석균만 먹다 따끈한 만두를 먹자 채소와 어우러진 돈육( 豚肉)의 씹히는 감촉도 일품이었지만 맛 또한 달착지근한 것이 일품 이었다. 하도 오랜만에 먹어보는 음식이라 조금씩 입에 넣던 그는 어느덧 접 시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아쉬워하였다. 차를 따라 마시다 문득 자신의 건너편에서 홀로 검(劍)을 안고 술을 마시는 흑의(黑衣)를 입은 사내와 눈이 마주치자 미소를 지으며 눈 인사를 하였다. 사내도 얼떨결에 인사를 하고 어색해 하더니 잠시 후 술병과 술잔을 들고 전소추에게 다가왔다. "합석을 해도 괜찮겠소?" 사내는 이십대 중반의 헌헌장부(軒軒丈夫)였고, 전소추가 만두를 마 치 귀한 음식인양 음미하며 먹는 모습이 이상하여 눈여겨보고 있던 무인이었다. 전소추가 머리를 끄덕이자 그는 털썩 의자에 앉으며 정중히 포권을 하며 자신을 소개하였다. "하하하……! 난 청해성(靑海省) 곤륜(崑崙)에서 온 곤륜철협(崑崙 鐵俠) 사우인(史羽吝)이라 하오." 전소추는 상대가 구파일방에 소속된 문파의 제자라는 것을 알자 포 권을 취하였다. "소생은 사천성에서 왔고, 아직 변변한 별호조차 없는 무명소졸(無 名小卒)이지요. 이름은 전소추라고 하오." 전소추는 상대방의 무예가 자신에게는 못 미치지만 대단한 경지에 올랐음을 짐작하고 역시 구파일방의 제자답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우인은 전소추에게서 뭔가 신비함이 느껴져 술잔에 술을 따르며 입을 열었다. "하하! 형장.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던데 이곳에 합석하였으니 우 린 인연이 깊은가 보오. 한잔 드시고 내게도 주시오." 전소추는 술잔을 단번에 비웠는데 독하기 독한 화주(火酒)를 단숨에 들이키고는 대경질색(大驚窒塞)하였다. "컥컥……!" 사우인은 전소추가 술을 비우고 목을 잡은 채 괴로워하자 그의 등을 두드려주며 대소를 터트렸다. "하하하……! 이런! 처음 술을 마셨나보군." 전소추는 뱃속이 타는 듯한 고통이 사라지자 계면쩍게 웃으며 술을 따라 상대에게 권했다. "하하하……! 형장도 한잔 받으시오. 헌데 이런 독한 술을 왜 마시 는 것이오? 소생은 어렸을 때부터 인세와 오랫동안 격리되어 있다가 출도하여 술은 처음 마시는 것이오." 사우인은 술잔을 잡자마자 비우고 전소추에게 다시 권했다. "하하! 그렇소? 그럼 한잔 더 드시오. 헌데, 실례지만 그럼 지금 나 이가 몇이오?" 전소추는 겁이라도 나는지 술잔을 천천히 나눠서 마신 후 입을 열었 다. "소생은 연왕이 보위에 오른 지 십 년이 지났을 때 태어났으니 지금 ……?" 전소추는 자신의 나이를 잘 몰라 말끝을 어물거리자 사우인이 고개 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천자가 승하하신 지도 벌써 칠 년이 지났으니 형장의 나이는 스물 둘이오. 그런데 사승(師承)은 어떻게 되오?" 전소추는 사부가 누구인지 묻는 사우인을 바라보며 난처한 기색을 보이며 답했다. "소생의 사부님은 이름 없는 떠돌이 승려였고 그분이 말년(末年)에 소생을 가르쳐 주셨지만 법명은 저도 잘 모르외다." 사우인이 전소추의 무공을 시험하기 위해 암암리에 진기를 뻗어내자 마치 마른 솜에 젖어 들어가는 물처럼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끼고 출수를 멈췄다. "아니……? 대체 무슨 무공을 펼쳤소?" 전소추는 태연스레 자신의 사부가 가르쳐준 이름도 없는 내공심법을 운기(運氣)하였다고 말하였다. 사우인은 전소추가 범상치 않아 보여 합석을 했는데, 자신보다 뛰어 난 무공을 지니고 있음을 짐작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형을 가르친 사부는 소림사 출신인 것 같군… 헌데 어디로 가는 길이오?" 무심결에 하북성으로 가겠다고 말하자 그도 그곳으로 갈 것이니 동 행을 하자는 제의를 해왔다. 전소추는 자신이 구파일방의 제자와 동 행을 하게 된다면 무림 정세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판단하고 쾌히 허락하였다. 함께 동행하며 전소추는 사우인이 곤륜파의 대제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루하기로 소문난 구파일방의 제자이지만 의외로 호탕한 성격이 마음에 들었고, 사우인은 전소추의 박식함에 감탄하였다. 두 사람은 상대에 대한 호감을 감추지 못하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 이 결의형제(結義兄弟)를 맺게 되었다. 사우인이 세 살 연장자이니 형이 되었고, 전소추는 자연스레 아우를 자처하였다. 둘은 하북성으로 향하며 경신술을 펼쳤는데, 사우인은 그가 자신보 다 힘도 들이지 않는 것을 보고 놀라워하였다. "의제의 사부가 누구인지 점점 궁금증이 더해가네……." 전소추가 가장 자신 있는 무공이 경신술이라며 몇 수 가르쳐 주자, 그는 절기를 아낌없이 전수해주는 그에게 사문의 무공을 전수해 주 지 못함을 미안해하였다. 하지만 곤륜파의 무공은 그에겐 너무도 쉬 운 무공에 속해 있다는 것을 그는 알지 못했다. 사우인은 가는 동안 자신이 알고 있는 무림정세에 대해 상세히 설명 해주었기에 전소추가 앞으로 행동하는데 있어서 커다란 도움이 되었 다. 그들이 장강을 따라 서능협(西陵峽)에 도착하여 그곳의 장관을 바라 보며 감탄을 하고 있을 때 멀리서 비단 폭 찢어지는 듯한 여인의 비 명소리가 들려왔다. "아악……! 도와주세요." 얼굴을 마주 본 둘은 동시에 비명소리가 난 곳으로 신형을 날려 그 곳으로 다가갔다. 그곳엔 백의(白衣)를 걸친 무인들 십여 명이 부상을 당해 피를 흘리 고 있었고, 여인 셋이 그들 사이에서 몸을 움츠리고 비명을 질러대 고 있었다. 회의(灰衣)를 걸친 삼십여 복면을 한 무리가 검과 도를 뽑아든 채 그들을 원형으로 에워싸고 있는 상태였다. 부상을 입은 무인들은 여인을 보호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 렀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고, 그들을 가로막은 무리에겐 그들 의 무공은 한낱 춤사위에 불과하였다. 이미 지칠 대로 지쳐 검은 제 속도를 내지 못하였고 병기로서의 위 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백의가 피로 물들어 자신의 몸도 지키지 못 할 정도로 지쳐 있던 사내가 검을 휘두르며 말했다. "막아랏! 생명을 걸고 소주를 보호해야한다." 복면을 한 괴인들은 고양이가 쥐를 데리고 놀 듯 병기를 이용해 그 들을 점점 더 궁지에 몰아 넣고 있었다. 아마도 가운데 있는 여인을 납치하려고 하려는 것 같았다. "멈추어라!" 내공을 실어 외침과 동시에 절대절명의 위기를 맞이한 그들 사이로 떨어져 내린 사우인이 흑의를 펄럭이며 그들을 향해 날아가며 기쾌 한 일 검을 그었다. "천광검법(天光劍法) 제 일식 천광출현!(天光出現)" 쒜이이익―! 퍼퍼퍽―! "으아아악……! 으악……! 악……!" 사우인의 일 검에 다섯 괴인의 병기를 들고 있던 팔이 잘리자 분수 처럼 뿜어져 나오는 피를 지혈하기 위해 뒤로 물러났다. "감히……! 웬 놈이냐? 흐흐흐……! 검법을 좀 배웠다고 우리의 일 을 방해하다니 세상을 떠나고 싶은 모양이군. 쳐라!" 백의를 입은 무인들과 여인들을 에워싸고 있던 괴인들이 사우인을 향해 짓쳐 들었다. 이때 예광(銳光)이 뻗치는 검으로 천중을 가리키고 있던 사우인의 우수가 좌에서 우로 빛살처럼 움직였다. "천광일편!(天光一片)" 사우인의 검에서 일 장 정도의 검강(劍 )이 순식간에 뻗으며 다가 오는 적들의 수급을 베어갔다. 고오오오오오오―! "으악! 케엑! 끄아악……!" 괴인 십여 명의 수급이 동시에 허공으로 치솟아 오르자 다가오던 적 들이 뒤로 물러섰다. "곤륜파의 곤륜철협이다. 죽고싶지 않으면 떠나라." 검을 하단으로 늘어트린 사우인의 냉랭한 목소리가 퍼지자 괴인들이 흠칫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곤륜철협이 무림의 후기지수 사이에서 도 무공이 높기로 소문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괴인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는 전혀 반응이 없었다. "크흐흐……! 던져라!" 괴인들은 일사불란하게 품속에서 암기를 꺼내 사우인을 향해 힘껏 던진 후 뒤로 후퇴하였다. 자신들의 암기에 곤륜철협이라는 애송이가 목숨을 잃을 것이 분명하 다는 듯 그들은 복면사이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우인은 하늘을 덮을 듯이 날아오는 암기를 바라보며 미동도 하지 않다가 눈부실 정도의 빠른 쾌검식(快劍式)을 시전하여 자신의 전신 을 보호하였다. 따당! 따다다당! 따다당―! 사우인의 검에 퉁겨져 나온 암기들이 비산하여 각기 다른 방향으로 날아갔다. 대부분은 괴인들을 향해 날아갔지만 일부는 전소추가 서 있는 방향과 부상을 입은 무인들에게 향하였다. "천수회인공!(千手廻引功)" 다급해진 전소추가 부상을 입은 무인들의 앞을 막으며 다급하게 외 쳤다. 그의 양수가 번개처럼 휘저어지며 마치 천 개로 늘어나는 착각을 일 으키게 하며 허공을 휘젓자 날아오던 엄청난 수효의 암기들은 모두 전소추의 손에 빨려들고 있었다. 괴인들 중 일부는 암기에 맞고 그 자리에서 절명하였고, 나머지는 곤륜철협 사우인도 감당하기 벅찬 판에 고수가 한 명 더 나서자 꽁 지 빠지게 달아나기 시작했다. 전소추는 자신이 들고 있는 암기의 끝이 시퍼런 빛을 발하자 극독이 발라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이런 인간 같지 않은 간악한 무리들……!' 사람의 목숨을 파리목숨만큼도 여기지 않는다는 것에 분개한전소추 는 대노하여 허공으로 솟구치며 도주하는 적들을 향해 양손을 떨쳤 다. "비폭산화(飛爆散花)!" 자신도 모르게 암기술을 펼치자 마자 전소추는 아차 하였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쐐에에에엑! 휘이이익―! 그의 손을 떠난 여러 종류의 암기들은 공기를 찢는 파공음과 함께 부챗살처럼 뻗어나가 도주하는 괴한들의 등 부위에 격중된 후 그대 로 관통되었다. 그들은 전소추에게 암기를 뿌린 대가로 이승을 떠나 야했던 것이다. "케에엑! 아악! 으악! 켁……!……." 전소추는 자신의 손에 이십여 명 이상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자 망연자실하였다. 독침에 맞은 괴인들은 순식간에 썩어 들어가 며 심한 악취를 주변에 풍기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암기에 부시독(腐屍毒)을 발라 놓았던 모양이었다. 사우인이 멍하니 자신의 손을 바라보고 있는 전소추의 어깨를 툭 치 며 입을 열었다. "아우! 정신을 차리게." 전소추는 자신이 강호에 출도한 이래 처음으로 사람을 살해한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의형! 소생이 이 손으로 사람을 죽였습니다. 소생이 무슨 권리로 그들을 죽일 수 있습니까……?" 전소추가 고개를 들지 않고 있을 때 백의를 입은 무인들과 여인들이 전소추와 사우인에게 절을 올리며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구명지은(求命之恩)을 베푼 두 분 대협께 감사드립니다." 전소추가 그들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사우인이 어깨를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아우와 내가 복면을 한 괴인들을 죽였기에 저들이 목숨을 구한 것 이니 너무 상심 말게나.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나 다수의 힘으로 일 을 해결하려한 저들은 결코 정파의 인물이 아닐 것일세. 그런데 자 네의 사부는 노승이라고 하더니 어떻게 불문무공이 아닌 암기술을 펼쳤는가?" "그, 그냥 배웠어요." 전소추는 암기술도 사부에게 배웠다고 얼버무리며 자리에서 일어났 다. 그의 사부가 소림사의 승려라고 짐작했던 사우인은 의아한 생각 이 들었지만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그때 선녀처럼 어여쁜 몸매를 지닌 여인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 들에게 다가와 면사를 거두더니 포권을 취하며 은쟁반에 옥구슬 구 르는 듯한 옥음(玉音)을 흘렸다. "두 분 대협께 어떻게 이 은혜를 갚아야할 지 모르겠어요. 저는 비 취장미(翡翠薔美) 석운교(石雲嬌)라고 해요. 두 분을 석가장에 모시 고 가서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고 싶어요." 비취장미 석운교의 황홀한 옥용을 마주 대한 두 사람은 아찔한 현기 증을 느껴야 하였다. 월궁항아(月宮姮娥)나 천상옥녀(天上玉女)가 인세에 모습을 드러낸 듯한 아름다운 그녀의 옥용은 미인을 표현하는 폐월수화(閉月睡花) 나 화용월태(花容月態)라는 말로도 부족할 것 같았다. 화려한 비단화복(緋緞華服)을 걸친 그녀의 가슴에 솟은 수밀도는 금 방이라도 화복을 뚫고 나올 정도로 솟아올라 있었고, 가느다란 세류 요와 탐스런 둔부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듯 보였다. 백설처럼 하얀 피부를 지닌 그녀의 음성까지 듣기 좋았으니 가히 십 전완미(十全完美)란 말이 무색할 정도였다. 그런 미인을 처음 본 전소추는 물론 사우인도 입을 벌린 채 침묵을 지키고 있었기에, 그녀는 옥용을 면사로 가리며 가볍게 웃었다. "호호호……! 부디 소녀 일행과 동행해주세요. 저들은 부상을 당해 소녀를 지켜주지 못할 거예요." 그제야 자신들이 결례를 범했다는 생각을 한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 고 상대방의 의중을 묻는 것 같았다. 어차피 자신들의 행선지가 하북성이었으니 가는 동안 만개한 장미처 럼 아름다운 여인과 같이 동행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한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하였다. 더욱이 그녀가 천하제일부 금적산(金積山) 석대숭(石大崇)의 장중주 (掌中珠)라니 가는 동안 숙식을 해결하는데 그녀의 도움을 받으면 될 것이었다. 사우인은 서둘러 부상자들을 지혈시키고 품에서 꺼낸 금창약을 발라 주었다. 그들의 상처는 금창약의 대단한 효능으로 바르자마자 상처 가 아물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상처가 아물자 죽은 자들의 복면을 벗기고 품을 뒤졌다. 그 러나 생면부지의 인물들이었고, 품속엔 어느 문파의 제자인지 파악 할만한 물건이라곤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한 문파의 사람이라는 것을 파악할 근거는 있었다. 그들의 병장기는 검(劍)과 도(刀)였는데 손잡이에 살(殺)이라는 글 씨가 음각(陰刻)되어 있었던 것이다. "소주! 이들이 어디에 소속된 살수(殺手)들인지 신분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 이곳을 빨리 떠나는 것이 좋겠습니다." 백의를 입은 호위무사들은 전방과 측방, 후방에 자리를 잡고 그들이 떠나길 기다렸다. 시녀로 보이는 십대 후반의 여인들도 아름다웠지만 비취장미의 미모 에 비할 수 없었다. 전소추와 사우인은 그녀들과 담소를 나누며 천 천히 자리를 떴다. 서능협의 협곡을 지나자 광폭(狂暴)하였던 물줄기는 폭이 넓은 곳에 이르자 유속이 줄며 유순해져 있었다. 잠시 휴식을 취하는 동안 전소추는 괴인들 무리가 습격을 할지 모르 니 배를 이용하자고 제안해 비취장미가 호위무사에게 배를 구해오라 고 명했다. 호위무사들이 나루터에 정박해 있던 유람선 중에서 가장 크고 튼튼 한 유람선을 구해왔다. 비취장미가 시녀들의 손을 잡고 연화부류(蓮花浮流)의 수법으로 물 위를 스치듯 선박에 승선하자 곤륜철협은 일학충천(一鶴沖天) 신법 으로 삼 장을 떠오른 뒤 이어서 궁신탄영(弓身彈影)의 멋진 수법으 로 승선하였다. 전소추가 어떤 수법으로 승선할까 궁금해하던 곤륜철협과 비취장미 는 그의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어느새 자신들의 곁에 서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가 발휘한 경공술은 유령무흔비(幽靈無痕飛)라는 오백 년 전 흔적 도 남지 않고 사라진 유령보(幽靈堡)의 절기였다. "하하하……! 과연 아우의 경공술은 신비롭군." 곤륜철협은 전소추의 무공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조금 전 목격한 경공술만 보더라도 자신과 비교 못할 정도로 확연한 차이가 나는 것에 대해 감탄했다. 장강의 중심부에서 유람을 나온 듯 편안한 여정을 즐기며 하류로 내 려가던 일행들은 날이 어두워지자 허기를 느끼고 불빛이 보이는 나 루터에 배를 댔다. 담소를 나누며 시간 가는 줄 몰랐던 일행들은 하선하여 그곳 사람들 에게 물어보고 나서야 자신들이 동정호(洞庭湖)가 있는 악양현(岳陽 縣)을 지나 홍호(紅湖)까지 내려온 것을 알게되었다. 동정호를 구경하려던 의도는 무산되어 섭섭했지만 배에서 잠을 자지 않으려면 숙박할 곳을 정해야했다. 그곳은 여행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라 제법 번창하여 커다 란 주루와 객점들이 있었다. 그 중 규모가 가장 큰 용화객잔에 숙소 를 정하고 주청에서 요리를 주문하였다. 석가장의 금지옥엽(金枝玉葉)답게 비취장미 석운교는 자신의 부를 마음껏 자랑하듯 수많은 요리를 주문하였고, 덕분에 전소추는 생전 처음 먹어보는 진귀한 요리를 게눈 감추듯 먹어댔다. 하지만 곤륜철협 사우인은 요리를 먹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 는지 어떠한 요리도 입에 넣지 못하고 있었다. 상사병(相思病)이라도 난 듯 멍청히 바라보고 있는 사우인을 배를 채운 전소추가 바라보고 키득거렸다. "히히히……! 형님, 미인을 바라보면 허기도 사라진답니까?" 사우인이 헛기침을 터트리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허험……!" 전소추는 그러한 모습을 보이는 사우인이 더욱 우스웠다. "하하하……! 소생이 보니 의형과 소저는 무척 어울리는 것 같은데 청혼을 하시지요?" 사우인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음을 애써 모른척하던 그녀는 먹던 요 리가 목에 걸렸는지 목을 잡으며 안색을 붉게 물들였다. 자신을 구해준 은공들이 의형제지간이고 둘 다 준수한 용모를 지니 고 있어 호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마음 한편으론 신비한 무공을 지닌 전소추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탓이었다. 전소추의 마음에 당초혜가 굳게 자리잡고 있음을 모르는 그녀는 토 라져 숙소로 돌아가자 사우인은 아쉬워했다. "아우! 장난이 너무 심한 탓에 석소저가 화 난 모양이다." 잠시 후 전소추와 사우인은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고, 대취(大醉)하 여 서로에게 몸을 기댄 채 숙소로 향했다. "딸꾹……! 의형! 대장부가 왜 그리 소심합니까? 좋으면 좋다고 표 현을 해야 석소저도 받아들일 것 아닙니까?" 사우인은 아무런 말없이 문을 열고 전소추를 부축하여 침상에 뉘여 놓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삼경 무렵 얼핏 기왓장을 밟는 듯한 소리를 들은 전소추는 취기를 삼매진화로 태워 버린 후 귀를 기울였다. 뿌드득―! 뿌드득―! 분명 누군가 기왓장을 밟고 서성이고 있었다. 의형의 옆구리를 툭툭 쳐 깨운 전소추는 천장을 가리키고 손가락으 로 입을 막아 말하지 말라는 신호를 하자 사우인은 취기를 떨쳐내며 검을 잡고 그대로 천장을 뚫고 솟구쳐 올랐다. 야행복을 입은 괴인들은 자루에 무언가 담은 채 지붕 위를 걷고 있 다가 기겁하며 자루를 떨어트렸다. 지붕에서 굴러 내린 자루는 마침 밖으로 나오려던 전소추가 엉겁결 에 안았다. "어엇……?" 뭉클한 느낌을 받은 전소추는 안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내려 놓고 끈으로 단단히 매여진 자루의 입구를 풀었다. 그 안엔 비취장미 석운교가 얇은 망사의만 걸친 채 혼절해 있었다. 누군가 침소에 몰래 들어가 그녀의 혼혈을 점혈한 모양이었다. 채챙―! 병기가 부딪치는 소리를 들은 전소추는 의형이 두 복면인과 팽팽한 접전을 벌이고 있는 것을 보고 주변에 떨어진 작은 돌멩이들을 주워 강기를 실어 날렸다. 쐐에에에엑―! 퍼퍼퍽―! "윽……!" 복면인 중 하나가 돌멩이에 맞아 신음을 터트리고 쓰러지자 나머지 복면인이 사우인에게 수많은 암기를 뿌리더니 지체없이 동료를 업고 도주하였다. 전소추가 그들을 쫓으며 소리쳤다. "의형! 자루 안에 석소저가 있으니 돌봐주시오." 사우인은 간신히 암기를 막아내고 한숨을 쉬며 내려왔다. "휴우! 자칫 잘못했다간 황천 구경을 할 뻔했구나……." 자루를 열어본 사우인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전소추가 사라진 방 향을 바라보았다. "아우가 나를 위해 자리를 비켜주다니……!" 자루를 안고 안으로 들어간 사우인은 민망하게 보이는 그녀를 이불 로 덮어준 후 혼혈을 풀어주었다. 깨어난 석운교는 침상에 그가 걸 터앉아 내려다보고 있자 깜짝 놀라 일어났다. "소저! 몸은 좀 어떻소?" 사우인은 자신이 이곳에 왜 들어왔는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다가 창 문을 열고 환기를 시켰다. 자꾸 잠이 쏟아지려는 것을 수상히 여긴 사우인은 몽연향(夢煙香)의 향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이불 속에 있던 석운교는 자신이 속이 훤히 비치는 망사의를 입고 있음을 알고 부끄러워하였고, 사우인은 창문을 걸어 잠그고 문을 열 고 나가며 말했다. "석소저! 소생은 아무 것도 보지 못했소이다." 사우인의 그 말은 다 보았다는 것과 진배없는 말이었다. 자신의 침소로 돌아가며 사우인은 그녀에게 사랑고백을 못한 자신을 한탄하고 있는 동안, 자신의 교구를 모조리 보았다고 생각한 석운 교는 자신을 두 번이나 구해준 곤륜철협의 남자다운 모습을 떠올리 고 있었다. 한편 복면인을 뒤쫓던 전소추는 그들이 숲 안으로 들어가 몸을 숨기 자 그만 종적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온갖 무학을 익힌 그는 그들이 지하에 스며들어 구명은잠술(求命隱潛術)을 펼치고 있음을 알아낼 수 있었다. "으응? 도대체 어디로 갔지……? 에잉! 아랫도리가 무거우니 소변이 나 볼까……?" 천천히 숲 안을 거닐던 전소추가 하의를 내리더니 소변을 보며 흥얼 거렸다. 쏴아아아―! "이야! 시원하구나. 땅 속에 있는 벌레들이 무척 놀라겠지?" 이때 복면인들은 지면 아래에 몸을 숨기고 숨을 쉬기 위해 가느다란 대롱을 입에 물고 있었는데, 전소추는 집요하게 대롱의 입구를 향 해 세차게 뿌려대었다. 갑자기 지면이 들썩이더니 두 명의 복면인이 튀어나오며 헛구역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흐억……! 어억! 더러워……." 전소추는 태연스럽게 하의를 여미고 그들을 바라보며 싸늘한 목소리 로 다그쳤다. "더 험한 꼴 당하지 말고 신분을 밝히고 왜 석소저를 납치하려 했는 지 말하라." 구역질을 하던 복면인들은 다짜고짜 품에서 비수를 꺼내 던졌다. 바 람을 가르며 날아오는 비수를 바라보던 전소추는 가볍게 손가락 사 이에 끼우며 웃었다. "하하하……! 비수를 던지려면 이렇게 해야지." 휘이익―! 전소추의 손을 떠난 비수는 느릿느릿 복면인들의 얼굴을 향해 날아 갔는데 그들은 고개를 숙여 가볍게 피하려다가 비수가 방향을 틀어 얼굴을 향해 날아오자 대경하며 피하려 했다. 찌이익―! 하지만 비수에는 눈이라도 달렸는지 그들이 피하려는 방향으로 정확 히 휘어지며 그들의 복면을 가르고 지나가 나무에 박힌 후 부르르 떨었다. "이, 이런……! 여인들이잖아?" 전소추는 그들에게 다가가다 멈춰 멍청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여인들의 복면을 찢은 비수는 그녀들이 묶은 머리 끈까지 베고 지나 가 구름 같은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있었다. "허험……! 소생은 그대들이 여인인지 짐작하지 못하였소. 쯧쯧…… ! 내가 어쩌다 연약한 여인에게 출수를 하게 되었나?" 전소추는 그녀들의 옥용이 비취장미와 비견될 정도로 아름다워 자신 의 눈을 비비며 말했다. "어떻게 내가 대하는 세상의 여인들은 모두 아름답지……? 미안하게 되었소. 가시오." 전소추가 자리를 뜨려는데 여인의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흥……! 소녀는 날수인요( 手人妖) 냉예향(冷藝香)이에요. 앞으로 이 수모를 톡톡히 갚아주겠어요." 신형을 띄운 전소추가 여운을 남기며 떠나갔다. "하하하……! 소저의 방명은 얼굴만큼 아름다운데, 쯧쯧쯧……! 별 호는 과히 듣기 좋지 않소. 소생은 전소추라하오. 나중에 날 다시 찾는다면 품에 안아 버릴 테니 찾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오." 전소추가 사라지자 두 여인은 통곡을 하며 울었다. "흐흐흑……! 두고 봐! 자객문(刺客門)의 모든 문도들을 풀어 원한 을 갚아주겠다." 한참을 울던 두 여인이 용화객잔이 있는 곳으로 원한에 가득 찬 시 선을 던졌다. "언니! 나 백수호접(白手蝴蝶) 연교매(燕嬌梅)가 이름을 걸고 맹세 하겠어. 내 평생 그자를 쫓아다니며 괴롭혀줄 것이야. 감히 나한테 더러운 소변을 먹이다니……." 옥루(玉淚)를 흘리며 울던 날수인요와 백수호접은 이를 갈며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아름드리 나무 위에서 전소추 가 모습을 드러냈다. "날수인요 냉예향과 백수호접 연교매라고 했던가? 이걸 어쩌지? 여 인이 원한을 품으면 오월에도 찬서리가 내린다고 하던데… 자객문은 어떤 문파일까? 돌아가서 의형에겐 뭐라고 해야 하나?" 전소추는 의문만 가득 품은 채 용화객잔으로 돌아왔다. 걱정하고 있던 사우인에게 그들의 행적을 놓쳤다고 말한 전소추는 의형이 잠들자 바닥에 앉아 첫닭이 울 때까지 운기행공(運氣行功)을 하였다. 조반을 하기 위해 식탁에 모여 있던 일행들은 주방에서 점소이들이 줄줄이 들고 나온 요리접시를 보고 식욕을 해소하려했다. 배가 몹시 고팠던 전소추가 가장 먼저 요리를 입에 넣었는데 분명 어제와 맛과 향이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다른 사람들이 젓가 락을 들어 요리에 손을 대려는 순간 전소추가 외쳤다. "잠깐! 먹지 마시오. 누군가 독을 풀었소." 사우인이 대노하여 장방을 불렀는데 음식에 독이 들어 있다는 말을 들은 그는 놀라서 주방으로 뛰어들었다. 다른 사람들의 요리엔 독이 풀려 있지 않았으나 유독 그들의 음식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이상한 독초가 섞여 있다는 것을 알게된 장방은 주방장을 다그쳤다. "이런 멍청아! 누구 망하는 꼴을 보고 싶어서 독이 들어 있는 음식 을 만들었느냐?" 삼십대 후반의 주방장은 손을 들어 머리를 감싸며 말했다. "장방 어르신! 전 아무 죄가 없습니다. 어제 만든 재료와 같은 것을 썼는데 그럼 어제도 독이 들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그랬 다면 천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소인은 억울합니다." 사우인은 누군가 일행들의 목숨을 노린다는 것을 감지하고 일행을 데리고 빠져 나왔다. "아우! 배가 고프더라도 조금 참는 것이 좋겠네!" 전소추는 자신이 독이 든 음식이라도 양껏 먹을 수 있는 만독불침( 萬毒不侵)의 신체를 지녔지만 그것을 숨기고 싶어 말없이 그들을 따 라 나루터로 향했다. 정박해 놓는 배에 올라탄 석가장의 호위무사들이 서둘어 강의 중심 을 향해 힘차게 노를 저었다. 중심부에 이르자 빠른 속도로 움직이던 선박이 점점 속도가 줄고 있 었고, 가라앉는 느낌이 들어 배의 아래 부분을 살펴보니 바닥에 커 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호위무사들은 노를 젓고 나머지는 물을 퍼내며 간신히 물가로 나왔 는데 배를 댈 곳이 없는 절벽 밑이었다. "아아악! 바, 바위가 떨어진다! 조심하라!" 꽝! 우지지지직―!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위에서 갑자기 바위가 굴러 떨어져 배의 선 미부분을 강타하여 부셔 버렸고, 이젠 배가 가라앉기만 기다려야 할 판이었다. 절벽 위에서 크고 작은 바위들이 다시 떨어져 내리자 곤륜신협 사우 인이 검을 뽑아 판자를 만들어 하나씩 주며 자신은 비취장미를 껴안 고 물로 뛰어들었다. 전소추도 물로 뛰어들었는데 대체 왜 이런 일이 생기는지 짐작한 듯 얼굴을 찡그렸다. '으이구! 이제 알았다……! 어제 골려준 그 여인들이 날 죽이려고 별 짓을 다하는구나!' 판자를 끼고 강물을 따라 흘러 내려가던 전소추는 물에 빠진 척 허 우적거리며 큰 소리로 다급하게 외치다가 가라앉아 버렸다. "살, 살려주시오." 사우인이 그를 구하려고 판자를 놓자마자 비취장미가 물에 빠져 떠 내려갔다. 다급해진 그는 능숙한 수영솜씨로 그녀에게 다가가 판자 위에 얹어 놓고 전소추가 사라진 곳으로 향했다. 물에 가라앉은 아우를 찾으려고 수없이 자맥질을 하였건만 그를 발 견하지 못한 사우인은 머리를 쥐어박으며 한탄을 하였다. '아……! 내가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겨 아우가 죽는 것을 수수방관( 袖手傍觀)하였으니 세상을 똑바로 볼 면목이 없구나!' 고개를 숙인 사우인은 비취장미가 떠내려가고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 하류로 떠내려가던 일행들이 절벽지대를 벗어나 뭍으로 올라 기진 맥진한 몸을 추스르기도 전에 사우인은 아우를 찾으려고 절벽 위로 뛰어올랐다. 일각이 지나도록 전소추는 떠내려오지 않자 이미 하류로 떠내려갔다 고 판단한 곤륜철협은 일행들을 이끌고 하류로 신형을 날렸다. 한껏 숨을 들여 마신 채 강물에 가라앉은 전소추는 한번도 직접 시 전해 본적이 없는 수룡잠영술(水龍潛泳術)을 시전하였다. 처음엔 제 뜻대로 되지 않아 가라앉기만 하더니 어는 순간부터 좌우 로 몸을 비틀며 빠른 속도로 미끄러지듯 유영했다. 눈앞에 커다란 잉어가 유유히 헤엄을 치는 것을 본 전소추는 잉어를 쫓아가면서 수룡잠영술을 익숙해질 때까지 수련하더니 곧 쫓던 잉 어를 추월하고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굽이친 곳을 지나 절벽 쪽으로 향한 전소추가 솟구쳐 오르며 두 발 을 교차하여 절벽을 찍으면서 허공으로 상승했다. 한번 절벽을 찍을 때마다 십여 장씩 솟구치던 전소추가 절벽위쪽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감히 날 수장(水葬)시키려 했단 말이지?' 비무둔잠술(飛霧遁潛術)을 일으키자 그의 전신에서 안개가 흘러나와 주변을 안개에 휩싸이게 한 후 바위가 떨어진 곳을 향해 소리 죽여 다가갔다. 절벽 위에선 몸에 달라붙는 홍의경장(紅衣輕裝)을 입은 절염한 미 태가 흐르는 여인 둘이 아래쪽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찾는 모습이 보 였다. 여인들은 날수인요와 백수호접이었고, 시원섭섭한 표정을 짓고 있었 다. 백수호접이 붉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투덜거렸다. "언니! 우리에게 치욕을 안겨준 그놈의 뼈를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 은데 너무 간단히 해치운 것 아냐?" 날수인요의 음성은 가라앉아 있었다. "아냐! 난 그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것을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쉽 게 죽게 될 줄은 몰랐어… 그런데 용화객잔에서 그자가 칠지홍엽초( 七支紅葉草)를 달인 물을 먹었는데 왜 반응이 없었는지 모르겠다. 내게 해약(解藥)이 있으니 그것을 가지고 그를 골려줄 생각이었잖아 ?" 백수호접과 날수인요는 사실 전소추를 죽일 마음이 없었고, 그가 자 신들에게 잘못을 빌게 만들 작정이었다. 지난밤에 자신들에게 모습을 보인 자는 그저 미남이라고 칭하기엔 아까울 정도의 준수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녀들은 그를 죽게 한 후 밀려드는 때늦은 후회감 때문에 아쉬워했다. "언니! 난 자꾸 이상한 기분이 들어. 그자에게 나는 기이한 체취가 자꾸 생각나거든……." 날수인요도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휴우……! 너도 그랬니? 사실은 나도 그런 느낌을 받았어." 짙은 안개에 몸을 숨기고 있던 전소추는 그녀들이 칠지홍엽초를 들 먹이자 얼굴을 찡그렸다. 칠지홍엽초를 물에 달이면 약간 붉은 물이 우려지는데 그것을 복용 하면 가려움증 때문에 피가 나오도록 피부를 긁어도 가려움증이 가 시지 않는 특이한 독초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들의 말을 듣고 있으려니 수치심 때문에 일을 벌린 것을 알게 되었다. '음……! 그리 사악한 여인들은 아니로군. 하지만 생명을 업신여기 니 벌을 내려야 하겠지?' 전소추가 살며시 의복을 벗고 두 손을 모으더니 이상한 주문을 외우 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전신에서 털이 나기 시작했고, 체구가 변 하고 얼굴 모습이 점차 짐승의 모습으로 변하였다. 엄청난 체구를 지닌 송곳니가 뾰쪽한 사나운 백호(白虎)의 모습으로 변한 전소추는 자신의 전신을 바라보며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만변둔갑술(萬變遁甲術)은 이럴 때 쓰라고 익힌 것이지……! 내가 봐도 정말 감쪽같이 변신을 했구나. 이제 슬슬 저들을 골려 볼까… …?' 짙은 안개에 휩싸인 채 전소추가 그녀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자 백 수호접이 먼저 안개를 발견하고 날수인요에게 말했다. "언니! 해가 중천에 떠올랐는데 웬 안개가 몰려오지?" 날수인요가 백수호접의 말을 듣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안개 속에서 우레와 같은 맹수의 포효가 들려왔다. 크아아아앙―! 안개 속에서 엄청난 백호가 걸어나오며 모습을 드러냈다. "어멋! 아아악……!" 송곳니를 드러낸 채 붉은 안광을 뿌려대는 백호가 그녀들을 노려보 자 오금이 저린 두 여인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날 곳을 찾았으나 피 할 곳이라곤 후방의 절벽뿐이었다. 크아아아앙―! 턱 버티고 앉아 자신들을 노려보던 백호가 절벽이 울리도록 포효를 터트리자 겁에 질려 있던 두 여인들은 냉정을 되찾았는지 암기와 비 수로 일전을 벌리려 하였다. 이때 백호가 벌떡 일어나더니 여인들을 향해 다가갔다. "죽어라!" 날수인요와 백수호접은 동시에 비수와 나비모양의 암기를 있는 힘껏 암기를 뿌렸다. 따다당―! 백호를 향해 날아가던 비수와 암기는 백호의 가죽에 부딪치고 쇳소 리를 내며 떨어졌다. 크아아앙―! 백호가 화가 동했는지 시뻘건 안광을 뿌리며 포효하였다. "크르르릉! 지난 천 년 동안 본 신령을 화나게 만든 인간이 없었는 데 연약한 너희들이 감히 내게 이따위 것을 던지다니 용서할 수 없 노라." 백호가 말을 하자 여인들은 너무나 놀라 뒤로 물러섰다. "흐아악……! 금강불괴(金剛不壞)의 신체를 지닌 백호가 있다니? 게 다가 말까지……?" 백호가 송곳니를 보이며 말했다. "크르르릉……! 너희들은 이곳을 지키는 신령(神靈)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느냐?" 여인들은 머리를 땅에 박고 두 손을 싹싹 비비며 울먹였다. "흐흐흑……! 신령인줄 모르고 그랬으니 용서해 주세요." 백호가 긴 혀를 내밀고 입맛을 다시더니 다가가며 말했다. "못된 것들……! 너희들이 하는 짓을 다 보았다. 배를 타고 가는 사 람들에게 무슨 원한이 있다고 바위를 굴려 죽게 하였느냐? 너희들을 잡아먹어 그들의 원혼을 달래야겠다." 백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날수인요가 사정했다. "흐흐흑……! 사, 살려주세요…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겠어요." 백호가 일 장 앞에 멈춰 서며 눈을 부라렸다. "정말이냐? 하지만 너희들은 벌을 받아야 한다." 신령이 벌을 준다는 말에 여인들은 두려움에 벌벌 떨며 고개도 들지 못하고 엎드려 있었다. 백호의 거대한 앞발이 들려지는가 싶더니 날카로운 발톱에서 두 줄 기 지풍(指風)이 뻗어나가 여인들의 혼혈을 격타했다. 퍼퍽―! 여인들이 혼혈을 점혈(點穴)한 전소추는 자신의 의복이 있는 곳으로 가서 만변둔갑술을 풀고 의복을 걸쳤다. "후후후……! 좀더 골려줘야지." 전소추는 여인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몇 군데 혈도를 더 점혈한 후 여인들을 칡넝쿨을 이용해 발목을 묶은 후 그 곳에서 좀 떨어진 숲 속의 나무에 매달고 나서 주변을 기어가던 뱀 몇 마리를 나무 위에 걸쳐놓고 혼혈을 풀어 주었다. 정신을 차린 여인들이 깨어나 자신들이 처한 상태를 보고 비명을 질 렀다. " 어맛! 아아악……!" 새하얗고 미끈한 종아리는 물론 의복이 모두 흘러 내려가 둔부까지 모두 드러나 있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사지가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아 울상을 짓고 있는데 전소추가 손가락질을 하며 모습을 드러냈 다. "하하하……! 너희들이 바위를 던져 나를 죽였군? 후후! 죄 없는 나 를 죽였으니 이곳 지옥(地獄)에 떨어졌지… 이곳은 하루종일 뱀이 여인의 종아리를 무는 형벌을 주는 곳이라던데……?" 입가에 피를 흘리고, 머리를 풀어헤친 전소추의 모습과 나뭇가지 위 를 기는 뱀들을 보고 여인들이 기겁을 하며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잘못했어요. 제발 저희들을 풀어주세요." 여인들이라면 누구나 본능적으로 뱀을 두려워하였기에 그녀들은 잔 뜩 겁이 질려 울부짖었다. "흐흐흑……! 아아앙……! 대협(大俠)! 제발 풀어주세요." 전소추의 한번 손짓으로 묶여 있던 칡넝쿨이 끊어져 바닥에 내동댕 이쳐졌다. 쿠쿵―! 무공을 상실하고 뜻대로 사지를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머 리가 깨질 듯 아팠지만 여인들은 전소추에게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고, 고마워요. 이 은혜는 반드시 갚겠어요." 전소추가 여인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흥……! 난 이미 수장되어 물귀신이 되었는데 어떻게 은혜를 갚겠 다는 말이지?" 여인들은 바닥을 기어와 전소추의 다리를 잡고 애원했다. "대협! 원하신다면 이곳에서 대협을 모시고 종복으로 살겠나이다. 그러니 제발 저 뱀들을 물리쳐 주세요." "정말이냐?" "저, 정말이옵니다. 대협!" 전소추가 손짓을 하자 뱀들은 마치 손짓을 알아들은 것처럼 스르르 자취를 감췄다. 그것은 허공섭물을 역이용한 수법이었다. 그러한 모습을 본 여인들은 자신들이 유부(幽府)의 지옥에 떨어진 것이 확실하다고 느끼고 흐느꼈다. "흐흐흑……! 제발 소녀들을 구해주세요." 이때 전소추가 목소리를 내리깔며 말했다. "내가 그대들을 용서하면 다시 인세로 나갈 수 있는데 앞으로 선행 을 베풀며 살수 있겠소?" 여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비볐다. "그, 그렇게 살겠어요. 인세로 나가면 대협의 넋을 기리는 제사도 지내겠어요." 전소추는 여인들의 말을 듣고 감동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본인은 혼례도 못 올리고 죽어 너무도 억울하오. 그러나 다시 인세 로 되돌아 갈 수 없는 몸! 그대들이 인세로 돌아가 나를 남편으로 생각하고 평생 수절을 한다면 그리하겠소." 여인들은 말없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가 결심이 선 듯 동시에 입을 열었다. "조, 좋아요… 그렇게 하겠어요." 전소추는 눈을 감으라고 말한 후 그녀들의 혼혈을 점했다. 원래 있었던 곳으로 그녀들을 옮겨 놓고 바닥에 백호가 남긴 듯한 발톱자국을 남겨 놓더니 그녀의 혼혈과 점혈한 혈맥들을 풀어주는 즉시 십여 장 뒤에 있던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흐으응……! 여기가 어디지? 여, 연매! 정신차려." 먼저 정신을 차린 날수인요가 백수호접을 흔들어 깨웠다. 그곳이 신령을 만났던 절벽 위라는 것을 깨달은 여인들은 서로 부둥 켜안고 기뻐했다. "우, 우리가 살았어! 그분 대협께서 정말로 우리를 지옥에서 건져주 셨어." 날수인요와 백수호접은 자신들이 환생한 것에 들떠 전소추와 백호의 체향이 일치한다는 것을 연관짓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이 있는 곳에서도 전소추의 기이한 체향의 여운이 흐 르고 있음은 더더욱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저승에서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녀들은 고마운 마음에 자연스레 전소추에게 존칭을 붙이고 있었고 , 그 모습을 보던 그는 눈치 채지 못하게 그곳을 벗어나 하류방향으 로 사라졌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잼 납니다
즐감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