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선한 사람이여
로마서 12:9-21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창조절 제1주일이다. ‘성령강림 후 주일’도 대림절 직전까지 계속된다. 일곱 절기 중 마지막 절기이다.
색동교회가 설립 10주년을 맞아 낸 <색동기도>에는 7가지 비전에 대한 기도문이 있다. 다섯 번째가 ‘창조질서’이다. 색동교회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내일의 집’이 되려는 고백이었다.
“... 이제는 달라지게 하옵소서. 나 홀로 누리려던 헝클어진 욕망을 줄이고, 모두가 함께할 단단한 희망을 키우게 하옵소서. 전전긍긍 해온 목표지향적인 삶이 아닌, ‘보시기에 좋은’ 가치지향적인 삶을 결단하게 하옵소서. 더 검소하고 절약하며, 나누고 배려하며, 이웃과 더불어 미덥고 소박한 일상의 관계를 이루며 살게 하옵소서. 무엇보다 자연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 세계 앞에서 겸손하게 하소서...”(24-25쪽).
색동교회는 창조절을 맞아 두 가지를 준비하였다. 하나는 창조절 배너이고, 또 하나는 창조절 입례송이다. 얼마나 창조적인가? 서상남 집사님과 김민경 선생님에게 감사드린다.
여러분 모두 가을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가을은 참으로 선한 계절이다.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령강림절 주일예배 마다 9가지 열매를 고백하며, 다짐하였다. 예수님은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고 말씀하신다.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마 7:17).
‘리빙 라이브러리’라는 말이 있다. 살아있는 도서관이란 뜻인데, 이 도서관은 책을 빌리는 곳이 아니다. 리빙 라이브러리에는 수많은 휴먼 북이 있다. 풀어서 설명하면 살아있는 도서관에서 책은 바로 구체적인 사람이고, 그 사람의 이야기이다. 모범교사와 같은 사람이다.
성경에서 모범은 의인, 지혜로운 사람, 영성이 깊거나, 선한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산다.
1)
로마서 12장은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윤리를 제시한다. 그 윤리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산상설교에 바탕을 둔다. 그래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실천적인 윤리이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윤리를 도덕 철학으로서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비에 힘입어 권면하는 것이다. 바울의 따듯한 제안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 바탕을 둔다.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 11:32).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구원과 사랑에 응답하기 위해 자신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린다. 바울은 이것을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라고 말한다. 그것을 삶으로 나타낸 것이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윤리이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드릴 산 제물과 영적 예배는 온전한 존재, 살아있는 인격체, 일상적 삶을 통해 구체화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바울의 새 윤리는 복음의 진수인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산상설교(마 5-7장)의 메시지와 일치한다. 한 마디로 ‘사랑의 계명’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든지 따라야 마땅한 새로운 삶의 방식이다. 이를 그리스도인의 윤리 대강령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거창한 이름을 붙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실천하는 일이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현대 교회, 현대 그리스도인과는 상관없다는 거리감을 느끼게 하려고 거창한 표제어를 붙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여전히 산상설교의 말씀을 고수하면서, 말씀 그대로 가감 없이 지키려는 사람들이 있다.
메노나이트, 아미쉬, 후터라이트와 같은 공동체이다. 사실 대형 교파, 주류 교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만 할 뿐, 그렇게 살도록 강요하지 않는다. 아무리 좋은 말도 자꾸 하면, 듣기 싫어한다. 교회에 와서 마음이 안식하려는데, 자꾸 양심을 부대끼게 만드는 것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산상설교든, 바울의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윤리 든, 현대인의 삶의 방식을 모르는 2천 년 전의 근본주의 윤리라고 항변한다. 아무리 좋은 사랑 타령도 자꾸 반복하면 잔소리처럼 들리고, 속이 불편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새로운 삶의 방식을 살아갈 수 있을까? 마틴 루터와 같은 개혁의 시대를 살았던 에라스무스는 이런 말을 하였다. “못을 뽑아내려면 다른 못을 박아야 한다. 습관은 습관으로 극복된다.” 이전의 습관을 뽑아내고, 새로운 그리스도인의 습관을 못 박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전의 불만의 습관인 못을 뽑아내고, 새로운 감사의 습관이란 못을 박는다는 원리이다.
그리스도인은 본디 선한 사람인가? 아니다. 다만 선한 삶을 살도록 부름받았다.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기 때문이다.
2)
로마서 12장에서 제시한 그리스도인의 새 윤리는 크게 두 가지 범주이다. 하나는 개인적이고, 하나는 공동체적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미 마음에 믿음의 씨앗을 뿌렸다. 경건한 생활, 영적 성장을 통해 우리의 믿음은 그 열매를 맺는 삶을 산다. 그 열매가 세상이 주는 결실과 차원이 다르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입니다”(갈 5:22-23/ 새 번역).
먼저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9)라고 시작한다.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절대적이듯, 사랑은 모든 윤리의 처음이며 마지막이다.
같은 그리스도인과 어울려 살면서 서로 존중하고 존경하기(10),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기기(11), 소망 중에 즐거워하고 환난 중에 참으며, 항상 기도에 힘쓰기(12) 그리고 공동체 안의 식구나 밖에서 온 손님을 힘써 대접하기(13)이다.
누구나 마음으로는 그렇게 하려고 하지만, 구체적으로 실천하려면 의지와 노력이 필요하다.
흔히 ‘루틴’(Routine)이란 말을 한다. 좋은 습관을 만드는 일이다. 그냥 습관이 아니다. 습관은 무의식 중에서 하는 행동을 포함한다. 그러나 루틴은 목적과 의지를 가지고 행하는 의식적 행동이다.
프로 야구 선수들을 보면 그들은 다양한 루틴을 갖고 있다. 타석에 들어서서 별짓을 다한다. 모자를 만지고, 배트로 이곳저곳을 두드리고, 심지어 침을 뱉기도 한다. 마치 자기 자신에게 주문을 거는 듯하다. 사실 실력과 상관이 없는 행위지만, 자신에게 집중하려는 의지이다.
선한 일을 하기 위해 나를 길들여라. 신앙은 머리로 아는 것, 믿는 것만으로는 불완전하다. 내 하루의 루틴을 돌아보라. 나는 어떤 목적과 의지를 갖고 있는가? 어떤 점에서 나는 그리스도인다운가? 하나님을 참되게 섬기려면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공동체를 강조한다. 그는 누누이 ‘형제자매 사랑’이란 공동체적인 삶을 권고한다. 각각 베푸신 믿음의 분량대로, 서로 지체로서 섬겨야 한다. 색동교회가 ‘젊고 따듯하며 평화로운 공동체’란 슬로건을 내세우는 이유이다.
이러한 사랑의 계명은 율법을 뛰어넘는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14).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15).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16).
남을 사랑하는 자, 선을 행하는 자, 겸손히 행하는 이미 율법을 이룬 사람이다. 인간의 의지로 되는 일이 아니다. 열심으로 주를 섬김으로써 그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 한두 번 하고 말일이 아니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기도할 때에 그 능력이 점점 자라날 것이다.
바울은 그렇게 살기 위해 영적 쇄신, 즉 성령의 인도와 도우심으로 삶을 바꾸라고 한다. 하늘에서 공급하시는 능력을 의지하라는 것이다.
남보다 열심히 사는 일은 감수할 일이 많다. 선한 일을 하려면 더 많은 비판을 들을 수 있다.
농부가 묵정밭을 갈기 위해 쟁기질할 때면 일 잘하는 소가 필수적이다. 이때 밭 가는 소가 둘일 경우를 겨릿소, 한 마리일 경우에는 호릿소라고 부른다. 두 마리가 한 멍에를 쓴 겨릿소라도 두 마리 중에서 일솜씨가 다를 수 있다.
농부는 일을 잘하는 능숙한 소를 오른쪽에, 미숙한 소는 왼쪽에 둔다고 한다. 농부는 소를 부릴 때 오른손에 채찍을 들고 소의 등짝을 때리는데, 그때 누가 채찍에 맞을까? 당연히 오른쪽에 있는 능숙한 소이다. 당연히 일을 잘하는 소만 매를 받는다. 그 소를 ‘안소’라 부른다. 매를 맞는 소가 능숙한 소라는 점은 의미가 있다. 농부는 대신 안소를 잘 대접하고, 잘 먹인다고 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에게 더 무거운 일을 맡기신다. 더 많은 비난을 들을 수도 있다. 공동체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좋은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더 어려운 일을 맡기는 것이다.
3)
바울의 새로운 윤리에 대한 가르침에서 개인적 윤리와 공동체 윤리, 이 두 가지를 다 포괄하고 있는 열쇠가 바로 ‘선을 행함’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과감히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해야 한다. 바울은 세 번 반복하여 강조한다.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9).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17).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21).
악의 승리는 선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악으로 선을 물들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악의 승리일 뿐이다. 악을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악을 당장 지우려는 것이 아니라, 먼저 선을 드러내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겪는 위기는 악과 결별하지 못하는 데서 온다. 악은 미워할 대상이다. 죄인은 불쌍히 여겨도, 악에게 관용을 베풀어서는 안 된다. 죄인에 대한 용서는 회개가 전제된 일이다.
흔히 선한 영향력이란 말을 한다. 선한 영향력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이 하는 모든 행위가 선하다는 것은 아니다. 마치 자신이 모든 선의 근원인 것처럼 말만 하는 것은 위선적이다. 하나님이 선이시지, 나 자신은 아니다.
선한 사람이 그 영향력을 끼치는 법이다. 그는 힘으로가 아니라, 선으로 주변을 물들이는 사람이다. 습관을 바꾸어내고, 문화를 변화시키고, 내 주위의 세상을 바꾸어 나간다. 그렇게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존 웨슬리는 처음 감리교인들에게 3대 생활 원리를 가르쳤다. 1739년의 일이다. 연합신도회 총칙은 지금도 ‘세 가지 생활 수칙’(웨슬리 식으로 살아가기)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것은 산상설교의 원리를 요약한 것이다.
첫째, 남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Do No Harm).
둘째, 선을 행하라(Do Good).
셋째, 하나님과 사랑 안에 거하라(Stay in Love with God).
당시 영국 사회의 주류요, 대교파인 성공회가 교회의 역할을 못하자, 보다 실천적인 개혁운동의 결과로 탄생한 감리교회의 슬로건이었다. 존 웨슬리는 당시 산업혁명 시기에 가난하고, 소외된, 그리하여 다시 비참에 빠지는 사람들의 삶을 염려하며 새로운 시대의 윤리를 증거한 것이다.
그 새로움은 다시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는 세상을 향해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임을 다시 일깨워 주었다.
본래 그리스도인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가? 사랑과 인정, 관용과 정의, 화해와 공감 능력 모두를 배운 사람들이다. 겸손하고, 남을 존중히 여기며, 화해를 실천하는 온유한 사람이다. 휴먼북이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보라! 부드러운 듯하나,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킬 소프트 파워로 가득하다. 예수님 마음으로 사는 성품이요, 인격이며, 윤리이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바라기는 사랑하는 색동가족 여러분, 사람의 시선보다 친밀하신 하나님의 눈길을 의식하며 살라.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일치하여 열매를 맺는 복된 삶을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