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자리에 최병선, 구자윤, 김부조, 정승종, 박창수, 황천성, 이만균, 곽삼덕, 김영식, 윤태호, 안영철, 허경욱, 방복주 등 13명이 참여했고, 회 이름을 박창수 회원의 제안으로 ‘쟈일크럽(Seil Club)'으로 결정했다. 부장(후에 회장)은 최병선, 총무 김부조, 장비 구자윤, 보도 정승종, 섭외 박창수, 감사 김영식으로 임원을 구성했고, 창립 총회 결과를 대외에 홍보(영국, 미국, 일본산악회 등에도 전달)하고, 매주 목요일 남포동 산유화다방에 오후 7시로 집회 장소와 시각을 정례화했다.
창립취지는 도보산행을 지양하고, 기술등반(암벽등반, 동계 적설기 하중등반, 빙벽등반)을 지향하며, 이에 필요한 전문적인 등반기술 습득의 체계화와 회원상호간 유대를 강화하며 유능한 후진 양성을 목표로 설정했다. 회원중심제를 채택하여 집행부 간사는 물론 회장도 회원 중에서 선출하는 제도를 창립 때부터 현재까지 유지함으로써 회장을 외부로부터 영입한 사례는 한 번도 없었다.
산악회 운영경비를 절약하기 위해 회관 운영을 지양하고, 최병선, 박창수씨가 근무하는 항만관련 업체인 부산운수(주) 사무실에 캐비닛을 2개를 빌려 모든 서류를 보관하고, 또한 회사 등사기로 산악회의 회보, 계획서, 회의록 등을 직접 편집 제작하여 배부했다. 이러한 열성들이 창립 때부터 지금까지 자료들이 잘 보관되어 있어 새 집행부로 승계되면서 후배들에게 좋은 사료로 활용되고 있다.
본격적인 기술등반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장비인 아이젠과 암벽장비들을 일본 호일산장 등지에서 견본을 구입해 이계환(64․부산공대 졸업) 회원이 철공소에서 특수재질의 자재로 직접 제작하여 실비로 보급했다. 이러한 장비들을 회원은 물론 다른 산악회에서도 구입요청이 쇄도하여 열악한 국내 장비 수요에 크게 기여했다.
기술등반 위주의 산행실적을 꾸준히 쌓으면서 1961년 1월25일부터 31일까지 미화당백화점 3층에서 제1차 적설기 지리산 등반 보고를 겸한 사진 및 장비전시회를 통해 그 첫 결실은 보았다. 이 전시회는 등산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많은 학생과 일반시민이 참관하여(연인원 2,000명) 대성황을 이루었는데, 산악운동의 이해를 돕고 부산 산악운동의 미래를 밝게 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부산 지역의 등산 열기를 고조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후 창립 전부터 코스를 개척해온 금정산 상계봉에 1961년 6개 코스를 완전히 정리하는 성과도 얻었다. 활동범위를 확대하면서 마산산악회의 남행수 회장과 합동 등산(1961년 6월11일 무학산) 등으로 경남 일원 산악회 상호간의 정보 교류도 활발히 진행했다.
1961년 5월과 1962년 4월 2년간 자연보호 운동 차원으로 금정산 남문 근처에 식목행사를 회원가족과 함께 하여 당시 나무 한 그루 없는 민둥산이 지금은 제법 울창한 수목으로 자라서 이곳을 오를 때마다 뿌듯한 감회를 느끼게 한다. 그리고 1961년 6월18일 영도 봉래산의 송충이잡이 행사에 회원 가족과 함께 참가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1968년 부산학생산악연맹이 결성되기 전인 1961년 6월24일 임시총회에서 산하에 학생연맹체를 구성하기로 결의하고, 한라산 하계훈련등반, 일광 하계 임해트레이닝대회, 좌천 달음산 암벽등반 등 학생들에게 기술등반 기초교육을 강도높게 실시했다. 이 때 참가한 고등부 산악반은 경남고, 부산고, 동래고, 경남상고, 부산공고 등 5개 고교였으며, 방학기간을 이용하여 등산강좌 개최와 기초 암벽등반을 교육해 향후 산악부를 선도할 수 있는 지도자 양성에 힘을 쏟았다. 이들 고교산악부는 1961년부터 1년에 2회씩 장기합동산행에 참여시켰으며, 이 행사가 훗날 부산학생등산대회에 출전하는 선수들에게 상당한 도움과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1961년 12월3일 무척산에서 재부 학생산악부 합동등산회를 개최함으로써 고교산악부와 대학산악부 간 정보교류 및 선후배간 유대 형성에 좋은 기회를 마련했다. 참가학교는 부산공대 박진 외 5명, 부산상대 김재도 외 9명, 동아대 박영수 외 4명, 경남고 윤기태 외 10명, 경남상고 박길호 외 9명, 동아고 정심 외 10명, 부산고 박언길 외 4명, 동래고 김수웅 외 3명, 부산상고 이영덕 외 10명, 대륙산악회 성산 외 1명, 쟈일크럽 최병선 외 12명 등이 동참하여 그 자리에서 부산지역 학생산악운동의 문제점 지적과 개선방향에 대하여 심도있게 논의했으며, 이러한 기회가 이후 부산학생산악연맹 태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등반활동의 실적을 부산 산악계에 공개하여 개선해야할 부분의 지적과 평가를 위한 기회를 마련하여 경남공보관에서 1962년 4월6일부터 11일까지 제2회 등산사진전 및 자료전시회를 개최했다. 연인원 6,000여 명이 참관하는 대성황을 이루었으며, 산악인 및 일반인의 관심을 끌었다. 또한 1962년 5월6일 부산일보사와 공동으로 등산입문을 희망하는 시민을 위해 시민안내 등산을 금정산에서 실시했다.
지리산 등산로 개척에 언론사 후원
1962년 7월28일부터 8월5일까지 지리산 하계등반을 부산일보사 후원으로 실시했다. 동계등반을 위한 사전답사, 학생산악부의 지도자 양성, 대집단 등반시 능률적인 운영 연구, 지리산 일대 자연환경 조사, 학술자료 수집이라는 산행목적을 세우고, 1개 분대를 6명씩 4개조로 편성했다.
단위분대는 코스 일대에 걸쳐 다음과 같이 임무를 부여했다. 조사반(현지인 생활상태와 자연환경조사), 등로반(동계등반 코스 결정 및 새로운 코스 설정), 기록반(유적지, 명승지 조사기록 및 전체 운영기록)으로 과제를 분담했다. 등반대 대장은 박창수(부장), 부대장은 김부조가 맡았으며, 1분대장 하정호, 2분대장 문수신(작고), 3분대장 구형우(부민상호신용금고 회장), 4분대장 김한무로 편성됐다.
산행코스는 부산-진주-대원사-치밭목-써리봉-중봉-천왕봉-장터목-세석평전-벽소령-연화천-노고단-화엄사의 주능선 상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세석에서 노라호 태풍을 맞게 되어 허우천 선생의 산막에서 3일간 머물며 악전고투했다. 당시 태풍의 위력은 부산일보사 김경렬 기획위원(작고)의 등행기(부산일보 8회 연재)에서 잘 표현되어 있다. 그 때 김경렬 선생의 직업의식은 철저했는데, 태풍 상황을 기록하기 위해 사투하는 모습에 대원들은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 답사를 통해 지리산신으로 숭배대상이었던 천왕봉 성모석상(聖母石像․마야부인상)과 성모사당(聖母祠堂)에 대한 역사적 고찰이 이뤄졌고, 1960년대의 지리산 등산객들에게 좋은 쉼터를 제공했던 반지하식 천왕봉산장이 알려지게 되었다. 천왕봉산장에 대해서는 김경렬씨가 쓴 기사 ‘지리산 7주야’(1962년 8월7~10일자 부산일보 게재)에 잘 기록돼 있다.
‘30, 4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산장이 낮은 지붕 형태로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었다. 김순용이라는 분이 4년째 이곳에 토굴 같은 산장을 경영하고 있으면서 등산객들을 돕고 있었다.’ 김경렬씨의 저서 '지리산'에도 ‘엎드려 들어갈 수밖에 없는 구조이긴 해도 온돌식이었고, 가운데에 칸을 질러 두 개의 방을 만들었다. 지붕은 흙을 다지고 돌과 풀을 심어 비가 새지 않는 특수한 구조로 돼 있었다’고 산장 형태를 자세히 소개했다.
당시 이 산장 이용료는 학생 30원, 일반 50원이었고, 산장주인 김씨는 진주농과대학(경상대학교 전신)의 기상관측기록을 맡으면서 이 산장을 지어 성모사당에 치성드리러 온 사람들을 상대로 장사를 했던 사실이 알려졌다. 김씨는 1주일에 한번씩 법계사 초막으로 내려가 진주에서 부쳐온 물건을 가지고 올라와 오징어 소주 담배 성냥 건빵 등을 등산객과 성모사당 참배객들에게 판매했던 것이다. 이 산장은 1970년대 초 문을 닫았다. 성모석상(마야부인상)은 산장에서 20m 위 천왕봉 봉우리에 마애음각상과 함께 위치하고 있었지만, 1972년 5월 어느 날 증발돼 버렸다.
고려말 왜구의 침입 때 지리산으로 도주한 패잔병들이 코와 귀가 잘랐다고 전해지는 이 석상은 1972년 5월께 천왕봉 정상에서 누군가의 의해 골짜기로 버려지는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민속학자 강용권씨(동아대 명예교수)가 지난 1991년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천왕사에 보존돼 있는 것을 확인했다. 1962년 7월30일 쟈일크럽 답사대가 천왕봉에 올랐을 때 대원들은 성모석상을 둘러싼 돌담 안에 텐트를 치고 야영했다. 기록에 따르면 성모석상은 고려 태조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상이라고 전해지기도 하고, 석가세존의 어머니 마야부인상이라고도 알려지고 있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다.
다만 이 석상은 1천 년 동안이나 천왕봉을 지키며 많은 사람들로부터 토속신앙의 대상이 돼 조선 중엽에는 ‘늦은 봄부터 여름까지 하루에도 수백 명의 남녀 기도객들이 모여들어 풍기문란과 실농을 면치 못하는 바람에 조정에서 이를 금지시켰으나 효력이 없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다.
세석평전의 자연과 사회적 고찰 성과
지리산 등산로 개척기에 이루어진 학술적 고찰들 가운데 세석평전에 사람들이 모여든 사연과 자연조건에 대한 학술조사는 천왕봉 성모상 고찰에 못지 않게 큰 성과로 평가받고 있다. 세석평전은 당시 지리산을 찾은 대부분의 산악인들이 등산코스로 삼았던 대표적인 등산로였으나, 지역적 특성과 자연조건 등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었다.
1962년 8월1일 대원들이 천왕봉에서 이곳까지 능선을 따라 7시간이 걸려 조사를 했다. 답사대에 참가했던 부산일보 김경렬 특파원은 답사 후 쓴 기사에서 ‘세석평전의 풀들이 다른 곳에 비해 반 정도밖에 자라지 못하는 것은 이곳에는 강한 바람이 잦고 토질이 부식토양으로 점질이어서 배수가 잘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고지이기 때문에 자주 안개가 낮게 깔리고 일조량이 짧은 것 등 나쁜 자연환경조건으로 인해 세석평전의 풀들이 잘 자라지 못하는 것은 물론 이곳을 농지로 개간하는 일이 어려울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일제 말부터 세석평전에 찾아든 피난민들이 정상적으로 농사를 짓지 못하고 목기를 만들거나 약초를 캐며 기껏해야 화전을 일구어 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한편 쟈일크럽의 답사에 앞서 1961년 7월 대학교수들로 구성된 조사단은 세석평전에 대해 ‘경사가 7~13도의 경사지에 20~30cm의 돌과 바위가 깔려 있어 세석이라고 칭하였다. 평지의 위쪽은 초원, 그 아래쪽은 관목과 교목 밀림지대를 이루고 있다’고 기록했다. 이 같은 자연적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지난 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세석평전 아래에 토굴을 파놓고 살면서 돌을 쌓아올려 제단을 만들고 기도를 올리는 일이 성행했다.
쟈일클럽의 1962년 8월 답사 때 그 같은 토굴과 돌로 쌓은 제단이 발견돼 당시 세석평전이 갖고 있던 기복적 성격을 밝혀냈다. 이들 기도자 가운데 3명이 1960년 4월 세석평전에 단을 쌓고 백일기도를 하던 중 일제 때의 50전짜리 은화 3천여 개가 들어있는 항아리를 발견해 횡재했던 일이 있었다. 이에 대해 김 특파원은 ‘은화 항아리는 일제 말기에 부호였던 어느 정감록주의자가 묻어두고 잊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고 해석했다. 그는 답사 뒤 쓴 기사에서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0년에서 1945년 사이에 충청 전라 경상 서울 등지의 사람들이 70호나 이곳에다 피난 보따리를 풀고 깊숙이 파묻혔던 일은 정감록의 원인이었다’고 기술했다.
‘서른 여섯 성받이가 융성할 터전이며 신선이 살 땅이다’이라는 정감록의 기록을 믿는 사람들은 세상이 어지러울 때면 으레 여기로 찾아들었던 것을 감안하면, 일제 말기 세석평전에 들어온 피난민들은 단순히 징병이나 징용을 피해 지리산 골짜기로 숨어든 이들과는 달리 정감록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1945년 해방과 함께 세석평전의 피난민들은 뿔뿔이 흩어져 하산길에 올랐으며 이로 인해 1950년 6.25전쟁 직전까지 남아있던 가구 수는 불과 다섯 집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나마도 6.25전쟁을 겪으면서 모두 떠나버리고 전쟁 후 기도객 등이 어쩌다 찾을 뿐 세석평전은 이제 봄이면 등산객들에게 만발한 철쭉꽃을 선사하는 자연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한산 경남지부가 전쟁 후인 1956년 8월 지리산 학술조사를 실시하고나서 낸 등반기에도 ‘6.25동란 전까지만 하더라도 화전민들이 살았다는 흔적이 군데군데 남아 있을 뿐 이제 인적은 찾아 볼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등반 후 8월8일부터 제2회 하계 임해훈련(일광해수욕장)이 실시됐다. 행사 내용은 산악세미나(암벽등반기술, 독도법, 조난시 구조방법, 내․외국 산악사 개요), 재부 산악인 친목좌담회, 수영, 야구, 축구 등 체력강화와 지리산 등반보고 및 반성회 등으로 편성됐다.
극지법 이론 도입 덕유산 적설등반 시도
쟈일크럽은 부산 산악계로서는 최초로 덕유산 극지법 등반을 실시하기로 임시총회에서 결의하고, 극지법 등반의 효율적인 운영을 위해 1962년 10월26일부터 10월30일까지 박창수씨를 대장으로 문수신(작고), 구형우, 권영계 4명이 덕유산 추계 정찰등반을 실시했다. 이 동계산행은 쟈일크럽의 미래목표였던 고난도 적설기 등반 및 고산등반을 위한 시작이었으며,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기획이었다.
1963년 1월1일부터 10일까지 부산일보사 후원으로 실시된 덕유산 극지법 등반에는 군수기지사령부로부터 트럭과 수송병, 무전기(PRC10) 3대 등을 지원받았다. 무전기는 캠프간에 연락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져 등반대 운영에 상당한 도움이 됐다. 파견된 군수기지사령부의 사병 등이 메일러너로 베이스캠프에서 함양군 서상면 소재 우체국까지 먼 길을 오가며 부산일보 김경렬 특파원이 쓴 원고를 송고해 이 내용이 다음날 기사화 되어 부산시민에게 전달되는 생동감 넘치는 등반보도 기사가 됐다.
당시 덕유산 등반은 예년에 비해 엄청난 폭설이 내려 최병선 대장과 박창수 부대장 등 대원들은 적설량이 1m나 되는 상황에서 폭풍설을 피해 주능선 아래 암벽 주위에 설벽을 쌓아 강풍을 막아내고 비상식량으로 배고픔을 견뎠으나, 4명의 공격조가 2도 동상에 걸리는 등 실신위기에 처하고, 등산화, 장갑 등 장비가 얼어붙는 혹한 속에서 무전기 마저 가동이 불가능하여 더 이상의 전진이 어려운 극한상황이 발생했다. 결국 이 등반대는 북덕유 정상을 포기하고 동엽령에서 후퇴해야 했다. 그러나 이 원정을 계기로 적설기 등반에 대한 새로운 지식과 경험을 쌓았고, 동계등반에 대한 보다 폭 넓은 사전 정보 획득과 교육과 훈련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됐다.
부산 등산계 초기 발전에 큰 영향을 준 행사 중에 하나가 부산 학생 등산대회 였다. 1959년부터 경북산악회가 주최한 학생의 날 기념 60km 극복 등행대회에 최병선 회장이 심판으로 계속 참가하면서 학생 산악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던 차에 견문을 넓히는 의미에서 1963년 제5회 대회에는 쟈일학생부 산하 고등부팀을 대거 출전시켰는데, 이 대회에서 동래고가 공산국민학교에서 대구역까지 16.6km 구보에서 고등부 기록을 수립했다.
그 후 산악회 지원 아래 매년 출전하면서 등산대회 운영방법을 익히게 되었고, 또한 군사정부 때인 1962년 10월 한국특수체육회가 개최한 제1회 전국 특수체육 도봉산 등산대회에 동래고가 산악회 지원 아래 출전하여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부산산악연맹 주최의 부산학생등산대회의 전신으로 1963년 6월13일~14일 이틀간 부산일보사가 주최하고, 쟈일크럽, 한산 경남지부, 대륙산악회 주관으로 금정산에서 부산등산대회가 개최됐다.
부산시, 교육위원회, 부산문화방송, 군수기지사령부 등 사회 각 분야 기관, 단체들이 후원했으며, 대회의 기획 진행 일체를 최병선, 박창수씨가 전담, 전국 등산대회 사상 처음으로 산악이론 채점제를 도입했다. 이 대회가 1966년 제1회 부산학생등산대회로 발전했다. 제1회 대회는 대학부, 고등부에서 20개 팀이 참가하여 금정산 일원에서 임원, 선수가 혼연일체가 되어 성황리에 치렀다.
1961년, 1962년 고교생으로 자일학생부 5개 고교 산악부원들이 고교를 졸업하고 대학생활을 하게 되면서 이 때부터 제2의 쟈일크럽이 탄생하는 전환점이 되어 세대교체라는 발전기의 서막이 열렸다. 창립회원의 지도하에 자일학생부 1기, 2기 출신(하자호, 박정추, 조정술, 이병근, 이영목, 이상헌, 손영진, 양창석, 이의도, 박영순)들이 활동영역을 넓히며 적극적으로 산악회 활동을 펼쳤다.
또한 신입회원들의 입회가 늘어나면서 회원들의 직업, 학력, 나이, 경제력 등이 다양화되었으며, 이 다양화된 회원들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다원화된 산악회 운영이 절실히 요구됐다. 1966년 회명을 ‘산악회 쟈일크럽’으로 개칭하고, 산악회의 질적, 양적인 향상을 위해 구자윤 창립회원이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기술등반 위주의 회원도 폭넓은 일반 등산활동을 병행할 수 있도록 산악회의 운영지침을 변경했다. 이러한 변화의 특징 중 하나가 여성회원의 입회를 허용한 것이다.
1967년 10월21일부터 25일까지 실시한 한라산 추계등반은 대장 박창수, 박현우(일동화학 사장), 조학용(제일은행 지점장), 박정오(한국산업교역 대표), 박영순, 이상헌, 김용호, 이원영(학생), 이병근(군인) 등이 대원으로 구성됐다. 또한 이 행사에는 마산의 경남산악회 남행수 회장 일행과 합동등반 형식으로 계획했다.
한라산의 기존 횡단루트인 제주-관음사-개미등-왕관릉-정상-영실-중문-서귀포에서 신입회원을 주축으로 훈련을 겸하고 창립취지를 교육시키는 성격의 등반이었다. 대원 중 박현우 회원은 1968~69년 회장으로 선임돼 산악회 중흥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된다.
박 회장은 많은 장비들을 해외로부터 구입하여 제공하고, 기술서적도 번역하여 보급하는 열성 회장으로 산악회 발전에 충실했다. 또한 1968년 부채바위 기존루트 초등(김영목, 이병근, 손영진), 무명암 직벽 초등, 병풍암 2개 코스 개척, 김해 봉화산 루트 개척, 신어산 악정바위 코스 개척, 토곡산 암장 개척, 백운슬랩 등반 등 회원훈련에 열정을 불태웠다.
이후 추계 시민안내등산을 금강골에서 실시하여 부산 산악인들에게 숨겨진 등산로를 알리고, 김영목, 이병근 회원은 동겨울에 부산 산악인들에게 빙벽등반 훈련장으로 접근이 용이한 금강폭 빙벽코스를 소개했다.
1969년 12월 적설기 한라산 탐라계곡 루트를 완등하는 성과도 동시에 올렸는데, 이러한 기술지향적인 등반활동이 미국 요세미티 암장 순례(94, 96년)로 이어지고, 정민영, 문상호, 김인수 회원들이 히말라야 원정대원으로 선발되는 등 창립시의 정체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