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키 부츠
그러니까 뮤지컬을 보고 난
뒤부터였죠
늦은 밤 변장을 하고 산책을 나갔어요
한참을 걷다 연못이 보이는
풀밭에 앉았지요 치마를 올리고
연못에 비친 흰 살결
흐릿한 적막을 저어봤어요
내 몸엔 또 다른 형상이 어른댔지요
살갗을 비비면서 우린 서로 알게 됐어요
여자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남자에게 마음 준 적 없구요 그런데
발목까지 감싸주는 치마가
속주름을 확 펴준다는 거 아세요
혼자서도 뜨거워질 수 있다는 거
일주일 중 가장 긴 하루
금요일엔 킹키 부츠를 신어요
보세요
이젠 혼자서도 후크를 채우고
부츠를 신고도 계단을 오른답니다
쇼윈도에 걸린 입술을 무심코 바라보다
놀라기도 하죠
화들짝
허리춤이 간지럽거나
내가 나를 보고 싶을 땐
벨리 댄스를 춥니다
원피스
리본 장식 원피스를 옷장 깊이 걸어 두었어 드레스 실루엣이 어울리는 여자를 찾기로 하고 말이야 두고 온 가는 연사와 촉감이 눈에 밟혀
앨런이란 무용수가 유대 왕을 무너뜨릴 때 입은 누군가 그런 옷을 입고 숲을 흔들면 수만 마리 여치 소리를 들려 줄 거야
하이힐은 파스텔 톤으로 할까 원피스엔 끈 달린 에나멜 소재가 어울릴 거야 사는 김에 벨벳 구두도 챙겨야지
옷들이 늘어날수록 야릇해지는 기분 밤마다 꺼내 입어보고 싶은 마음 온종일 우울해하다 하늘을 보았어 오렌지 나무 숲에서 여치들이 떼 지어 날아올랐어
몇 해가 지나도록 옷의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지 아무래도 내 바늘귀를 꿰어 줄 여자는 이곳에 없는 듯 싶었어
어쩌면 이 옷은 어느 특별한 날 나를 기념하기 위해 온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원피스를 입었는데 치수를 잰 듯 몸에 쏙 들어가는 거 있지
어느 클럽에서 노란 머리 조소코를 알게 됐는데 그녀에게 친구가 되어 달라 말할 생각이었어 그녀는 동그란 눈으로 붉은 단추들을 바라보겠지
내게 원피스를 입히고 구두를 신기면 영혼은 자지러질까
어디든 맥박을 짚으러 가야 해
립스틱, 핑크, 스위트
이건 외국의 한 미망인에 대한 이야기야 처음 화면에서 본 그녀는 뚱뚱하고 조금은 무기력한 표정의 노인이었어 남편을 잃고 외톨이가 된 그녀는 딱딱해진 잼에 식빵을 찍어 먹고 하루를 시작해
아만다, 왜 매일 같은 빵을 먹는 거지? 이어폰에 대고 카운슬러가 말을 건넸어 카운슬러는 그녀에게 일거리를 찾아 주고 싶어하지 아만다,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 줘 뭐든 도와줄 게
그녀는 조심스레 친구를 사귀고 싶다고 해 아니 아니, 주머니 속 꼬깃꼬깃 접어 둔 표정 하나를 가만히 꺼내 보였어
며칠 뒤 아만다는 외출 준비를 해 몇 번이나 옷을 바꿔 입고 립스틱도 여러 번 지웠다 칠했다 하지 우산을 쓰고 그녀는 마을에서 오마일 쯤 떨어진 바로 향했어
그곳엔 레즈들이 색색의 옷을 입고 맥주를 마시고 있었지 그녀는 눈을 어디에 둘지 몰라 화장실에 붙여 두었어 밖으론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을 것 같았지
그러지 말고 아만다, 자신 있게 말을 건네 봐 이어폰에 대고 카운슬러가 계속 속삭였어 안녕? 난 아만다야 세면대 앞에서 손을 씻고 있던 노인에게 진땀을 흘리며 말을 건넸지 태어나 처음으로 그녀가 자신의 표정을 갖게 된 날이었어
지금도 그녀가 줌 아웃 될 때의 얼굴을 기억해
비껴든 햇살이 이불 속으로 잘게 스며들고 있었어 팔에 링거를 꽃아 힘겨워 보였지만 표정 만큼은 맑고 잔잔했지 옆에선 바에서 처음 말을 받아 준 친구가 오래도록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어 얼핏 설국의 한 장면이 떠올랐지
백년 전 눈의 고장으로 가는 기차 안, 한 여자가 병든 애인의 머리칼을 하염없이 쓸어 넘겨주던*
*장혜령 시 「눈의 손들」
【작품론】변장의 쾌락과 퀴어적 상상력
- 이사과의 신작시 『킹키 부츠』, 『원피스』, 『립스틱, 핑크, 스위트』를 중심으로 / 김주원(문학평론가)
이사과의 『킹키 부츠』는 뮤지컬 '킹키 부츠'가 퀴어queer 서사라는 것을 알면 이해하기 쉽다. '킹키 부츠'는 드랙퀸(여장남자)의 상징이면서 작품 속 두 남자의 우정과 연대를 매개하는 소재이다. 뮤지컬이 드랙퀸과 동성애에 관한 편견을 걷어낸다면 이사과의 시적 화자는 늦은 밤 변장으로 여성적 기호들을 향유한다.
늦은 밤 변장을 하고 산책을 나갔어요
한참을 걷다 연못이 보이는
풀밭에 앉았지요 치마를 올리고
연못에 비친 흰 살결
흐릿한 적막을 저어봤어요
내 몸엔 또 다른 형상이 어른댔지요
살갗을 비비면서 우린 서로 알게 됐어요
여자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남자에게 마음 준 적 없구요 그런데
발목까지 감싸주는 치마가
속주름을 확 펴준다는 거 아세요
혼자서도 뜨거워질 수 있다는 거
『킹키 부츠』 부분
이사과 시의 화자는 뮤지컬의 인물을 흉내내는 트랙퀸이다. '치마를 올리고/ 연못에 비친 흰 살결/ 흐릿한 적막을 저어봤어요"라고 말하는 화자는 여성의 젠더를 연기함으로써 젠더의 자리바꿈에서 오는 쾌락을 느낀다. '흐릿한 적막'은 흔히 통용되어 온 성적 지표들이 사실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한다. 트랙퀸의 신체는 남성이면서 여성의 기호들에 둘러싸여 있다. 연못에 비친 몸은 젠더가 일종의 퍼포먼스performance라는 것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흐릿한 적막' 역시 꽤 적절한 표현이다. '흐릿한 적막'을 저어놓음으로써 화자는 고정된 성 개념을 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주디스 버틀러가 말했듯 젠더는 허구적인 구성물이다. 섹스와 젠더는 실체가 없는 환상이므로 반복적인 수행을 통해 만들어지며 드랙퀸처럼 패러디될 수 있다.
'킹키 부츠'는 젠더의 수행성을 드러내는 장치이다. "내 몸엔 또 다른 형상이 어른댔지요"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젠더 개념의 모호성 때문이다. 드랙퀸은 여장남자로서 모호한 정체성을 갖고 있다. "여자가 되고 싶은 생각도, 남자에게 마음 준 적도 없는" 화자의 정체성은 성의 이분법을 따르지 않을 뿐 아니라 성적 고정관념을 벗어난다. "혼자서도 뜨거워질 수 있"는 화자의 쾌락을 남성 혹은 여성의 기준으로만 생각하기는 어려운 것이다.『킹키 부츠』의 화자는 젠더를 연기하는 퍼포머performer이다. 그(그녀)는 밝고 경쾌하게 성을 유희함으로써 젠더 이분법을 가로지르는 존재인 것이다. 이 시에 등장하는 '킹키 부츠', '쇼윈도', '밸리 댄스'가 뮤지컬의 요소라는 점은 젠더를 둘러싼 기호들이 전시 효과에 불과하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이사과의 시는 퀴어적 상상력이 돋보인다. 『원피스』의 화자도 리본 장식 원피스를 옷장 깊이 걸어두지만 그녀가 여자인지는 알 수 없다. '원피스', '하이힐', '벨벳 구두' 등 여성의 소품과 생물학적 성은 아무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옷들이 늘어날수록 야릇해지는 기분"은 『킹키 부츠』에서 연못에 비친 몸을 보는 화자의 정서와 유사한 것이다. 이 시의 화자는 클럽에서 만난 조소코女装子, 즉 여장남자의 친구가 되고 싶어한다. '원피스'는 여성적 기호지만 퀴어들의 관계에서 중요한 매개가 된다. '원피스'는 기존 젠더 개념에서 탈각되어 퀴어적 기호로 전유되고 있는 것이다.
『립스틱, 핑크, 스위트』는 액자식으로 구성된 퀴어 서사이다. 화자는 외국의 미망인 아만다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남편을 잃고 외톨이가 된 무기력한 아만다는 "주머니 속 꼬깃꼬깃 접어둔 표정 하나"를 갖고 있다. 그녀의 외출, 다시 말해 레즈들이 모인 술집에 간 아만다는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의 표정을 갖게" 된다. 아만다는 레즈비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숨긴 채 살아오다 비로소 맑고 잔잔한 미소를 짓는다. 「립스틱, 핑크, 스위트」는 아만다의 외출과 커밍아웃coming out의 의미를 교차시키고 있다.
이사과의 시는 퀴어 담론, 구체적으로 성소수자의 관점과 목소리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성소수자의 정체성은 문화의 장에서 주류라고 할 수는 없지만 소수자의 인권과 문화적 다양성이라는 시대적 변화 속에서 부각되고 있다. 이사과의 시들이 뮤지컬과 영상물 등 대중문화를 차용하고 있다는 점은 '퀴어'의 달라진 위상과 관련된 것이기도 하다. 현대시에서 퀴어적 상상력은 '소수적인 것'이다. 그것은 단지 비중이 적고 주류에 비해 열세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주류의 가치를 상대화하고 새로운 인식과 미학을 창안할 수 있는 능력, 퀴어적 상상력의 가능성은 그 능력에 달려 있다.
이사과의 시에서 '퀴어'는 이제 유희의 대상으로 변모했다. 그것은 지금 문화 장의 최전선에 있는 주제이며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한 영역이다. 변장이 낯선 쾌락의 무대가 되는 것은 그 무대의 뒤편까지 같이 볼 때 온전해진다. 이 점에서 이사과 시의 퀴어적 상상력은 기존의 고정관념이 어떤 타자들을 만들어냈는 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열린시학 2024년 여름호》
첫댓글 영감을 주는 좋은 작품입니다. 잘 감상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거침 없이 세계관을 확장하는, 도발적이며 긴장감을 놓치지 않는 시편들
잘 감상했습니다.
이사과 시인님의 활발한 활동을 응원합니다.
감사합니다^^
니체님 좋은 시 잘 읽었습니다.
톡톡 개성 있는 시이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