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방문 장소는 임진왜란때 한국에 귀화한 일본인 조선장수 김충선 유적지 답사하였습니다.
김충선(金忠善, 1571~1642)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 장수의 선봉이 되었다가 조선에 귀화하여 일본 공격에 앞장을
선 특이한 경력을 가진 인물이라고 하네요.
임진왜란 때 한국에 귀화(歸化)한 일본인.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의 좌선봉장으로 내침하였으나, 곧바로 경상도병마절도사 박진에게 귀순하였다.
본관 김해. 자 선지(善之). 호 모하당(慕夏堂). 본명 사야가(沙也可).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좌선봉장으로 내침하였으나, 곧바로 경상도병마절도사 박진(朴晉)에게 귀순하였다. 누차 큰 공을 세워,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받았다. 이어 도원수 권율(權慄), 어사 한준겸(韓浚謙)의 주청(奏請)으로 김해 김씨성과 충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으며 임금이 하사한 성씨라고 해서 사성 김해 김씨라고 부른다. 정유재란 때 전투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그 뒤 오랑캐의 침입으로 변경이 소란하자, 자청하여 10년 간 국경방어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정헌대부(正憲大夫)가 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부장(副將) 서아지(徐牙之)를 잡아 죽인 공으로 사패지(賜牌地)를 하사받았으나, 사양하고 수어청의 둔전(屯田)으로 삼게 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소명(召命)을 기다리지 않고, 광주(廣州) 쌍령(雙嶺)싸움에 출전하여 오랑캐 500여 명을 베었다. 화의(和議)가 성립되자, 통곡하여 대구의 녹리(鹿里)로 돌아갔다. 진주목사 장춘점(張春點)의 딸과 혼인하여 우록동(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에 정착하여 살면서 가훈 ·향약 등을 마련하여 향리교화에 힘썼다. 문집에 《모하당문집》이 있다.
김해 김씨를 하사 받아서 김수로왕 후손인 진짜 김해 김씨는 좀 그럴것 같다고 생각했는데요.
임금의 명이니 어쩔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모하 김충선 선생의 약사내용 입니다.
신도비 이구요.
달성 한일 우호관을 만들어 통신사들의 내용과 귀화한 일본인에 대한 상세한 것을 알 수 있게 해 놨네요.
여기가 녹동서원은 시간 관계상 못 봤습니다. 다음에 꼭 한번 들러 보겠습니다.
녹동서원(鹿洞書院)은 모하당(慕夏堂)김충선(金忠善)[1571~1642]을 추모하기 위하여 1794년(정조 18)에 건립되었다. 김충선의 자는 선지(善之), 호는 모하당(慕夏堂)이다. 본래 일본인으로 성은 사(沙), 휘는 야가(也可)이다. 임진왜란 때 귀화하여 공을 세웠다. 선조로부터 사성(賜姓) 김해 김씨(金海金氏), 충선이라는 이름을 하사 받아 사성 김해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에 거주하며 가훈 및 향약 등을 제정하였다. 저서로는 1798년(정조 22)에 간행한 『모하당집(慕夏堂集)』이 있다.
사야가(沙也加 또는 沙也可)는 1571년(선조 4) 1월 3일 일본에서 태어났다. 일본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1592년(선조 25)에 처음으로 조선의 땅을 밟게 되었다. 이때, 사야가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휘하의 선봉장이었으며, 3000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조선에 왔다. 그런데 그는 불과 며칠 만에 조국 일본을 향해 돌진하는 조선의 장수로 변해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에 귀화한 조선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당시 왜군 중에는 조선에 투항해 왜군과 맞서 싸운 이들이 있었다. 조선에 투항한 일본인을 ‘항복한 왜군’이라 하여 ‘항왜(降倭)’라 칭했다. 항왜는 적의 사정을 정확히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고, 조총을 비롯한 일본의 무기 관련 기술을 전수해주는 등 여러모로 유용한 존재였다. 보통 항왜는 전황이 좋지 못해 투항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사야가는 그들과 달랐다. 그는 조선을 동경하여 처음부터 투항을 결심하였다고 술회하고 있다.
위의 글은 사야가가 남긴 자전적 가사 <모하당술회가(慕夏堂述懷歌)>의 제1단 부분이다. 사야가는 넓디넓은 천하에서 어찌하여 오랑캐의 문화[좌임향ㆍ격셜풍]를 가진 일본에 태어났는가에 대해 탄식했으며, 그래서 아름다운 문물을 보기를 원했다. 그러던 중 가토 기요마사가 조선을 정벌하러 가게 되면서, 그는 선봉장으로 임명되었다. 사야가는 이 전쟁이 의롭지 못한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예의지국 조선을 한번 구경하고자 선봉장이 되어 조선에 오게 되었다. 이때, 그는 맹세코 다시 일본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을 마음속으로 결단했다고 표현하고 있다. 즉, 예의의 나라 조선을 흠모하다가 가토의 선봉장이 되어 출정함에 귀화의 결단을 내리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후에 그가 조선의 예의(禮義)와 문물을 사모하여 당호를 ‘모하(慕夏)’라고 한 것1)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 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고국(故國)을 떠나는 사야가의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던 것 같다. 그것은 "친척을 이별며 칠(七)형제 두 안을 일시에 다 나니 슬푼 마 셜은 지 업다면 빈말이라" 2)라고 한 것에서 잘 나타난다. 여러 가족들을 떠나는 아픔을 겪어야 했지만, 사야가는 조선에 귀화하고자 하는 열망을 꺾지 않았다. 그는 귀화의 이유로 크게 두 가지를 들었다. 하나는 요순삼대(堯舜三代)의 유풍을 사모하여 동방 성인(聖人)의 백성이 되고자 함이며, 또 하나는 자손을 예의의 나라의 사람으로 계승하기 위해서였다.3)
조선의 장수 ‘김충선(金忠善)’으로 다시 태어나다
사야가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가토 휘하의 선봉장으로 왔다가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朴晉)에게 귀순하였다. 귀순한 후, 순찰사(巡察使) 김수(金睟) 등을 따라서 경주ㆍ울산 등지에서 일본군의 침공을 막아내는 데 공을 세웠다. 원래 적진의 선봉장으로 활약했던 만큼 적의 동향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는 이러한 전공을 가상히 여긴 조정으로부터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 받았다.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에는 사야가의 뛰어난 전공을 인정한 도원수 권율(權慄), 어사 한준겸(韓浚謙) 등의 주청으로 성명(姓名)을 하사받았으며,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다. 사야가가 조선인 ‘김충선’으로 거듭 태어나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선조는 “바다를 건너온 모래(沙)를 걸러 금(金)을 얻었다”며 김해 김씨로 사성(賜姓)하였다4). 이름은 충성스럽고 착하다는 ‘충선(忠善)’으로 지어졌다5). 이처럼 임진왜란 기간 동안 조선에서는 일본 출신 귀화인들에게 벼슬을 내리기도 하고, 성씨와 이름을 부여해 조선에 정착하는 것을 적극 권했다. 이때, 이름은 충선 이외에 향의(向義: 의를 향함), 귀순(歸順: 순하게 돌아옴) 등으로 정해졌다.
김충선은 왕명으로 벼슬과 성명이 내려지게 되자, 그 기쁨을 <모하당술회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헌계(姿憲階) 사성명(賜姓名)이 일시에 특강(特降)니 어와 성은(聖恩)니야 갑기도 망극다 이 몸 가리된들 이 은혜 갑플소냐"모화당술회가
성은이 망극하여 자신의 몸이 가루가 되더라도 은혜를 갚겠다는 그의 의지가 엿보인다. 이어서 그는 죽을힘을 다해서 적진을 파멸하고 왕에게 은혜를 갚은 후에 연회를 열겠다고 다짐하였다.
김충선은 전쟁에서 이기려면, 무엇보다도 무기가 좋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조선의 무기를 돌아보니 정밀함이 적어, 이 병기를 가지고서 적을 격파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알고 있던 조총과 화포 등 일본의 무기 제조 기술을 널리 전수하여 전투에 활용코자 했다. 그가 임진왜란 당시 이덕형(李德馨)ㆍ정철(鄭澈)ㆍ권율(權慄)ㆍ김성일(金誠一)ㆍ곽재우(郭再祐)ㆍ이순신(李舜臣)과 주고받은 편지에는 조총 등의 보급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통제사 이순신에게 보낸 답서를 예로 살펴보자6).
하문하신 조총과 화포에 화약을 섞는 법은, 지난번 비국(備局)의 관문(關文)에 따라 이미 각 진영에 가르쳤습니다. 이제 또 김계수(金繼守)를 올려 보내라는 명령이 있사오니, 어찌 감히 따르지 않겠사옵니까.김충선, <통제사 이순신 공께 답하는 글>
이순신이 조총과 화포 및 화약 제조법을 물은 데 대해서 김충선이 쓴 답서이다. 이후에도 김충선은 화포와 조총을 만들어 시험한 후, 각처에 보급하여 전력을 강화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7). 조선으로의 귀화를 받아주고 특별히 벼슬과 이름을 하사해 준 데 대한 고마움의 보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66세까지 전쟁터를 누비다
김충선은 임진왜란 이후에도 조선에 충성하는 한결같은 모습을 보였다. 전쟁 후에 그는 우록동(友鹿洞)에 터를 잡고 생활했지만, 조정에 변고가 생기면 자원하여 전쟁터로 나와 싸웠던 것이다. 정유재란과 이괄의 난 및 두 차례의 호란(胡亂) 등에서 활약했던 김충선의 모습을 살펴보면, 그의 충심을 가늠해 볼 수 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시기에 김충선은 손시로(孫時老) 등 항복한 왜장과 함께 의령(宜寧) 전투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당시에 왜적 만여 명은 산음(山陰)에서 곧바로 의령으로 내려가 정진(鼎津)을 반쯤 건너고 있었다. 이때, 김충선은 명나라 병사 수십 명과 전사(戰士) 등과 합세해 왜적에게 맞섰다. 조선의 군병은 기세를 떨치며 싸웠으나, 곧 왜적의 습격에 빠져들고 말았다. 왜군이 마병(馬兵)으로 추격하여 포위를 하자, 조선 군병과 명나라 병사가 함께 포위된 위기 속에서 포위를 무너뜨릴 수 있었던 데에는 항왜들의 힘이 컸다. 당시의 전투에서 김충선도 적의 수급(首級)을 베었던 것이 확인된다.
…… 명나라 병사와 항왜 등의 참급(斬級)은 많게는 70여 급인데 분주하게 진퇴하는 동안에 거의 다 흩어져 없어졌으며, 명나라 병사는 두 급을 베고, …… 항왜 동지(同知) 요질기(要叱其)ㆍ항왜 첨지(僉知) 사야가(沙也加)ㆍ항왜 염지(念之)는 각기 한 급씩을 베었다. 그리고 왜기(倭旗) 홍백ㆍ흑백의 크고 작은 것 3면(面)과 창 1병(柄) 칼 15병, 조총 2병, 소 4마리, 말 1필과 포로가 되어 갔던 우리나라 사람 1백여 명을 빼앗아 오기도 하였다.[선조실록] 1597년(선조 30) 11월 22일(기유)
이 시기에 김충선은 김응서(金應瑞)의 휘하에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상관에게도 의리를 지키는 면모를 보였다. 명나라 제독(提督) 마귀(麻貴)는 왜적의 꾀에 넘어가 명나라 병사를 위험에 처하게 한 김응서를 엄격하게 군율로 다스리려 했다. 그러자 김충선은 자신이 전공을 세우면 김응서의 죄를 용서해 줄 것을 청하는 군령장(軍令狀)을 보냈다8). 그리고 실제로 3개월 후인 1598년(선조 31) 1월 울산 증성(甑城, 島山城)에서 왜적을 대파하여 일을 무마시켰다.<모화당술회가>에
부분에서 이때의 일을 확인해 볼 수 있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의 주동자 이괄(李适, 1587~1624)은 임진왜란 때 전투 경험이 있는 항왜 출신들을 선동하여 동원하였다. 당시 이괄의 부장(副將)은 항왜 서아지(徐牙之)였는데, 54세의 김충선은 서아지를 김해에서 참수(斬首)하는 전공을 세웠다. 이때, 조정에서는 공을 인정하여 사패지(賜牌地)를 하사하였다. 그러나 김충선은 이를 극구 사양하고 수어청(守禦廳)의 둔전(屯田)으로 사용케 하였다9).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서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영장(領將) 김충선(金忠善)이라는 자는, 사람됨이 용맹이 출중할 뿐만 아니라 성품 또한 매우 공손하고 조심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괄의 난 때에 도망친 항복해 온 왜인을 추포(追捕)하는 일을 그 당시 본도의 감사로 있던 자가 모두 이 사람에게 맡겨서 힘들이지 않고 해결할 수 있었으니, 진실로 가상합니다.[승정원일기] 1628년(인조 6) 4월 23일(갑인)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도 김충선은 토병 한응변(韓應卞) 등과 함께 자원군으로 나와 전투에 임하였고, 이로 인해 상당직(相當職)에 제수되었다10).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에는 66세의 노구를 이끌고 전투장에 나와 광주(廣州) 쌍령(雙嶺)에서 청나라 병사를 무찔렀다. 22세에 조선에 귀화해 온 이후부터 66세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전쟁터에 나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싸웠던 것이다.
김충선은 나라에 대한 충심을 자손들에게도 강조하였다. 그는 1600년(선조 33) 인동(仁同) 장씨 진주목사 장춘점(張春點)의 딸과 혼인하여 여러 자식들을 두었는데, 자손에 훈계하기를 영달(榮達)을 탐하지 말고 효제(孝悌)ㆍ충신(忠信)ㆍ예의ㆍ염치를 가풍으로 삼아 자자손손에게 계속 전할 것을 당부하였다.
김충선은 1642년(인조 20) 9월 30일, 72세의 나이로 경상도 달성군 가창면 우록(友鹿) 마을에서 세상을 떠나 삼정산(三頂山)에 장사 지내졌다. 우록마을 입구를 지나면 녹동서원(鹿洞書院)이 있으며, 서원 뒤에 김충선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녹동사가 있다. 서원과 사당은 김충선 사후 유림에서 조정에 소를 올려 지었다. 그의 6대손 김한조(金漢祚)는 김충선의 생애를 정리하고 유작을 모아 문집을 간행했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등에 소장된 [모하당집(慕夏堂集)]이 그것이다.
이미 우리 역사가 된 귀화인들
김충선의 위패를 모신 녹동서원.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에 위치해 있다. <출처: Ktneop at ko.wikipedia.org>
김충선처럼 우리나라에 귀화해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은 많다. 과거제도를 고려에 처음 도입하게 한 후주(後周) 출신의 쌍기,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에 크게 기여한 이지란, 조선 인조대 표류한 후 ‘박연’으로 이름을 바꾸고 조선의 화포 개발에 도움을 준 네덜란드 출신의 귀화인 벨테브레 등이다.
귀화인의 역사는 과거 속에서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여전히 진행형인 사안이라는 점에서 보다 주목된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탁구 종목에서는 유독 눈에 띄는 선수가 있었다. 2007년 한국 국적을 취득한 중국 출신 귀화 선수 당예서(중국명: 唐娜). 중국 탁구 국가 대표로 뽑히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과 같아서 조국을 등지고 결국은 태극 마크를 달았다. 비단 당예서 뿐만이 아니었다. 탁구 국가 대표로 출전한 선수 중에는 싱가포르, 미국 등에도 원래 중국 국적의 선수가 많았다. 수십년 전 프로 축구 대표팀 골키퍼로 명성을 날린 샤리체프도 러시아 국적을 버리고 한국인 ‘신의손’이 되었다. ‘신의손’은 축구 훈련장이 있던 구리를 본관으로 하여 구리 신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후에도 프로 농구, 프로 축구 등 스포츠 분야에서는 귀화 선수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있다.
법무부 추산에 따르면 2011년 현재 귀화인은 11만 명을 넘는다. 귀화인이 급증하다 보니 귀화 성씨도 400개 이상이다. 몽골 김씨, 태국 태씨, 독일 이씨, 대마도 윤씨, 길림 사씨, 청도 후씨 등이 등록되어 있다. 귀화인들이 한국식 성을 따르면서 자신의 출신 지역을 본(本)으로 남기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도 흥미롭다. 외국 출신이지만 한국 국적으로 또 다른 역사를 만들어갈 인물의 탄생을 기대해본다.
[네이버 지식백과]김충선- 일본군 선봉장에서 조선의 장군으로 변신하다 (인물한국사, 신병주, 장선환)
본디 가토 기요마사의 좌선봉장을 맡았으나 조선에 들어온 이후 경상도 병마 절도사 박진에게 2000명의 병력과 일가를 데리고 귀순하였고, 이후 조선군으로서 주로 의병과 함께 활약하거나, 조총 제작법을 전수하는 등 여러 도움을 주었다. 다만 일본에 있을 때의 지위나 본명 등이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귀순 이유는 명확치 않다. 허나 그가 집필한 가사 모하당술회록에서는 "명분 없는 전쟁을 일으킨 왜군에 환멸을 느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5]
귀순 이후 사야가는 경상도 지역의 의병들과 함께 힘을 합쳐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고, 곽재우(郭再祐)와 연합하기도 했다. 의병 및 조선군 장수로서 모두 78회의 전투를 치렀으며, 이때 전공을 세워 정3품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손시로(孫時老) 등 항복한 왜장(倭將)과 함께 의령(宜寧)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무관 3품(三品) 당상(堂上)에 올랐으며, 이어 사야가는 울산성 전투에 경상도 우병사 김경서(金景瑞) 휘하로 울산왜성에 농성 중이던 가토의 1군을 섬멸하는 공을 세웠고,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를 하사받기도 했다.이후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 어사 한준겸(韓浚謙)의 주청(奏請)으로 선조로부터 성명(姓名)이 하사되고 하인 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로 가자되었다. 벼슬로 보건데 논란(아래 참조)에도 불구하고 인정할 만한 전공 자체는 있었으며, 조선 조정 역시 이것을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또, 항왜 출신에게 벼슬을 내려 대외적으로 항왜 집단에게 포상을 하고 치하하는 의미도 있었을 것이다.
학계에선 조선 내 조총을 이순신이 보급한 걸로 보지만 당시 김충선과 이순신 사이의 서신[6]에서 김충선이 "이미 조총을 개발하여 훈련하고 있다."라고 한 기록이 있는 걸로 보아 개발과 양산 자체는 김충선이 한 것으로 보인다.애초에 일본에서도 조총 부대 지휘관 출신이기에 조총과의 인연이 참으로 깊었기 때문인지, 20세기 들어 김충선의 집을 수리하다가 담장 속에 감춰진 조총을 발견하기도 했다[7].
남풍이 때때로 불제 고향을 생각하니 조상의 무덤은 평안한가 일곱 형제는 무사한가 구름을 보며 고향을 생각하는마음과 봄풀을 보고 솟아오르는 생각이 어느 때인들 없을소냐 아마도 세상에 흉한 팔자는 나 뿐인가 하노라
선조로부터 성을 받았는데 성은 모래(沙)에서 나오는 금(金)에서 따와[8]김해 김씨를 받았는데 가야수로왕계인 김해 김씨와 구별하기 위해 '사성(賜性 : 하사받은 성) 김해 김씨'라 부른다. 김충선이 낙향 후 현재의 대구광역시달성군가창면 우록리(友鹿里)에 사슴을 벗하여 살았기에 우록(友鹿) 김씨라고도 한다. 이 우록이란 지명은 김충선이 직접 지은 지명으로 이곳은 현재까지도 사성 김해 김씨들의 집성촌이 조성되어 있다. [9] 이 지역에는 김충선의 사당인 녹동 서원이 있는데, 뒷편 산 중턱에는 김충선의 묘가 있고 옆편에는 달성 한일 우호관이 있으며 일본에서 일본인 관광객이 한 해 천 명 정도 온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 북방 경비를 위해 북방에서 근무하였으며, 이 공로로 정2품 상 정헌대부 벼슬을 받는다. 이괄의 난때 이괄 군에 항왜들이 많이 가담했다가 토벌당했는데, 그 중 무예가 뛰어난 서아지(徐牙之)라는 항왜는 도저히 조선군이 잡을 수가 없었다. 그때 김충선이 서아지를 만나 잘못을 꾸짖은 후 목을 베었다고 한다. 그 공으로 땅을 받았으나 군대의 둔전으로 사용하라고 다시 반납했다. 여기서 왜 참전했냐면 이괄의 반란군은 항왜가 가담하여 되어 반란을 일으켰다. 조정에서는 이러한 항왜를 배은망덕한 놈들이라 분노하였고 가담도 하지 않았지만 같은 동족인 항왜가 역모에 가담한걸 보면 자신의 결백과 의심의 눈초리를 씻기 위해 공을 세워 그 의심을 풀어야 했다. 그 후 병자호란 때 쌍령 전투에도 참전하여 청나라군 500기를 죽였으며 조선 조정이 항복하자 통곡하였다고 한다. 1643년 외괴권관(外怪權管)으로 국경 수비를 맡고 있던 중, 명나라와 밀통하였다가 적발되었는데, 청나라의 칙사가 김충선과 그와 함께 밀통한 이들을 꾸짖고는 특별히 용서하였다. 이후 해직되어 대구(大邱) 녹리(鹿里)로 돌아왔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우록동에 은둔,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2008년 초까지만 해도 '일본에서 이름이 뭔지 알 수 없다'였던 내용이 2009년 들어 '존재 자체가 의심스럽다'며, '현재 사야가의 자손이라 자칭하는 일족이 살고 있다'는, 후손들이 보면 분개할 만한 내용으로 바뀌어 있었으나 과격한 표현이 완화되었다. 일제 강점기의 식민 사관은 조선 왕조 실록 등 조선의 기록을 마구잡이로 폄하했고, 일본 학자들은 김충선에 대해 조선에서 지어낸 가공의 인물로 생각하는 경향이 짙었다. 한마디로 학술적으로 수준이 매우 낮을 뿐더러 이미 70여년 전에 유효하지 않은 것으로 판정난 구닥다리 학설에 근거해서 작성되어 있다는 얘기다. 현실은 집성촌 후손들의 유전자 검사에서 한국인과 다른 일본인의 유전적 특징이 발견되어 KBS 역사스페셜에서 방영되기도 했다.
사실 이것은 일본 위키 백과의 역사 문서들에서 늘 드러나는 고질적 문제점이다. 극도로 편향되고 학문적인 수준이 의심되는 자료, 논문들을 다분히 의도적으로 인용하고, 사료에서도 혐한들의 입맛에 맞는 부분만 취사선택하거나 단어 한두 개를 변조 / 날조해서 전체의 맥락을 왜곡하는 등 지극히 악질적인 방법으로 위키 백과를 뒤틀어놓고 있다. 일본의 웹은 한국 웹과 달리 자정작용이 거의 되지 않으며, 만일 한다 해도 집착심이 심한 넷우익들에 의해 곧바로 원상복귀되기 때문. 실제 일본 사학계에서는 이와 정반대로, 전전의 사관과 분위기에서을 탈피하려는 노력이 있었고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임진왜란에 대한 연구가 상당히 진보했다. 특히 나카무라 히데타카 같은 학자는 <조선왕조실록>은 물론 <모화당문집>도 사실에 근거한 부분이 많다고 보면서 사야가를 실존 인물로 학계에 널리 알려서 이미 사야가 실존은 수십년 전에 정설로 인정받은 지 오래다. 여기에 대중적인 인지도가 매우 높은 문호 시바 료타로가 사야가에 관한 수필을 쓴 것으로 인해 우록동에는 일본인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을 정도.
즉, 사야가에 대한 위키 백과의 폄하적 서술은 학술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이미 수십년 전에 폐기된 것으로, 일본 사회의 여론과 전혀 다르다는 좋은 증거다.
후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일제 강점기 당시 혹심한 폭력은 없었지만 우록동에 일본 경찰들이 오거나 매국노, 비국민의 후손이라며 매도하는 등 후손들을 귀찮게 한 적이 많다고.
일본에도 가족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에 귀화한 뒤에도 일본에 남겨둔 가족을 그리워 하며 지은 시가 몇 편 남아 있다. 하지만 그가 전향한 죄로 몰살당한 것인지 직계든 방계든 간에 현재 일본에서 그의 후손을 자처하는 일족은 없다고 한다.[10] 그래서 현재 확인된 그의 후손은 조선에서 새로 가정을 꾸린 뒤 태어난 자식들과 그 자손들 뿐이다. 한때 한국의 후손들이 조선 사기장 자손들을 찾는 움직임과 더불어 일본에서 그의 후손을 찾으려 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고. 사실 아래에서 서술하듯이 김충선이 일본에서는 누구였는지 정체조차 불분명한 상태라 일본에서 후손을 찾으려고 해도 큰 의미는 없을 것이다.
시조가 일본인이라 그런지 사성 김해 김씨는 조선 후기 족보 위조의 파도 속에서도 사칭당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쇼와 덴노 연간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상적 귀순자.[11] 노부나가 쪽 가신의 일족이 아닌가 하는 설도 있다. 오다 노부나가 사망 이후 히데요시가 정권을 잡으면서 노부나가의 가신들을 대부분 숙청시켜 반감을 많이 사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병사 직전에도 이들의 원한이 두려웠던지 남은 가족들의 안위를 도쿠가와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또 시바 료타로의 어느 에세이에서는 '사야가'라는 것은 이름이 아니고 일본어의 감탄사를 음차한 것이라는 설을 제시한 바 있는데, 그렇게 된다면 전혀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
스즈키 요시유키 《바다의 가야금》이라는 소설 때문에 사이카 마고이치란 설도 있지만 나이 때문에 그럴 가능성은 적고[12] 그 휘하의 철포 용병 집단인 사이카슈의 일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김충선 자신이 자를 선지(善之)로 지었는데, 일본 측의 기록에도 사이카슈(雑賀衆)에 스즈키 요시유키(鈴木 善之)(!)라는 이름을 확인할 수 있으며, 조선에 항복한 것까지 확인되어 있다.[13] 《바다의 가야금》은 김충선 = 사이카 마고이치 설을 바탕으로 한 소설. 단 바다의 가야금에서는 나이 문제 때문에 사이카 마고이치를 세습명으로 설정하고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이카 마고이치인 스즈키 시게히데의 아들을 주인공으로 설정했다. 사이카 마고이치가 세습명이라는 설도 있으니 크게 틀린 것은 아니다.
오카모토 에치고 한편 네임드 항왜인 오카모토 에치고(岡本越後)가 김충선이라는 설도 있다. 키타지마 만지와 심수관이 제기한 설로 창작물 중에는 안병도의 '일본정벌기', 김경진과 같이 쓴 소설인 '격류'에서 이 설을 채용하였다. 다만 위에 나온 사이카 집단 설도 포함해서 사이카 집단의 일원이었던 오카모토가 조선에 와서 항복했다는 것으로 설명했다. 임진왜란(김경진)에서도 이 설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오카모토 에치고는 울산성 전투 당시 조명 연합군에 속해서 군대를 이끌고 울산성에 화의 사자로까지 갔던 항왜이다. 조선 왕조 실록에는 항왜 월후(越後)를 사신으로 울산성에 보냈다고 나오며 일본 측 기록에는 8,000명을 이끄는 항왜 오카모토 에치고노카미가 항복을 요구하는 사절로 왔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좀 안습으로. 처음에는 당장 항복하라고 큰소리를 치다가 대화가 진행되자 일본을 버린 것을 후회하고 울면서 지금이라도 일본에 다시 귀순하고 싶다고 했다고 묘사되어 있다. 다만 일본 측 기록은 적당히 걸러 봐야 할 필요가 있는데, 울산성 전투 당시 일본군의 안습한 상황을 볼 때 항복을 받아내러 간 사람이 대화 도중 지레 쫄아서 다시 귀순하길 원하며 울었다는 것은 신빙성이 좀 떨어지기 때문.
하라다 노부타네 일본에서는 하라다 노부타네(原田信種)라는 설도 있다. 카토 키요마사의 가신들을 조사해 본 결과, 하라다 노부타네가 조총과도 관련이 있는 보급 관련 직책으로 임진왜란에 참가해서 조선으로 간 후 생사불명이 되었다는 것을 확인하였고, 이를 근거로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라다 노부타네는 울산성 싸움에서 전투 중 실종되었다는 설이 다수설이다.
아소씨 가문 가신 설 가토 기요마사의 영지인 구마모토는 원래 아소산을 섬기는 대신관인 아소씨 가문이 다스리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땅을 빼앗겼고 가토를 따라 강제로 출전하게 되었는데 그 아소 가문의 가신이 아니었겠느냐는 설이다. 위에 나온 오카모토 에치고가 아소 가문 사람이라는 기록이 있어서 주목받는 설이다. 특히 일본의 기록에 오카모토 에치고노카미 외에 아소미야 에치고노카미(阿蘇宮越後守)라는 항왜도 기록되어 있고, 아소 일족이 타이코 검지에 대한 반발 등으로 반란을 일으키고 당주인 아소 코레미츠(阿蘇惟光)가 가신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에 책임을 지고 처형당했다는 기록을 볼 때에 오카모토 에치고노카미가 아소 일족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는 설이다. 실제 조선과 일본의 기록이 맞아 떨어지는 것이 많기 때문에 최소한 오카모토 에치고노카미는 아소 일족일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키타지마 만지는 아소일족의 아소미야 에치고노카미 = 오카모토 에치고노카미 = 김충선으로 추정했고, 심수관은 사야가라는 이름 때문에 위에서 언급한 사이카 일족 연계설도 언급하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
1915년 일본인 연구자들의 모임인 '조선 연구회'는 사야가 문집인 모하당문집을 다시 간행한다. 책머리에 가와미 히로타미는 "적혀 있는 글은 위서이며, 사야가 같은 매국노가 우리 동포라는 것이 유감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고 단정했다. 1924년 역사학자 세데하라 탄은 "사야가에 관한 확실한 자료는 없다"며 허구의 인물이라고 했다.
당시 조선총독부 연구원이었던 나카무라 에이코는 현지 조사를 실시하고 1차 자료인 조선 왕조 실록과 승정원 일기를 통해 1933년 청구 학총에 논문 '모하당 김충선의 자료에 대해서'를 쓰면서 사야가가 실존했던 인물임을 증명하여 그 학설이 정당성을 얻고 있다.
해방 이후, 1965년 한일 국교 수립 후 일본 관광객들이 하나 둘 우록동을 찾으면서 1971년시바 료타로가 쓴 《가도를 가다. 한국기행》에 사야가와 우록리가 소개되면서 일본인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1999년에는 무려 1,500명이 찾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의 공영 방송인 NHK에서 <출병에 대의 없다, 히데요시를 등진 사나이>(1992년 3월 30일 방송.)라는 다큐멘터리를 내보냈는가 하면, 아사히 신문에서 "양식있는 무사의 의로운 결단" 등의 제목으로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14]
1988년 한국 중학교 3학년 도덕교과서에도 나왔으며, 일본의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서는 평화주의자, 인도주의자 등으로 묘사되어 실리기도 했다.
그 외 유명한 항왜 장수라면 여여문과 김성인(金誠仁: 사여모. 함박 김씨(咸博 金氏)의 시조)이 있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이런 인물이 있었다고 소개하고 그의 귀순 과정과 조선군에 총포 제작, 병과 육성 과정, 선조에게 성씨를 하사 받는 모습 그리고 이후 행적 같은 그의 일대기에 대해서 방영한 적이 있다.
신봉승에 의하면 박정희 정권 때 경제통인 "쓰루"[15]김학렬 경제 기획원 부 총리가 김충선의 후손이라고 한다. 역시 박정희 정권 때 내무 장관을 지낸 김치열(金致烈)도 김충선의 후손이다.
2010년에 웹툰 작가 칼카나마(본명:김찬희)가 다비드 실바가 한국계라는 설을 반박하기 위해 그린 웹툰 김실바 리포트에서 자신의 시조 할아버지가 일본인이며 자신은 13대 후손이라고 간접적으로 밝힌 바 있다. 우리 나라에 귀화한 일본인이 시조라는 것과 작가의 성이 김씨인 것을 감안하면 칼카나마가 김충선의 후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사야가의 일생에 관한 상세한 자료는 사야가 본인이 후일 집필했다고 알려진 <모하당문집>이 출처인데, 여기서는 사야가가 대병력을 이끌고 거의 상륙 직후에 귀순했다고 쓰여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여러 문제가 있어서 신빙성이 낮다는 주장이 있다.
사야가의 서신 내용 문제. 기록을 보면 일본인 무사인 사야가가 거의 조선인 유학자와 같은 모화 사상에 근거하여 화려한 문체로 조선의 백성들을 절대 해치지 않겠다는 방을 내걸고, 박진에게 조선과 중국의 문물을 흠모하여 항복한다는 절절한 서신을 올려 귀순했다고 하는데, 일본인 무사들의 지식 수준은 매우 떨어졌기에 승려들에게 이런 서류 업무를 대행시키는 실정이었을 뿐더러[16] 그 승려들도 조선, 중국식의 서식이나 문법과는 다소 거리가 먼 일본식 문장을 구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인 무사가 조선 유학자 같은 사상을 갖고 있거나 조선식의 유려한 문장과 서식을 구사할 정도로 문장에 능통했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아주 낮은 이야기다.
병력에 대한 기술 문제. 3천에 가까운 대병력을 이끌고 귀순했다면 당연히 일본 측에도 그에 따른 기록이 없을 리가 없고 전장의 상황에도 큰 영향을 끼쳤을 텐데, 그런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또한 그런 큰 병력을 이끌 수 있는 권한과 직위를 보유했다면 웬만한 다이묘급.[17] 전선에서 이탈했다면 기록조차 남지 않을 리가 없다.
항왜의 발생 시점 문제. 문집에는 사야가는 전쟁 자체를 나쁘게 보아 상륙 직후에 항복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초기의 조선군은 항복하는 왜군을 마구 죽이곤 했기 때문에 이 시기에는 항복자의 신상 안전이 보장되지 않았고, 애초에 전격전에 가까운 쾌속 진군을 거듭하던 개전 초기의 일본군이 항복할 이유가 현실적으로 전무하다고 봐도 좋은 수준이기 때문. <실록>에서 사야가 등 항왜에 대한 논의는 명군의 참전으로 전황이 일본군에게 크게 불리해지고 일본군의 사상자가 속출하던 계사년(1593년) 즈음에나 등장한다.
모하당문집의 신빙성 문제. 모하당문집은 본래 사야가가 쓴 기록이 분실되었는데 6대 후의 후손이 그것을 재발견하여 다시 간행했다라는, 몹시 수상한 단서가 붙어 있다. 실제로는 행장류 기록에 가깝다는 이야기인데, 행장은 후손들이 조상에 대한 숭모를 담아서 크게 미화하는 일이 잦은 기록이어서 이렇게 되면 신빙성에 한계가 생긴다.[18]
이런 문제들 때문에 모하당문집은 그 뼈대가 사실에 근거한 것으로 보이기는 하나[19] 세부 사항은 철저한 사료 비판이 필요하다. 따라서 사야가의 실제 투항 시점은 상륙 직후인 임진년이 아니라 상륙하고 나서 시간이 좀 흐르고 일본군이 불리해진 이후인 1593년으로 잡고, 실제 투항 동기는 단순히 생존을 위한 것이거나, 모종의 사정으로 인해 도요토미 정권이나 가토의 지배 하에서 생활할 수 없는 입장이었을 것으로 추측하는 견해가 많다.[20] 한국 여행기를 연재하던 도중 사야가에 관심을 갖고 집중적으로 파고든 문호 시바 료타로 같은 사람도 이런 설을 긍정하면서 '전국 시대의 상식에 비추어 보면 항복한 무사가 어제까지의 아군에게 활을 쏘는 것은 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야가도 분명 그랬을 것이다.'라고 했을 정도. 또 귀화한 인원수도 모하당문집에서 주장하는 수천명 규모가 아니라, 홀홀단신이었거나 부하를 이끌고 항복했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소수의 부하만을 이끌고 항복한 것으로 본다. 물론 이런 연구들이 사야가의 전공과 존재감을 깎아내리는 건 아니다.
일본인이었음에도 조선에 귀화해서 일본을 상대로 큰 공을 세웠다는 극적인 인생 때문에 영화나 사극의 주역으로 등장할 법도 하지만, 아직까지 김충선을 주인공으로 한 사극이나 영화는 없다.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한 사극에도 단역으로 아주 잠깐 나오는 정도에 불과했다.
2015년에 KBS 1TV에서 방영한 드라마 징비록에서는 가토 기요마사의 부장으로 등장했다. 가족들과 생이별해 전쟁에 참전하는 것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는 모습을 보이는 등 조선에 귀순하는 과정이 처음으로 그려졌다. 모화당문집과 실록 등을 최대한 비교하면서 그의 사상이나 항복 동기를 현실적으로 묘사하려 한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부분이지만[21] 제일 중요한 수천 명 규모 항복설을 여과 없이 수용하는 바람에 다소 우스꽝스러운 모양새가 됐다는 점은 아쉽다. 갑옷을 벗고 허겁지겁 도주하던 중 항복하려는 사야가를 보고 왜군의 추격으로 착각해 달아나는 이일을 쫓아가면서 조또마떼!를 외치는 장면 때문에 시청자들을 빵터지게 했다. 박진이 아니라 김수에게 투항하는 고증오류가 나온 건 덤.
전쟁소설데프콘 시리즈 제2부 한일 전쟁 편에서는 한국군이 북한 해군 특수부대를 동원해 노획한 해상자위대 이지스함 초카이를 이 이름으로 개명해 편입시켰다.
일본 만화가 쿠라시나 료가 <사야가 - 일한 센고쿠시대 에마키>라는 만화를 그린 바 있다.
안병도의 소설 <일본정벌기>에서는 조선이 반격하여 향후 일본 재침략의 불씨를 없애려는 내용으로, 항왜 출신이다 보니 여러 모로 활약을 크게 한다. 아직 자신의 세력이 부족해 천하를 얻지 못해 고심 중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몰래 접견하는 장면도 나오는데, 지금이라도 죽일 수 있다며 위협하는 이에야스에게 '제가 사이카 출신인 걸 잊으셨습니까?'라며 소매에 감춘 총을 겨누는 패기를 보여주기도 한다. 데프콘 한일 전쟁 편에서도 이 소설의 이야기가 나온다. 데프콘 시리즈에 참여한 작가 중 한 명이 안병도였기에 넣은 간접 홍보.
웹툰 칼부림 2부 마지막 장면에서 도포를 입은 뒷모습이 나왔고 3부 1화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역사대로 서아지 일행을 참살했지만 주인공인 함이와 그를 도와주는 취사병 덕만 아재 만큼은 살려주고 참수한 수급도 서아지와 고효내만 조정에 보낸다. 고효내의 대사를 빌면 "중화의 문물을 사모해서 어쩌고"라는 이유를 내세워 조선에 투항했다는데, 함이와의 대면에서는 "딱히 조선이 좋아서 귀순한 건 아니었고, 어찌 생각하면 충동적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고 본인이 말했다. 작중 대사로 미루어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해 깊은 원한을 가졌던 듯.
김경진, 윤민혁이 공동 집필한 소설 격류와 이 내용을 바탕으로 다시 쓴 임진왜란(김경진)에서는 회상 장면에서 등장했다. 이 작품에선 김충선을 사이카슈의 우두머리로 설정했다. 침공 초창기 우연히 서로의 부하들이 서로 다투는 것을 무마하는 과정에서 구루지마 미치후사와 만나게 되었다. 함께 술을 마셨는데 한때 구루지마 해적 무리와 사이카슈가 함께 했던 것을 언급하며 미치후사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리고 조선에겐 문화의 힘이 있다는 생각을 밝히고 조선에 항복했다.
웹소설 명군이 되어보세!에서는 임진왜란 전 노부가나와 척을 진 사나다 노부시게를 필두로 한 사무라이 1000여 명이 귀순할 때 같이 귀순, 북방에서 호란 중에 큰 공을 세운데다 마침 유배 와 있던 윤두수의 서녀와 눈이 맞아 윤두수의 사위가 되었다! 윤두수는 해서 4부가 모두 박살나고 조선이 대승을 거둔 뒤에 유배가 풀려 이조판서가 됐으니 인생의 승리자 확정.
2017년에 tvN에서 방영한 드라마 명불허전에도 등장했다. 김충선 역은 일본인 배우 타케다 히로미츠가 맡았다.
[1] 본래는 이름을 '沙包門'이라고 썼으나 沙也可로 잘못 읽은 것이 굳어졌다는 설도 있다.[2] 이 모하당 호는 김충선이 생전에 쓴 것이 아니라, 6대 후손 김한조가 모하당문집을 저술하면서 붙이게 된 것이다.[3] 임금이 하사하는 성씨.[4] 김해와 가까운 부산포를 통해 귀순했기 때문이라는 뉘앙스로 실록에 적힌 게 있다.[5] 그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에 불만을 품었던 반대파 세력 중의 하나였고, 출병하는 척 하며 귀순했다는 추측이 있다.[6] 모하당문집에 실려 있다.[7] 다만 이 물건이 정말 김충선이 쓰던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8] 즉 사금(沙金)[9] 집성촌의 후손들을 대상으로 유전자 조사를 해서 역사스페셜에서 방영한 적이 있었는데 실제로 일본인의 유전자가 나타났다.[10] 있다고 해도 왕씨 몰살 당시 개성 왕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신분세탁을 통해 사야가와 같은 가문 출신임을 숨기고 더 나아가 세대를 거듭하면서 사야가의 가문 출신이라는 자각마저 사라졌을 가능성이 높다.[11] 오오카 쇼헤이의 포로기에 보면 전적 전향 사회주의자인 동료가 필리핀 레이테에서 미군이 상륙하자마자 탈영해서 미군에게 투항하는 스토리가 나온다. 그를 일컬어 지칭하는 말.[12] 사이카 마고이치 = 스즈키 시게히데 설이 완전히 불가능한건 아니다. 스즈키 시게히데의 생몰 연대 자체가 일단 추정치이고, 만약 스즈키 시게히데 설을 따를 경우 93살에 사망했다는게 되는데 전국 시대 일본 측에는 호죠 겐안이나 미요시 마사카츠처럼 반올림해서 1세기를 산 인물들이 좀 있으므로. 물론 가능성은 낮다.[13] 출병 기록집에 출병했다는 기록은 있는데, 전사했다던가 돌아왔다던가 하는 기록은 없이 그냥 이름이 지워져 있다. 보통 조선에 항복한 인물들은 이렇게 처리.[14]NHK는 자민당과의 연계가 적은 편이고 따라서 자국의 우경화에도 변함없이 중립성을 유지하는 경향이 크다. 물론, NHK 관련 인사가 망언을 터뜨린 사례가 없진 않으나, 이것 가지고 'NHK는 우익 방송' 운운하기는 어렵다. 잠깐 뿐이지만, NHK 대하드라마야에의 벚꽃에서 주인공인 니지마 야에가 우익으로 돌변한 자신의 제자를 디스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는 등, 오히려 반(反) 우익적 성향이 더 강하다.[15] 학(鶴, 두루미)의 훈독. 술을 워낙 좋아하는 사람이라 결국 병을 얻어 위 대부분을 잘라내서 몸이 학처럼 말랐다는 데서 불리는 별명이었으며, 이름인 학렬(鶴烈)의 '학'을 훈독한 것이기도 하다.[16] 조선 시대 일본과의 사이에 오가는 외교문서들은 대부분 승려들이 맡아서 썼다.[17] 3천명의 병력이면 영지로는 대략 10만석 이상의 규모다! 이쯤이면 일본 본국에서도 김충선이 갖고있던 영지를 다른 다이묘나 가신들에게 나누어 주기위해 서로 차지할려고 한참 싸웠을것인데 그러한 기록은 딱히 없다.[18] 당시의 좋은 예가 김억추 행장이다. 자원 수급에 급급하던 조선 수군이 명량 해협에 철쇄를 둘러쳤다는 황당한 설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이 민간에 퍼져 버렸다. 원균의 행장도 당시 상황을 모르는 사람들이 후손의 청을 받고 써 줘서 미화 투성이가 되어 버렸다.[19] 시바 료타로는 후대에 한학을 익힌 후손들의 윤문은 있었을 수도 있지만, 내용의 뼈대는 집안 대대로 전해들은 내용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20] 사야가는 전술에 능통했으며 기술에 대한 지식도 매우 탁월했다. 이것 때문에 사야가가 상당히 유능하며 교양과 지식이 풍부한 고급 무사라는 점에는 거의 이견의 여지가 없다.[21] 후대의 조선인이 쓴 티가 역력한 문장을 구사하거나, 모화 사상을 가진 것으로는 나오지 않았다.
첫댓글 여긴 언제 가셨데요?
어제 저녁요. 올라갈때 들러서 올라 갔어요.
@계순(季純) 저도 한번 가봐야겠네요. 계순님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신각 저두요. 신각님을 알게 되어서 정말로 행운입니다. 특히 고향분들이라 더욱 반가웠습니다. 앞으로도 많이 좋은 공부 많이 공유하시죠. 가르쳐 주셔요.
@계순(季純) 제가 선배님께 배워야죠^^앞으로 좋은 인연 함께해 주세요^^
http://m.mhj21.com/8143. 김해 김씨 시조 모하당 김충선과 鹿洞書院(녹동서원)
더 많은 내용이 있네요. 저도 배웁니다.
이어서 후속답사까지!
대단한 열정이십니다.
저희는 지회장님 덕분에 많이 배우고 귀동냥합니다요. ㅋㅋㅋ 열정이 사그라 들지를 않으셔요. ㅋㅋㅋ 곁에 있으니 온돌방이옵니다여.
사야가..
김충선..
김해 김씨의 일파지만..
저와는 사뭇 다른 종씨지요.
저는 수로왕의 직계..ㅋ
왕족올씨다! 캬..
부끄부끄..
네엡 맞습지요. 저의 자형께서도 김수로왕 혈통이시죠. ㅋㅋㅋ 역쉬 왕의 포스여요.
올라가시는 길에도 답사는 멈추지 않았네요..
대단합니다!
이게 모하당 일기!
제가 직접 찍은 것이지요..ㅎ
와우~ 정말이옵니다요. 나중에 따로 말씀 해 주시옵소서. 공부 더 하겠습니다.
모하당도 이순신 장군님을 존경하시던가요?
우리민족이 되기까지 얼마나 노력을 하셨는지...
그 후손분들도 참 대단한 분들입니다.
아마도 존경하셨을 겁니다. 그당시에는요. 대단한 분이시네요.
아~~~따로 더 공부를 하셨군요. 대단한 아산지회 김충선도 다시 공부합니다.
ㅋㅋㅋ 천안지회 이옵니다. 너무 바쁘시니.. ㅋㅋㅋ 도움 되셨다니 감사할 따름이옵니다요. 비격진천뢰님
어머 실수~~~천안지회요
ㅋㅋㅋ 괜찮습니다요. ㅋㅋㅋ 비격진천뢰님의 영광의 덧글에 감사할 따름이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