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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ソ連外交官が語る
「ロシア-ユダヤ闘争史」の全貌
전 소련 외교관이 증언하는 "러시아-유대투쟁사"의 전모
※ 어떤 분이 제공한 자료입니다. 하잘계 유대인과 러시아인과의 알려지지 않은 관계에 대해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더 이상 "유대인의 비사(悲史)"가 아니라, 러시아인의 시점에서 설명된 "러시아인의 비사"입니다.
관심있는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993년 여름──
옛 소련 시대, 주일 소련대사관에 근무한 외교관 알렉산드르 이바노프 씨는, 1993년 여름에 일본을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전국각지에서 강연을 실시해, 지금까지의 러시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지금의 러시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원래 러시아의 "유대문제"란 무엇인가에 대해, 열정적으로 설명했습니다.
이바노프씨는 모스크바 대학을 졸업하고 도쿄 대학원을 수료한, 일본사정도 잘 아는 러시아인 외교전문가입니다. 그의 강연에는, 우리 일본인들이 거의 듣지 못했던 놀라운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 일본인에게, 알려지지 않은 하잘계 유대인과 러시아인과의 투쟁의 역사를 남김없이 말해 주었습니다.
이하는, 그가 했던 강연내용의 일부를 정리한 것입니다.
제1장
하잘 왕국 vs 러시아 제국
제2장
"러시아 혁명"은 "유대 혁명"이었다
제3장
하잘 왕실 직계의 자손 라자리 카가노비치의 암약
제4장
러시아의 문화와 종교를 철저히 파괴한 하잘계 유대인
제5장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러시아의 영웅 주코프 원수의 활약
제6장
스탈린과 주코프 원수의 반란
제7장
소련 붕괴의 무대 뒤편
~러시아인과 유대인의 민족투쟁이 원인~
부록
스탈린과 카가노비치에 대해
■■ 제1장 : 하잘 왕국 vs 러시아 제국
■8~9세기, 러시아인들은 하잘왕국과 싸웠다
6세기 후반, 중앙아시아의 볼가강 유역에 강력한 민족이 대두하기 시작했다. 후에 하잘(영어로는 "Khazar", 카잘이라고도 함)왕국을 형성하는 하잘 민족이다.한편, 당시에는 러시아도 아직 제국으로서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러시아인은 이미 키예프 등에 정착해 있었다.
6세기부터 8세기에 걸쳐, 하잘 민족은 카스피해의 북쪽으로 진출하자, 러시아인들과 종종 충돌하게 되었다. 하잘인들은 러시아인들을 지배하에 두고, 노예로 만들어, 카스피해의 북쪽에 있는 이틸이라는 하잘인들의 수도로 데려갔다. 이틸에서는 당시, 러시아인 노예가 아주 싼 값에 매매되었다고 한다.
"하잘 왕국"은 7세기에 하잘인에 의해 카스피해에서 흑해연안에 걸쳐 이뤄진 거대국가다. 9세기 초에 유대교로 개종해,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유대인 이외의 유대교국가가 되었다.
8세기에 들어와, 비잔틴 기독교와 이슬람의 압박을 받은 하잘 민족은, 왕부터 노예에 이르기까지 거국적으로 유대교로 개종해, 하잘은 유대국가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를 유대인이라고 자칭하게 된 것이다. 현재, 세계의 유대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아슈케나지 유대인은, 이 하잘인의 후손이다.
8세기부터 9세기에 걸쳐, 러시아인과 하잘왕국은 여러차례에 걸쳐 전쟁을 벌였으나, 965년, 마침내 러시아인들이 하잘왕국을 점령했다. 그리고, 수도 이틸을 거의 궤멸시키고 말았다.그 이래, 하잘국가는 다시는 예전과 같은 강국은 되지 못했다.
1992년에 발견된 하잘왕국의 수도 이틸의 유적
※ 아사히신문은 1992년 8월 20일에 이하와 같은 소식을 전했다.
"6세기부터 11세기에 걸쳐 카스피해와 흑해에 이르는 하잘이라는 터키계 유목민제국이 있었다. 9세기 경 지배계급이 유대교로 개종, 유대인 이외의 유대제국이라는 세계 역사상 드문 사례로서 러시아나 구미에서는 연구되어 왔다.〈중략〉이 7월, 보도사진가인 히로카와 류이치 씨가 러시아의 고고학자와 공동으로 일주일간의 발굴조사를 실시해, 카스피해의 작은 섬에서 수도 이틸일 가능성이 높은 방벽과 고분군을 발견했다.
13세기에 들어서자, 타타르(몽골)가 하잘왕국을 완전히 멸망시켰다. 유대교도 하잘인, 즉 아슈케나지 유대인들은 러시아와 가까웠기 때문에, 그 대부분이 러시아 영내로 도망쳤다.
러시아의 유대교도 하잘인들은, 이미 12세기에, 러시아국가 내에서 러시아에 대한 음모를 획책하게 되었다. 그리고 1174년, 그들은 러시아의 가장 유명한 황제, 안드레이 보고뤼프스키 황제를 암살한 것이다.
당시의 러시아는 여러나라의 집합체였기 때문에, 각각 나라의 황제가 모여 회의를 가졌다. 그 결과, 그들은 러시아에 있는 유대교도 하잘인들을 탄압하기로 결정했다.그리고, 다수의 유대교도 하잘인들이 죽음을 당하게 된 것이다.
10세기 전후의 유럽과 오리엔트
■폴란드로 옮긴 하잘계 유대인
유럽의 역사를 돌아보면, 18세기 말, 1772년부터 3차례에 걸쳐 폴란드 분할이 이뤄졌다. 폴란드는 3개로 나뉘었고, 당시의 강대국이었던 러시아 제국은 폴란드령의 일부를 자신의 영토 안에 편입시켰다. 그런데 그 폴란드에, 하잘계 유대인들이 "국가내 국가"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규모 유대 커뮤니티는, 15세기까지만 해도 스페인 내에 있었다. 무엇보다, 이 스페인에 있던 유대인은, 그 대부분이 성경에서 말하는 진짜 유대인, 즉 스파라디 유대인이었다.1492년, 스페인 정부가 스파라디 유대인을 국외로 추방하므로서, 스페인내의 유대국가는 소멸했다. 스페인에서 쫓겨난 스파라디 유대인들은 주로, 북아프리카, 네덜란드, 영국 등으로 건너갔다.
아슈케나지 유대인(하잘인)과 스파라디 유대인의 이동 지도
반면, 러시아에서 추방된 유대교도 하잘인들은, 대부분 폴란드로 옮겨갔다. 그때문에, 15세기에는 유대교도 하잘인들의 정부는 폴란드 내에 세워져 있었다고 해도 좋다.
15세기 말에서 16세기에 걸쳐, 폴란드의 유대인들은 폴란드인보다 막강한 힘을 갖게 되어 있었다. 그들은 실제로, 폴란드 국내에 자신들의 정부, 자신들의 국회, 자신들의 교회 등을 만들고 있었다.
일반 폴란드인들은 물론이고, 폴란드 정부조차, 그런 유대인들의 "국가내 국가"에 대해서는, 일절 손을 댈 수 없는 형편이었다.
■폴란드 분할로 러시아에 들어간 하잘계 유대인
러시아는 18세기 말에, 이러한 유대인의 "국가내 국가"가 존재하는 폴란드 영토의 일부를 자국의 영토로 삼았던 것이다.영토를 얻은 것은 좋았지만, 영토와 함께 유대인 정부도 들어오게 된 것이다.이때 러시아는, 극히 위험한 독을 삼키게 되어 버렸다.
이렇게 해서,18세기부터 러시아 국가의 내부에는, 다시 유대 문제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러시아의 유대인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가장 어려운 민족문제다. 그것은, 러시아에 있어서의 유대문제가, 10세기 이래의 러시아 대 하잘의 불화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끌어안은 유대인은, 스파라디 유대인이 아니라, 아슈케나지 유대인이며, 그들은 유대인이 아님에도 유대인이라 칭하는 사람들이다.즉 그들이 유대교도 하잘인이라는 것에, 이 민족문제의 복잡성이 있다.
그 당시, 러시아에 들어온 하잘계 유대인은 300만명 정도였다.그 대부분이 러시아의 서쪽, 즉 우크라이나, 서백 러시아, 혹은 옛 폴란드령에 살았던 자들이다.
그럼에도, 유대문제는 18세기에는, 아직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었다. 19세기 말엽부터 러시아의 유대인들은 열심히 혁명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혁명운동을 지도한 정당, 사회민주당이나 사회혁명당 등의 지도자와 활동가들은, 거의 모두가 하잘계 유대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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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러시아인은 전투적, 혁명적인 요소를 가지지 않은 민족이었다.반면, 유대교도 하잘인에게 러시아는 적국이고, 러시아 문화는 적국의 문화였다. 따라서, 그들은 러시아 국가에 대해서는 항상 전투적, 혁명적이었다.
유대교도 하잘인들은, 낡은 과거의 역사를 곧 끌어낸다. 현재의 역사와 옛 역사를 똑같이 나열해, 3500년 전의 출이집트(이집트에서 노예가 되었던 고대 유대인이 모세에 이끌려 이집트에서 탈출했다)등과 같은 역사적 흔적을 들고 나오게 된다.
유대인은 과거의 역사에 살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교도 하잘인은, 과거 러시아인들이 하잘왕국을 멸망시켰다는 것을 잘 기억한다. 그때문에 유대인 중에는, 항상 러시아에 대한 복수심이 있다. 러시아에서 혁명을 일으켜, 국가를 전복시키는 것은, 유대교도 하잘인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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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러시아 지식인 중에는, 이미 그런 유대교도 하잘인의 움직임을 포착한 사람들이 있었다.가령 러시아의 작가인 도스토예프스키의 저작을 읽어보면, 그는 거듭해서 "유대인은 혁명을 일으킬 것이다, 유대인은 러시아 안에 든 독이자 악마"라고 강조한다.도스토예프스키는 "반드시 유대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단언했었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는, 그런 움직임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그리고, 대부분의 러시아의 지식인들은, 유대인과 싸우지 않고 유대인과 하나가 되어 혁명을 준비했던 것이다.
■■ 제2장 : "러시아혁명"은 "유대혁명"이었다
■일러전쟁을 획책한 하잘계 유대의 노림수
1904년, 일러전쟁이 발발했다. 일러전쟁은 유대인의 획책에 의해, 이웃 간인 두 나라가 충돌하게 된 전쟁이다. 당시, 영국의 유대인들이 도발적인 행동을 해서, 일본도 러시아도 모르는 사이에 전쟁에 휘말려 갔다는 것이, 사실이다. 일본과 러시아의 역사적인 관계는, 결코 좋은 관계라고 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거기에 유대인의 획책이 있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그렇게 주장하는 러시아인은 적지 않다.가령 러시아에서 나오는 '일러전쟁에 있어서의 유대역할'이라는 책 등도, 그런 유대인의 움직임을 설파한 것이다.
일러전쟁 당시, 유대인들은 "러시아 정부의 패배"라는 구호를 내걸고 혁명운동을 전개했다. 이 구호에 따라, 유대인 혁명가들은, 러시아 정부의 패배를 바라는 일본이나 미국에서 혁명자금을 도입하는 것을 용이하게 만들기도 했던 것이다.일본의 자금력은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에, 주로 미국의 자본이 투입되었다.
미국의 대자본가이자, 아슈케나지 유대인인 야콥 시프가 러시아의 아슈케나지 유대인 혁명가들에게 거액의 원조를 제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유대인의 중심적인 존재였던 유대인 금융업자 야콥 시프 ※ 러시아의 유대인 혁명가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렇게 해서 제1차 러시아 혁명의 폭풍이 러시아 전역을 강타하자, 1906년 5월, 러시아 정부는 스트루이핀을 총리로 하는 새정부를 구성했다.
이 스트루이핀이라는 인물은, 민족주의자이자 국가주의자였기 때문에, 강고한 반유대적 정책을 취해 혁명운동을 진압해 나갔다(그래서 레닌도 제네바로 망명했다). 스트루이핀은 "강력한 러시아를 만들자"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오늘 날의 러시아의 "개혁"과는 전혀 다른, 러시아인에 의한 러시아인을 위한 정치와 경제개혁을 진행시켜 갔다.
러시아인에 의한 러시아인을 위한 정치와 경제개혁을 추진한 표트르 스트루이핀 수상
그러나 안타깝게도, 1911년 9월, 스트루이핀 총리는 유대인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스투루이핀이 키예프에 갔을 때, 니콜라이 2세와 함께 극장에서 오페라를 보고 있을 때의 일이다. 그의 자리 근처에 보그로프라는 유대인이 있었다. 그는 반체제 인사, 사회혁명당의 당원이자 정부의 경찰 에이전트이기도 했다. 그는 스투루이핀의 자리 근처에 오자마자, 니콜라이 2세의 면전에서 권총을 2발을 쏜 것이다.
드미트리 보그로프 ※ 스톨루이핀 총리를 암살한 유대인으로 사건 후 군사법정에 회부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스투리이핀이 사망함에 따라, 러시아인에 의한 러시아인을 위한 개혁도 끝나고 말았다.
그 무렵, 러시아의 자본주의 경제는 상당히 강해져 있었다. 이미, 세계의 자본주의 국가들 중에서도, 결코 뒤지지 않는 자본주의 국가가 되어 있었다. 당시 러시아의 경제성장률은 11~15%로 사람들의 생활수준도 높았다. 그것은 10월 혁명 이전의 일이다.
■유대인이 맡았던 러시아 10월 혁명
스투루이핀이 암살되자, 유대인들은 또 하나의 혁명준비에 들어갔다.1917년 11월 7일(러시아력으로는 10월 25일)의 "10월 혁명"이다.
이 10월 혁명은 유대인에 의한 혁명이었다.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말할 것도 없이, 혁명을 지도한 자 대부분이 유대인이기 때문이다.10월 혁명을 앞두고, 트로츠키를 리더로 하는 70명의 유대인 그룹이 뉴욕에서 왔다.미국의 유대인 자본가인 야콥 시프는, 이 트로츠키의 그룹을 지원하고 있었다.
남우크라이나 태생의 유대인 레온 트로츠키(본명 브론슈타인) ※ 10대 때부터 혁명운동에 종사하다가, 첫 체포와 망명 후, 제1차 러시아 혁명에 지도적 역할을 한다. 나중에 레닌의 오른팔이 되어, 레닌이 이끄는 폭력혁명파(볼셰비키)와 공투, "적군"의 창설자 및 지휘관으로 활약한다.1924년 레닌이 사망하자, 스탈린이 대두해 트로츠키와 대립. 정치력이 뛰어난 스탈린이 승리하자, 트로츠키는 추방되어, 망명지인 멕시코에서 암살됐다.
그때 러시아는, 독일과의 전쟁이 한창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다. 독일방면에서도, 레닌의 그룹이 러시아에 들어왔다.이 그룹 역시, 대부분이 유대인이었다.
10월 혁명은, 미국과 독일의 돈에 의해 유대인이 실행한 혁명이었다.
볼셰비키의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은 1917년 11월 7일에 새정부 수립에 성공했다
그렇다고 해도, 러시아 혁명은 무엇때문에 한 줌의 유대인 지도자 하에서, 간단히 추진될 수 있었을까. 러시아인들은 가만히 보고만 있었을까. 당시의 혁명정부에는, 러시아인이 거의 참가하지 않았던 것이다. 레닌 자신이 그 사실을 말한 바 있다.
10월 혁명이 일어난 후, 러시아인들은 신정부의 성립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러시아인으로서는, 이런 반민족적 시스템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혁명 당시, 유럽에서 나온 11명의 공산당 지도자들
레닌은, 정부의 관료로 누구를 기용할지를 곰곰이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당시는 전쟁 중이었으므로, 서측에서 유대인들이 속속 러시아의 중앙으로 옮겨왔다. 소련의 신정권에 유대인은 약 150명이 참가했다. 그리고, 정부의 정상급 인사들은 모두 유대인이었다. 정권 내부의 러시아인은 25%로 극히 적었던 것이다.
레닌의 할머니는 유대인이었다. 레닌 자신이 유대인과의 혼혈이었던 것이다. 러시아 10월 혁명 이후의 신정권에서는, 그 멤버 중 99%를 유대인이 차지했다.그러나, 미국과 독일에서 러시아로 들어온 유대인들은, 혁명가, 혹은 공산주의자였고, 대부분 유대교를 믿는 것은 아니었다.
초대 소련 최고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
■ 유대인 사이의 격렬한 투쟁 - 구미에서 온 혁명가 vs 러시아에 있던 시오니스트
그 무렵의 유대운동에는 두 가지 흐름이 있었다.하나는 공산주의다. 공산주의자, 혁명가들은 유대교를 신봉하지 않는다.
또 하나는 시오니즘이다.시오니즘은, 유대교도가 자신들의 종교본부인 예루살렘(시온)을 중심으로, 자신들이 세계를 지배해야 한다는 사상이다.그런 사람들을 시오니스트라고 한다.
백러시아 민스크 전선에서의 시오니스트병사의 모임(1918년)
10월 혁명 후, 유대인들은 이 2개의 흐름으로 함께 러시아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이윽고 그런 유대인들 사이에서 마찰이 생겨나게 되었다.
1920~1930년대, 미국과 독일에서 온 공산주의자들과, 러시아에 있던 150만 유대교도 사이에 격렬한 투쟁이 일어난 것이다. 혁명가들은 유대교를 믿지 않기 때문에, 유대교인들은 공산주의자들을 비판하고, 공산주의자들과 싸우게 되었다.
레닌과 트로츠키들과 함께 온 사람들은, 이 싸움으로 거의 사라졌다. 혁명정부의 중심에 있던 자들은 거의 죽임을 당하고 만 것이다.그리하여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에, 이 유대인들 사이의 싸움은 결말이 난 것이었다.
↑1920년 2월 8일자 런던의 '일러스트레이티드 선데이 헤럴드'지에 실린 "시오니즘 대 볼셰비즘 : 유대인의 영혼을 위한 투쟁"이라는 사설. 놀랍게도 이 기사를 쓴 사람은, 그 유명한 처칠(나중의 영국 총리)이다. 예로부터 유대인을 많이 알고, 친유대주의자였던 처칠(시오니즘 운동에 감명을 받아 영국 정계에서 가장 먼저 시오니즘 지지자가 된 정치인이다)은, 이 기사 중에서 러시아 혁명에서 유대인의 역할에 대해 언급하며, "공산주의는 문명의 전복을 위한 세계적인 혁명적 음모이며, 이 음모는 무신론적 국제유대인에 의해 지도되었다"라고 적고 있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 총리
■■ 제3장 : 하잘왕실의 직계 자손 라자리 카가노비치의 암약
■스탈린을 조종한 괴물 카가노비치의 정체
10월 혁명 이후, 특히 1920~1930년대에, 유대인들은 러시아에서 "국가내 국가"를 만들어 갔다. 그것은 바로, 8세기~10세기경에 번성했던 하잘왕국의 재현이었다.
러시아에는 하잘왕국의 황제의 자손이 있었던 것이다. 스탈린은 괴뢰이자, 유대인들의 로봇이었다.스탈린은 표면에 드러난 지도자이고, 유대국가에는 이면의 지도자가 있었던 것이다. 그 이면의 지도자가 모든 실권을 쥐고 있는 진정한 지배자였다.
제2대 소련 최고지도자 요시프 스탈린
그것은 누구인가. 세상에서 스탈린의 한쪽 팔이라 불리던 유대인 라자리 카가노비치이다(카가노비치는 마치 러시아적인 성처럼 비치를 붙이고 있지만, 할아버지 시절에는 카간이라고 불렀다).
카간(可汗)은 하잘인들의 언어로, 유대교 종교의 지도자, 황제 등을 뜻한다. 하잘왕국도 하잘 카간국이라고 했다. 카가노비치의 원래 성씨가 카간이라는 것은, 그가 과거 하잘왕국황제의 직계 자손임을 나타낸다.
하잘왕국은 수세기 전에 소멸되었지만, 그 황제의 직계자손들이 살아 있었던 것이다.
하잘왕실 직계후손이었던 라자리 카가노비치(유대인)
※ 우크라이나의 키예프 근교의 유대인 가정 출신으로, 스탈린의 심복으로서 경제정책의 많은 부분을 감독했다.완강한 무신론자로 알려져, 러시아 정교의 "구세주 하리스토스 대성당"의 폭파를 비롯한, 수많은 기독교 교회와 역사적 건조물의 파괴활동을 주도해, 우크라이나에서는 악명높은 인위적인 대기근인 "홀로도몰"을 일으킨 책임자로서도 알려졌다. 또한 1930년대 후반의 스탈린의 "대숙청"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해, 180이 넘는 숙청 리스트에 개인적으로 서명해 수만 명을 죽음으로 내몬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스탈린의 명령을 실행함에 있어, 그 냉혹무비함 때문에 "철의 라자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스탈린은 공산당서기장이라는 자리에 있었지만, 카가노비치는 그저 서기에 불과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카가노비치와 카가노비치의 보좌관이, 모든 정책을 총괄하고 있었다.스탈린은 이 카가노비치의 정책 집행자에 불과했다.
하잘왕국에서는 종교적 권위를 가진 카간(황제)외에, 실제 정무를 수행하는 뱌쿠(집행자)가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도, 당시의 소련정부는 바로 하잘왕국의 재현이었다.
일반적으로 "스탈린의 독재"라고 흔히 얘기되지만, 사실은 하잘인의 하잘왕국의 지도자에 의한 독재였던 것이다. 이 사실은 결코 언급되는 경우가 없다.
■ 하잘의 왕 카가노비치가 러시아를 지배했다
카가노비치는 어떻게 해서 러시아의 국가내 국가, 즉 유대국가를 지도해 나갔을까. 공산당에 의한 것이 아니다. 공산당도 겉모습에 불과했다.실제로는 이면조직이 있었다. 그것이 국가보안성(나중의 국가보안위원회=KGB)이다. 국가보안부의 간부 모두가 유대인이었다.총수뿐만 아니라 중간층도 하층도, 대부분이 유대인으로 채워져 있었다.
국가보안성에는 베리야라는 극히 위험한 인물이 있었다.그는 유대인(어머니)과의 혼혈로, 그루지야의 북코카사스 출신의 유대인이었다. 베리야는 카가노비치의 사촌에 해당한다. 카가노비치는 벨리야, 즉 국가보안성을 통해 러시아=하잘국가를 지배해 나간 것이었다.
소련내의 비밀경찰조직의 장관 라브렌치 베리야
※ 그는 카가노비치의 사촌으로, 악명 높은 "카친숲의 학살"의 주범이자, 시베리아 억류 등 외국인 포로를 수용하는 수용소를 관할하는 최고 책임자이기도 했다
또 그 무렵, 유대인들은 국가보안성 내에 "수용소"라는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었다. 솔제니친의 저서인 '수용소군도'
에는, 이 시스템에 대해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각 수용소의 소장은 90%가 유대인이었다. 수용소시스템을 처음 도입한 인물은, 프렌켈이라는 유대인 혁명가다. 수용소는 러시아인 노예를 수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설이었다.
■가족전원이 처형된 로마노프 왕조 일가의 비극
혁명이 성공하자, 유대인들은 러시아인들을 완전히 지배하에 두려고 했다. 그러려면 러시아의 "머리"를 잘라내야 한다."머리"라는 것은 일본으로 치면 천황인 것처럼, 러시아로 치면 쯔아, 즉 황제였다.
제14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마지막 로마노프 왕조 일가)
※ 황후 앞에 황태자 알렉세이, 황제의 오른쪽에 넷째 딸인 아나스타샤. 부부의 뒤 왼쪽부터, 셋째딸 마리아, 둘째딸 타티아나, 큰딸 오리가.
유대인들은 우선 당시 쯔아인 니콜라이 2세를 가족 모두 암살했다. 혁명 다음 날인 1918년 7월, 유대인들은 우랄 산맥의 에카테린부르크(현재의 스베르드로프스크)의 한 집 지하실에서 쯔아와 그 가족을 모두 총살에 처했다.
그리고, 그 집의 벽에 사인을 남겼던 것이다. 그것은 히브리어로 "황제는 암살당했다, 국가는 파괴되었다"고 적혀있었다. 나(이바노프)는 그 사인을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옐친 대통령은 당시, 그 마을의 제1서기였으나, 이 옐친의 명령에 따라, 쯔아가 살해된 집은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이제는 아무도 이 사인을 볼 수 없다. 집도 벽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제4장 : 러시아의 문화와 종교를 철저히 파괴한 하잘계 유대인
■혁명에 의해 러시아 두뇌가 모두 국외로 유출
러시아의 "머리"는 이렇게 잘려졌다. 그렇다면 그들의 다음 목표는 무엇인가? 그 다음에 그들은 무엇을 해야 했을까.
러시아의 전통, 습관, 역사와, 그것을 존속시키고 있는 귀족들을 죽이는 것, 그것이 그들의 다음 과제였다. 그러나 러시아의 귀족들은 그 때, 행운인지 불행인지 대부분이 국외로 망명해 있었다. 최소 300만의 귀족이 미국이나 유럽 등지로 탈출했는데, 그들은 이른바 러시아의 두뇌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요컨대, 혁명에 의해 러시아의 두뇌가 모두 국외로 유출되고 만 것이다.
미국에는 세계에서도 유수의 기술을 발견한 학자들이 많이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일이지만, 그러한 학자들 중에는 러시아인이 가장 많은 것이다.적어도 그들 러시아인이 20%를 차지하고 있다.
가령 헬리콥터의 발명자인 시코르스키, 노벨상을 받은 경제학자 바실리 레온체프, 작곡가 라흐마니노프 등, 꼽아보면 끝이 없을 정도다. 러시아의 두뇌는 거의 미국으로 가버린 것이었다. 미국은 혁명에 의해 러시아의 두뇌를 획득한 셈이다.
우수한 실업가, 데미도프, 스트로가노프, 엘리세예프 등도 외국으로 가버렸다. 러시아는 유대 때문에 우수한 실업가들을 모두 잃고 말았다. 러시아인의 "머리"를 대신해 유대인의 "머리"가 러시아의 몸, 즉 러시아인의 국가 위에 올려진 것이다.
■러시아의 농업체계도 러시아 정교회도 철저히 파괴됐다
나아가 러시아의 오랜 전통, 습관, 문화를 가진 사람은 누구인가. 농민이다. 그들은 개인 농지를 가지고 있던 지주였다.그러나 유대인들은 혁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농업시스템을 파괴해야 한다며, 곳곳에 콜호즈(집단농장)와 소프호즈(국영농장)를 만들어갔다. 그 결과, 러시아의 농업시스템이 모두 파괴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문화인도, 우수한 실업가도, 전통적인 농민도 러시아에서 사라졌다. 전부 유대인이 한 짓이다. 또한 러시아 정교도 거의 궤멸 상태에 이르기 까지 탄압을 받았다. 러시아 정교는 러시아인에게 가장 신성한 종교다.적어도 10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러시아인들에게 커다란 정신적 영향을 계속 주어왔다. 그러나 혁명 이후, 유대인들은 러시아 정교회의 90%를 파괴해 버린 것이다.
공산주의에게 종교는 아편이었다. 아르메니아 교회의 사원도 많이 파괴됐다. 그러나, 시나고그(유대교회)만은 피해가 없었다.
러시아 정교회
러시아에서는 10~11세기에 걸쳐, 러시아의 전통적인 건축기법에 따라 아름다운 많은 교회가 세워졌다. 지금은 12세기에 지어진 교회가, 얼마 남아 있지 않지만, 오래된 교회의 대부분이 유대인에 의해 파괴되고 말았다. 파괴된 것들 중에는, 건물 이외에 그림이나 9~11세기의 성상화(聖像画)도 많이 있었다.
이러한 파괴는 러시아로서는 견디기 힘든 끔찍한 비극이었다.
■■ 제5장 :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러시아인 영웅 주코프 원수의 활약
■대전 전에 군간부와 지식인을 숙청한 하잘계 유대인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전에, 유대인들은 또 다른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그것은 러시아 군대의 간부들을 숙청하는 것이었다. 적어도 그 당시, 3만여 명의 장군과 장군급, 대령급 군인들이 살해됐다. 그들은 때마침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1, 2년 전에 살해당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히틀러로부터의 침략 위협을 느끼지 않았을까. 러시아를 외적으로부터 지킬 필요가 있으면서도, 왜 우수한 군인을 살해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을까.
그들에게 문제는 국외가 아니라, 국내에 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인 장군과 대령 등이 적군(赤軍)을 지도해, 반유대 감정이 고조되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위험을 느끼고 군대의 간부들을 죽였다.
실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의 일이었다. 그들 장군 중에는 유대인도 섞여 있었지만, 유대인이든 무엇인든, 불온한 움직임을 일소하기 위해서는 무차별적으로 살해되어 간 것이다.
■나치스 독일과의 싸움 ─ 소련을 승리로 이끈 주코프 원수
전쟁이 시작되었다. 뛰어난 사령관을 이미 잃어버린 러시아군은, 처음의 1, 2년간 패배를 거듭한 후, 모스크바까지 철수해 적을 맞아들이는 전법을 취하기로 했다. 그리고, 후의 모스크바 전선에서는 격렬한 전투 끝에, 최종적으로 러시아가 승리를 거뒀는데, 그때에는, 드디어 세대교체가 이뤄져, 차세대의 우수한 군인들이 지휘하고 있었다.
그러한 사령관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사령관이 주코프 원수였다.
1941년 6월, 히틀러가 이끄는 독일군은 "독소불가침조약"을 깨고, 갑자기 "발바로사 작전"이라고 불리는 소련침공 작전을 개시했다. ※ 이 독소전은 러시아에서는 "대조국 전쟁"이라고 불린다
소련군을 지휘한 러시아 영웅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
1941년 10월, 독일군은 모스크바 대공격을 시작했다. 이에 대해, 그해 12월, 주코프 원수가 이끄는 러시아군이 대반격을 가했던 것이다. 그것을 러시아에서는 모스크바의 대조국 전쟁이라고 한다. 이듬해 스탈린그라드에서의 대규모 시가전은 1943년 2월까지 이어졌지만, 마침내 독일군은 항복해, 러시아군의 승리를 향한 첫 걸음이 찍혔다.
주코프 원수가 맡은 역할은, 모든 전쟁에서 가장 커다란 것이었다.
소련 서부의 도시 "스탈린그라드"전투에서, 소련군은 독일군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고, 이후의 전국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싸움은 제2차 세계대전의 결정적인 전기가 되었다).
(왼쪽) 격전 끝에 베를린 제국의회의 돔에 휘날리는 소련 국기(1945년 4월 말)(오른쪽) 승리를 축하하며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춤을 추며 환호하는 소련군들
전쟁이 끝나자, 급속하게 러시아인의 민족적 자각심이 높아졌다.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이다.유대인들은 러시아를 두려워했다.
위기를 느낀 유대인들은 1948년, 러시아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우수한 정치인들을 차례로 재판에 넘겨, 러시아인 지식계급을 죽여간 것이다. 카가노비치가 그러한 지휘를 맡았는데, 스탈린도 거기에 동조했다.
■■ 제6장 : 스탈린과 주코프 원수의 반란
■ 유대를 떠나 암살당한 스탈린
스탈린은 그 무렵부터 유대인의 방식에 반발하게 되었다. 스탈린의 아내는 카가노비치의 여동생이었고, 그 전의 스탈린의 둘째 아내 역시 유대인이었다.그럼에도, 스탈린은 유대인에게 대항해 나갔다.
전쟁의 승리로 자신의 이미지가 올라가기도 했고, 유대의 횡포를 참지 못하게 되어, 반유대 태도를 취하기 시작한 것이다. 1949년부터 사망하는 1953년까지, 스탈린은 실제로 그런 행동을 계속해 나갔다.
스탈린과 아내인 로자(유대인) ※ 로자는 카가노비치의 친여동생이었다
스탈린의 신변에는 항상 베리야가 있었다. 베리야는 국가보안성의 리더이자, 스탈린과 마찬가지로 그루지야인이었지만, 유대와의 혼혈이었다. 베리야는 시종 스탈린에 대한 주시를 게을리하지 않고, 스탈린의 행동을 모두 카가노비치에게 보고했다.그때문에, 스탈린은 베리야 몰래 반유대의 음모를 획책해 나갔다.
1952년, "의사사건"이 터졌다. "의사사건(医者事件)"이란,1948년, 유대인 의사들이 수많은 러시아인의 신생아, 그것도 남아들만 독살한 사건이다. 그때 살해된 남자아이의 수는 상당한 수였다. 특히 대도시인 레닌그라드, 모스크바, 키예프 등에서 많은 남아가 살해됐다.
왜 유대인들은 이런 폭거를 자행하는가, 이대로 많은 남아가 죽임을 당한다면, 대체 어떻게 되는가──.
스탈린은 1952년, 이 사건과 관련된 의사들을 모두 체포해, 유대인 자신들이 만든 수용소로 보내, 그 절반을 죽인 것이다.
스탈린은 나아가 보다 큰 반유대 플랜을 갖고 있었다. 시베리아의 극동지방에 비로비잔이라는 유대인 자치주가 있었는데, 그는 대도시에서 모든 유대인을 모아, 시베리아의 비로비잔으로 보내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실행에 옮겨지기 전에, 그는 베리야에 의해 암살당했다.1953년 3월의 일이었다.
극동지방에 존재하는 비로비잔의 "유대인 자치주"(노란색으로 칠해진 지역↑)
스탈린은 자연사라는 설이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유대인에 의한 암살이었다. 베리야에 의해 스탈린은 살해당한 것이다.스탈린의 아들인 와실리는 공군장교였지만, 그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그는 이웃에게 이 경위를 모두 말했다. 그러나 와실리도 곧 암살당하고 말았다.
■ 소련의 전권을 잡은 카가노비치
유대인은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세계적인 규모에서 힘을 갖고 있으며, 유대민족이 불리한 상황에 처했을 때 일치해서 공격에 나설 수 있다. 스탈린은 강력한 독재자라고 불렸지만, 그 실제는 그들에게 조종당한 로봇이며, 자신이 독재자로서 행동을 취하자 마자 유대에 의해 암살당한 것이다.
스탈린이 죽은 뒤, 베리야는 카가노비치의 진정한 오른팔이 됐다. 이 2인은 스탈린이 암살된 이후 약 3개월 동안, 실질적으로 러시아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동안, 그들은 무엇을 하려고 했을까.그것은 소련의 분열 책모였다.베리야가 체포된 후에, 이러한 계획이 있던 것이 발각되었다.
스탈린이 암살된 이후 실질적으로 러시아를 지배한 하잘의 카가노비치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인 1953년, 카가노비치는 당시 소련의 전권을 장악했다.이 때, 러시아는 진정한 유대국가가 되어버린 것이다.
러시아의 유대인과 미국의 유대인들은 이런 사태를 크게 기뻐했다. 왜냐하면, 러시아의 유대인이나 미국의 유대인이나 모두 아슈케나지 유대인이라는 동포이며, 확실하게 손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은 소련과 미국이라는 두 유대국가가 힘을 합치면, 전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의 누가 이런 음모를 막을 수 있었을까.
그 당시, 국가보안성의 에이전트는 곳곳에 있었다. 그리고, 밀고가 제도로서 국민의 의무였다. 당시의 러시아인은, 이런 유대네트워크에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다.
■ 유대권력을 궤멸시킨 주코프 원수
그러나 기적이 일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파시즘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안겨준 주코프 원수가, 1953년에 유대와의 전쟁에서도 승리를 거둔 것이다.
스탈린이 암살된 지 약 3개월 만인 1953년 6월 26일, 모스크바의 교외에서 주코프 원수는 육상훈련을 하고 있었다.이 훈련 도중에, 주코프 원수는 갑자기, 스스로 전차부대 2개 사단을 이끌고 모스크바 시내로 들어가, 국가보안성본부를 향해 진격을 시작한 것이다. 국가보안성은 이 움직임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그때문에, 주코프는 순식간에 국가보안성본부의 점거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카가노비치와 벨리아를 체포한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
주코프 원수는 먼저 베리야를 체포했다.그리고 나서 카가노비치 등을 체포했다.
이것은 전혀 이례적인 사태였다. 러시아인의 민족성에서 볼 때, 이런 과격한 반발행동에 나서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주코프는, 누구에게도 상의하지 않고,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곧바로 전차부대 2개사단을 움직여, 모스크바로 들어가 국가보안성 본부를 탈취한 것이다.
그때부터 러시아는 새로운 정부가 되어, 유대인은 국가보안성과 군대의 사령부를 포함해, 모든 조직에서 추방됐다.적어도 1960년까지, 대부분의 정부기관에서 유대인이 일소된 것이다.
드디어, 러시아를 러시아인이 지도하는 곳이 되었다.일시적이긴 했지만, 분명히 러시아인의 승리였다.이때 1953년부터, 1985년에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이 되어, 이듬해에 페레스트로이카(개혁)가 시작될 때까지의 기간, 러시아 국내에 하잘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대로 러시아에 살기는 했지만, 더 이상 유대인들이 "국가내 국가"를 만드는 일은 없었다.
제5대 소련의 최고지도자인 브레지네프 시대(1964~82년)는 러시아인들에게 역사상 매우 안정된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유대인들은 이 시대를 "정체"시대라고 한다.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정체"라고 부를 만한 시대인 것이다.
■■ 제7장 : 소련붕괴의 무대 이면 ─ 러시아인과 유대인의 민족투쟁이 원인
■1991년 8월 쿠데타는 "유대 제2의 혁명"이었다
공산주의체제 붕괴 후의 러시아의 정치를, 일본에서는, 개혁파(민주계)와 보수파(구공산당계)의 대립을 축으로 한 것으로 파악하고, 거기에 중간파계, 민족파계등의 제파가 얽힌 정쟁의 흐름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민족투쟁"인 것이다. 러시아인과 유대인의 대결, 그것이 러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태의 근본에 있는 것이다.
1991년 8월, 세계를 뒤흔든 소련의 쿠데타는 어이없는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그 결과 일어난 것은, 틀림없는 혁명이었다. 이는 유대인에 의한 쿠데타이자, "유대 제2혁명"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었다. 과격파 유대인들은, 온건한 고르바초프 정권을 무너뜨리고 스스로 집권하려 했던 것이다.
쿠데타 실패 후, 옐친 그룹이 집권했지만, 옐친 대통령을 둘러싼 러시아 정부의 고위 관리의 대부분이 유대인이었다.
옐친은 유대인 아내를 두었지만, 그 자신은 순수한 러시아인이다. 그러나 그는 머리가 나쁘고, 심지어 알코올 중독자다.그는 사용되는 로봇일 뿐이다. 그의 보좌관은 80%가 유대인이었고, 그의 보좌관 중에는 20명의 미국인이 있었다. 그 미국인 중에서도 지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제프리 삭스라는 하버드대학의 교수로, 물론 유대인이다.
(왼쪽) 제8대 소련의 최고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 (오른쪽) 러시아 연방 초대 대통령 보리스 옐친
러시아국내의 유대인들은, 8월의 쿠데타로 러시아 정부 내의 실권을 잡은 다음으로, 해외의 유대인들과 호응해, 러시아 경제를 지배하에 두려고 했다.그 때문에, 구미의, 그 중에서도 미국의 유대자본이 거세게 러시아로 밀려들게 된 것이다.
옐친과 그 추종자들은, 8월의 쿠데타 이후, 급진적인 시장개방노선을 의회에서 승인시키자, 가이달 정권을 출범시켰다.그리고 연말의 연방붕괴와 CIS의 형성을 거치자 마자, 단숨에 시장개방, 가격자유화라는 쇼크요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그 결과 러시아에서는, 국제파 유대인에 의한 맹렬한 "골드 러시"가 일어났다.
1991년 8월 쿠데타 이후 한동안, 뉴욕에서 모스크바행 비행기는 대부분 유대인들에게 차지했다.
■ 머지않아 러시아인의 해방운동이 일어날 것이다
8월 쿠데타로, 그들 유대인들은 다시 러시아의 권력을 잡았다고 생각학 있을 것이다. 그러나, 70여년 전의 10월 혁명 때와는, 그 사태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1917년 10월 혁명 당시에는 큰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러시아 유대인들에게는 힘이 없다. 그들은 두 번째 혁명을 일으켰지만, 오늘 날의 러시아인들은 75년 전의 러시아인들과는 다르다. 당시의 러시아는 농업국가였다. 많은 농민들은 읽고 쓸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공산주의 시절에 받은 교육수준은 매우 높다.러시아인 노년배도 그리고 젊은 사람들도, 점점 유대문제를 알아가고 있다.그리고 애국심이 높아지면서 동시에 유대인에 반발하는 행동을 취하기 시작한 것이다.
유대인은 모스크바나 상트페테르부르크, 키예프 등의 대도시에서는 힘이 있지만, 농민이나 노동자 중에는 유대인은 거의 없다. 이것은 반가운 일이다. 더우기, 유대인들의 영향은 아직 지방까지 미치지 못했다. 러시아의 지방에는 진짜 러시아가 남아 있다.
러시아인들의 반발은, 러시아인에 의한 유대로부터의 해방운동으로서, 이미 지방에 퍼지기 시작했다. 러시아인들은 반드시 자신들의 러시아인 리더를 뽑을 것이다.
앞서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는 지방으로부터의 혁명이 아니라 "위로부터의 혁명"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는 "혁명"이라기보다는 반러시아적 음모였다. 결코 아래로부터의 해방운동, 혁명이 아니었다.
우리 러시아인은 이미 혁명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최초의 10월 혁명, 이는 분명히 유대혁명이었다. 그리고 또한, 2년 전인 1991년 8월에 있었던 혁명도, 유대혁명이었다. 러시아인들은 유대혁명은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더 이상 이것을 참을 수 없다. 러시아의 유대인들은, 러시아에서 악질적인 행위를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다.그러나 그들은 이미 지나쳤다.
앞으로, 러시아인과 유대인의 싸움은 더욱 치열해질 것이다.머지않아 러시아인의 해방운동이 일어날 것이다. 나(이바노프)는 그것을 굳게 믿는다.〈후략〉
── 1993년 여름 ──
■■ 추가 정보 : 스탈린과 카가노비치에 대해
●논픽션 작가인 히로세 타카시씨가 쓴 대저 '붉은 방패
(집영사)에는, 스탈린과 카가노비치에 대한 흥미로운 기술이 있다. 해당하는 부분을 일부 발췌해 소개한다.
※ 각 이미지 사진과 캡션은 본관이 독자적으로 추가
'붉은 방패'히로세 타카시 저(집영사)
"소련이 살아남기 위한 외화를 획들할 목적으로, 우크라이나의 밀이 서유럽으로 수출되어, 그 수입이 철강산업을 키우게 됐다. 이 당시의 철은, 현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공업을 지배하는 거대한 동력이었다. "철의 사람" 스탈린은 밀을 팔아 쇠를 샀던 것이다.여기에, 서유럽에서 이 밀을 산 사람은 누구인가, 하는 역사상 최대의 수수께끼가 생겨난다.
소련무역의 실제작업을 주관한 인물, 그것은 유대인 리트비노프 외무장관과 연동해, 공포의 1930년대의 소련을 움직였던 라자리 카가노비치라는 남자였다.〈중략〉"
(왼쪽) 라자리 카가노비치와 스탈린 (오른쪽) 막심 리트비노프 (유대인)
"카가노비치는 1893년, 키예프의 가난한 유대인 노동자의 집에서 태어났으며, 스탈린의 측근으로서 1930년대에는 시종, 소련에서 제 2인자의 지위를 누렸다. 1925년에는, 우크라이나 공산당의 제1서기가 되어, 우크라이나 공산당 지도자를 숙청했다. 1928년부터 중앙위원회의 서기가 되어, 우크라이나 등 각지로 스탈린의 대리인으로서 나가 수백만의 농민과 그 가족을 죽음과 귀양을 보내는 공포활동을 지도했다.
기독교회 등 중요한 낡은 건축을 무자비하게 파괴하고, 1930년대 후반의 숙청에서는, 체포와 귀양을 스스로 실천했으며, 항공산업장관이던 형 미하일에게도 냉담하게 대해, 미하일은 베리야의 처형 결정을 듣고 자살했다.〈중략〉"
(왼쪽) 현재의 우크라이나 지도(오른쪽) 하잘왕국과 갈리치아 지방(노란색으로 칠해진 곳)
※ 좌우 지도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듯이, 현재의 우크라이나 수도인 키예프를 포함한 동쪽의 절반은 과거 하잘왕국의 영역이었다
"카가노비치의 본명은, 그 인명록에 Kogam(코간)이라고 적혀 있는데, 서유럽의 자료에서는 Kagan(카간)으로 되어 있다.즉 코간 또는 카간이라는 성을, 러시아식 이름으로 해서 카가노비치(Kaganovich)로 바꾼 것이다.
숙청자인 라자리에게는, 자살한 형 미하일은 물론이고, 알려진 바로는 모이셰, 유리, 로자 등 최소 총 4명의 형제자매가 있었다. 문제는 이 전원에게 있었다.남자 4명은, 스탈린 정권에서 "카가노비치 왕국"으로 불릴 정도로 권력을 자랑하며, 앞서 말한 것처럼 바쿠를 지배하는 석유산업장관부터 중공업장관, 항공산업장관까지 공업계를 한 손에 거머쥐고, 5개년 계획에서 발생하는 이권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면서 민중과 동떨어진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벨리야의 전에 공포의 사형집행인이었던 비밀경찰의 책임자인 예초프가 이들 형제들을 '부르주아의 하수인'으로 고발했기 때문에, 형제 중의 한 명인 미하일이 자살하고 만 것이다. 놀란 스탈린은, 그 후 카가노비치 일족을 건드리지 말라고 비밀경찰에게 명했다. 왜냐하면, 스탈린 제3의 처가 숙청자 라자리의 친여동생인 로자 카가노비치였기 때문이다.〈중략〉
……그리고 제3의 아내인 유대인, 로자 카가노비치와 이듬해 스탈린이 결혼한 것이다. 그녀를 스탈린에게 소개한 것이, 나치스와 손을 잡았던 모로토프 외상(리트비노프의 후임)으로, 모로토프는 정보위원회(후의 KGB)의 의장을 맡아, 스스로 비밀경찰의 톱에 선 남자다.〈중략〉"
(왼쪽) 라자리의 친여동생인 로자 카가노비치 (오른쪽) 바체슬라프 모로토프(아내가 유대인)
"모로토프는 대량 테러 조직에는 지극히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1935년에 소련 인민위원회 회의에 들어가 있던 25 인민위원 중, 탄압의 시대에 살아남은 것은, 미야콘, 월로실로프, 카가노비치, 리트비노프, 그리고 모로토프뿐이었다. 우크라이나에서의 학살캠페인의 수석지휘관과 지도자는 모로토프와 카가노비치였다.
모로토프는 유대인 반파시즘 위원회의 거의 모든 멤버를 체포하는 등, 전후 모든 탄압에 책임을 지고, 그 희생자가 된 것이 모로토프 자신의 아내인 폴리나 제므튜지나이다. 그녀는 유대인으로, 이스라엘에 자매와 조카가 살았다.
2차대전 후에 모로토프는 해임되었지만, 스탈린의 사후에 다시 외무장관에 임명되어, 아내인 폴리나도 석방되는 시대로 접어들어, 이번에는 1957년, 흐루시초프와의 충돌로 인해 철저히 패배하면서, 모로토프의 정치적 이력은 사실상 끝을 맺었다.1984년에 모로토프의 복당을 적극 지지한 것이 (이스라엘 건국을 승인한)그롬이코였다.〈중략〉"
(왼쪽) 모로토프와 스탈린(오른쪽) 스탈린의 딸 스베트라나
※ 스탈린의 딸인 스베틀라나는 22살이나 연상인 유대인 영화감독을 사랑해, 대학 2학년 때 유대인과 결혼했다.3번째 결혼 상대는 라자리 카가노비치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카간 가문에는, 6번째 아이가 존재했음을 시사하는 중대한 사실이, 프랑스의 문헌에 적혀 있다. 그 이름을 니콜라라고 하며, 이것이 그들 형제의 어두운 비밀을 쥐고 있던 인물이다. 이 남자는 카가노비치가 아니라, 아버지 아브라함 카간의 성을 그대로 이어 니콜라 카간이라고 했다.우크라이나의 숙청자 라자리의 5살 연하로,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프랑스로 귀화한 프랑스인이었던 것이다.
표면상으로는, 소련에서 파견된 프랑스 주재은행의 고위 관리로 알려져 있었지만, 실은 다음과 같은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앞서 프랑스의 <이백 가족의 대계도>의 맨 위에 제시한 바와 같이, 니콜라는 "붉은 방패"의 투자은행으로서 전세계에 세력을 뻗치는 "세리그만 은행"의 오너이고, 공동경영자는 물론 세리그만 일족이었다.
본서 상권 타이타닉호의 침몰에서 〈계도 8〉에 등장한 것이 이 일족의 미국 이민이다. 카간은 그 프랑스 가문과 파트너 관계를 맺고, 정상의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 "붉은 방패"의 마천트 벙커에는 철칙이 있어, 적어도 이 당시에는 "일족 이외에는 절대로 오너가 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니콜라 카간은 왜 오너가 될 수 있었을까. 그 대답은, 니콜라 카간 본인이 로스차일드 일족이었다고 추측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자와 일각수가 그려져 있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문장
"우크라이나의 농민 수백만의 학살 단서를 찾기 위해, 카간 혹은 코간이라는 인물을 전세계의 역사상의 기록에서 찾았더니, 주의를 끄는 2가족이 발견됐다. 이것을 <이백 가족의 대계도>에서 카가노비치의 오른쪽에 나타내는데, 그 중 하나는, 러시아의 지배자 긴즈부르크 가문과 결혼한 카간 가문으로, 이것은 미국으로 건너가 유대교에서 고위 랍비일족이 되었다. 또 하나는 카간의 아들이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나, 곧 헬가 로스차일드와 결혼한 일족이었다.
만일 이것이 모두 같은 가족이라고 하면, 소련(러시아)과 프랑스와 아르헨티나를 연결하는 키워드가 존재하는 셈이다. 그 공통항은, 곡물 외에 없을 것이다.실명으로 말하면, 러시아의 곡물을 우크라이나의 오데사로부터 독점적으로 매입한 프랑스의 곡물상사 "루이=드레퓌스상회"다. 이것이 아르헨티나에 진출해, 나중에 현대 미국에서 세계 4위의 곡물상사가 된 것은 이미 말했듯이 곡물업계의 상식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세리그만 은행"과 "루이=드레퓌스 상회"의 관계를 조사해 보자.〈200가족의 대계도(二百家族の大系図)〉에서는 2번째 오른쪽 하단에 위치하는데, 그 곡물상사 일족인 프랑스 루이=드레퓌스라는 여성이 아르헨티나의 브레노스아이레스에서 탄생해, 그녀가 프랑스의 누벨바그 시대에 2번째로서 등장한 남자배우 자크 샤리에와 결혼한 것이다. "안네의 일기" 무대에 서다가 마르셀 카르네에게 인정받은 샤리에는, '위험한 모퉁이'에서 파스칼 프티와 공연해 영화에 데뷔했고, '뜨거운 손' '오늘밤 한가한가?' '금지된 육체' 등, 제목부터 상상이 가는 작품들에 차례로 주연을 맡았다. 이 루이=드레퓌스와 결혼하기 전에 샤리에의 아내였던 것이, 신이 아담과 함께 만든 여자 브리지드 바르도다.〈중략〉"
"…이 가계의 근원을 더듬어 가면, 여기저기에 위험한 굴곡은 있지만, 러시아의 로스차일드=긴즈부르크 가문을 지나, 우크라이나의 숙청자인 카가노비치=스탈린 일족의 파트너, 문제의 세리그만 가문에 이르는 족보를 보지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프랑스 "이백 가족"의 비밀이었다.
그리고 곡물상사와 "셀리그만 은행"에 대한 관계는, 지금 설명한 혈족관계를 그대로 금융권에도 반영해, 정확한 전체상을 그려왔다. 즉 "세리그만 은행"은 "루이 휴루스 은행"과 합병한 뒤, 1968년에 문제의 곡물상사 "루이=드레퓌스 상회"에 흡 합병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스탈린의 사자로서 프랑스와 소련의 사이를 오간 니콜라 카간은, 머지않아 곡물상사의 대리인이었음이 드러난다."
'비참한 수확 우크라이나 대기근 ─ 스탈린의 농업집단화와 기근테러'
홀로코스트와 함께 세기의 대학살 "홀로도몰"에 의해, 최종적으로 700만 이상의 우크라이나인이 굶어죽었다. 이것은 전체 우크라이나 인구의 20%가 죽었다는 것을 의미했다.소련 정부는 이 사건을 계속 부인하고 은폐해, 세계에 공식적으로 인지되게 된것은 1970년대 이후다. ※ "홀로드몰"이란 우크라이나어로 기근(호로드)으로, "고사:苦死(몰)"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영양실조에 빠진 아이들은 제대로 된 의료도 받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다
(왼쪽) 홀로드몰에 의한 우크라이나의 인구 감소를 나타낸 지도(1933년)(오른쪽) 우크라이나의 아티스트가 제작한 홀로드몰 포스터
"결국, 우크라이나에서 수백만의 농민들이 굶주린 채 마른 나무처럼 죽어갔고, 수백만이 수용소로 보내졌을 때, 그곳에는 '지붕 위의 바이올린'을 연주한 주인공 테비에와 같은 유대인 농민들도 대거 포함되 있었을 것이지만, 당시에 대한 수많은 자료들이 보여주듯, 크렘린에는 롤스로이스, 캐딜락, 링컨 등 서방 세계의 최고급 차량들이 즐비했고, 지도자들은 미식가들만 즐비해, 보르시치에 오리나 사슴 등, 호화로운 식사를 실컷 먹고 있었다.
혹자는 스탈린과 그루지야인 주가시빌리, 혹자는 카가노비치 유대인 카간, 혹자는 리트비노프 유대인 왈락, 혹자는 모로토프일 스크랴빈 등이었다.……<후략>
이상, 히로세 타카시 지음 '붉은 방패'(집영사)에서
http://inri.client.jp/hexagon/floorA4F_ha/a4fhb500.html
하자르 마피아의 은폐된 역사
March 11, 2015 Preston James and Mike Harris cafe.daum.net/flyingdaese/Vg7B/3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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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06 https://cafe.daum.net/flyingdaese/SfFI/5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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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
좋은자료 올려주어 감사합니다...
["일러전쟁은 유대인의 획책에 의해, 이웃 간인 두 나라가 충돌하게 된 전쟁이다"]
여기서 추측가능한 것이 일본과러시아 가 이웃한 국가간의 충돌...
그당시 일본은 지금의 일본이 아니다라는 것을 알수가 있습니다...
18~19세기 의 러시아는 대제국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기에 맞서는 일본또한 거대제국
유럽을 거진 차지한 일본이었을것입니다.
6.25 ~ 휴전협정이 1953.7. 스탈인 암살(53년3월)후 러시아를 구한 영웅 게오르기 주고프원수에 의한 것이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