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풀잎 하나가 / 안도현
초록 풀잎 하나가
옆에 있는 풀잎에게 말을 건다
뭐라 뭐라 말을 거니까
그 옆에 선 풀잎이 흔들린다
흔들리는 풀잎이
또 앞에 선 풀잎의 몸을 건드리니까
또 그 앞에 선 풀잎의 몸이 흔들린다
흔들리는 것들끼리
한꺼번에 흔들린다
초록 풀잎 하나가
뭐라 뭐라 말 한 번 했을 뿐인데
한꺼번에 말이 번진다
들판의 풀잎들에게 말이 번져
들판은 모두
초록이 된다
- 동시집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몰라』 (상상, 20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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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도현 시인
1961년 경북 예천 출생. 원광대 국어국문학과 및 단국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졸업
1981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및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외롭고 높고 쓸쓸한』 『북항』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등.
산문집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백석 평전』 외.
현재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1998년 소월시문학상, 2002년 노작문학상, 2005년 이수문학상, 2007년 윤동주상, 2009년 백석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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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안도현 시인의 신작 동시집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몰라’에 실려 있는 동시이다.
작은 초록 풀잎 하나가 옆에 선 풀잎에게 말을 건네자 그 말은 다른 풀잎의 몸을 흔들고,
또한 말은 옆쪽으로도 앞쪽으로도 건너간다.
마치 물결처럼 파동처럼 주변을 진동시키며 나아가서 전달된다.
이 말은 초록 풀잎의 언어이므로 참으로 산뜻하고 싱그러운 것일 테다.
무엇이든 하나의 움직임은 다른 것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것이 말이든 행위이든 마음이든 모두 그러하다.
그러므로 내 움직임이 과연 다른 것들에게 선한 영향을 만들고 있는지를 그때그때 살펴봐야 한다.
일이 벌어지자마자 순식간에 퍼져나가기 때문이다.
싱싱하고 맑은 향기가 있는 초록 들판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봐야 하는 까닭이다.
-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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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 하나의 움직임이 옆으로 번지며 들판이 모두 초록으로 변해가는 풍경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생생한 이미지에 시인이 심어놓은 메시지는 잡힐 듯 말 듯하다.
"초록 풀잎이"라고 해도 됐을 텐데 "초록 풀잎 하나가"라고 쓰고, "말 했을 뿐인데" 대신
"말 한 번 했을 뿐인데"를 선택한 게 도드라진다.
"하나"와 "한 번"이 가진 가능성을 펼쳐 보이면서 시작하는 용기를 격려하고 있는 게 아닐까.
- 국민일보 / 시가 있는 휴일 2023-0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