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소 : 충청남도 천안시 수신면 속창리 산11-1
원래 이곳 수신면은 조선시대 청주목 관할이었고
한명회 묘도 처음부터 여기 있었던 것은 아니 었다
절통한 그 사연이 있었으니 ....
한명회 [韓明澮, 태종 15년(1415)∼성종 18년(1487)] 자는 자준(子濬)
호는 압구정(狎鷗亭) 본관은 청주이며 婦人은 황려부부인 민씨로 1남 4녀를 두었으며
예종비(睿宗妃) 장순왕후(章順王后)와 성종비(成宗妃) 공혜왕후(恭惠王后)의 두딸의 아버지이다
그는 조선 전기 권력의 소용돌이 속에서 대표적인 훈구대신으로 알려젔다.
세조 2년(1456) 성삼문등 사육신의 단종복위 운동을 저지하는데 큰 공을 세워서
좌승지·도승지로 승진하고 1457년 이조판서로 상당군(上黨君)에 봉해 졌으며 이어 병조판서가 되었다.
1461년 상당부원군에 진봉되고, 1462년 우의정, 1463년 좌의정을 거쳐 1466년 영의정이 되었다.
墓隧에는 신도비를 비롯하여 문·무관석 장명등 석물을 갖추었고 비분은 약 1천여자의 해서로
한명회의 행적을 기록하였으며 비석 받침은 160×114㎝로
측면에는 모두 10개의 안상을 새겼고
윗면에는 12개의 연화문을 복연(覆蓮)으로 조식했다.
이수는 두 마리의 용이 구름속에서 여의주를 조롱하는 모습을 조각하였다.
비 몸은 이무기가 새겨진 덮 개로 돌은 대리석인데 비하여 비의 받침은 화강석으로 만들어져 있다.
비문은 서거정 (徐居正)이 지었고 비문 말미에
성종 19년(1488)에 세운 것으로 서거한 그 이듬해의 일이다.
한명회는 부모를 일찍 여의어 불우한 소년시절을 보냈으며 과거에도 늘 실패 하였다.
그러던 그가 문종 2년(1452) 38세 때 문음으로 경덕궁직으로 있을 때
친구인 권람(權擥)의 주선으로 수양대군에게 무사 홍달손(洪達孫) 등 30여명을 추천하여
그의 심복으로 삼아 정치적 기반을 닦기 사작했다.
(門蔭=공신의 후손이나 궁정의 친척관계등 문벌의특별한 연줄로 인해서 벼슬에 임명되는 것을 말함)
단종 1년(1453) 계유정난때 수양대군의 참모로서 대공을 세워 군기녹사가 되었고
정난공신 1등으로 동부승지·좌부승지에 승진되고, 또 좌익공신 1등으로 우승지가 되었다.
세조 즉위이래 성종조까지 고관 요직을 역임 군국대사에 참여하는데
세조때 부터 성종대에 이르기까지 총 4차례의 1등 공신으로
많은 토지와 노비를 상으로 받아 부를 누렸다.
그래서 청주에는 많은 토지가 있었다고 하며 한명회는 청주한씨 충성공파 代父이다
그는 말년에 압구정에서 음유를 즐기며 지내다가 나이 72살에 마치게되니 餘恨이 없을 것이다
한명회의 그러한 부귀영화도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화때
폐비윤씨의 죽음에 관련하였다 하여 사후에
시신을 부관참시 당하는 수모를 겪었으나 중종반정 이후 다행이 身元은 復權되었다.
당시 천하의 권력자 한명회가 호화묘소에 묻힌 지 꼭 17년 만에
의금부에서 청주로 내려가 한명회의 관(棺)을 쪼개어 머리를 베어 오자
연산군은 죄명을 써서 저작거리에 효수하라 명하게 된다
그렇게 부관 참시후 그의 시신이 저잣거리에 효수되는 대참사를 당한 뒤 후손들이
그의 유품을 나중에 수습해서 천안에 있던
그의 어머니 옆으로 묘를 만들어 놓은 것이 지금의 자리이다.
그래서 엄밀하게 따지고 보면 충청남도와 한명회는 직접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리고 얼마전 한명회 분묘에서 도굴 당했던 지석(誌石)은 지금 천안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지석은 망자의 신분이나 일대기를 돌에 기록해 묘에 함께 묻는 유물을 말하는데
특히 한명회 묘를 둘어싼 곡장은 커다란 암석으로 쌓여 있었으며
대군묘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하장이 길며 위험이 있었다.
그러나 웬 걸까요 그 이유가 있었으니.....
당시 이곳에 한명회 묘를 만들자 명당터라는 것을 안 나라에서
그의 기운이 또 다시 일어나 어떤 평지풍파를 일으킬지 모른다는 판단에 따라
기운을 누르고자 무거운 석재를 쌓도록 조정에서 嚴命 했다고 한다
권력을 가지 지금의 사람들도 탐욕과 권력에 왜들 짐착하는지
역사란 지나고 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신도비의 글자는 오랜 세월에 잘 보이지를 않았지만
부귀영화를 누렸으니 한명회는 여한이 없을 것 같다.
청주는 한명회 본향이고 그래서 많은 토지가 있었다고 한다.
청주의 옛명칭은 상당이라 칭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한명회가 세조한테 제수 받은 상당군(上黨君)으로
봉해진 벼슬 이름 상당은 청주시에 상당구가 있고 시내를 관동하는 상당대로가 있으며
상당산성, 상당공원으로 그 이름이 씌어지고 있으니 전혀 무관치는 않다고 할 수는 없다
또 한 한명회가 갈매기를 벗삼아 지냈다는 한강변에 狎鷗亭은
그의 호(豪) 로 지금은 강남의 중심부가 되었으니 죽어서도 이름을 남긴 셈이다.
하지만 후세 사람들은 가진권력으로 거들먹거리며
세상을 우습게 보는 오만함이 담겨 있는 이름이라고 하였다.
한명회 묘는
경부고속도로 목천IC 부산방향 6키로 지점으로
서울가는 길에 잠시 차를 세우면 고속도로에서도 아주 잘 보인다.
경부고속도로 옆에 위치하여 서울을 왕래할 때마다 보았을텐데 그냥 흘려 보냈던 명당이다.
조선 초기 수양대군이 세조가 되는데 기여를 한
한명회(韓明澮)(1415-1487)의 자는 자준, 호는 압구정(鴨驅亭), 본관은 청주이다.
장순왕후와 공혜왕후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추후 부관참시를 당하기도 하였다.
당초 한명회는 어머니를 이곳에 모셨었고
후손들이 한명회를 부관 참시된후 이 자리로 모신 것으로 되어 있다.
뒤에 있는 묘는 황려부인 여흥 민씨의 묘이다.
입수(入首)는 병자 입수이고, 우수좌류, 진방 파구이고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자리를 잡았다.
신(申) 득수로 장생득수이고, 자입수로 장생룡이며, 고장파이다. 申子辰 삼합법에 맞는 형국이다.
청룡과 백호사는 당판에 비해 낮은 것이 특징이다.
그동안 관산하였던 다른 명당과 차이가 있는 부분이다.
유곡 선생의 설명에 따르면 고산지룡(高山之龍)에서는 청룡과 백호가 명당을 감싸야 하나,
야산지룡(野山之龍)이므로 룡보다는 수를 보기 때문에 명당쪽이 청룡, 백호보다 낮아도 된다고 한다.
백호쪽으로는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고 있으나 크게 훼손된 상태는 아니다.
청룡사를 넘어서 묘방에는 쌍봉이 뚜렷한 산이 있고 병방과 정방에도 수려한 산들이 자리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