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노우볼 / 고선경 어릴 적 그녀는 소리 내어 영문을 읽을 때 잘못 발음할까 두려워하는 아이였지 그 아이가 살던 옛집에서 가짜 산타클로스의 품에 안긴 채 울음을 터뜨리는 사진을 나는 들여다보고 있다네 한 손에 꼭 움켜쥔 지팡이 모양 사탕에서는 체리 향이 났겠지 그녀가 유년 시절에 듣던 캐럴과 내가 죽은 뒤에 울려 퍼질 캐럴은 아마도 같을 거야 매년 다른 선물 상자를 풀던 그녀는 어느 크리스마스에 문득 풀어 볼 상자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테고 상자가 있더라도 더는 선물에 크게 감응하지 않는 그런 시시한 어른이 되었겠지 그런 미래가 너무 뻔해서였을까 눈송이가 창문에 콕콕 달라붙네 어떤 멜로디도 완성하지 않으면서…… 나는 잭콕을 마시고 있어 음악이 필요한 건 아니야 단지 그녀의 탄생을 생각하고 있지 그녀의 탄생에 관한 꿈을 어두컴컴한 거리에 환히 불 켜진 단 하나의 상점이 있었다지 신발 파는 상점의 매대에서 유난히 반짝이던 빨간 구두 그게 그녀의 태몽이라고 그녀의 어머니가 알려 주었어 유치찬란한 거짓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들지만 글쎄, 할 수만 있다면 나는 그 꿈으로 들어가 보고 싶네 가서 빨간 구두의 높다란 굽을 뚝 부러뜨리고 싶네 그러고는 유유히 상점을 빠져나와 어둠에 섞이다가 사라져 버리는 거야 그래 현실은 이미 사라지는 중이지 눈보라와 입김과 흰빛과 체리 향과 함께 흩어지는 그녀에 대해서는 대체 왜 묻는 거지 그녀가 세상을 뜬 지는 이십 년도 더 지나지 않았나 그래도 자네의 뜬금없는 전화 덕분에 이번 크리스마스는 덜 외로웠으니 그걸로 됐지 어쩌면 자네는 그녀의 딸이거나 그녀의 음악을 기억하는 오래된 팬일 수도 있겠군 현실은 매번 이런 식으로 닥치지 창밖의 젊은이가 구토하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정말 크리스마스다워 그래 이런 날마다 나는 그녀를 참 많이도 울렸다네 사진을 계속 들여다보고 있자니 사진이 움직이는 것 같네 물기 머금은 아이 눈이 이토록 커다랬나 꼭 크리스마스트리 장식 같군그래 흰 페인트칠이 벗겨진 방문과 거기에 기대어 웃음을 참는 아내 그리고 우스꽝스러운 산타클로스 분장을 한…… 나도 한때 행복한 젊은이였다네 ㅡ 계간 《시산맥》 2023년 겨울호 -------------------------
* 고선경 시인 1997년 경기도 안양 출생. 한양여자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202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샤워젤과 소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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