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해전
황원갑 <역사소설가>
올해 12월 26일은 이순신(李舜臣) 정군의 순국 420주년이 되는 날이다. 선조 31년(1598년) 무술년 11월 18일(음력) 밤. 이순신은 함대를 거느리고 장도를 떠나 적이 오는 길목인 노량바다로 진군했다. 60여 척의 조선 함대의 뒤를 200여 척의 명 함대가 뒤따랐다. 비록 전함 수는 명 수군이 많았지만 모두 조선 판옥선보다 선체도 작고 전투력도 떨어졌다. 막강한 조선 전함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진린(陳璘)을 비롯한 명나라 장수들이 조선 판옥선에 타고 전쟁에 임한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11월 19일 오전 2시경. 조명연합함대는 노량해협에 이르렀다. 조선 함대는 남해 쪽 관음포에, 명군은 하동 쪽 죽도에 진을 쳤다. 결전에 앞서 이순신은 갑판에 올라가 손을 씻고 무릎을 꿇고 향을 피웠다. 그리고 두 손 모아 하늘에 간절히 기도했다.
“천지신명이시여! 이 원수만 없앤다면 죽어도 한이 없으니 도와주소서!”
그러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그 순간 하늘에서 큰 별 하나가 바다 속으로 떨어졌던 것이다.
곧 이어 전투가 시작되었다. 적의 대함대가 순천 예교를 향해 사천 쪽에서 노량해협을 막 빠져나왔던 것이다. 그러다가 어둠 속에서 우리 배를 보자 조총을 쏘았다. 우리 수군은 즉각 응전했다.
달도 뜨지 않은 캄캄한 밤바다에서 불화살들이 핑 핑! 허공을 가르고 날아갔다. 둥 둥 둥 둥! 전고가 급하게 울리고 쾅 쾅! 쏘는 포성이 어두운 밤하늘과 밤바다를 진동했다. 포탄과 화살이 빗발처럼 날아갔다. 맹렬한 공격을 당한 적선들은 당황하여 방향을 잃고 우왕좌왕했다. 그러면서도 도망치기 위해서, 살기 위해서 온갖 발악을 다했다. 포탄이 작렬할 때마다 적선이 깨지고 불덩이가 날아가자 적선에 불이 붙었다. 적병들이 내지르는 아비규환의 비명이 사방에서 울렸다. 이순신은 겨울철 북서풍을 이용하여 맹렬한 화공을 퍼부었다. 적선들은 한 척 두 척 불타고 깨지면서 격침되었다. 남은 적선들은 허둥지둥 관음포 좁은 물길로 달아났다.
마침내 동쪽 하늘이 허옇게 밝아오기 시작했다. 수많은 적함이 치열한 접근전에서 불타고 부서졌다. 그러나 적군은 우리보다 수적으로 거의 2배나 되는 500여 척의 대 함대였다. 관음포에서 도망칠 물길이 막히자 적군은 최후의 발악을 했다.
선봉에 섰던 이순신과 진린의 전함이 번갈아가며 적선들에게 포위당했다. 그때마다 이순신과 진린은 포위망을 뚫고 서로를 구원하는 한편, 적선을 한 척 한 척 계속 격침시켰다. 이순신은 쉴 새 없이 북채를 들어 둥 둥 둥 둥! 전고를 울리고 독전기를 휘두르며 전투를 지휘했다.
이순신은 적선 가운데 한 층각선(層閣船) 위에 적장 세 놈이 타고 지휘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 적선에 접근하여 활을 들어 적장 한 놈을 쏘아 죽였다. 그러자 그때 진린의 배를 포위 공격하던 적선들이 층각선을 구출하기 위해 한꺼번에 이쪽으로 몰려왔다.
전투는 더욱 격렬하게 이어졌다. 단 한 놈의 왜적도 살려서 돌려보낼 수는 없다! 이순신은 더욱 힘껏 전고를 울리고 독전기를 휘둘렀다. 그러던 어느 순간, 홀연히 날아온 탄환 한 발이 그의 왼쪽 겨드랑이를 관통하여 심장 가까이에 박혔다. 치명상을 당한 장군은 갑판에 쓰러지면서도 전투를 걱정했다. 맏아들 회와 조카 완, 몸종 금이가 둘러싸고 있었다. 이순신이 입을 열었다.
"방패로 내 앞을 가려라.”
그리고 또 이렇게 말했다.
“싸움이 급하다. 내가 죽더라도 알리지 말라.”
그것이 이순신의 최후의 명령이요 유언이었다.
“이렇게 되다니, 기가 막히는구나!”
이순신이 죽은 뒤 회가 탄식하자 완이 이렇게 받았다.
“지금 만일 곡성을 내었다가는 온 군중이 놀라고 왜적들이 다시 기세를 얻을지 모릅니다.”
“그렇다! 그리고 또 시신을 온전히 보전해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습니다! 전쟁이 끝나기까지는 참는 수밖에 없습니다.”
회와 완은 터지는 울음을 참고 이순신의 시신을 선실 안으로 옮겼다. 그리고 다시 지휘대로 나와 전고를 울리고 독전기를 휘두르며 전투를 지휘했다. 그래서 전투가 끝날 때까지 적군은 물론 아군도 이순신의 전사 사실을 알 수 없었다. 심지어는 대장선에 같이 타고 있던 이순신의 심복 군관 송희립(宋希立)도 몰랐다.
그렇게 격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그날 정오 무렵이 되자 노량해전도 마무리가 되었다. 관음포 해역에 들어온 300여 척의 적 함대는 200여 척이 불타거나 부서져 격침되고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내며 전멸하다시피 대패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적장 시마즈 요시히로는 남은 배 50여 척을 이끌고 사천 쪽으로 달아났다. 예성의 고니시 유키나가도 노량해전이 한창 치열하게 벌어지는 틈을 타 직할 함대를 이끌고 멀리 남해를 우회하고 칠천량을 거쳐 부산으로 도주했다.
처절한 해전이 끝난 그날 11월 19일 남해 관음포 해상은 조명 수군 장졸의 통곡으로 떠나가는 듯했다. 전투가 대승으로 끝난 뒤 통제사가 전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바다는 온통 비통한 울음소리로 울렁거렸다. 조선군은 물론 진린을 비롯한 명나라 장수와 군사들도 울었다. 전투가 끝날 무렵 진린은 통제사의 대장선 곁으로 다가와 목이 터져라 외쳤다.
“이야! 이야! 통제사! 속히 나오시오!”
수차나 자기 목숨을 구해준 이순신과 더불어 전승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어서였다. 그러자 이순신의 조카 완이 뱃전에 나서서 이렇게 대답했다.
“숙부님은 돌아가셨습니다.”
그 말을 알아들은 진린은 갑판을 뒹굴며 애통하게 울부짖었다. 이순신의 전사 소식이 전함마다 전해지자 승전의 환호성을 올리던 수군 장졸 모두가 바다가 떠나가도록 구슬피 통곡했다.
노량해전이 끝난 뒤에 현지를 돌아본 좌의정 이덕형(李德馨)은 ‘왜선 200여 척을 격침시켰고, 사상자 수는 수천 명’이라고 보고했다. 그러나 조선 수군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주장(主將)인 이순신을 비롯하여 가리포첨사 이영남(李英男), 낙안군수 방덕룡(方德龍), 흥양현감 고득장(高得蔣) 등 10여 명의 장수가 전사하여 임진왜란 해전 중 최대의 피해를 기록했다.
그러나 명군은 진린의 부장 등자룡(鄧子龍)과 도명재(陶明宰) 등 두 명의 장수가 전사한 것으로 나온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명군보다 조선 수군이 주전(主戰)을 맡아 더욱 치열한 혈전을 벌였다는 반증이다. 그런데 통탄할 노릇은 그처럼 유례없는 대승을 거두었으면서도 고니시 유키나가와 시마즈 요시히로를 비롯하여 이름깨나 있는 왜군 장수들은 한 놈도 잡아 죽이지 못한 점이었다.
만일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전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에서 가정은 아무 소용없는 노릇이기는 하지만, 역사는 분명히 달라졌을 것이다. 이순신은 패퇴하는 왜군 잔당을 추격하여 부산 앞바다까지 가서 그들의 귀로를 가로막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본국으로 철수하려는 남은 적군과 또다시 필사의 혈전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 가상의 전투에서 일본군은 거의 전멸에 가까운 참패를 당하고, 살아서 일본으로 돌아간 자는 몇 명 되지 않았으리라.
또한 만일 그러한 부산해전이 벌어지지 않았다고 해도 일본군에게 남은 길은 자멸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순신과 진린의 조명연합함대에 뱃길이 막혀 바다를 건너가지 못하고, 본국에서 구원부대도 오지 않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한 일본군은 할 수 없이 부산포로 돌아가 버틸 것이다. 그러면 육지의 조명연합군과 의병 등이 바다의 연합함대와 합세하여 수륙합동작전을 펼칠 것이고, 결국 침략자 일본군에게 남은 길은 항복 아니면 전멸뿐이 아니겠는가.
이순신은 그렇게 죽었는데, 국왕 이균이 얼마나 형편없는 임금이었던가는 임진왜란 뒤의 공신(功臣) 선정에서도 잘 나타났다. 공신 호를 받은 사람은 선무공신, 즉 무관은 18명이고 호성공신, 문관은 86명이나 되었다.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고 싸우다 죽은 군인보다 피난길에도 당쟁을 멈추지 않았던 문관들에게 임금을 수행하느라고 고생했다며 무더기로 공신 호를 내렸던 것이다.
더욱 기막힌 사실은 곽재우(郭再祐) ․ 고경명(高敬命) ․ 조헌(趙憲) ․ 김덕령(金德齡) 등 빛나는 무공을 세운 의병장은 단 한사람도 끼지 못한 반면, 내시가 24명이나 되었으니 알 만하지 않은가!
원균(元均)도 처음에는 1등공신이 아니라 2등이었다. 공신도감 도제조, 즉 공신선정위원회의 위원장 격이던 이항복(李恒福)이 선무공신을 정할 때에 원균을 김시민(金時敏) ․ 이억기(李億祺) 등과 함께 2등으로 올렸는데 임금 이균(선조의 본명)이 이순신 ․ 권율(權慄)과 같은 1등으로 바꾸어주었던 것이다. 그때 이균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일찍부터 원균을 지혜와 용맹을 겸비한 사람으로 여겼는데 이제 원균을 오히려 2등으로 낮추어 책정했으니 어찌 원통한 일이 아니겠는가. 원균은 지하에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임금이 그렇게 나오니 이항복도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며 발을 뺐다.
“원균은 왜란 초에 수군이(부하가) 없는 장수였으나 이순신 덕택으로 해전에 참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뒤에 3도 수군을 전멸시켰으므로 이순신 ․ 권율과 같은 1등 공신으로 책정하기 어려워서 2등으로 내려 책정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전하의 가르침을 받았으니 1등 공신으로 다시 책정하겠습니다.”
결국 이균이 원균을 1등으로 올려준 것은 이순신을 통제사에서 파면하고 원균을 그 자리에 앉힘으로써 칠천량전투에서 참패하여 조선 수군을 전멸시킨 자신의 궁극적 책임을 회피하려는 비겁하고 간교한 술수였다. 그래서 오죽하면 사관(史官)도 이렇게 한탄했겠는가. <선조실록>의 기록이다.
- 지금 이 호성공신 ․ 선무공신은 그 수가 104명이나 되고, 심지어는 고삐를 잡는 천한 노예와 명령을 전달하는 내시까지 모두 거두어들여 외람되게 기록했는가 하면, 이들과 함께 소반의 피를 마시고 산하를 가리키며 맹세했으니 후세에 비웃음을 남긴 것이 여기에 이르러 극에 달했다. 일을 담당한 신하와 이목(耳目)의 관원들은 그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다… -
변덕스러운 이균은 국가를 멸망의 위기에서 구한 이순신에게 감사하기는커녕 자신의 실정과 실책을 덮기 위해 그가 죽은 뒤까지 미워했던 것이다. 이순신을 천고에 없던 영웅으로 칭송하고 찬양하는 반면, 미증유의 재앙인 임진왜란 ․ 정유재란을 막지 못한 국왕 이균과 형편없는 통솔력으로 수군을 궤멸시킨 원균에 대한 백성들의 원성은 높기만 했다.
이균은 비정상적인 성격의 주인공이었다. 자신이 적통(嫡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왕위를 이었다는 사실에 자격지심도 있었다. 의심과 시기심이 많고 독선적이었다. 이균의 이러한 증오에 가까운 미움과 시기심에 대해서 이순신이라고 모를 리가 없었다. 전에 이균이 무고한 김덕령을 죽인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순신은 자신이 전쟁이 끝난 뒤까지 살아남는다고 해도 결국은 이균의 마수에 빠져 무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을 것이다.
전에 정여립(鄭汝立)사건의 경우에서도 보았다시피 이순신과 유성룡(柳成龍)을 묶어서 역모혐의를 씌울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럴 경우 가족과 친척과 친지들의 안전도 무시할 수 없었다. 면사첩이란 게 있기는 하지만 변덕스러운 이균에게 그 따위 것은 백 장이 있어도 소용없을 것이다.
이순신은 언제 어디에서 죽더라도 천지신명과 조상의 영령에 조금도 부끄럽지 않게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자살은 미덕이 아니라 비겁한 도피행위, 비겁자가 선택하는 최후의 길이다. 이순신은 인품이 고매하고 당당한 인물이었다. 그런 이순신을 두고 전사를 가장한 자살을 했다느니, 자살을 가장하여 숨어 살았다느니 하는 허황한 말들을 만들어내는 짓거리야말로 이순신을 두 번 죽이는 일이요, 이순신의 거룩한 순국정신을 욕되게 하는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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