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기획]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 박기섭 | ||||
내 마음의 높고 아련한 시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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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의 정만서가 방학중을 만났다. 방학중은 영해 사람이다. 첫 만남이라 서로 통성명을 하는데, 정만서가 먼저 “나는 에누리 없는 정가요” 했다. 의표를 찌르는 화법으로 영해 촌사람의 콧대를 꺾을 심산이었다. 이럴 때 답변이 시원찮으면 승부는 싱겁게 끝난다. 그런데 방학중의 응수가 만만치 않다. 그는 태연스레 “나는 문지방 안에 방가요” 하고 받아쳤다. 이쯤 되면 두 사람의 의기투합은 시간문제다. 바로 이런 것이 수작이다. 던지기도 어렵지만, 마땅한 대꾸를 찾기는 더욱 어려운 법이다. 방학중과 정만서는 익살과 재담으로 숱한 일화를 남긴 기인들이다. 어떤 이는 평양의 김선달, 한양의 정수동과 함께 이 두 사람을 ‘조선의 4대 해학가’로 일컫기도 한다. 〈한우가〉로 널리 알려진 두 편의 시조를 읽는다. 이른바 화답시다. 화답시는 위에서 본 바와 같은 수작의 말부림이 시 속에 편입한 것이다. 우리 시문학사에서 화답시의 전통은 의외로 그 연원이 깊다. 시조만 해도 꽤 여러 편이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이방원의 “이런들 어떠하리”(하여가)와 정몽주의 “이 몸이 죽고 죽어”(단심가)를 필두로 서경덕과 황진이, 정철과 진옥, 임제와 한우의 화답시들이 그것이다. 서경덕의 “마음이 어린 휘니”와 황진이의 “어져 내 일이야”가 그윽한 기품의 연모가라면, 정철의 “옥이 옥이라커늘“과 진옥의 “철이 철이라커늘”은 한바탕 질펀한 육담가라고나 할까. 특히 정철과 진옥의 그것은 ‘살송곳’과 ‘골풀무’의 적실한 비유로 육담미학의 백미로 꼽힌다. 군자연하는 유교 사회의 금기를 여지없이 파기하는 배설의 정서가 녹록지 않은 까닭이다. 〈한우가(寒雨歌)〉는 우리 시문학사에 빛나는 명편 사랑시 가운데 하나다. 기발한 발상과 정감 어린 수사, 주고받는 수작의 표현이 적중의 쾌감을 동반하고 있다. 임제(林悌, 1549~1587)는 조선 중엽의 시인이자 문장가였다. 그의 시풍은 성격만큼이나 호방했고, 문장 또한 허균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뛰어났다. 게다가 거문고와 피리, 노래까지 잘했으니 그야말로 풍류 남아의 표상이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길을 나선다. 한우를 만나기로 작심을 한 것이다. 그게 〈한우가〉의 시작이다. 예전에는 재색을 아우른 기녀를 ‘해어화(解語花)’ 즉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 했다. 시문과 창무에 두루 뛰어났으니 문인 재사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짝인 셈이다. 한우(寒雨, 생몰년 미상)는 색향 평양을 대표하는 명기였다. ‘한우(찬비)’라는 이름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엔간한 풍모로는 범접조차 하기 어려운 어떤 강한 절조 같은 게 느껴진다. 이렇다 할 기록이 없어 세세한 면모를 살피긴 어려우나, 넘치는 재기로 상대의 의중을 꿰뚫은 화답시 한 수만으로도 능히 그 천품이 짐작되는 바다. 젊어서부터 기방 출입이 잦았던 임제가 그런 한우를 모를 리 없다. 기녀를 다루는 데는 웬만큼 이골이 난 그였다. 길을 나서면서부터 시조 한 수를 착상한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정황으로 보아 두 사람의 만남은 첫 대면임이 틀림없다. 그런 만큼 〈한우가〉는 즉흥시의 성격이 짙다. ‘북천’이라 한 걸로 봐서 한우의 거처는 평양의 북쪽에 있었던가 보다.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났으며, 그 만남의 정황이 어떠했던가는 그리 중요치 않다. 문제는 그 자리에서 임제가 시조 한 수를 노래(시조는 본디 시 이전에 창사(唱詞), 즉 노래의 가사였다)했다는 점이다. 이는 시조의 생활화를 그대로 보여주는 일이다. 은근하고 그윽한 임제의 노래가 유장한 가락을 타고 흐른다. “북천이 맑다커늘 우장 없이 길을 나”섰는데 웬걸,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가 친다. 물론 여기서 ‘찬비’는 ‘한우’를 말한다.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그대가 박대하면 두수없이 “얼어” 잘 수밖에 더 있는가. 짐짓 찬비에 자신의 속내를 빗댄, 절묘한 중의법이다. 그런 임제를 한우는 어떻게 맞이했을까. 노래가 끝날 때까지 다소곳이 아미를 숙인 채 듣고만 있던 한우가 마침내 고개를 든다. “어이 얼어 자리 무슨 일로 얼어 자리.” 이미 임제의 마음을 알아챈 한우였기에 굳이 애모의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아니, 숨길 까닭이 없다. 가슴 깊은 곳엔 하마 진작부터 “원앙침”을 시치고, “비취금”을 개켜 두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마음이 “찬비 맞았으니 얼어” 자겠다는 사람을 “찬비 맞았으니 녹아” 자게 한 것이다. “얼어 잘까 하노라”를 “녹아 잘까 하노라”로 뒤바꿔 놓은 솜씨가 단연 압권이다. 〈한우가〉는 남녀 간의 수작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조금도 비속하지 않고, 정분을 노래하되 전혀 가식이 없다. 그러면서 그 가락의 흐름은 참으로 자연스럽다. 시조 한 수를 주고받으면서 서로의 가슴을 열고 애틋한 정염의 밤을 기약한 두 사람. 그 뒷얘기를 물어 무엇하리. 임제의 피리소리에 한우의 가야금 가락이 어우러졌으면 그뿐. 그렇듯 몸과 마음이 어녹는 밤이었으면 그뿐. 이런 작품이 없었다면 우리 시문학사는 얼마나 건조하고, 또 얼마나 적막했겠는가. 이런 사랑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어디서 심금을 울리는 회심의 정조를 만날 것이며, 또 이렇듯 고아한 풍류의 격조를 헤아려 볼 것인가. 〈한우가〉를 읊다 보면 그 시대에 이미 반복법의 묘리를 깨우친 저 고려가요 〈만전춘별사〉가 자꾸 떠오른다. 이를 어찌 우연이라 할 텐가. “얼음 위에 댓잎 자리 보아 님과 나와 얼어 죽을망정/ 얼음 위에 댓잎 자리 보아 님과 나와 얼어 죽을망정/ 정 둔 오늘밤 더디 새오시라 더디 새오시라.” 임제는 나주 사람이다. 백호(白湖)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풍강(楓江), 벽산(碧山), 소치(嘯痴) 등의 별호를 쓰기도 했고, 만년에는 겸재(謙齋)로 고쳤다고 한다. 만년이라야 삼십 대 후반이다. 그는 불혹에도 못 미친 서른아홉에 유명을 달리한 비운의 천재였다. 호협한 성격으로 너저분한 예속에 얽매이기를 싫어했고, 겉치레를 배격했다. 그런 탓에 그는 서로 헐뜯고 질시하고 편당을 짓는 관료사회에 오래 부지하지 못했다. 환멸과 절망, 울분과 실의에 사무쳤던 그는 벼슬을 버린 뒤 탈속한 생활로 각처를 유람했다. 가는 곳마다 숱한 일화를 남긴 떠돎 속에 그가 지향한 행음(行吟)의 풍류가 오롯하다. 사람들은 그를 두고 기인이라 했지만, 정작 그는 그런 세평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느 면으로 보나 그에게는 방외인의 풍모가 약여하다. 그가 죽기 전 가족에게 남겼다는 〈물곡사(勿哭辭)〉를 옮겨 적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四夷八蠻 皆呼稱帝/ 唯獨朝鮮入主中國/ 我生何爲 我死何爲/ 勿哭(사방의 여러 나라가 다 황제를 칭하는데, 오직 우리 조선만이 중국을 주인으로 삼고 있다. 이 못난 나라에 내가 살면 무엇하고 죽은들 무엇이 슬프겠느냐. 울지 마라.)” 내친김에 이 글의 허두를 연 방학중 이야기를 하나 더 하고 글을 맺고자 한다. 사는 일이 하도 팍팍해서 곁말의 능청에 한눈이라도 좀 팔았으면 해서다. 방학중이 오십천(영덕에 있다) 물을 건너오니 물을 건너가려던 사람이 물었다.
박기섭 haengongdang@hanmail.net / 1980년 〈한국일보〉로 등단. 시집 《키작은 나귀타고》 《묵언집》 《비단 헝겊》 《엮음 수심가》 《달의 문하》 등이 있고, 박기섭의 시조 산책 《가다 만 듯 아니 간 듯》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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