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가 오롯하게 이웃해 있으면서도 그토록 각자의 지리적 특성이 다른 나라가 또 달리 있을 수 있을까? 일본, 중국, 그리고 우리 한국의 세 나라처럼 말이다.
일본(日本)은 니혼(にほん) 또는 닛폰(にっぽん)이라는 그의 일본어 이름이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해의 본고장, 적어도 아시아의 여러 나라 중에서는 뜨는 해를 제일 먼저 맞이하는 완벽한 도서국, 섬나라다. 그들이 그들 영토라고 주장하는 캄차카반도의 일부에 대해서도 러시아는 그런 주장을 인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은 누가 뭐라고 해도 세계에서 가장 큰 대륙 국가 중의 하나다.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큰 아시아 대륙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은 그들의 나라를 스스로 중국(中國)이라고 부르며 그들이 모든 세계, 그리고 하늘과 땅 사이의 중심에 있다는 이른바 중화(中華) 사상을 가지고 있다.
한때 만주의 대륙까지 그 영토를 넓힌 적이 있었던 우리 한국은 아주 전형적인 반도국의 하나다. 한국은 중국의 거대한 대륙과 일본의 그믐달 모양의 작은 군도와의 사이에 참으로 묘하게 자리해 있다. 초거대 대륙 판게아(Pangaea)가 이동하여 부침을 계속하면서 그런 모습을 만들었든, 반도의 나라 우리 한국이 자리한 위치를 보면 우연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잘 믿어지지 않을 만큼의 아주 특이한 자리매김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북아시아에 자리해 있는 이들 일본, 중국, 그리고 한국의 세 이웃 나라들은 이토록 서로가 판이하게 서로 다른 지리적 차이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다시 한번 이 세 나라가 함께 연하고 있는 황해와 동해, 그리고 동지나해의 바다와 서로가 이웃해 있는 지도의 형상을 눈여겨 살펴보기만 하더라도 서로가 보통의 예사로운 관계가 아닐 것이라는 점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유럽의 예를 본다면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이탈리아 등 세 나라가 아마도 우리의 세 나라와도 같은 지리적 특성과 지정학적 관계 속에 있다는 생각을 해보게도 된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을 보면 그 나라들이 놓여있는 위치가 우리처럼 오붓하게 둘러싸여 있는 모습과는 달리 길게 쭉 뻗어 있다. 또 우리 세 나라의 주변에는 우리에게 큰 영향을 끼칠만한 다른 나라의 존재를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그들의 주변에는 수도 없이 많은 다른 나라들이 그들 가까이에 자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 세 이웃 나라의 관계가 그 유례가 없는 특별한 것임이 틀림없다.
한편 우리 한반도의 주변국인 일본과 중국은 우리가 이들을 넘어서지 않고서는 어느 한쪽으로 나가기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하게 우리를 둘러싸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대로 일본이나 중국의 자리에서 보면 그들의 세력이나 영향력을 넓힐 수 있는 그 중심이 되는 위치에 우리 한국이 반듯하게 자리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또 이들 세 나라 간의 숙명과도 같은 관계를 눈치채지 않을 수 없다.
서로가 너무나 가까운 이웃 사이여서 아주 가깝게도 느껴지지만, 때로는 멀게만 느껴지기도 하는 그 애증의 관계가 너무나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는 우리 세 나라. 특히, 우리나라는 지금도 우리의 바로 이들 이웃 나라인 일본과 중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300만 명에 가까운 숫자의 우리 동포들을 가지고 있다. 이들 두 나라에 우리의 일부가 들어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랫동안의 역사를 통해 성쇠를 거듭해 왔던 그들이지만 세 나라 중에서도 대부분의 시기를 통하여 가장 강력했던 중국의 힘과 문화의 영향은 사실상 세계가 ‘동양東洋(Orient)'이라고 구분 짓는 지리, 정치, 사회, 문화적인 특성을 만들어 놓았다고 할 수도 있다. 중국의 영향 아래 깊게 뿌리내려온 불교적 종교의 전통은 물론 공자나 맹자, 노자의 동양철학 사상 등은 중국을 포함하는 일본과 우리 세 나라 모두의 사회적 가치의 기반이 되고 있다. 심지어는 민주와 자유라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이야기하면서도 그 바탕과 이들의 구체적 개념에 대해서는 동양과 서구가 서로 다른 시각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따위의 독특한 사회, 문화적 특성을 키워 나오기도 했다. 그래서 각각의 나라가 자리한 위치와 처한 환경이 크게 다르기는 하지만, 서구의 다른 사람들이 이들 세 나라의 모습을 바라보면 별다른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을 만치 서로가 많이 닮아있다는 인식을 주기도 한다.
일본과 중국, 그리고 우리 한국의 세 나라는 서로가 닮아있는 점이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문득문득 마주치게 되는 그들 각자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면 모두가 의아하게 생각하리만큼 커다란 서로 간의 차이를 가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이들 세 나라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찬찬히 비교해 보면 근본적인 사고나 생각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고 하더라도 일상적인 삶의 모습에서는 그 차이가 두드러지는 것들을 적지 않게 발견할 수가 있다. 모두가 하나의 유사한 문화권 속에서 서로가 너무도 비슷한 가치관과 생활방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보니 서로가 너무 닮지 않기 위해 그들 나름의 특징적인 모습을 일부러 나누어 가지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1986년 처음으로 내가 찾았던 선진국 일본의 첫 모습은 나에게 적잖이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도쿄에서도 새롭게 개발된 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신주쿠(新宿) 지역은 겉모습으로만 보아서는 서울과 하등의 다를 것이 없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새롭게 문을 연 나리타공항에서 개항 반대를 주장하는 주민들의 조용한 시위 모습, 우리 같았으면 민주화를 부르짖으며 거리로 광장으로 모여들어 시위를 벌이고 있을 나이 또래의 젊은 학생들이 공항을 빠져나가는 유명연예인을 에워싸서 뒤따르며 환성을 지르는 모습, 우리나라에서는 그때까지만 해도 구경할 수 없었던 고속도로변에 높다랗게 세워진 방음벽의 도열, 작은 골목의 거리 곳곳에서 아주 흔하게 눈에 띄는 각종의 자판기... 이 정도의 차이를 뺀다면 동경의 거리 모습은 고층빌딩이 조금은 더 높고 많다뿐이지 서울의 모습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였다.
그러나 내가 우리와 그들의 모습이 크게 다르다는 것을 느낀 것은 ‘리스텔(Ristel)’이라는 중급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짐을 풀면서였다. 양복저고리를 넣는 옷장의 크기가 문제였다. 옷을 가로로 넣게 되어 있는지, 아니면 세로로 넣게 되어 있었지 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여하튼 그 폭이 좁아 양복저고리의 어깨 부분이 양쪽이 구겨질 만큼 그 폭이 좁았다. 방은 모든 것들이 말끔하게 갖추어져 있었지만, 그것의 크기나 구조는 조금의 여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타이트했다. 이미 동경에는 캡슐 호텔이 등장했다는 보도가 있기도 했던 때였지만 누군가가 일본을 ‘축소지향형(縮小指向形)’의 사회라고 분석한 그들의 모습을 호텔의 방 모습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나는 그때 며칠을 그 호텔에서 머무르면서 때로는 아침을 그 호텔 앞의 작은 음식점에 들러 사서 들고는 했다. 그들 보통의 아침 모습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오가는 샐러리맨들도 심심찮게 찾아들었던 그 작은 식당의 메뉴는 우리의 것처럼 아주 간단했다. 그런데 더욱 간단한 것은 그 식단의 내용이었다. 대부분 그들이 즐겨 찾는 식사를 나도 주문하곤 했는데, 그것은 우리로 말하면 한 상의 아침 집밥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들이 아침 식사로 즐겨 먹는 것은 된장국 식사, ‘미소정식’이라는 것이었다. 밥 한 공기와 된장국 한 그릇, 작은 생선 한 토막과 끓이지 않은 ‘낫토’라고 하는 끓이지 않은 청국 한 숟가락이 그 정식의 식단이었다. 우리의 것과 비교해서는 아주 간소한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1996년부터 2년 동안 하노이에 머물면서 가끔 여행을 즐겼던 곳은 베트남과 중국의 국경이 만나는 중국 남부의 접경지역에 있는 핑샹(憑祥, Pingxiang)이라는 도시였다. 하노이에서 약 170km쯤의 길을 달린 뒤 국경을 넘어 15킬로미터쯤의 거리에 있는 인구 10만 명 정도의 도시였다. 가끔 그 도시를 찾았던 것은 접경지역의 풍물을 구경하는 것도 흥미로웠지만, 모처럼 만의 여유와 풍성함을 맛보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때마침 무척 자유로워진 베트남과 중국 간의 국경왕래로 쉽게 이들 양국의 국경을 드나들 수 있었다.
토요일 아침 일찍 하노이를 출발, 동북쪽으로 차를 몰아 이른 오후가 되면 베트남의 북부 관문 도시인 랑손(凉山, Langson)을 거쳐 베트남 측의 국경사무소에서 출국 허가를 받은 뒤, 바로 중국의 관문인 우의관(友誼關)이라는 문을 통과해 중국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우리는 주로 그곳 핑샹시가 운영하는 국영 호텔에서 하루나 이틀을 묶으며 그 주변의 관광지를 돌아보기도 하고 이국에서 맛보는 또 다른 이국의 정취를 느껴보고는 했다.
사실 우리가 그곳을 즐겨 찾았던 것은 하노이에서와는 달리 물건값도 비교적 싸게 느껴졌고, 특히 입맛에 맞는 푸짐한 음식을 마음껏 즐길 수가 있었던 때문이다. 그 당시 이미 중국에서는 외국인에 대한 이중 가격제도가 대부분 없어진 때였지만, 하노이에는 외국인에게는 상대적으로 비싼 가격을 물리는 차별이 적지 않았던 때였다. 같은 값이면 훨씬 더 풍성하게 맛난 음식을 들고 쇼핑도 즐길 수가 있었다.
그런데 쉽게 비교가 되었던 것은 역시 그들 중국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호텔 방에 비치된 집기라고는 별다른 것이 없었지만 그 공간만큼은 널찍해서 일단은 넉넉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가끔 그곳 사람들의 초청이나 안내를 받아 식사를 함께할 때면 그들의 푸짐한 식사 관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살아가는 모습이 그렇게 윤택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모습이 그렇게 각박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들은 둥글고 큰 원탁의 식탁에 모두를 마주 보며 앉는 것을 즐기는 것 같았다. 적당한 간격을 두고 나오는 음식의 가짓수는 끝이 없는 것도 같았다. 그들은 크게 신경 쓸 것 없이 먹는 것만큼은 여유를 갖는다고도 했다.
일본이라고 한다면 ‘페킹 덕(Peking Duck)’과 같은 방식의 요리는 결코 만들어낼 수 없을 것이다. 내가 1982년 처음으로 해외를 여행하며 방문했던 타이베이에서의 잊을 수 없는 경험 중의 하나는 바로 페킹 덕에 관한 것이었다. 전통적인 음식점에 초대되어 대접을 받은 음식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이 요리였다. 역시 푸짐했던 정통 중국식 만찬에서 그 요리가 그 식사의 하이라이트이기도 했던 것 같다. 흰색 앞치마를 두른 몸집이 좋은 요리사가 큼직한 쟁반에 역시 큼직해 보이는 튀긴 통 오리고기 한 마리를 어깨높이로 받쳐 들고 둥근 식탁을 한 바퀴 휭 돌며 손님들에게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무언의 인사를 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옆에 앉아있던 누군가가 그것이 바로 유명한 중국 음식의 하나인 페킹 덕이라는 것이었다. 잠시 후에 막상 그 요리가 나왔다는 것을 보니 별다른 게 아닌 것처럼 보였다. 노르스름한 색깔로 기름에 튀겨진 오리껍질 몇 개와 이와 비슷한 숫자의 얄팍하게 민 둥근 밀가루 떡, 이름 모를 약간의 채소와 소스가 전부였다. 그 밀가루 떡에 구운 오리껍질과 양념을 넣어 싸서 먹으면 그 맛이 일품이라는 것이었다. 그 요리는 바삭거리며 쫄깃하기도 하고 향긋한 밀가루 내음이 어우러져 그런대로 괜찮은 맛이 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나의 관심은 오리의 껍질 고기는 당연히 부차적인 것이고, 제대로 맛볼 수 있는 요리야말로 고소한 오리의 속살일 것이라고 은근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기다리고 있던 오리 속살 요리는 좀체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나는 옆에 앉아있던 사람에게 오리의 속살 고기가 언제 나오는지를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대답은 놀랍게도 그 요리는 속살이 아닌 껍질만을 먹는다는 것이었다. 아까운 몸통의 살코기가 버려지지는 않겠지만 손님의 상에는 더이상 오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식도락을 즐기기로 이름이 나 있는 그들이었지만 그것은 낭비가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에게는 물론, 더욱 알뜰한 살림을 사는 일본 사람에게 있어서 페킹 덕과 같은 방식의 요리는 있을 수가 없을 것이라는 내 생각은 아마도 틀린 것이 아닐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규모나 그 크기가 세 나라 각각이 달라 보였다. 대국적인 전통의 기질을 지니고 있다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중국 사람들은 거의 모든 것이 크고 풍성해 보였다. 반면에 우리가 섬나라 근성을 가지고 있다고 때로는 얕잡아 보기도 하는 일본 사람들의 모습은 일견 옹색하리만큼 작고, 좁고, 소박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중국과 일본을 사이에 두고 이른바 반도적 교량의 위치, 반도적 가교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우리들의 모습은 어떨까? 아마도 그것은 중국 사람들의 큼직함과 풍성함, 그리고 일본 사람들의 미소함과 검약함의 중간쯤에 우리의 것이 있지 않을까? 머리에 떠오르는 이런저런 것들을 쉽게 비교해 보더라도 그것은 크게 빗나간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사는 집들의 크기가 그런 것 같고, 그들이 각각 둘러앉는 식탁의 크기가 또한 그렇지 않은가?
이렇듯 우리가 중국이나 일본, 또는 일본과 중국의 사이에 있으면서 무엇인가 중간쯤의 자리에 있다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은 우리의 지리적인 위치뿐만은 아닌 것 같아 보인다.
일본, 중국, 그리고 우리 세 나라 모두가 비슷하게 유교적 전통의 가부장적인 권위가 존중되고 경로효친 의식이 어느 다른 서구의 나라보다 높게 형성되어 있다는 것은 누구나가 쉽게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들이 각자의 일상 속에서 표현하는 상대방에 대한 인사의 습성을 눈여겨보면 실로 큰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중국 사람들이 그들의 지위의 고하, 신분의 귀천을 불문하고 그 어느 사람도 그의 허리나, 머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상당한 예의를 표하는 경우에도 중국인들은 상체와 머리를 앞쪽으로 약간 움직이는 듯한 자세를 취할 뿐, 고개를 숙이는 법은 없는 것 같다. 대신 손을 들어 반갑다는 표시를 하는 것이 그들 보통의 인사법인 듯해 보였다.
반면에 나는 처음 인사를 나누거나, 또 웬만큼 알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보통의 경우 깊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지 않는 일본 사람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가끔 일본인들끼리 나누는 인사를 보면 허리가 거의 90도만큼이나 꺾이도록 몇 번씩이고 인사를 서로 주고받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들의 방식은 어떤가? 중국식도 아니고 일본식도 아닌 바로 그 어느 중간쯤?의 한국식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쪽에 치우치지 않고 꼭 그들의 절반에 우리의 보통 인사법이 있다. 우리의 경우 일반적으로 20〜30도쯤 상체를 앞으로 숙여서 서로 가볍게 인사를 나눈다. (계속...) (2003. 9. 25.)
첫댓글 한중일 삼국의 문화와 습관 역사 비교를 잘 하셨네요. 20년 전에 삼국을 바라보는 눈이 매섭습니다. ㅋㅋㅋ
순우의 세심한 관찰이 스며든 글을 잘 읽었습니다.
한ㆍ중ㆍ일간 지리적 접극으로 문화적
상호작용은 크다고 봅니다.
우리는 중국 공산주의는 배척해야 하지
만 일본의 실용주의는 선택적 모방을
해야 할것입니다.
반도국가는 힘이 약할때는 재앙이지만
국력이 강할때는 지정학적 가치는 매
우 크다고 봅니다.
좋은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