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날의 유례와 설날에 대하여.
오늘은 설날의 유례와 설날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설의 유래
설은 한 해의 첫날 전후에 치루는 의례와 놀이 등을 통 털어
가리키는 말로서, 첫날을 설날, 그 하루 전날을 까치설날이라고
부르고 있다.
설이라는 말의 유래는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고 있으나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5가지 설명이 통용되고 있다.
첫째, 삼간다는 뜻으로서, 새 해의 첫날에 일년 동안 아무 탈없이
지내게 해 달라는 바람에서 생겼을 것이다.
둘째, '섧다'의 뜻에서 유래된 말로서, 해가 지남에 따라
점차 늙어 가는 처지를 서글퍼 하는 뜻에서 생겼을 것이다.
셋째, '설다,낯설다'라는 뜻에서 볼 수 있듯이, 새로운 시간주기에
익숙하지 않다는, 그리고 완전하지 않다는 뜻에서 생겼다.
넷째, 한 해를 새로 세운다는 뜻의 '서다'에서 생겼을 것이다.
그러나 설이란 말은 17세기의 문헌에 '나이,해'를 뜻하는 말로 쓰여진 반면에,
요즘과 같이 나이라는 말이나 나이를 뜻하는 '살'이라는 말이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나이를 하나 더먹는 날'의
의미를 가진 '설날'이라는 말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다가 19세기에 들어서 나이를 가리키는 말이
'살'로 바뀌므로써, '설'과 구분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하루 전날인 섣달 그믐날을 왜 까치설날이라고
부르게 되었는지는 아직 밝혀진 바가 없다.
설날을 맞고 보낸다는 뜻을 말할 때,
다름 명절을 지내는 것과 같이 특별히 '쇠다, 쇤다'고 말하고 있다.
이 '쇠다'는 뜻은 '오래되다, 늙었다'라는 뜻을 가진 것으로 보아 설에 대한
해석 가운데에서 두 번째의 것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설을 쇠다'는 뜻은 '한 살을 더 먹어 늙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설날은 1년의 첫날이라는 점에서, '한 해'라는
시간단위를 전제로 하고 있다.
그와 함께 하루와 보름, 그리고 달과 계절 등과 같은 시간 단위는
사회생활과 일상생활, 제도와 농사 등고 밀접한 연관을 갖기 때문에,이러한
시간단위와 절일 등을 정하는 역법은 바로 국가의 중요한 기밀사항의 하나였다.
따라서 어느 날을 설날로 잡는가 하는 문제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문제로서, 현재의 설날은 달과 태양의 주기를 합쳐서
계산한 태음태양력에 의한 것이다.
이것을 일반적으로 음력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보름을 주기로
한 달의 주기를 통해서 날짜를 확인할 수 있는 태음력과 함께
계절을 확인하여 농사를 짓는 기준으로 삼도록 태양주기를
15일 간격으로 24절기로 나눈 것을 결합한 것이다.
이 음력은 통일신라시대에 중국 당나라에서 들여 온 것으로 보이며
이후로 대한제국 말기에 양력이 등장하여 신정이 자리를 잡기 시작할 때가지
약 1200여년간 설날은 이 음력을 기준으로 삼아 왔다.
따라서 한자로는 설날을 원일(元日)원조(元朝) 원단(元旦) 삼원(三元)
삼시(三始) 세수(歲首)세초(歲初) 연두(年頭) 연시(年始) 정조(正朝)
춘절(春節) 원진(元辰)단일(旦日) 등등으로 불리우고 있다.
이 가운데에서 원단이나 삼원 등고 같은 말들이나 3월 3일, 5월 5일, 7월 7일과
같이 양수가 겹친 날들을 중요한 명절일로 삼고 있는 종교가
도교인 것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이 날은 또한 도교와도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었던 날로 보이며, 그 흔적을 많이 발견할수 있다.
설은 일제시대에 양력을 기준으로 삼으면서 강제적으로 쇠지
못하게 하였으나, 오랜 전통에 의해 별로 성과를 보지 못했다.
이러한 정책은 광복 후에도 그대로 이어져 제도적으로 양력설에 3일씩이나
공휴일로 삼았으나, 오히려 2중과세의 문제가 사회적으로 대두되기까지 하였다.
따라서 1985년에 '민속의 날'로 정하여 비로소 공휴일이 되고
또 사회적으로 귀향인파가 늘어나면서부터 본격적인
설날로 정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2.설날의 풍속 -
설날 풍속은 당대의 지배이념의 영향을 많이 받는데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지배이념으로 삼았던 궁궐과 관리를 중심으로 한 지배계층의
풍속과 피지배계층이었던 생업에 종사하는 일반 서민들의 풍속으로 나누어 지며
그것도 설날의 전과 후에 걸쳐서 며칠간에 걸쳐 이어진다.
새로운 지배이념이 등자아했을 때, 과거의 지배이념에 의해서 이루어진
풍속은 그 잔존물로서 일부계층이나 지역에 민속에 남겨진다.
따라서 불교가 지배이념으로 채택된 때에는 무속의 풍속이
유교가 지배이념이 된 조선시대에는 불교의 풍속이 일부
지역과 계층의 민속으로 남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은 조선시대의 유교 풍속이 민속의
일부로 남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설빔 -
설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미리 마련해 놓은
새옷을 입는데 이 새옷을 「설빔」이라고 한다.
설빔을 위해서 각 가정에서는 가을부터 옷감을
마련하였다가 주부는 미리 정성껏 만들어 둔다.
설빔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없이 살림 정도에 따라서
마련하거니와 어린 아이는 설빔에 대한 기대가 크고
서로 자랑도 하기 마련이다.
옛날 같으면 어른은 두루마기 또는 도포를 비롯하여
버선. 대님까지 새로 한 벌을 하며, 바지. 저고리에는
새 솜을 두어 엄동설한에도 추위를 모르게 한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한벌을 마련하여 색동옷으로 곱게 단장한다.
여러 가지 색깔의 옷을 입으므로 마치 꽃밭처럼 아름답다.
설빔으로 갈아입은 뒤에야 차례를 지낸다.
성묘(省墓) -
설날 조상의 무덤을 찾아가 성묘를 한다.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했다는 인사를 조상의 묘에 고하는 것이다.
생존한 어른에게는 세배를 하지만 이미 사별한 조상에게도
생존시처럼 인사를 드리는 것이다.
많은 자손들이 나이 많은 어른을 앞에 모시고
조상의 효열담(孝烈談)을 들어가면서 줄을 지어
눈길 속에 성묘가는 모습은 아름다운 정경이다.
차례 -
설날 아침 일찍 세찬(歲饌)과 세주(歲酒)를 마련하여
사당에 진설하고 제사를 지내는 것을 정조차례라고 한다.
사당은 지손(支孫)은 모시지 않고 장손이 모시는데
부모·조부모·증조부모·고조부모까지의 4대조의 신주를 모셔두며
정조차례 때에는 차례대로 제사하고, 보통 제사 때에는 해당되는
분에게만 제사하게 된다.
5대조 이상의 신주는 각기 분묘 옆에 묻어 집에서는
지내지 않고 10월에 있는 시제 때에만 제사를 지낸다.
차례 때에는 원근에 있는 자손들이 모두 장손집에 모여
함께 지내는데 단란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다.
세배 -
차례가 끝나면 일동은 자리를 정리해 앉는다.
이때 조부모·부모· 백숙부모·형제 등 차례로 절을 하고
새해 첫인사를 드리는데 이를 세배라고 한다.
집 안에서 세배가 끝나면 차례 지낸 세찬과 떡국으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일가친척과 이웃 어른을 찾아가서
세배를 드리게 되는데, 사당을 모신 집이 있으면 먼저
사당에 절을 한 다음 세배를 드린다.
세배를 받은 측에서는 어른에게는 주식(酒食),
아이에게는 과일과 돈으로 대접하며 정담을 나누기도 한다.
일가 어른이 먼 곳에 살면 수십리 길을 찾아가서라도
세배를 드리는 것이 예의로 되어 있으며, 세배를 할 줄 모르면
교양없는 사람으로 취급을 받는다.
먼 곳에는 정월 15일까지 찾아가서 세배하면 인사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덕담 -
정초에 어른이나 친구를 만났을 때에 말로써
새해 인사를 교환하는데 이를 덕담이라고 한다.
이때에 「과세 안녕하셨습니까?」또는「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고
하며, 연소한 아이들에게는,「새해에는 복 많이 받게」또는
「새해에는 소원 성취하게」하는 등으로 처지와 환경에 알맞은 말을 한다.
덕담은 새해를 맞이하여 서로 복을 빌고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뜻에서 축의(祝意)를 표시하는 것이다.
歲銜(세함) -
벼슬을 하는 집안에서는 옻칠을 한 책상을 대청에 비치해 둔다.
그러면 밑에 거느리는 아전들이 종이를 접어 이름을 써서
책상 위에 놓아두고 간다.
각 관청(官廳)의 서리(胥吏)와 영문(營門)의 교졸(校卒)들도 종이에
이름을 적어 관청이나 선생의 집에 드린다. 이것을 세함이라고 한다.
설날이 되면 주인(主人)은 모두 하례하러 세배차(歲拜次) 나가서
부재(不在)이므로 이러한 제도가 생겼다.
3. 설의 놀이와 연희 -
새해에 개인의 신수를 점쳐 보기 위하여 오행점을 보거나
윷점을 치고, 또 토정비결을 본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오행점은 나무 조각에 금 목 수 화토를 새겨 장기 쪽같이 만들어
이것을 한번에 던져 엎어지고 자빠진 것으로 괘를 얻고
그 괘에 따라 정해진 점괘로 그 한 해의 신수를 본다고
하였는데, 현재 그 내용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윷점은 대부분 윷놀이를 시작하기 전에 보는 것으로, 윷을 3번 던져서
나오는 결과를 조합해서 정해진 점괘를 통해서 보는 점이다.
모, 와 윷은 같은 것으로 보고, 예글 들어 '도도도'는
'어린 아이가 인자한 어머니를 만난다' '도개걸'은 '남비가 등불을 친다'
'개걸도'는 '갓난아이가 젖을 얻느다' '모걸도'는 '구시가에 바람이
인다'등과 같은 내용으로, 특히 어린이 들고 부인들 간에
성행하였다고 한다.
[토정비결]은 이지함(李芝涵 1517-1578)의 저술이라고
전해지는 점서로, 인간이 태어 날 연월일시의 사주 가운데
연월일에 해당하는 수를 그 해에 정해진 수와의 관계를 가감해서
얻어진 괘에 따라 점을 친다.
이 점괘는 1년치와 함께 달별로 상순 중순 하순으로 나누어서
일신과 가사, 그리고 공사에 관한 다양한 내용의 괘사로 되어 있다.
지금도 정초가 되면 길거리에서 토정비결을 보아 주는
사람들을 볼 수 있는데, 조선시대 후기에 이루어진 세시풍속
관계의 문헌들에서는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마도 [주역]에
바탕을 둔 점서로, 민간에서 심심풀이로 전해 오던 것이 조선시대
말기에 널리 퍼진 것이 아닌가 보여진다.
일반적으로 3일이 지나면, 어린 아이들이 보름날까지
연날리기를 하다가 14일 날 저녁에 줄을 끊어 날려 버리면
그 해에 드는 액을 날려 버린다고 생각하였으며, 이것을
'액막이연'이라고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연을 만드는 종이도, 그리고 연실도 또한
만들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주로 서울과 같은 도시지역에서 성행했었다.
설을 지내고 3일째 되는 날에 일반 농촌이나 산촌에서는 마을고사,
또는 동제라고 하는 공동제사를 지내고, 집잡마다 찾아다니며
농악을 치고 고사를 지내는 '지신밟기'가 있다.
마을제사는 지방마다 형태가 다른데, 일반적으로 가족 가운데
병자가 없거나 험이 없는 깨끗한 삶을 제관으로 뽑고, 마을 뒤나
산위에 있는 당나무나 당집에서 유교식으로 지내는 제사를 말하는데,
마을 사람들과 동물이 건강하고 또 한 해의 농사가 잘되게 해달라는
축문을 일고, 소지를 올리고 끝낸다.
제사를 끝내면 마을 동회를 열어 마을의 공동 일을
의논하고 일년 동안 공동으로 사용한 경비를 결산하다.
지신밟기를 할 때에는 집집마다 조금씩 쌀을 내놓는데
이것은 마을이 공동자산으로 삼는다.
이 마을제사와 지신밟기는 새해를 맞아 공동의
생활공간을 새롭게 만들기 위한 의미를 갖는다.
4. 설 음식 -
설날 차례상과 세배 손님 접대를 위해 여러 가지 음식을
준비하는데 이 음식들을 통틀어 세찬(歲饌)이라 한다.
차리는 세찬에는 떡국, 세주, 족편, 각종 전유어, 각종
과정류,식혜, 수정과, 햇김치 등 여러 가지 음식들이 있는데
준비는 가세에 따라 가지수와 양이 다르지만 정성을 다해
만들며 어느 집에서나 만드는 대표 음식은 떡국이다.
그래서 떡국 한 그릇을 더 먹었다는 말이 설을 쇠고
나이 한 살을 더 먹었다는 표현이기도 하다.
한편 설전에 어른들께 귀한 음식을 보내는 일, 어른들이
아랫사람들에게 보내는 먹을 것들도 세찬이라고 하였다.
그때 보내는 종류는 여러 가지가 있었으나 대표적인 것은 쌀,
술, 담배, 어물(魚物), 고기류, 꿩, 달걀, 곶감, 김, 등이었다.
떡국 -
설날에 흰떡국을 끊이는 풍습은 최남선의[조선상식]에서
흰색의 음식으로 새해를 시작함으로써 천지만물의 부활신생을
의미한다는 종교적 뜻이 담긴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흰떡으로 역사를 문헌으로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벼농사를 짓고
시루와 확돌을 사용하던 때가 B.C 4 - 5세시경으로 밝혀져
있으므로 이 때부터 흰떡이 만들어 졌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흰떡은 멥쌀가루를 쪄서 안반(按盤)위에 놓고 메로 쳐
매끄럽고 치밀하게 되도록 한 다음 가래떡으로 만든다.
이 떡을 백병(白餠)거모(擧摸)라 하였다.
꾸득꾸득해진 가래떡을 얇고 어슷하게 썰어서 떡국거리로 준비해 둔다.
지금은 기계화되어 사라진 정취지만 1950년대만 해도 세모에
집집마다 떡에 소리가 골목을 메워서 즐거운 명절 분위기를 자아냈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떡국은 흰떡과 쇠고기, 꿩고기가 쓰였으나
꿩을 구하기 힘들면 대신 닭을 쓰는 경우가 많다. "꿩대신 닭"이란
말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했다.
요즘은 쇠고기가 많이 쓰이고 있다.
떡국 끓일 때는 고기장국을 미리 끊여 두어야 한다.
국물이 맛있게 우러나는 양지머리를 고아서 덩어리는
편육으로 이용하고,양념한 장국을 끊이다가 준비된 흰떡을 냉수에
씻어서 넣고 한소끔 끊이면 떡이 떠오를 것이니
이때 그릇에 담아서 웃기를 얹는다.
웃기는 따로 살코기를 다져 놓은 것고 황백지단을 쓴다.
혹은 살코기와 움파를 꼬치에 꿰어 만든 산적을 한 두 꽂이 얹기도 한다.
특히 개성 지방에서는 조랭이 떡국을 끊이며 충청도 지방에서는
생떡국, 이북 지방에서는 만두국을 끊이기도 한다.
평안도 만두국 -
밀가루를 따뜻한 물로 반죽하여 젖은 보자기로 덮어 두었다가
끈기가 생기면 손바닥 만큼씩 둥글게 밀어 놓는다.
속은 쇠고기, 돼지고기를 다지고 김치는 속을 털어내고
곱게 다져 물기를 꼭 짠다.
두부도 베주머니에 넣어 물기를 짜고 숙주나물은 살짝 데쳐서
잘게 다져 물기를 꼭 짠 다음 잘 섞어 갖은 양념으로 무친다.
밀어놓은 껍질에 소양지를 넣어 두었다가
쇠고기로 육수를 만들어 만두를 넣어서 끊인다.
상에 낼 때 그릇에 떠서 웃기로 황백지단
채 썬 것을 얹고 초장을 곁들인다.
조랭이 떡국 -
멥쌀가루를 곱체 쳐서 흰떡을 만들어 참기름을 바르면서
나무칼로 썰어 조랭이떡을 만든다.
양지, 사골, 양, 등을 고아 국물을 만들어서 간을 하고
삶아진 건지는 건져 양념해서 웃기로 쓴다.
준비한 떡을 찬물에 헹구어서 끊는 장국에 넣어 끊으면
그릇에 담고 고기와 완자, 홍백지단을 웃기로 얹는다.
여러분들에게 유용한 정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첫댓글 깊은뜻이 있었군요. Thanks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시여 파크골프도 열심히 치세요^^
예~!
그렇군요 ~
감사합니다.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설날의 유래와 그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들...
새로운 이야기도 많고...
그래도 예전 설날이 너무나 그리워지네요~~
새옷도 하나씩 얻어입고요.ㅋㅋㅋ
읽어주시고 답글도 주시어 감사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