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종 시 모음 2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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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0년 지기
박희종
눈이 엄청 와
갈길
온길 끊어진
어젯밤 새벽녘
잠시 눈떠져
잠시 쉬다가
옆에서 자고 있는
마누라의 손을 잡았다
따스하고 포동포동한 것이
옛날처럼 나를 반겨주었다
함께 있다는 생각
든든하다는 믿음
사랑스럽다는 느낌
잠결에 차낸 이불 덮어 주다보니
끓어올라
얼굴 한 번 쓰다듬어 주고
쉬었던 잠 다시 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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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쎄
박희종
내가 누굴 사랑하는지
누가 나를 사랑하는지
귓가에 스치는 바람처럼
속 내 감추고 흐르는 물처럼
느낌으로 알지요
그러나 알 수가 없네요.
내가나를 사랑하는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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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단풍
박희종
봄꽃이 아름답다 해도
가을꽃을 따를 수 없다는 말이 붉다
2040따로
5060따로
7080따로
좌 따로
우 따로
할 말이 많네
정열을 불태우다가
봄꽃을 위하여
몸 바치는 단풍처럼
서로 얼싸안고
두둥실 춤추는 날은
내일일까
모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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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도루묵
박희종
흙이
모래가 되고
모래가
자갈이 되고
자갈이
바위가 되더니
그 바위는 거대함을 자랑한다
그러나
바위는
자갈이 되더니
모래가 되고
흙이 되어
바람에 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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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매미
박희종
시를 쓴다고
무심코 던진 한 마디
돌멩이 되어
예쁜 풀들, 벌레들 다칠지 몰라
낯선 단어들을
퍼즐처럼 맞추며
모양만 그럴듯하게
엮어내지는 않았는지
진정, 시인은
때론 말문을 닫고
가슴으로 새기며
이쁘게 살아가는 사람…
아무래도 자격을 반납해야 할까봐
허물벗고
내일을 기약하며
날아간 매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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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몸 부려
박희종
냇가 건너편 밭에 심은 콩
소독한번 하지 않아
풀반
콩반
추석 지나니 잎이 누럭누럭
사랑하는 아들과
밀짚모자 눌러 쓰고
콩을 뽑아 세웠다
아래엔 차광막 요 깔고
위엔 비닐 이불 곱게 씌우고
가을볕에 때깔나게 마르면
도리깨질하여
맛난 된장 담가
좋은 친구 오거들랑
보글보글 끓여 먹어야지
입가에는 미소가
뻐근한 허리에서는
분홍빛 엔돌핀이 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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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못난이
박희종
죽자 사자 사는 일이
치거니 받거니 사는 일들이
기막힌 감동으로
와 닿는
아름다운 한 세상
아무도 탓 할 수 없다
내 잣대로
남을 싫어 할
권리도
자격도 없다
왜냐면
내가 못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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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사랑
박희종
사랑하는 사람이
아픔을 겪는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사랑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대신
차라리 내가 아플걸
절절이
느껴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사랑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아픔은 빼앗아 가는것이 아니고
돌아보고
돌아가는 자숙
아픔도 기쁨
기다림도 기쁨
사랑도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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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사랑하는 동생에게
박희종
더위를 피하느라 난리들을 떨은 것이 엊그제인데
조석으로 쌀쌀한 바람이 불어 옷깃을 여미니
분명코 가을인 듯 싶구나
어렸을 때는 독서의 계절인줄로 알았던 가을이
낭만의 계절, 사색의 계절로 느껴짐은
나이에 따른 시각의 차이인가?
고추랑 콩이랑 가을걷이 끝났으니 이젠 겨우내
땔 나무 할 일만 남았나보다
영선아!
엊그제 통화를 하고 생각을 해보니 너도 가을을 타는지
너무나 사색적이고 철학적이어서 이 오빠의 마음이
좀 그랬단다.
차라리 겨울이 되어 온천지에 하얀눈이 내리면
마음이 차분해질텐데, 수확을 하는 가을들녘에
서있는 우리들은 그 자연에 비해 뭘 하고 살고 있나,
나의 뜻은 무엇인가, 과연 나는 어디로 가고 있나 등의
삶의 의미에 대하여 한번쯤 생각해 보는 계절인 듯 싶다
이 오빠도 요즈음 가끔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들어 잠 못 이루기도 한단다
사랑하는 나의 동생 영선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충남 금산 하옥리 334번지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오래도 살아왔네그려
합신당 제과소에서 셈베나 유과를 먹고
백양 아이스케키를 실컷 먹고 자란 우리 형제들,
그 후 서울로 이사와서 겪었던 이런 저런 일들
대림동 재활용사촌,
네가 전학한 문성초등학교,
나의 대학시절과 일광초자,
수도중학교때 우리 곁을 떠난 희철이,
그날들을 어떻게 다 말할 수 있을까,
영선아!
너는 열심히 그리고 보람지게 살아왔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시간을 낭비할 때 너는 한 시대의 아픔을
공감하는 사회의 파수꾼으로써 그 역할을 충분히 했다고 본다
너에게는 한번도 표현하지 못했지만 네가 젊음을 던져
어려운 사람들을 위하여 희생한 그 삶을 이 오빠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네가 공주교도소에서 복역 할 때에도 너한테는 가족이기에
만류했지만 뒤돌아서서는 강한 자부심을 느꼈었단다.
내 사랑하는 아우 영선아!
한가지도 아닌 두가지의 병마를 겪었을 때
이 오빠는 막걸리 좀 먹었지,
형과 누나는 잘살고 있으니, 너는 내가 책임진다고 내 마누라와
네 조카한테 평상시 입버릇처럼
이야기만하고, 진작 너한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어
면목이 없구나.
영선아!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네가 그 병마를 잘 타일러
잠재운 것은 우리들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위하여 노동 인권운동하며
키워진 너의 정신이 원동력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고약한 병마와 잘 타협해주어 고맙다.
황토방에 군불 한 부석 지펴 넣고 너를 대하고 있으니,
지난 일들이 영화의 파노라마처럼 스치고 지나 가는구나
살다보면 내 마음 같지 않아 주위에서 우리들을 실망시켜
매우 화를 나게 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거기에 집착하면
우선 내가 피곤하니 후울쩍 뛰어넘어 잊는 것이
지혜가 아닐까?
그 당시에는 그 일이 매우 중요하여 격분도 하고
매달리는 열정도 갖었지만, 세월이 지난 후 돌이켜보면
하나의 기억으로만 남듯이, 사는게 별 대수가 아니라
멀고 먼 여정에 불과하지 않나하는 생각을 해본다.
사랑하는 나의 동생 영선아!
이 오빠도 딴엔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했지만
요즘들어 내 인생에 보람진 의미를 부여해주기가 어렵다는 생각이다.
막연하게 기대하는 것은 우리들의 과거에 희로애락이 있었기에
현재가 있듯이, 지금 우리가 당면하여 골몰하고 있는 과제들은
훗날에 아름다운 추억이 되리라는 것이 존재의 이유이다.
내 아우 영선아!
너의 여정 54년
나의 여정 63년
합하니 117년
이런 사랑도 해보고
저런 열정도 가져본 우리들
이젠 새롭게 조용히 멋진 설계를 할 때이다.
자동차도 10년이 되면 중고 중에 중고라는데 우리들의 연식이면
뭘 더 바랄까?
지금 우리들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적, 물질적, 대인적인 생각들.
여기에서 욕심부리면 그 동안 살아온 날들에 욕보일까
겁나네 그려
하늘에 떠 있는 구름 보듯이 때론 가볍게
때론 아름답게 보며 살아보자
옛날엔 매우 현실적이고 도시적이었던 오빠도
이 산골에서 한 15년 살다보니,
조금은 눈에 보이는 것 같더구나.
부르기만 하여도 절절한 동생아!
네 몸속에 남아있는 아픈기운은 이곳 무릉리의 좋은 공기와
물을 찾고 있단다.
이 오빠가 15년전, 전연 엉뚱하게 서울을 버렸듯이
기왕 마음 먹은일 너도 그 도시를 버리고 내려와
텃밭에 상추랑 오이, 가지 심고
지난 날들을 회고하며 딴 세상을 살아보자.
오늘은 운일암 반일암
내일은 용담호
모레는 마이산에 도시락싸고 술 한병들고
오빠랑 소풍다니며 남은세월 재미있고 신나게 누리는
오누이가 되어 보자구나.
내려와 잊을 것은 잊고 우리가 조금만 더 멍청해지고
단순해 질 수 있다면 앞으로 좋은 날들이 있지 않을까?
또한 친환경소재인 흙과 나무로 지어진 새터의 집이 기다리고 있다.
바라보는 곳이 동쪽이라서 좋은 기운을 너의 온몸으로
받아들이면 건강에도 좋은 약이 되리라 믿는다
만날 날을 기다리며
가을비 내리는 밤
황토방에서...
오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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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신체 검사 삑구
박희종
밥 먹을래?
삑구 할래? 하면
삑구 하던 내가
이제는
밥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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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신체 검사 눈알
박희종
들어 누워 눈자위속 뼈 만져보니
손에 잡히는 구멍두개
상하좌우로 손가락 돌리며 크기를 재본다
“아! 이것이 해골바가지 보면
뻥 뚫린 그 구멍이구나.”
지금이야 눈꺼풀로 덮여있지만
언젠가는
나도
휑하니 구멍 두개만 남겠지!
뻥뚫린 해골바가지
뻥뚫린 구멍이구나
언젠가는 나도
언젠가는 나도
휑하니 구멍 두 개만
휑하니 구멍 두 개만
남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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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신체 검사 머리털
박희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째 낸다고
앞머리로 가린
5살 때의 이마 흉터
이젠 가리지 않는다.
좋아 빠지고
나빠 빠지다 보니
오랜만에 만난
엊그제 어느 친구
“다쳤어?”
“아녀! 어렸을 적 흉터야!”
몰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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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신체 검사 모가지
박희종
거울 앞에 서면
내목은 칠면조
고개를 젖혀보고
내려도 본다.
“그래 동창이니 맞먹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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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신체 검사 손등
박희종
까아만 오돌개 따 먹을라구
뽕나무 300주
구덩이 파고
심고
잘크라구 비닐 씌우니
아이구 허리야!
귀찮아 대략 씻고
저녁상에 앉아
내 손등 살갗 땡겨보니
땡겨진체
한참을 그냥 있네.
“허기야!
너도 내 나이만큼은 먹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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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얘야!
박희종
따스한 가을녘
갓 돌 지난 손주 녀석을 안고
앞뜰에 나와
“얘야! 이것은 대나무이고
저것은 소나무란다“
평상에 말리고있는 대추를
한입 으깨어 물려주며
“이것은 대추란다”
하고 이야기 해주었다
내려다보고 있던 햇님도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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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여의도
박희종
이래야 하는데 이럴 수도 없고
저래야 하는데 저럴 수도 없고
끊어야 하는데 끊을 수도 없고
끊지 말아야 되는데 끊어야 되고
따라 다니면 안 되는데 안 따라 갈 수 없고
안 따라 가야되는데 따라가게 되고
해야 될 일은 안하고
안 해야 되는 일은 하고
되는 것도 아니고 안 되는 것도 아니고
이 눈치보고 저 눈치보고
세월은 배타고 망망대해로 가는구나
세상은 요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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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여의도
박희종
이래야 하는데 이럴 수도 없고
저래야 하는데 저럴 수도 없고
끊어야 하는데 끊을 수도 없고
끊지 말아야 되는데 끊어야 되고
따라 다니면 안 되는데 안 따라 갈 수 없고
안 따라 가야되는데 따라가게 되고
해야 될 일은 안하고
안 해야 되는 일은 하고
되는 것도 아니고 안 되는 것도 아니고
이 눈치보고 저 눈치보고
세월은 배타고 망망대해로 가는구나
세상은 요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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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이나 저나
박희종
절 싫으면 중 떠나듯
교회 좋으면 신부오고
절 좋으면 목사오고
성당 좋으면 떠난 중 다시 오고
오고 가고
가고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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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장땡
박희종
세상 살음은
사람 좋아하고
사람 싫어하는 살음
사람한테 태어나
사람낳고
사람끼리 어울려 사는 것이 살음이라하지만
결국 우리는
좋아도 죽고
싫어도 죽는다
세상 살음은
그냥 조용히
다녀간 줄 모르듯
살아가는 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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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제갈공명
박희종
아는 체 해도
남은 모르고
잘난 척 해도
나만 알뿐
모르는 척
못난 척 사는 것이
아는 사람
잘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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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합환목(合歡木)
박희종
저게 무슨 나무라구?
침실 앞에 있으면 부부사이가 좋아진다는
합환목이잖아!
꽃이 이쁘더라구
맞아! 보라빛깔 띄운 연분홍색이지
그래서 그런가?
뭐가?
우리 부부사이 말여
안 맞는 것 보단 맞는 게 많은 편이지
더 좋을람 어떻게 해야되야?
거름 주고 더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봐야겠지
그건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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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허수아비
박희종
된장 담가 먹을라구
쟁기질하고 고랑 내어
구부렸다
폈다하며 심은 콩밭
한이레 지나니
메마른 땅 밀치고
하나 둘 고개를 내미는 떡잎
맛집 찾아다니는 식객들처럼
온 동네 비둘기 다 모여
무공해 식사를 하네
바람 불면
윙윙거리며
요동치는 빤짝이를
예서 저리로
제서 이리로
말목박고 줄을 멘다
윙~윙 빤짝 빤짝
이골 난 비둘기
눈 하나 깜짝 않고
삼삼오오
반상회를 계속하네
워이 워~이
워~이 워이
소리 지르다 지쳐
밀짚모자 눌러쓰고
아예
콩밭에 주저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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