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三章 마지막 암살자(暗殺者) 1 십 일 후. 계절은 이미 가을(秋)의 문턱을 넘어선 듯하다. 새벽에 일어나는 사람이라면 뜨락 가득히 무서리가 눈꽃보다 처연히 피어난 것을 보게 되리라. 거대한 전각. 열 개의 아름드리 대리석 기둥이 전각 지붕을 떠받치고 있다. 전각 뒤쪽에는 기화요초(琪花瑤草)가 만발한 뜨락이 있고, 좌측에는 연화(蓮花)가 가득한 호수가 펼쳐져 있으며, 호수에는 다섯 개의 가산(假山) 그림자가 담기어져 있었다. 전각으로 오르는 계단은 일백팔 개. 이 곳은 가히 자금성(紫禁城)을 능가하는 규모의 성지라 할 수 있었다. 지금 바늘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깊은 침묵의 장막이 전각 일대를 뒤덮고 있다. 보이지 않되 무수한 무사들이 전각 둘레에 포진해 있다. 내공이 절정에 이른 자들, 이들은 호흡 소리마저 죽인 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사방을 감시하고 있다. 어디 그뿐이랴? 전각 주변에는 열두 가지의 기관이 설치되어 있기에 나는 새라 할지라도 이 곳을 통과할 수 없다. 이 곳, 바로 마황전(魔皇殿)이 아니겠는가? 구천십지(九天十地)의 제반 마도계 인사들이 절대자로 경배하고 있는 인물이 머물러 있는 곳. 이 곳은 바로 천겁만마전주(千劫萬魔殿主)의 거처이기도 했다. 한 노인, 그는 거산(巨山) 같은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금빛 장포를 걸친 노인은 뒷짐을 진 채 연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두 눈에서 금채(金彩)를 번뜩거리는 인물, 그의 체취에는 감히 도전하지 못할 기개가 엿보이고 있었다. 마황(魔皇). 그는 천겁만마전을 장악한 인물이며, 그렇게 하기 위해 자신의 친형과 조카를 베어 버릴 정도로 무자비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의 나이 이제 일흔다섯. 과거에 비해 그의 마성(魔性)은 한결 줄어든 듯, 얼핏 보면 악마의 절대자라는 것이 실감나지 않는다. 그는 백미를 잔뜩 찌푸리고 있었으며, 잠시 전 그를 찾아와 숙연한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한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단정한 인상의 미서생, 그는 마황의 무기명 전인이며 천겁만마전의 순찰부를 이끌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패배감에 가득 찬 얼굴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를 제거한 인물은 분명 대륙의맹(大陸義盟) 쪽에서 비밀리에 파견한 암살자일 것입니다." "……." "또한 그는 오행신마를 죽인 자일 것입니다." "왜 그렇게 단정하는가." "그의 시신을 조사해 본 결과, 그의 사인은 오행신마의 사인과 같았습니다. 그 자는 정확히 일 초로 사형마제의 목젖 천돌혈(天突穴)을 잘라 버렸습니다." "으음……!" "당시 그는 마교대법을 완성하는 상황이었으며, 그의 손에는 애검(愛劍) 흡혈천사(吸血天邪)가 쥐어져 있었습니다. 그로 미루어 보아 상대는 그에게 정체를 노출당했으며… 결국 그는 최고 절정자(絶頂者)는 아니었다 사료됩니다." 미서생의 말이 거기에 이를 때. "꼭 그렇지 않을 수도……!" 마황은 시선을 위로 쳐들었다. 하늘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늘 하늘을 조롱해 왔던 마황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그는 하늘을 겁내고 있었다. 물론 그의 추종자들은 알지 못하는 일이되……. "어떠한 의미에서 그러한 말씀을?" 미서생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뇌제갈(魔腦諸葛) 동천류(董天流). 십 오세가 되기 전에 마도의 병법서를 통달했으며, 백도에서 전해지는 제반의 병서도 완벽하게 그의 머리 속에 들어 있다. 그는 마황 헌원사령(軒轅邪靈)이 가장 아끼는 인물이다. 그는 마도제일의 천재라 불리우고 있으며, 십대마가(十大魔家)의 영재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자이다. 그러하기에 그는 마황의 수석 서기 겸 총순찰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은둔해 있던 사형마제를 제거한 자는 두 달 전 오행신마를 추적 살해한 자이며, 지난 삼 년에 걸쳐 천겁만마전에 동조하는 요인(要人)을 백이십삼 명이나 암살한 바로 그 자임에 들림이 없다." "그… 그렇습니다." "그는 가장 강하며 가장 빠른 자이다. 또한 가장 치밀한 자이기도 하다." "그렇습니다." "대륙의맹 쪽은 우리를 견제하고 있으며, 우리 쪽으로 포섭되어 오는 사마외도인(邪魔外道人)을 소리 소문 없이 암살하고 있다. 우리는 오랫동안 그들의 정체를 조사하였으며 의맹에 첩자를 파견하기까지 했다." "……." "결국 우리는 알게 되었다. 대륙의맹 내부에 하나의 암살 조직이 있고, 그 이름이 대외살각(對外殺閣)이라는 것을!" 천겁만마전과 대륙의맹은 백년숙적(百年宿敵)이다. 대륙의맹은 백도를 이끌고 있으며, 천겁만마전은 변황해외(邊荒海外)의 마도세력을 규합하여 중원천하의 대권(大權)을 장악하는 야심을 기르고 있다. 두 세력은 묘할 정도로 균형을 이루고 있기에 견제는 할 뿐, 이렇다 할 접전은 벌어지지 않는 상황이었다. 최근 들어 양대세력의 균형이 깨어지기 시작하였는 바, 모든 일은 한 명의 전문 암살자로 인해 벌어지고 있었다. 마황의 눈빛이 한층 차가워졌다. "그 자는 대외살각의 우두머리이며 백도 최후의 암살자이다. 그 자는 가공할 살인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대륙의맹은 그 자로 인하여 천겁만마전보다 우위에 서게 되었다. 그 자는 치밀하며 정확하다. 그 자가 사형마제보다 늦게 발검(拔劍)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일부러?" 마뇌제갈은 흠칫 놀랐다. 또한 마황의 표정은 조각처럼 굳어졌다. "그렇다. 놈은 일부러 사형마제에게 시간을 준 것이다. 과거 오행신마를 죽였을 때 그러했듯, 그는 마도인의 무공을 철저히 조롱하고 있기에 일부러 기회를 주고 나서 제거하는 것이다." 지난 삼 년 간, 천겁만마전의 순찰부는 한 인물에 대한 조사로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마뇌제갈은 그 일을 전담하고 있으며, 그가 전적으로 담당하고 있는 인물은 천겁만마전에 가장 강력한 도전자로 두드러지고 있는 한 인물에 대한 건(件)이었다. 창궁비연(蒼穹飛鳶)! 누구도 그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 또한 누구도 그의 얼굴을 알지 못한다. 그가 어디에 사는지, 평상시 어떠한 이름과 신분으로 지내는지…….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은 한 가지에 불과했다. 강하다는 것, 이제껏 단 한 번도 실패를 경험해 보지 않았다는 것. 그는 결정적 장소에 나타나며, 실로 무자비한 방법으로 마도 인사를 제거해 버린다. 그의 방문을 받고 살아남은 자는 이제껏 없었다. 그러하기에 천겁만마전 쪽에서는 그를 악마로 칭하고 있을 정도였다. 창궁비연, 그는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 보다 위험한 인물이다. 아니, 대륙의맹 전체보다 위험할지도 모른다. 그로 인해 전 마도의 위계질서가 깨어지고 있는 실정이었다. 오행천마만 하더라도 그러하다. 그는 천겁만마전을 위해 하란산(賀蘭山) 일대에서 활약하던 참이었으며, 대륙의맹 쪽에 정체가 발각되었기에 거처를 떠나 마황전으로 돌아오는 중에 창궁비연의 추적에 걸려든 것이다. 그는 변복하고 항주에 숨어들었다가 창궁비연에게 제거된 것이다. 또한 사형마제는 그 이전에 정체를 바꾸고 무량보전에 숨어 마교대법을 수련하고 있었는데, 창궁비연은 그의 거처를 알아 내고 그를 간단히 제거해 버린 것이다. 야수(野獸). 창궁비연은 마도인들의 목숨을 노리는 한 마리 맹수라 할 수 있었다. "그는… 제이의 숙야장청(叔夜長靑)이다." "아……!" "숙야장청은 너무나도 강했다. 그러하기에 그는 신(神)으로 불렸으며, 전 마도는 그를 제거하기 위해 일대 규합하였으며… 마도에서 가장 강한 일백팔 명의 무사를 선출하여 백팔(百八) 자객단(刺客團)을 구축하였다." 마황은 천천히 걸었다. 연지 위에 투영되는 그의 그림자가 흐려지기 시작한다. "숙야장청은 화탄 공격을 받았으며,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으음……!"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죽지 않았다. 그는 폐인(廢人)이 되었으되… 여전히 살아 있다." "……." "대외살각은 그가 이룩한 마지막 세력이며 창궁비연이라는 자는 그의 마지막 제자이다. 아마도… 창궁비연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은 숙야장청과 매옥당에 불과할 것이다." 마황은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에 암영이 그득하다. 그는 무수한 혈전 가운데 청춘을 보낸 인물이다. 또한 온갖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마도계의 종사가 되기 위해 가장 철저한 방법으로 상대를 제압하며 중년을 보냈으며, 노년의 초입에 이르러 결국 마황의 지위에 오른 인물이기도 했다. 그가 전대 마황을 제거한 이유는 오직 하나, 그가 마황의 지위에 이를 경우 백도인들이 마도를 철저히 붕괴시키기 위해 목숨 바치기를 아까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숙야장천을 제거하고자 했던 인물은 전대 마황이며, 그 일이 실패로 돌아가며 마도계는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되었던 것이다. 마황은 마도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친형을 베고 새로운 마황이 된 것이다. 한데, 장궁비연이라는 인물이 나타나 전 마도를 상대로 복수하기 시작하며, 그의 번뇌가 새롭게 깊어지고 있는 것이다. "천류(天流)." "예, 마황." "의맹에서 으뜸가는 자객(刺客)이라면 누구를 뽑겠느냐" 그의 질문은 뜻밖의 것이었다. "글쎄요?" 마뇌제갈 동천류(董天流)는 잠깐 눈썹을 꿈틀거리게 했다. 그것은 그가 깊은 사고를 할 때 취하는 특이한 버릇이었다. 이윽고 그는 하나의 이름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마검향(魔劍香)이 아닐까요?" "마검향… 그는 천재(天才)이지, 살인의 천재. 그는 소년시절부터 이름을 날렸으며, 거금(巨金) 십만(十萬) 냥(兩) 이하의 살인 청부는 맡지 않았지. 그는 자신이 암살할 대상이 없다 외치며 해남도(海南島)에 은거했지." "그렇습니다. 그는 완벽한 살수였습니다." "그는 가공할 암살단을 이끌었지. 하나, 그는 창궁비연이 되지 못할 인물이다." "어이해?" 마뇌제갈은 마황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뛰어난 지식을 지니고 있으되, 마황이 갖고 있는 풍부한 경험과 직관력 앞에서는 무력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검향은 이기적인 인물이다." "아……!" "그는 협의심(俠義心)이 부족하다." "협의심." "창궁비연은… 모름지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살인하는 자일 것이다. 마검향이라면 대가가 없는 살인은 하지 않는다. 만에 하나 마검향이 창궁비연이라면, 그가 살인을 할 때마다 대륙의맹의 창고가 하나씩 비게 될 것인데… 살인 후 자금이 유출되는 흔적은 없다!" 마검향! 그는 살(殺)의 예(藝)를 터득한 인물이다. 그는 대륙의맹의 파멸백팔관(破滅百八關)을 겪은 다섯 명 가운데 하나이며, 일 대 일의 격투와 일 대 다수의 격투에 두루 능하다. 그는 어떠한 악조건 아래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동영인술(東瀛忍術)을 취미로 익힌 완벽한 척살자(擲殺者)라 할 수 있었다. 창궁비연이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대륙의맹 제일의 살객으로 군림했었다. 그는 삼 년 동안 대륙의맹을 위해 일을 했는 바, 그의 활약으로 인해 마도의 힘이 절반으로 위축될 정도였다. 백도인마저 두려워했던 인물 마검향. 마뇌제갈은 그가 창궁비연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는데, 마황은 그것을 부정해 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표랑이 아닐는지……?" 일순 마뇌제갈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진다. 표랑(漂郞)! 그의 이름은 강호에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가장 과격한 백도인으로 소문난 인물이다. 또한 그의 무공은 마검향에 버금 가며, 그의 신분은 숙야장청의 의발전인(衣鉢傳人)으로서 당세제일의 협사인 매옥당과 동배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현재 그는 대륙의맹을 떠났다 알려지고 있다. 운중검마부(雲中劍魔府)의 현판을 어검비기로 잘라 내고, 폭풍혈교(暴風血敎)의 사십구 마검사를 일 검으로 도륙낸 인물. 그의 이름을 듣고 공포를 느끼지 않을 마도인은 없을 것이다. "그는… 아니다." 마황은 즉시 고개를 저었다. "어이해?" "표랑은 소맹주인 매옥당(梅玉堂)과 심각히 대립하였기에 의맹을 떠난 자이다." "으음……!" "표랑은 창궁비연과 같은 심정을 지닌 자로 전 마도인을 모조리 죽이고자 하며, 매옥당을 우유부단한 자라 여기고 있다. 그러하기에 그는 의맹을 떠난 것이다." "위장이 아닐는지……." "위장은 아니다. 그 증거는 살인 흔적이 밝히고 있다." "흔적이라도 하신다면?" "표랑을 살인을 할 때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하나, 창궁비연은 흔적을 남긴다." "아, 그렇군요." "표랑은 명예욕이 강한 인물. 그는 살인을 할 때 자신의 이름을 공공연히 말한다. 그러하기에 그는 창궁비연이 아니다." "글쎄?" 마황은 그렇게 말하며 밀지(密紙) 한 장을 건네 주었다. 핏빛의 봉투, 그것은 일급 비밀을 담게 되며 마황 측근 인물 가운데 다섯 명만이 그것을 읽을 수 있다. "첩자가 보내 온 것이다." 마황은 마뇌제갈에게 밀지를 내밀었으며, 마뇌제갈은 무릎을 꿇은 채 밀지를 펴 봤다. 거기 이렇게 적혀 있었다. <매옥당(梅玉堂)은 장로회의(長老會議) 결과 숙야장청(叔夜長靑)의 뒤를 이은 의맹주로 선발될 것이 거의 확실함. 그는 혈전(血戰)을 혐오하는 성격. 그가 맹주가 된다면 싸움이 줄어들 것임.> 처음에는 그러한 글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이러한 글이 적혀 있었다. <숙야장청의 딸이자 매옥당의 사매(師妹)인 숙야옥상(叔夜玉霜)의 정혼자로 내정된 인물이 밝혀졌는 바, 그는 철무정(鐵無情)이라는 인물임. 그에 대해 조사해 본 바, 그는 앙천각(仰天閣)의 서기(書記)로 무공을 알지 못함. … 후략(後略)…….> 철무정, 그는 지극히 평범한 인물이다. 다만 용모가 뛰어나기에 숙야옥상이 그에게 매혹되었다고 밀지에 기록이 되어 있었다. 사실 밀지에 적힌 그러한 글로 인해 훗날 마도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또 하나의 글. 그것은 마뇌제갈의 눈을 번쩍 뜨게 했다. <숙야장청이 폐인이 된 후 구축한 암살 조직 대외살각(對外殺閣)의 인원이 드러났음. 숫자는 칠(七) 인(人), 그들의 우두머리는 창궁비연(蒼穹飛鳶). 그는 숙야장청의 최후 전인이며, 그에게 연락하는 인물은 흑풍(黑風)이라는 자. 그는 매옥당과 대립하고 있는 실정. 만에 하나 표랑(漂郞)이 돌아와 그와 합류한다면, 매옥당이 제거되고 표랑과 창궁비연이 대권을 장악할 것임.> 마뇌제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창궁비연, 표랑. 둘 사이의 공통점은 오직 하나에 불과하다. 그들은 마도인을 사갈시 하며, 마도세력을 척살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창궁비연과 표랑이 대륙의맹의 주도권을 잡게 되면 백도는 마도를 치는 데 전력을 다할 것이고, 그렇게 될 경우 마도의 패배는 불 보듯 뻔한 것이다. 마도세력은 현재 둘로 갈라져 있지 않은가? "……." 마뇌제갈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마황을 올려다봤다. 마황은 하늘을 보고 있었다. "마도는 마도인의 것이다. 하나, 과거 마도는 죄를 무한히 지었기에 무참히 보복당하는 것이다." "……." "자네가 읽은 글귀를 적기 위해 일급 첩자 칠십사 명이 희생되었다." "……." "사실… 더 이상의 선혈(鮮血)은 중지되어야 한다. 창궁비연은 하나의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 만에 하나 본좌가 죽을 경우, 더욱 무서운 일이 벌어지게 된다는 것을……." "예에?" "천류, 네게도 그 사정을 말할 수 없다." 마황은 느릿느릿 걸었다. 그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동천류의 몸을 덮쳤다. "하여간 창궁비연은 제거되어야 한다. 천겁만마전의 모든 힘을 집중해서라도 그를 제거해야 한다." "……." "필요하다면 그녀를 불러라!" "그녀라면?" 동천류가 몸을 떤다. 누군가를 기억하며 그는 공포를 느낀 것이다. "설마… 묵월(墨月)마저?" "그렇다. 묵월이라면 이번 일을 가능하게 할지 모른다." 묵월! 마도에서 가장 신비로운 이름이다. 묵정(墨井)의 후계자, 오로지 살인술만을 연마한 마도제일의 암살자이다. 묵월은 마도비전(魔道泌傳)으로 내려오는 십대 살인술을 터득했으며,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기억상실약을 복용한 후 의맹에 접어들었다. 그는 십 년 간 기억을 망각한 채 살고 있으며, 천겁만마전이 필요할 경우 사자(使者)가 가서 그녀의 기억을 회복시키도록 안배되어 있다. 그녀는 가장 중요한 일을 하기 위해 십 년 간 침묵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나타나는 경우는 전 마도의 존망(存忘)이 걸린 일에 국한이 된다. 한데 그녀를 불러야 한단 말인가? 창궁비연의 위험성이 그 정도로 막대해졌단 말인가? 밤이 지나가기 전, 하나의 인물에 대한 대체적인 정보가 천겁만마전 순찰부 일급무사들에게 하달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제부터 순찰부의 주된 임무는 그를 제거하는 쪽으로 집중되어질 것이다. 비연(飛鳶)! 마지막 암살자, 대체 그는 어디에서 마도의 목젖을 노리고 검을 갈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묵월(墨月). 그녀는 어디에서 백도의 목을 노리고 살검(殺劍)을 갈고 있는 것인지……. 어두운 서재. 그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어 넘기며 왼손 가운데 손가락에 찻잔 고리를 걸었다. 불투명한 눈빛이 암울해 보인다. "벌써… 겨울인가?" 그는 대기가 상당히 냉각되었음을 느끼는 듯했다. 그는 싸늘히 식어 버린 찻물이나마 말끔히 마셔 버린 이후, 밤새 작성한 열 개의 두루마리를 서가(書架)의 정해진 장소에 놓아 둔 다음에 서재를 나섰다. 앙천각(仰天閣)의 뜨락을 뒤덮고 있던 국화는 어느 틈엔가 조락해 버리고 말았다. 그는 엿새 만에 뜨락으로 나서는 것이다. 뚜벅- 뚜벅-! 철무정은 뜨락 이 곳 저 곳을 걸어다녔다. 무서리가 짙게 끼인 뜨락 가득히 한무(寒霧)가 엄습하고 있었다. 투명한 겨울 햇살 가운데. 치릿-! 문득 싸늘한 기세가 등 뒤로 빠르게 다가섰다. '검(劍)!' 그는 한순간 호흡을 멈췄다. '철기(鐵氣)는 느끼어지지 않는다. 대신 목기(木氣)가 느끼어진다.' 그는 상대의 무기가 다섯 자 안으로 접어들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일순. "ㅋㅋ… 철저하시군." 툴툴거리는 목소리가 등 뒤에서 터져 나왔다. 언제 나타난 것일까? 죽도(竹刀)를 든 미청년이 히죽이고 있었다. "그대의 호흡이 완연히 달라진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대는 이미 내가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보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다니… 역시 철저한 위선자다운 위장이오." 철무정의 등에 죽도를 들이댄 자는 초류홍(楚流虹)이었다. 그의 옷자락에서는 술 내음이 물씬 배어 나왔다. 그는 이 곳에 오기 이전, 뱃속 술벌레를 진정시키기 위해 말술을 들이마셨음에 틀림이 없었다. "류홍, 어찌 된 일이지?" 철무정은 그가 뭐라 말하든 무신경한 태도였다. 초류홍은 그의 태도가 못마땅하다는 듯 땅바닥에다가 가래침을 뱉어 냈다. "카악! 나는 분명 노형이 창궁비연임을 알고 있거늘… ㅋㅋ… 그런 나마저 노형이 진짜 창궁비연인지 아닌지를 회의할 정도이니… 귀하야말로 천하의 위선자요." "훗훗… 나를 창궁비연이라 생각하다니 영광이네." 철무정은 미소를 던졌다. 초류홍은 그를 대할 때마다 독기를 뿜어 낸다. 초류홍은 철무정의 담백하고 탈속한 체취에 심한 역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의 지위는 대외살각의 흑풍(黑風). 그는 창궁비연에게 연락을 하는 입장에 있는 인물이었다. 그렇다. 철무정은 바로 창궁비연의 화신(化身)인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삼 인, 의맹에서 파락호라 취급받는 초류홍이 그 가운데 하나가 되는 자였다. 한데 철무정은 초류홍 앞에서도 자신이 창궁비연이라는 것을 전혀 내색하지 않고 있었다. 초류홍은 그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빠드득! 어쩌다가 옥상(玉霜) 소저가 그대 같은 위선자에게 걸려들었는지 모를 일이오." "옥… 상?" "저쪽에 그 분이 계시오. 빌어먹을!" 초류홍은 또다시 가래침을 뱉어 냈다. 가래침은 누렇게 말라 버린 국화밭 깊숙이 떨어져 내렸다. "모름지기 노형은 옥상 소저를 취하는 것을 미끼로 대륙의맹을 정복하겠다는 야망을 불태울 것이오. 하나, 그렇게 하지 않기를 당부하겠소. 그렇게 할 경우, 내가 그대를 암살해 버릴 테니까! 빠드득!" 초류홍의 눈에서 독광이 어른거렸다. 순간, 철무정의 입술이 나직이 벌어졌다. "철부지 녀석! 나를 죽이고 싶다면… 전에 내가 준 십이 권의 검보(劍譜)를 완벽히 익혀라! 그 따위 실력으로는 나를 암살할 수 없다." "뭐… 뭐라고?" "풋내기! 너의 자세며 발초(拔招), 운검(運劍)은 허점 투성이다. 내가 너를 대외 살수로 임명하지 않고 대내 순찰책으로 임명한 이유는, 그 따위 실력으로 강호계에 나갔다간 즉시 살해당하게 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철무정은 창궁비연의 자격으로 말했다. 초류홍이 그를 안지 어언 삼 년이다. 그 동안 철무정이 창궁비연 자격으로 말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라 할 수 있었다. "네 아버지는 의맹을 위해 목숨을 바친 영웅이거늘… 네놈은 꼭지가 덜 떨어진 풋내기일 뿐이다. 나를 모독하기 이전, 네 자신을 모독해라!" 철무정은 냉막히 말한 다음, 걸음을 내디뎠다. 부르르르-! 초류홍의 전신이 경련을 일으킨다. 그는 철무정의 등을 노려보았고, 넓적한 등판에 죽도를 꽂아 놓을 듯한 자세를 취했다. 하나, 그로서는 도저히 죽도를 흔들어 댈 수 없었다. 철무정의 뒷모습만으로도 초류홍의 심령을 압도해 버린 것이다. 죽도를 쥔 손이 파르르 흔들렸으며, 끝내 죽도는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언제고… 죽일 테야. 나는 네 정체를 안단 말이다. 가증스러운 위선자라는 것을! 너는 의맹을 정복할 작정을 하는 자다. 나는 네 정체를 폭로하고… 너를 죽여 버릴 테다." 초류홍의 눈에 습막이 머금어졌다. 과거 그의 아버지는 그가 보는 앞에서 죽었다. 초류홍은 그 때부터 피에 대해 공포심을 갖게 되었으며, 가공할 자질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공을 성취하지 못한 채 폐인으로 떠돌게 된 것이다. 그의 무공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그를 지배하고 있는 심마(心魔)를 정복해야만 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의 내면에 대해 그보다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철무정일지 모른다. 그러하기에 철무정은 그를 볼 때마다 냉막하고 거만히 대하며, 철저히 모독하고 있는 것일지도… 2 한 여인. 그녀는 회양목에 등을 기대어 선 채 천하제일의 미남자가 자신을 향해 다가서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몸에 꽈악 달라붙은 녹색 경장이 몸매를 돋보이게 한다. 물이 오르기 시작한 장미 봉오리가 이렇듯 농염할까? 한 마리 암사슴과 같은 여체. 터질 듯 팽팽히 오른 앞가슴의 융기가 눈길을 자극시킨다. 잘룩한 개미 허리 아래 풍만히 발달해 오른 둔부가 탐스럽게 매달려 있다. 나이 스물두 살, 대륙의맹의 꽃으로 불리우고 있는 여인이다. 숙야옥상(叔夜玉霜). 상당히 오만한 여협인데, 철무정 앞에서만은 달랐다. 철무정은 그녀를 여자로 취급하지 않았으며, 그러한 연유로 인해 숙야옥상은 철무정을 연모하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슷- 슷-! 철무정은 서리 덮인 풀잎을 밟으며 숙야옥상 쪽으로 다가섰다. 숙야옥상은 무엇인가를 잘근잘근 씹고 있는 바, 그것은 갈대의 잎사귀였다. 짙붉은 입술이 탐스럽다. 꼭 누르면 핏물이 배어 나올 듯한 입술, 적당한 높이로 솟아오른 콧날, 겁이 많아 보이는 커다란 눈망울. 이목구비의 조화가 차라리 예술이라 할 수 있었다. "오랜만이군요, 철(鐵) 공자(公子)." 숙야옥상은 갈대잎을 뱉어 내며 말했다. 철무정과 숙야옥상 사이는 상당히 미묘한 사이라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처음 알게 된 시기는 삼 년 전이다. 당시 철무정은 숙야옥상의 글선생이었으며, 숙야옥상은 연무를 중시하느라 글읽기를 소홀히 하다가 철무정에게 따귀를 맞은 바 있다. 두 사람 사이는 그 때부터 깊어졌다 할 수 있었다. 하나 늘 마음을 터놓은 쪽은 남자인 철무정이 아니라, 여자인 숙야옥상 쪽이었다. 숙야옥상으로서는 철무정에게 다정한 말 한 마디 듣지 못한 실정이었으며,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철무정을 향한 연모의 정념을 잃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어쩐 일이신지……." 철무정은 팔짱을 깊게 꼈다. 우울한 눈빛을 가진 미서생. 그는 초라한 의복을 걸치고 있으며, 영웅검호에 비할 수 없이 소박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야옥상은 그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늘 무정하시군요. 이름처럼……." "그럴 수도……." "어이해 제게 다정한 눈빛조차 주시지 아니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 "제 모든 것을 바쳐 흠모하고 있습니다." "……." "여자로서 차마 하지 못할 말조차 서슴없이 할 정도로 천박해지고 말았거늘, 철 공자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다니……!" 또르륵-! 숙야옥상의 커다란 눈망울에서 눈물이 굴러 떨어졌다. 철무정은 그대로 무뚝뚝하기만 했다. "이유는 이전에 말했다고 아는데……." "아내와 사별(死別)했다는 말씀을 의미하시는 것인지요." "……." 철무정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 내게는 아내가 있소. 아내가 죽었다고는 하나, 나는 아내를 잊지 못하고 있소. 그리고 고향에는 아들이 있소! 나는 언제고 그 곳에 가야 하오. 미안하오. 숙야 소저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그의 눈빛은 그러한 말을 대신하고 있었다. "모두 거짓말이라는 것을 압니다. 아내와 아들이라니요?" 숙야옥상은 애써 고개를 저었다. "믿거나 말거나 소저 마음대로요." 철무정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이어, 그는 눈을 깜박이며 말을 이었다. "읽을 책이 많소. 바쁜 용건이 없으시다면 돌아가겠소이다." "대사형(大師兄)이 한 번 뵙고자 하십니다." 숙야옥상은 딸깃빛 입술을 빨았다. "소맹주께서?" 철무정은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숙야옥상의 대사형이라면 고검대협(孤劍大俠) 매옥당(梅玉堂)이 아니겠는가? 나이는 서른두 살, 그 나이에 백도계의 정봉(頂峯)에 올라섰다는 것은 그의 무공과 인품이 어느 정도인가를 대변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는 과묵한 인물이며 지극히 추악한 외모를 지니고 있다. 그러하기에 그는 남보다 부단히 연무하였으며, 숙야장청의 뒤를 이어 백도의 거성(巨星)으로 떠오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숙야장청의 의발전인은 매옥당과 표랑, 그리고 마검향. 그들 가운데 대륙의맹에 남아 있는 인물은 매옥당에 불과했다. 마검향은 해남도(海南島)에 갔고, 표랑은 정처없이 떠도는 낭인(浪人)이 되어 무림을 떠났다. 매옥당은 숙야장청을 대신해 숙야옥상의 후견자 노릇을 하고 있었으며, 숙야옥상은 그를 친오라버니로 여기며 자신의 모든 것을 그에게 의지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오찬을 같이 하자십니다." "으음……!" "장소는 군림탑(君臨塔)." "……." "공적인 자리가 아니라 사적인 자리입니다. 부담없이 가시기 바랍니다. 그 자리에서 제 이야기를 하고 싶으시답니다." 숙야옥상의 볼이 새빨개졌다. 그녀의 볼에 떠오른 홍조는 가을 하늘 아래 익어 가는 능금의 빛깔 그것이었다.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여인 숙야옥상, 그녀는 차마 철무정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하고 눈길을 내리깔았다. 지금 그녀가 철무정의 얼굴을 바라보았더라면 철무정의 두 눈에서 무시무시한 광채가 쏟아져 나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으리라. '매옥당이… 나를……?'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잘 보고 갑니다.
즐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