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五章 서가(書架)의 비밀 1 천밀전(天密殿). 언제나 약향(藥香)에 휘어감겨 있는 누각이다. 그 곳은 수년 전 봉쇄가 되었다. 매옥당의 친필 서찰을 지니지 못한 사람이라면 지위 여하를 막론하고 천밀전으로의 출입이 금지된다. 천밀전은 가히 대륙의맹에서 가장 권위 있는 장소. 그 곳의 권위는 군림탑의 권위를 능가한다. 그 이유는 거기 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다. 가장 위대한 무예가(武藝家). 백도의 무신으로 군림하며 대륙의맹의 세력을 황하(黃河) 너머와 장강(長江) 아래로 확장하였으며, 구파일방을 비롯하여 천하명가(天下名家)의 후예들을 대륙의맹으로 대거 끌어들인 백도의 절대자. 대륙무성(大陸武聖) 숙야장청(叔夜長靑). 천밀전은 숙야장청이 머물러 있는 장소였다. 대륙의맹은 숙야장청이 맹주의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만 해도 백도에서는 상징적인 존재에 불과했었다. 맹에 속한 백도인들은 대륙의맹의 법규보다는 자파(自派)의 법을 중시했으며, 모든 일을 다분히 형식적인 차원에서 처리하곤 했었다. 하나, 숙야장청이 무공을 완성한 후에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백도인들은 자파보다는 대륙의맹의 무사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게 되었으며, 그의 명이라면 화약을 지고 불구덩이 속에라도 뛰어들 정도가 되었다. 백도의 신으로 불리운 숙야장청. 마도계는 그를 두려워하게 되었으며, 급기야 그를 제거하기 위해 일대 모험을 감행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그는 백팔 명의 마도자객에 의해 쓰러졌고, 그 날 이후 그의 모습은 모든 공적인 자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하나 그가 생존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비록 그가 폐인이 되었기는 하되 그가 지니고 있는 권위는 매옥당의 권위에 비해 십 배 더하다 할 수 있었다. 천밀전의 약사(藥師). 그는 갑자기 졸음을 느끼며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뒤쪽으로 헌칠한 그림자가 불쑥 나타났다. 바로 철무정. 그는 약사의 혼수혈을 점한 다음 천밀전 안으로 접어든 것이다. 그는 비밀(秘密) 암도(暗道)를 알고 있기에, 그가 천밀전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은 없었다. "대사부(大師父)." 철무정은 침상 쪽으로 다가섰다. 방 안에는 쓰디쓴 약향이 그득하다. 침상이 하나 놓여 있으며, 그 위에는 깡마른 신체의 노인 하나가 반듯이 누워 있었다. 본시 기골이 장대한 노인인데, 오랫동안 식음을 전폐하였는지라 신체가 해골처럼 깡마르게 된 것이다. 게다가 다리 하나가 끊어졌고, 한 팔이 떨어져 나갔다. 그러한 상태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는 것이 기적이라 할 수 있었다. 만에 하나 그의 신체가 금강불괴지신(金剛不壞之身)에 육박하지 않았더라면, 만 관의 화약이 터지는 가운데 쓰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숙야장청, 그는 벌써 오 년째 그러한 모습으로 누워 있는 것이다. "접니다." "……." "제가 왔습니다." 철무정은 우울한 표정으로 숙야장청 곁으로 다가섰다. 그는 숙야장청의 마지막 제자이다. 숙야장청은 철무정을 창궁비연으로 화신시키기 위해 자신의 진원지기(眞元之氣)를 아낌없이 전수했다. 그로 인해 철무정은 이십 세에 이르러서야 무공을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천하제일의 내공을 지니게 된 것이다. "으으……!" 숙야장청은 철무정을 알아본 듯했다. 하나 그는 가쁜 숨소리를 낼 뿐 목소리를 내지는 못했다. 그는 말을 하지 못하는 신세가 된 지 오래였다. 노사자(老師子). 그는 쓰러진 거인에 불과했다. 철무정은 침상 곁으로 다가가 나무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았다. 그는 숙야장청의 깡마른 손을 두 손으로 꽈악 쥐었다. 숙야장청은 그를 알아보는 듯 눈에 습막을 머금었다. 누구에게도 눈물을 보이지 않던 숙야장청이었는 바, 폐인이 된 후 얻은 최후의 전인을 보게 되자 눈물을 보이는 것이다. "대사부는 제게 세 가지를 부탁하셨지요." "으으……!" 숙야장청은 그렇다는 눈빛을 던졌다. "그 중 하나는 대륙의맹의 대권(大權), 또 하나는 백팔 자객에 대한 철저한 복수(復讐)였습니다." "으으… 으으……!" "그리고 마지막 하나를 제게 맡기셨습니다." "……." "어쩌면… 마지막 사항이 가장 부담스러운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으으으……!" 숙야장청은 고개를 저었다. 그 뜻은 철무정의 말이 잘못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숙야장청은 마지막으로 당부한 것이 무엇이기에……? 철무정의 입가에 미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대사부가 제게 마지막으로 맡기신 것은… 옥상의 장래였습니다." 아아, 그랬던가? 숙야장청이 철무정에게 숙야옥상을 맡겼단 말인가? "옥상은 저를 좋아하는 눈치입니다." "……." "저도 옥상이 싫지는 않습니다." "으으으……!" 숙야장청은 흐뭇하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 때, 철무정은 가벼운 한숨 소리를 내며 뇌까리듯 말했다. "그러나… 또 한 여인을 잊지 못하겠습니다." "으으……?" "그녀는… 저로 인해 폐인이 되었습니다." "……." "저는 언제고 그녀를 찾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녀를 받아 주어야만 합니다. 사실 저는 그녀로 인해 무림인이 되었으니까요." 철무정의 말이 거기에 이를 때, 숙야장청의 노안(老眼)에 묘한 빛이 떠올랐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 한다. 철무정은 숙야장청의 눈빛을 읽을 수 있었다. 그 눈빛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 제자야, 그런 일로 번뇌하지 마라! 숙야장청은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철무정은 사부의 손을 꽈악 쥐었다. "대사부! 사실… 저는 무사(武士)가 되지 못할 놈입니다." "아……!" "저는 살인할 때마다 괴로움을 느낍니다. 제 손에 죽어 가는 자의 피가 대지를 적실 때마다, 저의 영혼은 번뇌에 휘말립니다. 아아, 한시빨리 무림계를 떠날 수 있게 된다면 좋겠습니다." "으으……!" "제가 막강(莫强)하지 못한 것이 분할 뿐입니다. 제가 비록 강하기는 하되, 모든 일을 완벽히 처리하기에는 아직도 부족합니다." "으으……!" 숙야장청의 숨소리가 이상해졌다. 무서운 집념을 가진 거인, 그는 죽어 가면서도 한 명의 전인을 길렀다. 그 인물이 바로 철무정. 그는 철무정을 자신의 분신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하기에 그는 자신이 가장 아끼고 있는 육 인의 전문가에 대한 통솔권을 철무정에게 전한 것이다. 매옥당에게는 그 이외의 것을 주었으되, 기실 대륙의맹의 가장 중요한 것은 철무정에게 전해졌다 하더라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철무정에게 전해진 권한은 막대한 것으로, 만에 하나 철무정이 바란다면 매옥당마저 철무정에게 죽어야만 한다. 다만 철무정은 매옥당이 자신보다 뛰어난 맹주감이라 여기고 있기에, 매옥당에게 도전하기를 거절하고 있는 것뿐이다. "으으……!" 숙야장청이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그리고 그의 죽어 가던 눈빛이 이글이글 타오르기 시작했다. '사부가 내게 무슨 말을?' 철무정은 문득 말을 멈췄다. 그는 숙야장청이 자신에게 어떠한 중대한 말을 하고자 한다는 것을 문득 깨달을 수 있었다. 철무정은 숙야장청을 보았으며, 숙야장청은 조심스럽게 눈을 깜박거렸다. 잇따라 세 번 깜박이고 쉬고, 잇따라 두 번 깜박이고 쉬고, 그리고 잇따라 일곱 번 깜박이고……. 그는 그러한 눈깜박임을 세 차례에 걸쳐 계속했다. '삼(三)… 이(二)… 칠(七)…….' 철무정은 세 개의 숫자를 마음 속으로 읽었다. "대사부, 제게 무엇을 가르치시고자 하시는 것인지요?" "으……!" 숙야장청은 철무정의 말이 맞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그것이 삼이칠이라는 숫자인지요?" "으으… 으으……!" 숙야장청은 다시 고개를 끄덕거렸다. 결국 철무정은 숙야장청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알아맞힌 것이다. "삼이칠… 그것이 무엇인지요?" "……." 숙야장청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 그것은 네 스스로 알아 내야 할 것이다, 제자야! 그의 눈빛은 그러한 말을 전하고 있었다. 삼이칠(三二七). 세 개의 숫자, 그 비밀은 대체 어떠한 것인지……? 얼마 후, 철무정은 조용히 천밀전을 벗어났다. 약사는 누군가 다녀갔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부수수 정신을 차리고 눈만 깜박거렸다. 철무정과 숙야장청의 만남은 늘 이런 식이었다. 2 밤에 폭우(暴雨)가 내렸다. 세차게 퍼부어지는 빗속, 철무정은 앙천각으로 돌아가는 길에 섬세한 그림자 하나가 나무 그늘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음을 보게 되었다. 커다란 우산을 쓴 여인, 그녀는 커다란 눈망울 가득히 철무정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파르르르-! 여인의 신체는 철무정이 다가서자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제… 오십니까?" 입술을 세차게 빠는 여인, 그녀의 용모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그녀의 얼굴을 보고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사내라고 불리지 못할 것이다. 독심(毒心)의 장부가 아니라면 그런 여인을 결코 기다리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옥상, 이제까지 나를 기다리고 있었군. 얼굴이 많이 수척한 것으로 보아…….' 철무정은 말을 마음 안에만 담아 두었다. 마음 속으론 다정한 말을 하되,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상당히 무뚝뚝한 말이었다. "춥소. 어서 내실로 드시오." "대사형과 어떠한 이야기를 나누셨는지요?" "그저… 그런 이야기뿐." "아, 대체 저에 대한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대사형은 은근히 철 공자를 미워하시는 듯하니… 그 연유를 모르겠습니다." "그럴 수도……." 철무정은 빠른 속도로 걸었다. 그는 지극히 무정한 표정 가운데 숙야옥상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숙야옥상으로서는 그의 이렇듯 차가운 모습을 늘 대해 왔는지라 별 충격을 받지 않은 듯했다. 하나 그녀도 여인,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만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야속하신 분. 그러나 이럴수록 제 마음은 더욱 그대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쏴아아- 쏴아아-! 빗줄기가 보다 굵어졌다. 이번 비로 인해 가을이 죽어 버리리라. 그리고 곧 겨울이 시작될 것이다. 무림 사상 가장 춥고 어두운 겨울이……. 하나, 봄을 잉태하고 있는 그러한 겨울이……. 비는 쉬지 않고 내렸다. 비가 내리는 기세로 보아 며칠 거듭 내린 듯했다. 그 날, 그 곳에서 육천칠백 리 떨어진 곳에 있는 천겁만마전의 순찰부에서는 하나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었다. 드넓은 취의청. 마뇌제갈 동천류는 며칠 밤을 거듭 세우며 십여 권의 서적을 독파한 상황이었는지라, 그의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있었고 의복을 갈아입은 지도 며칠째였다. "창궁비연을 찾아 내는 일이 시급하다." 그는 대륙의맹 쪽에 침투해 있는 첩자들이 보내 온 제반기록을 낱낱이 읽은 상황이었다. "그는 정사(正邪)의 균형을 깨어뜨리고 있다. 그를 제거하지 못하는 한, 무림계에 평화가 이룩되지 않는다." 그는 오랫동안 생각한 결과, 두 가지 방안을 세울 수 있었다. 그것이 성공한다면 정도와 마도의 세력 균형이 회복되리라. 그리고 그것이 성공하지 못한다면, 백도와 마도는 십 년에 걸친 격전을 시작하게 될지도 모른다. 현재 천겁만마전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인물들은 혈전을 싫어하는 사람들이다. 다만 백도와의 알력이 너무나도 오래 되었는지라, 양 파는 화평히 지내지 못하고 서로서로를 죽이고 있는 것이다. "창궁비연을 끌어내야 한다. 일단은 그의 능력과 무공의 허점을 알아 내야 한다. 그 다음에야 그를 완전 제거할 수 있다. 창궁비연은 대륙의맹의 존망이 걸린 일에만 모습을 나타낸다." 동천류는 천천히 붓을 들었다. 이어 그는 세필(細筆)로 글을 적기 시작했다. <한 여인을 납치하기 바란다. 그녀의 이름은… 숙야옥상.> 3 첫눈이 내리는 날, 철무정은 여우털 조끼를 걸친 채 뜨락을 거닐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걸었으며, 흩날리는 눈발 사이로 무수한 그림자들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눈에 덮이는 앙천각의 지붕 위에서, 나목으로 화한 나무숲 사이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그림자들. 그림자들은 철무정의 움직임에 따라 민감하게 위치를 이동시켰다. 그는 보이지 않는 가운데 감시당하고 있는 상황이라 할 수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매옥당은 자신의 공적인 지위를 이용하여 철무정이 하고자 하는 일을 철저히 방해하고 있었다. 매옥당과 철무성 사이의 대립은 지극히 심각한 것이었다. 매옥당은 철무정의 폭력적인 방법을 혐오하고 있었으며, 그러하기에 의당 그에게 살인명단(殺人名單)을 제공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거절하고 있었다. 결국 대외살각은 단 일곱 명의 힘으로만 운영되어지게 되었다 하더라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대사형은 모를 것이오. 마도의 포악함을, 그리고 어이해 내가 피도 눈물도 없는 악마가 되어야 하는지를…….' 철무정의 어깨 위로 눈이 소담스럽게 쌓였다. 삐걱- 삐걱-! 그는 눈에 발자국을 찍으며 이 곳 저 곳을 거닐었다. '대사형은 내가 대륙의맹의 대권(大權)을 노린다 여기고 있으되, 사실 내가 노리는 것은 대권이 아니오.' 철무정은 입술을 질겅 씹었다. 그는 수년 간 비밀리에 마도거마들을 척살했다. 그에게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암살 명단이 있으며, 거기 이름이 올려져 있는 자는 거처가 어디이든 철무정의 방문을 받고 암살당해야만 했다. 그가 행하는 방법은 일반 백도인들이 행하는 방법에 비할 수 없이 무자비했다. 창궁비연의 활약으로 인해 구파일방의 종사들은 대륙의맹을 피에 굶주린 살인마의 집단으로 정의내릴 정도에 이르렀지 않는가? 매옥당이 철무정을 증오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라 할 수 있었다. '머지않아 무림을 떠날 것이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모조리 마무리짓는 날!' 그는 주먹을 꼬옥 거머쥐었다. '그리고 그 날이 될 때까지는 누구도 나를 제거하지 못한다.' 휘리리리링-! 바람은 눈발을 거세게 휘말아 올렸다. 철무정은 신형을 틀다가 문득 차가운 기운이 엄습함을 느꼈다. '살기!' 철무정은 눈보라의 한기 속에서 골수 속으로 파고드는 싸늘한 예기(銳氣)를 느꼈다. 그 기운은 우측에서 다가서고 있었다. '완벽한 살인 각도! 그렇다면…….' 철무정은 입가에 묘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살기를 느끼지 못한 양 느긋이 팔짱을 끼었다. 그는 천천히 걸었고, 한기 속으로 은밀히 감추어진 예기는 그의 등 뒤 명문혈(命門穴)을 향해 살기를 모우고 있었다. 하나 살기는 살기로 그칠 뿐, 병장기가 치솟아 오르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십(十) 보(步) 걸었을까? 철무정은 피식 웃으며 뇌까렸다. "왜… 암습하지 못하지?" 휘리리리링-! 싸늘한 눈보라 가운데 환은술(幻隱術)로 몸을 감추고 있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그는 죽도(竹刀)를 가슴에 안고 있었으며, 죽도에서 살기가 뿜어지고 있었다. "빌어먹을! 이미 알고 있었구려."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청년, 그는 대외살각의 일급 살수 초류홍(楚流虹)이었다. 초류홍은 철무정을 증오하고 있었다. 그는 철무정을 이중인격자이며 위선자로 규정짓고 있었다. 또한 그는 제 손으로 철무정을 제거하는 것이 대륙의맹을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입장이기도 했다. "류홍!" 철무정은 초류홍 쪽을 바라봤다. 유심(幽深)한 눈빛이다. 하나, 초류홍은 그러한 눈빛에 접할 때마다 몸을 떨어야만 했다. "너는… 나를 벨 능력이 없다." "빌어먹을!" "ㅋㅋ… 나를 베기 위해서는 너의 검이 지금보다 세 배는 빨라져야 한다." "그렇소. 각주는 여러 가지 호신술을 익히고 있소. 그러하기에, 나는 내가 익힌 어떠한 수법으로도 각주를 제거하지 못하는 것이오." 초류홍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천생의 협골(俠骨). 그는 철무정을 증오하되, 철무정은 그를 제자처럼 아끼고 있었다. "류홍, 나는 전신의 근골이 수십 번 부서지는 고통을 경험하며 오늘의 무공 성취를 이룩했다. 더욱이 나는 강호 거마들을 암살해 가면서 나의 살인술을 완전무결하게 단련했다." "……." "오만한 말인지 모르되, 나를 격파할 인물은 당세에 거의 없다 하더라도 과언이 아니다." "빌어먹을! 어이해 대사부가 그대 같은 자를 각주로 선출하였는지… 차갑고 음험하며 무자비한 그대를……." 초류홍의 얼굴은 더욱 추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백도의 천재 가운데 천재. 마음이 심약하다고는 하나, 그가 이룩한 경지는 타인이 감히 법접치 못할 지고한 경지이다. 하나 그에게도 넘지 못할 산(山)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철무정이었다. 초류홍의 철무정에 대한 정서는 질투이며, 또한 존경이었다. "류홍, 너는 강호를 아느냐?" "강… 호?" "강호의 바람은 무정하다." "으음……!" "강자는 살고, 약자는 죽는다. 그것이 강호의 법이다." 철무정은 그렇게 말하며 손을 슬쩍 내저었다. 옥수(玉手)가 무수한 그림자를 뿌린다. 백팔 개의 손 그림자가 초류홍의 앞가슴을 휘어감는다. "살인환옥수(殺人幻玉手)!" 초류홍은 소리치며 몸을 뒤로 빼내고자 했다. 그러나 이미 늦은 후였다. 팟-! 그는 가슴께에 둔중한 아픔을 느끼며 휘청거려야만 했다. 철무정은 그의 옷가슴에 일 장을 찍었으며, 찰나적으로 그의 애도(愛刀)를 빼앗아 버린 것이다. "빌어먹을! 나의 애도를 훔치다니……." 초류홍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무사에게 있어 병기는 목숨이나 마찬가지이다. 병기를 빼앗긴다는 것은 목숨을 빼앗긴 이상으로 수치스러운 일이다. 철무정은 세 가지 초식을 잇따라 써서 초류홍의 도를 빼앗아 버린 것이다. 그는 도신을 손바닥으로 매만지며 뇌까리듯 말했다. "내가 적이었다면 너는 벌써 죽었다." "으으……!" "너는 천재(天才)다!" "……." "하나 네가 나를 격파할 만한 절정고수가 되고자 한다면, 네가 천재라는 것을 망각해야 한다." "그 말은?" "후후… 그 말의 의미는 네 스스로 찾아야 한다." 철무정은 죽도를 땅에 꽂았다. 이어 그는 신형을 틀었고, 앙천각을 향해 느릿느릿 걸음을 떼어 놓았다. 초류홍은 패배감에 사로잡히며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피가 흘러 나온다. 주먹을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손톱이 손바닥 속으로 파고들며 핏방울이 뚝뚝 흘러 나오는 것이다. "언제고… 그대를 꺾겠소!" "마음대로!" "그대의 오만함을 조롱하겠소." "후후……!" "나의 명예를 걸고 그대를 격파하겠소." "핫핫… 네가 나보다 강하다면!" 철무정은 웃으며 눈발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초류홍, 나의 뒤를 이어 대외살각을 맡을 녀석이다. 다만… 마음이 너무 여린 것이 흠이다.' 철무정은 그러한 생각을 하며 앙천각 안으로 접어들었다. 서적이 빽빽이 꽂힌 서가(書架). 앙천각은 삼층이되, 지하 층을 따진다면 모두 구층이라 할 수 있었다. 철무정은 앙천각을 집으로 삼고 있었다. 창궁비연으로 활동할 때가 아니라면 늘 앙천각에 머물며 서적을 읽고 서류를 정리하는 것이 그의 생활 전부였다. 이 날도 그는 고서 속에 파묻혀들고 있었다. 앙천각 지붕이 눈에 뒤덮이고 있을 때, 철무정은 지하 구층의 서가 앞을 오락가락거리고 있었다. 각 서가마다 삼천 권의 서적이 꽂히어 있고, 서가의 숫자는 도합 오백 개에 달한다. 어떠한 천재라 하더라도 모든 서적을 읽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날, 철무정은 하나의 서가 앞을 오락가락거리고 있었다. "대사부가 말한 숫자의 의미는 이것이 아닐까?" 그는 고서가 즐비하게 꽂힌 서가 앞에 이르러 있었다. 서가의 분류 기호는 삼이칠(三二七)이었다. 삼이칠, 바로 숙야장청이 말한 숫자가 아닌가? 철무정은 삼이칠이 꽂힌 서적의 명단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는 이미 그것을 읽어 보았는 바, 숙야장청이 자신에게 전하고자 하는 서적이 명단 안에 있다는 것은 확신치 못할 일이었다. 서가에 꽂힌 서적은 강호 명인들의 서적 기록들이며, 그 가운데 무공 서적으로 분류가 된 것은 한 권도 없다 할 수 있었다. 과거 숙야장청은 폐인이 되기 직전, 이러한 말을 한 바 있다. - 무정, 너는 천살성(天煞星)이다. 너의 살기는 너무나도 짙다. 그 살기가 너의 성취를 방해할 정도이다. 너의 살기가 너무도 강하기에, 불행하게도 지금 네게 모든 것을 전수할 수가 없다. 네 스스로 네 자신의 무공을 완성해야 한다. 그리고 언제고 네가 살기의 늪에서 빠져 나오는 날, 나의 모든 것을 얻게 되리라! 뚜벅- 뚜벅-! 철무정은 삼이칠 서가 앞을 오랫동안 거닐었다. 무공 서적은 매옥당이 관리하고 있는 무경각(武經閣)이 있으며, 앙천각에는 무공 서적이 보관되어 있지 않다. 앙천각에는 제반 지혜를 담고 있는 서적이 보관되어 있을 뿐이었다.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은 여기에 있지 아니한가?" 철무정은 다섯 시진 내내 서적을 뒤적거리다가 씁쓸히 중얼거렸다. 그는 네 권의 서적에 주의를 기울였는 바, 서적을 읽어 본 후 그것이 자신이 찾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곤륜(崑崙) 운학자(雲鶴子)가 남긴 송학운수경(松鶴雲水經)에는 소나무와 학과 더불어 여생을 즐긴 노도인의 일기가 기록되어 있었으며, 청성파(靑城派) 무검도장(無劍道長)의 기록에는 차를 마시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었다. 백공신승(百空神僧)의 참불기(參佛記)도 일상적 기록에 불과하였고, 허허신개(虛虛神 )의 천하주유록 또한 마찬가지였다. "시간 낭비일 뿐인가?" 철무정은 중얼거리며 뒤돌아서려 했다. 문득. 치리리리릿-! 그는 한 줄기 예기가 가슴을 엄습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기운은 그가 느껴 본 어떠한 가운보다도 예리한 것이었다. '누가 나를 노렸다면 나의 가슴이 절단되었다.' 철무정의 상반신이 흠뻑 땀에 젖었다. 찰나지간의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신 삼백육십 대혈 모두에 검을 맞은 듯한 영적인 충격에 사로잡힌 것이다. "대체 무엇이……?"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즐감했습니다.
잼 납니다
즐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