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재호 루카 신부
연중 제7주간 화요일
집회서 2,1-11 마르코 9,30-37
신학생 때, 한 학기에 한 번씩 교구장 주교님과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그 많은 편지들
가운데에서 문득 오늘 복음을 듣고 생각나는 글이 있습니다.
편지에서 교구장 주교님께서는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살아가면서 몇 가지 유념하는 공리(公理)가 있단다. 그 가운데 하나는 사람은 농담으로든
진담으로든, 어떤 형태로든지 자신의 단점을 드러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이 사람들이 그를 편하게 생각한단다.”
그때 왜 하필 저에게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살면서 단순하고도
연륜이 느껴지는 이 말씀을 자주 떠올립니다.
자기 자랑하는 사람치고 주위에서 반기는 사람 없고, 자신의 단점을 드러낼 줄 아는 사람치고
주위에 사람 없는 경우는 드물다는 것을 살아가면서 깨닫기 때문입니다.
사실 세상에 그 누구도 털어서 먼지 나지 않을 수는 없으며, 단점 없이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스스로가 자신의 단점을 농담으로든 진담으로든 털어놓는다면 사람들은 그 사람을 보고
비웃거나 얕보지 않고, 편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동질감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여느 사람들과 같이 되시어 십자가에서 꼴찌의 자리를 차지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만물 위의 주님으로 드높이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을 따릅시다. 우리도 그분처럼 무시와 비웃음을 당하는 꼴찌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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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연중 제7주간 화요일
집회서 2,1-11 마르코 9,30-37
최고의 사랑이 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고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꼴찌가 되고 종이 되는 것은 진정 첫째가 되기 위한 것일까요?
중국 항우와 유방 시대에 한신은 가난한 집안에 볼품없는 사람으로 태어나
많은 조롱을 당하지만 백 만 대군을 거느리는 큰 꿈을 가지고 있었기에
건달들의 가랑이 사이를 지나가라는 모욕을 당하면서도 그 모욕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고종의 아버지 흥선 대원군도 안동 김씨 세도 하에 유림들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가는 모욕을
당하지만 아들을 임금으로 만들려는 큰 꿈 때문에 그 모욕을 견디어냅니다.
위의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뜻일까요?
제가 잘 아는 한 형제님이 있습니다.
그분은 정직하고 성실하나 그것 때문에 세상을 힘들게 살았습니다.
두 번이나 사업이 실패하였습니다. 형편이 좋을 때는 말수도 적고 너그럽고 겸손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업이 실패하고 난 뒤에는 같이 모이면 혼자서 많은 말을 하고 자기를 뽐내곤 하였습니다.
보잘 것 없고 가난한 사람이 허세를 부리고 힘 있고 잘 난 사람이 오히려 자신을 감추고
낮추는 법이지요. 위의 예수님 말씀은 이런 뜻일까요?
인간적으로 봐도 자신을 낮출 수 있는 사람이 큰 사람이고
큰 사람이 되려면 자신을 낮출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인간적인 차원이 아닐 것입니다.
뒤에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낮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의 낮춤은 낮춤의 사랑이고 낮춤의 사랑은 존경의 사랑입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 중에 가장 품위 있는 사랑이 존경이고,
하느님께 대한 최고의 사랑은 흠숭이지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랑에 있어서 최고, 첫째가 되려면 꼴찌가 되어야 하고
종이 되어야 하고 어린이를 하느님처럼 받들 줄 알아야 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어린이를 그저 어린이로 보지 않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을 그저 보잘 것 없는
한 인간으로 보지 않고 하느님으로 보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하느님의 눈과 사랑을 가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과 같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작은 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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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중 루도비꼬 신부
연중 제7주간 화요일
야고보 4,1-10 마르코 9,30-37
우리 모두가 일상생활 속에서 언제나 경험하듯이, 불확실하거나 불분명한 것은 대부분
불행한 사태를 야기 시키는 것을 종종 볼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일이 명확하지 않고 애매모호할 때는 혼란을 가져오기도 하고
온갖 억측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 억측들은 대부분 사려 깊은 사람들에게는 항상 좋은 내용이나 기대가 아니라
정반대로 불길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예를 들면, 어느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아가, 내가 오는 화요일에 병원에 가야하는데...”라고 말했다면 이 젊은 며느리는
도대체 이 시어머니 말씀의 숨은 뜻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자주 있습니다.
“내가 시어머니를 모시고 직접 병원에 가야하는지?
아니면 혹시 병원에 예약은 해 놓고 다른 일 때문에 가실 수가 없다는 말씀인지?
병원 가시기에 겁이 나시는지?
시어머니께서 몸이 편찮으시니 특별히 보살펴 달라는 부탁인지?
당신의 병을 지금까지 알아주지 못해서 책망하시는 건지...”
이 때 우리들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당연히 곰곰이 생각하여
스스로 숨은 뜻을 알아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당연한 이치입니다만, 종종 소홀히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방금 우리가 들은 복음 말씀에서도 비슷한 내용의 이야기를 접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은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에 관해서 말씀하실 수 있는 전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인지... 사람의 아들이란 당신 자신을 두고 하신 말씀인지?
어떤 사람들에게 위협을 느끼고 계시는지?
혹시 로마인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아니면 친척이나 친구들인지?
당신 제자들인 우리가 당신을 지켜주지 않을 것으로 믿고 있는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여 하필이면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시는지?
부활은 무엇인지?
당신의 반대자들이 벌써 이것을 준비하였기 때문에 명확한 사실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인지?
아니면 장차 일어날 큰 기적을 미리 알려주시는 것인지... ‘
앞에서 말씀드린 며느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애매모호한 것이 많아서 당연히
곰곰이 생각해보야야 하지만, 자주 그러하듯이 제자들은 도대체 제대로 알려고도 않습니다.
더군다나 제자들은 두려움 때문에 묻기조차 두려워합니다.
지금까지 이들은 예수님과 함께 오랫동안 같이 생활하면서 서로를 잘 알고 있지만
이해되지 못하는 일이 있어도 묻기조차 두려워합니다.
이것은 틀림없이 예수님 앞에서나 동료들 앞에서 어느 누구도 어리석은 질문을 하여
놀림거리가 되지 않으려는 소극적인 삶의 태도에서 온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달리 행동하셨습니다.
당신에게 모든 것이 불확실 할 때는 무엇보다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물어 보셨고,
인간들에게 심지어는 당신 제자들에게도 질문하십니다.
당신께서는 길에서 제자들이 무슨 일로 논쟁하였는지 알고 싶어 하시고 질문하십니다.
제자들은 비록 대답은 하지 않고 침묵으로 대신하였지만 예수님의 질문은
사태의 전모를 파악하시고 새로운 가르침을 주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하느님 나라의 기본적인 삶의 규칙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섬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위대한 자로서 인정을 받지만 권한만을 요구하는 사람은
결코 큰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작고 약한 자들 편에 서 계시면서 죽기까지 하느님과 인간에 봉사하신
당신의 삶 안에서 당신의 위대하심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자주 물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마치 어린이가 부끄러움에 대한 두려움 없이, 주위의 시선을 개의치 않고
어른들에게 질문을 하여 자신과 세상을 알려고 하는 태도와 비슷합니다.
이때에 많은 것들이 이전 보다 훨씬 더 명확해지고, 하느님과 세상의 진리와 이치가
더 잘 보이게 될 것입니다.
부산교구 김석중 루도비꼬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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