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궁렬 요셉 신부
연중 제7주간 수요일
마르코 9,38-40
하느님이 일하시는 영역은 온 세상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병에 걸린 것을 악령에 사로잡힌 것으로 생각했다.
병든 사람은 죄를 지어서 어둠의 세력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병을
고쳐주실 때 당시의 언어를 사용하여 네 죄를 용서받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병자들을 가득 모아놓고 병을 고쳐주신 적은 없다.
그분은 지나시다가 만나는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하느님의 생명에서 벗어나 상처받아 고생하는 사람들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다시 말하면 측은한 마음이 들어 병을 고쳐주셨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본래 목적은 병자들을 돌보는 것이 아니었다.
치유의 기적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는 징표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님은 요한이 당신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을 막았다는 보고를 받고 나무라셨다.
당신의 이름으로 마귀를 몰아내는 사람은 당신처럼 악마의 세력에 사로잡혀 있던 영역을
하느님 세상으로 바꾸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당신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은 당신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은 당신이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는 것을 도와주고
그 영역을 넓혀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그 사람은 어느 면에서 제자들의 신앙보다 더 깊은 신앙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제자들이 쫓아내지 못하는 마귀를 그는 쫓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하느님이 일하시는 영역은 제자들의 범위를 넘어 온 세상을 무대로 하시는 것이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교회에 한정시킬 수 없는 것이다.
전주교구 나궁렬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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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연중 제7주간 수요일
야고보서 4,13-17 마르코 9,38-40
우리의 생명도, 우리의 일도
오래 전의 얘기인데 사상체질이라는 책을 누군가 가져왔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때까지 저는 별 관심이 없었기에 재미삼아 저의 체질이 무엇인지
시험을 해보았습니다.
참으로 놀라웠던 것은 거기서 얘기하는 것이 너무나도 정확히 제가 좋아하는 음식,
저의 성격과 일치하는 것이었고 심지어는 생활습관까지도 저와 맞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의하면 저는 태양인 체질인데 앉을 때 기대서 앉는 것을 좋아하는 것까지
거기에 나와 있었습니다. 그때 다시 한 번 깨달은 것이 모든 것이 참으로
天賦的(천부적)이라는 것, 그래서 겸손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선 우리의 생명이 바로 天賦的(천부적)입니다. 하느님께서 생명을 주셨고, 그래서 생명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우리 성가에 나의 생명을 주님께 드린다고 노래하는데 엄밀하게 얘기하면
나의 생명이 아닙니다. 나의 것이라면 내 생명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야 하는데
나의 생명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하고 얘기합니다.
우리의 일도 天賦的(천부적)입니다. 우리는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선택하고 나의 힘으로
그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믿음이 없는 사람의 생각일 뿐입니다.
나의 일로 그것을 할 때, 그리고 그것이 하느님의 뜻에 맞지 않을 때
그것은 되는가 싶다가도 뜻대로 되지 않게 됩니다.
이렇듯 생명도, 일도 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기에
우리는 야고보서의 말씀대로 자기가 하는 일에 허세를 부리며 자랑해서는 안 되고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맡기신 좋은 일은 성실히 해야 합니다.
하느님 뜻을 생각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자기 힘으로 하는 것도 악이지만
좋은 일을 할 줄 알면서 하지 않는 것도 죄라고 야고보서는 얘기합니다.
탈렌트의 비유에서 주님은 탈렌트를 땅에 묻어 둔 사람을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나무라시며 벌주십니다.
오늘의 야고보서는 현재 제가 하고 있는 일의 태도에 대해서 진지한 반성을 하게 합니다.
평양에 북한 주민을 위한 식당과 병원을 세우면서 이 평화 봉사소 사업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면 아무리 어려워도 이루어질 것이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아니면 아무리 내가 하려고 해도 안 될 것이라고 얘기해왔습니다.
이것이 저의 믿음이긴 하지만 어떤 때 저의 이중적인 태도를 보고 저는 놀라게 됩니다.
어떤 때는 이 사업이 마치 제가 잘 해서 된 것처럼 뻐기는가 하면
어떤 때는 너무 힘들고 귀찮아서 정말 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사람들의 호응이 별로 없을 때, 그래도 도와달라고 아쉬운 소리 해야 할 때,
요즘처럼 국제 식량 사정이 나빠져 이 사업을 하기에 제가 역부족이라고 생각될 때,
남과 북의 관계자들, 특히 북측이 비협조적일 때,
이것 자기들 좋으라고 하는데 뭐 나 좋으라고 하는 줄 아나 하면서 때려 치고 싶습니다.
그러다 문득 북한의 배고픈 사람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
이 일을 맡기신 하느님께 대한 죄스런 마음에 다시 마음을 추스릅니다.
그리고 제가 당쇠라는 필명을 가진 주님의 종 마당쇠임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깁니다.
작은 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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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수 도미니코 신부
연중 제7주간 수요일
마르코 9,38-40
이웃에 대하여
첫째로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할 때 삶에 필요한 은총을 주셨습니다.
누구에게나 무언가를 잘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 무언가를 바로 잘 하게 하는 힘이 곧 은총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이 은총을 받지 못하면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성서에서 사람은 진흙으로 만들어졌음을 강조합니다.
둘째로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더불어 살도록 만드셨습니다.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안쓰러워
더불어 살도록 하와를 만들어 주셨다는 성서의 말씀을 상기합시다.
또 사도 바오로께서는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2장 7절에서
"성령께서 는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을 주셨는데
그것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은총으로 더불어 사는 사람들이 더 잘살도록 도와주라고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계획하시고, 만드셨다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셋째로
우리가 받은 은총을 잘 사용하는 일이 곧 선행입니다.
누군가가 무엇을 잘 한다면 그것이 곧 선행입니다.
선행은 그분으로부터 받은 은총의 힘으로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은총을 많이 받았다 한들 그것을 잘 사용하지 않으면 죄를 짓고 맙니다.
그래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받은 은총을 선하게도 악하게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넷째로
선행은 하느님을 드러냅니다. 선행은 하느님을 창조주로, 자기 자신을 피조물로
증언하는 일입니다. 누군가 잘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힘으로 한 것이기에
하느님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도구로 뽑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은총을 주십니다.
그러기에 뽑힌 이들은 남을 더 잘 도와주어야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뽑혔다는 것은 이미 누군가를 도와 줄 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유는 하느님께서 그 만큼 은총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뽑히지 못한 사람을 더 잘 도와주라는 이유입니다.
더 잘 도와주는 것만 빼면, 다시 말하면 더 받은 은총만 없다면
서로가 다를 바 없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도와주기는커녕 남이 잘 하는 것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남이 잘 하는 것에서 하느님을 발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나 자신을 과시하기 위하여 남의 선행을 빼앗아 버린다든지
없애버리려 한다면 힘없는 도구는 없애 버릴 수 있겠지만
그 힘을 주신 하느님께서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린 서로의 삶을 돕는 도구입니다. 우리는 서로의 삶의 거들 짝입니다.
그래서 서로 다른 은총을 주셨습니다.
서로가 더 잘 되도록 돕는 일에 우리가 받은 은총을 사용하도록 노력합시다.
부산교구 김옥수 도미니코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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