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九章 격동의 대지(大地) 1 일월 사 일. 암천각의 서생들은 조촐한 술자리를 마련하여 신년이 시작되었음을 즐기는 자리를 만들었다. 철무정은 세 잔 술에 얼굴이 벌겋게 취해 버리고 말았다. 그는 빨리 자고 싶다는 구실 아래 자신의 거처로 돌아왔다. 그의 거처는 지하에 있으며, 비밀 서류가 많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감히 그 곳으로 들어설 수가 없다. 철무정은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문을 걸었으며, 책장 위의 몇 가지 서류를 검토한 다음에 암도로 접어들었다. 그렇다. 그의 방은 외부로 직통하는 통로를 갖고 있었다. 그러하기에 사람들은 철무정이 바로 창궁비연이라는 것을 꿈에서조차 짐작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 녀석이 비뚤어지고 있다. 어리석은 녀석!' 철무정은 암도를 따라 나는 듯 달렸다. 암도의 끝은 늪지이다. 그 곳을 아는 사람은 철무정뿐이다. 철무정은 늪지로 나서며 얼굴을 바꿨다. 그는 변체환용술(變體幻容術)을 익히고 있는지라 역용환을 쓰지 않고도 얼굴을 바꿀 수 있었다. 예인촌(藝人村) 깊은 곳, 다른 때와는 달리 을씨년스러운 공기가 감돌고 있다. 정사 대접전이 다가오고 있다는 풍문 가운데 대륙의맹 전역에 살벌한 공기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 예인촌을 관장하고 있는 인물은 대내총관(對內總官)이기도 한 사마량(司馬良). 그는 예인촌 사람들을 의맹의 기생충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특히 그는 한 소년에 대해 심히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늘 술을 마시고, 하루라도 여체를 곁에 두지 않고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 자. 그의 아버지가 의맹의 일등공신이 아니었더라면 그는 벌써 지하 뇌옥에 갇혔을 것이다. "벌레 같은 놈!" 대내총관 사마량은 초류홍을 그러한 식으로 불렀다. 사실 그는 초류홍이 내외살각의 일급 살수이며, 벌써 서른다섯 번에 걸쳐 마도 거마를 제거한 바 있는 의맹의 숨은 실력자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술 더 갖고 와!" 주루가 그의 목소리로 인해 시끄러워진다. 죽도(竹刀)를 허리에 찬 채 의자에 걸터앉은 미청년, 그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기녀 둘을 동시에 끌어안은 채 술을 퍼마시고 있었다. "ㅋㅋ… 나의 어버지는 의맹을 위해 죽었다. 그러한 이상 의맹은 내게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초류홍은 얼굴이 시뻘개져 있었다. 그가 손을 휘젓자 탁자 위의 술병이 굴러 떨어져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어졌다. "빌어먹을! 이제 내 말을 말같이 들리지도 않는 게로군." 초류홍은 욕설을 토하며 벌떡 일어났다. "아이쿠!" "엉덩이가 으깨지겠다." 두 명의 기녀는 땅바닥에 내팽개치며 울상을 지었다. "가져!" 초류홍은 기녀들에게 한 줌 금원보(金元寶)를 집어던진 다음, 뒤돌아보지도 않고 주루를 빠져 나갔다. 그리고 의맹의 무사들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소리 없는 가운데 욕설을 토해 냈다. 비틀비틀-! 초류홍은 갈지자걸음으로 걸었다. 말라 죽은 갈대밭 근처에 이를 때, 문득 그의 고막 속으로 싸늘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류홍! 타락한 체하라고 했지 진짜 타락하라고 했더냐?" 이끼 낀 바위 위, 키가 헌칠한 회의인 하나가 걸터앉아 있었다. 무심한 눈빛, 그리고 잔잔한 호흡. 초류홍은 목소리를 들은 후에야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ㅋㅋ… 위대하신 창궁비연 나으리가 속하를 찾아오시다니… 대외살각은 마비되어 버렸거늘… 그래, 속하에게 어떠한 살인 명령을 내리고자 하시는지?" 회의인은 철무정이었다. "류홍! 나와 소맹주 사이의 알력으로 인해 살각의 움직임이 마비되었다고는 하나, 우리에게는 할 일이 많다. 그리고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부단히 무공에 정진(精進)해야 한다." "ㅋㅋ… 나는 철부지가 아니오. 나는 귀하를 잘 알고 있소. 귀하는 피에 굶주린 인물이며, 의맹을 이용해 자신의 야심을 채우는 인물인 것이오. 그리고 매옥당 소맹주는 다행스럽게도 귀하의 정체를 알기에, 귀하를 제거하고자 하는 것이오. 며칠 귀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귀하가 제거되었다 여겼는데… 빌어먹을! 아직 제거되지 않았구려." "멍청한 놈! 너는 쓸데없는 데 정력을 낭비하고 있다." "ㅋㅋ… 나는 귀하 같은 자의 속하인 것이 분할 뿐이오" "정말이냐?" "그렇소." "너는 나를 벨 자신이 있느냐?" "물론 기회만 주어진다면!" "좋다. 지금 기회를 주겠다!" 철무정은 팔짱을 깊이 끼고 초류홍을 향해 가슴을 환히 열어 주었다. - 베고 싶다면 베라! 철무정은 지극히 의연한 자세를 보여 주었다. "정녕… 죽고 싶은 게로군!" 초류홍은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는 천천히 죽도를 쳐들었으며, 죽도의 끝은 차가운 대기를 가르며 철무정의 가슴 쪽으로 다가섰다. 철무정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호흡을 바꾸지 않았으며 눈도 깜빡거리지 않았다. 산(山)처럼 그는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치릿-! 초류홍의 죽도는 극쾌도(極快刀)이다. 그는 허공의 한 점을 정확히 갈랐고, 그의 죽도는 섬전일화(閃電一花)에 따라 철무정의 가슴으로 다가섰다. 하나, 초류홍은 죽도를 일순 정지시키고 말았다. 푸르르르-! 그는 철무정을 보며 땀을 쭈욱 흘렸다. "차마… 차마……!" 초류홍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그의 죽도는 철무정의 가슴 바로 앞에서 정지되어 있었다. "어리석은 놈! 기회를 주는 데에도 베지 못하다니! 그렇듯 심약해서야… 척마멸사 대업에 선봉이 될 수 있겠느냐?" 철무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일순 그는 팔짱을 풀며 종학금룡수(縱鶴擒龍手)를 발휘했다. 손바닥 그림자가 어른거리는가 하더니, 초류홍은 잇따라 따귀 세 대를 얻어맞고 사 장 뒤로 나가떨어졌다. 그의 얼굴은 피에 물들었다. 하나, 그도 독종인지라 신음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철무정은 몸을 일으키며 그를 쓸어 봤다. "나를 못마땅하게 여긴다면 나를 꺾을 정도로 강해져라." "으드득!" "네게… 나에게 도전할 권리를 주겠다." "진심이오?" "그렇다." "ㅋㅋ… 그 말을 가슴 깊이 새기겠소." 초류홍은 눈빛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철무정은 그를 실로 혹독하게 다뤄 왔다. 초류홍은 철무정의 제자라 하더라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초류홍은 철무정을 존경하기에 앞서 증오하고 있었다. 이유는 오직 하나, 철무정으로 인해 그 자신이 암살자가 되어야 했기에! "언제고 그대의 오만을 베겠소!" "마음대로!" "ㅋㅋ… 내가 성장할 때까지 죽지 않기를 빌겠소!" 초류홍은 치를 떨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가 휘청이며 일어나려 할 때, 작은 물체 하나가 초류홍의 등줄기로 날아들었다. 초류홍은 그것을 피하기 위해 몸을 뒤틀고자 하였으나 이미 늦은 후였다. "으음……!" 초류홍은 쓴 신음 소리를 내며 벌렁 나뒹굴고 말았다. "누가… 비도(飛刀)를?" 천무정은 벌떡 일어나며 비도가 날아든 곳을 바라봤다. 먼 곳에서 하나의 호리호리한 그림자가 다가서고 있었다. 매우 빠르게 다가서는 자. 그는 은빛 찬란한 옷을 걸치고 있으며 두 자루 검을 등에 교차해 메고 있었다. 그는 풀을 밟고 다가서고 있으되 풀잎이 뉘어지지 않았다. "재미있는 녀석들이로다!" 싸늘한 목소리였다. 다가서는 자는 나이 서른 정도로 보였다. 얼굴이 희고 갸름하다. 귀공자의 인상인데 상당히 냉막해 보였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의 무공이 철무정의 수준에 육박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비화수혼(飛花搜魂) 절기를 발휘해 초류홍을 간단히 제압한 것이다. "귀하는?" 철무정은 천천히 손을 끌어올렸다. "훗훗… 네가 창궁비연이냐?" 은의공자는 빠른 속도로 다가서서 초류홍 곁에 섰다. '나를 알다니? 대체 누구기에……?' 철무정이 흠칫 놀랄 때. "당세에 나의 말을 이해할 사람은 오직 두 사람. 그 중 하나는 마검향(魔劍香)으로, 현재 그는 득검(得劍)하기 위해 마검도(魔劍島)에 숨어 들었으며… 또 하나의 인물은 창궁비연이라 할 수 있지." 마검향은 숙야장청의 둘째 제자이다. 그 또한 의맹을 떠난 지 오래 되는 인물이었다. 한 산에 두 마리 호랑이가 살 수 없다는 말이 있다. 대권은 매옥당에 쥐어졌기에, 그와 능력이 버금 가는 사람은 의맹을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마검향과 같은 인물이 의맹에 머물러 있더라면 의맹의 힘은 지금보다 배가 되었을 것이다. 숙야장청이 쓰러진 후, 의맹에는 두 번의 엄청난 시련이 있었다. 첫번째 시련은 마검향에서부터 시작이 되었다. 그는 매옥당과 대립하였는 바, 그 이유는 숙야옥상 때문이었다. 그는 숙야옥상을 사랑했던 인물. 하나 당시 숙야옥상의 나이는 열네 살에 불과했다. 매옥당은 마검향이 숙야옥상을 데리고 가는 것을 막았고, 마검향은 매옥당을 이기주의자로 몰아세우며 삼천 명의 영재(英才)들을 이끌고 맹을 떠나갔다. 그는 마검도라는 문파를 세웠으며, 지난 육 년 간 부단히 힘을 기르고 있는 실정이었다. 또 한 번의 시련은 표랑이 떠날 때 왔다. 표랑은 이기적인 인물, 그는 십대세가(十大世家)의 힘을 이끌고 서쪽으로 떠나갔다. 그리고 나서 이제까지 한 번도 소식을 전한 바가 없다. 한데 지금 그가 돌아온 것이다. 표랑, 그가 창궁비연을 찾아온 것이다. "훗훗… 일검서생( 劍書生) 표랑을 알겠지?" "누구에게도 이 초를 쓰지 않고 일 초로 승부를 낸다는… 표랑!" 철무정은 그제서야 표랑을 알아봤다. 천하의 풍류남 표랑(漂浪). 그는 숙야장청 휘하 가운데 가장 뛰어났던 인물이다. 다만 그는 숙야장청이 대의를 위해 사사로운 이익를 포기한다는 데 불만을 품고 훌쩍 떠나가 버린 것이다. 본시 그는 강호 명가 출신이다. 그는 자신의 사적인 지지세력을 끌어모아 하나의 거대집단을 형성하였으되, 최근 들어 그 일이 거의 달성된 입장이라 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맹에 왔지. 훗훗… 만에 하나 사제가 없었더라면, 이 곳의 현판은 벌써 쪼개어졌을 것이다." "그 말뜻은?" "나는 매옥당을 잡종으로 여긴다는 말이지." "아……!" "매옥당은 옹졸한 겁쟁이이다. 그는 마도와 정면 대립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러하기에 과거 마검향 이사형이 떠났고, 내가 떠났던 것이다. 또한 모름지기 사제 또한 오래 버티지 못하고 떠나게 될걸세." 표랑은 안목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맹을 떠난 지 오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륙의맹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알아차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지금의 상황대로라면 철무정은 맹을 떠날 수밖에 없다. 그는 대외살각을 독자적인 세력으로 키워 마도세력과 정면 대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숙야 대사부는 한 마리 봉황을 낳았으며, 세 마리 호랑이와 한 마리 새앙쥐를 길렀지." 봉황이란 숙야옥상을 뜻한다. 만인의 연인이 되는 여인. 표항도 그녀를 사랑한 바 있다. 하나 그는 한 사람의 적이 될 수 없음을 알고 옥상을 포기했다. 그는 바로 마검향. 그는 표랑을 능가하는 절대절정 고수였다. 표랑이 옥상에게 관심을 기울였더라면 마검향의 검이 그의 목젖을 길게 그어 버렸을 것이다. 마검향은 현재 운검 중이며 머지않아 강호로 복귀한다. 그가 되돌아온다면 강호 정세에 상당할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세 마리 호랑이란 마검향과 표랑, 철무정을 말한다. 그리고 한 마리 새앙쥐란 매옥당을 뜻하는 것이다. "분한 것은, 한 마리 새앙쥐가 전 백도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표랑은 섬세한 감각과 차가운 피를 함께 지닌 인물이었다. 두 사람은 처음 보는 처지였으되 오랫동안 말을 주고받은 사람 마냥 친한 감정을 가질 수 있었다. 용(龍)을 알아보듯, 두 사람은 서로서로를 알아보고 있는 것이다. "나는 긴 말을 싫어하는 성격이야." 표항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거렸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지요?" "훗훗… 나는 하나의 세력을 이룩했지. 일컬어 절정무문(絶頂武門)! 아직 강호에는 소문이 나지 않은 세력이지." "으음, 절정무문!" "절정무문에는 첫째만이 머물러 있지. 그리고 마도의 잡재들을 조롱할 만한 영웅만이 머물러 있지. 나는 절정무문의 이인자를 구하기 위해 삼천 리 길을 왔다네. 바로 자네를 만나기 위해! 훗훗… 벌써 나흘 전에 여기 왔지. 자네를 찾기 위해 이 곳 저 곳을 기웃거리다가 결국 자네를 발견하게 된 것이네." 표랑은 의지가 강한 인물이다. 또한 그는 자신의 천하를 이룩해 보겠다는 야망을 갖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매옥당을 조롱하며 증오하고 있다. 매옥당이 아니라 표랑이 소맹주의 자리에 머물러 있다면, 아마도 정사는 벌써 수백 차례 접전을 치루며 둘 중 하나만 살아남게 되었을 것이다. "의맹은 기울어져 가는 달이지. 그리고 절정무문은 떠오르는 태양! 어떤가? 절정무문에 투신하지 않겠는가?" "고마운 초빙이외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할 일이 많소이다." "ㅋㅋ… 듣자니 매옥당이 자네를 제거하려 한다는 데…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매옥당을 위해 싸우기를 계속하겠단 말인가? 듣기보다 어리석은 친구로군?" "나는 매옥당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외다." "그럼… 정의를 위해 싸우는가?" "꼭 그러한 것도 아니오." "그럼?" "나 자신을 위해 싸우는 것이외다." "ㅋㅋ… 어쨌건 결정하게. 나와 힘을 합해 매옥당을 칠 것인가, 아니면 영원히 매옥당의 아랫사람 노릇을 하겠는가를……!" "으음……!" "마음이 독해야 장부 소리를 듣지." 표랑은 갈대잎을 질겅 씹었다. 그는 의맹에 격동의 계절이 도래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왔다. 의맹의 힘은 서서히 약화되고 있으며, 중요한 것은 의맹의 비밀이 하나 남김없이 마도에 노출이 되었다는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의맹 구석구석에는 마도의 첩자들이 우글거리고 있어 비밀스러운 일이 시작되면 즉시 마도가 그 사실을 알아버린다. 표랑은 그 일을 못마땅히 여기고 철무정과 힘을 합해 매옥당을 제거하고자 결심하고 여기에 온 것이다. 바람이 차다. 철무정의 옷자락이 바람에 나풀거렸다. 그리고 그의 미간에 검은 그늘이 만들어졌다. 그는 깊은 번뇌 속을 헤매다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매옥당을 죽이고 싶어하는 놈이오. 하나, 그는 나의 은인이오. 그러한 이상 나는 그의 적이 되지 못하오." "쯧쯧, 듣기보다 속이 좁군." 표랑은 상당히 실망한 듯했다. 그는 조약돌 하나를 걷어차 산산이 부숴 버렸다. "마음을 결정할 시간이 필요하다면 시간을 주겠네." "시간은 필요 없소이다. 내 마음은 이미 결정되었으니까." "어리석은 친구로군." 표랑은 고개를 휘휘 저으며 뒤돌아섰다. 일순 그는 팔과 허리 사이로 초류홍을 끼며 걸음을 내디뎠다. "자네가 나의 동반자가 되기를 거절한다면, 초류홍이라는 녀석을 대신 선택하겠네. 초류홍은 어렸을 때 나를 졸졸 따라다닌 녀석이지. 훗훗… 조금만 가르치면 큰일을 할 재목이지." 그는 빠른 속도로 치달렸고, 하나에서 셋을 셀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때 그는 이미 능선 하나를 타넘어가 버렸다. "표랑… 대단한 자다!" 철무정은 숨을 훅 들이마셨다. "저런 인물이 의맹에 버티어 있다면, 사마외도가 감히 의맹을 업신여기지 못하리라." 2 그 날 저녁, 취선주루는 상당히 만원이었다. 얼큰히 취해 소리치는 취객들 가운데, 키가 헌칠한 청년 하나가 호젓한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입술을 질겅질겅 씹으며 근처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 분은… 저 곳에 계시다.' 그는 애써 눈빛을 감추고 있었다. 그가 내공을 모조리 발휘한다면 눈빛이 자색으로 타오를 것이다. '묵월(墨月)… 그 분은 마도 서열 오 위인 자. 그 분은 십 년 전 이 곳에 스미어드셨다.' 그는 술잔을 놓고 천천히 일어났다. 그는 후원 쪽으로 드는 문 안으로 접어들었다. 후원에는 창굴(娼窟)이 마련되어 있다. 돈으로 여체를 사는 곳. 하나, 청년의 눈은 여체를 찾는 눈이 아니었다. 그는 창녀를 소개하는 점소이가 다가서는 것을 보았다. 점소이는 사무적인 투로 이렇게 묻고 있었다. "단골 기녀가 있습니까" "하나 있네." "누구인지요?" "이름이… 십오랑(十五娘)이네." "호오, 십오랑을?" 점소이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청년을 위해서 아래로 유심히 쓸어 봤다. 하늘에는 고월이 걸리어 있다. 청년은 주춤거리며 창굴 속으로 접어들었다. 3 망천애(望天崖). 거기 서면 일대가 한눈에 보인다. 황산의 두 가지 신비는 운해(雲海)와 송해(松海)이다. 망망대해처럼 펼쳐진 구름 바다, 기기묘묘한 형상을 이룩하는 구름 바다는 대대로 황산의 자랑이었다. 그리고 빛이 유난히 붉은 주사송(朱砂松) 또한 황산의 절경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한 시진 전 망천애 위로 올라섰다. 헌칠한 키가 회색의 장포와 잘 아울리고 있다. 구태여 외모를 뽐내고자 하지 않는 것이 그의 외모를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마도는 무엇인가를 시작하려 하고 있다.' 철무정은 뒷짐을 진 채 이리저리 거닐었다. '동천류라는 자는 마도의 부흥을 위해 계략을 꾸미고 있다. 후후… 만에 하나 내가 그 자의 마지막 계획을 격파한다면, 천겁만마전은 사기를 잃고 일패도지하게 될 것이다.' 철무정은 운해를 내려다봤다. 문득 하나의 귀여운 얼굴이 구름 바다에서 피어 올랐다. 철무정은 문득 그 이름을 토해 냈다. "소옥(少玉)!" 그렇다. 철무정은 문득 그 이름을 토해 냈다. 그는 학자로 대성할 꿈을 갖고 있었던 일대 수재. 하나 그의 가문은 마도세력에 의해 철저히 유린되었으며, 그의 아내는 그가 보는 곳에서 마도인에 의해 윤간되었다. 그는 반 미쳐 버렸으며, 세 달 내내 술을 퍼마시다가는 한 가지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것인 즉, 스스로 마도세력을 격파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오 년… 후후… 벌써 오 년이던가?' 철무정의 머리카락이 마파람에 흩날렸다. '언제까지 강호에게 머물러야 할지 모르겠군.' 철무정의 생각이 거기에 미칠 때였다. 누군가 뒤쪽으로 다가서는 듯 가벼운 인기척 소리가 들렸다. 그의 발걸음은 둔하고 무거웠다. '무공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철무정은 누군가 다가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오 년 전 파멸백팔관(破滅百八關)을 거쳤다. 파멸백팔관은 숙야장청이 이룩한 악마의 연무장으로, 파멸백팔관을 모조리 거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철무정은 파멸백팔관을 통과할 이후 가공한 능력을 지니게 되었으며, 초인적인 청력과 안력을 지니게 되었다. 사박- 사박-! 철무정 뒤쪽으로 한 사람이 다가섰다. 눈처럼 흰 옷을 걸친 여인, 그녀의 피부는 눈보다도 희었다. 어딘지 모르게 병적(病的)인 아름다움이다. 커다란 눈망울은 겁이 많아 보이며, 뾰족한 콧날은 그녀의 개성을 역력히 엿보여 주었다. 그녀는 철무정의 뒤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잔기침 소리를 냈다. 철무정은 그제서야 그녀가 등 뒤에 있다는 것을 아는 척하며 뒤돌아섰다. "아, 낭자시군." "저예요. 옥상이에요." 등 뒤로 나타난 여인은 숙야옥상이었다. "날씨가 차갑소. 여기까지 어쩐 일이시오." 철무정은 뒷짐을 지고 말했다. 그는 모든 여자에게 무뚝뚝하게 대했다. 그런데 그 무뚝뚝함은 이상한 매력이 되었으며, 한 번 그의 매력에 빨려든 여인은 도저히 헤어나지 못하고 마는 것이다. 숙야옥상이 그러하고, 십오랑이 그러하다. "드릴 말씀이 있어 왔습니다." 숙야옥상의 눈빛이 아주 맑다. 그녀는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마치 결전에 돌입하는 여장부 같은 모습이 아닌가? "어떠한 말을?" 철무정은 애써 눈길을 다른 데 주었다. 그는 정이 많은 사람이다. 하나, 그는 지극히 냉철한 사람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피비린내 나는 세월이 그의 기질을 전혀 다르게 변화시킨 것이다. 그는 마도를 섬멸하는 그 날까지 마음의 문을 아무에게도 열어 주지 않으리라 생각한 지 오래였다. '바로 저 눈빛이다.' 숙야옥상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녀에게는 남이 알지 못하는 비밀이 있다. 얼마 전, 그녀는 대륙의맹의 비밀 수호신이라 할 수 있는 창궁비연의 등에 업힌 바 있다. 그녀는 창궁비연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던 여인인 것이다. 창궁비연과 철무정은 너무나도 판이한 위치에 있다. 철무정은 서치(書痴), 그는 닭 모가지 비틀 힘도 없는 서생이다. 창궁비연은 남북(南北) 십삼(十三) 성(省)의 전 마도인이 공포의 대명사로 여기고 있는 존재이다. 두 사람을 같은 인물이라 여기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숙야옥상은 두 사람의 눈빛이 비슷하다 느끼고 있는 것이다. '바로 저런 체위였다. 내 짐작이 맞다면… 두 사람은 하나이다.' 숙야옥상은 입술을 잘강 물었다. 그녀는 여기 오기 전, 작은 음모를 꾸민 바 있었다. 그것인 즉, 철무정이 바로 창궁비연이라는 것을 밝혀 보겠다는 것이었다. "한 가지 보여 드릴 것이 있어요." "무엇을?" "조부님의 유품 가운데 하나입니다." 숙야옥상의 조부라면 전대의 맹주이다. 그는 신검무제(神劍武帝) 숙야천(叔夜天). 그는 철무정이 장기로 삼고 있는 항마백팔예(降魔百八藝)를 집대성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무예로 미친 인물로 천하 각대문파의 절기를 모조리 익히는 것을 취미로 삼고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그는 각대문파의 실전 절예를 회복하는 것을 생활로 삼았으며, 무가지보를 수집하여 그 비밀을 푸는 것으로 여생의 업을 삼았었다. "바로… 이것입니다!" 숙야옥상은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녀의 손바닥에는 옥접(玉蝶) 하나가 놓여 있었다. 너비가 세 치, 길이가 두 치이다. 어찌나 정교히 만들어졌는지 더듬이 두 개와 날개의 태극 도형이 진짜 나비의 그것과 같다. "이것은?" 철무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태극살접(太極殺蝶)이라 합니다. 호호… 다시는 납치되지 않기 위해 호신용구로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이 위력은 상당합니다." "위력이라면?" "보십시오!" 숙야옥상은 입술을 잘강 물며 태극살접을 가볍게 퉁겼다. 순간, 태극살접은 산 나비 마냥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나비의 날개 위로 양광(陽光)이 떨어져 내리며, 아주 거대한 태극 도형 하나가 허공에 떠올랐다. 우우웅-! 태극문양이 일 장 방원을 휘어감았으며, 무시무시한 한망(寒芒)이 철무정의 가슴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어엇?" 철무정은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휘청휘청-! 땀을 줄줄 흘리며 뒤로 뒤뚱뒤뚱 물러나는 모습이 가관이었다. "어서 저 흉물(兇物)를 거두오!" 철무정은 자지러지며 소리쳤다. 숙야옥상은 입술을 질겅 씹으며 소리쳤다. "발출하는 법은 알아도 거두는 법은 모릅니다." "으으……!" 철무정은 두 손을 허우적거리며 태극살접을 떨쳐 버리려 했다. 그러나 태극살접은 미세한 바람을 타고 비행하는 것인지라, 그가 손을 허우적거릴수록 나는 속도가 보다 빨라졌다. 한순간. 팟-! 태극살접은 철무정의 가슴에 달라붙었으며. "욱욱……!" 철무정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벌렁 넘어지고 말았다. 또르륵-! 숙야옥상의 뺨을 타고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아니었던가?" 그녀는 철무정 바로 곁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녀는 철무정이 바로 창궁비연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하기에 암기를 던져 철무정이 무공을 발휘하도록 유도하고자 했던 것이다. 한데, 철무정은 태극살접을 막지 못하고 혼절하고 말았으니……. "아아, 두 사람은 다른 사람이었단 말인가? 내가 본 바가 틀림없다면… 두 사람은 하나이거늘!" 숙야옥상은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이윽고 그녀는 천천히 품을 뒤져 약병 하나를 끄집어 냈다. 그 안에는 진홍색 단약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청명호심단(淸溟護心丹). 어지간한 상처를 순식간에 치료하는 개세의 신약으로, 무당파(武當派) 홍운도장(紅雲道長)이 숙야옥상의 열일곱 살 생일날 선물한 것이었다. 파르르르-! 숙야옥상의 손길은 실망감에 격렬히 떨렸다. 그녀는 약병 마개를 따려고 손아귀에 힘을 가했다. 순간 손바닥에 땀이 흥건히 배었는지라 약병이 손바닥에서 미끄러져 굴러 떨어져 버렸다. 약병은 떼구르르 구르기 시작했고. "어머머……!" 숙야옥상은 깜짝 놀라며 약병을 줍기 위해 몸을 이동시켰다. 일순 그녀는 빙판을 잘못 디디고 휘청거렸으며, 그녀의 섬세한 몸뚱이는 망천애 끝으로 휘청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아아악……!" 숙야옥상은 나락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단말마의 비명 소리를 냈다. 그녀의 몸뚱이는 만 길 벼랑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대체 얼마를 떨어졌을까? 슷-! 그녀의 위쪽에서 회색 새 한 마리가 떨어져 내렸다. 아니, 그것은 회포를 걸친 한 청년의 몸뚱이었다. 그는 만근추(萬斤錘)를 발휘해 숙야옥상보다 훨씬 빨리 떨어져 내렸으며, 일순 단애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고 있는 노송의 가지를 발끝으로 차며 잠룡승천(潛龍昇天)으로 올라갔다. 한순간 그는 빠른 속도로 날아 내리는 숙야옥상의 몸뚱이를 가볍게 받아 들었으며. "핫-!" 기합 소리가 터져 나오는 가운데 그의 몸뚱이는 십오 장을 치솟아 올라 망천에 위로 사뿐히 날아 내렸다. 모든 일은 거의 일순간에 벌어졌다. 숙야옥상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바, 그 눈물은 슬픔에 겨운 눈물이 아니라 기쁨에 겨운 눈물이었다. "제 짐작이 맞았군요." "……." 머쓱한 표정을 짓는 인물, 그는 조금 전까지 혼절한 체하고 있던 철무정이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경신술을 발휘하여 숙야옥상을 구한 것이다. "철 공자가 바로 창궁비연이라는 저의 짐작이 맞았습니다." "부정하지 않겠소." 철무정은 씁쓸레한 표정을 지으며 눈길을 돌렸다. 그는 숙야옥상을 살리기 위해 무공을 발휘하고 만 것이다. "이제… 저를 부정할 명분이 없으십니다." 숙야옥상의 태도는 당당하기 짝이 없었다. 철무정은 자신이 무림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인해 숙야옥상을 거절해 왔다. 그런데 그가 바로 창궁비연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만 것이다. "이제는 저를 뿌리치실 수 없으십니다." "꼭… 그렇지는 않소!" 철무정의 대답은 여전히 냉담했다. "어이해?" "이유는… 내게 아내가 있고, 아들이 있기 때문이오." "으음……!" "그 말은 사실이오." "……." 숙야옥상의 얼굴빛이 점점 초췌해졌다. 철무정은 입술을 질끈 씹으며 보다 모질게 말했다. "또한 낭자를 위함이기도 하오. 나는 낭자를 안을 자격이 없는 자요." "변명하지 마십시오. 흐흑… 상공에게는 소녀를 거절할 명분이 하나도 없습니다." 숙야옥상은 원망에 가득 찬 눈빛을 던졌다. "미안하오. 내가 할 말은 그뿐이오." 철무정은 천천히 등을 돌렸다. 그의 뒷모습은 쓸쓸해 보였다. "바보!" 숙야옥상은 크게 소리쳤다. 철무정은 뒤돌아보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낭자를 받아들이기에는 나의 마음이 너무나도 차갑소. 나의 마음은 늘 겨울이며… 봄이 오기에는 너무 머오.' 철무정은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사라져 갔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잼 납니다
재미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