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 자동차는 발명된 지 겨우 100년이 지났지만, 지난 100년 동안의 인류 문명의 총아로서 문명의 선두에 서서 20세기 인류 문화사를 다시 쓰게 만들 정도로 큰 역할을 하였다. 그 역할은 앞으로 어느 정도 축소는 되겠지만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자동차를 살펴보면 환경파괴, 자원의 고갈, 사고에 따른 인명 손실 등 많은 단점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 단점들이 빠른 시간 내에 개선되지 않는다면 자동차 또한 인류의 문화 유산 물로 박물관에서만 볼 수 있는 시대가 올 것이다. 여기서는 10년 내 현재의 자동차가 개선되어 위의 단점들을 극복하고 계속 인류의 사랑을 받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1) 환경 친화적인 자동차 자동차의 배출가스 및 소음으로 인한 공해는 전 세계적인 현상이며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는 그 정도가 세계 최악의 상태이다. 배출가스에 대한 기술적인 대책으로 주행 시 발생하는 유해성분의 억제 및 재처리가 있으며, 소음 대책은 강성의 향상, 방진고무, 진동흡수 댐퍼 등이 있다. 궁극적으로는 알코올, 전기 같은 청정 연료를 쓰고 소음은 능동소음 제거장치와 차 음식과 흡 음식을 이용한 완벽한 소음의 차폐 방법이 사용될 것이다.
2) 안전한 자동차 자동차 사고로 우리나라에서만 연간 10만 명 이상의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과속, 불완전한 도로, 운전자의 시계 부족 등이 그 이유이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서, 속도제한 차, 초음파에어백, ITS, GPS 이용 운전정보 제공, 나이트비전, 초음파 충돌방지 등을 이용한 자동차가 만들어져 좀더 안전한 상태에서 운전할 수 있는 자동차와 안전한 도로 시스템을 갖출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3) 자원의 소비가 적은 자동차 보존 량이 한정되어 있는 화석연료와 철 등을 우리가 오랫동안 사용하기 위해서는 그 효율을 높이고 새로운 대체재를 만들어야 한다. 그 방법으로 차량의 경량화, 하이브리드카와 같은 연비가 뛰어난 자동차, 무 연소에너지 발생장치인 연료전지, 강철을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소재를 사용한 자동차가 곧 우리 눈앞에 현실로 다가오리라 생각된다.
4) 편리한 기능의 자동차 현재의 자동차도 10년 전 차와 비교한다면 그 편리함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향상되었다. 그러나 우리 인류의 욕망은 끝이 없어 음성인식 기능을 갖춘 자동차 안에서 모든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인터넷 카, 주행 프로그램에 따라 자동 주행이 되는 차량들이 곧 현실화되리라 생각한다.
시발(始發)
1955년 국제차량 공업사
우리나라 최초의 국산자동차. 1955년 8월 서울에서 정비업을 하던 최무성, 혜성, 순성씨 3형제가 미군으로 불하받은 지프의 엔진과 변속기, 차 축 등을 이용하여 드럼통을 펴서 만든 첫 지프형 승용차. 우리 손으로 만든 첫 자동차인 시발은 2도어 4기통 1.323cc 엔진에 전진3단, 후진1단 트랜스미션을 얹었으며, 국산화 율이 50%나 되어 긍지가 대단했으나, 한 대 만드는데 4개월이나 걸려, 시발 차의 값이 8만 환으로 사가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러다가 1955년 10월 광복 10주년을 기념하여 경복궁에서 열린 산업박람회 때 최무성씨가 시발차를 출품하여 최우수 상품으로 선정됨과 동시에 대통령상을 수상함으로써 신문에 크게 보도되자 을지로 입구에 있던 그의 천막 공장에는 시발차를 사가려는 고객으로 문전성시를 이루었으며, 이로 인해 가격도 하루아침에 30만환으로 뛰어 올랐다. 대통령상을 받은 후 한 달도 못되어 1억환 이상의 계약금이 들어와 이 돈으로 공장도 사고 시설도 제대로 갖추어서 양산 체제로 돌입했다. 특히 영업용 택시로 인기가 높아서 생산능력이 수요를 늘 못 따라갔다. 얼마후 시발 투기붐까지 일어나 상류층 부녀자들 사이에선 "시발계"까지 성행하여 프리미엄까지 얹어서 전매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새로운 차 개발에 많은 돈을 썼고 5.16혁명으로 정부 보조금이 끝난데 다가 1962년 산뜻한 "새나라"자동차가 쏟아져 나오자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 차는 1963년 5월까지 3천 여대를 만들어 시판했다.
새나라
1962년 새나라자동차 새나라 자동차는 62년 8월 경기도 부평(지금의 대우자동차 공장)에 연산 6천 대의 생산능력을 갖춘 조립공장을 세웠다. 여기에서 62년 11월부터 생산하기 시작한 새나라는 닛산의 61년식 블루버드 P310형 부품을 도입해 조립한 차였다. 4도어 세단으로 뒷바퀴 굴림인 새나라는 직렬 4기통 1,200cc 55마력 엔진을 얹고 스타일링이 돋보였다. 현대식 조립라인에서 생산된 우리나라 최초의 승용차로 기록된다. 새나라는 그러나 모처럼 우리 손으로 자라나던 시발자동차를 몰아내는 부정적 역할을 맡았고, 당시 제3공화국의 특혜시비로 1년 만에 퇴장당하는 비운의 차가 되고 말았다. 63년 5월까지 2천700여대를 생산했다
삼륜 용달 K-360,T-600 1962년 기아산업
일본 동양공업(현 마쓰다)과 제휴하여 1962년 세 바퀴 소형화물차 K-360, 1963년에는 경소형 T-1500 을 내놓으면서 우리나라에 용달차 시대를 연 기아산업( 현 기아자동차 )이 생산한 뉴 모델 용달차. 일명 딸딸이로 불리우며 당시 자영업자들로부터 "기름이 적게 드는 경제적인 차" 로 크게 환영받았다.
K360은 스피드미터와 다이나모 경고 등, 오일압력 경고 등, 방향지시 레버, 와이퍼 스위치버튼, 라이트 스위치 레버 등의 운전장치를 갖추었으며, 특히 다이나모 경고 등은 충전상태를 알 수 있는 장치로 이그니션 스위치를 넣으면 녹색 등으로 점등, 제너레이터가 충전을 시작하면 꺼진다. 오일 압력 경고 등은 적색 등으로 표시되었다. 와이퍼 작동스위치는 로터 식으로 인스트루먼트 패널 위에 따로 설치되었다. 엔진은 배기량 577cc에 EA형 2기통 4행정 OHV로 최고출력 20마력(4,300rpm) 최대토크 3.8kgm(3,000rpm)를 발휘하였다. 변속기는 상시교합 및 선택습동 식으로 전진3단, 후진1단인 수동변속기였다. 기화기는 하다찌 소렉스형 VAD26-2A가 설치되었고, 냉각장치는 강제 공 냉식 이다. 클러치는 건조 단판식이 채용되었으며 브레이크 장치는 유압식 후륜 내부확장 방식(드럼 브레이크)였다. 시동성 향상을 위해 수동 초크버튼이 적용되었고, 연료 탱크는 12ℓ였다. 연료게이지는 계기판에 따로 설치되어 있지 않고 탱크 옆에 레벨 게이지(투명 비닐관)가 있어 연료량을 확인할 수 있었다.
T-600은 1969년에 생산되기 시작했으며, 기존의 K-360 보다 큰 최대 적재량 500Kg으로 T-600 이 나오면서 용달차의 주종이 바뀌었다. 전장 3,295mm. 차량중량 520Kg, K360과 동일 엔진을 사용하였으며 1969 ~1974년까지 7,742대가 생산되었다.
코로나(CORONA) 1500 1966년 신진자동차
일본 도요타자동차와 기술제휴로 1966년 5월 처음 생산한 모델. 코로나는 우리나라 도로사정에 꼭 알맞다는 평을 들으며, 나오자마자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중국이 대만과 국교를 맺고있는 나라와 관계를 맺는 나라까지도 거래하지 않겠다는 이른바 "주은래 4원칙" 을 발표하자 중국 진출에 뜻을 둔 도요타자동차가 철수. 기술과 부품공급이 끊어지면서 단 한대의 코로나도 만들 수 없었다. 1966년 5월 ~ 1972년 11월까지 44,248 대가 생산되었다. (사진은 1970년에 생산된 코로나 세 번째 모델인 코로나 70)
코로나는 1.2차 환기통 및 그로브박스, 히터, 라디오, 시거 라이터 등 다양한 편의장치를 갖추었다. 미 등과 와이퍼 및 워셔 조정스위치는 로터리 방식이고 주차 브레이크는 스티어링 컬럼 아래에 설치되어 있었으며 앞으로 당기는 타입으로 다소 독특한 모습을 가졌다. 방향 지시 등과 헤드라이트 조정 레버는 컬럼 타입으로 함께 사용했다. 특히 계기판의 속도미터는 최고속도 100km/h를 표시하였고, 보 네트지지대는 수동 접이식 이였으며 견인고리가 따로 없던 코로나는 앞 서스펜션 로어암에 밧줄을 연결한 후 견인하였다. 엔진(모델명 2R)은 배기량 1,490cc에 4기통 4행정 OHV(Over Head Valve)로 최고출력 82마력(5,200rpm) 최대토크 12.4kgm(2,800rpm)를 발휘하였다. 변속기는 전진3단 후진1단인 수동변속기를 적용하였다. 특히 코로나의 엔진은 80년대 초반까지 자동차 정비자격증을 따기 위해 반드시 익혀야 할 엔진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추억으로 남아 있기도 하다. 기화기는 2연식이고, 냉가 장치는 원심펌프 강제순환 냉각방식을 채용했다. 브레이크는 앞뒤 모두 유압 내부 확장방식(드럼 브레이크)이었다. 세스펜션은 앞 독립현가 코일스프링(유압 쇼크 압소버)을 뒤 반타원 비대칭 엽판 스프링(유압 쇼크 업소버)을 사용하였다. 특히 코로나는 오토 초크를 채용, 시동 전 액셀 페달을 한번 힘껏 밟아 오토 초크가 고속 아이들 위치에 놓이게 한 후 시동을 걸었다. 이는 기온에 따라 1~3회까지 액셀 페달을 밟는 숫자가 달랐다. 연료탱크의 용량은 45ℓ였다.
크라운(CROWN) 1967년 신진자동차 일본 도요타자동차의 자체 개발1호로 유명한 중형차 "크라운" 을 수입하여 조립, 생산한 모델, 우리나라 고급차 시장의 문을 연 것으로 평가된다. 소형차 "코로나"를 최고의 차로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 그보다 차체가 크고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크라운은 당시 큰 화제를 모았다. 최초의 국산 고급차로 주로 자가용이나 관용으로 공급되고 수량은 많지 않았으며, 상류층 자가용으로 인기를 독점하였다. 1967년 5월~1972년 7월까지 총 3,840대가 생산되었다.
퍼블리카(PUBLICA) 1967년 신진자동차
오너 드라이빙의 새바람이 서서히 일 무렵인 1967년 신진자동차(주)에서 제작된 차. 퍼블리카는 도요타가 61년 발표한 유럽스타일의 국민차 . 2도어 왜건 타입에 공 냉식 수평대향 2기통 796cc엔진을 장착한 연비가 뛰어난 승용차. 꼬마차 란 별명을 얻으면서 기름이 적게 드는 차를 바라던 오너들의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던 1960년대 우리나라 실정에 가장 알맞는 경제적인 차였으며, 당시 동양TV 특집에 경품차량으로 등장하기도 하였다. 퍼블리카는 1967년 5월에서 1971년까지 2,500대가 생산되었다.
코티나(CORTINA) 1968년 현대자동차
코티나는 67년 12월 현대자동차가 설립되면서 68년 2월 미국 포드사와 기술, 조립, 판매 관련 계약을 체결하고 1968년 11월부터 생산하기 시작한 차종으로 현대자동차의 시조라 할 수 있다. 코티나 시리즈는 스텔라(코티나 마크Ⅴ 하체 채택)가 탄생하기 전인 83년 5월까지 생산되었다. 68년 생산을 시작한 코티나는 배기량 1,598cc 4기통 OHC 엔진을 얹었으며 최대마력 75마력(5.000rpm) 최대토크 12.25kgm(2,500rpm) 최고속도 160km/h를 발휘하였다. 변속기는 전진4단 후진1단인 수동변속기가 적용되었고, 연료탱크 용량은 45.5ℓ 였다. 승차정원은 6명이었다.
1971년에 생산된 뉴 코티나는 배기량 1,593cc 4기통 OHC 엔진이 새롭게 얹혀졌다. 오버헤드 캠 축 방식인 OHC 엔진은 캠 축을 실린더 헤드에 직접 연결 캠 축으로 밸브를 개폐하는 것과 로커암을 이용해 간접적으로 밸브를 개폐하는 것 등의 2종류가 있다. 이 엔진은 최대마력 78마력(5,700rpm) 최대토크 11.4kgm(3,600rpm) 최고속도 160km/h를 발휘하였다. 변속장치는 전단 동시 치합 식으로 전진4단 후진1단의 수동변속기이며 시프트레버는 기존 컬럼 시프트에서 플로어 시프트(바닥에서 조정)로 변경하였다. 뉴 코티나는 또한 2중 유압 제동장칠 적용해 기존 단일계통이었던 제동장치를 한층 개선, 안전도를 높혔다. 2중 유압장치는 마스터실린더가 전륜과 후륜 2계통으로 나뉘어 작용, 1계통의 파이프가 파열되더라도 다른 1계통이 작용해 상시 제동력을 얻을 수 있는 시스템을 말한다. 브레이는 뒷바퀴에 드럼방식을 사용했으나, 앞바퀴에 디스크방식을 적용해 제동력을 높혔다. 조향장치도 기존 로드&링키지 방식을 개선한 랙&피니언 방식을 채택하였다. 현가장치는 앞 더블 위시본 방식이 채용되었고 뒤는 코일 스츠링 및 쇼크 업소버와 4개의 바 링크로 구성되었다. 클러치도 유압식에서 기계식(건조 단판식)으로 변경 적용하였다. (사진은 뉴코티나)
랜드 크루이저 픽업 1968년 신진자동차
우리나라 최초의 4륜 구동 픽업트럭 모델. 일본 도요타자동차의 크루이저 짚 모델을 들여와 개량, 생산하기 시작했다. 당시 산업건설 현장에서 인기가 높았던 소형 트럭이다.
포드 20M 1969년 현대자동차
68년 2월 현대자동차가 미국 포드사와 기술제휴 및 조립계약을 맺은 후 69년 5월부터 생산하여 73년 6월까지 생산된 차. 엔진은 배기량 1,955cc V6형으로 최고출력 106마력(5,300rpm) 최고속도 160km/h를 발휘했다. 변속기는 동시치합 식 전진4단 후진1단인 수동변속기이며 연료탱크는 55ℓ였다. 제동장치는 2중 브레이크와 배력 제동장치를 적용했으며, 앞바퀴는 디스크 방식을 뒷바퀴는 드럼방식을 채택했다. 전기장치에는 퓨즈박스가 설치되어 전기계통에 이상이 생길 때 퓨즈가 먼저 끊어져 전기계통으로 인한 화재사고를 방지하도록 했다, 와이퍼는 2단으로 되어있어 필요에 따라 빠르고 느리게 조정이 가능하도록 했으며 헤드라이트는 상하좌우 자유롭게 조정이 가능한 타입으로 되어 있었다.
피아트(FIAT)124 1970년 아시아자동차
신진 "코로나", 현대 "코티나" 등과 어깨를 겨루며 70년대 초 우리나라 최초로 승용차 3파전을 이루었던 승용차. 이탈리아 피아트사와 기술제휴로 생산한 피아트의 뉴 모델로, 잘 달리기로 소문난 피아트 차답게 경쾌한 달리기와 돋보이는 실용성, 경제적이고 내구성이 좋아 잔 고장이 없는 차로 오너드라이버들에게 크게 환영받았다. 직렬 4기통 1,197cc 65마력 엔진을 장착하였고, 최고시속 145km의 뛰어난 주행성능을 자랑하였다. 1970년 3월에서 1973년 4월까지 6,775대를 생산하였으며, 아시아자동차는 그 후 승용차 생산에서 손을 떼고 대형버스와 트럭을 만들었다.
뉴 크라운(NEW CROWN) 1971년 신진자동차
1967년 처음 등장한 고급 차 크라운의 마지막 뉴 모델로써, 구형에서 디자인을 네 번이나 바꾼 마지막 모델. 코로나만 해도 부러움의 대상이던 시절에 그보다 더 고급차인 뉴 크라운은 그야말로 부와 신분의 상징이었고, 동경의 대상이었다. 집 한 채 값이 70 ~ 80 만원 하던 시절. 차 값이 무려 310만원이었다. 디자인이 당시로서는 초현대적이어서 재벌총수, 장관, 국회의원 등의 자가용으로 인기가 높았다.
시보레(CHEVROLET) 1700 1972년 GM코리아자동차
1972년 기술제휴사인 일본 도요타자동차가 중국 진출을 위해 철수하자 미국 GM사와 합작하여 GM코리아자동차(주)를 설립하고, 코로나의 대체차량으로 생산한 승용차, 그러나 국내에서 인기를 끌지 못한 실패작이었다. 당시 유류사정이 좋지 않을 때 튼튼하고 힘은 강했지만 연비가 낮은데다가 지상고가 낮아 당시 우리나라 도로사정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특히 주 고객인 택시회사들로부터 외면을 당했다. 1972년 8월~ 1978년 10월까지 8,105대가 생산되었다.
레코드 1900(RECORD) 1972년 GM코리아자동차
GM코리아에서 1976년 새한자동차로 이름을 바꾸기 직전 GM 독일 자회사인 오펠에서 개발한 대표적인 중형차인 레코드를 국산화 한 승용차. 레코드1900은 독일 오펠사의 엔진, 보디 등 주요부품을 모두 수입해 만들었는데, 1,9ℓ 102마력 엔진은 최고시속 161km의 고성능을 냈다. 스타일링이 벤츠를 닮았다는 호평을 받으면서 중형차 시장에 신선한 충격을 몰고 왔다. 고급승용차로 인기가 있었으며, 75년에는 스타일을 조금 바꾼 레코드 로얄이 나왔는데 후에 대우자동차의 "로얄 시리즈"의 시초가 된다. 레코드는 1972년 8월에서 1985년 12월까지 4,148대가 생산되었다. (사진은 레코드 로얄)
브리사(BRISA) 픽업 B-1000 1973년 기아자동차
그 동안 조립생산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우리나라 자동차공업의 수준을 한 단계 올려 국산화의 바람을 몰고온 기아자동차가 제작한 최초의 승용차 타입 소형트럭. 차량중량 75Kg, 전장 3,845mm, 62마력 엔진을 얹은 브리사는 라틴어로 "산들바람" 이라는 이름이 뜻하는 것같이 기름이 적게 들고 경제성이 뛰어나 특히 자영업자들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1973 ~ 1981년까지 56,770대가 생산되었다.
브리사(BRISA) S-1000,1300 1974년 기아자동차
S-1000이란 이름으로 개발된 브리사는 그동안 2륜, 3륜 자동차의 공급에 주력했던 기아자동차가 경기도 소하리에 종합자동차공장을 준공하고 최초로 생산한 승용차. 일본 마쓰다의 패릴리아 바디를 기초로 985cc 62마력의 국산화 엔진을 얹은 브리사는 자동차공업의 국산화라는 돌풍을 일으켰다. 생산 첫해 65%이상, 다음해 80%이상의 국산화 율을 기록한 브리사는 자동차의 심장 격인 엔진을 80%까지 국산화함으로써 그간 조립생산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던 메이커에 큰 자극을 주었다. 특히 73년 불어닥친 제1차 오일쇼크로 근심하던 오너들에게 기름이 적게드는 경제적인 차로 환영을 받았다. 고연비에 내구성과 주파성이 좋은 브리사는 1974년 10월~ 1981년 12월까지 75,987대가 생산되었다. 브리사 1000은 74년 10월부터, 브리사Ⅱ1300(K303)은 77년 5월부터 생산되어 1981년 12월까지 생산되었다.
1975년 신진짚자동차
신진자동차 계열사인 신진짚이 미국 AMC와 기술제휴, 생산한 다목적용 4륜 구동 짚, 하드톱, 밴트럭, 픽업 등 모델을 다양화하여 80년대까지 생산하였다. 험로주행을 알리는 짚 광고로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험로주행, 공사현장 가동장비로 인기를 끌었다. 신진짚은 리비아에 짚을 100대 수출했으나 공산권 국가와 거래를 하는 나라와는 합작을 하지 않는다는 미국 AMC가 지분을 모두 회수하는 바람에 그후 5년동안 "짚" 이라는 이름은 쓸 수 없게 되었다.
포니(PONY) 1975년 현대자동차
최초의 국산 고유모델(국산화 90%) 승용차. 현대자동차는 포드와의 사업추진이 허사로 돌아가자 이탈리아 디자이너 쥬지아로에게 스타일링을 맡겨 한국형 승용차 "포니"의 개발에 성공하고 74년 10월 제55회 토리노 모터쇼에서 성공적으로 데뷔함으로서 국산 고유모델 시대를 열었다. 한국인의 취향과 체격, 그리고 도로사정에 맞는 경제형 차 인데다가 내구성이 좋아 국민들로부터 인기를 끌었으며, 마이카시대를 열어준 차였다. 포니가 나온 뒤 승용차 시장의 80% 정도였던 중형차는 밀려나고 소형차 시대가 열렸다. 포니는 1975년 12월 생산에 들어가 76년 2월 울산공장에서 첫 출고되었으며, 판매 첫해에 1만726대가 팔려나가 국내 승용차시장 점유율 43.6%를 차지하면서 단번에 최고 인기차로 떠올랐다. 그해 7월 국산승용차로선 처음으로 에콰도르에 5대가 수출됐다. 이렇게 시작된 포니 시리즈는 1984년 단일 차종으로서는 처음으로 50만대 생산을 돌파하였으며, 1975년 12월~ 1985년 12월까지 293,936 (내수 226,549대, 수출 67,387대)가 생산되었다. 77년에는 1,439cc 92마력 짜리 엔진과 왜건, 픽업트럭 등 가지치기 모델도 등장했으며 76년 당시 포니의 차 값은 2,273,270원 이었다.
포니는 탄생당시 5도어 해치백 모델로 외형과 설계는 이탈디자인의 쥬지아로가 맡았고, 엔진은 미쯔비시 새턴(수냉 4기통 OHC 1,238cc 80마력(6,300rpm) 최대토크 10.8km(4,000rpm) 최고속도 155km/h), 언더 보디는 랜서의 것을 이용하였다. 변속장치는 동시치합식 전진4단 후진 1단의 수동변속기였으며 현가장치는 앞바퀴 맥퍼슨 스트럿 뒷바퀴 판 스프링 방식이었고 제동장치는 하이드로릭 2중식으로 앞바퀴는 디스크 방식, 뒷바퀴는 드럼방식이었다. 연료계통의 기화기 형식은 스트롬버그 2벤츄리 수직형이었으며 수동초크를 채용했다. 연료탱크 용량은 45ℓ, 냉각계통은 강제순환 수냉식, 서머스탯은 왁스형 타입을 사용되었다.
제미니(GEMINI) 1977년 새한자동차
새한자동차가 "시보레 1700". 그리고 이의 계열모델인 "카미나" 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합작회사인 GM의 독일 자회사 오펠의 "카데트" 3세대 모델을 개량한 일본 이스즈의 모델을 들여와서 생산한 승용차. GM 오펠에서 월드카를 목표로 만든 야심작으로 유럽식 스타일에 주행성능이 좋고, 넓은 트렁크와 심플한 디자인이 돋보였으나 실내공간이 좁고, 경제성이 나쁜 것이 단점이었다. 1977년 12월 ~ 1981년 3월까지 18,900대를 생산하였다.
코티나(CORTINA) 마크 Ⅴ 1977년 현대자동차
소형차에 밀리기는 했어도 중형차 역시 소홀히 할 수 없는 차종이었기에 현대자동차가 "뉴코티나" 의 후계 차로 미국 포드와 기술제휴 하여 만들어낸 승용차. 78마력으로 당시로서는 신사풍의 점잖은 스타일, 안락한 승차감, 안전성 등으로 중산층 자가용으로 인기를 끌었다. 이 차는 연료절약형 승용차에 주어지는 홍콩의 "쉘 이코노미 런" 상을 1978년, 1979년 2회에 걸쳐 수상함으로써 뛰어난 경제성을 인정받았다. 1977년 3월~ 1980년 12월까지 14,287대를 생산하였다. 코티나 마크Ⅴ는 배기량 및 엔진, 최대마력은 뉴 코티나와 같았고, 최대 토크는 12kgm(3,000rpm)으로 향상되었다.
그라나다(GRANADA) 1978년 현대자동차
최고급 승용차를 원하는 수요층을 위해 1978년 독일 포드사와 기술제휴로 개발한 유럽 정통 스타일의 대형 고급 승용차. 어떠한 주행조건에서도 강력한 힘을 발휘했으며, 차체와 브레이크, 스티어링 등이 뛰어난 안전성을 주었고, 4륜 독립현가장치, 인체 공학적 시트 등으로 훌륭한 승차감이 확보된 승용차였다. 1980년에는 엔진을 4 기통으로 줄인 "뉴 그라나다"를 개발, 경제성을 높이는 등 고급차 에서도 차종을 다양화하였다. 1978년 10월~ 1985년 12월까지 4,743대가 생산되었다.
엔진은 배기량 1,993cc로 수냉식 V6 OHC엔진을 얹었으며, 최고출력 102마력(5,700rpm) 최대토크 16.9kgm(3,500rpm) 최고속도 165km/h를 발휘했다. 변속장치는 동시치합 식으로 전진4단 후진1단의 수동변속기였다. 점화계통의 배전기는 무접점 식이고, 연료계통의 기화기는 2벤츄리 수직형(SOLEX 제품)이다. 오토초크를 채용했으며 흡입공기 자동온도 조절방식을 적용했다. 연료 탱크 용량은 65ℓ였다. 냉각계통은 강제순환 수 냉식 이였다. 현가장치는 4륜 독립 현가장치로 앞뒤 모두 코일 스프링 및 복동식 쇼크 업소버를 적용했다. 조향장치는 배력장치가 적용된 랙&피니언 타입이고 제동장치는 복식 다이어프램 서보 유니트를 가진 이중 유압 제동장치였다.
푸조(PEUGEOT) 604 1979년 기아자동차
기아자동차가 프랑스 최대 자동차메이커인 푸조와 기술제휴 하여 내놓은 최고급 승용차 모델. "푸조 604" 는 이탈리아의 세계적인 디자이너 피닌 파리 나가 디자인한 차로, 당시 국내의 6기통 승용차 가운데 최고의 성능을 자랑했다. 영업측면보다는 기아의 기술축적에 더 큰 의미를 두고 개발되었으며, 그동안 미국, 일본차에 익숙해진 오너들에게 프랑스 차의 진면목을 보여주면서 대기업 경영자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1979년 2월 ~ 1981년 12월까지 381대를 생산하였다.
로얄 살롱(ROYALE SALON) 1980년 대우자동차
1972년 레코드 1900(72.8~85.12)의 탄생과 함께 시작된 레코드시리즈는 80년 레코드 디젤(80.5~89.4)과 로얄 살롱(80.9~91.9), 83년 로얄 프린스(83.7~91.6)와 로얄 XQ(83.3), 86년 로얄살롱 수퍼(86.2), 90년대 프린스(91.6~97.3)로 이어 졌다. 80년부터 생산된 로얄살롱은 배기량 1,979cc 4사이클 4실린더 직렬형 엔진으로 최고출력 119마력(6,000rpm), 최대토크 18kgm(3,800rpm),최고속도 178km/h를 발휘한다. 변속기는 전진3단 후진1단인 자동변속기가 적용되었으며 변속레버는 P→R→N→D→2→1 위치로 되어 있다. D위치에서는 저속부터 고속까지 3단계로 자동 변속되었다. 특히 로얄살롱은 배기 정화장치(PCV),2중 배기 매니폴드 등 에미션 관련 장치를 채용, 강화되는 검사에 대응하도록 했다. 배기가스 정화장치(PCV:Positive Crakcase Ventilation System)는 엔진 내부가스를 대기 중에 방출하지 않고 재 순환해 재 연소 시켰으며 세컨더리 스로틀밸브의 개폐시기가 엔진온도에 의해 자동 조정되도록 했다. 또한 감속 때 배기가스의 저감장치로 감속 및 변속 때 액셀 페달에서 급히 발을 뗄 때 스로틀 밸브의 급격한 부압 변화를 완화해 미연소 가스의 방출을 방지했다. 에어클리너에는 자동온도 조정장치인 더블 레귤레이터와 서모 스위치, 배큠 다이어프램 장치를 갖추어 흡입되는 공기의 온도가 차가 울 때 예열 된 공기를 공급받을 수 있게 했다. 현가장치는 앞 맥퍼슨식 독립현가장치로 코일 스프링내에 설치된 복동식 쇼크 업소버를 적용했다. 뒤는 2개의 로어 컨트롤암과 트랙로드 링크타입으로 컨트롤 암은 전후방향의 힘을, 트랙로드는 좌우방향의 힘을 억제해 차의 균형을 유지 시켰다. 뒷바퀴에는 또한 코일 스프링과 복동식 쇼크 업소버가 적용되었다. 차체크기는 길이 4,701mm, 너비 1,740mm, 높이 1,420mm 였다.
맵시(MAEPSY) 1982년 대우자동차 맵시는 82년 3월부터 89년 2월까지 생산되었으며, 1.3ℓ LPG엔진과 자동변속기가 적용 되었다. 엔진은 배기량 1,492cc로 최고출력 85마력(5,400rpm) 최대토크 12.5kgm(3,000rpm) 최고속도 수동 150km/h, 자동 140km/h를 발휘했다. 변속장치는 수동변속기 전진4단 후진1단, 자동변속기가 전진3단 후진1단 이었다.
특히 자동변속기의 변속레버의 경우 변속할 때 레버를 앞뒤로 당기기만 해서는 안되었다. N↔D를 제외하고는 릴리스를 위로 당겨야 레버를 움직일 수 있었다. 또한 킥다운 장치가 적용되어 순간 가속 주행이 가능하도록 했다. 또한 맵시 1.3ℓ의 LPG 엔진은 배기량 1,272cc로 최고출력 76마력(6,000rpm) 최대토크 10.2kgm(3,500rpm) 최고속도 151km/h를 발휘했다. 냉각계통은 원심 임펠라 식이었고, 아이어 프램 방식의 베이퍼 라이저를 적용했다. 용기 용량은 62ℓ로 충전용량은 53ℓ 였다. 시동성 향상을 위해 초크장치가 설치되었는데 오토초크(맵시XQ)와 수동초크(맵시1300) 2종류가 적용되었다. 냉각계통은 원심펌퍼에 의한 강제순환방식이며, 브레이크는 앞 디스크, 뒤 드럼방식이었다. 조향계통은 충격흡수식 랙&피니언 타입이었다. 특히 맵시는 에어클리너 흡입구에 설치되어 있는 플랩레버를 5~10월까지는 "SUMMER"위치에 겨울철인 11~다음해4월까지는 "WINTER"표시에 꼭 고정해야 했다. 이는 에어클리너로 흡입되는 공기를 예열 시키기 위해서 설치된 것이다. 차체의 크기는 길이 4,262mm, 너비 1,612mm, 높이 1,365mm였다.
포니(PONY) Ⅱ 1982년 현대자동차
국내 승용차 시장점유율 60% 이상을 기록한 포니1 에 둥근 맛을 살린 후계차로, 국내 최초의 페이스 리프트된 승용차. 새로운 형태의 5도어 해치백 스타일로 출고가 되자마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84년부터 캐나다에서 판매를 시작하여 수입차 판매 1위를 기록, 훗날 미국 시장진출을 위한 기반을 닦은 차가 되었다. 1982년 1월~ 1990년 1월까지 359,007대(내수 20,7221대, 수출 15,1786대)를 생산하였다.
길이 4,029mm,너비 1,566mm, 높이 1,327mm. 배기량 1.2ℓ와 1.4ℓ 2종류의 엔진을 얹었으며 각각 2모델씩 총 4개의 모델을 출시하였다. 엔진은 수냉식 직렬 4기통 OHC이며 1.2ℓ는 기존 포니와 같았으나 1.4ℓ는 최대마력 12마력(6,300rpm)이 증대되었고 토크 또한 10.8kgm에서 12.5kgm(4,000rpm)로 향상되었다. 배기량도 1,238cc에서 1,439cc로 200cc가 증가하였다. 최고속도 또한 155km/h에서 160km/h로 높아졌다. 변속장치는 동시치합식 전진4단 후진1단인 수동변속기와 1.4ℓ모델에만 적용된 전진3단 후진1단의 자동변속기가 설치되었다. 또한 헤치백 스타일의 포니Ⅱ는 주행때 공기저항을 최소화하는 절연보디를 적용했으며 뒷 유리 와이퍼 및 충격흡수식 스티어링컬럼(Collapsible steering column), 브레이크 부스터를 설치했다.
스텔라(STELLAR) 1983년 현대자동차
우리나라 최초의 국산 고유 중형모델이자 국내 최장기간(14년) 판매모델 승용차. 포니에 이어 쥬지아로가 디자인을 맡은 "스텔라" 는 공기저항을 극소화시키는 쐐기형 바디라인을 기본으로 앞 유리면 경사를 낮게 설계한 것이 특징으로 진부한 스타일에 싫증을 느끼는 소비자 욕구에 부응함은 물론 수출상품 다양화를 통해 수출경쟁력을 증대시켜 수출증진에도 크게 기여하였으며, 87년 10월에는 '88 서울올림픽 공식 승용차 지정되어 이용되기도 하였다. 1983년 7월~ 1997년 1월까지 438,317 대가 생산되었다.
길이 4,416mm, 너비 1,716mm, 높이 1,362mm. 1.4ℓ 92마력과 1.6ℓ 100마력 최고속도 160km/h인 두 가지 엔진이 나왔으나, 85년 2월에는 1.5ℓ100마력으로 통일되었다. 87년 4월에 캐나다 수출용 스텔라 CXL을 내놓고 아펙스,GL,GX등 부분변경모델을 잇따라 내놓으며 중형차시장에서 50%를 웃도는 시장점유율을 차지했다. 90년 6월에는 1.8ℓMPI엔진을 얹은 1.8i를 내놓았다. 크기에 비해 싼값과 유지비로 꾸준한 인기를 모았다.
코란도(KORANDO) 1983년 쌍용자동차
코란도는 69년 11월 신진자동차가 만든 신진 지프가 그 뿌리로 국내 4WD시장을 개척했다. 3.8ℓ 휘발유 엔진에 하드톱, 소프트톱, 밴, 픽업 등 다양한 모델을 갖추고 등장해 폭넓은 인기를 모았다. 신진은 이후 오일쇼크를 거치며 새로 디젤 엔진을 개발, 배기량을 낮춘 2.8ℓ 디젤 엔진을 선보였지만 79년 공산국가인 리비아에 수출하면서 합작사인 미국 AMC와 헤어지게 된다. "한국인도 할 수 있다"(Korean Can Do)라는 뜻을 담은 코란도라는 이름은 83년에 붙여졌다. 88년 10월에는 2.2ℓ 디젤 엔진을 얹은 왜건형 보디의 코란도 훼미리를 내놓았고, 91년 갤로퍼가 나오기까지 4WD시장에서 독주했으나 갤로퍼의 돌풍에 밀려 빛을 잃었다. 96년 뉴 코란도로 풀모델 체인지해 인기를 회복한 코란도는 신진-거화-동아를 거쳐 쌍용-대우로 주인이 5번이나 바뀌었고, 이제 다시 새 주인을 기다리는 유전을 겪고 있다.
포니 엑셀(PONY EXCEL) 1985년 현대자동차
1978년도부터 FF(전륜구동)방식 차에 대한 자료 수집 및 기본 설계 방향 수립에 착수했던 현대는 79년부터는 본격적인 디자인 컨셉을 결정, 81년부터 X카라는 프로젝트명으로 스타일링 작업과 기본 설계에 착수하였다. 85년 2월, 5도어 해치백 스타일로 탄생을 한 포니 엑셀의 가장 큰 특징은 기존의 국내 승용차들이 사용하고 있던 후륜구동 방식이 아닌 신개념의 전륜구동 방식의 차라는 것으로 포니와 마찬가지로 미쓰비시의 엔진과 샤시기술, 이탈디자인의 스타일링 그리고 전륜구동의 핵심 부품인 CV조인트 기술을 영국의 GNK사에서 도입하여 제작되었다. 세계적인 추세로 볼 때 전륜구동 방식이라는 것이 엄청난 신기술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당시 국내의 승용차들이 모두 후륜구동 방식을 채택하고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세간의 화제를 불러일으키기에는 충분했다. 처음부터 수출을 염두에 두고 개발된 수출전략형 차인 만큼 차 이름에도 많은 노력을 들여 기존 해외시장에서의 포니의 인지도와 명성을 살리면서도 차별화를 위해 '좀 더 나아진 포니, 뛰어난 포니'라는 뜻을 지닌 포니 엑셀로 정해졌다. 포니, 스텔라에 이어 세 번째 고유모델인 포니 엑셀은 5도어 해치백스타일로 4기통 1.3ℓ와 1.5ℓ엔진을 얹었다. 데뷔당시 1.3FX,1.5FX,1.5수퍼 등 세 모델이었으나, 같은 해 가을 4도어 세단 스타일의 프레스토를 더하고, 86년 가을에는 3도어 스포티를 선보였다. 포니엑셀은 89년 4월 뉴 엑셀로 거듭나고 91년 마이너 체인지를 거쳐 94년 7월 뉴엑셀이 단종 될 때까지 156만7천236대가 생산되었다.
르망(LEMANS) 1986년 대우자동차
르망의 등장은 국내 모터리제이션에 혁신을 예고한 것이었다. 이전의 국내 자동차의 주류였던 이른바 '포니 스타일'이라고 불리던 포니 문화에 충격을 가한 것이다. 르망의 계보는 조금 복잡하다. 르망의 기본모델은 독일 오펠사의 카 데트 이다. 또한 오펠사는 미국 GM의 독일내 자회사이다. GM의 경우 소형차의 기술 지원이나 엔진은 일본의 이스즈와 공조 체체를 이루고 있었다. GM은 주로 대형차만을 생산해서 소형차에 대한 경험이 적었기 때문이다. 르망의 기본모델인 카 데트는 배기량 1.6과 2.0이 주축을 이룬다. 1.6 모델이 카데트의 기본모델 이다. 대우는 이 카 테트의 기본모델의 라인을 도입하여 르망을 생산하기로 하였으나 1.6엔진은 국내 세제상 불리한 면이 있었다. 그래서 대우는 국내 실정에 맞게 엔진의 실린더 보어를 약간 줄이는 손질을 가해 86년 7월 1.5ℓ엔진의 르망을 내놓았다. 스타일면에서 포니나 제미니(르망 이전의 대우 소형차)에 비해 부드러운 모습 아닌 혁신적인 모습으로 공기 저항계수가 cd0.32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전의 국산 차들은 박스 같은 모습으로 공기 저항계수라는 것을 생각치도 못하는 스타일이었다. 길이 4,394mm, 너비 1,663mm, 높이 1,362mm, 1,498cc 89마력의 수냉식 직렬 4기통 전자제어 점화장치 엔진을 장착하였으며, 최고시속은 170km 이었다. 전자식 점화장치를 쓴 캬뷰레터 엔진의 1세대에 이어 88년 9월에는 미국 수출용에 장착하던 직접분사방사방식의 TBi엔진을 얹어 2세대 르망시대를 열었다. 91년 2월에는 양산 차로는 처음으로 튜닝파츠를 쓴 르망 이름 모델을 내놓아 카 매니아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1997년 2월 단종 될 때까지 100만대가 넘게 생산되었다.
그랜저(GRANDEUR) 1986년 현대자동차
길이 4,865mm, 너비 1,725mm, 높이 1,450mm. 1,997cc,120마력의 엔진을 장착하였다. 이 차는 한 때 우리나라 대형 고급차의 대명사로 불리었던 차로 1886년 7월부터 1992년 9월까지 생산되었으며, 이후 92년 뉴그랜저, 99년 XG 그랜저로 이어지는 그랜저 시리즈로 계속 생산되고 있다.
프라이드(PRIDE) 1986년 기아산업
1980년 산업합리화조치의 발표이후 승용차를 생산할 수 없게되어 상용차만을 만들어왔던 기아가 87년 2.28조치의 해제 후 처음으로 탄생시킨 승용차가 프라이드다. 1986년 12월 생산을 시작하여 87년 3월 시장에 데뷔한 프라이드는 기본 설계는 일본의 마쯔다가 맡았고 생간은 기아에서 그리고 판매는 포드에서 하는 것으로 계획되어 개발이 시작되었다. 설계를 맡은 마쯔다는 자신들의 파밀리아를 베이스로 해서 설계를 변형하여 프라이드를 설계했다. 엔진은 1.1ℓ와 1.3ℓ에 바디 스타일은 3도어 해치백으로 야무지고 단단한 이미지를 갖춘 이 차는 당초의 개발목적이었던 미국 시장의 서드 카(third car) 개념을 충실하게 반영하여 만들어졌다. 수출명은 페스티바(Festiva)로 미국, 일본 등지에서 같은 이름으로 팔렸다. 90년 11월에는 기아가 개발한 4도어 노치백의 프라이드 베타가 판매되었으며, 94년 후계모델 아벨라가 나왔지만 꾸준한 수요로 구 모델과 신 모델이 동시 생산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소형 신차 "리오"가 출시됨에 따라 1999년 12월 13년만에 생산을 중단하게 되었다. 차량의 제원은 길이 3,565mm, 너비 1,605mm, 높이 1,460mm. 프라이드는 1986년 12월 탄생하여 그동안 내수시장에서 71만여대, 수출에서 52만여대(해외 현지생산 제외)를 생산하였으며, 93년에는 생산 1백만대를 돌파하였다. 출고당시 판매가격은 329~399만대였다.
뉴 쏘나타(NEW SONATA) 1988년 현대자동차
85년 11월 스텔라의 최상급 모델로 쏘나타(Y1)가 나왔지만 스텔라와 같은 보디를 써 차별화에 실패하는 바람에 87년 후반 시장에서 사라지고, 88년 6월 1일 고급 중형승용차를 표방하며 첫선을 보인 Y2카에 다시 쏘나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1.8ℓ와 2.0ℓ 시리우스 엔진을 얹은 쏘나타는 둥근 차체와 편한 운전 등을 장점으로 내세워 중형차시장의 강자로 자리잡았다. 국내 중형차의 대중화시대를 이끈 뉴 쏘나타는 93년 5월 Y3카 쏘나타II에 자리를 물려주기까지 55만2천433대가 생산되었다. 특히 쏘나타는 86년 그랜저에 이어 전자제어 MPI엔진을 얹어 국내자동차의 본격적인 전자제어화를 이끌었다. 엔진은 OHC 직렬 4 기통으로 1.8ℓ와 2.0ℓ 2종류가 얹혀졌으며 변속기는 전진5단 후진1단의 수동변속기와 TCU에 의해 제어되고 오버드라이브 기능과 로크업 기능을 갖춘 전진4단 후진1단의 자동변속기가 채용되었다. 브레이크는 방열성이 뛰어난 벤틸레이티드 디스크 브레이크를 앞바퀴에 적용했으며, 국내 처음으로 8x9인치로 서로 다른 부스터를 조합한 탠덤 부스터를 사용하였다. 현대는 93년5월 당시 쏘나타의 인기가 최고를 유지하고 있는데도 과감하게 풀 모델 체인지를 거쳐 Y3카 쏘나타Ⅱ를 내놨다. 96년 2월에는 페이스리프트를 거쳐 쏘나타Ⅲ로 변신했으며 98년 3월에는 제4세대 모델인 EF 쏘나타에게 자리를 물려주게 된다. 30개월 간 4500억원을 들여 개발한 EF쏘나타는 너무 진보적인 이미지 때문에 내부에서도 논란이 많았으나 과감한 스타일은 쏘나타를 한층 젊은 차로 만들었다. 쏘나타는 탄생이후 99년 말까지 모두 186만대가 생산 144만대가 국내에서, 40만대가 해외에서 팔렸다. 지난 96년 내수판매 100만대를 돌파해 단일브랜드로 밀리언셀러 시대를 열었으며 EF쏘나타의 경우 지난 98년부터 2년 연속 월1만대이상 판매하는 신화를 창출했다. 쏘나타는 13년 만에 국산 파로는 처음으로 200만대 판매를 돌파하게 됐다. 쏘나타는 미국에서의 좋은 반응으로 89년 7월 국내 메이커의 척 해외공장인 캐나다 부르몽공장에서 수출용 2400cc모델이 만들어져 북미시장에 공급되었다. 쏘나타는 당시 유행하던 직선형상을 버리고 라운드형상으로 모서리를 둥글려 온화한 느낌을 살렸다. 후륜 구동방식에서 벗어나 조정성능과 연료효율이 높은 전륜구동방식을 국산 중형차로는 처음으로 채택했다. 더구나 엔진룸과 트렁크를 짧게 만든 대신 실내를 최대한 넓힌 덕분에 최고급모델 그랜저보다 실내공간이 더 컸다. 여러 사람이 타는 패밀리카의 장점인 동시에 이왕이면 큰 것을 좋아하는 국내소비자들의 취향에도 잘 맞았다. 쏘나타는 외국의 힘을 빌리지 않은 국내 첫 독자디자인 차량이다. 쏘나타는 대 뷔 2년 6개월 만인 91년 3월에 앞뒤램프의 모양을 바꾸고 그릴을 가늘 게 바꾼 부분변경모델이 나왔다. 7월에는 2.0모델에 DOHC 137마력엔진을 추가한 '골드'모델이 나왔는데 금장칠이 된 'GOLD' 마크를 애프트마킷에서 구해 붙이는 것이 유행이 되기도 했다. 한편 지난 92년 정주영 현대회장이 국민당 대표로서 대선에 출마했을 때 자신의 승용차를 그랜저에서 쏘나타골드로 바꿨다. 유세장에 갈 때 시꺼먼 그랜저를 타고 가면 서민대통령후보 이미지를 풍길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국민당 간부를 비롯한 대다수의 당직자들은 물론 현대그룹 내 계열사 사장들도 쏘나타로 바꾸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뉴 엑셀(NEW EXCEL) 1989년 현대자동차
'8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국내에서도 자동차의 대중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고 사람들의 기호도 다양해지면서 소비자들은 보다 편안하고 보다 성능이 좋은 자동차를 선호하게 되었다.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여 등장한 것이 제 3세대 승용차 뉴엑셀이다. 뉴엑셀은 이전 모델들과의 연관성은 없지만 현대가 뉴엑셀을 발표하면서 내세웠던 '제3세대'라는 케치프레이즈를 생각해보면 최초의 고유모델이었던 포니 1, 2를 1세대, 전륜구동 시대를 연 포니 엑셀을 2세대, 당시 첨단의 신기술이 적용된 뉴엑셀을 3세대로 구분하고 있는 듯 하다. 매커니즘이나 스타일링면에서 기존의 모델보다 훨씬 진보한 새로운 모델이었지만 새로운 차 이름을 사용하기에는 홍보에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드는 만큼 기존의 차 명을 그대로 유지해 달라는 미국 현지법인 및 딜러 들의 요청이 강력하여 결국 수출명을 전 모델이라 할 수 있는 엑셀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89년 4월에 등장한 뉴엑셀은 한 등급 위인 쏘나타의 메커니즘과 스타일링을 많이 적용해 만들어졌다. 사용된 엔진은 기존의 포니 엑셀과 같은 오리온 엔진이었지만 이름과 기본적인 틀만 동일할 뿐 엔진제어방식의 차이로 실질적으로는 전혀 다른 엔진이었다.
캐피탈(CAPITAL) 1989년 기아자동차
'87년 2.28조치의 해제 이후 프라이드와 콩코드를 생산하던 기아에게는 이 두 차종 사이의 갭을 채워줄 수 있는 새로운 승용차가 절실히 필요했다. 소형급 이면서도 차체 크기나 실내 공간이 넉넉하고 연비나 기타 세제상으로 유리한 입장이 될 수 있는 차를 계획하던 기아는 콩코드를 베이스로 하여 한 급 아래의 차를 만들어내게 된다. 그래서 탄생된 것이 바로 캐피탈이다.
캐피탈의 스타일은 지극히 평범했다. 콩코드를 기본으로 만든 만큼 전체적으로 직선적인 이미지가 강했다. 앞 뒷부분에서 콩코드의 모습을 없애기 위해 약간의 라운드 처리를 가해 전체적인 크기나 분위기를 바꿨다. 하지만 헤드 램프와 일체형인 안개 등이나 사각형의 3분할된 테일 램프는 콩코드의 레이 아웃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외관상으로는 앞쪽과 도어의 라인이 같았지만 사이드 몰딩의 위치를 바꿔 차별화를 주었다. 실내의 레이아웃은 콩코드의 것을 그대로하고 몇 가지의 편의 장비를 삭제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에스페로(ESPERO)
1990년 대우자동차
'80년대 중반까지 국내 승용차시장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확보하고 있던 대우자동차는 80년 말에 들어서면서부터 다른 메이커의 맹렬한 추격에 업계3위의 자리로 밀려나 있었다. 한때는 중형차의 왕국이라 불릴 정도로 인기가 있던 대우자동차는 다시 한번 왕국을 건설하기 위한 도약을 시작한다. 희망하다라는 뜻을 가진 스페인어인 에스페로라는 차를 재도약의 발판으로 내놓은 것이다. 에스페로는 86년부터 개발에 착수해 4년여만에 탄생된 모델이었다. 데뷔 당시 가장 주목을 받은 부분은 차의 엔진이나 성능이 아닌 스타일링이었다. 이탈리아 카로체리아의 대표격이며 세계적인 디자이너인 베르토네의 손길을 거친 에스페로의 스타일링은 새로운 충격으로 다가왔다. 공기저항계수 0.29의 매끈한 보디는 완벽한 에어로다 이내믹 스타일을 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스타일링이 연비 향상이라는 플러스 요소를 만들어 낸 것이다. 라디에이터 그릴이 생략된 랩드 프런트(Wrapped Front), 글라스 속에 내장된 C필러, 보트테일 형태의 하이 리어 데크 등은 이전의 국산차 에서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실내의 형상도 랩어라운드방식의 대쉬보드에서 앞, 뒤 도어를 감싸는 듯한 일체형으로 설계, 운전자 및 동승자에게 안락하며 세련된 느낌을 줄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디자인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기존의 대우차에서 느껴지던 둔탁하고 세련되지 못한 느낌이 많이 사라진 모습이었다.
엘란트라(ELANTRA) 1990년 현대자동차 90년 10월 수출전략형 준중형 모델로 선보인 엘란트라는 소형차와 중형차 사이의 틈새를 메우며 중요한 차급으로 떠올랐다. 발매 초기에는 큰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차츰 진가를 인정받아 92, 93년 국내 최고의 베스트셀러카가 되었다. 4기통 1.5ℓ 90마력 엔진을 기본으로 1.6ℓ DOHC 126마력 엔진을 더했다가 93년 4월에 1.6ℓ 엔진을 없앴다. 대신 1.5, 1.5 DOHC, 1.8 DOHC로 선택폭을 넓히고 준중형차로는 처음 에어백과 ABS를 갖추었다(옵션). 95년 3월 후속모델인 아반떼에게 자리를 물려주었고, 아반떼는 현재까지 그 인기를 이어가고 있다. 아반떼는 2000년 상반기 후속모델 XD(프로젝트명)에게 자리를 물려주게 된다.
티코(TICO) 1991년 대우자동차
대우가 "국민차"라는 캐치프레이즈로 내놓은 국내 최초의 경차. 싼값으로 누구나 쉽게 차를 살 수 있도록 해 국내 모터리제이션에 새 장을 열었다. 91년 5월에 데뷔한 티코는 5도어 해치백 스타일의 스즈키 알토를 베이스로 796cc 41마력 엔진을 얹었고 최고시속 160km이다, 차체가 약하다는 평을 반영해 92년 임팩트 빔을 쓰고 3단 자동변속기를 더하는 등 고급화를 계속했다. 24.1km/ℓ의 뛰어난 연비와 실용성을 바탕으로 꾸준한 인기를 모은 티코는 대우가 독자개발한 2세대 경차 마티즈가 나온 뒤에도 수요가 끊이지 않아 현재까지 계속 생산되고 있다.
세피아(SEPHIA) 1992년 기아자동차
92년 9월 데뷔한 세피아는 기아의 첫 고유모델로 섀시를 독자개발 했다. 매끈하고 세련된 스타일이 돋보였고, 달리기 성능도 경쾌하다는 평을 얻었다. 1.5 DOHC 105마력, 1.8 DOHC 139마력 엔진을 얹었고, 94년형 모델에서 프론트 그릴을 바꾸고 에어백, ABS 등을 옵션으로 달아 고급화했다. 93년에는 도쿄 모터쇼에 해치백 타입의 레오를 선보여 멋진 스타일로 준 중형 해치백의 새로운 장을 열었지만 시판(96년 10월)이 너무 늦어 성공하지 못했다. 97년 후속모델 세피아II에 자리를 넘겨줄 때까지 62만8천168대를 생산했다. 세피아II는 2000년 상반기 풀모델 체인지될 예정이다.
무쏘(MUSSO) 1993년 쌍용자동차
무쏘는 93년 8월 데뷔한 쌍용의 야심작이다. 종래 지프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고급 SUV로 국내 SUV시장의 격을 높였다. 고출력, 저소음, 저공해가 특징인 독일 벤츠의 직렬 5기통 2874cc 95마력 디젤 엔진을 얹고, 시속 70km 이하를 달릴 때 버튼을 돌려 굴림바퀴를 바꿀 수 있는 미국 보그워그사의 트랜스퍼 케이스를 달았다. 94, 95년 파리~다카르 랠리에서 연속 종합8위에 올라 내구성도 입증 받았다. 기품 있는 스타일과 힘, 안락감 등으로 오너들에게 타보고 싶은 SUV로 꼽히는 무쏘는 쌍용이 대우로 넘어간 이후 라디에이터 그릴을 대우 마크로 바꿔 어색하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스포티지(SPORTAGE)
1993년 기아자동차 93년 7월 등장한 스포티지는 국내 첫 "지프형 승용차"로 4WD시장에 새 바람을 일으켰다. 세피아에 이은 기아의 두 번째 독자모델로 당시로서는 상당히 앞선 컨셉트였다. 일상생활 및 레저용차로 손색없는 SUV로 설계된 스포티지는 독특한 스타일링으로 데뷔 당시 세계시장에서도 흔치 않은 개성을 자랑했다. 승용차 수준의 승차감과 지프의 안전성, 험로주파력 등을 갖추어 국내보다 해외시장에서 더 큰 인기를 끌고 있다. 2.0 휘발유와 2.2 디젤 엔진을 얹고, 국내 4WD로는 처음으로 시속 60km 이하일 때 달리면서 구동방식을 바꿀 수 있는 시프트 온 플라이 시스템을 썼다. 현재는 2.0 디젤 터보 한 엔진으로 4가지 모델을 갖추고 있다.
티뷰론(TIBURON) 1996년 현대자동차
96년 4월 등장한 티뷰론은 국내 최초의 스포츠 쿠페로 엔진, 트랜스미션, 섀시 등을 독자개발하고 서스펜션은 포르쉐와 공동개발해 스포츠성능을 높였다. 근육질의 스타일과 2.0ℓ DOHC 150마력 엔진의 최고시속 200km인 폭발적인 달리기로 화제를 모았고, 그때까지 미쓰비시 이클립스 등 수입 쿠페에 눈길을 보냈던 젊은층을 흡수하며 국내에 본격 스포츠 쿠페 시장을 열었다. 이로써 현대는 74년 토리노 모터쇼에서 발표했던 포니 쿠페(쥬지아로 디자인)를 양산하지 못했던 아쉬움을 티뷰론을 통해 풀게 되었다.
마티즈(MATIZ) 1998년 대우자동차
마티즈는 98년 4월 판매하기 시작하여 98년 한해동안 내수시장 전 차종 1위를 기록한 차종이다. 출시이후 지금까지(99년 12월 현재) 내수16만 5,000여대, 수출 27만3,000대등 모두 43만8,000여대가 팔렸다. 마티즈는 경차로는 드물게 수출시장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98년 유럽수출을 시작으로 영국,이탈리아,독일,동유럽,중동등에서 "최고의 경차"로 선정돼 상품성을 인정받고 있다. 마티즈는 3기통 796cc 52마력의 엔진을 장착했으며 무엇보다 이탈리아 쥬지아로가 디자인한 깜찍한 디자인이 강점이다. 99년에 출시한 2000년형 모델에는 일본 아이찌사와 공동 개발한 무단변속기(CVT)를 국내 최초로 장착, 국산 승용차 중 최상의 공인주행연비(23.8km/ℓ)와 동력성능을 동시에 만족시켰다. 경차 티코로 국민차시대를 처음 열었던 대우가 야심적으로 개발, 국산 경차의 수준을 한 차원 끌어올린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카니발(CARNIVAL) 1998년 기아자동차
미니밴의 교과서로 불리는 크라이슬러 캐러밴과 포드 윈드스타를 집중 벤치마킹해 만든 카니발은 우리나라에 본격적인 미니밴 시대를 연 주인공이다. 특히 RV 선호도가 높아지고, IMF로 경제형차가 각광받으면서 싼 유지비가 인기를 부채질했다. 카니발은 7, 9인승 두 가지 보디타입에 V6 2.5ℓ DOHC 175마력, 2.9ℓ DOHC 135마력 디젤 터보 엔진을 얹고 고급장비를 많이 갖추었다. 제2의 봉고신화라고 불릴 정도로 기아가 어려움을 벗어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포드(FORD) T형 1908년 포드자동차
그 누구도 T형 포드를 앞지를 수 없다. 아무리 달려도 그 앞엔 또 다른 T형 포드가 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1924년 무렵에는 약 천만대의 T형 포드가 미국의 전 도로를 굴러다니고 있었으니 미국의 어느 곳에 가도 T형 포드가 보이지 않은 곳이 없었다. 넓은 미국 땅에서 빠르고 편리하게 갈 수 있는 값싼 자동차는 참으로 반가운 선물이었다. 그 때만 해도 차는 부자들이나 가질 수 있는 사치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값싸고 튼튼한 T형 포드가 나오자, 보통 서민들도 차를 가질 수 있다는 꿈에 부풀었다. 1924년 12월 T형 포드의 값이 자동차 역사상 제일 싼 290달러까지 내렸으니, 시골의 가난한 사람들 조차 포드 한 대씩은 가지려고 애쓴 건 당연한 일이었다. 욕실이 없는 집에 살더라도 포드 한 대씩은 꼭 갖추려 했던 것이다. 이 차는 간결하고 신뢰성이 높은 설계와 새로운 합금강의 사용으로 견고할 뿐 아니라 양산방식 때문에 그 값이 저렴하여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으며, 첫해에 6,870대, 그 다음해에는 1만대를 판매하였다. 이 차는 직렬4기통 2.9ℓ엔진으로 20마력의 힘과 시속 68km의 최고 속도를 냈고 간단한 구조의 엔진과 트랜스미션은 일반 공구로도 누구나 쉽게 고칠 수 있게 만들어 졌다. 1908년 10월1일 첫 출고부터 27년 5월26일 생산중지 일까지의 18년반 사이에 15,007,033대를 생산하였다.
캐딜락(CADILLAC) V16 1930년 GM
1920년대 미국에서는 포드, 크라이슬러, 제너럴 모터스가 최고의 자동차 자리를 놓고 싸우고 있었다. 1928년에 제너럴 모터스가 선두자리로 올라섰지만, 여전히 포드나 크라이슬러는 제너럴 모터스의 막강한 경쟁자였다. 제너럴모터스는 두 경쟁 회사를 따돌리기 위해, 최 고급차 개발에 박차를 가한 끝에 대공황이 한창이던 1930년, 드디어 야심작 캐딜락 V16을 내놓았다. 캐딜락 V16은 세계 최초로 16기통을 단 초대형 승용차로서 7,400cc급 165마력에 시속 160Km로 달릴 수 있었다. 유연한 외형, 상상을 초월하는 힘으로 V16은 1930년대 미국 상류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 캐딜락 V16은 미국 허버트 후버 대통령과 마피아의 대부 알 카포네가 좋아했던 차이기도 하다.
포드(FORD) 디럭스 세단 33년형 1933년 포드자동차
차체 디자인이 클래식 스타일에서 모던 스타일로 바뀌면서 제작된 차량. 미국의 다른 자동차 회사들이 이윤이 많이 남는 고급스럽고 화려하며, 값비싼 차만 만들고 있을 때 일반 시민들이 탈 수 있는 값싸고 튼튼한 차를 개발했던 포드 자동차가 2년 동안 300만대를 생산하여 미국의 8기통 포드 세대를 연 모델이다. 차체가 강철로 되어 있어 튼튼한 것이 자랑이다. 우리나라에도 1937년부터 수입되어 주로 영업용 택시와 자가용 승용차로 이용되었다.
피어스 에로우(PIERCE ARROW)1934년 피어스에로우
1934년 피어스에로우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실버 에로우(은 화살)는 대환영을 받는다. 공기역학에 입각하여 만들어진 이 모델의 헤드라이트는 흙 받이 쪽으로 옮겨지고 흙 받이는 차체와 하나가 되었으며 뒤 바퀴는 덮여졌다. 혁명을 예고하듯 가장 예술적인 이 차는 당시 흙탕길을 달리기 위해 만들어진 조잡한 차에 비하여 아주 섬세하게 제작되었기에 가장 유력한 차로 발돋움했고 더욱이 5대 밖에 만들어지지 않아 환싱적 이리 만큼 과감한 디자인예술의 새장을 열었다. 배기량 7ℓ, V-12 실린더 엔진, 175마력 휠 베이스 139in, 가격은 10000달러. 이때부터 라디에이터 위에 활 쏘는 사람(Archer)의 엠블럼이 부착되면서 [잃어버린 부의 상징]으로 통하게 되었고 우리들 기억 속에 영원히 남게 되었다
시보레(CHEVROLET) 마스터 디럭스 타운 세단
1937년 GM 1931년 미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승용차 판매에서 1위를 자리를 차지한 이후 현재까지 자동차 업계 제 1위를 지키고 있는 GM 자동차가 만든 승용차. 제동이 정확한 유압브레이크를 사용했으며, 튼튼한 강철 차체로 이루어져 당시 미국에서는 특히 영업용 택시로 많이 이용 되었다. 일제치하에서 일본인들이 이용하였으나 미제차라는 이유로 우리나라에서는 수입을 금지시켰다.
크라이슬러(CHRYSLER) 플리머스 디럭스 세단 1950년 크라이슬러
차체 모양이 각이 진 클래식 스타일에서 현재의 유선형 디자인으로 넘어오기 전 잠시동안 유행했던 곡선형의 모던 스타일로써 당시 미국 중산층이 즐겨 애용했던 크라이슬러가 만든 훼밀리카. 오늘날 플리머스는 시보레, 포드와 함께 미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차가 되었다. 우리나라에는 광복 후 주한 미군가족들이 들여와 사용하던 것을 불허받아 한동안 국내 상류층 자가용으로 사용하였다
포드(FORD) 선더버드 1955년 포드자동차 GM의 시보레 콜베르와 함께 미국을 대표하는 스포츠카였으나 후에 승용차로 바뀌었다.
캐딜락(CADILLAC) 프리트우드 60 리무진 1960년 GM
세계 3대 승용차를 꼽으라면 롤스로이스, 벤츠, 그리고 캐딜락이 손꼽히는데, 고급승용차의 대명사인 캐딜락 중에서도 명차로 꼽히는 승용차. 미국에서도 웬만한 부자가 아니면 한 번 타보기도 힘들다는 캐딜락은 미국 자동차업계의 선두주자 GM의 간판 스타이며, 링컨컨티넨탈과 함께 대통령 전용차로 쓰인다. 총 830대만 생산된 플리트우드 60리무진은 우리나라에서는 대재벌 총수의 귀빈접대용으로 인기를 끌었으며, 윤보전 전 대통령의 공식 승용차이기도 했다.
코베트 스팅레이 1963년 시보레
시보레가 1953년 내놓은 첫 번째 코베트는 미국에서 대중성을 얻은 유럽 스포츠카에 대한 도전이었다. 상어 모양의 힘 있는 스타일에 무게를 줄이기 위해 파이버글라스 플라스틱 보디 패널을 쓴, 기술적으로 한 발 앞선 차였다. 63년에 나온 스팅레이는 새로운 사다리꼴 섀시에 강력한 V8 엔진을 얹고, 독립 리어 서스펜션과 코일 스프링, 그리고 전 모델과 마찬가지로 파이버글라스 플라스틱 보디 패널을 썼다. 이 차는 1967년까지 생산되었다.
머스탱(MUSTANG) 1964년 포드
1964년 포드 관계자들은 2천400달러 짜리 쿠페 한 대를 놓고 이름을 짓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아반티, 아벤투라, 알레그로Ⅱ, 토리노, 투리노, 쿠거, 브롱코, 치타, 퓨마, 콜트, 선더버드Ⅱ, 스페셜 팰컨 등등. 그때 이태리 계 간부 한 사람이 자신 있게 나섰다. "머스탱이야 말로 가장 미국적인 이름이다." 데뷔한 지 18개월만에 머스탱은 68만989대나 팔렸고 당시 포드 사장이던 리 아이어코카의 사무실은 화려하게 단장되었다. 머스탱의 플랫폼은 빈약하고 작은 팰 컨에서 빌려왔고, V8 엔진과 4단 기어는 시답지 않은 페어레인에서 넘겨받은 것이다. 값싼 플랫폼에 그럴듯한 옷을 입혀 떼돈을 벌었다고 항변할지 모른다. 그러나 폴크스바겐은 35년 뒤 세계 최고의 대중차 골프의 하체 위에 TT 쿠페와 로드스터를 올려 세기말의 명작을 만들었다. 머스탱은 60년대 초 미국 젊은이들의 개성을 대표한 차다. 긴 보네트와 좁은 실내, 작은 트렁크 등 전통적인 스포츠카 디자인이었다. 101마력을 내는 직렬 6기통 2.8ℓ 엔진을 얹었고 V8 4.2ℓ 164마력 엔진을 옵션으로 준비했다. 1964년 4월 뉴욕에서 처음 등장해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머스탱은 계속되는 인기 속에 280마력을 내는 V8 4.7ℓ 고성능 엔진도 얹혀졌다. 이 차는 1968년까지 생산되었다.
캐딜락(CADILLAC) 프리트우드 68 리무진
1968년 GM 1968년도에 생산된 캐딜락 플리트우드 68 리무진. "캐딜락" 이라는 이름은 1701년 미국 디트로이트를 발견한 프랑스 탐험가 앙트완느 드 모드 캐딜락 장군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미국 최고급 호화 리무진으로 1,156대만 생산되었으며, 세계적 부호, 헐리우드 톱스타, 각국 국가원수 등의 승용차로 애용되었다. 캐딜락이 백악관 전용차가 된 것은 미국의 제 31대 대통령 하버트 후버 때부터 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식승용차이기도 했다.
링컨 콘티넨탈 1975년 포드자동차
포드자동차는 크게 대중차를 전담하는 포드, 포드를 기본으로 고급스런 차를 생산하는 머큐리, 최고급차를 생산하는 링컨으로 나뉘는데, 그 링컨의 대표적인 차종이 바로 컨티넨탈이다. 링컨은 1924년 미국의 제 30대 대통령 캘빈 굴리지가 구입한 이후 미국 대통령의 전용차가 되었으며, 링컨의 대표차 컨티넨탈은 1939년에 처음 등장했다. 고급 세단승용차로 우리나라에서는 70년대 재벌 총수들이 자가용으로 즐겨 이용하였다.
벤츠(BENZ) 파덴트 모토르바겐 1886년 벤츠
1886년 가솔린엔진을 부착한 최초의 3륜차. 칼 벤츠가 특허를 획득한 가솔린 자동차의 원조라 볼 수 있는 차량이다. 현재 뮌헨 과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다임러(DAIMLER) 1886년 다임러
1886년 고트리브 다임러(Gottlieb Daimler)는 1기통 배기량 250cc 0.8 마력의 가솔린엔진을 마차에 장착한 4륜 자동차를 발명하여 아내 엠마의 43번째 생일인 4월26일에 이를 선물하였는데, 앞쪽에는 핸들이 달린 차 축을 뒤쪽에는 엔진과 벨트로 연결된 구동 축을, 그리고 의자 밑에는 작은 자동차 엔진을 장착했다. 이때 이 자동차의 최고속도는 시속 16km였다.
벤츠(BENZ) 비자비 1893년 벤츠
1893년 칼 벤츠가 제작한 차로 속도 20km/h로 달렸다. 종과 석유등을 달아 놓은 폼이 마차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현재 뮌헨 과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다임러(DAIMLER) 리멘바겐 1895년 다임러 1895년 4류 마차에서 말이 끄는 대신 엔진을 부착하였다. 현재 뮌헨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벤츠(BENZ) S/SS/SSK 1927년 벤츠
벤츠는 1927년 2월 낮은 차체에 수퍼차저를 단 직렬 6기통 6.8ℓ 엔진을 얹은 S와 7.1ℓ 엔진을 얹은 SS, 더 큰 수퍼차저를 달고 크기는 작은 SSK 등을 내놓았다. 벤츠의 수퍼차저가 달린 스포츠카들은 뛰어난 성능을 자랑하고 뒤쪽에 스페어 타이어와 머플러가 달려 멋도 있었지만 수퍼차저가 작동할 때 너무 큰 소리가 나는 단점이 있었다. 이 차는 1932년까지 생산되었다.
BMW 328 1936년 BMW
328은 모터쇼가 아닌 레이스 트랙에서 처음 데뷔한 스포츠카다. 경량급 모델로 차양이나 옆 유리창 등이 없었지만 뛰어난 성능을 가지고 있었다. 319를 베이스로 한 섀시에 튜브 모양의 강철 프레임과 솔리드 리어 액슬, 횡 리프 스프링 등을 썼고 직렬 6기통 OHV 2.0ℓ 엔진을 얹어 매우 좋은 핸들링과 뛰어난 접지력을 갖추었다. BMW는 이 차에 가볍지만 강한 섀시와 보디 프레임에 상대적으로 유연한 서스펜션을 접목시켰고 이 방식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차는 1940년까지 생산되었다.
벤츠(BENZ) 500,600,770
안전하고 믿을 수 있기 때문에 벤츠는 세계 여러나라의 국가 원수들이 즐겨 탄다.1963년부터 1981년까지 약 2,500대가 만들어졌다고 하는, 문이 여섯 개나 달린 벤츠600은 지금까지 세계 여러나라의 대통령이나 왕,수상들이 제일 좋아하는 차라고 한다. 600보다는 좀 오래 되었거나, 국가 원수급이 탔던 차 가운데에 아주 유명한 차가 있다. 바로 히틀러가 탔던 초대형 리무진 "벤츠 770 그로스"다. 이 독재자는 암살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제일 안전한 차를 선택했던 것이다. 전세계를 통틀어 770 그로스는 몇 대 남아 있지 않은데, 770 그로스를 가진 차 주인들은 모두 자기차가 히틀러가 탔던 바로 그 차라고 주장하고 있다. 2,700Kg의 엄청난 무게에 8기통 엔진을 얹은 770 그로스는 배기량이 7,655cc 라고 해서 770이라고 한다. 위대한 700이라는 뜻의 '770그로스'는 독일 제국의 상징이었다. 최고 시속 170Km를 자랑하는 이차는 히틀러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나라의 왕실차로 이름을 떨쳤다. 사우디의 파이잘왕도 이차를 탔다.
비틀(BEETLE) 1948년 폴크스바겐
1948년부터 1978년까지 30년 동안 무려 2천만대를 생산한 20세기 후반 최고의 베스트셀링카.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는 세계대전을 일으켜 세계사에 독재자라는 이름을 알리고 있지만 독일의 아우토반과 "폴크스바겐"을 만들어내 독일 국민에게 큰 공헌을 하였다. 정권을 잡은 히틀러는 독일 국민에게 약속한 국민차의 생산을 위해 포르쉐 박사에게 "어른 두명과 어린이 세명이 탈 수 있는 차, 연료 1리터로 14.5km 이상을 달릴 수 있으며, 정비가 쉬운 차, 그리고 차 값은 1천 마르크 이하인 차" 를 만들라고 지시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1939년 포르세박사는 히틀러에게 우스꽝스럽게 생긴 딱정벌레 같이 생긴 자동차를 제작하여 보여준다. 히틀러의 고아가 되어버린 이차는 파괴된 독일을 짧은 시간 내에 경제대국으로 일으켜 세우는데 큰공을 했다. 비틀은 판매된 30년 기간동안 초기와 동일한 모양을 유지한 채 메커니즘과 편의성을 끊임없이 개선해 단종될 때는 초기모델과 똑같은 것이 단 한가지도 없었다. 그러나 모양은 그대로 유지함으로써 모델을 바꾸기 위해 투자되는 개발비용을 절약해 값 싼차를 만들었고 포르쉐박사의 천재적인 기술을 밑바탕으로 설계된 소형차는 유지관리비를 대폭 절약해 주어 세계사람들의 사랑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비틀이란 이름은 둥근 에어로다이나믹 디자인에서 비롯된 것으로 미국시장에 들어간 후 붙여졌다. 비틀의 차체는 완전한 일체구조식은 아니지만 사다리형 프레임 방식과는 약간은 다른 구조를 하고 있다. 플로어 패널이 차체와 분리되는 구조이면서 플로어 패널 중앙을 통과하는 터널 구조의 프레임이 장착되는데 이것은 백본 프레임(back bone farme)이라고 불린다. 백 본 프레임을 중심으로 몇 개의 크로서 멤버(cross member)로써 플로어팬(floor pan)이 구성되어 있는데, 차체의 강성을 확보하면서 구조물의 공간을 줄일 수 있는 방법으로서 일체 구조식의 초기적인 형태로 볼 수 있다. 플로어 중앙부를 통과하는 터널형태의 백 본 프레임이 플로어 패널에 용접되어 있고, 플로어 패널에는 패널 자체의 강성을 높히기 위한 리브(rib)가 형성되어 있으며, 몇 개의 크로스 멤버가 플로어 패널을지지하며 플로어 팬을 이루고 있다. 한편 이 플로어 팬은 그 주변이 볼트와 너트를 이용하여 차체와 결합된다. 비틀은 차량의 뒤쪽에 공 냉식 수평대향 1.1ℓ 엔진을 얹은 뒷바퀴 굴림차 였으며, 독일에서는 1978년에 마지막으로 생산되었고 이후 브라질과 멕시코에서 2천 200만대의 비틀이 1990년대 후반까지 만들어 졌다. 1998년에는 "뉴 비틀"이란 이름으로 다시 새롭게 등장해 미국인과 유럽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포르쉐(PORSCHE) 356 1948년 포르쉐
초기의 벤츠, 로노등의 자동차 회사의 차들을 다자인 하고 제작에 참여했던 페르디난트 포르쉐박사는 1948년 3월 폴크스바겐과 모양이나 크기가 비슷한 2인승 스포츠카 "포르쉐 356"을 만든다. 1131cc의 배기량을 가진 공냉식 리어엔진은 폴크스바겐보다 강한 40마력의 힘을 낼 수 있었다. 이차는 처음부터 미국에 수출되었고 스포츠카가 귀하던 시절 자동차경주마다 출전해 승리함으로써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이 포르쉐 356의 성공으로 포르쉐 자동차는 세계적인 스포츠카 메이커로써 명성을 날리기 시작하여 오늘날 세계적인 스포츠카를 생산하여 각종 국제 경기에서 그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벤츠(BENZ) 300SL 쿠페 1954년 벤츠
메르세데스 벤츠 역사상 가장 뛰어난 역작으로 평가받는 차로 20세기 자동차 성능 발전에 원동력이 됐던 슈퍼카의 원조이다. 300SL은 레이싱카의 특징을 도로 위로 가지고 온 럭셔리카로 새로운 직렬 6기통 2,996cc 엔진을 얹었으며 최고시속은 250km 이다. 이 엔진은 스파크 플러그가 실린더 헤드가 아닌 실린더 블럭에 있었고, 양산차 중 처음으로 인젝션 방식의 연료분사장치를 적용했으며 섀시는 W194라고 불리는 가볍고 단단하며 강한 알루미늄 보디 패널을 썼다. 코일 스프링을 쓰는 서스펜션은 앞 위시본, 뒤 스윙암 형식이었다. 문이 지붕 위로 열리는 걸윙도어는 이 차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이었다. 이 차는 1957년까지 생산되었다.
포르쉐(PORSCHE) 911 1963년 포르쉐
911은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스포츠카로 포르쉐의 명백한 독자성을 보여주는 모델이다. 1963년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 데뷔한 911은 낮은 허리 라인에 넓은 유리창을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스포츠카였다. 130마력을 내는 수평대향 공랭식 6기통 2.0ℓ SOHC 엔진은 뒤쪽에 놓여 있었고, 시속 210km의 최고속도를 냈다. 911은 1963년 데뷔이래 매년 열리는 모든 자동차경주에 참가했다. 이 차는 현재까지 차세대 모델들이 생산되고 있다.
벤츠(BENZ) 230 1966년 벤츠
최고급차의 대명사, 안전의 대명사로 불리는 독일 벤츠가 만들어낸 승용차. "최고가 아니면 만들지 않는다" 는 벤츠의 창업정신은 110여년에 이르는 벤츠의 역사를 곧 자동차의 역사로 만들어 놓았다. 1960년대로 들어서면서 벤츠는 오늘날 벤츠의 상징이 된 라디에이터 그릴과 가로로 세워진 헤드라이트를 쓰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도 들아와 연예인, 의사, 정치가들이 많이 이용했다.
NSU R080 1967년 NSU
RO80은 로터리 엔진인 반켈 엔진을 얹은, 진보된 엔진기술을 대표하는 차였다. 1967년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 데뷔한 이 차는 매력적이고 진보된 스타일로 에어로다이나믹 디자인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낮은 보네트에 반켈 엔진을 얹어 전체적으로 무게중심이 내려가 뛰어난 핸들링을 갖고 있었다. RO80은 이전의 내연기관 엔진 형태의 틀을 깨는 로터리 엔진을 얹고 에어로다이나믹 디자인을 쓰는 등 기술과 스타일에서 앞섰으나 NSU의 경영악화로 1976년에 아쉽게도 생산을 중지했다.
벤츠(BENZ) 280SE 1969년 벤츠
벤츠를 대표하는 대형 세단승용차. 뛰어난 동력성능, 민감한 조종성, 안락함과 정숙성, 품격 등 모든면에서 세계 최고의 프레스티지카로 꼽힌다. 벤츠의 승용차는 A ,C ,E ,S 클래스로 나뉘어지는데, S 는 Special, E 는 Executive, C 는 Compact의 머리글자로 알파벳 순서상 나중 문자일수록 대형차이고, A 클래스는 벤츠가 최근에 선보인 소형차라는 뜻이다. 이니셜 앞 또는 뒤에 붙는 숫자는 배기량을 뜻한다. 우리나라에도 들어와 1970년대에 연예인, 기업가, 의사 등 자영업자들이 주로 애용하였다.
골프(GOLF) 1974년 폴크스바겐
1974년 폴크스바겐이 내놓은 골프는 해치백 스타일의 소형차를 유행시켰다. 쥬지아로가 디자인한 이 차는 2도어와 4도어의 전형적인 유럽 해치백 스타일로 산뜻한 선을 가지고 있었고, 좋은 성능과 뛰어난 연비로 많은 인기를 누렸다. 1.1ℓ와 1.6ℓ 두 가지 엔진을 얹었다. 지금은 4세대 모델이 나오지만 사람들은 최초의 모델을 가장 좋아한다.
아우디(AUDI) 콰트로1980년 아우디
콰트로는 풀타임 4WD의 새로운 유행을 몰고온 차다. 아우디 80을 베이스로 200 5T 세단의 직렬 5기통 SOHC 터보 엔진을 얹고 파워 스티어링과 5단 기어를 썼다. 풀타임 4WD는 앞뒤 모두 또는 뒤쪽 차동장치만 록시킬 수 있었다. 1980년부터 랠리경주에 4WD 경주차가 참가할 수 있게 되어 콰트로는 랠리카로써 최고의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이 차는 1991년까지 생산되었다.
퀴뇨의 증기자동차 1770년 퀴뇨
1770년 프랑스의 공병 대위였던 군사 기술자 죠셉 퀴뇨(Nicholas Joseph Cugnot)는 포차 (砲車)를 견인할 목적으로 증기기관을 동력으로 한 세계 최초의 3륜 증기 자동차(시속5km) 2종(대형,소형)을 제작했다. 당시 육군사령관 이었던 스와솔 공작은 참모들에게 이차를 시험토록 지시했는데, 무거운 보일러와 2개의 실린더가 앞바퀴에 얹혀져 구동되어 조향하기 어려웠고, 보일러도 15분마다 물을 보충해야 했으며, 브레이크 장치도 갖추지 않아 결국 대형의 것은 파리 교외의 언덕길에서 세우지 못하고 벽에 부딛혀 화재를 일으키므로서 제1호 교통사고를 내고 말았다. 퀴뇨의 시도는 프랑스 혁명에 의해 중지되었으나, 전륜구동의 이 차가 오늘날 자동차의 시조인 셈이다. 현재 뮌헨 과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셀포레 증기자동차
1891년 레온 볼레가 제작한 증기 자동차로 최대속도 25km/h로 달렸다. 현재 뮌헨 과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파나르 르바소(PANHARD LEVASSOR) 1889년 파나르 르바소 다임러 회사의 제작.판매권을 받아 파나르 르바소가 1889년에 만든 자동차
베베(BEBE)912년 푸조
1912년, 푸조는 귀여운 소형 자동차 "베베"를 세상에 선보였다. 이 "베베"는 당시 자동차 예술에 있어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던 자동차 설계의 천재인 부가티가 설계한 차이기도 하다. "귀여운 아기"라는 뜻의 베베는 2인 승이지만 배기량이 855cc인 작은 엔진은 6마력의 힘을 가지고 시속 45Km까지 달릴 수 있었다. 당시로는 누구도 따라 올 수 없는 멋진 스타일의 베이비카에다가 남녀노소가 부담없이 운전할 수 있는 이상적인 자동차여서 1년만에 3천대가 팔리는 히트작품이 되었다.
부가티 (BUGATTI) T35 1926년 푸조
T35은 그랑프리를 위해 탄생한 차로 직렬 8기통 2.0ℓ 엔진을 썼다. 부가티의 트레이드 마크인 발발굽 모양 라디에이터 쉘은 우스운 모양을 했지만 수백 마일을 달려야 하는 그랑프리의 혹독한 조건 속에서 엔진을 충분히 식혀줄 수 있었다. 빛나고 품위 있게 굽어진 프론트 액슬 또한 걸작이었고 가볍고 아름다운 경합금휠은 부가티의 완벽성을 완성시키는 또 다른 요소가 되었다. 이 차는 1930년까지 생산되었다.
부가티(BUGATTI) T41 르와이알
부카티 차 중 가장 크고, 가장 힘있고, 가장 훌륭한 차라 일컬음을 받은 차가 "부가티 모델41 르와이얄" 이다. 일명 황금벌레라 불리는 이 차는 6대를 만들어 3대만 판매했는데 판매가격은 롤스로이스중 최고급차인 팬텀보다도 3배나 비싸게 팔렸다. 코끼리를 상징하는 엠블렘도 라지에타 위에 올려 차의 품위를 한층 높였다. 중량 2.5ton, 길이 6.7m, 그중 본네트 길이만 2m 직렬 8기통 300마력엔진 최고 속력 276Km/h인 이차는 부가티 자신이 한대를 가지고 스페인 국왕, 루마니아 국왕, 벨기에 국왕에게 각각 한대씩 팔렸다. 그러나 부가티는 이차를 만들기 시작할 무렵 공황이 발생하여 판매에 어려움을 겪음으로 인해 사업상 실패한 모델로 남게된 사연이 있는 차이기도 하다.
부치아리(BUCCIALI) 더블후이트 1930년 부치아리
1930년 파리 모터쇼에 출품돼 보는 이의 마음을 한눈에 사로잡아 버린 명차 "부치아리 더블후이트"는 30인치의 긴 금장의 날으는 황새가 상표였다. 이차는 세단형을 연상케 하는 것으로 1930년대 중반까지 금장을 발동기 옆면에 부착했었다. 직렬 16실린더, 7830cc의 고급 차로써는 놀랍게도 최초로 전륜구동 및 4륜 독립 현가 방식을 채택했고 차축간 길이 147인치 짜임새 있는 외모 등이 당시로는 매우 완성도 높은 차였다. 가격 또한 18 ~ 21만 프랑으로 아주 비싼 차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신비로운 자태는 보는 이의 마음을 설레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트락숑 아방 1934년 시트로엥
트락숑 아방은 시트로엥의 대표기술인 앞바퀴굴림을 처음으로 적용한 차였다. 차 이름 역시 앞바퀴굴림이라는 기술용어에서 따왔다. 당시 거의 모든 유럽의 자동차 메이커들은 여러 개로 나누어진 보디를 조립했으나 이 차는 하나로 된 보디인 모노코크 보디를 사용했으며, 실린더 위에 밸브가 달린 OHV 엔진을 얹었다. 이 모든 것은 당시 몇 년을 앞선 기술이었다. 이 차가 후대에 남긴 가장 큰 영향은 독특한 디자인방식이다. 트락숑 아방은 동시대의 차들과 달이 바퀴를 덮는 펜더가 차체와 일직선으로 되어 있다. 이 때문에 양 옆 발판 역할을 하던 러닝 보드를 없앨 수 있었고 3명이 나란히 앉을 만큼의 실내공간을 확보했다. 1,303cc 타입7과 1,911cc 56마력의 타입1, 6기통 77마력인 타입15등이 생산되었으며, 1934년부터 57년까지 23년 동안 생산되어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 생산된 자동차로 남았다.
시트로엥(CITROEN) 2CV 1948년 시트로엥
세계 2차 대전 직후 프랑스국민들은 값비싸고 고급스러운 차보다는 경제적인 소형차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여기에 "시트로엥의 2CV"는 독특한 디자인과 값싸고 경제적인 소형차로 프랑스의 국민차 역활을 훌륭히 해냈다. 굴러가는 프랑스의 예술품이라고 프랑스 인들이 자랑하는 독특한 스타일의 개성 있는 차, 그러나, 경제적인 소형차 이것이 2CV를 명 차로 인정하는 가장 큰 이유인 것이다. 2CV는 간소함의 상징인 차였다. 간단한 구조로 된 덮개가 있는 보디에 잔디 깎는 기계에서 가지고 온 2기통 375cc 8마력 수평대향식 엔진을 얹었고, 주름진 보디 패널에 하나의 헤드라이트와 윈드실드로부터 뒤쪽 범퍼까지 말을 수 있는 직물로 된 지붕, 환기를 위해 수평으로 접어지는 고정된 창문, 핸드 시그널, 캔버스 접이식 의자 등을 썼다. 앞바퀴굴림 방식에 네 바퀴 모두 독립 서스펜션을 쓰는 등 기술적으로 진보한 부분도 있었다. 이 차는 1990년까지 생산되었다.
시트로엥(CITROEN) DS19 1955년 시트로엥
DS19는 독특한 스타일과 모양으로 1955년 가을 프랑스 모터쇼에서 데뷔, 잠시 인기를 끈 모델이었다. 이전의 디자인과 전혀 달리 부드럽게 넘어가는 라인과 라디에이터 그릴이 없는 것은 이 차만의 특징이었다. 앞바퀴굴림이고 뒷자리의 넓은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휠베이스 가 길었다. 유압식 파워 스티어링, 파워 브레이크, 유압식 기어변속과 자동 클러치, 유압식 서스펜션 등 최신기술이 쓰였다.
에스파스 1984년 르노
에스파스는 자동차와 밴의 특성을 결합시킨 다목적 자동차(MPV, Mu개념을 소개한 차였다. 80년대 중반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들의 여가활동을 위해 만들어졌고, 미니밴 스타일에 직렬 4기통 2.0ℓ SOHC 110마력 엔진을 얹어 시속 175km의 최고속도를 내는 앞바퀴굴림이었다. 오늘날 세계 어느 곳에서도 MPV를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에스파스 때문이다.
피아트(FIAT) 1891899년 피아트 1899년 7월 11일,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설립된 피아트 자동차사가 그 다음달에 생산한 차.
피아트 500 친퀘첸토 (FIAT CINQUECENTO) 1936년 피아트
영국의 로버 미니, 프랑스의 시트로엥 2CV와 함께 미니카 중 최고의 명 차로 불리우는 피아트500. 1930년대말의 이탈리아. 토리노 시가에서도, 길 양쪽으로 아름다운 나무들이 늘어서 있는 에밀리아 가도에서도, 토스카나의 산길에서도 이 당시 이탈리아의 어느 곳에 가더라도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빈 캔을 밟는 것 같은 소리와 마치 우리나라 경운기 소리 같은 '바타타타타'거리는 소리. 이것은 바로 피아트500 '친퀘첸토'가 내는 시동음과 엔진 음이었다. 엄청나게 작아 보이는 이 차는 처음으로 등장한 1936년 생긴 모습 때문에 생쥐(이탈리아어로 '친퀘첸토')라고 불리었다. 이 차는 이탈리아의 국민들을 위한 차로 모든 이탈리아를 누볐고, 이탈리아인들이 차를 연상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하는 차가 되었다. 1936년 피아트500 1세대가 나온 이후 꾸준한 인기를 누리었고 1957년 신형 2세대가 나오자 다시 피아트500의 열풍이 불었다. 배기량 479cc라는 엄청나게 적은 배기량의 공냉식 2기통 엔진이 장착되었지만 워낙 작고 가벼운 차라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1960년부터 생산된 500cc의 엔진을 장착한 피아트500은 시속 96km까지 낼 수 있었고 1990년부터 나온 3세대 피아트500은 704cc의 엔진을 장착하고 최고시속 126km까지 낼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 400백만대 이상 팔려나간 2세대 피아트500은 다른 피아트500과 마찬가지로 매우 단순한 구조로 만들어져 있다. 적은 배기량의 엔진은 차의 뒤에 실려있고 보통 차의 엔진룸에는 배터리, 스페어 타이어, 연료탱크가 들어있다. 물론 짐도 실을 수 있다. 차체의 지붕에는 천으로 된 선루프(?)가 달려있어 필요하면 둘둘 말아 열 수가 있다. 인스트루멘탈 패널에는 속도계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계측기도 없다. 연료계조차 달려 있지 않은데 연료의 사용량은 연료탱크의 3/4가 비면 경고등이 들어오고 경고 등이 들어온 이후로는 64km정도 더 주행할 수 있다고 한다. 1965년형까지는 도어가 보통의 차들과는 반대로 열리게 되어 있었다. 즉 문손잡이가 앞쪽에 달려 있어 문을 앞쪽에서 뒤쪽으로 열게 되어 있어 문을 열었을 때 뒤쪽에서 차가 문을 받으면 도어가 사람을 덮치게되어 매우 위험했으나 이후 보통의 차와 같이 뒤쪽에서 여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엔진이 뒤에 실려 있고 후륜구동 이므로 자동차 바닥에 터널(엔진의 힘을 전달하는 샤프트가 지나가는 통로)이 필요 없고, 게다가 공 냉식이므로 라디에이터를 비롯한 각종 냉각장치가 필요 없어 공간을 덜 차지하므로 작은 차체에 실내를 훨씬 넓게 사용할 수 있었다. 영국의 미니 로버, 프랑스의 시트로엥 2CV와 함께 미니카 중 최고의 명차로 불리우는 피아트500은 인터넷에도 수많은 홈페이지가 있을 정도로 현재에도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고 지금은 완전히 다른 모습의 피아트500에게 자리를 물려주었지만 앞으로도 계속 사랑을 받을 것이다. 피아트 500 토폴리노 (FIAT TOPOLNO)
1946년 피아트
500 토폴리노는 "일과 절약을 위한 작은 차"라는 컨셉트를 가진 차였다. 가장 작은 크기에 가장 넓은 실내공간을 가진 2인승 쿠페 스타일로 가벼운 섀시에 앞쪽은 독립 서스펜션을 썼고, 주철 실린더 블록과 경합금 실린더 헤드를 가진 760cc 13마력짜리 4기통 수냉식 엔진에 4단 기어를 얹었으며 최고시속 85km를 냈다. 서스펜션은 유압식 쇼크 업소버와 리프 스프링을 썼고 뛰어난 유압식 브레이크와 다이렉트 스티어링의 조화는 운전을 안전하고 더욱 즐겁게 해주었다. 이 후 이차는 이탈리아 경차의 표준으로 불리며 90년대 친퀘첸토와 함께 이 나라를 대표하는 경차로 남아 있으며 1948년까지 생산되었다.> > 알파로메오(ALFA ROMEO)> 줄리에타 스프린드 쿠페 1954년 알파로메오
1954년 4월 이태리 카디자인의 거장 베르토네가 디자인한 날씬한 몸매의 줄리에타 스프린트 쿠페는 나오자마자 뛰어난 성능과 좋은 핸들링, 저렴한 값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 차는 새로운 1천290cc 80마력 엔진을 얹고 시속 165km를 냈다. 다음 해 봄에는 4도어 세단, 1956년 봄에는 피닌파리나가 디자인한 2인승 컨버터블 스파이더도 나왔다. 이 차는 1968년까지 생산되었다.
페라리(FERRARI) 250GT SWB 베를리네타 1959년 페라리
250GT SWB 베를리네타는 자동차경주와 함께 자란 차였다. SWB는 "Short Wheel Base"의 약자를 나타내며 250GT의 휠베이스를 줄인 모델이다. 단단한 튜블러 프레임 섀시에 앞 독립 서스펜션과 리어 액슬 등을 썼고, V12 3.0ℓ DOHC 280마력 엔진을 얹어 시속 270km를 냈다. 4천150mm의 길이에 2천400mm의 짧은 휠 베이스는 960kg의 가벼운 무게와 잘 조화되어 여러 자동차경주에서 우승할 수 있었다.
피아트(FIAT) 124 스포츠 스파이더 1969년 피아트
이탈리아 자동차생산의 90% 를 차지하는 피아트 자동차가 만든 2인승 소형 스포츠카. 1969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나서 1982년까지 14년간 만들어졌던 모델이다. 유럽의 스포츠맨들이 좋아하는 소형 스포츠카로, 스포츠카 붐을 조성하는데 한 몫을 했다. 격자형 라이에이터 그릴과 볼륨감 있게 처리된 보닛라인은 이 차의 트레이드 마크다.
페라리(FERRARI) F40 1987년 페라리
1987년 10월 페라리 스포츠카 창사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V8기통 3000cc에 680마력의 엔진으로 시속 355Km까지 달릴 수 있는 페라리 F40이라는 걸작을 만들어 세계적인 화제를 모았다. 처음에는 이 차를 400대만 한정 생산한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3천여명이 현금을 싸들고와 서로 사겠다고 아우성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1988년부터 1991년까지 950대를 만들겠다고 생산계획을 수정하기도 한 차이다. 주문도 하늘의 별 따기지만 행운을 얻어 계약을 해도 4년 정도 기다려야 타 볼 수 있다는 스포츠카이다. 그래서 일찍 출고된 페라리 F40의 현지가격이 1억8천 만원 정도인데 일본에서는 프리미엄이 무려 3배나 붙어 5억원대(한화)에 거래되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 차가 인기가 높은 또 하나의 이유는 페라리사가 950대의 F40을 미국에 400대, 영국에는 60대, 일본에는 40대씩 나라별로 배정했다는데 있다.
롤스로이스(ROLLS-ROYCE) 10마력
1905년 롤스로이스 1905년에 당시 자동차의 고장이 자주 일어나자 헨리 로이스가 제작한 자동차. 이 때 롤스가 공동 경영자가 되었다.
실버 고스트(SILVER GHOST) 1906년 롤스로이스
1906년에 불후의 명작 "실버 고스트"가 탄생했다. 런던 모터쇼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이 차는, 6기통 7,000cc급에 60마력의 강력한 엔진으로 시속 125Km를 내는 고급 차였다. 또한 실버고스터는 오르막길이던, 내리막길이던 상관없이 스피드를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게다가 기어를 바꾸기가 간편해 운전에 서투른 초보라도 다루기가 쉬웠다. 1927년까지 20년 동안 모두 8,420대가 생산된 실버 고스트는 롤스로이스를 세계 최고의 훌륭한 차로 만들어 주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1907년형 실버 고스트는 세상에서 가장 비싸게 팔린 차이다. 이 차는 영국의 런던 시내 한복판에 있는 헤로즈 경매상에서 한 달 동안 전시 된 후 경매에 부쳐졌는데, 우리 돈으로 자그마치 18억6천3백만원에 팔렸다. 이는 1961년에 18억4천만원에 팔린 1961년형 페라리 250GTI 베를리네타 콤페티치오네의 기록을 깬 세계 최고 기록이었다. 실버고스터, 즉 은빛 유령이란 이름이 붙게 된 것은 이 차의 차체가 알루미늄으로 되어 있고, 헤드라이트, 범퍼 등에 은도금을 해서 이 차가 달릴때면 마치 은빛 유령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오스틴 세븐(AUSTIN 7)
1920년대 영국의 차들은 한결같이 덩치가 크고 운전이 힘든데다가 값이 비싸서 돈 있는 사람이 아니면 살수가 없었다. 이러한 때 허버트 오스틴은 값싼 소형차 "오스틴 7"을 1921년에 내놓아 유럽의 자동차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이차가 바로 미국의 포드 모델T와 필적 할 수 있는 영국의 포드 T형 차였다. 오스턴7은 두 명의 어른과 세명의 아이들이 편히 탈 수 있는 넓은 실내와 획기적인 연료 절감을 할 수 있는 소형차였다. 이차는 1937년까지 생산되어 전 세계로부터 인기를 모았고, 단번에 영국 서민들의 인기를 독차지하여 당시 영국 최대의 베스트셀러카가 되었다. 자동차의 대중화를 위해 태어난 오스틴7은 당시 엔진 출력으로 부과되던 자동차 세금제도에 따라 10마력의 힘에 해당하는 7파운드의 세금을 내 세븐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작고 튼튼하며 값싼 이 차는 A모양의 섀시와 아주 작은 747cc 4기통 엔진을 얹었다. 처음에 2인승이 나왔고 곧 '박스'라고 부르는 4인승 세단도 나왔다. 세븐은 튼튼하고 싼값으로 많은 사람들이 사고 싶어했다. 또한 이차는 프랑스에서 "심카 로랑가르", 독일에서는 "BHW딕시", 미국에서는 "벤텀", 일본에서는 "닷선"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져 그야말로 월드카가 되었다.
벤트리(BENTLEY) 1927년 벤트리
1920년대에 영국을 대표한 자동차. 붉은 날개, 초록 날개, 푸른날개 각각의 특징을 갖고 있는 엠블럼을 달고 선보인 "벤트리"는 자사 벤트리뿐만 아니라 롤스로이스도 세계정상에 올려놓는데 결정적인 역활을 했고 가히 기술과 예술의 만남의 극치라 할 만큼 아름다운 승용차를 만들어냈다. 원래 스포츠카를 전문으로 만들던 벤트리 기술진들이 롤스로이스사로 벤트리가 영입되었을때 이에 주눅들지 않고 자신들의 기술력을 자랑하기 위해 만든 차이기에 주문을 받아 각각 특징 있게 만들어져 롤스로이스측의 미움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승용차로써 스포츠카의 기술을 탑재하고 있어 성능 면에서는 그 어느 차에 뒤지지 않는 차 인것만은 분명했다.
MG-TF 대중교통 수단의 발달과 함께 자동차는 점차 대량생산 시대로 들어섰고 이제 실용성뿐만 아니라 예술적인 면도 고려해야 할 무렵 색다른 자동차가 등장한다. 모리스 가라게스(Morris Garages), 바로 "M.G"이다.
M.G는 TA, TB 등의 시리즈를 계속 만들어 영국 거리에는 M.G를 제외하고는 다른 차는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유행을 일으켰고 유럽시장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깨끗하고 산뜻하며 세련된 M.G차들은 애호가들이 가장 소유하고 싶은 차 중의 하나로 추천되어 값비싼 고급차에 집착하는 편견을 탈피하게 만들었으며 소형의 스포티한 타입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세인이 사랑했던 차이기에 지금도 그 빛나는 명성에는 변함이 없다.
랜드로버(LANDROVER) 1948년 로버자동차
1948년 영국 정부의 요청에 따라 로버자동차가 네바퀴 굴림 다목적 군용차를 만들어내자 폭발적인 인기를 끌어 "랜드로버" 라는 이름으로 민간에 공급되어 생산되기 시작한 짚형 승용차. 아프리카 광야를 달리는 사파리에서는 으례 랜드로버가 쓰였으며, 야외용 차라면 딴 회사가 만든 것이어도 모두 "랜드로버"라 부를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원래 랜드로버는 미국의 짚과 비슷한 용도의 영국 군용차로 채용되면서 널리 알려졌다. 우리나라에서는 1960년대에 선교사 등이 많이 타고 다녔다.
재규어 (JAGUAR) XK120 1948년 재규어 재규어는 "X"라는 글자로 시작되는 프로젝트 이름으로 엔진개발을 했다. 그 중 XK 시리즈는 4기통 2.0ℓ와 6기통 3.4ℓ 두 가지로 모두 DOHC 방식을 썼다. 2인승 쿠페 XK120은 1948년 런던 모터쇼에서 손으로 만든 경합금 패널로 된 보디에 XK 시리즈 3.4ℓ 엔진을 개량한 직렬 6기통 3.5ℓ DOHC 엔진을 얹고 데뷔했다. 180마력의 힘을 내는 엔진은 이 차를 최고속도 시속 220km으로 달리게 했다. 이 차는 1954년까지 생산되었다.
미니 (MINI) 올타입 1959년
세계 경차의 아버지격으로 추앙 받는 영국의 대표적인 미니카. 미니가 탄생하게 된 배경은 바로 1956년에 일어난 세계 유류파동으로, 전 세계는 연료를 적게 쓰는 미니카의 생산에 심혈을 기울이기 시작했고, 독일은 BMW의 '이제타'같은 초소형 미니카를 생산하여 영국시장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그에 대항하는 영국의 미니카로 1959년 미니가 탄생했다. 이 미니의 설계자는 알렉 이시고니스경으로 당시 영국의 최고 자동차 설계사였다. 알렉 이시고니스경과 그의 동료들은 '작은 차체, 넓은 실내'라는 주제로 설계를 시작하여, 모노코크 바디(프레임이 없는 방식), 앞바퀴 굴림 방식 채용, 직렬엔진 탑재 등 당시의 신기술과 새로운 개념을 받아들여 설계하였고 1959년 '모리스 미니 마이너'라는 이름으로 발표했다. 미니는 연비와 공간활용에서 혁신을 불러온 모델이었다. 모든 면에서 효율적인 이 차는 많은 사람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959년 9월 첫 등장한 미니는 전체 길이가 3천50mm로 믿을 수 없을 만큼 작았지만 성인 4명이 탈 수 있을 만큼 넓은 실내공간을 갖추었다. 직렬 4기통 848cc OHV 엔진은 34.5마력을 냈고, 앞 바퀴굴림으로 네 바퀴 모두 독립 서스펜션을 가지고 있었다. 그후 다양한 변형이 많이 생산되었고 쿠페S등 일부 차종은 1,275cc 75마력 엔진을 장착하기도 하였다. 1967년 MK-II로 모델 체인지되기 전까지 9년간 66만대가 생산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1969년 미니는 다시 MK-III라는 새로운 모델로 등장하여 미니850, 미니1000, 미니 쿠페S, 미니밴, 픽업 등 생산회사인 오스틴사나 모리스사 양 사 차이 없이 많은 모델들이 생산되었다. 미니가 생산되자 존 쿠퍼라는 사람에 의해 개조되어 59년, 60년 레이싱 카 컨스트럭터스의 챔피온이 되었다. 물론 미니의 설계자 이시고니스경은 반대를 했지만, 이것을 계기로 미니는 영국 레이서들에게 애용되기 시작했고 존 쿠퍼가 개조하여 생산한 차량에는 '쿠퍼'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미니 쿠퍼는 61년 양산이 시작되어 2년 동안 2만 4천대가 넘게 팔려나갔다. 64년에서 67년까지 몬테카를로 랠리에서 연속 우승까지 하여 영국자동차의 영광의 상징이 되었다. 미니는 차체의 크기에 비해 실내를 매우 넓다. 게다가 앞좌석의 슬라이딩 거리가 길어 필요시 충분한 넓이의 확보가 가능하고 뒷 자석에도 재떨이가 있는 등 편이성에 있어서도 신경을 많이 썼다. 작은 엔진룸은 빈틈이 없을 정도로 꽉 차있는데 특이한 것은 라디에이터와 팬이 왼쪽 앞바퀴를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배터리는 좁은 엔진룸 때문에 트렁크에 실려 있다. 뉴 BMW 7시리즈 등 요즘 생산되는 고급 차에는 충격이나 수분에 약해 사고시 화재나 폭발 위험성이 있는 배터리를 트렁크에 넣는 추세인데 미니는 이런 것 때문은 아니고 그저 엔진룸이 좁아서이다. 앞바퀴 굴림 차에 처음으로 직렬엔진을 사용한 것도 실내의 공간확보 때문이었고 네 바퀴를 최대한 차체의 구석으로 몰아 넣어 실내 공간확보 및 승차감 향상에도 도움이 되었다. 비틀즈의 전 멤버가 한대씩 소유하고 있었고 영국여왕도 소유하고 있는, 전세계의 서민과 부자, 왕족들에게 사랑받던 미니는 한때 10여년전 전자화, 고성능화에 밀려 생산을 중지하려는 적도 있었으나 아직도 전 세계적으로 인기가 높고 아직도 여전히 생산되고 있다. 프랑스 시트로엥의 2CV의 1948년에서 1988년까지 생산된 세계기록을 깰 날이 멀지않아 무척 기대가 된다.
재규어 (JAGUAR) E 타입1961년 재규어
E타입은 레이스를 위해 태어난 차다. 둥그렇고 긴 모양의 낮은 차체와 에어로 다이나믹한 디자인은 2인승 오픈카로써 모든 아름다운 균형미를 갖추었다. 앞쪽에는 라디에이터 그릴이 아닌 에어 인테이크가 있고 바퀴 위쪽은 부드러운 곡선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256마력의 힘을 내는 직렬 6기통 3.8ℓ 엔진을 얹어 시속 240km의 최고속도를 냈다. 이 차는 1975년까지 생산되었다.
로버(ROVER) 레인지로버 1970년 로버자동차
레인지로버는 자동차 역사에 SUV라는 새로운 장르를 연 차다. 1970년 레인지로버가 나왔을 때 영국의 언론은 "사파리차"라고 불렀는데 이는 오늘날의 SUV(Sport Utility Vihicles)에 해당하는 말이었다. 이전 4WD 모델의 단점이었던 너무 작고 느리며 딱딱한 느낌을 개선해 빠른 속도와 편안하고 넓은 공간으로 장거리 여행에도 불편이 없었다.
크라운(CROWN) 1955년 도요타 외제차를 들여와 조립생산하던 당시 일본의 다른 자동차 메이커와 달리 독자적인 차를 내놓던 도요다가 1955년에 발표한 고급 승용차다. 소형트럭 섀시로 승용차를 만들던 관행을 따르지 않고 모든 부품을 새로 개발했다. 오늘날 평론가들은 크라운이 발매된 해를 일본 자동차의 원년으로 삼고 있다. 미국식 스타일의 보디에 4기통 1천453cc 48마력 엔진을 얹고 앞뒤 모두 더블 위시본 서스펜션을 달았다. 열악한 도로사정에 내구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에 I 빔형 서스펜션이 달린 모델을 내놓기도 했지만 뒷날 내구성이 입증되어 모두 더블 위시본으로 바뀌었다. 택시회사와 상류층에게 인기를 끈 이 차는 신뢰성이 낮다는 일본차의 이미지를 바꾼 일등 공신이다. 이 차는 1962년까지 생산되었다.
스바루(SUBARU) 360 1958년 스바루 "하야부사" 전투기를 만드는 후지중공업이 일본 통산성이 내놓은 국민차 구상에 따라 개발한 경차, 스바루 360은 "사람의 차(people's car)"로 불리며 서민들의 발이 되어 주었다. 모노코크 보디에 공랭식 2스트로크 방식 2기통 356cc 16마력 엔진을 뒤쪽에 얹어 실내공간을 넓혔다. 앞쪽 트레일링 암, 뒤쪽 스윙 액슬 방식의 토션 빔 서스펜션은 소형차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안락한 승차감을 주었다. 이 차는 1969년까지 생산되었다.
닷선(DATSUN) 블루버드 310 1958년 닛산
"닷선(DatSun)"은 닛산이 처음 내놓은 차 이름으로 오랫동안 닛산 차를 이르는 대명사로 쓰였다. 블루버드 310은 영국 오스틴과 제휴한 닛산이 모든 최신기술을 발휘해 만든 차로 110에서 진화한 210에 뿌리를 두고 있다. 310은 생산을 시작하자마자 일본 소형차시장을 주름잡았다. 여성운전자를 위한 팬시딜럭스 버전을 내놓기도 했다. OHV 방식 1천189cc 55마력 엔진과 일본 대중 차로는 처음으로 낮은 기어단수에서 부드러운 변속을 돕는 싱크로나이저가 달린 변속기가 쓰였다. 프레임 위에 박스형 차체를 얹은 세미 모노코크 타입 섀시와 독특한 앞쪽 더블 위시본 서스펜션이 조종 안정성을 높여주었다. 이 차는 뒷날 "새나라"란 이름으로 우리나라에서 생산되기도 하였으며, 일본에서는 1971년까지 생산되었다.
닷선 페어레이디(FAIRLADY) 1500 1962년 닛산
미국시장을 겨냥해 만든 일본 최초의 스포츠카로 닷선 로드스터 1500으로 잘 알려졌다. 캔버스 톱이 달린 3인승 컨버터블의 슬림 보디는 블루버드 310에서 가져왔다. 4기통 1천448cc 80마력 엔진과 플로어 방식의 수동 4단 기어는 60년에 만들어진 고성능 세단 세드릭에 쓰인 것이다. 이 차는 1963년 후지 스피드웨이에서 열린 제1회 일본 그랑프리 GT클래스에서 세계적인 스포츠카들을 제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MG와 트라이엄프 같은 영국 스포츠카 분위기의 1세대 페어레이디는 해외에서도 큰 인기를 끌어 1969년까지 모두 6천906대가 생산되었다.
프린스 스카이라인(SKYLINE) GT 1964년 프린스
1965년 닛산에 합병된 프린스자동차가 64년에 열린 제2회 일본 그랑프리 우승을 노려 만든 차다. 57년 소형 패밀리카로 데뷔한 스카이라인 1500에 글로리아용 직렬 6기통 2.0ℓ 125마력 엔진을 달아 한순간이나마 엔진 과열된 포르쉐 904 GTS를 앞질러 껑충한 4도어 세단이 스포츠카를 추월했다는 일화를 만들기도 했다. 그 일이 있은 뒤 스카이라인은 고 성능차로 운명지워져 개량을 거듭하며 69년부터 72년까지 일본 모터 스포츠에서 50연승의 대기록을 세웠다. 이 차는 1965년까지 생산되었다.
코롤라(COROLLA) 1966년 도요타
66년은 도요타의 세계 진출 첫걸음을 가능케한 코롤라가 탄생한 해다. 이 차는 일본 대중차 시대를 활짝 열어 젖히며 미국,유럽등에 일본차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1,077cc 60마력으로 140km의 최고시속을 자랑하며 기본에 충실한 성능과 품질로 고객들의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 차는 요즘도 변경모델들이 도요타의 주력 모델로 생산되며 올해 일본차 베스트셀러를 예약한 상태. 지금까지 1,000만대 이상 판매되었다.
도요타 2000 GT 1967년 도요타
도요다가 심혈을 기울여 개발한 고성능 GT카다. 강성이 뛰어난 X백본 프레임에 네 바퀴 모두 더블 위시본 서스펜션을 썼다. 야마하에서 손본 직렬 6기통 1천988cc DOHC 150마력 엔진으로 최고속도 시속 220km를 내 일본에서 처음으로 시속 200km를 넘은 차로 기록되었다. 기어비가 촘촘한 크로스레이쇼 방식의 5단 기어와 LSD로 동력전달이 원활하고 진공배력 부스터의 4바퀴 디스크 브레이크로 제동성능도 우수하다. 일본차로는 유일하게 '007' 영화에 등장하기도 했다. 이 차는 1975년까지 생산되었다.
셀리카(CELICA) 1970년 도요타
미국에서 포드 머스탱이 크게 히트한 것을 보고 도요다가 만든 2도어 쿠페로 일본 스페셜리티카의 장을 열었다. "스포츠카처럼 멋지고 승용차처럼 쾌적한 차"라는 타이틀로 젊은이들의 다양한 취향에 맞춰 내?외장을 마음대로 고르게 했다. 4기통 1천588cc 115마력 엔진을 기본으로 모두 7개의 모델을 갖추었다. 맥퍼슨 스트럿 방식의 앞 서스펜션과 강성을 높여주는 레터럴 로드가 달린 4링크 뒷 서스펜션으로 안정적인 핸들링을 자랑했지만 고성능 GT에 못 미치는 동력성능으로 실망을 안겨주기도 했다. 이 차는 1978년까지 생산되었다.
시빅(CIVIC) 1972년 혼다
72년 등장과 동시에 3년 연속 일본의 "올해의 차"로 선정될 만큼 큰 인기를 누린,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소형차의 성공작이다. 시빅에 얹힌 CVCC 엔진은 독특한 부연소실 설계로 촉매정화장치 없이도 미국의 빅3가 손들어 버린 당시의 배기개스 기준을 통과한 저공해 엔진이다. 직렬 4기통 1천488cc 63마력 엔진과 앞뒤 맥퍼슨 스트럿 서스펜션은 월드카 시빅의 이미지를 "누구라도 다루기 쉬운 고성능 소형차"로 만들어 주었다. 베스트셀러 시빅은 그동안 개량을 거듭해 지난 95년에 데뷔한 6세대 모델도 세계인의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이 차는 1979년까지 생산되었다.
서베나 RX7 1978년 마쓰다
일본 유일의 로터리 엔진이 달린 스포츠카로 일본과 미국에서 크게 히트해 일본 스포츠카에 대한 나쁜 인식을 바꾼 차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팝업 헤드램프를 달았고, 앞뒤 5 : 5에 가까운 완벽한 무게배분도 자랑이다. 특히 연소특성상 오염물질을 많이 내뿜는 로터리 엔진으로 강화된 1978년 배기규제를 통과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모노코크 보디에 얹힌 573cc× 2 로터리 엔진은 최고출력 130마력을 낸다. 이 차는 1985년까지 생산되었다.
셀시오(CELSIOR) 1978년 도요타
미국시장을 겨냥해 개발한 도요다의 야심작으로 미국에서 렉서스 LS400으로 팔린 이 차는 큰 인기를 모으며 BMW 7시리즈와 벤츠 S클래스가 독주하던 세계 프레스티지카 시장을 뒤흔들었다. LS400은 뛰어난 품질과 성능, 파격적인 값으로 미국 소비자 만족도 1위에 오르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V8 3천968cc 260마력 엔진은 1UZ-FE형으로 연소효율이 높아 고출력, 저연비를 자랑한다. 보강재를 덧댄 모노코크 보디에 네 바퀴 모두 더블 위시본 방식의 서스펜션을 달아 유연한 승차감을 지녔다. 엔진과 트랜스미션을 종합제어하는 ETC-i 가 달려 에어백과 안전벨트 텐셔너 등의 수동적 안전장치는 물론 우수한 운동성과 제동 성으로 위험을 피할 수 있게 하는 능동안전까지 충실하게 배려했다. 이 차는 1997년까지 생산되었다.
미아타 1989년 마쓰다
보는 각도에 따라 표정이 변한다는 일본의 전통가면을 모티브로 영국 스포츠카 분위기가 물씬 풍겨나게 디자인했다. 89년 시카고 모터쇼에서 미아타 MX-5로 데뷔, 8년만에 42만 대가 팔리며 세계적인 경량 로드스터 붐을 일으킨 주인공이다. 직렬 4기통 1천597cc DOHC 116마력 엔진이 뒷바퀴를 굴리는 미아타는 날렵한 달리기 성능을 지녔다. 엔진과 트랜스미션, 디퍼런셜을 알루미늄 프레임에 연결하는 파워플랜트 프레임(PPF)은 프로펠러 샤프트가 백본 프레임처럼 작용해 차체강성을 높여준다. 유노스 디비전에서 판매를 전담하기 때문에 유노스 로드스터라고 불리는 미아타는 1.8ℓ DOHC 130마력 엔진도 있다. 이 차는 1993년까지 생산되었다.
혼다 NSX 1990년 혼다
처음으로 페라리와 포르쉐 등의 수퍼 스포츠카 시장에 도전한 일본차다. 1989년의 시카고 오토쇼에서 발표, 이듬해 가을부터 판매되어 미국에서는 웃돈을 붙여 거래되기도 했다. 도요다 MR2에 이은 본격적인 일본의 미드십 스포츠카였을 뿐 아니라 세계최초로 알루미늄 모노코크 보디를 써서 화제를 모았다. 매끈한 스타일링이 페라리를 닮아 NSX만의 카리스마가 없다는 비난도 있지만 손쉽게 몰수 있는 스포츠카로 높은 인기를 끌었다. 엔진 경량화를 위해 터보 대신 가변식 밸브 시스템인 VTEC 엔진을 달았다. V6 2천977cc DOHC 273마력 엔진과 앞뒤 더블 위시본 서스펜션을 지닌, F1 레이스에서 입증된 혼다 기술의 결정체 NSX의 최고속도는 270km다.
프리우스(PRIUS) 1997년 도요타 도요타가 97년 도쿄 모터쇼에 내놓은 세계최초의 양산 하이브리드카다. 프리우스는 앞뒤 오버행을 줄인 독특한 디자인으로 소형차 카롤라보다 작은 체구지만 실내공간은 중형차 캠리 못지 않게 넓다. 하이브리드 구동계는 고연비의 4기통 1천500cc 58마력 밀러 싸이클 엔진과 최신의 니켈-메탈수소 배터리로 작동되는 전기모터로 구성되었다. 상황에 따라 모터나 엔진을 번갈아 쓰며 달려 휘발유 1ℓ로 28km를 달릴 수 있다. 환경을 생각하는 차 프리우스는 21세기식 운전재미를 미리 맛보게 해준다
첫댓글 풍운아님~~ *^^ 문화방에 이미지 맞아서 옮겨습니다 우리나라 자동치에 역사를 한눈에 알게 해주시네요 감사드립니다
자동차 만드는 회사에 다니다 보니 관심 있어서 글을 올렸어요~~ 내가 써놓구 글이 안보여서 방마다 다 노크했더니 이방에 숨어 있네요~ ㅎㅎㅎ 앞으론 방명에 맞게끔 흔적 남기께여...ㅈㅅㅎㅇ 그래두 실수 있더라두 운영자님들 계속 수고좀 해주세여~`